I 먼저 언약신학과 조직신학의 관계성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조직신학에 대한 교육을 배웠는데 언약신학적 관점에서 한 번 풀어서 이해하는 배움의 시간은 갖지 못했을 것이다. 언약신학을 조직신학으로 푸는 것은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조직신학적 접근법을 지양하고, 관계중심적인 조직신학을 배우고자 한다. 어차피 목회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관계,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목회의 핵심인데, 이 관계를 이해하고자 한다. 목회와 영성에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성경은 구원에 대한 책이다. 구원에 대한 계시가 담긴 책이다. 조직신학이란 성경적 세계관이다. 성경에는 세계관에 들어 있다. 조직신학을 배운다는 것은 성경적 세계관을 배운다는 것이다. 세계관이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다. 신에 대해서, 인간, 자연, 죽음, 인생, 사후세계에 대해서 바라보는 눈이다. 그래서 조직신학은 성경적 세계관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래서 조직신학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조직신학을 한다는 것은 성경적 세계관을 배운다는 것이고, 조직신학으로 설교한다는 것은 성경적 세계관을 성도들에게 가르친다는 것이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성경은 구원에 관한 책이다. 성경의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론이다. 조직신학도 구원론이 중심이다. 설교에서도 구원론이 많이 선포된다.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성경 기록의 목적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다. 특수 목적은 구원을 얻고 생명을 얻는 것이다. 광의적 목적은 성경적 세계관을 가르치는 것이다. 구원은 예수 믿고 천국에 가는 것을 넘어서 세계관의 전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구원이란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수용하는 것이다. 인간이 무엇인가? 신은 누구인가? 죽음은 무엇인가? 세상은 무엇인가? 이 모든 것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져다 주는 것이 곧 구원이다. 거듭남이라는 특수한 의미를 넘어서 세계관의 전향이 곧 구원이다. 신학이 다르면 세계관이 달라진다. 세계관이 달라지면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진다. 세계관이 달라지기에 신앙의 칼라, 경건의 유형, 삶의 방식이 달라진다. 인간론, 죄론, 구원론, 성화론이 조금씩 다른 빛깔을 낼 수 밖에 없게 된다. 조직 신학에 따라서 모든 것이 달라진다. 싫든 좋든 누구나 조직신학을 가르칠 수 밖에 없다. 나는 강단에서 조직신학 가르친 적 없다고 말해도 듣는 사람은 설교를 듣고, 성경을 듣고, 어떤 유형의 세계관을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듣는 사람이 나의 설교를 통해서 특정한 세계관을 수용한다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믿음은 무엇인가? 나로 하여금 믿고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영접하고, 거듭나서 새 삶이 되게 하는 것이다. 영생을 얻고 그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이 구원이고, 이 구원의 선물은 믿음으로 받는다. 특수한 의미에서 그렇다. 그러나 믿음은 그 이상이다. 믿음은 단순한 구원이나 체험 그 이상이다. 거듭남과 체험을 넘어서 새로운 세상, 새로운 가치, 새로운 안목으로 인생을 바라보도록 해 주는 것이다. 이것이 믿는다는 말속에 포함된 포괄적 의미이다. 신에 대해서 무엇을 믿는가? 인간에 대해서, 자연에 대해서, 역사에 대해서, 종말에 대해서, 죽음에 대해서 무엇을 믿는가? 이 모든 것을 포함한 것이 믿음이다. 체험을 포함하여 성경적 기독교적 세계관이 곧 믿음이다. 믿음이라고 다 같은 믿음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껏 개혁주의 소프트 웨어를 신학교에서 배우고, 강단에서 써 먹지 못한다. 조직신학이 너무 어렵고, 너무 비싸다. 성도와 거리가 멀다. 그래서 이를 풀어 먹지를 못한다. 이론은 개혁주의로 배우고, 실제는 다른 신학이다. 일관성이 없다. 모든 조직신학은 상반되면 안 된다. 모든 신학 안에 일관성이 있어야 신학이다. 이러한 일관성이 없으면 세계관이 될 수 없다. 어떠한 ‘안목’, 어떠한 ‘관’을 가진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신론과 인간론이 상반되면 안 된다. 인간론과 구원론, 구원론과 기독론, 기독론과 성령론, 성령론과 종말론, 종말론과 교회론이 상반되면 안 된다. 자꾸 조각난 이론이 되기에 꿰어지지 않고 나눠진다. 처음에는 이러한 관계 중심의 내 설교를 듣고 성도들이 헷갈린다. 이전의 설교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 설교를 3년 5년, 10년을 듣고 나면 일관성을 느껴야 한다. 관계 중심의 일관된 신학 사상과 세계관이 반복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자꾸 나부터 일관성이 없어지고 헷갈린다면, 이는 내가 조각난 조직신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일관된 조직신학이 없기 없으니 나도 헷갈린다. 성도들은 더 헷갈린다. 그러므로 일관성을 갖도록 노력하라. 조각난 조직신학으로 조각난 설교를 하기에 성도들의 가치관이 조각난다. 그래서 언약신학적 특징이 많다. 언약신학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신학이다. 언약신학이 개혁주의 조직신학의 하부구조를 만들어 받쳐주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셨다. 창조는 관계의 출발이다. 이 관계를 깨트리고 하나님을 떠난 것이 죄이다. 그래서 죄는 관계의 상실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속죄는 관계의 회복이다. 성화는 관계의 성장이다. 영광과 종말은 관계의 완성이다. 성경에는 관계에 대해서 많은 모티프를 가지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3가지 관계 모티프이다. 부자관계, 부부관계, 왕과 백성의 관계이다. 신학에는 해석학적 무게(중심)이라는 것이 있다. 신학이라면 어떤 신학이든지간에 이 해석학적 무게( hermeneutical gravity ) 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신학을 이해하려면 이 해석학적 무게를 빨리 알아내야 한다. 소설을 읽어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세세한 부분까지 다 알아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 중심 무게는 알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개혁주의 신학의 해석학적 무게는 바로 ‘관계’라는 것이다. 창조와 새 창조의 구도가 바로 관계성에서 전개되고 있다. 그래서 언약신학의 출발이 바로 관계이다.
언약신학 = 임마누엘 신학 = 장막신학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말씀이 언약의 공식이다. 그런데 이 언약 공식의 성취가 비로소 여기서 다 이뤄진 것이다. 언약의 하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장막을 치시매” 라고 하듯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셨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는 장막의 완성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자기 비하로 이뤄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저 위에 그냥 계신 상태로는 우리와 함께 거하실 수가 없다. 하나님이 저 위에 그냥 계신 상태로는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다. 하나님께서 자기 비하를 통해서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고, 약정을 맺으시고, 우리와 결속하신다. 우리와 영원히 함께 거하기를 바라신다. 그러기에 이 언약적 관계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파트너십을 맺고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이 관계 속으로 들어가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주권을 갖고 계신다. 또 우리는 하나님께 조건없는 순종을 드려야 하는 책임이 있다. 일방성이 전제된 쌍방의 관계가 언약의 관계이다.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일방성이 전제되어 있고, 동시에 쌍방향적인 조건없는 순종을 드리는 것이 바로 언약이다. 이것은 절대로 도덕이 아니다. 언약주의적 신학에서는 순종이 결코 도덕적 관점이 아니다. 언약적 관점에서 보면 순종은 로드십이지, 절대로 도덕이 아니다. 주님의 주권에 대한 자의적인 순종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적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하나님께서 자기 스스로를 비하시켜서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와 거하시고, 함께 일하시기 원하시고, 우리에게 기회 주시기를 원하시고, 그 은혜와 영광에 동참시켜 주시길 원하신다. 이런 은혜와 사랑, 축복에 대한 반응으로 이뤄지는 것이 우리의 순종이다. 다시 말해서 로드십에 대한 순종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언약신학은 관계신학이요, 임마누엘 신학이요, 낮춤의 신학이요, 장막 신학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시오, 우리는 그의 백성이라는 장막신학의 주제가 언약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언약의 3요소가 여기서 등장한다. 1)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집행하셨다. 주권적이란 말은 은혜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자발적으로 내려오셨다. 자신을 낮추시고 우리에게 다가 오셨다. 그렇게 하여서 우리와 관계를 맺어 주셨다. 2) 피로 맺은 약정이다. 하나님께서 피를 통해서 우리를 속죄하신다. 피라는 것은 무엇인가? 피는 회복을 의미한다. 피는 돌려놓는 역할을 한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기하고 하나님을 떠나가게 했다. 이 떠나감, 관계의 파괴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 죽음은 곧 피를 흘리는 것이다. 피흘림을 통해서 언약의 파괴에 대한 댓가를 치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죽음이란 것도 언약적 죽음이다. 인간의 죽음은 언약 속에서 죽는 것이다. 아담이 언약을 파기한 대가로 죽음이 온 것이다. 이 관계 파괴와 죽음을 돌려 놓는 것이 구원이다. 여기에는 반드시 피가 필요하다. 그래서 피로 맺은 언약이 필요하게 된다. 피는 피인데 짐승의 피로는 안된다. 왜냐 하면 인격대 인격이기 때문이다. 짐승의 피는 불완전하다. 짐승의 피를 아무리 많이 갖다 놓아도 부족하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이다. 3) 약정이다. 약정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결속시키는 것이다. 약속이기에 서로가 떨어질 수가 없다. 하나님과 인간이 언약에 서로 매이게 된다. 하나님이 스스로 매이신다. 우리도 이 언약에 매여야 한다. 그러므로 이상에서 살펴 본 3가지 요소를 포함해야 언약이다. 다시 설명하면 언약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있어야 한다. 언약은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은혜로 주신 것이다. 이 은혜가 빠지면 신학은 완전히 달라진다. 동시에 피가 필요하다. 피가 없으면 언약이 될 수 없다. 언약은 회복시키는 것이다. 파괴된 것을 회복하고 죽음을 회복시켜야 한다. 피를 통해서 가능하다. 하나의 인격적 관계를 다른 인격적 관계로 대치시키고, 회복시키는 것이기에 피가 아니고는 회복될 수가 없다. 이 언약은 단순한 언약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문제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에 짐승을 쪼개어서 피를 흘리게 하시고, 그 피흘리고 쪼갠 고기 사이로 하나님의 영광이 지나간다.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것을 강력히 선언한다. 그래서 구약에서 하나님이 “언약을 세운다”고 할 때에 언약을 세우고, 제정하고, 맺으신다는 동사는 히브리어로 ‘카라트’ 이다. 언약은 베리트이다. 그런데 카라트는 쪼갠다는 뜻이다. 언약을 세우는데 쪼갠다는 뜻의 동사를 사용한다. 쪼개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피를 의미한다. 피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피는 회복을 의미한다. 도덕에는 피가 필요 없다. 그러므로 구원은 결코 도덕이 될 수 없다. 피로써 대속의 구원을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약정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약속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스스로 우리를 위해서 묶으신다. 자신이 언약을 하시고 그 약속에 매이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 능력과 신실하심을 가지시고, 약속 안에 들어오신다. 하나님은 자신이 맺으신 언약에서 자신이 벗어나실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 언약안에서 구약과 신약이 하나로 묶어진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보듯이 구약과 신약은 하나의 통일된 하나님의 언약 속에서 묶여진다. 구약과 신약은 서로 다른 이중적 메시지가 아니다. 같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의 언약 속에서, 구약의 성도와 신약의 성도가 만난다. 이 둘이 한 믿음 안에서 모두 하나님과 결속된 하나님의 백성들이요, 그리스도의 신부들이요, 하나님의 종들이다. 그런 점에서 히 11장이 언약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약정의 징표로 주신 것이 바로 성례이다. 구약에서는 유월절이고, 신약에서는 세례와 성찬이다. 우리가 혼인 언약을 할 때에 그 징표로써 반지를 주고 받는다. 언약식에는 서로에게 무엇인가를 주고 받는 식이 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짐승을 쪼개어서 피를 흘리게 하시고, 그 사이로 지나가신다. 하나님이 그러실 필요가 전혀 없으신대도 그렇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짐승을 피흘려 쪼갠 후에 굳이 그 사이로 지나가신다. 또한 유월절 어린 양을 쪼개어서 그 피를 바르게 하신다. 그 피를 보고 지나가게 하신다. 하나님은 그 약정에 대해서 이런 심각성을 보여 주심으로 우리가 쉬운 언어로 알아듣게 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이다. 성례가 이런 것이다. 성례 자체에 신비로운 파워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피를 통해서 약정으로 맺어주셨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어떤 특정 신학의 교리들은 이미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식과 진술 방법에 대한 문제들을 어떤 식으로든지 이미 결정된 것으로 전제하고 배우는 것이다. 감리교 신학에서 신학을 배운다면 이미 이들 신학은 감리교 신학이 가지고 있는 계시론을 전제하고 배우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 안에 들어가며 그 속에서 신론, 기독론, 구원론을 배울 수 밖에 없다. 어떤 신학적 서론과 전제를 가지고 신학을 하느냐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배우게 된다. 이 ‘언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하나님의 주권성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은혜를 주시는 일방성이 들어 있다. 반면 ‘계약’이란 용어는 쌍방성이 강한 용어이다. 하나님과 우리가 50대 50 으로 계약을 맺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하나님이 우리와 똑같은 조건에서 계약을 맺으실 수가 있는가? 이것은 너무한 것이다. 계약은 contract 이다. 이 표현은 조금 안 맞는다. 언약이란 표현은 covenant 이다. co 는 ‘같이’ 라는 의미이고, venant 는 ‘간다’ 라는 의미이다. 즉 언약이란 ‘함께 간다, 같이 간다’ 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말씀하심으로써 언약을 주시고 그 언약을 따라서 자기 백성과 함께 가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임하셔서, 자기 계시를 주시되 말씀을 통해서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어적인 자기계시가 언약이란 단어 속에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조직신학의 서론적 관점에서 볼 때 언약이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팔머 로버트슨은 이런 말을 한다. “성경에서 모든 하나님의 언약이 성립되는 근본 구성요소는 세워진 약정의 성격이 구두 선언이라는 점이다” 모든 하나님의 언약이 성립되는 근본 구성요소는 약정의 성격이 구두 선언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명제이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우리에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 신학의 대 기본 전제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런데 자유주의 신학이나 현대신학은 그렇지 않다. 이들이 개혁주의 신학을 공격하는 가장 주된 대상은 계시론이다. 자유주의자들이나 현대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언어로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이들은 계시의 과정과 계시의 진술 과정에 인간이 개입했다고 말한다. 인간이 개입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뜻과 상관없이 주관적으로 자기의 뜻을 개입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계시가 변질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이나 현대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언어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하나님이 초월적인 하나님이시고, 주권적인 하나님이시라면 계시도 초월적으로 와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인간의 주관적인 생각이나 의지가 전혀 투입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질 것이라고 전제한다. 이런 전제를 놓고 신학을 출발하기에 결과적으로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실존주의 신학, 도덕신학, 신비주의 신학이 나오게 된다.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것인가, 계시를 어떻게 수납하고,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진술할 것인가가 안되니까 실존주의, 도덕신학, 신비주의 영성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말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실존을 추구하거나 신비를 추구하거나 도덕적 신앙을 추구하게 되는 이유는 계시론에서부터 문제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분명히 우리가 알 수 있는 언어로 주어졌다. 이 사실은 신학의 대 전제이다. 가장 중요한 기본이다. 물론 성경에 기록된 것 외에도 우리가 모르는 것이 많다. 하나님은 말씀 안에만 갇혀 있는 분은 아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초월적인 하나님이시기에 말씀 외에도 더 많은 부분이 있다. 이를 인정하여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타내 주신 부분 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다. 개혁주의 신학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데에는 성경의 계시로 충분하다. 부족함이 없다. 왜 그러한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어떻게 부족할 수 있는가? 하나님에 대한 전체적인 계시나 포괄적인 계시는 아니지만 충분한 계시인 것은 분명하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기로 작정한 것에는 부족함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개혁주의 신학이다. 개혁주의 계시론의 출발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전제이다. 개혁주의를 현대신학이나 자유주의 신학과 가장 분명히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 계시론이다. 구원론이나 다른 파트에 가서 논쟁을 벌이려고 하면 복잡해진다. 전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해야 쉬워진다. 우리가 누구와 신학 논쟁을 하고자 한다면 서론으로 데리고 가보라. 상대방의 계시의 수납 방법과 계시의 진술 방법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라. 그렇게 해야 신학의 차이점이 분명해진다. 그렇지 않고 성령론이나 기타 다른 것으로 논쟁을 벌이려고 하면 문제가 된다. 신론을 살펴보자.
신론을 개혁주의 입장에서 이해하고자 할 때 관계적 입장에서 풀지 않으면 지나치게 초월적이거나 지나치게 내재적이 되고 만다. 지나치게 파워중심으로 나가든지, 아니면 지나치게 도덕중심으로 나가게 된다. 우리의 영성이 왜곡된다. 파워 영성은 초월적인 것을 너무 추구하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이나 순종의 과정이 약해진다. 그냥 파워를 받아서 점프해 버린다. 이것은 아주 조심해야 한다. 물론 능력을 받고 파워를 얻는 것도 필요하지만 능력을 받는 것에만 중심을 두면 순종의 과정, 성화의 과정, 로드십을 닮아가는 과정을 무시한다. 자꾸 자연적 질서를 뛰어 넘고자만 한다. 그러다 보면 인격적 관계가 약화될 수 밖에 없다. 우리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에 가장 충실한 신학이다. 그렇기에 이 개혁주의 신학이 연구하기가 가장 어렵다. 신학은 신론에서 판가름나는데 초월주의적 하나님만 보는 것이 아니고, 내재적인 하나님만 보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두 가지 성품을 다 갖고 계시는 분이시고, 성경에서는 이 두 가지 모습을 다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는 두 성품을 다 이해하고 설명해야 한다. 초월적이고 무한하신 하나님은 동시에 우리에게 내려 오셔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가장 쉬운 언어로 자신을 알리시고 우리와 인격적 관계를 맺기 원하신다. 부자 메타포어, 부부 메타포어, 왕과 백성의 메타포어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와 그런 관계를 맺기 원하심을 보여주셨다. 위 세 가지 메타포어 중에서 혼인 메타포어가 가장 중요하다. 왜냐 하면 이 부부 메타포어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이 관계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이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설명해 줄 수 있는 관계는 도덕도, 파워도 아니다. 남편이 도덕적으로 의무적으로만 아내와 관계를 맺는다면 얼마나 딱딱한가? 예를 들어서 10가지 남편의 수칙을 정했다고 하자. 그리고 그것만 다 지킨다면 나는 아내에게 내 의무를 다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다. 부부관계는 행위적인 것 그 이상의 것이다. 도덕적인 것, 그 이상의 관계이다. 그렇다고 파워로써 맺어질 수도 없는 것이다. 부부의 행복이나 사랑은 명예나 돈과 같은 그 파워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을 가졌다고 해서 이것으로 상대방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 물론 부자간의 관계에서도 이 사실이 드러나지만 부부관계에서 가장 잘 드러내 준다. 그래서 혼인 메타포어가 언약적으로 가장 적합한 설명을 해 준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관계는 도덕적 관계도, 파워의 관계도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은 남편이시고 우리는 아내이며, 그리스도는 신랑이시고 우리는 신부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이 언약적 관계를 가장 귀하게 여기시고 계신다. 양극에 속하는 도덕주의와 초월주의는 서로 통하는 것이다. 언약이라는 것은 관계이다. 이 관계는 도덕으로도 충족시킬 수 없고, 파워로도 충족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도덕과 초월은 양극이지만 서로 통한다. 도덕과 신비도 양극이지만 서로 통한다. 얼른 겉으로 보면 안 통할 것 같은데 사실은 서로 깊이 통한다.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공통점이 있는가? 인격적 관계를 무시하는 부분에서 통한다. 더 깊이 보면 이기주의에서 서로 통한다. 둘 다 자기 중심적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맺기 원하시는 관계는 자기 중심적인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자기 중심으로 모든 것을 하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도덕이나 파워는 언약적 관계의 변질된 모습이다. 도덕으로 관계를 맺기 원하고, 파워로 관계 맺기를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본래 맺기를 원하는 것의 변태이다. 실제로는 이 둘 다 모두 자기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도덕이라는 것은 자기가 무엇인가를 행함으로써 그 행위와 도덕으로써 인정을 받고자 하는 것이다. 반면에 파워는 자기가 무슨 능력을 받아서 그 능력을 행사함으로써 인정을 받고자 하는 것이다. 하나는 도덕적이고, 다른 하나는 신비적인 것이지만 알고 보면 자기 중심이라는 뿌리가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관계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죄라는 것은 진리를 변질시키는 것이다. 진리의 변태적인 모습이 죄이다. 완전히 다른 새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의 본성 속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는 마음이 인간에게 있다. 이것이 죄로 인해서 변태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도덕이고, 파워이다. 도덕적으로 선행을 행해서 나의 의를 증명해 보고 싶어한다. 내가 능력을 받아서 그 파워로 나의 의를 증명해 보고 싶어한다. 둘 다 마찬가지이다. 파워영성과 도덕 영성은 뿌리가 같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는 변태적인 모습이다. 언약적 영성의 변태적인 모습이다. 이것이 신론에서 출발한다. 모든 신학은 계시론에서 일차 갈라진다. 두 번째로 갈라지는 것이 신론이다. 계시를 어떻게 받고, 진술할 것인가에서 나뉘어진다. 또한 신에 대한 정의에서 우리와 신의 관계가 결정된다. 신과 나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따라서 모든 것이 달라진다. 신과의 관계를 맺으려면 신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계시를 통해서 신에 대해서 알았는데 이 신이 초월적 신이냐, 인격적 신이냐를 결정하고, 그 결정에 따라서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인간이 참 복잡한 존재이다. 도덕적 선행으로 신과 관계를 맺을 것인가, 아니면 파워적 능력을 통해서 신과 관계를 맺을 것인가? 신을 기쁘게 하는 길이 과연 무엇인가를 놓고 고민한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신이 파워 중심이냐 아니면 도덕 중심이냐를 놓고 자신이 먼저 결정해 버린다. 그리고 나서 그런 결정에 따라서 관계를 형성해 버린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정의는 3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1) 하나님은 세 인격체로 존재하신다(God is three persons). 2) 각 인격은 온전한 하나님이시다(Each person is three God). 3)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There is one God). 이상이 삼위일체의 정의이다. 성경적으로 삼위일체를 설명해 보면 두 가지 접근 방법이 가능하다. 하나는 인식론적 접근방법이다. 아버지를 알기 위해서는 아들을 알아야 하고, 아들을 알기 위해서는 성령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인식론적 삼위일체론이다. 아들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는 말씀을 통해서 아들을 알게 된다. 성경이 말하는 삼위일체 인식의 접근방법이다. 성경에서는 삼위일체를 증명하라고 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삼위일체를 설명해 줄 뿐이다. 어느 한 분이 없이는 다른 분을 알 수 없다. 아들을 보면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된다. 말씀을 통해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된다. 여기서 중심은 아들이다. 아들을 보고 아버지를 안다. 아들을 보여주는 자가 성령이시다. 기독론적 삼위일체를 말씀하고 있다. 이상을 볼 때 성경은 삼위일체를 모두 기독론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인식론적으로 보아도 그렇고, 구원론적으로 보아도 그렇다. 성경은 삼위일체를 철학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 성경에서의 삼위일체는 기독론적 삼위일체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그 아들은 누구이신가? 그 아들은 사람의 모양을 입고서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자기를 비우시고 이 땅에 오셨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시다. 바로 언약적 하나님이시다. 그 아들은 스스로 자기를 낮추시고 종의 형체로 낮추셔서 우리에게 오셔서 장막을 치시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시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일체 하나님은 이처럼 임마누엘 하나님으로서 아들 중심으로 이뤄져 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성경적으로 하고자 할 때 언약적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삼위일체이다. 성경이 접근하는 방식대로 접근하는 것이 제일 좋다. 성경이 증명하지 않는 것을 우리가 증명하려고 하면 그것은 어리식은 시도가 된다. 반면 성경이 증명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증명하려 하지 않으면 이것도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는 항상 성경이 가는 곳까지 가고, 성경이 머무는 데서 머물러야 한다. 앞에서도 언급한 대로 언약신학은 말씀 신학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방법은 사건도 아니고, 도덕도 아니고, 실존도 아니고, 신비도 아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곳까지만 가야 한다. 성경이 삼위일체에 대해서 기독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기독론의 핵심은 임마누엘이시다. 우리에게 오셔서 장막을 치시고,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 되시며,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된다는 언약의 실행이다. 이 언약적 관점이 삼위일체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신론의 중심이 이 언약사상이 중심에 있는 기독론적 삼위일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론은 결코 사변적으로나 철학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 언약적 관점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서 이해해 나가야 한다. 이런 부분들을 생각할 때 조직신학은 언약적 관점이 구원론적으로 볼 때 우리에게 얼마나 밀접한 관련이 있는가를 알게 된다. 구원론이 신학의 중심이다. 모든 것은 구원론적 관점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항상 모든 신학은 구원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구원론이 신학의 중심부이다. 구원을 위한 것이 되려면 모든 신학 분야에서 언약적 관점을 견지해야만 한다. 언약 중심으로 구원론을 이해하고, 언약 중심으로 신론을 이해하고, 언약 중심으로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한다. 모든 신학의 중심은 언약 중심으로 이해를 해야 한다. 오늘은 칼빈과 루터에 대한 말을 하고자 한다. 칼빈과 루터는 언약에 대한 반응이 달랐다. 언약에 대한 반응이 첨예한 대립 양상을 보이고 있다. 언약에 대해서 루터와 칼빈의 반응은 아주 다르다. 이것이 루터신학과 칼빈신학, 개혁신학과 사이를 갈랐다. 두 사람의 언약 반응이 다르다. 루터는 배경이 중세의 카톨릭신학이었다. 루터는 중세 신학을 배경으로 종교개혁을 시작했다. 이를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중세 신학은 한 마디로 성례신학이다. 모든 것이 교호에서 집행하는 성례에 집중되어 있다. 성례에 엄청난 프리미엄을 준다. 성례에 대한 집착이 강력한 교권주의로 나타난다. 강력한 사제주의가 발생한다. 사제들의 권한은 절대 권한이다. 루터의 실수는 이것이다. 세상이 중세의 교권주의의 지배하에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루터는 언약의 참 의미를 아는 데에 실패했다. 이런 입장이 루터의 입장이다. 칼빈은 어떠한가? 칼빈은 언약을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책임으로 푼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게 푼다면 루터의 말이 맞을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인격성에 초점을 두고 풀었다. 하나님은 초월적인 분이시고 내재적인 분이시다.무한하시고 자유로우시며 타자성을 가진 분이다. 인간과 다른 분이시다. 주권적이시다. 그러나 그가 우리에게 오셔서 장막을 치신다. 장막신학이 언약신학이다. 계시록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장막을 치시는 것이 나온다. 계시록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신다는 것이다. 계 21:3-5 “(계21:3)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계21:4)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21:5)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에덴에서부터 하나님은 장막을 치시고 함께 하신다. 광야에서 장막을 치시고 우리와 함게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장막을 치시고 우리와 함게 하신다. 이것이 완성되는 것이 구원이다. 이것이 장막신학이고 언약신학이다. 언약 메타포어에 보면 안전 개념이 중심이다. 혼인 언약을 보라. 남녀가 부부가 되어서 가정을 이루는 것은 의무나 책임의 개념이 아니다. 안전과 보호를 위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데 이를 루터는 책임과 의무로만 본다. 결혼을 율법적으로만 보는 사람이 있는가? 이러면 불행해진다. 이혼하는 사람이 있는가? 그가 율법적 관점에서 보고, 언약적 관점에서 보지 봇한다. 결혼을 의무로 본다면 얼마 못 간다. 왕과 신하도 그렇다. 왕은 백성을 보호한다. 그리고 백성은 왕에게 충성한다. 칼빈은 루터와 달리 좀더 객관성을 가진다. 칼빈은 생각해 보면서 개혁은 좋은데 언약 개념조차 버릴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안다. 중세 교회가 언약 개념을 성례로 바꾸면서 펠라기우스적으로 이해한 것이 문제이다. 언약은 의무가 아니라 안전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장막을 치시고 관계 맺기를 원하신다. 성례는 율법주의도, 도덕주의도 아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한 방편이다. 그래서 그는 성례신학을 지양하기 위해서 말씀을 강조한다. 말씀을 성례보다 더 앞세우므로써 언약신학을 세우고자 한다. 교회의 표지 - 말씀과 성례와 권징이다. - 말씀이 성례보다 앞선다. 중세는 아니다. 성례가 말씀을 앞선다. 칼빈은 순서를 바꾼다. 성례 신학을 말씀 신학으로 바꾼다. 성례는 믿음의 동인이 아니다. 믿음의 결과로 나타나는 표시이다. 믿음은 말씀을 들음으로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은 성례보다 앞서야 한다. 칼빈에 의해서 말씀 신학이 성례 신학을 앞서게 된다. 주권과 약정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하나님의 내재성이 같이 간다. 동반된다. 이것이 진정한 구원이다. 칼빈은 시계추를 중앙으로 가져온다. 루터는 극단적으로 자유로 몰고 간다. 칼빈은 언약을 통해서 균형을 잡는다. 하나님은 언약을 맺으시고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 성례는 결코 말씀보다 위에 설 수 없다. 중세는 약정을 너무 강조한다. 그래서 약정을 오용해서 성례를 집행하는 행위 자체에 자동적인 효력이 있다고 만들었기에 문제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타자성을 주장했기에 칼 바르트의 눈에는 그가 다르게 보인다. 현대 신학자들이 그렇게 보수주의 신학을 매도한다. 우리와 천주교가 다를 것이 별반 없다고 한다. 인간이 별로 안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보장되어 있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 그러나 사실은 아니다. 칼빈이 말한 것을 보아야 한다. 언약은 성경적 계시이기에 이것을 구현해야 한다. 신자가 제자인가? 아닌가? 과연 성도는 제자인가? 아닌가? 루터신학에 의하면 신자는 필수적으로 제자가 될 필요는 없다. 신자일 수 있고 제자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제자도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에게 해당한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칼빈주의 신학의 번성을 증명한 책이 막스 베버의 책이다. -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정신], 유명한 역사학자, 사회학자이다. 내가 자본주의 예찬론자가 아니고, 책 선전자도 아니다. 칼빈주의가 총체적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회복이다. 언약의 진정한 회복이다. 기독교 세계관이 형성된다.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에덴에서 아담에게 처음으로 언약 관계를 맺으신다. 그리고 창조의 모든 지시와 축복으로 주신 모드 책임들을 진정한 의미에서 다 회복한다는 것이다. 사회, 정치, 문화, 경제, 윤리, 모든 면에서 로드십을 회복하는 것이다. (광고) - 참 기가 막힌 강의이다. 두 번 째 듣는데 참 좋다. 성경신학적 입장에서 관계성 문제를 가르치는데 이 강의를 통해서 많은 보완점을 가진다. 우리 학교는 성경, 조직, 실천 신학에서 모든 통일성을 가진다. 이론은 개혁주의이고, 실천은 오순절로 가지 않는다. 우리 학교가 교수들끼리 이런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늘 대화를 많이 나눈다. 전가된 의, 이는 개혁신학의 핵심이다. 언약 신학은 영어로 무엇인가? Federal Theology 이다. 칼빈의 대표정치에서 스코틀랜드로 넘어간다. 오늘날 미국의 대표정치에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장로교 민주주의와 대표 정치가 같다. 머리가 잘못하면 바꾼다. 정부에서는 머리가 잘못하면 선거를 통해서 끌어내린다. 일반 교회에서는 한 번 머리가 되면 내려오지 못한다. 미국에서는 장로들이 3년 만에 한 번씩 신임을 묻는다. 50% 이상 찬성을 얻어야 한다. 그리고 6년이 되면 무조건 1년을 쉬어야 한다. 다시 돌아와서 세울 때는 3분의 2 이상 찬성을 얻어야 한다. 작년에 3분의 원로 장로들이 모두 신임을 묻고 통과했다. 나를 목회자로 청빙하기 직전에 이 신임 제도를 통과시킨 후에 나를 청빙했다. 나로 하여금 목회를 잘 하도록 도움을 준 것이다. 3년 지나 신임 투표에서 떨어지면 일정 기간이 지나서 다시 묻는다. 떨어질 것 같으면 아예 미리 은퇴를 해 버린다. 투표 자체를 거부하고 불명예를 받지 않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책임 제도이다. 이와 같은 장로교 모델이 민주주의 정치 모델이 된 것이다. 구약을 보라.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로 부름을 받았다. 이스라엘 주변국의 흥망성쇠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향한 자세에 의해서 달라진다. 이스라엘은 작은 약소국에 불과하다. 주변국은 강대국이다. 애굽, 앗수르, 바벨론... 이들이 잘하고 못하고 이전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했느냐에 따라서 그들의 흥망성쇠가 결정된다. 왜?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로 부름 받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잘하면 주변도 복이다. 아니면 반대이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은 새 언약의 백성이다. 그런데 특별히 성경은 전도와 선교를 말하면서 제사장적 소명으로 말한다. 이방민족을 하나님 앞에 데리고 나오는 제사장으로서 소명을 전도라고 한다. 이 세상 모든 민족들과 우리는 연대를 갖는다. 운명을 같이 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전도와 선교를 하라. 제사장은 이방인을 제물로 삼아서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이다. (롬15:16)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봉사의 문제도 그렇다. 목회적 의미를 갖는다. 봉사나 섬김도 마찬가지이다. 도덕적 율법적 의무적 차원에서 섬기라, 복을 받기 위해서 봉사하라고 하면 복음적이 아니다. 희생을 해도 복음적으로 요구하고, 전도도 복음적으로 하라고 요구하라. 구원을 복음적으로 가르치고, 봉사는 율법적으로 하라고 하면 일관성이 없다. 구원은 복음으로 받고, 생활은 율법적으로 하고, 구원은 복음으로 받고, 사는 것은 도덕으로 살면 안된다. 성도들이 헷갈린다. 우리 목사님들이 일관성 있는 설교, 일관성 있는 목회를 해야 한다. 막 10:42-44 “(막10:42)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막10:43)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막10:44)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막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우리가 종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 섬김의 신학적 근본, 명분이 무엇인가? 예수님이 설명하신다. 섬김의 원리이다. 자신이 제사장적 소명을 받아서 섬김의 사시고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처럼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는 것이다. 자신이 제사장으로서 목숨을 드리고 섬김에 의해서 다른 사람을 살렸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우리가 봉사하고 섬기고 전도하는 것이 의무나 복받는 수단이나 도덕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봉사나 전도를 두 가지 주제로 맞춘다. 경건하게 사는 삶과 기복의 삶에 맞춘다. 우리가 경건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섬기고 전도하고 봉사해야 하지 않는가? 우리가 복 받기 위해서 섬기고 봉사해야 하지 않는가? 예수님은 봉사와 전도와 섬김을 경건이나 복 받는 것과는 별개로 설명한다. 바울도 전도의 명분을 그렇게 설명하지 않는다. 우리의 신분에 명분을 둔다. 우리 신분은 제사장이다. 복음의 제사장적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제물로 드림으로 섬기고 사랑해야 하지 않는가? 우리 신분과 명분이 제사장이니 우리가 드려서 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않는가? 행위에 맞추면 경건주의로 흐른다. 신분에 맞추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언약적 삶에 초점을 맞춘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언약적 구도 속에서 봉사하고 선교하고 전도한다. 목회 차원에서 순종과 봉사와 전도를 요구할 때 포커스를 조금 바꿔주라. 제사장적 소명을 가진 삶이 얼마나 신나고 영광스럽고 축복인가를 가르쳐 줄 때 제대로 하게 된다. 봉사나 전도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을 돕는 사역이 아니다. 이 자체가 축복이다. 물론 이는 이론적이다. 이것이 설교로 풀어져야 한다. 그래서 쉽지가 않다. 이론적으로 알지만 실제로 풀어서 설교하고 가르치고 적용시켜야 하기에 어렵다. 나도 목회를 하면서 이를 이론적으로 알지만 실제로 가르치려고 하니 어렵더라. 신나게 사는 것이 제사장적 삶이라는 것을 알지만 실제로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은 어렵다. 어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해도 이런 방향성을 잃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아무도 가르쳐 줄 수가 없다. 성경 어느 본문을 선택해도 이런 방향성 속에서 풀어낼 수 있어야 일관성을 가진 목회자이다. 1년 반의 목회 기간 동안 얼마 안 된 목회이지만 항상 이것이 고민거리이다. 설교 강단에서 도덕 설교가 아니고, 기복 설교가 아닌 복음설교를 위해서, 언약적 설교를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늘 생각한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대속물로 주신 것처럼 제자들에게도 십자가의 원리로 살라는 것을 가르쳤다. 십자가 원리로 사는 것이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삶을 한 마디로 막 8:34절로 설명했다. “그리스도의 삶은 한 마디로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제사장적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봉사도 전도도 선교도 하는 것이다. 그러한 신학이 전제되지 않고 의식이 없는 가운데 하는 봉사나 전도는 전부다 둘 중의 하나이다. 도덕주의로 가든지 아니면 기복주의로 간다. 십자가로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 언약 신학은 장막신학이다. 장막에는 핵심이 속죄이다. 속죄는 제사를 통해서 한다. 장막 안에는 십자가가 있다. 산상수훈의 팔복을 보라. 이 팔복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닮는 것이다. 십자가 삶이다. 산상수훈을 하면서 도덕설교, 윤리 설교 하면 안된다. 기복설교는 더더욱 안된다. 제사장적 소명을 가장 분명하게 가르쳐 주는 사례로써 팔복을 설교할 수 있어야 한다. 마 5:1-12 “(마5:1)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마5:2)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마5: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5: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5:6)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5:7)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5:8)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5:9)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5:10)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5:11)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5: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는 것은 우리가 제사장적 소명을 가지고 살아갈 때 이를 가장 잘 실행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장막을 쳐 주신다. 하나님께서 장막을 쳐 주시는 사람이 곧 복있는 자이다. 하나님의 축복과 도우심과 은혜를 받고 살아간다. 복을 물량주의로 보면 안된다. 제사장적 삶과 물량주의는 정비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필요하면 물량적 축복도 주신다. 그러나 이것이 다는 아니다. 산상수훈에서 하나의 패턴을 가르쳐 주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제사장적 삶을 가르쳐 주신다. 정리를 하면 언약의 개념에서 대표성을 설명한 것이다. 대표성, 연대, 연합의 개념을 언약적 관점에서 모든 것을 그렇게 이해하라. 영성과 목회에 적용하라. 창조도 언약이고, 구원도 언약이다. 첫 창조도 언약, 새창조도 언약이다. 우리 영성, 우리 목회, 우리 신앙 생활 모드것이 하나님이 구원하신 구도에 맞는 목회의 개념을 가지라. 은사는 어떤 사역을 위해서 주시는 선물이다. 은사를 자랑하는 데 사용하거나 과시하면 절대로 안된다. 잘 못된 것이다. 하나님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일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런데 우리같은 부족한 것들을 부르셔서 함께 일하시고자 한다. 우리같이 무능력한 것들을 택해서 함께 일하고자 은사를 주신다. 일을 함께 하시고자 불쌍히 여기시고 주신ㄱ 것이 은사이다. 그런데 이런 은혜의 선물을 가지고 관계를 무시하거나 자랑하거나 하면 하나님이 본래 은사를 주신 목적에 아주 위배된다. 은사에서 자신의 못난 점을 발견하라. 은사를 많이 주셨으면 내가 더 못난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주님이 불쌍해서 선물로 주셨다. 이것이 바른 은사론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해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관계적 영성을 추구하라. 성품적 성도됨을 우선 추구하라. 성품의 변화를 먼저 목표로 삼으라. 언약적 관점에서 볼 때 성품의 변화가 서열이 앞선다. 그 다음에 사역이다. 이런 신학과 이런 영성, 이런 목회를 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람직한 목회관이다. 성경에 보면 성도들이 능력을 나타내는 부분과 열매를 맺는 것 두 가지를 모두 가르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보면 능력을 나타내는 것은 능력을 나타내는 것은 열매를 맺는 것보다 결코 더 앞설 수 없다. 앞서서도 안된다. 예수님께서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좇아 내고, 많은 권능을 행한 사람들을 가리켜 이것이 반드시 천국에 들어가는 보장은 아니라고 하신다. 이렇게 능력을 많이 행하고도 천국에서 좇겨 났다. 능력을 행하는 것이 천국 입장권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주님은 열매를 보고 보장하신다. 열매를 보고 인정하신다. 관계성이 위이다. 성품적 열매가 분명히 앞선다. 능력의 과시가 천국 입장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그러나 능력에 반해서 열매는 나무를 보여준다. 물론 예수님이 은사론적 영성을 부정하시는 것은 아니다. 관계적 영성을 대안으로 말하는 것도 아니다. 관계적 영성이 은사론적 영성의 대안이라고 말하면 안된다. 은사론적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관계적 영성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서열이다. 무게 중심이다. 균형을 잡되 서열은 분명히 하라. 언약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두 가지 큰 맥락이 있다. 관계적 영성과 은사론적 영성의 균형이 필요하다. 마 7:24-27 “(마7:24)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7:25)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마7:26)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마7:27)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다른 구절을 하나만 더 보자. 물론 선교는 나가서 전도지 나눠주고, 복음을 제시하고, 선교하는 전투적 영성, 사역적 측면이 있다. 당연하다. 전투적 측면의 선교사역이 있어야 한다. 나가서 전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 본문에서 예수님은 관계적 영성에다가 선교 사명까지를 포함시켰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선교도 잘 된다. 그런데 전투적 영성에 치중할 때 많은 이들이 상처를 받는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전투적 영성이 너무 강해서 문제이다. 관게적 영성이 약하다. 그래서 서로 싸우고 상처를 준다. 서로 사랑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전투적 영성이 관계적 영성에 포함되어야 한다. 이런 문제들을 목회적 관리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성경에 보면 교회가 가정, 학교, 군대가 있다. 교회는 어디에 가장 가까울까? 가정에 제일 가깝다. 가정은 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학교의 모습, 군대의 모습도 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측면은 가정의 모습이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두 가지이다.
1) 무질서이다. 무질서는 과정을 초월하는 것이다. 과정을 무시한다. 이들은 일만 잘 되면 된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 나와 성도들의 관계를 무시한다. 일만 잘 하면 된다. 공동체 모습은 무시한다. 하나님의 정하신 성화의 과정, 질서를 초월한다. 성화 과정, 교회를 세우는 과정에서 초월되기에 무질서가 생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피나는 과정이다.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는 과정이다. 이런 과정은 관계에서 시작되는 것들이다. 그러기에 인격적 관계는 과정을 중시한다. 성화 많이 된 사람이 최고가 아니라 능력이 많은 사람이 최고이다. 신령한 능력이든 인간적 능력이든 능력이 우선이다. 능력 위주의 공동체에서는 질서가 필요 없다. 힘있고, 능력 많은 사람이 최고이다. 2) 무례함이다. 관계를 무시하게 된다. 무질서와 함께 무례함이 은사론적 치우침에 치중할 때 관계를 무시하거나 관계를 초월한다. 능력 위주로 나가게 되면 당연하게 이렇게 된다. 관계를 초월한 영성은 하나님이 정하신 성화의 과정, 교회를 세우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과정이 초월된다. 이 초월된 것에서 무질서가 생긴다. 성화의 열매를 가진 사람이 최고가 아니라 능력을 많이 가진 사람이 중시된다. 질서가 무시된다. 무례함이 따른다. 관계를 무시한다. 무질서와 관계 초월이 문제이다. 파워 영성과 관계 영성의 적절한 조화와 적절한 관계성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것이 목회의 관건이다. 신학에서 아주 중대한 원리적 이슈가 된다. Being 이 된다고 Doing 이 필연적으로 따라 오는 것은 아니다. Doing 이 있다고 Being 이 필연적으로 따라 오는 것은 아니다. 둘 다 필요하다. 추구해야 한다. 엡 4:11-12 “(엡4:11)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엡4:12)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요14:25-26)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성령의 사역은 진리의 성령으로서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와서 알리신다. 예수님의 것은 아버지의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도 구원론적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사변적으로 말하면 안된다. 구원론적으로 접근하라. 아들이 아니고서는 아버지를알수 없고, 성령이 아니고는 아들에 대해서 알 수 없다. 더 묻지 마라. 성령론은 아들 중심이 될 수 밖에 없다. 이 외에도 결정적인 말씀이 있다. 성령론에서 우리가 피해야 할 두 가지 극단이 있다. 첫째는 성령 사역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가면 안 된다. 성령 사역에 의존하지 않는 목회 사역은 안된다. 성령 사역을 극소화시키고, 최소화하면 결국은 도덕주의, 인본주의로 나갈 수 밖에 없다. 성령의 사역을 극소화시키면 도덕주의만이 답이다. 도덕적 인간을 만드는 것을 성화의 목표로 삼는다. 특별한 하나님의 사역과 초자연적 노력이 없어도 인간이 성화되리라고 하면 안된다. 칼빈주의 신학, 정통주의 신학이 이런 점에서 오순절 측 인사들에게 성령론을 극소화시키는 것처럼 오해될 여지가 있다. 매사에 성령을 능력, 은사 중심으로만 본다. 이 둘 다 피해야 한다. 성령의 사역을 축소화하거나 은사주의로만 나가면 안 된다. 성령의 사역을 인간의 차원에서만 이해하고 축소시켜서도, 지나치게 은사주의로 넘어가서도 안된다. 이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라. (행28:31)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성령은 누구신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다.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에게 성령의 은사를 허락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이런 모든 역사를 산발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큰 목적가운데 있다. 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시고 Lordship을 수행하시는 방편으로 주신 것이다. 성령의 역사를 이런 큰 틀 안에서 이해해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성령께서 우리 인격의 성장이나 도우시는 도덕적 방편으로 가서는 안된다. 반대로 성령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고, 파워를 안겨 주는 무속적인 방편으로 가서도 안된다. 지나치게 도덕적 성령론으로 가서도 안되고, 지나치게 무속적 성령론으로 가서도 안된다. 오순절 측에서 볼 때 개혁주의 성령론이 도덕적 성령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개혁주의에서 볼 때 오순절 성령론은 무속주의 성령론처럼 보인다. 그러나 진정한 개혁주의 성령론은 이런 두 가지 극단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신학이다. 언약적 신학의 측면에서 보려고 한다.
그래서 예수님도 나무를 보실 때 열매를 보고 안다고 했다. 능력을 나타내는 것을 보고는 그 사람이 어떤 존재(Being) 인지 분명하게 알 수가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Being에서 Doing 으로 가는 과정에서 점점 차원이 낮아진다. 보편적인 것이 가장 귀한 것이다. 특수한 것을 추구하는 습성이 나쁜 것은 아니나 거기에 매이면 안된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말씀하는 것도 너무 튀려고 하지 말라고 한다. 순차적으로 볼 때 이는 가장 낮은 것이다. 그래서 그가 가장 위대한 은사는 사랑이라고 한다. 사랑이라는 것이 가장 큰 은사인데 사랑의 은사라고 하면 사람들이 이를 주목하지 않는다. 사랑을 쉽게 생각한다. 아무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특별한 은사, 남다른 은사, 남에게 과시할 은사를 추구한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바로 여기서 생긴다. 바울은 진정으로 위대한 은사가 사랑이라고 아주 쉽게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보편적인 사랑의 은사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물론 열매나 은사는 상호 보완적인 면이 있다. 절대 둘을 나누어 버리면 안 된다. 뚜렷한 선을 그으려고 하면 안된다. 다만 이런 설명을 하려고 할 때 선을 구분하는 방법이 필요하다. 예수님도 극단적 사례를 통해서 Being 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계신다. 이 부분에 대해서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성령의 열매든, 성령의 은사든 모두 구원을 돕는 차원에서 말해야 한다. 거듭나고 천국 가는 특수한 의미의 구원이 아니라 광의의 의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주권에 순종하고 주님을 따라 살아가는 모든 언약적 관계를 위한 열매와 은사가 되어야 한다. 구원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 자체로 과시용이 아니라, 프리미엄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구원을 위한 것이라는 분명한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 미국이나 영국 등 서양 교회를 보면 기독교가 도덕이나 윤리 철학으로 많이 치우쳐 있다. 서양의 교회는 긴 기독교 역사와 전통과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오랜 전통과 신학적 업적과 연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덕과 윤리 철학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문제가 있다. 너무 지나치게 성령의 사역을 배제하면서 성령의 주권적 초월적 기적적 역사, 성령의 개입과 직접적 관여를 제거하여 버리니까 결국 남는 것은 도덕과 윤리와 철학만 남는다. 기독교가 윤리화 철학화, 사변화 되어 버리고 만다. 서양의 교회의 상당수가 그렇게 되어 간다. 반면 우리 한국 교회나 동양의 교회는 기독교 역사가 짧다. 항상 기독교가 들어오면 부흥 운동으로 시작한다. 강력한 부흥운동으로 교회가 세워지고 폭발적 성장과 교회 부흥이 일어난다. 그러다 보니 기독교가 생활로써 문화로써 정착하는 것이 약하다. 역사가 짧기에 당연한 것이다. 어디서나 기독교가 들어가면 부흥으로 먼저 일어나고, 다음으로 성화로써 생활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 나라는 아직 후반 성화가 약하다. 서양 교회에서 배워야 한다. 서양의 교회는 생명력이 없어지는 것이 문제이다. 동양의 교회는 생명이 철철 넘쳐 흘러나는데 성령의 폭발적 역사와 부흐을 통해서 뜨거운데 생활이 부족하다. 동양 교회는 열매가 부족하다. 서로에게 배우는 노력이 필요하다. 적은 단위의 모임에서는 이런 혈연 관계가 좋다. 정이 있다. 한국에 오면 정이 많다. 이것은 좋다. 일부분 필요하다. 그런데 서양은 개인주의 문화이다. 정이 약하다. 그런데 단위가 커지면 국가 단위나 큰 공동체에서는 정으로 이끌 수가 없다. 그런 경우에는 계약으로 인도하는 것이 훨씬 편하고 유리하다. 도덕성이나 윤리나 계약이 강조된다. 큰 조직으로는 훨씬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가정 단위의 그룹에서는 정이 많은 것이 좋다. 혈통에서는 웬만한 것은 다 용납이 된다. 서양에서는 심지어 가족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고소하고, 어머니를 고소하기도 한다. 서로간에 하겠다고 약속한 것을 이행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고소를 해버린다. 약간 살벌하지만 계약 문화이기에 그렇다. 너무 심한 것은 좋지 않다. 그런데 국가적 민족적 차원에 이르면 달라진다. 그 때는 진정한 경쟁력으로 말해야 하는 단계인데 여기에 이르면 달라진다. 법으로 나오고 계약을 맺어진 조직 앞에서는 국가적 경쟁력이 아주 밀리게 된다. 성품적인 것은 순종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리고 이 순종은 그리스도의 주권사상, Lordship 으로 나타나야 한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주권사상이 가장 강조되는 사상이다. 그런데 순종은 도덕적 순종이 아니라 전적인 위탁으로 생기는 순종이다. 맡김으로 이루어진 순종이다. 믿음에서 나온 순종이다. 믿고 위탁하지 않으면 순종할 수 없다. 내가 순종했을 때 순종에 대해서 책임지는 분이 계신다. 책임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순종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정직이 사라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무리 정직하게 살아도 누군가가 책임져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정직하게 살려고 하지 않는다. 성숙한 사회일수록 평시민들의 의식속에 내가 정직하게 살면 이 사회와 국가가 나를 책임져준다는 믿음이 있다. 국가와 시민간에 이런 신뢰와 위탁의 관계가 형성되어야 법을 지킨다. 그런데 이를 알면서도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내가 보기에 유익하고, 내게 좀 더 편하고 하기에 선택하기 어렵다. 쉽게 되지 않는다. 시간이 걸린다. 언약 중심의 목회, 개혁주의 신학으로 목회하는 것이 어렵다. 시간이 걸린다. 신학생들이 학교에서 신학은 개혁주의로 배우고 나가서는 개혁주의 목회를 안하려고 한다. 영광의 신학이 아니고, 십자가 신학이다. 십자가 신학의 열매는 금방 보이지 않는다. 항상 목회자가 오래 기다려야 한다. 언제나 앞서 희생하여야 한다. 항상 균형을 이뤄야 한다. 그래서 개혁주의 신학과 목회가 어려운 부분이다. 언약의 대주제는 Lordship 이다. 우리의 구원과 성화론이 전부 이 로드십으로 요약이 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 결국 로드십을 위한 것이다. 누가 우리 인생에서 왕노릇을 하는가? 이런 문제이다. 구원이란 포괄적으로 보면 로드십이다. 거듭나는 것도, 성화도, 온전한 성도를 만드는 것도 로드십을 세우는 것이다. 그래서 팔머 로벗슨 교수의 책을 보면 ‘언약은 어머니와도 같다’ 고 한다. 어머니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어머니는 나를 낳아준 분이다’ 라고 한다고 어머니에 대하여 제대로 정의되는 것은 아니다. 낳아주고, 길러주고 모든 사랑과 모든 은혜를 베푼 분이다. 마찬가지로 팔머 교수는 우리가 언약을 쉽게 정의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물론 언약을 정의 내릴 수는 있다. 종교적인 것, 행위적인 것으로 언약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면 쉽게 내릴 수 있다. 종교라는 것을 행위 위주로 정의하면 쉽게 정의를 내릴 수 있다. 종교를 파워 중심으로 정의를 내린다면 이것도 쉬운 일이다. 그러나 언약이라고 들어가면 정의가 어려워진다. 마치 어머니의 정의를 내리는 것이 어렵듯이 말이다. 그런데 모든 종교는 정의를 내리기 쉽다. 둘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도덕과 행위, 아니면 신비와 파워 이다. 신비를 추구하면 파워 중심으로 나갈 것이다. 도덕과 파워는 언약 관계의 변태적 행위이다. 도덕과 파워도 언약 관계의 다른 모습이다. 그런데 사람들도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 원한다. 다만 도덕이나 아니면 파워를 통해서 변태적인 방법으로 관계를 맺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죄인 것이다. 그런데 혼인 메타포어는 신비한 관계이다. 도덕도 파워도 아니다. 이런 메타포어를 가지고 영성을 추구하는 것이 언약신학이다. 이것이 언약신학이다. 로드십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우리 왕으로서, 그리스도가 우리 주권자로서 오신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충성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분에게 모든 것을 위탁함으로써 나오는 순종이다. 이는 도덕적 관계도 아니다. 일방적인 파워관계도 아니다. 일방적, 초월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로드십을 정의 내린다면 ‘전적인 위탁에서 나오는 순종’, ‘믿음에서 나오는 삶’ 이다. 이것은 믿음에서 나온 위탁이기에 도덕적인 것이 아니다. 또한 이것은 삶이고, 순종에 관한 것이기에 초월적인 것이 아니다. 로드십은 도덕도 초월도 아니다. 혼인 메타포어는 도덕도 초월도 아니다. 단순한 순종이라면 도덕으로 표현이 가능하다. 행위적으로 노예적으로 하라는 것을 하며 된다. 그러나 우리는 위탁에서 나오는 믿음으로 하는 순종이다. 그러기에 도덕이 아니다. 반면 이것은 지나친 초월이 아니다. 삶의 이야기이다. 순종의 이야기이다. 중도의 개념을 갖는 것이 로드십이다. 이 균형이 언약 신학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본질이고, 핵심이다. 내가 언약 신학에 대해서 가장 매력을 갖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기독교는 도덕도 초월도 아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약정을 맺으셨다. 하나님은 은혜로 오셔서 우리와 관계를 맺으신 분이다. 로드십이 기독교에서 가장 매력적인 것이다. 언약신학에서 보면 로드십이 가장 큰 신앙의 목표요, 영성의 목표가 된다. 지난 강의에서 본 것과 같이 이 주제는 아주 중요한 것이다. 로마서 15장에서 이에 대한 중요한 내용이 나온다. 그리스도게서도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함이다고 하신다. 섬김과 봉사를 제사장적 소명에 연결하신다. 자신의 제사장적 소명을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섬김과 봉사를 연결시킨다. 내가 이 사실을 성도들에게 가르쳐 주었을 때 눈이 휘둥그레지고 새로운 깨달음이라고 탄복했다. 우리가 축복 받기 위해서 전도하고 섬기고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제사장적 삶을 사셨다. 그리고 우리도 제사장으로서 섬기고, 봉사하고 전도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매력 포인트이다. 이것을 잡으라. 이 두가지 매력 포인트에서 언약 신학의 모든 갈래가 나오는 것이다. 팔머 로버트슨 교수는 창조에서의 금단의 열매 시험의 실패는 로드십의 실패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하신 일은 로드십의 회복이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육신의 삶을 회복시킨 것이나, 영적인 영역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 생활의 모든 것을 회복시킨 것이다. 금단의 열매는 모든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을 말하면서 팔머 교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뤄진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창조 구조에 반대되는 방법으로가 아니라 창조 구조에 부합하는 방법으로 구원을 이루신다. 새 창조의 의미, 구원의 의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로드십을 회복하는 의미가 창조 때에 의도하신 인간, 창조 때 의도하신 세상의 목적에 반대되는 쪽으로가 아니다.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방법으로 구원을 이루신다. 그것은 복음 안에서 비로소 진정한 창조의 본래 의도가 완성된다. 창조에서 의도하신 바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권을 인정하는 방법으로 일하실 것이다. 이 세상에 대해서 책임을 지라. 이 세상을 통해서 나에게 영광을 돌리라. 여기서 노동이 있고, 결혼이 있고, 안식이 있다. 창세기 1-3장에서 보여주신 창조의 목표가 노동, 결혼, 안식이다. 흔히 창 1:28절을 ‘문화명령’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문화 명령도 결국 로드십 안에 포함되는 것이다. cultural mandate. ‘문화 명령’ 말고 ‘지상 명령’이 있다. evangelical mandate, 혹은 Great Commission 이라고 한다. 문화 명령은 첫 창조에서, 지상 명령은 새 창조에서 이루어진다. 첫 창조의 실패를 회복하는 것이다. 예수 믿으면 탈퇴가 아니라 회복이다. 예수 믿으면 가정을 떠나는 것이 아니고, 가정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 믿으면 직장을 떠나는 것이 아니고 직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 믿으면 사회를 떠나는 것이 아니고 사회로 돌아가야 한다. 탈피나 탈퇴가 아니라 회복이다. 문화 명령에 충실하는 것이 진정한 복음 안에서의 삶이다. 문화적 측면, 윤리적 측면 우리가 하는 설교나 강의가 이런 건전한 신학과 신앙으로 일관성을 가지고 성도들을 인도해야 한다. 한국의 신학은 이런 점에서 개혁주의적 신학, 언약주의적 신학으로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다. 좀 더 개혁주의적 신학에 노출될 필요가 있다. 성도들이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상반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분위기가 전반적이다. 그래서 ‘문화를 중요시 여겨야 한다’거나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 고 하면 영적이지 않은 것처럼 이해한다. 기초가 아주 약하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바탕이 바뀌어서 아주 튼튼해져야 적극적 적용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처음부터 너무 강하게 적용하지 말고 상황에 따라서 적절하게 적용을 시키라. 교회에서 문화 활동을 하는 일을 잘 해야 한다. 현재 우리 교회에 출석이 900명 정도이다. 영어 하는 장성한 2세가 300명 정도 된다. 남은 세대는 우리 말을 사용하는 세대이다. 그 중에 청년 들이 500명 정도 된다. 청년 위주의 교회이다. 과거에 아주 청년과 1세대 사이의 마찰이 많았다. 청년들은 문화를 원하고, 예배의 개혁을 원한다. 그러나 1세대는 대다수가 이를 거부한다. 장로들 12명이 전부 60대이다. 내가 이제 40대이다. 60대 장로들이 30대 목사를 데려 오기로 결정한 것이다. 먼 미래를 생각하면서 청년의 정서에 맞고, 영어와 한국어를 다 사용할 수 있는 목사를 찾은 것이다. 32년 된 교회인데 아주 전통적인 보수교회이다. 영과 육을 분리하는 것이다. 영적인 생활과 육적인 생활이 다르다. 교회 안에서 문화를 말하면 반대하는 철저한 분위기이다. 내가 부임해서 개혁신학을 가르치고 설교를 계속하니 전체적으로 익숙하지가 않다. 은퇴하신 원로 목사님이 60대 중반에 은퇴를 했는데 내가 적응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내가 교회에서 절대로 신학이란 단어나, 개혁주의 라는 단어조차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설교 용어로 풀어서 쓴다. 그런데 이런 설교를 하고 강의를 하면서 시간이 흐르자 사람이 변화된다. 이들을 보면서 희열을 느낀다. 이런 목사가 오니 처음에 몇 사람이 안 맞는다고 떠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적응이 되었다. 이제는 교회를 부흥시키는 일이 남았다. 바른 개혁주의 신학을 가지고 관계 중심으로 이끌어 가면서 전도와 부흥을 제대로 하게 하는 것이 숙제로 남았다. 이 일이 다 쉽지 않다. 교인들은 새로운 목회자에 대해서 뭔가를 기대한다. 주위의 교회를 보고 상대적으로 비교하면서 바라본다. 젊은 목사가 왔으니 선풍적 바람을 일으켜 주길 기대한다. 말은 드러내고 않하지만 그렇다. 강의 잘 해놓고 결국은 부흥으로 왔다. (폭소)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개혁주의 교단에 속하여 칼빈주의 신학을 공부하게 하시고 어떻게 하든 배운 것을 신앙과 영성과 삶에 적용하여 개혁주의적 목회를 하게 하소서! 어렵지만 공부와 연구에 힘써서 사역과 공부 사이에 균형을 잡게 하소서! 우리가 바람직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언약에 근거하고 로드십에 근거한 목회를 하게 하소서! 오늘 강의 주제는 복음과 율법이다. 복음 안에서 자유를 강조한 사람이 마틴 루터이다. 그는 신학에서 자유라는 주제를 강조한다. 복음 안에서의 자유가 강력하게 나타난다. 칼빈은 그 자유 안에서 순종하는 법을 가르쳤다. 신학적 균형의 관점에서 본다면 칼빈이 더 균형 있는 신학을 가르쳤다. 조금 복잡해진 경향은 있으나 균형 잡으려면 말이 많아지고 조금 딱딱해진다. 그런데 성경에는 2 가지 종류의 자유가 있다. 먼저는 구원론적 관점에서 자유가 있다. 율법의 정죄로부터의 자유이다. 이것이 구원론적 의미에서 자유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로부터, 정죄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는 죄와 사망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다. 이것이 구원론적 자유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이 이루지 못한 언약을 우리를 위해 완성해 주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아담이 실패한 언약을 성취하심으로 율법의 정죄로부터 해방시켰다. 우리를 대표한 아담의 자손인 우리를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종으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새 백성으로 우리를 만들어 주셨다. 이것이 자유요, 복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완성이 되셨다. 그것은 아담이 이루지 못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셨다. 아담에게 주어진 언약은 순종의 언약이라 불린다. 아담이 이루지 못한 순종의 언약을 이루지 못함으로 그리스도가 성취하심으로 율법의 정죄로부터 구원하셨다. 이것이 구원론적 의미에서의 자유이다. 이 차이를 잘 그려주는 것이 히브리서이다. 구속사적으로 히브리서가 이 두 시대를 잘 설명해 준다. 갈라디아서도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에게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시대를 비교하고 있다. 율법과 복음을 나눌 때 율법은 옛 언약의 시대를 말한다. 율법은 복음에 반대되는 의미에서 율법의 시대가 아니라 은혜의 시대 안에서 옛 언약에 속한 시대를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약간 헷갈린다. 율법의 시대는 복음의 반대로서가 아니라 같은 복음인데 복음이 나타나는 구속사적 과정에서 이스라엘이 아직 어린 아이일 때 몽학선생의 아래서 있는 것이다. 그것이 율법의 시대이다. 새 언약 아래서 복음의 시대를 은혜라고 말하는데 복음 안에는 율법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시대적 흐름 가운데서 새 언약이 성취되었다는 의미에서 복음의 시대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시대라고 해서 복음이 없는 것이 아니고, 복음의 시대라고 해서 그 안에 율법이 없는 것이 아니다. 잘 이해해야 되는 말이다. 이 구조 속에서 복음과 율법을 이해하라. 양자가 서로 상반되는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구속사적 흐름 속에서 몽학선생의 시대와 아들의 시대를 구분하는 용어로서 설명하는 것이다. 구원론적 차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론적 차이를 말하려면 창조와 구속을 비교해야 한다. 구원론적 의미에서의 자유함을 말할 때는 창조에 속한 시대와 구속에 속한 시대를 비교해야만 한다. 그것을 잘 말해주는 것이 바로 로마서이다. 루터가 복음을 로마서 안에서 발견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율법의 정죄로부터의 자유함이다. 히브리서나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자유는 율법의 정죄함으로부터라기 보다는 율법의 옛 언약의 시대에서 새 언약의 시대가 도래함으로써 우리가 누리는 자유함이다. 그림자로부터의 자유함이다. 예언과 약속과 그림자로서 표현된 복음이 실체로, 성취로 나타났다는 의미의 복음이 히브리서와 갈라디아서의 내용이다. 원시복음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아브라함의 언약이다. 믿음의 의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신다. 구속이 피흘림으로 말미암아 이뤄질 것을 보여주신다. 율법은 믿음 이후에 온 것이다. 모세 율법은 율법으로 의를 세우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모세 언약은 율법을 가지고 행위로 의를 세우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구속사적으로 이 흐름을 보아야 모세 언약 속에서 주어진 율법의 본래 의도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아담이 실패한 것을 그리스도께서 이루셨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혼란이 없다. 로마서에서도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로마서 전체의 구도는 아담과 그리스도의 비교이다. 아담이 이루지 못한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셨다. 아담이 순종하지 못한 율법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셨다. 로마서 전부가 이런 구도 속에서 진행된다. 그런데 히브리서, 갈라디아서에서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비교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와 히브리서에서 옛 언약과 새 언약으로 주신 두 시대를 비교한다. 이스라엘이 백성들이 율법을 오해하여 자기 의를 세우는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로마서 이해에는 문제가 없는데 갈라디아서 히브리서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약간 헷갈린다. 이 둘 다 은혜의 시대이다. 복음의 시대이다. 옛 언약에서 복음의 의미와 새 언약에서 복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성화적으로, 언약적으로, 윤리적으로 새 언약에서의 복음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율법에 있다.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은 한 마디로 구약은 모형이요, 신약은 실체이다. 내용적으로는 같다. 질적으로는 같다. 그런데 하나는 모형으로 주어지고, 다른 하나는 실체로 주어졌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와 고넬료가 좋은 예가 된다. 이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문제이다. 율법으로부터 자유할 수 없다는 문제가 여기서 발생한다.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자유할수 없다고 한다.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이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목적이 아니다. 율법은 일점 일획이라도 폐지될 수 없다. 율법으로부터의 자유함이 아니라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차이를이해해야 한다. 어떤 율법으로부터는 자유하고, 어떤 부분으로부터는 오히려 율법을 우리의 삶 속에서 로드십의 높은 차원에 대한 순종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이것이 중요한 과제로 남는다. 우리가 율법폐지론으로 나가면 안된다. 잘못된 것이다. 우리의 언약은 도덕이 아니다. 그러나 언약적 관계 속에서는 가장 도덕적인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다. 누군가가 도덕으로 요구하여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감동을 받아서 도덕을 행하게 되는 것이 언약적인 삶이다. 이것이 신앙의 열매이다.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것이 아니라 연속성의 문제를 잘 이해하여서 로드십이라는 차원, 산상수훈의 차원에서 로드십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복음과 율법에서 이것이 키 포인트이다. 우리는 분명히 새 언약 안에서, 성령 안에서 자유로와야 한다. 그런데 ‘자유롭게 사는 것과 로드십에 대해 순종하는 것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 하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는 것이다. 사실 구원의 문제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 구원 받는 메시지는 단순한 것이다. 믿음으로 구원 받고 하나님의 의를 덧입는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어린 아이나 어른이나 다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구원 받은 후에 어떻게 성화되어 가는가는 단순하지 않다. 성령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면서 동시에 로드십에 대해서 순종하면서 자율적으로 지켜가는가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우리가 피해야 하는 두 극단이 있다. 하나는 율법 폐지적인 성향을 가지는 것이다. 율법 페지적인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된다. 다른 하나는 율법을 구약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율법을 구약적 수준에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율법을 지나치게 구약적으로 적용해서 사제적인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된다. 카톨릭의 모습을 보면 구약적이다. 사제나 형식, 미사 등이 구약적이다. 미사는 엄연히 예배가 아니라 제사이다. 예배와 제사는 조금 다르다. 구약적으로 믿고 구약적으로 교회론을 가지고 있는 것이 천주교이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자유로움을 누리는 동시에 율법을 자원하여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 율법을 폐지해서도 안되고, 반대로 율법주의로 나가서도 안 된다. 우리가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문제를 잘 이해하지 못할 때 이런 오류에 빠진다. 우리는 생각도 새 언약적으로 하고, 생활도 새 언약적으로 해야 한다. 율법 폐지론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 자유롭게 사는 사람은 오히려 은근히 무엇엔가 속박되기를 바란다. 아주 이율배반적이지만 실제로는 그렇다. 내가 있는 곳의 반대편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무엇인가 쾌락주의적으로 살면서 마음으로는 율법주의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다. 이것은 윤리적 모순이다. 그런데 실제가 그렇다. 진정한 자유가 아닌 이기적인 자유, 죄 안에서의 자유를 누리는 사람은 항상 반대편을 그리워하며 속박 되기를 바란다. 율법주의 성향을 그리워한다. 반대로 율법주의로 사는 사람은 자유를 그리워한다. 그러기에 절대로 율법주의도 행복하기 어렵고, 반율법주의도 진정한 자유를 얻지 못한다. 참 자유나 행복을 누릴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항상 율법주의적으로 도덕주의적으로 경건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실제로는 자유롭게 살고 싶어하며 스트레스를 받는다. 죄 안에서 만족과 희망을 가질 수 있다면 그에게는 복음이 없어도 된다는 말이 아닌가? 사람은 양 극단, 즉 쾌락으로 가든지, 율법주의로 가든지 그 안에 있다.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속박될 때 진정한 자유를 찾는 것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로드십에 속박되고 복음 안에서 자유로운 삶이다. 속박될 것에 속박되고, 자유할 것에 자유해야 사람이 균형이 잡힌다. 율법주의도, 쾌락주의도 진정한 답은 아니다. 모든 것에서 자유롭다면 그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하나님에게서조차 자유롭다는 그것은 자유가 아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행복할 수 없다. 그것이 성경적인 죄론이다. 모든 것을 소유하고 모든 것을 누린다 해도 하나님 안에 매이지 않으면 자유롭지 못하고 행복할 수 없다. 이것이 죄론이다. 진정한 윤리, 진정한 복음 안에서 자유는 속박되지 말아야 할 것에 속박되지 말고, 진정으로 속박되어야 할 것에 대해서는 속박되어야 한다. (히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다. 현재 모형만 왔다. 아직 참 형상은 오지 않았다. 참 형상은 그리스도이다. 모든 짐승의 제사는 모형이었다. 장막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치신 모든 장막은 형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육신으로 장막을 치신 것은 성취이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뤄지고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영원히 거하는 것은 완전한 성취이다. 장막의 완전한 성취이다. 율법의 종류에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도덕법(moral law), 즉 십계명이다. 그리고 둘째는 제사법(ritual law), 즉 의식법이고, 셋째는 민법(civil law) 이다.
제사법의 핵심 정신은 속죄이다. 속죄에 대한 법이 제사법이다. 구약에서는 속죄가 짐승의 피로 이뤄졌다. 그런데 신약에 넘어오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바뀐다. 피라는 형식은 바뀌었다. 짐승의 피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바뀐다. 피의 형식(form)은 바귀었다. 그런데 속죄의 원리는 더 강해졌다. 속죄는 구약보다 신약에서 더 강화되고 온전하게 되는 것이다. 유월절의 속죄는 덮어주고 넘어가는 것이다. 이것도 은혜의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피는 단순히 덮어주는 정도가 아니다. 양심의 죽은 행실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고 새롭게 하는 힘이 있다. 죄를 유월해 주는 것만이 아니라 온전한 속죄를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이뤄주신다. 형식은 단절이다. 그런데 속죄의 구속의 원리는 계속되어질 뿐 아니라 더욱 더 강화되고 있다.
여기서도 형식이 있고 원리가 있다. 어떤 범죄에 대해서 어떤 벌을 가한다는 형식이다. 그런데 민법에 담겨진 원리는 성결과 거룩이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성결의 원리를 가지라고 하는 것이다. 범죄자를 처벌하는 형식에서 성결의 원리가 전제되고 있다. 그런데 신약에 넘어 오면서 달라진다. 이혼의 사유를 보자. 이혼의 사유가 신약에서는 구약보다 훨씬 더 어려워진다. 거의 이혼하지 말라는 방향으로 나간다. 어쩔 수 없이 이혼하는 경우는 허용하지만 하나님의 원칙에 의해서는 근본적으로 이혼 허용이 안된다. 간음이 구약에서는 사형의 사유였으나 신약에서는 이혼의 사유가 된다. 구약에서는 일부다처제가 허용되었으나 신약에서는 금지된다. 이는 구약과 신약에 있어서 하나님의 기준치가 달라진 것이 아니고 역시 구약 백성들이 아직 영적으로 몽학선생 아래 있는 수준이었기에 그러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완성으로 오셨기에 상대적 윤리가 더 이상 허용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산상수훈이다. 많은 부분들이 우리가 볼 때에 구약에서는 윤리적인 문제들이 발생된다.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대 원리보다 형식이 더 중시되었던 시대의 문제들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형식보다는 원리가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완성된 시대에 와서는 이런 문제들이 허용될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도덕법을 보자. 도덕법의 원리는 사랑이다. 예수님이 도덕법의 원리를 사랑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로드십으로 주시는 삶의 원리요 방법이기 때문에 구약이나 신약이나 변함이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이다. 신약에서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 것으로 책임을 다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삶으로 가야 한다. 구약에서는 간음을 하지 않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었고 여기서 끝났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단순히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다가 아니고 그 사람을 사랑하는 단계까지 가야 한다. 마음으로 간음한 것도 이미 간음한 상태라고 강조한다. 살인도 마찬가지이다. 육신적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으로 다가 아니다. 마음으로 사람을 미워하면 영적으로 살인한 것과 같다. 도덕법에 있어서 사랑의 원리가 더욱 확대된다.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확대된다. 문자적인 데서 내면적인 데로 간다. 자발적인 것이 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새 언약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사랑의 원리라고 강조된다. 새 언약으로 오면 규제는 많이 줄었다. 규제는 많이 완화되었는데 요구되는 삶의 수준을 훨씬 높아졌다. 규제는 줄고 수준은 높아졌다. 사실 규제가 많다는 것은 좋은 현상이 아니다. 규제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성숙하지 못하다는 증거이다. 규제가 아예 없다는 것은 또 그것대로 문제가 있다. 경건을 생각해 보라. 모든 삶에 규칙이 없을 수가 없다. 경건의 훈련을 하고 연습에 익숙해지려면 반드시 규제가 필요하다. 규칙적이어야 한다. 순종이 필요하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어느 정도 규제를 할 것이냐가 실제적인 문제가 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속 시원한 대답을 줄 수는 없다. 성경적으로 상위 원칙이 있고, 하위 원칙이 있다. 하위 원칙이 상위 원칙을 위배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너무 규제 중심으로 가면 피곤하다. 관계 중심의 대원리, 사랑 중심의 대 원리가 상처를 입는다. 아이들에게 도덕을 가르치고 행위를 가르쳐야 하지만 관계를 위배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덕을 가르친 후에 관계가 깨어지고 만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른 아이와 어른을 놓고 볼 때 아이들에게는 구체적으로 규제가 많다. 막연히 풀어 놓고 막연히 알아서 하라고 하면서 관계 중심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이것을 이해할 수준이 아닌 사람에게는 이런 일을 말하면 안된다. 어린 아이들에게 로드십을 말하면 이해가 안 된다. 옷을 벗고 일을 돕는 아이들아 모여라! 고 하면 통한다. 구약 시대에는 몽학선생의 도움과 지도를 받아야 하는 시절에는 규제가 많다. 이 시대에는 문자적으로 된 것을 지키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에는 달라진다. 다른 차원으로 바꾸어 주셨다. 내가 목회자들에게 제안해 보고 싶다. 첫째는, 도덕적 강령을 빼고 한 달간 설교를 시도해 보라. 하라, 하지 말라는 도덕적 내용을 성경에서 빼 보라. 그리고 하라 하지 말라는 도덕적 강요 외에 관계 중심으로만 깊이 설교해 보라. 이런 설교를 시도해 보라. 둘째는 이런 후에 한 달이 지나서 성도들의 삶의 반응을 보라. 이런 설교 후에 성도들의 반응이 어떠한가? 성경대로 살고 싶어 하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시험을 해 보라. 더욱 열심히 섬기며 살아야 한다고 결심하는지 아니면 이렇게 그냥 쉬라고 하는지를 보라. 관계 중심의 원리는 삶으로 연결되게 되어 있다. 우리 관계 중심의 언약 신학이 반드시 이렇게 설교로 나타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연구하고 대화하는 모든 것이 필요가 없다. 이렇게 설교하고 섬기면 성도들이 목사에 대해서 안다. 우리 목사님이 도덕적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안다. 한국의 종말론은 전통적으로 3가지로 분류된다.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이다. 한국 교회는 전천년설 종말론을 많이 따른다. 전천년설에도 역사적 전천년설과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 있다. 오늘날은 후천년설을 따르는 자가 많지 않다.
전천년설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라는 것이 미래적인 사건으로 남아 있다. 아직 천년 왕국이 미래적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통치권과 주권이 미래적인 것이다. 이들에게는 우리가 아직 하나님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천년왕국의 시대에 가서 거기서 우리는 로드십을 이룬다. 거기서 누린다. 거기서 회복이 된다. 그러기에 전천년설은 천년왕국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된다.그 때 가서 주인과 함께 왕노릇을 하기 위해서 몰두한다. 열심히 미래를 준비한다. 영적인 일에 관심이 아주 많다. 이 땅에 관심이 약하고 천년 왕국을 준비하기 위해서 열심히 영적인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반면에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고 현재 이 세상에서 주님의 주권에 순종하며 살아 가는 것에 약하다. 하나님의 주권과 로드십에 약하다. 아직 왕권이 오지 않았기에 그렇다. 세상으로부터 동 떨어진 2원론적 모습으로 가게 된다.
천년왕국은 이미 시작되었다. 이미 천년왕국은 왔고, 이제 완성만 기다리고 있다. 이제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가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시기만 하시면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간다. 이 땅에서 이미 하나님의 왕국이 실현되었다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첫 창조가 새 창조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그러기에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천국의 삶을 즐기고, 천국을 맛본다. 사람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이 회복된다. 그런데 영적인 일에 대해서 열심이 떨어진다. 전천년주의자들은 이 땅에 관심이 적다. 왕국을 준비하기 위해서 그 일을 위해서만 살아간다. 나 개인적으로는 언약 신학을 배우면서 그 중요성을 이해하고 그 언약적 관점에 충실하고 성경에 충실한 종말론이 무천년설이라는 것을 알고 선택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임했다. 사도행전에서도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친다.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고,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에 대해서 가르치며, 성령의 역사하심이 하나님 나라와 관련되었다고 가르친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 생각하고, 하나님 나라의 주권을 세우는 일에 관심을 갖는다. 중생, 선교, 전도 모든 일에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면서 일한다. 중심 포인트가 달라진다. 교회 안과 교회 밖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대표하는 특수한 집단이고, 세상은 하나님이 모든 분야에서 역사하시는 보편적 영역이다. 이렇게 복음이 것이 언약적 포괄적 관점이다. 그러므로 세대주의적인 종말론을 추종하는 교파들이나 근본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2분법적인 것이 강하다. 웨민에서 나간 학교가 Faith 신학교이다. 이들이 나간 결정적 이유는 종말론에 대해서 분명하게 가르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다. 종말론에 대해서 분명하게 가르치지 않고 둘 다 정보를 주고 선택하게 유도하다 보니 웨민에서 대부분의 교수들이 무천년설을 따르게 되었다. 전천년설을 가르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분개하였다. 자유롭게 선택하게 하다 보니 무천년설 중심으로 학교가 변했다. 그래서 나가 버렸다. 페이스 신학교로 나간 유명한 사람 하나가 프랜시스 쉐이퍼 박사이다. 그가 나가서 유명한 신학자가 되었다. 그래서 두 신학교가 갈렸다. 페이스 신학교에서는 종말론을 보수주의를 결정하는 리트머스 종이라고 결정지어 버린다. 종말론을 보수주의로 믿지 않으면 좌경화라고 못 박는다. 그런데 지금 페이스 신학교가 문을 닫았다. 언약의 흐름 속에서 교수들이 잘 설명해 주고, 스스로 선택하게 한다. 아마 웨민 교수들이 언약적 흐름에서 자연스럽게 학생들이 무천년설을 선택하리라고 믿고 유도했던 것 같다. 이것이 가장 일관성있고 성경과 언약 신학에 충실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천년 왕국을 미래적 사건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은 우리와 다르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키시고 여기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뤄진 것처럼 이루는 것이 남아 있다. 이를 통해서 이 땅에서 세상속에 임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강력한 동기 유발을 일으킨다. 한국 교회가 단순히 부흥만을 외치면 이것 또한 도덕주의나 윤리주의가 되어 버린다. 기독교 윤리 실천 운동을 하는 분들의 말을 들으니 아무래도 기독교 실천을 위해 아무리 말해도 듣는 사람에게 설득력이 부족할 때가 있다. 이들은 실천 자체만을 말하기에 그렇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만을 말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들에게 신학적 배경이 없어서 그런다. 목회자들은 이런 신학적 설득력을 가지고 실천에 힘써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되면 성도들에게 일관성있는 신학을 가르치고, 성화론, 종말론, 신론, 인간론 등을 통일성있게 가르친 후에 봉사와 전도 섬김 등을 요구할 수 있다. 일관성 속에서 우리가 순종하고 윤리를 말하고 생활을 말한다면 파워풀한 메시지가 전달될 것이다.
조직신학에서는 통일성의 방식으로 성경에 접근한다. 성경신학에서는 다양성의 방식으로 성경에 접근한다. 어떤 정황속에서 누적되어서 어떻게 발전되어 나가는가 하는 과정을 중시한다. 조직은 완성된 진리체계라는 원칙 하에서 어떻게 서로 연계되었는가 하는 연관성을 중시한다. 주제별 연관성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조직신학에서는 주제별로 성경을 가르친다. 연계를 서로 설명한다. 필연적으로 주제별로 가게 되어 있다. topical 한 방향으로 간다. 한국 목사님들이 주제별 설교를 좋아하는 이유가 조직신학이 전통적으로 강했기 때문이다. 반면 요즘 강해설교를 많이 말하는데 아직 이것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성경신학이 약했기 때문이다. 성경신학은 서양에서도 발전한 역사가 짧다. 한국에도 조직신학이 먼저 들어왔다. 배운대로 설교하는 것이다. 항상 통일성과 다양성이 조화를 이루고 다양성이 통일성에 지배를 받는 구도 내에서 신학이 전개되어야 한다 그런데 주종이 대등을 이루다가 이제는 성경신학이 주를 이루고 있다. 다양성이 주가 되어서 통일성을 이끌어 내고 있다. 성경신학과 조직신학 사이에 대화가 많이 이뤄져야 하는데 대화가 없기에 따로 간다. 앞으로 한국에서 조직신학과 성경신학 사이의 큰 갈등이 일어날 것이다. 제가 예견하건대 신학교마다 이 두 부류 사이에서 큰 갈등이 일어나고 분쟁으로까지 번질 가능성이 있다. 이런 문제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과연 이런 문제를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까? 나는 언약에서 이를 풀어간다. 언약 속에 통일성과 다양성이 같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을 묶어 줄 수 있는 고리가 언약 개념에 있다고 믿는다. 제 박사 학위 논문이 ‘언약 개념을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풀어보는 것’ 이었다. 저는 성경신학적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성경신학적으로 언약 개념을 풀어내는 연구는 많다. 책도 많다. 팔머 교수의 책 한권만 떼어도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언약 개념을 거의 섭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는 항상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원리에서 약간 혼란을 겪거나 문제가 생기면 언제나 팔머 교수의 책으로 간다. 그의 책은 아주 단순한 논리로 엮은 교과서이다. 포괄적으로 쓴 책이고 얇다. 복잡하지 않다. 성경신학 언약을 아주 잘 보여준다. 그 책 한 권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조직신학에서 다루는 내용은 구원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통합시키는 것이다. 두 가지를 통합시키는 것이 조직신학의 큰 과제이다.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들어와서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는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권적으로 일하시면서도 어떻게 우리의 의지와 감정과 체험을 무시하지 않고 구원의 과정에 참여시키시는가? 이것이 조직신학의 과제이다. 언약은 조직신학의 중요한 토픽이다. 조직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 그대로 조직이요, 논리이다. 초월성과 내재성을 논리적으로 어떻게 연결시키는가가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여기서 언약이 필연적으로 다뤄지지 않으면 안된다. 학위 논문이 출판은 되었는데 아직 번역은 되지 않았다. 미국의 유명한 인터넷 책방에 들어가면 내 책이 금방 나온다. 아마존에 들어가서 ‘영재 송’ 누르면 목차까지 다 나온다. 학문적인 책이기에 출판 권수가 적고 가격도 약 90 달러 정도나 된다. 국제적인 학문적 결과로 인정을 받았다. 그래서 조직신학에서 변증학을 하게 되면 가장 먼저 다루는 것이 이 존재론이다. 다양한 개체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모습을 통일성안에 설명하는 것이다. 인간 존재의 하나의 통일된 목적(goal) 이 있는가? 이를 찾는다. 이것이 철학의 주제인데 인간의 논리로는 풀 수 없다. 그래서 개혁신학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처음부터 전제를 하고 시작한다. 하나님은 주권의 하나님이시오, 또 우리와 관계 맺으신 하나님, 우리 안에 장막을 치시는 하나님이시다. 더 이상 이에 대해서는 묻지 말라. 이것을 물으면 하나님의 계시를 부인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계시로서 출발한다. 그런데 철학에서는 이 계시를 수용하지 못한다. 그래서 철학과 종교가 부딪치는 것이다.
구원과 윤리 - 통일된 주제 안에서 하나의 통일된 주제아래 넣기가 어렵다. 영혼 구원과 사회 윤리 문제를 보는 관점. 항상 충돌을 일으킨다. 개인과 사회 - 한 개인을 앞세우느냐? 아니면 사회를 앞세우느냐? 개인주의냐, 공동체냐 하는 사이에서 언약이라는 것을 통해서 답을 찾아야 한다. 관계이다. 조직신학에서는 개념적 어려움들을 통합시키고 풀어주는 것에 항상 관심을 둔다. 그런데 조직신학은 완성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모든 것을 바라본다. 즉 하나님의 계시는 절대로 상반될 수 없다. 하나님은 모순 되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 하나님은 앞뒤가 분명하신 분이시고, 일관성을 가지신 분이시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의 통일된 주제를 가지고 있다. 우리 눈에 보기에는 어렵고, 반대이고, 역설적 개념이지만, 분명히 하나님의 성품 안에는 모순이 있을 수 없다. 하나의 완성된 목적 가운데 계신다. 이것을 버리지 못한다. 어떤 모순 가운데 부딪치더라도 어떤 갈등이 생겨도 이를 버리지 못한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시론은 하나님의 주권에서 나온다. 조직신학은 언약이라는 개념 속에 주권과 관계라는 두 축이 있다. 이 두가지 축 속에 조직신학은 개념적으로 설명하면 주권에 가깝다. 항상 완성된 통일체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모든 것을 시작한다. 현상 속에서 나타나는 어떤 모순도, 우리 체험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모순도, 이 세상 속에서 바라보는 어떤 현상도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이런 전제를 가지고 시작하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 안에서 모순이라는 것이 없다. 그러니 철학자들이 볼 때는 어떤 면에서 우습다. 세상이 모순 투성이인데 조직신학은 모순이 없다고 한다. 양자가 시작부터 다르다. 출발이 다르다. 이런 것들 때문에 조직 신학 하려면 어렵다. 주권과 관계 2가지 성격에서 볼 때 조직신학은 주권에 더 가깝다. 반면 성경신학은 관계에 더 가깝다. 왜냐 하면 성경은 역사와 정황을 따지기 때문에 주권을 주권으로 수행하시지만 어떻게 역사 안에서 관계를 맺으시는가? 역사는 다양성이다. 역사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를 맺으신다. 역사를 보면 다양한데, 이를 역사주의라고 한다. Historicism 이다. 이 세상에서 절대적인 것은 역사 하나 뿐이다. 변한다는 것, 자체를 모르고는 그 외에 아무것도 절대적인 것이 없다. 변하는 것만이 절대이다. 절대적인 것은 절대로 없다는 원리가 역사주의 출발이다. 역사 앞에서는 절대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성경은 역사의 산물이기에 절대적일 수가 없다. 역사는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아무래도 성경신학을 하다 보면 역사와 관련이 깊어진다. 그러다 보면 역사주의에 빠진다. 물론 조직신학의 통일성을 전제로 한 상태에서 성경신학을 하면 잘 된다. 그러나 점점 조직신학을 부인하고 성경신학만 하게 되니까 역사주의에 빠진다. 실상이 그렇다. 그러다 보니 역사주의에 많이 빠진다. 그 대표적 케이스가 세대주의이다. 역사와 정황에 따라서 하나님은 다른 목적을 가지시고 다른 방법으로 설명한다. 역사에 따라서 인간이 죄를 짓고 나서 아담 이후에 ‘도덕의 시대’, ‘양심의 시대’가 있다. 이렇게 시대를 나눴다. 그러나 개혁주의에서는 창 3:15절 이후에 모두가 다 은혜의 시대이다. 하나님이 모든 역사를 이뤄가신다. 거기에 무슨 도덕의 시대, 율법의 시대, 양심의 시대가 있고, 그러다가 끊기고 한다. 다음에 교회의 시대가 있다고 한다. 이것이 다른 말로 하면 역사주의이다. 역사 안에서 역사가모든 것을 상대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신학에서는 신조, 교리라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신조가 우습게 여겨진다. 성경신학을 하는 사람에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우습다. 17세기에 만들어진 신조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의미를 줄 수 있는가? 그 17세기라는 역사적 상황에서 만들어진 역사적 산물이 우리에게 지금 신앙적 교리적 기준이 될 수 있는가? 그래서 성경신학이라는 것이 역사주의로 빠질 위험을 가지고 있다. 만일 우리가 조직신학이라는 통일성 안에서 성경신학을 하면 하나님의 계시라는 축복과 선물을 풍성히 가져다 줄 수 있다. 반면에 우리가 조직신학에서 떨어져서 성경신학이 따로 놀면 역사주의에 빠지게 된다. 조직신학만 가지고 논리만 가지고는 우리가 신학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조직신학은 싸움 신학이다. 역사를 무시하기 때문에 그렇다. 역사를 무시하고 논리만 강조하면 싸움 신학이 될 수 밖에 없다. 구속사가 없이 조직신학을 하면 사변화되고 싸움신학이 되어 버린다. 제가 강의를 하면서 역사를 무시하는 방향으로 전개하는 인상을 받는데 내 의도는 그것이 아니다. 역사와 철학이 잘못되어 있을 경우를 말한 것이다. 사실 역사의 통일성 속에서 조직신학도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그런 역사관 자체가 조직신학적 전제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지금 말하는 역사주의라는 것은 전제가 다르다. 역사철학, 역사관이 다르다. 역사주의의 역사관은 역사가 절대적인 통일성을 갖지 않는다는 전제 속에서 출발한다. 이들에게는 누적이 아니고 대치이다. 기독교적 역사는 누적되어진 역사이다. 통일성 속에서 차곡차곡 쌓여져 가는 것이다. 통일성이란 전제 속에서 역사를 보는 것이 기독교 역사이다. 그런데 지금 역사를 말하는 사람들은 이런 전제를 갖고 있지 않다. 헤겔의 역사철학은 역사주의의 뿌리가 된다. 역사는 정반합이라는 원리를 통해서 새로운 역사로 나아간다. 옛 것은 다 그 시대의 산물이고, 상대적 역할을 했을 뿐이다. 이제는 다 지나갔다. 옛 것은 소용이 없다. 신학도 마찬가지가 된다. 이들에게는 3세기의 신학과 4세기의 신학이 지금 우리에게 쓸모가 없다고 본다. 15-16세기의 신학이 지금의 우리에게는 소용이 없다. 현재의 역사,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역사 안에서 만들어진 것만이 지금 우리에게 의미를 준다. 그리고 그것조차도 10-20-100년이 지나면 상대적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구속사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놓고 설명하기에 이런 관점에서 보면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은 뗄 수가 없다. 역사가 있고 계시가 있다. 역사를 통해서 계시가 온다. 역사를 떼어 놓고 계시를 말할 수 없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나님의 언약 백성과 관계를 맺어 오셨는가? 구속사를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 구속사를 빼고 신학을 말할 수 없다. 언약이란 관점에서 볼 때 조직신학은 하나님의 주권적 측면을 강조하고, 성경신학은 관계적 측면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과 장막을 치시고 관계를 맺으신다. 관계적 측면에서 이 정황을 살펴서 신학이나 설교로 만들어 내는 것이 강해설교가 된다. 강해설교는 아무래도 구속사적 측면을 잘 설명한다. 성경신학에서는 논리의 통합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 반면에 우리가 볼 때에 약간 상반된 개념, 즉 영과 육, 개인과 사회, 구원과 윤리 등 개념을 통합시키는 것이 조직신학이다. 그러기에 개념적 설교를 하게 되면 조직신학적이 된다. 이것은 이해를 돋우는 데는 좋다. 개념적 설교는 지식인들은 좋아하지만 생각을 하기 좋아하지 않는 일반 성도들에게는 먹히지 않는다. 관계를 무시하게 된다. 일반인들은 느낌이 있는 것을 좋아한다. 관계를 유념해야 한다. 설교는 Feel 이 꽂히는 설교를 해야 한다. 저도 조직신학을 가르치기에 개념적 설교가 많아진다. 아무래도 Feel이 부족하다. 좋아하는 사람은 있는데 개념 따라가기가 피곤하다. 들으면서 피부로 와 닿고, Feel 이 꽂혀야 한다. 따라가면서 개념을 정리하여 가는 작업이 힘든다. 개념을 줄이고 상황 속에서 삶을 보면서 설교를 해 나가야 한다. 사람들이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관계를 좋아하기에 그렇다. 설교도 드라마 쪽으로 개발할 필요가 있다. 구속사적 설교를 잘 하려면 구속사적 드라마를 만들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구속사적 설교가 단순히 구속사 설명이 아니다. 구속사적 드라마를 연출해 내야 한다. 원어를 연구하여서 아무리 문화를 이야기해도 Feel 이 꽂히는 것이 아니다. 드라마를 펼쳐낼 수 있는 효과를 낼 수 잇어야 한다. 차라리 그림 없는 구속사적 설교를 하느니 주제 설교가 낫다. 그러므로 둘 다 문제이다. 개념적 설교에 치우치면 사변적 설교로 흐르기 쉽다. 하나님의 주권성이나 통일성을 잘 다룰 수 있을지 모르나 관계성이 약하다. 그러나 관계적 설교를 한다고 하면서 항상 구속사적 정황 설명이나 하다가 그치게 되면 역시 사람들이 존다. 개념 정의가 서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조직신학에서는 개념적 통합을 하려고 노력하고, 성경신학에서는 시대적 통합을 하려고 한다. 구약과 신약을 통합하려고 한다. 시대적으로 어떻게 이를 연결시킬 것인가? 이스라엘과 교회를 시대적으로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 전혀 다른 공동체를 통합시키는 것이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을 통합시키는 문제. 약속과 성취라는 시대적 통합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일반 역사과 구속 역사를 어떻게 통합시킬 것인가? 일반 역사 속에서 구속사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렇다. 당시 사람들의 관습이나, 사고방식, 문화 등을 터치하면서 구속 역사를 말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조직신학에서는 개념적 차이를 통합하고, 성경신학에서는 시대적 차이를 통합시킨다. 조직신학에서는 주권적 성격을 많이 갖게 되고, 성경신학에서는 관계적 성격을 갖고 있다. 그래서 우리 목회자들은 이 둘 다를 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만 할 수 있게 되면 절름발이가 된다. 그래서 저도 설교를 하면서 절름발이 설교를 했다는 것을 시인하게 된다. 관계적 측면을 더 개발하지 않으면 안되겠구나 하고 뉘우친다. 관계적 측면을 개발하지 않으면 항상 개념적 설교만 하고, 개념적 성도만 만들게 되겠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는다. 개념만 가지고 개념적 설교만 하면 개념적 성도만 키운다. 관계적 설교를 하지 못하면 성도의 온전함을 이루지 못한다. 아직도 나는 구속사적 설교를 잘 못한다. 자신감이 떨어진다. 자신감이 떨어지면 감동을 줄 수 없다. 물론 조직신학 성향인지, 성경신학 성향인지 자신이 잘 안다. 조금 은사가 앞서는 부분이 있다. 그런 사람은 그런 부분을 살려야 한다. 그러나 치우치면 안된다. 목회자 자신이 개념 부분에 강한지, 관계 부분에 강한지 자신이 안다. 이를 대충이라고 진단하고 있어야 한다. 대개 한국 목회자들이 조직신학적으로 간다. 가만 내버려 두면 조직신학적으로 간다. 왜냐 하면 쉽기에 그렇다 30분 안에 설교를 만들어 내기에는 조직신학적 설교가 가장 쉽다. 시간에 좇기면 주제로 나간다. 시간이 없는데 언제 원어 살피고 역사적 정황을 살피는가? 시간이 없으니 조직신학으로 가는 것이다. 목회가 바쁘니까 그렇다. 궁지에 몰리니까 발에 땀나면서 준비한다. 그렇게 하면 한 두 번은 은혜로 하나님이 봐주신다. 그런데 반복되면 은혜가 없다. 시간이 없으니 조직신학적으로 간다고 변명하는데 반복되면 편리주의로 가게 된다. 그러므로 성경 공부는 두 가지 방법이 동시에 이용되어야 한다. 일방성과 쌍방성이 동시에 있어야 한다. 연역법을 모르면 성경공부 리더가 되지 못하다. 동시에 귀납법을 모르는 사람도 성경공부 리더가 되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성경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강의만 하고 있다. 관계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개념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 지금 제일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성도들이 전통적 양육 방식에 익숙하기에 대화법을 모른다. 성도들이 대화법을 모르고 대화를 통해서 결론에 이르는 법을 모른다. 토론 문화가 심지어 미국에 사는 한국인들에게조차 잘 안되어 있다. 그래서 어떤 유형의 모임이든지 일단 강대상을 하나 준비해둔다. 집에 가든지, 교회에 가든지 목사가 한 번 설교를 하고 강의를 하라는 것이다. 내가 이것을 싫어하고 소그룹에서는 관계 중심으로 대화를 하고 모든 사람을 참여시키고 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만 교육하는 리더들만큼은 목표와 방향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연약을 모르는 채 귀납을 시키면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다. 이것을 가르쳐 주고 싶어하는데도 성도들에게 잘 안된다. 이들은 목사들에게 설교 듣는 법만 배운 것이다. 자신들이 성경 말씀을 가지고 귀납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강의 듣고, 설교 듣고 하는 일에만 익숙하다. 그래서 내가 어디 가면 설교단 가져 오지 말라고 부탁한다. 내 중심으로 모이는 자리가 있고, 아닌 자리가 있다. 성경 연구 자리에서는 대화를 통해서 결론에 이르는 것이다. 요즘 소그룹을 강조한다. 소그룹은 관계적 형태를 중시하는 것이다. 관계 중심, 귀납 중심으로 하겠다는 것이 소그룹이다. 쌍방적인 요소가 여기 있다. 그러나 소그룹 리더는 반드시 연역을 알아야 한다. 연역 모르는 소그룹 리더는 관계 중심을 말하다가 잡담하가다 끝나 버린다. 신세 타령하고 잡담하다가 끝나 버린다. 소그룹을 하려고 노력하면서 어려움을 느끼는다. 너무 지나치게 연역 중심으로 해 왔기에 성도들이 자기 자신의 신앙을 자기 방법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지나치게 한 사람에게 의존하는 의존도가 너무 높다. 무엇이든지 목사가 해야 한다. 소그룹은 평신도 지도자들을 세울 때에 가능하다. 지나치게 연역적으로 가니 반작용으로 소그룹을 나가는데 결과적으로 소그룹도 연역을 모르면 잘 할 수 없다. 리더가 리더로써 기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소그룹 리더가 관계 중심으로 가면서도 언제나 연역으로 돌아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만 성공한다. 설교도 마찬가지이다. 연역적 접근방식과 귀납적 접근 방식을 같이 가지고 가야 한다. 조화를 이뤄야 온전한 설교가 된다. 역시 양육 방식, 훈련 방식도 조화가 필요하다. 연역은 강의중심이다. 주일학교나 성경학교 등은 연역식이다. 강의는 일방적이다. 그러나 교육의 효과를 위해서는 쌍방적이 되어야 한다. 이 강의가 그렇다. 연역식이다. 듣고 그냥 가 버리면 다 잊어 버린다. 강의를 듣고 자신만의 언어로 이를 표현해 보고 실천할 수 있는 장을 연습을 해야 한다. 이해하고 소화하고 실천을 돕는 것을 다뤄주는 것이 소그룹이다. 이것이 귀납적 방법이다. 두 가지가 언제나 조화를 이뤄야 한다. 한 쪽이 약해지면 온전한 훈련이될 수 없다. 하나님의 구원 방법 속에서 주권과 관계성에서 하나가 약해지면 초월과 도덕으로 나눠지듯이 우리 설교나 양육이 이렇게 치우치게 되어 버린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을 모델로 삼아서 그 패러다임으로 나가자. 그렇게 살자.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 일방적이고 쌍방적이다. 리더십도 마찬가지이다. 일방성과 쌍방성을 잘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느 때에 일방성이 필요한가를 알고 분별하여서 그 때는 일방적으로 이끌고 나가야 한다. 그러다가 풀어줄 때에 풀어서 자신들이 스스로 하도록 자발성을 살리고 쌍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일방성과 쌍방성의 완급 조절이 리더십의 키이다. 내가 교수하면서는 이런 것을 잘 몰랐는데 목회를 하면서는 리더십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일방성과 쌍방성의 조화가 아주 중요한 것을 체험했다. 당회를 해도 두 가지 조화가 필요하다. 부교역자들과 관계에서서도 그렇다. 일방성과 쌍방성의 완급조절이 가장 어려운 문제였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이런 것 배울 수는 없다. 기업과 목회는 다르기 때문이다. 세속적 리더십과 영적 리더십은 다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리더십을 세상 세미나를 좇아 다니며 배울 수 있는가? 과거에는 이런 것 고민하지 않았다. 제가 과거에는 예리했다. 칼이었다. 강의할 때는 그것이면 족했다. 그런데 지금은 제가 목회하면서 기가 죽었다. 두루뭉실해짐을 보았다. 그래서 지금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고민중이다. 리더십은 주님의 리더십을 따라가야 한다. 주권성과 관계성의 문제를 배워야 한다. 그것이 가장 성경적인 리더십이다. 미국 LA 남가주 사랑의 교회에서 하는 제자훈련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다. 옥한흠 목사는 제자훈련 철학이나 이론과 목회전략에만 간여하고 실제적인 것은 다른 사람들이 한다. 평신도 운동을 가르친다고 하기에 제자 훈련 방법을 가르쳐주는 줄 알고 참석했는데 깜짝 놀랐다. 내 생각에는 만인제사장주의를 가르치고, 사람을 돕는 프로그램과 방법론을 기대하고 갔는데 이것은 5% 정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나머지 90% 이상이 전부 교회론이었다. 평신도에게 권한을 주는 평신도 운동이라는 주제 속에 아주 강력한 교회론이 들어 있었다. 놀라왔다. 말하자면 쌍방 관계 중심, 중앙 집권체제를 지방 자치제로 변형시키는 가운데서도 일방적 리더십에 대해서는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다. 그런데 개혁주의 언약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맞는 점이 있다. 내가 볼 때는 개혁신학적 관점에서 일방성과 쌍방성의 균형을 이루는 실천적인 모델의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미국의 윌로우크릭 처치나 캘리포니아 새들백 처치에 가 보면 역시 마찬가지이다. 전통적 교권주이는 없다. 전통적 일방주의나 권위주의, 중앙집권주이ㅡ는 없다. 거의 관계중심으로 나간다. 현대적 폭발적 성장의 교회는 관계 중심의 모델을 가지고 극대화시킨 교회들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일을 하는 리더들의 모습을 보면 일방적 리더십을 가진 사람들이다. 교회성장에 이런 리더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이런 교회론을 가지고 목사론을 가지고 일해야 한다. 물론 그들은 이런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내가 볼 때 신학적 관점이 있다는 것이다. 옥 목사님은 교회론에서 끝난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얼마든지 더 들어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교회론에서 끝나 버린다. 그런데 훨씬 더 이론적으로 신학적으로 끌고 들어갈 수 있다. 신학적 입장에서 성령론이나 다른 신학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런 운동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 제 신학을 배워서 해야 한다. 그런데 내가 볼 때 답답한 것이 있다. 충분히 개혁주의 안에 오순절 신학을 능가하는 성령론이 있고 그 부분을 커버할 수 있는데 이들이 그 부분까지 터치를 할 힘이 없다. 그런 신학적 식견이 없다. 교회론에서 끝나니까 그렇게 된다. 그런 방식으로 하기에 성령론을 다른 곳에서 빌려와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그런데 신학은 교회론 하나로 설 수 없다. 교회론은 분명히 구원론과 성화론과 성령론과의 결합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교회론 하나로서 독립된 것이 아니다. 교회론을 가지고 제자훈련을 만들었다면 반드시 그 아래에 커다란 신학적 원리가 있다. 내가 볼 때는 충분히 교회론을 뒷받침해 줄 중요한 신학적 명분이 있다. 그런데 이를 터치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를 터치해 줄 수 있는 신학적 명분을 연구하기 위한 시도가 없다. 만일 내게 의뢰를 해 온다면 이 부분을 충분히 보완해 줄 수 있겠는데 안타깝다. 그래서 내가 이 부분을 신학적으로 정리해서 내 놓고자 하는 것이다. 언약적으로 목회를 하고, 언약적으로 신학을 하고, 언약적으로 설교를 하고, 언약적으로 제자 양성을 한다는 것이 새로운 영역이다. 그래서 제가 볼 때는 이 부분에 있어서 처음으로 터치하고 있다. 제 논문 자체가 조직신학을 언약적으로 풀어나가기 위한 시도였기에 제 나름대로 이 부분에 대해서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그래서 성령이 필요하면 오순절에 가고, 다른 것이 필요하면 천주교에 가고 손을 잡아야 성공할 수 있다고 하면 문제가 있다. 이런 것 보다는 다른 대안이 필요하리라 본다. 언약적 관점에서 볼 때 평신도 운동을 하면서도 강력한 리더십이 교회론적 관점에서 왜 필요한지 분명히 신학적으로 주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런 부분에 대해서 제가 터치하고 싶다. 그래서 ‘천주교는 이런 것이 문제이다.’ ‘재세례파는 이것이 문제이다.’라고 한다. 당시 교회론의 관심은 무엇이 정통이고 무엇이 비정통인가를 찾아내는 것이다. 이 시대에 교회론의 핵심은 ‘교회의 표지’ 였다. 교회의 표지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정통과 비정통을 판가름하는 것이다. 이것을 가르는 것이 교회의 끝이라고 믿었다. 더 이상의 것이 없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 시대에 만들어진 교회론이 지금 오늘날에도 적절한가?” 이런 의문을 제시해 보라. 비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많이 비평하면서 이런 의문을 제시한다. 너무 정통 비정통을 따지는 데만 국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는 교회의 표지가 중요했다. 그런 세상에서 형성된 교회론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문 밖에만 나가도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갈려 있다. 오늘은 중세 교회 세상이 아니다. 오히려 거슬러 초대 교회와 같은 분위기이다. 우리가 문 밖에만 나가면 비기독교, 나가면 반 기독교인, 이런 적대적인 분위기에 살고 있다. 그러기에 여기에 맞추어 교회론의 관심사가 달라져야 한다. 그러기에 개혁주의 교회는 지나치게 정적이다. 그 자리에 그냥 앉아 있다. 정통을 구별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그런데 사실상 오늘날 교회는 동적인 교회론을 필요로 하고 있다. 앞으로 나가는 교회이며, 침투해 들어가는 교회가 필요하다. 전도적이고 선교적이며 적극적이며 움직이는 교회론이 필요로 한다. 이것이 개혁주의 입장에서 볼 때 제자 훈련의 명분이다. 동적 교회로 만들어가야 한다. 정적인 교회가 아니라 동적인 교회로 만들어야 한다. 이런 필요에 의해서 사람들이 내린 결론이 오순절과 개혁주의의 연합이다고 본다. 그런 움직임이 앞으로 반드시 가게 되어 있다. 오정현 목사는 한국에 와서 수련회를 인도하면서 이런 강의를 공공연히 한다. 그래서 개혁주의 교회론이 문제가 있으므로 오순절 교회론을 받아 들여야 한다. 그는 신학적 연합을 요구한다. 그는 연합을 원한다. 화합과 조화를 원한다. 그래서 지나치게 성령파로 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신학자인 제가 볼 때 우리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깊이가 약하기에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본다. 구원을 받고도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우리가 정적 기독교가 된 것은 그런 중세적 기독교 세상에서 성령을 받아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사람들이 만든 교회론을 그대로 받아서 배웠다. 벌콮이나 다른 조직신학자에게서 그대로 배워서 행하며 지금도 그래도 배우고 있다. 교회의 표지만 맨날 외쳐가지고 무슨 쓸모가 있나? 오늘의 시대는 나가서 기독교를 대항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에게 나가서 전하고 이겨야 하는데 중세 교회의 표지만 논한다는 것은 한심한 일이다. 이런 논리이다. 그래서 이런 것을 보면서 앞으로 흐름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학자로서 우리신학이 부족하니까 다른 것과 손잡자고 하기보다는 깊이를 모르기에 그렇다고 이해하고 있다. 시대적인 상황에서 만들어진 교회론에 우리가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었다는 주장에 일리가 있다. 타당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또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는 관계중심의 신학, 관계 중심의 영성을 추구해 왔다. 칼빈주의나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관계 중심의 영성을 가진 교회다. 관계 중심의 영성은 일 중심의 영성과 다르다. 전투적 영성은 질서에서 아래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론의 특징상 정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해야 한다. 그 다음에 우리가 오순절파에 가서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하기보다는 우리가 성령이란 누구인가를 안다. 성령은 우리에게 로드십을 주시는 분이시다. 전도나 선교 봉사 등 모든 것이 로드십이라는 큰 흐름 속에서 되어야 한다. 성령론 자체가 우리와 다르다. 성령론이 다르기에 우리에게 없으니 저쪽에 가서 성령을 받고 교회론을 보충하자고 하는 것은 맞지 않다. 관계 중심의 신학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로드십 중심의 성령론을 개발해야 할 필요가 있다. 현실상 교회 부흥은 순복음 교회가 일으켰다. 그리고 제자훈련 하는 사람들이 교회 부흥을 일으켰다. 그러니까 숫자에서 밀린다. 숫자 가지고는 할 말이 없다. 봐라! 이렇게 하며 s된다. 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도 잘 해야 한다. 옥한흠 목사님은 제가 볼 때 언약 신학에서 볼 때 아주 건전하다. 신학만 아니라 목회 현장에 이를 적용해서 부흥을 일으켰다는 것은 아주 좋다. 그런데 교회론에서 그친다. 제가 아쉬운 점은 그 외에 다른 것에도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론의 취약점을 오순절에서 배워야 한다고 하는 대안은 문제가 있다. 제가 주장하는 초점은 성령은 누구이신가? 이를 가지고 말하라. 성령은 로드십을 주신다. 그리고 제사장적 소명에 의한 삶이다. 언약 신학의 두 가지 매력이 이것이다. 의무적 봉사나 전도가 아니다. 제사장적 소명에 의한 삶이다. 제자는 스승을 따라가는 사람이다. 스승은 우리를 위해서 제사장으로 사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그 분은 제사장으로 살다가 제사장으로 가셨다. 가시면서 우리에게 제사장으로 살다가 제사장으로 죽으라고 하신다. 이것이 제자도이다. 무조건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제사장적 삶을 살라는 것이 바로 신학적 명분이다. 제가 보기에 언약 신학적으로 보기에 로드십의 주제와 제사장적 삶의 방향에서 교회론이 훨씬 튼튼해 질 수 있다. 개혁주의 교회론을 비하하고 매도할 필요는 없다. 교회론만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만약 조금 과격한 사람이 말하기를 교회론만이 아니다. 구원론이나 성령론이나 다 그 시대 상황에서 한 것이기에 문제가 있다고 하면서 다 수정해야 한다고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기에 우리가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부족한 교회론이라는 비판에 대해서 매도하는 느낌이 있다. 우리 개혁주의 신학이 무엇인지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발상이라고 본다. 그래서 앞으로 언약적 관점에서 로드십과 제사장적 소명을 강조해서 일방적 하나님의 구원 방식과 관계적 차원에서 목회를 연결해 가는 사람이 나오면 좋겠다. 이를 할 수 있는 목회적 방안을 접목해 보라. 나는 신학적 근거를 제시하고 이 선에서 끝날 것 같다. 누군가가 젊은 세대에서 이런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목회에 적용해 보라. 그렇다면 소망이 있다. 지금 다 이해할 수 없고, 안되면 신학을 수정하는 방향으로 나가 버리면 문제가 있다. 목회자는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신학자는 그럴 수 없다. 뜯어 맞추기 방향으로 나가면 안된다. 옥 한흠 목사는 제자훈련에 성령론이 부족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오정현 목사는 제자훈련에 성령론이 부족하다고 가르친다. 그런 뉘앙스가 부족한다. 예수님의 제자훈련이 그렇다. 제자훈련 마친 후에 성령을 받았다는 주장을 한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개혁주의 신학을 더 연구해서 우리 신학을 다 파헤쳐 본 다음에 정말 답이 없다고 한다면 수용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신학적 노력을 해 보지도 않고 다른 해법을 찾으면 안된다. 솔직히 우리 한국 신학계를 3년 간 지켜 보면서 다 보았다. 총신, 합신, 개신, 고신, Acts 등 뻔하다. 누가 무엇을 가르치는지 다 안다. 신학자들이 보수 신학을 가지고 잘못된 현실에 대해서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제시해 줄 역량을 가진 학자가 없다. 그러기에 오순절 성령을 모시고 와야 한다는 것을 말하면 할 말이 없다. 신학 교수들조차도 더 깊이 연구하고 공부할 필요가 있다. 교수들에게 그런 환경이 필요하다. 교수들이 정치에 관여해야 하니 신학에 몰두할 여유도 없고 어려움이 생긴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답답함을 느낀다. 이 부분에 대해서 제가 추천할 만한 책이 없다. 로버트슨 교수는 성경신학적 입장에서 언약을 개괄적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서론격이다. 깊이 있는 부분, 실제적인 부분들을 터치하지 않는다. 제 논문도 학위 논문이기에 굉장히 테크니컬하게 되어 있지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다루지 못하고 있다. 이번 강의가 아주 중요하다. 이것이 보강되고 이런 운동을 펼치는 중요한 계기가 되길 바란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는데 성경에 근거한 목회와 신학을 해 나가자. 우리 목회를 통해서 귀한 열매를 맺고 주님의 뜻대로 사역하는 목회자가 되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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