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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자료/성경공부

조직신학과 언약신학의 관계

                     I

 먼저 언약신학과 조직신학의 관계성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조직신학에 대한 교육을 배웠는데 언약신학적 관점에서 한 번 풀어서 이해하는 배움의 시간은 갖지 못했을 것이다. 언약신학을 조직신학으로 푸는 것은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조직신학적 접근법을 지양하고, 관계중심적인 조직신학을 배우고자 한다. 어차피 목회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관계,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목회의 핵심인데, 이 관계를 이해하고자 한다. 목회와 영성에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서론적으로 조직신학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고자 한다. 이것이 오리엔테이션이 될 것이다. 그 다음에 언약신학에 대한 구체적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구원에 대한 책이다. 구원에 대한 계시가 담긴 책이다. 조직신학이란 성경적 세계관이다. 성경에는 세계관에 들어 있다. 조직신학을 배운다는 것은 성경적 세계관을 배운다는 것이다. 세계관이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다. 신에 대해서, 인간, 자연, 죽음, 인생, 사후세계에 대해서 바라보는 눈이다. 그래서 조직신학은 성경적 세계관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래서 조직신학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조직신학을 한다는 것은 성경적 세계관을 배운다는 것이고, 조직신학으로 설교한다는 것은 성경적 세계관을 성도들에게 가르친다는 것이다. 
강단에서 하나님이 누구시고, 인간이 누구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를 강단에서 설교로 선포하는 것이 조직신학이다. 전문적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든, 아니든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교회라는 환경, 강단에서 설교는 곧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 설교를 듣고, 성도들은 이 세상에 대한 시각과 안목을 설정하게 된다. 설교는 복음을 선포하는 특수한 의미도 있으나 포괄적 의미에서 볼 때 성경적 세계관을 가르치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너무 신학교에서 어렵게, 철학적 사변적으로 배우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풀기가 어렵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배우기를 어렵게 배워서 그렇다. 강단에서 철학을 말해보아야 소용이 없다. 
그래서 조직신학에 대한 관계 중심의 틀을 세운다면 강단에서 조직신학이 쉽게 전달될 것이다. 개혁주의 영성이 잘 전달될 수 있다고 본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성경은 구원에 관한 책이다. 

성경의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론이다. 조직신학도 구원론이 중심이다. 설교에서도 구원론이 많이 선포된다.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성경 기록의 목적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다. 특수 목적은 구원을 얻고 생명을 얻는 것이다. 광의적 목적은 성경적 세계관을 가르치는 것이다. 구원은 예수 믿고  천국에 가는 것을 넘어서 세계관의 전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구원이란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수용하는 것이다. 인간이 무엇인가? 신은 누구인가? 죽음은 무엇인가? 세상은 무엇인가? 이 모든 것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져다 주는 것이 곧 구원이다. 거듭남이라는 특수한 의미를 넘어서 세계관의 전향이 곧 구원이다. 
구원은 예수가 없는 세상에 살던 사람이 예수가 있는 세상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의미는 우주적 차원의 변화이다. 우주적 차원의 전향이다. 이 세상의 변화이다. 이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서 강단에서 선포하는 구원의 복음이 달라진다. 

  신학이 다르면 세계관이 달라진다. 

세계관이 달라지면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진다. 세계관이 달라지기에 신앙의 칼라, 경건의 유형, 삶의 방식이 달라진다. 인간론, 죄론, 구원론, 성화론이 조금씩 다른 빛깔을 낼 수 밖에 없게 된다. 조직 신학에 따라서 모든 것이 달라진다. 싫든 좋든 누구나 조직신학을 가르칠 수 밖에 없다. 나는 강단에서 조직신학 가르친 적 없다고 말해도 듣는 사람은 설교를 듣고, 성경을 듣고, 어떤 유형의 세계관을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듣는 사람이 나의 설교를 통해서 특정한 세계관을 수용한다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믿음은 무엇인가? 

나로 하여금 믿고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영접하고, 거듭나서 새 삶이 되게 하는 것이다. 영생을 얻고 그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이 구원이고, 이 구원의 선물은 믿음으로 받는다. 특수한 의미에서 그렇다. 그러나 믿음은 그 이상이다. 믿음은 단순한 구원이나 체험 그 이상이다. 거듭남과 체험을 넘어서 새로운 세상, 새로운 가치, 새로운 안목으로 인생을 바라보도록 해 주는  것이다. 이것이 믿는다는 말속에 포함된 포괄적 의미이다. 신에 대해서 무엇을 믿는가? 인간에 대해서, 자연에 대해서, 역사에 대해서, 종말에 대해서, 죽음에 대해서 무엇을 믿는가? 이 모든 것을 포함한 것이 믿음이다. 체험을 포함하여 성경적 기독교적 세계관이 곧 믿음이다. 믿음이라고 다 같은 믿음이 아니다. 
이 모든 내용을 정리해보면 모든 조직신학의 분야를 하나로 꿸 수 있는 안목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꿸 수 있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그 조직신학이 강단에서 파워풀한 메시지로 성도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가 아닌가가 결정된다. 많은 신학도들이 많은 조직신학의 이론을 꿰지 못하기에 사변으로 남게 되고, 설교 강단에서 힘을 쓰지 못한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나름대로 터득한 자기 식의 조직신학을 설명하는 어려운 현실에 봉착하게 된다.
신학은 일종의 소프트웨어와 같다. 소프트 웨어에 따라서 아웃풋이 달라진다. 아무리 좋은 데이터가 들어와도 소프트 웨어가 나쁘면 좋은 out put 이 나올 수 없다. 그런데 내가 볼 때 이제껏, 우리는 아주 좋은 정보(계시, 말씀)를 가지고 제대로 산출을 할 수 없었다. 개혁주의신학은 소프트 웨어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계시를 가지고 관계를 중심으로 풀어낸다. 다른 신학사조들도 나름대로 신학 소프트 웨어를 가지고 성경 계시를 선포한다. 성경이라는 데이터는 같은데 소프트 웨어가 다르기에 결과도 다르다. 같은 성경으로 하나는 칼빈주의를 선포하고, 다른 하나는 민중신학을 가르친다. 왜? 소프트 웨어가 다르기에 그렇다. 

  우리는 이제껏 개혁주의 소프트 웨어를 신학교에서 배우고, 강단에서 써 먹지 못한다. 조직신학이 너무 어렵고, 너무 비싸다. 성도와 거리가 멀다.  그래서 이를 풀어 먹지를 못한다. 이론은 개혁주의로 배우고, 실제는 다른 신학이다. 일관성이 없다. 모든 조직신학은 상반되면 안 된다. 모든 신학 안에 일관성이 있어야 신학이다. 이러한 일관성이 없으면 세계관이 될 수 없다. 어떠한 ‘안목’, 어떠한 ‘관’을 가진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신론과 인간론이 상반되면 안 된다. 인간론과 구원론, 구원론과 기독론, 기독론과 성령론, 성령론과 종말론, 종말론과 교회론이 상반되면 안 된다. 자꾸 조각난 이론이 되기에 꿰어지지 않고 나눠진다. 

  처음에는 이러한 관계 중심의 내 설교를 듣고 성도들이 헷갈린다. 이전의 설교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 설교를 3년 5년, 10년을 듣고 나면 일관성을 느껴야 한다. 관계 중심의 일관된 신학 사상과 세계관이 반복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자꾸 나부터 일관성이 없어지고 헷갈린다면, 이는 내가 조각난 조직신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일관된 조직신학이 없기 없으니 나도 헷갈린다. 성도들은 더 헷갈린다. 그러므로 일관성을 갖도록 노력하라. 조각난 조직신학으로 조각난 설교를 하기에 성도들의 가치관이 조각난다. 
언약신학을 말하기 전에 이런 조직신학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이 필요하기에 설명을 해 보았다. 우리에게 신학의 수준 높은 상태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신학은 완전하지 않다. 신학을 잘 배워서 성경에 충실한 소프트 웨어를 가지고 풀어내야 한다. 다만 여기에 일관성을 가져야 한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이런 일관성이 없으면 복음을 가르치면서 율법을 말하는 우를 범한다. 어느 부분에서는 신본주의를 가르치고, 어느 부분에서는 인본주의를 가르친다. 이 대목에서는 칼빈주의 예정론을 가르치고, 저 대목에서는 알미니안주의를 가르친다. 어디서는 개혁주의 성령론을 가르치고, 어디서는 오순절 성령론을 가르친다. 왜? 개혁주의 조직신학의 체계가 약하기에 그렇다. 
우리 교회가 필라델피아 임마누엘 교회이다. 33년 역사에 천 명 정도 성도가 있다. 부임한 지 1년 반이다. 아직 교회 상황을 잘 모른다. 부흥회를 가졌다. 20여 년 지원한 한 선교사가 있다. 그래서 장로님들이 그 분을 모시고 집회를 갖자고 해서 모임을 가졌다. 이전에 소문을 듣기를 그 분이 다락방에 연루된 적이 있다고 했다. 그 전에는 그러했고, 지금은 아니라고 듣는다. 사전에 내가 선교부 수석 장로에게 부탁하기를 다락방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말도록 주의를 미리 부탁했다. 3년 전에 교회에 다락방 문제로 홍역을 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신학적 논란이 되거나 문제가 되지 않도록 교회에 대한 예의를 부탁했다. 내가 오순절 교회에 가면 개혁주의 성령론을 말하지는 않는다. 신학적 논쟁을 하는 자리가 아니고 강단이기에 예의를 지켜야 한다. 그런데 4일 동안 내내 하는 말이 성령세례를 받으라고 계속 강조한다. 성령세례를 받아야 여러분이 회개하고, 변화되고, 부흥한다고 말한다. ‘이 당회장이 조직신학 박사라고 들었는데...’라고 하면서 나를 가지고 논다. 성도들을 울리고 웃기면서 아주 무례하다. 성령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참 무례하고 문제다. 자기가 믿고 있는 것을 주입시키고, 강제로 구겨 집어넣어야 만족을 느낀다. 참 실망이 컸다. 성령 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이렇게 문제가 된다는 사례를 보았다. 
그러기에 저는 한 주간 언약적 관점에서 일관성을 가지고 조직신학을 풀어가고자 한다. 조직신학을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높은 위치에서 끌어 내려서 관계 중심으로 우리에 친근하게 풀어가 보자. 우리의 조직신학이 어려워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조직신학을 철학자의 논리에 맟추지 말자. 어렵게 느끼는 조직신학을 강단에서 풀어내어 성도들의 세계관을 변화시킬 설교로 만들자. 이것이 앞으로 내 사명이라고 본다. 나는 현재 목회자이지만 신학을 했기에 학자로서 이 문제를 한국 강단에 적용시킬 사명이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전에 3년 간 개혁신학연구원에서 조직신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면서 자료를 모았고, 정리했다. 개혁주의 신학과 영성을 강단에서 회복하는 일을 위해 저서를 출판하고자 준비하고 있다. 이 한 주간의 강의가 곧 저서의 핵심이 될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한국 교회와 강단에 제시하고자 한다. 


                         Ⅱ

개혁주의 조직신학은 언약신학적 관점에서 형성되었다


그래서 언약신학적 특징이 많다. 언약신학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신학이다. 언약신학이 개혁주의 조직신학의 하부구조를 만들어 받쳐주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셨다. 창조는 관계의 출발이다. 이 관계를 깨트리고 하나님을 떠난 것이 죄이다. 그래서 죄는 관계의 상실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속죄는 관계의 회복이다. 성화는 관계의 성장이다. 영광과 종말은 관계의 완성이다. 
 1) 관계의 출발 - 창조
 2) 관계의 상실 - 죄 
 3) 관계의 회복 - 속죄
 4) 관계의 성장 - 성화
 5) 관계의 완성 - 영화
이렇게 5가지 단계로 언약 신학적 관점에서 개혁주의 조직신학을 정리할 수 있다. 

성경에는 관계에 대해서 많은 모티프를 가지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3가지 관계 모티프이다. 부자관계, 부부관계, 왕과 백성의 관계이다. 
탕자의 비유는 부자관계의 비유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 관계의 형성이다. 그런데 탕자가 아버지를 떠난 것은 관계의 상실이다. 돌아온 것은 관계의 회복이다. 돌아와서 자녀로서 살아가는 것은 관계의 성장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모든 축복을 누리는 것이 관계의 완성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는 혼인 메타포어로 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신랑이시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교회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는 그리스도, 그리고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무조건적으로 순종한다. 무조건적인 사랑과 순종이 부부의 관계이듯이 그리스도와 교회가 그렇다.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가 왕과 백성의 관계로 나타난다. 성경의 일관된 언약적 공식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며,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왕으로서 백성들을 책임지시고, 백성들은 왕이신 하나님께 충성을 다한다. 이것이 성경 어디에나 나오는 관계이다.
성경에서 어느 부분을 언급해도 이 세가지 관계를 떠날 수 없다. 하나님은 자신과 우리의 관계를 설명하시면서 가장 알아듣기 쉬운 언어로 설명하셨다. 구원에 대해서 가장 쉬운 비유로 우리에게 가르치셨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내가 너희와 이런 관계를 맺기 원한다. 너희는 이런 관계성 속에서 나를 의지하고 나에게 순종하라고 계시하신다. 이것은 결코 사변적인 것이 아니다. 철학적이거나 어려운 것이 아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무슨 사변적인 것이 필요한다. 실제일 뿐이다. 남편과 아내도 그렇다. 그러기에 구원을 이런 언어로 쉽게 풀어내는 것이 언약신학적 조직신학이다. 

신학에는 해석학적 무게(중심)이라는 것이 있다


신학이라면 어떤 신학이든지간에 이 해석학적 무게( hermeneutical gravity ) 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신학을 이해하려면 이 해석학적 무게를 빨리 알아내야 한다. 소설을 읽어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세세한 부분까지 다 알아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 중심 무게는 알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개혁주의 신학의 해석학적 무게는 바로 ‘관계’라는 것이다. 창조와 새 창조의 구도가 바로 관계성에서 전개되고 있다. 그래서 언약신학의 출발이 바로 관계이다. 
설교에서도 이런 해석학적 무게가 있어야 한다. 설교가 매번 중심이 바뀌어지면 안 된다. 항상 설교의 무게중심은 정해져 있어야 한다. 어떤 목사는 매번 다른 내용을 설교하는데 그 중심이 도덕적 설교가 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은 분명히 복음을 선포하고, 은혜를 선포한다고 하는데도 결국은 도덕적 설교가 되고 만다. 도덕 중심의 신학과 신앙으로 무게중심이 옮아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 본인은 잘 모르지만 그렇게 되는 수가 많다. 또 어떤 이는 기적이 신학적 무게를 차지한다. 무엇을 말하든지 결국은 기적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은 이처럼 기적이나 도덕이 신학적 중심이 될 수는 없다. 잘못된 것이다. 신학적 무게중심, 해석학적 중심이라는 것은 그것을 빼고 나면 신학의 토대 자체가 무너져 버리는 것을 가리킨다. 개혁주의 신학에서 몇 가지를 빼면 신학으로서 토대 자체가 무너져 버리는 것이 있다. 이것이 바로 언약에서 나오는 관계성이다. 
언약이란 단어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 언약은 곧 관계이다. 편하게 쉽게 여기라.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 맺기를 원하신다. 관계성을 빼어 놓으면 개혁주의는 존재하기 어렵다. 만일 관계성을 빼 버리면 이 신학의 운명은 두 가지 뿐이다. 하나는 도덕주의 신학이고, 다른 하나는 초월주의 신학이다. 이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다. 도덕중심이 되든지, 아니면 파워중심이 된다. 도덕은 진정한 복음이 아니다. 파워도 진정한 복음이 아니다. 언약신학은 곧 관계신학이다. 웨민 신앙고백에도 언약의 정의는 그렇게 되어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언약의 정의는 이렇다. “하나님의 자발적인 자기비하(God's voluntary condescension)” 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낮추셔서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에게 오셨다. 그리고 우리와 언약을 맺으시고 관계를 맺길 원하셨다. 이 관계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처음에 아담과 맺은 관계가 아담의 범죄로 인해서 깨어졌기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그 관계를 회복하신 것이다. 이것이 언약의 중심 주제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관계신학이다. 관계신학은 곧 임마누엘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학이고, 곧 임마누엘 신학이다. 팔머 로버트슨 교수의 [계약신학과 그리스도] 라는 책에 보면 언약신학을 임마누엘 신학으로 정의를 내린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기를 비하시킨 것이 언약신학이다. 


빌립보서에 보면 임마누엘의 원리가 나온다. 빌 2:6-8절을 보자.
(빌 2:6-8) “(빌2: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2:7)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2: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여기서 보면 하나님이 친히 자기를 비어서 종의 형체를 가지셨고, 사람과 같이 되셨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특히 7절을 주목하라. “자기를 낮추시고”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기를 낮추셨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기를 비하하신 것이다. 이것이 언약신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요한복음 1장에 언약신학이 잘 나타나 있다.  “(요1: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1: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1: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1;1-3)
요한은 이 구절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셨으며,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심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런데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되셨는가? 14절을 보자.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육신이 되어서 인간이 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거하신다’는 말이 ‘장막을 치셨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거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는 표시로 장막을 치셨고, 거기 거하셨다.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오셔서 장막을 치시고, 죄인과 함께 거하시듯이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직접 오셔서 장막을 치시고 인간과 함께 거하셨다. 이것이 일종의 장막신학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장막신학의 완성이시다. 장막신학의 절정이 여기에 있다. 

언약신학 = 임마누엘 신학 = 장막신학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말씀이 언약의 공식이다. 그런데 이 언약 공식의 성취가 비로소 여기서 다 이뤄진 것이다. 언약의 하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장막을 치시매” 라고 하듯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셨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는 장막의 완성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자기 비하로 이뤄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저 위에 그냥 계신 상태로는 우리와 함께 거하실 수가 없다. 하나님이 저 위에 그냥 계신 상태로는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다. 하나님께서 자기 비하를 통해서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고, 약정을 맺으시고, 우리와 결속하신다. 우리와 영원히 함께 거하기를 바라신다. 
관계적 시각으로 보지 않으면 이 사실은 이해할 수 없다. 혼인 메타포어의 핵심은 무엇인가? 같이 거하는 것, 동거하는 것이다. 같이 잠을 잔다는 것은 그냥 몸만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부부의 연합에는 신비스런 연합이 들어있다. 부부 혼인 메타포어 속에는 신비로운 연합이 포함되어 있다. 부부연합이라는 것은 세상에 둘도 없는 연합이다. 그러기에 신비스런 연합이다. 구원이란 이 세상에 다른 것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하나님과 우리의 신비스런 연합의 관계를 의미한다. 이 관계가 깨어진 상태에서 다시 회복하는 것이 언약의 주제가 된다. 
팔머 로버트슨은 말한다. 관계 중심의 신학을 하면 관계 중심의 영성을 추구하게 되고, 관계 중심적 목회를 추구하게 된다. 개혁주의적 목회나 개혁주의적 영성은 항상 관계 중심적 목회를 추구하는 것이다. 도덕적인 것도 아니고, 파워 중심적인 것도 아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사실이다.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도덕도 아니고 파워도 아니다. 이것은 관계이다. 정말 행복한 부부관계는 관계가 온전한 관계이다. 부부관계가 도덕으로만 이뤄지면 불행이다. 도덕이란 것은 책임과 행위이다. 물론 이것이 부부관계에서 필요하지만 행위와 도덕, 책임이 부부의 모든 것이라면 딱딱하고, 건조하다. 의무만 남는 것이 되고 만다. 행복이 아니다. 파워도 마찬가지이다. 파워로 부부관계를 유지하려 하면 불행해진다. 파워로 부부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면 안된다. 부부는 파워의 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이다. 부부는 인격적인 관계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자 하실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원의 성격을 보여주셨다. 바로 언약적 관계를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기 원하신다. 인간과 관계를 맺기 원하신다. 그런데 인간은 자꾸 관계를 도덕적 측면에서 유지하려 한다. 아니면 파워 중심으로 나가려고 한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 개혁주의 신학을 바로 공부하면, 언약신학을 바로 공부하면 도덕 중심으로 나가지 않는다. 파워 중심으로 나가지도 않는다. 혼인 메타포어나 부자 관계, 왕과 백성의 관계속에서 신앙을 발견해 간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형성한다. 
이처럼 하나님이 내려 오셔서 우리와 관계를 맺으신다. 이를 표현하는 문구로서 팔머 교수는 이런 단어를 사용한다. “하나님이 사람과 연관하여”(in connection with),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with),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between) 일하신다. 일종의 파트너십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 세상을 관리하도록 우리에게 청지기로 세우셨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우리에게 맡기셨다. 이 세상을 관리하고 다스리도록 하셨다. 하나님이 혼자 일하시면 더 빠르고 쉬울 것이다. 하나님이 일을 못하셔서가 아니다. 하나님은 훨씬 더 잘하신다. 그런데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고 우리와 함께 일하시길 원하신다. 그렇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게 하신다. 창조도 그렇고 새창조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고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청지기가 되어서 하나님의 은혜에 동참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봉사의 기회를 주신 것도 마찬가지이다. 영적 파트너십을 갖고 일하시길 바라신다. 물론 파트너십이 50대 50으로 나눈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주도하신다.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관계를 이루시고 이 일을 이루신다. 창조나 새창조가 마찬가지이다. 새창조는 구원이다. 새창조는 첫 창조의 반대가 아니다. 첫 창조의 무효화도 아니다. 첫 창조를 회복하는 것이 새 창조이다. 본래의 의도와 목적대로 회복하는 것이다. 왜 그렇게 이해하는가? 관계 중심으로 보기 때문이다. 새창조가 첫 창조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회복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언약주의적 특성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파트너십은 사람과 연관하여, 사람과 함께,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거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덴을 지으시고, 아담을 만드시고, 아담과 이 언약적 관계를 누리고, 계속하여 그 언약적 관계를 갖기를 원하신다. 사단이 들어와서 유혹하고, 이 관계를 깨트리고 말았다. 이처럼 성경은 이 관계의 시작이 있다는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언약에서는 이 관계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러기에 이 언약적 관계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파트너십을 맺고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이 관계 속으로 들어가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주권을 갖고 계신다. 또 우리는 하나님께 조건없는 순종을 드려야 하는 책임이 있다. 일방성이 전제된 쌍방의 관계가 언약의 관계이다.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일방성이 전제되어 있고, 동시에 쌍방향적인 조건없는 순종을 드리는 것이 바로 언약이다. 이것은 절대로 도덕이 아니다. 언약주의적 신학에서는 순종이 결코 도덕적 관점이 아니다. 언약적 관점에서 보면 순종은 로드십이지, 절대로 도덕이 아니다. 주님의 주권에 대한 자의적인 순종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적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하나님께서 자기 스스로를 비하시켜서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와 거하시고, 함께 일하시기 원하시고, 우리에게 기회 주시기를 원하시고, 그 은혜와 영광에 동참시켜 주시길 원하신다. 이런 은혜와 사랑, 축복에 대한 반응으로 이뤄지는 것이 우리의 순종이다. 다시 말해서 로드십에 대한 순종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언약신학은 관계신학이요, 임마누엘 신학이요, 낮춤의 신학이요, 장막 신학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시오, 우리는 그의 백성이라는 장막신학의 주제가 언약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히 11장을 보고, 대개는 ‘믿음의 장’이라고 부른다. 이를 달리 보면 ‘언약의 장’ 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히 11장은 곧 언약의 계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구원의 약정이 곧 언약인데 구원의 약속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가? 결국은 아벨로부터 시작된다. 다시 말하면 아담부터 시작된 것이다. 창 3장에서 시작된 약속이 그 이후에 계속하여 살아 있고, 효력을 발하고 있다. 그러기에 히 11장은 믿음의 장인 동시에 언약의 장이 되고 있다. 아브라함에게서 언약이 잘 나온다. 피로 맺은 약정은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다. 물론 아담에게서부터도 피로 맺은 약정이 시작된다. 짐승을 잡아서 가죽옷을 입힌 사건에서 이 효시를 볼 수가 있다. 그러나 믿음과 피로 맺은 약정이 같이 결부되어서 나타나는 최초의 모습은 창세기 15장이다. 아브라함에게서부터 이 피로 맺은 언약이 시작된다.   
히 11장을 보면 구약의 모든 선진들이 아담 이후에 하나님의 동일한 구원의 언약 하에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히 11장은 “믿음으로 누구는, 믿음으로 누구는....” 전체가 이렇게 되어 있다. 이 말은 “언약으로 누구는...” 이라고 바꿀 수 있다. 믿음은 선물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약정하시고 주신 선물이다. 그러기에 믿음은 결과이다. 선물이다. 엡 2:8-9절을 보자. “(엡2:8)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2: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구원은 선물이다. 믿음도 선물이다. 이런 점에서 히 11장은 아주 중요하다. 믿음의 장이고, 언약의 장이다.
“믿음으로 아벨은 더 나은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은 피로 맺은 구원을 약정하셨다. 그리고 그것을 이제 아벨을 통해서 에녹을 통해서 노아를 통해서 그 믿음의 계보가 계속되고 있다. 
이제 창세기 15장으로 가 보자. 처음으로 피로 맺은 언약이 나오는 대목이다. 창 3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은 언약이 시작된다. 창 3:15절을 ‘원시복음’이라고 부른다. 복음의 원형이다. 최초로 나온 언약의 모습이다. 그런데 창 3:15절에는 이 복음이 믿음과 연결되어 있지 않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그러기에 복음은 복음인데 ‘원시복음’이라고 부른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그리고 나서 창 15장에 와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에 최초로 피로 맺은 약정이 바로 하나님께서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주신 구원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기에 창 15장이 언약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장이 되고 있다.
창 15장을 보자. 1-1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인정하신다. 그리고 그의 자손과 그들의 자손이 얻을 땅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그리고 고기를 쪼개어 놓고 그 사이로 지나가며,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신다. 17장에 가보면 언약을 하시는데 할례를 통해서 맺으신다. 할례는 사람의 생식기를 잘라 내는 피흘림의 의식이다. 그런데 이 피흘리는 예식을 통해서 자신의 언약을 이루신다. 피흘리심이 없이는 사함도 없다. 이것이 원칙이다. 할례를 통해서도 그렇게 보여주셨고, 유월절 어린 양을 통해서도 피로 맺은 약정에 대해서 보여주고 계신다. 하나님은 피흘리심을 통해서만 구원을 이루신다.
언약의 정의는 팔머 로버트슨 교수의 책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언약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집행하신 피로 맺은 약정이다” 이것이 언약에 대한 간략한 정의이다. 언약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집행하셨는데 이것은 피로 맺어진 약정이다. 

언약의 3요소가 여기서 등장한다. 


1)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집행하셨다

    주권적이란 말은 은혜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자발적으로 내려오셨다. 자신을 낮추시고 우리에게 다가 오셨다. 그렇게 하여서 우리와 관계를 맺어 주셨다. 

2) 피로 맺은 약정이다

    하나님께서 피를 통해서 우리를 속죄하신다. 피라는 것은 무엇인가? 피는 회복을 의미한다. 피는 돌려놓는 역할을 한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기하고 하나님을 떠나가게 했다. 이 떠나감, 관계의 파괴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 죽음은 곧 피를 흘리는 것이다. 피흘림을 통해서 언약의 파괴에 대한 댓가를 치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죽음이란 것도 언약적 죽음이다. 인간의 죽음은 언약 속에서 죽는 것이다. 아담이 언약을 파기한 대가로 죽음이 온 것이다. 이 관계 파괴와 죽음을 돌려 놓는 것이 구원이다. 여기에는 반드시 피가 필요하다. 그래서 피로 맺은 언약이 필요하게 된다. 피는 피인데 짐승의 피로는 안된다. 왜냐 하면 인격대 인격이기 때문이다. 짐승의 피는 불완전하다. 짐승의 피를 아무리 많이 갖다 놓아도 부족하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이다.   

3) 약정이다

    약정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결속시키는 것이다. 약속이기에 서로가 떨어질 수가 없다. 하나님과 인간이 언약에 서로 매이게 된다. 하나님이 스스로 매이신다. 우리도 이 언약에 매여야 한다. 그러므로 이상에서 살펴 본 3가지 요소를 포함해야 언약이다. 


다시 설명하면 언약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있어야 한다. 

언약은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은혜로 주신 것이다. 이 은혜가 빠지면 신학은 완전히 달라진다. 


동시에 피가 필요하다. 

피가 없으면 언약이 될 수 없다. 언약은 회복시키는 것이다. 파괴된 것을 회복하고 죽음을 회복시켜야 한다. 피를 통해서 가능하다. 하나의 인격적 관계를 다른 인격적 관계로 대치시키고, 회복시키는 것이기에 피가 아니고는 회복될 수가 없다. 이 언약은 단순한 언약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문제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에 짐승을 쪼개어서 피를 흘리게 하시고, 그 피흘리고 쪼갠 고기 사이로 하나님의 영광이 지나간다.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것을 강력히 선언한다. 그래서 구약에서 하나님이 “언약을 세운다”고 할 때에 언약을 세우고, 제정하고, 맺으신다는 동사는 히브리어로 ‘카라트’ 이다. 언약은 베리트이다. 그런데 카라트는 쪼갠다는 뜻이다. 언약을 세우는데 쪼갠다는 뜻의 동사를 사용한다. 쪼개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피를 의미한다. 피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피는 회복을 의미한다. 도덕에는 피가 필요 없다. 그러므로 구원은 결코 도덕이 될 수 없다. 피로써 대속의 구원을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피라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을 다른 생명으로 회복시킨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이 첫 창조의 질서를 무시하지 않고, 첫 창조의 질서를 반대하는 방법으로가 아니고, 첫 창조의 질서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래서 한 인격이 실패했을 때에 또 다른 인격으로 우리를 회복시켜 주셨다. 이것이 피가 상징하는 의미이다. 그래서 결코 구원은 도덕이 아닌 것이다. 구원은 도덕적인 것이 아니고 관계적인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가 약정이다. 

약정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약속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스스로 우리를 위해서 묶으신다. 자신이 언약을 하시고 그 약속에 매이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 능력과 신실하심을 가지시고, 약속 안에 들어오신다. 하나님은 자신이 맺으신 언약에서 자신이 벗어나실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 언약안에서 구약과 신약이 하나로 묶어진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보듯이 구약과 신약은 하나의 통일된 하나님의 언약 속에서 묶여진다. 구약과 신약은 서로 다른 이중적 메시지가 아니다. 같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의 언약 속에서, 구약의 성도와 신약의 성도가 만난다. 이 둘이 한 믿음 안에서 모두 하나님과 결속된 하나님의 백성들이요, 그리스도의 신부들이요, 하나님의 종들이다. 그런 점에서 히 11장이 언약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약정의 징표로 주신 것이 바로 성례이다. 구약에서는 유월절이고, 신약에서는 세례와 성찬이다. 우리가 혼인 언약을 할 때에 그 징표로써 반지를 주고 받는다. 언약식에는 서로에게 무엇인가를 주고 받는 식이 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짐승을 쪼개어서 피를 흘리게 하시고, 그 사이로 지나가신다. 하나님이 그러실 필요가 전혀 없으신대도 그렇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짐승을 피흘려 쪼갠 후에 굳이 그 사이로 지나가신다. 또한 유월절 어린 양을 쪼개어서 그 피를 바르게 하신다. 그 피를 보고 지나가게 하신다. 하나님은 그 약정에 대해서 이런 심각성을 보여 주심으로 우리가 쉬운 언어로 알아듣게 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이다. 성례가 이런 것이다. 성례 자체에 신비로운 파워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피를 통해서 약정으로 맺어주셨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와 회복과 관계, 이것이 개혁주의 신학의 기둥이다. 우리 개혁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없으면 다 무너진다. 대속의 피가 없으면 존재할 수가 없다. 피를 통한 대속의 구원이 중심이다. 동시에 은혜가 없으면 무너진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주시는 은혜로 우리는 살아간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주시는 은혜이다. 또한 관계가 중요하다. 관계가 없으면 개혁주의 신학은 그 특성을 잃어버린다. 은혜와 회복과 관계. 이것이 중요하다. 
또한 앞으로는 우리가 개혁주의 조직신학의 각 부분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알아보자. 조직신학의 각 파트를 언약신학의 관점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조직신학에는 여러 파트가 있다. 서론, 신론, 인간론, 구원론, 기독론, 성령론, 교회론, 종말론이다. 이 세 가지 기둥을 통해서 보면 그 파트별로 언약이 신학의 지배적인 중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직신학 서론이 무엇인가? 어떤 특정 신학에는 그 바탕에 깔려 있는 전제가 있다. 이 전제가 성경적으로 타당한가를 판가름하는 것이 서론이다. 서론의 전제가 비성경적인 것이면 조직신학 후반부의 각 장은 다 비성경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 서론은 전부 계시론에서 출발한다. 계시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서 신학의 성격이 판가름난다. 조직신학 서론에서는 계시론이 가장 중요하다. 계시론에서 다루는 것은 계시 인식의 방법과 계시의 진술 방법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시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어떤 방식으로 계시를 이해할 것인가? 꿈으로 이해할 것인가, 사건으로 인식할 것인가? 아니면 도덕으로 인식할 것인가? 우리에게 계시가 오는 방법이 무엇인가? 그래서 계시인식의 방법이 서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꿈으로 오는 것을 계시로 본다면 이것은 꿈의 신학이 된다. 계시 인식의 보편적 방법을 도덕에서 찾으면 도덕신학이 된다. 자유주의 신학의 결론은 도덕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계시론이 도덕적이다. 이들은 성경말씀을 하나님의 계시로 보지 않는다. 자유주의 신학은 계시를 도덕 속에서 찾으려 한다. 이들의 신학은 결국 도덕신학이 된다. 이들은 신앙과 행위와 모든 실천의 근거를 도덕 속에서 찾으려 한다. 자유주의는 도덕과 윤리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자유주의 신학은 사회복음, 도덕신학의 방향으로 나가게 된다. 알고 보면 사실은 그것이 계시론에서 출발하고 있다.
사건을 통해서 계시를 바라보면 어떻게 되는가? 신정통주의 계시론은 사건적 계시론이다. 계시가 사건(event)을 통해서 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건을 해석하는 것이 계시이다. 이들에게는 어떤 사건이 있다고 할 때에 그 이벤트를 내가 해석하면 그것이 곧 신학이 된다. 
이와 같이 계시 인식의 방법과 그 인식한 계시의 진술 방법이 곧 서론이다. 인식한 계시를 진술한다는 것은 어떤 명제로 만드는 작업이다. ‘신은 이런 존재이다’, ‘인간은 이런 존재이다’, ‘구원은 이것이다’, ‘죽음은 이것이다’ 라는 명제로 만들어야 한다. 다양한 주제들을 명제화해야 신학이 되는 것이다. 명제는 어디에서 오는가? 계시에서 온다. 신이 누구인가? 이 명제에 대해서 계시를 통해서 안다. 우리는 성경이라는 계시를 통해서 신에 대해서 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신에 대해서 배우고, 그렇게 해서 생겨난 명제들이 우리의 신론이 된다. 그러나 기록된 말씀을 계시로 생각하지 않으면 다른 방법을 통해서 우리가 계시를 받아야 한다. 이런 계시를 통해서 신학적 체계를 만들게 된다. 그래서 계시론이 신학의 바탕이다. 조직신학 서론에서는 계시론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신학 서론을 가장 먼저 배운다. 신이 누구인가, 죄가 무엇인가, 인간이 누구인가 등은 계시론에서 나온다. 그래서 서론이 가장 중요하다. 서론을 무시하고 쉽게 신론으로 뛰어 들거나, 인간론, 성령론을 뛰어 들면 계시가 빈약하고, 나름대로 만들어 낸 ‘개똥 신학’이 되고 만다. 계시 인식과 계시 진술의 방법이 가장 우선적으로 다뤄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머지 다른 모든 개별적 교리들은 이 계시에서 유추되고 있다. 

어떤 특정 신학의 교리들은 이미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식과 진술 방법에 대한 문제들을 어떤 식으로든지 이미 결정된 것으로 전제하고 배우는 것이다. 감리교 신학에서 신학을 배운다면 이미 이들 신학은 감리교 신학이 가지고 있는 계시론을 전제하고 배우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 안에 들어가며 그 속에서 신론, 기독론, 구원론을 배울 수 밖에 없다. 어떤 신학적 서론과 전제를 가지고 신학을 하느냐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배우게 된다. 
그렇다면 언약 신학은 왜 개혁주의 조직 신학에 들어와야 하는가? 그 이유는 개혁주의 조직신학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라고 인정하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명제는 계시론적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보편적 계시의 방법은 꿈도 아니고, 사건도 아니고, 도덕성도 아니고, 실존도 아니고, 우리의 감성도 아니고, 종교적 본능도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편적으로 계시하시는 방법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언어적 계시로, 구두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두로 약정하셨다. 이처럼 계시론적인 의미를 갖는다. God speaks our language.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언어로, 구두로 우리에게 구원을 약속하셨다. 이것이 언약이다. 계약이란 말보다 언약이란 용어가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더 적합한 언어이다. 계약이란 표현에는 계시론적 의미가 약하다.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계약이란 용어가 더 많이 쓰인다. 팔머 로버트슨의 책에 보면 전부 계약이란 단어로 번역되었다. 그런데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언약이란 표현이 더 적합하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계시론이 나온다. 언약신학은 하나님이 구두로 말씀하시는 계시에서 출발한다. 언약신학은 말씀신학(Theology of the Word) 이다. 말씀 제일의 신학이다. 

이 ‘언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하나님의 주권성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은혜를 주시는 일방성이 들어 있다. 반면 ‘계약’이란 용어는 쌍방성이 강한 용어이다. 하나님과 우리가 50대 50 으로 계약을 맺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하나님이 우리와 똑같은 조건에서 계약을 맺으실 수가 있는가? 이것은 너무한 것이다. 계약은 contract 이다. 이 표현은 조금 안 맞는다. 언약이란 표현은 covenant 이다. co 는 ‘같이’ 라는 의미이고, venant 는 ‘간다’ 라는 의미이다. 즉 언약이란 ‘함께 간다, 같이 간다’ 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말씀하심으로써 언약을 주시고 그 언약을 따라서 자기 백성과 함께 가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임하셔서, 자기 계시를 주시되 말씀을 통해서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어적인 자기계시가 언약이란 단어 속에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조직신학의 서론적 관점에서 볼 때 언약이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팔머 로버트슨은 이런 말을 한다. “성경에서 모든 하나님의 언약이 성립되는 근본 구성요소는 세워진 약정의 성격이 구두 선언이라는 점이다” 모든 하나님의 언약이 성립되는 근본 구성요소는 약정의 성격이 구두 선언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명제이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우리에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 신학의 대 기본 전제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런데 자유주의 신학이나 현대신학은 그렇지 않다. 이들이 개혁주의 신학을 공격하는 가장 주된 대상은 계시론이다. 자유주의자들이나 현대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언어로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이들은 계시의 과정과 계시의 진술 과정에 인간이 개입했다고 말한다. 인간이 개입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뜻과 상관없이 주관적으로 자기의 뜻을 개입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계시가 변질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이나 현대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언어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하나님이 초월적인 하나님이시고, 주권적인 하나님이시라면 계시도 초월적으로 와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인간의 주관적인 생각이나 의지가 전혀 투입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질 것이라고 전제한다. 이런 전제를 놓고 신학을 출발하기에 결과적으로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실존주의 신학, 도덕신학, 신비주의 신학이 나오게 된다.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것인가, 계시를 어떻게 수납하고,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진술할 것인가가 안되니까 실존주의, 도덕신학, 신비주의 영성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말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실존을 추구하거나 신비를 추구하거나 도덕적 신앙을 추구하게 되는 이유는 계시론에서부터 문제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분명히 우리가 알 수 있는 언어로 주어졌다. 이 사실은 신학의 대 전제이다. 가장 중요한 기본이다. 물론 성경에 기록된 것 외에도 우리가 모르는 것이 많다. 하나님은 말씀 안에만 갇혀 있는 분은 아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초월적인 하나님이시기에 말씀 외에도 더 많은 부분이 있다. 이를 인정하여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타내 주신 부분 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다. 개혁주의 신학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데에는 성경의 계시로 충분하다. 부족함이 없다. 왜 그러한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어떻게 부족할 수 있는가? 하나님에 대한 전체적인 계시나 포괄적인 계시는 아니지만 충분한 계시인 것은 분명하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기로 작정한 것에는 부족함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개혁주의 신학이다. 개혁주의 계시론의 출발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전제이다. 개혁주의를 현대신학이나 자유주의 신학과 가장 분명히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 계시론이다. 구원론이나 다른 파트에 가서 논쟁을 벌이려고 하면 복잡해진다. 전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해야 쉬워진다. 우리가 누구와 신학 논쟁을 하고자 한다면 서론으로 데리고 가보라. 상대방의 계시의 수납 방법과 계시의 진술 방법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라. 그렇게 해야 신학의 차이점이 분명해진다. 그렇지 않고 성령론이나 기타 다른 것으로 논쟁을 벌이려고 하면 문제가 된다. 

신론을 살펴보자.


신론에서 가장 이슈가 되는 부분은 하나님의 성품이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하나님의 내재성(인격성) 두 가지를 균형있게 살펴보는 것이 신론에서 가장 어려운 작업이다. 하나님은 초월적인 분이시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다. 하나님은 내재적인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동거하신다.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거하기를 원하신다. 우리와 관계 맺기를 원하신다. 그러기에 인격적인 존재이시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두 가지를 조화롭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것이 가장 어렵다. 지나치게 초월성으로 가면 인격성을 무시하게 된다. 지나치게 초월성을 강조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약해진다. 파워로 나가게 된다. 파워 영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을 보면 인격성이나 관계성이 약해진다. 반대로 하나님의 내재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신학이 도덕쪽으로 나가고 만다. 도덕의 한계에 갇히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초월적인 분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 성령으로 거듭난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다. 성령을 의지해서 죄를 대항해서 싸우고 승리한다. 전부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 

신론을 개혁주의 입장에서 이해하고자 할 때 관계적 입장에서 풀지 않으면 지나치게 초월적이거나 지나치게 내재적이 되고 만다. 지나치게 파워중심으로 나가든지, 아니면 지나치게 도덕중심으로 나가게 된다. 우리의 영성이 왜곡된다. 파워 영성은 초월적인 것을 너무 추구하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이나 순종의 과정이 약해진다. 그냥 파워를 받아서 점프해 버린다. 이것은 아주 조심해야 한다. 물론 능력을 받고 파워를 얻는 것도 필요하지만 능력을 받는 것에만 중심을 두면 순종의 과정, 성화의 과정, 로드십을 닮아가는 과정을 무시한다. 자꾸 자연적 질서를 뛰어 넘고자만 한다. 그러다 보면 인격적 관계가 약화될 수 밖에 없다. 

우리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에 가장 충실한 신학이다. 그렇기에 이 개혁주의 신학이 연구하기가 가장 어렵다. 신학은 신론에서 판가름나는데 초월주의적 하나님만 보는 것이 아니고, 내재적인 하나님만 보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두 가지 성품을 다 갖고 계시는 분이시고, 성경에서는 이 두 가지 모습을 다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는 두 성품을 다 이해하고 설명해야 한다. 초월적이고 무한하신 하나님은 동시에 우리에게 내려 오셔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가장 쉬운 언어로 자신을 알리시고 우리와 인격적 관계를 맺기 원하신다. 부자 메타포어, 부부 메타포어, 왕과 백성의 메타포어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와 그런 관계를 맺기 원하심을 보여주셨다. 

위 세 가지 메타포어 중에서 혼인 메타포어가 가장 중요하다. 왜냐 하면 이 부부 메타포어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이 관계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이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설명해 줄 수 있는 관계는 도덕도, 파워도 아니다. 남편이 도덕적으로 의무적으로만 아내와 관계를 맺는다면 얼마나 딱딱한가? 예를 들어서 10가지 남편의 수칙을 정했다고 하자. 그리고 그것만 다 지킨다면 나는 아내에게 내 의무를 다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다. 부부관계는 행위적인 것 그 이상의 것이다. 도덕적인 것, 그 이상의 관계이다. 그렇다고 파워로써 맺어질 수도 없는 것이다. 부부의 행복이나 사랑은 명예나 돈과 같은 그 파워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을 가졌다고 해서 이것으로 상대방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 물론 부자간의 관계에서도 이 사실이 드러나지만 부부관계에서 가장 잘 드러내 준다. 그래서 혼인 메타포어가 언약적으로 가장 적합한 설명을 해 준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관계는 도덕적 관계도, 파워의 관계도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은 남편이시고 우리는 아내이며, 그리스도는 신랑이시고 우리는 신부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이 언약적 관계를 가장 귀하게 여기시고 계신다. 
이처럼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균형있게 말하는 것이 개혁주의 신학의 신론이다. 하나님의 무한성, 초월성을 부정하는 것이 범신론적 신학이다. 그래서 범신론적 신학에서는 믿음을 도덕으로 격하시킨다. 우리가 도덕적 영성만을 추구하고 있으면서 개혁주의 신학을 한다고 하면 안된다. 반면에 우리가 하나님과의 모든 인격적 관계를 무시하고, 모든 것을 파워로 해결하려고 하는 경우도 개혁주의 신학이 아니다. 이들은 자꾸 질서를 무시하고 비약적인 과정으로 영성을 추구하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 파워 영성을 말하는 사람들은 초월주의 신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정하시고, 주권적으로 택정하시고, 주권적 섭리를 통해서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인도하신다. 반면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만나주신다.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 안에서 인격적으로 관계하시고, 관여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격성이다. 

양극에 속하는 도덕주의와 초월주의는 서로 통하는 것이다. 언약이라는 것은 관계이다. 이 관계는 도덕으로도 충족시킬 수 없고, 파워로도 충족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도덕과 초월은 양극이지만 서로 통한다. 도덕과 신비도 양극이지만 서로 통한다. 얼른 겉으로 보면 안 통할 것 같은데 사실은 서로 깊이 통한다.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공통점이 있는가? 인격적 관계를 무시하는 부분에서 통한다. 더 깊이 보면 이기주의에서 서로 통한다. 둘 다 자기 중심적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맺기 원하시는 관계는 자기 중심적인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자기 중심으로 모든 것을 하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도덕이나 파워는 언약적 관계의 변질된 모습이다. 도덕으로 관계를 맺기 원하고, 파워로 관계 맺기를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본래 맺기를 원하는 것의 변태이다. 

실제로는 이 둘 다 모두 자기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도덕이라는 것은 자기가 무엇인가를 행함으로써 그 행위와 도덕으로써 인정을 받고자 하는 것이다. 반면에 파워는 자기가 무슨 능력을 받아서 그 능력을 행사함으로써 인정을 받고자 하는 것이다. 하나는 도덕적이고, 다른 하나는 신비적인 것이지만 알고 보면 자기 중심이라는 뿌리가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관계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죄라는 것은 진리를 변질시키는 것이다. 진리의 변태적인 모습이 죄이다. 완전히 다른 새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의 본성 속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는 마음이 인간에게 있다. 이것이 죄로 인해서 변태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도덕이고, 파워이다. 도덕적으로 선행을 행해서 나의 의를 증명해 보고 싶어한다. 내가 능력을 받아서 그 파워로 나의 의를 증명해 보고 싶어한다. 둘 다 마찬가지이다. 파워영성과 도덕 영성은 뿌리가 같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는 변태적인 모습이다. 언약적 영성의 변태적인 모습이다. 이것이 신론에서 출발한다.

모든 신학은 계시론에서 일차 갈라진다. 두 번째로 갈라지는 것이 신론이다. 계시를 어떻게 받고, 진술할 것인가에서 나뉘어진다. 또한 신에 대한 정의에서 우리와 신의 관계가 결정된다. 신과 나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따라서 모든 것이 달라진다. 신과의 관계를 맺으려면 신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계시를 통해서 신에 대해서 알았는데 이 신이 초월적 신이냐, 인격적 신이냐를 결정하고, 그 결정에 따라서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인간이 참 복잡한 존재이다. 도덕적 선행으로 신과 관계를 맺을 것인가, 아니면 파워적 능력을 통해서 신과 관계를 맺을 것인가? 신을 기쁘게 하는 길이 과연 무엇인가를 놓고 고민한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신이 파워 중심이냐 아니면 도덕 중심이냐를 놓고 자신이 먼저 결정해 버린다. 그리고 나서 그런 결정에 따라서 관계를 형성해 버린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도덕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파워 중심으로 볼 것인가를 놓고 결국은 결정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결정은 목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또한 평소에 성도들에게 어떤 영성을 가르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신학의 무게 중심, 신앙의 방향성을 가져야 한다. 교회 성도들에게 예배와 교육, 성경 공부 등을 통해서 이런 무게 중심에 대해서 가르치고, 훈련해 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육 철학이 없이 교육을 시키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서 한 기업인이 공장을 운영하고 물건을 생산해 나간다고 해보자. 그가 최종적으로 산출되는 제품을 어떤 제품으로 만들 것이며, 어떤 목표 가운데 기업을 운영하는가를 설정해 놓지 않고 나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목회자도 도덕 중심의 목회냐, 파워 중심의 목회냐, 아니면 관계 중심의 목회냐를 놓고 결국은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신자들을 어떤 신자로 키울 것인가, 신자상에 대한 분명한 노선 결정이 있어야 한다. 어떻게 하다 보면 이런 사람, 저런 사람도 나오겠지 하면서 막연하게 목회 철학을 가지거나 모호한 방향성을 가지면 안 된다. 개혁주의 목회와 개혁주의 영성을 가진 목회자라면 개혁주의에 맞는 성도들을 양성해 내야 한다. 
신론에서 또 하나 중요한 신학적 주제는 삼위일체론이다. 


삼위일체의 정의는 3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1) 하나님은 세 인격체로 존재하신다(God is three persons). 

2) 각 인격은 온전한 하나님이시다(Each person is three God). 

3)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There is one God). 

이상이 삼위일체의 정의이다. 

성경적으로 삼위일체를 설명해 보면 두 가지 접근 방법이 가능하다. 하나는 인식론적 접근방법이다. 아버지를 알기 위해서는 아들을 알아야 하고, 아들을 알기 위해서는 성령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인식론적 삼위일체론이다. 아들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는 말씀을 통해서 아들을 알게 된다. 성경이 말하는 삼위일체 인식의 접근방법이다. 성경에서는 삼위일체를 증명하라고 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삼위일체를 설명해 줄 뿐이다. 어느 한 분이 없이는 다른 분을 알 수 없다. 아들을 보면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된다. 말씀을 통해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된다. 여기서 중심은 아들이다. 아들을 보고 아버지를 안다. 아들을 보여주는 자가 성령이시다. 기독론적 삼위일체를 말씀하고 있다. 
두 번 째 삼위일체 접근방법은 구원론적 접근방법이다. 성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우리를 택정하셨다. 이와 같이 구원은 택정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성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속죄하셨다. 우리를 위해서 피흘려 주셨다. 또한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다. 이처럼 구원론적 관점에서 볼 때 어느 한 분 하나님만 빠져도 구원이 일어날 수 없다. 성령이 거듭나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성자가 우리를 위해 속죄해 주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성부 하나님이 우리를 택정해 주지 않으시면 구원이 있을 수 없다. 삼위일체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구원론적 관점에서 설명해 주고 계신다. 그런데 여기서도 중심은 아들이다. 성부가 우리를 택정하신 것은 아들 안에서 구원하시고자 택정해 주신 것이다. 성령 하나님도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되 아들 안에서 거듭나게 하신다. 성부, 성자, 성령의 구원 사역이 아들 중심으로 되어 있다. 

이상을 볼 때 성경은 삼위일체를 모두 기독론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인식론적으로 보아도 그렇고, 구원론적으로 보아도 그렇다. 성경은 삼위일체를 철학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 성경에서의 삼위일체는 기독론적 삼위일체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그 아들은 누구이신가? 그 아들은 사람의 모양을 입고서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자기를 비우시고 이 땅에 오셨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시다. 바로 언약적 하나님이시다. 그 아들은 스스로 자기를 낮추시고 종의 형체로 낮추셔서 우리에게 오셔서 장막을 치시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시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일체 하나님은 이처럼 임마누엘 하나님으로서 아들 중심으로 이뤄져 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성경적으로 하고자 할 때 언약적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삼위일체이다. 성경이 접근하는 방식대로 접근하는 것이 제일 좋다. 성경이 증명하지 않는 것을 우리가 증명하려고 하면 그것은 어리식은 시도가 된다. 반면 성경이 증명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증명하려 하지 않으면 이것도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는 항상 성경이 가는 곳까지 가고, 성경이 머무는 데서 머물러야 한다. 앞에서도 언급한 대로 언약신학은 말씀 신학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방법은 사건도 아니고, 도덕도 아니고, 실존도 아니고, 신비도 아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곳까지만 가야 한다. 성경이 삼위일체에 대해서 기독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기독론의 핵심은 임마누엘이시다. 우리에게 오셔서 장막을 치시고,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 되시며,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된다는 언약의 실행이다. 이 언약적 관점이 삼위일체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신론의 중심이 이 언약사상이 중심에 있는 기독론적 삼위일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론은 결코 사변적으로나 철학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 언약적 관점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서 이해해 나가야 한다. 이런 부분들을 생각할 때 조직신학은 언약적 관점이 구원론적으로 볼 때 우리에게 얼마나 밀접한 관련이 있는가를 알게 된다. 구원론이 신학의 중심이다. 모든 것은 구원론적 관점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항상 모든 신학은 구원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구원론이 신학의 중심부이다. 구원을 위한 것이 되려면 모든 신학 분야에서 언약적 관점을 견지해야만 한다. 언약 중심으로 구원론을 이해하고, 언약 중심으로 신론을 이해하고, 언약 중심으로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한다. 모든 신학의 중심은 언약 중심으로 이해를 해야 한다.      
  
                               

어제는 언약 신학에 대해서 개괄적 강의를 했다. 언약 개념의 정의를 말했다. 언약개념이 개혁주의 신학과 조직신학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말했다. 부분적으로 조직신학의 신론과 전반에 대해서 언약의 개념에 대해서 말했다. 

오늘은 칼빈과 루터에 대한 말을 하고자 한다. 

칼빈과 루터는 언약에 대한 반응이 달랐다. 언약에 대한 반응이 첨예한 대립 양상을 보이고 있다. 언약에 대해서 루터와 칼빈의 반응은 아주 다르다. 이것이 루터신학과 칼빈신학, 개혁신학과 사이를 갈랐다. 두 사람의 언약 반응이 다르다. 루터는 배경이 중세의 카톨릭신학이었다. 루터는 중세 신학을 배경으로 종교개혁을 시작했다. 이를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중세 신학은 한 마디로 성례신학이다. 모든 것이 교호에서 집행하는 성례에 집중되어 있다. 성례에 엄청난 프리미엄을 준다. 성례에 대한 집착이 강력한 교권주의로 나타난다. 강력한 사제주의가 발생한다. 사제들의 권한은 절대 권한이다.
성례신학 - 교권주의 - 사제주의 : 이것이 중세 신학의 패러다임이다. 
성례신학의 핵심은? 라틴어로 한 마디로 표현하면 문구가 그렇다. 엑스 아포리 아포라토, 영어로 표현하면 because of work done 이다. 성례를 베푸는 행위 자체에 효력이 있다. 사제가 성례를 집행하는 집행 행위 자체에 영적 효력이 있다. “행위 자체” 라는 단어에 중요한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사제들이 성례를 베푸는 행위 자체로 은혜가 주입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온다. 행위 자체라는 것을 중시한다. 이것의 반작용이 루터의 신학이다. 루터의 신학은 중세의 성례신학의 반작용이다. 그런데 성례라는 것은 언약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할례와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뿌림으로서 죄를 속죄받는 것이었다. 성례는 언약공동체 안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할례 받음으로 언약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중세의 성례신학은 언약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성례 자체가, 성찬이나 세례나 모두 언약에서 도출된 것이다. 
그런데 루터는 이 언약에 대해서 부정적 반응을 보인 이유는? 중세에 사제들이 성례 행위 자체로 영적 효력을 말하고, 성례 베풀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진다는 것을 보장한다(개런티된다) 는 것을 거부한다. 언약이라는 것이 문제가 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방향으로 나간다고 말한다. 루터의 입장은 거대한 중세 교회를 바라 보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이 루터의 입장이다. 성례 행위 자체로 은혜가 보장된다는 것은 주술을 통해 행위를 통해서 은혜가 온다는 것과 같다. 그러면 하나님은 인간에 속박된 분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래서 루터는 언약을 거부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대해서 책임을 지셔야 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 그는 언약에 대한 개념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중세 성례 신학의 부작용에 대해서 너무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는 이것이 율법주의라고 보았다. 율법주의는 선행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종교적 행위를 통해서도 올 수 있다. 성례 자체만으로 은혜가 보장된다면 이런 언약은 율법주의의 기초가 된다.
루터의 언약에 대한 진단은 잘못되었다. 중세 신학은 반 펠라기우스적 입장이 주류였다. 펠라기우스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신학을 반 펠라기우스적 신학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은혜 반절, 인간의 노력 절반이 합해져서 된 것이다. 펠라기우스는 은혜 자체를 부정한다. 인간의 의지로 인간은 언제든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이 논쟁을 벌였다. 중세에 펠라기우스 영향을 받고 생긴 것이 반 펠라기우스적이다. 로마 카톨릭의 구원관은 반 펠라기우스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후에 알미니안주의가 된다. 
하나님의 은혜 절반, 인간의 행위 절반이 섞인 것이다. 은총과 자연이 합해져야 한다. 
은총 (Grace) + 자연(Nature) = 구원. 

루터의 실수는 이것이다. 세상이 중세의 교권주의의 지배하에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루터는 언약의 참 의미를 아는 데에 실패했다. 이런 입장이 루터의 입장이다. 
루터는 무엇을 주장하는가? 하나님의 자유를 강조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책임을 진다는 것이 문제이다. 하나님은 자유로운 분이다. 하나님은 은혜를 줄 사람에게 주신다. 인간이 무엇을 행했다고 은혜를 준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현대 신학자들이 이런 루터의 신학을 이용해서 다른 신학을 강조한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절대 타자성을 강조한다. 바르트의 계시론은 하나님의 자유에 근거한 계시론이다.하나님의 계시는 절대 자유성이다. 인간의 언어에 묶이지 않는다. 인간의 언어가 하나님의 계시에 영향을 준다.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의 언어로 되어 있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바르트는 이 개혁주의 계시론을 공격한다. 하나님이 인간의 언어로 조정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문제이다. 바르트는 계시를 하나님의 자유에서 시작하는데 이 자유는 루터신학에서 시작된 것이다. 바르트는 진정한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자유, 하나님의 타자성이다. 그러면서 개혁주의, 보수주의의 계시론을 공격한다. 그런데 개혁주의는 계시를 공격하고 무너지면 다 무너진다. 성경이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기에  하나님이 묶였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셔서 스스로 묶이셨는가?
하나님은 인격적 존재로 오셔서 우리의 말로 우리의 언어로 자신을 계시하셨다. 이것이 개혁주의의 언약 개념이다. 반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속박되었다고 한다면 아니다. 관점에 따라서 달라진다. 계시론은 언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런데 이를 우리가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첫째로, 루터는 하나님의 자유를 말할 때 계시론적으로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루터는 전혀 그런 뜻이 없는데 칼 바르트가 그렇게 해석을 나름대로 한 것이다. 루터가 의도한 것은 전혀 계시론적인 것이 아니다. 현대 신학자 바르트가 그렇게 해석하여 버린 것이다. 
우리가 이를 알아야 현대 신학자들과 루터의 연계성을 끊어 버려야 한다. 루터는 개신교의 창설자이다. 그런데 그가 이런 것을 시작했다고 하면 우리가 할 말이 없어진다. 루터는 시대적 배경에서 이렇게 말한 것이지 그의 의도가 이것은 아니다. 

칼빈은 어떠한가? 칼빈은 언약을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책임으로 푼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게 푼다면 루터의 말이 맞을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인격성에 초점을 두고 풀었다. 하나님은 초월적인 분이시고 내재적인 분이시다.무한하시고 자유로우시며 타자성을 가진 분이다. 인간과 다른 분이시다. 주권적이시다. 그러나 그가 우리에게 오셔서 장막을 치신다. 장막신학이 언약신학이다. 계시록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장막을 치시는 것이 나온다. 계시록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신다는 것이다. 

계 21:3-5 “(계21:3)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계21:4)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21:5)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에덴에서부터 하나님은 장막을 치시고 함께 하신다. 광야에서 장막을 치시고 우리와 함게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장막을 치시고 우리와 함게 하신다. 이것이 완성되는 것이 구원이다. 이것이 장막신학이고 언약신학이다.
칼빈은 하나님이 인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율법주의적 차원에서 언약을 본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보았다.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하시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인간과 관계 맺으신다. 언약 신학에서 인격성이 핵심이다. 인격은 책임이나 의무가 아니라 security 이다. 안전 보호의 개념이다. 언약은 안전 개념이다. 

언약 메타포어에 보면 안전 개념이 중심이다. 혼인 언약을 보라. 남녀가 부부가 되어서 가정을 이루는 것은 의무나 책임의 개념이 아니다. 안전과 보호를 위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데 이를 루터는 책임과 의무로만 본다. 결혼을 율법적으로만 보는 사람이 있는가? 이러면 불행해진다. 이혼하는 사람이 있는가? 그가 율법적 관점에서 보고, 언약적 관점에서 보지 봇한다. 결혼을 의무로 본다면 얼마 못 간다.
부자 메타포어를 보라. 관계이다. 안전과 보호 개념이다. 탕자를 아버지가 기다린다. 아버지가 아들을 보호한다. 회복한다.

왕과 신하도 그렇다. 왕은 백성을 보호한다. 그리고 백성은 왕에게 충성한다. 
이런 모든 메타포어가 다 관계이고, 언약 메타포어이다. 칼빈은 모든 언약을 이렇게 관계 측면에서 보았다. 루터는 이를 보지 못한 것이다. 왜? 칼빈이 똑똑해서가 아니다. 칼빈은 개혁의 후세대 사람이다. 루터는 혁명가이다. 칼빈은 이론가이다. 루터의 책은 힘이 더 철철 넘친다. 힘이 빠지고 지치고 우울하면 루터의 책을 읽으라. 반면 칼빈은 이론적이고 딱딱하다. 만일 목회하다가 너무 동력적이고 붕 뜨면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읽으라. 루터의 기질을 가진 사람은 칼빈을 좋아하게 된다. 나는 칼빈 기질이기에 루터의 책을 좋아한다. 그래서 혁명적 개혁적 일을 필요로 하는 환경에서는 루터같은 이가 더 성공적일 것이다. 그러나 후에 이론을 전개하고 체계를 만드는 환경에서는 칼빈같은 이가 성공한다(@@@). 

칼빈은 루터와 달리 좀더 객관성을 가진다. 칼빈은 생각해 보면서 개혁은 좋은데 언약 개념조차 버릴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안다. 중세 교회가 언약 개념을 성례로 바꾸면서 펠라기우스적으로 이해한 것이 문제이다. 언약은 의무가 아니라 안전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장막을 치시고 관계 맺기를 원하신다. 성례는 율법주의도, 도덕주의도 아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한 방편이다. 그래서 그는 성례신학을 지양하기 위해서 말씀을 강조한다. 말씀을 성례보다 더 앞세우므로써 언약신학을 세우고자 한다. 

교회의 표지 - 말씀과 성례와 권징이다. - 말씀이 성례보다 앞선다. 중세는 아니다. 성례가 말씀을 앞선다. 칼빈은 순서를 바꾼다. 성례 신학을 말씀 신학으로 바꾼다. 성례는 믿음의 동인이 아니다. 믿음의 결과로 나타나는 표시이다. 믿음은 말씀을 들음으로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은 성례보다 앞서야 한다. 칼빈에 의해서 말씀 신학이 성례 신학을 앞서게 된다. 
칼빈은 하나님의 자유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유에 대해서는 칼빈도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다만 칼빈은 하나님의 자유에다가 하나님의 약정을 포함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고, 초월적인 분이시지만 우리와 관계를 맺으신다. 
언약의 개념 =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피로 맺은 약정. 

주권과 약정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하나님의 내재성이 같이 간다. 동반된다. 이것이 진정한 구원이다. 칼빈은 시계추를 중앙으로 가져온다. 루터는 극단적으로 자유로 몰고 간다. 칼빈은 언약을 통해서 균형을 잡는다. 하나님은 언약을 맺으시고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 성례는 결코 말씀보다 위에 설 수 없다. 중세는 약정을 너무 강조한다. 그래서 약정을 오용해서 성례를 집행하는 행위 자체에 자동적인 효력이 있다고 만들었기에 문제가 된 것이다. 
칼빈 신학과 루터 신학의 근본적 차이점이다. 언약 신학의 개념에서 달라진다. 다른 차이도 있으나 이것이 근본이다. 은혜의 보장성이 문제였다. 

하나님의 타자성을 주장했기에 칼 바르트의 눈에는 그가 다르게 보인다. 현대 신학자들이 그렇게 보수주의 신학을 매도한다. 우리와 천주교가 다를 것이 별반 없다고 한다. 인간이 별로 안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보장되어 있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 그러나 사실은 아니다. 칼빈이 말한 것을 보아야 한다. 언약은 성경적 계시이기에 이것을 구현해야 한다. 
천주교 - 언약을 하나님의 책임을 돌려서 율법주의로 만든다.
루터교 - 반작용으로 언약 개념을 아예 포기한다. 쓸모 없는 것으로 단정한다. 언약이 빠지니 자연히 빠지는 것이 있다. 균형을 잃으면 상실하는 것이 있다. 언약을 포기하고 언약과의 단절로 인해서 하나님의 타자성, 하나님의 자유성을 강조하다 보니 인간의 책임이 빠지게 된다. 하나님의 일방적 은총만 강조하니까 로드십이 빠진다. 개혁주의에서 볼 때 루터신학은 로드십이 없다는 것이다. 윤리의 개념, 순종에 대한 신학적 명분이 약하다. 은혜에 감사해서 은혜에 보답한다는 정도이다. 신학적 근거가 없다. 신학적 명분이 서려면 하나님과 인간의 본질적 관계가 있어야 한다. 언약이 빠지지 로드십이 빠진다. 순종이 우발적이 된다. 하면 좋고 안 해도 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순종은 제자의 삶이고 절대성이다. 선택이 아니라 절대성이다. 언약적 관계에서 필수적이다.  
칼빈주의 - 언약을 회복했다. 관계가 회복된다. 로드십을 살린다. 
혼인 메타포어나 기타 메타포어를 보면 로드십이 중요하다.

신자가 제자인가? 아닌가? 과연 성도는 제자인가? 아닌가? 루터신학에 의하면 신자는 필수적으로 제자가 될 필요는 없다. 신자일 수 있고 제자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제자도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에게 해당한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 28:18-20  “(마28:18)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28: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마28: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 여기서 주동사는 제자를 삼는 것이다. 그리고 보조동사, 분사는 세례를 주고,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이다. 제자를 삼는 것이 주동사이고, 제자를 삼는 것 안에 모든 가르치는 것, 세례 주는 것이 포함된다. 신앙생활과 로드십은 불가분이다. 루터신학에는 이것이 성립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도 개망나니가 될 수 있다. 루터신학은 신학적으로 그런 명분이 주어진 것이다. 물론 우리가 그렇게 살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신학적 명분은 그렇지 않다. 순종의 요구는 율법이 아니다. 로드십이다. 루터는 하나님의 자율성 초월성이다 해놓고 후에 순종하라고 한다. 이 순종은 율법이 된다. 하나님은 자유로우시고 은혜이신데 왜 순종하라고 하는가? 제자도가 사라진다. 
루터파 교회가 칼빈주의 교회만큼 영향력을 발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학문적으로 검증된 것은 아니지만 내 견해가 그렇다. 종교개혁 이후에 루터교의 상대적 약화, 칼빈주의의 상대적 강세의 이유는 바로 강력한 로드십에 있다. 강력한 순종에 대한 엔진이 언약신학에 있다. 로드십이 있기에 기독교 세계관이 생긴다. 사회, 직업, 정치, 경제, 윤리에서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인정하고, 주인되심에 반응하는 일이 생긴다. 그러니 번성하게 될 수 밖에 없다. 

칼빈주의 신학의 번성을 증명한 책이 막스 베버의 책이다. -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정신], 유명한 역사학자, 사회학자이다. 내가 자본주의 예찬론자가 아니고, 책 선전자도 아니다. 칼빈주의가 총체적이라는 것이다. 
구원은 믿고 천국이 아니다. 믿고 구원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다. 창조하시고 에덴을 만들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자 하셧다. 새창조 아래서 이 원리는 동일하다. 구원 받고도 혼인하고, 노동하고,  안식한다. 신학적 명분이 바로 로드십이다. 칼빈주의가 그래서 살아남고, 루터는 쇠약해졌다고 생각한다. 루터교 목사님들이 들으면 기분 나쁘겠지만 내 편견이 그렇다. 루터에게는 윤리의 명분이 없다. 
우리가 천주교의 율법주의가 싫다고 해서 윤리를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개혁주의는 근본주의와 다르다. 우리에게는 세계관이 있고, 윤리가 있고, 제자도가 있다. 제자도의 삶은 신학적으로 분명한 명분이 있다. 루터는 단절을 주장한다. 언약과의 단절이다. 칼빈은 언약의 회복을 주장한다.
루터는 seperation 이고, 칼빈은 restoration 이다. 하나는 단절의 신학이고, 다른 하나는 회복의 신학이다. 그런데 분리는 세상과의 분리로 간다. 언약과 단절은 로드십 단절이다. 로드십 단절은 세상과의 단절이다. 그래서 근본주의가 된다. 내가 교회안에서 장로 집사로 섬기는 것은 필요하고, 세상에 나가서 사업할 때에 집사, 장로는 아니다. 영과 세상을 분리한다. 루터 신학은 언약의 관점에서 볼 때 분리가 오고, 로드십 부인이고, 그런 영성은 근본주의 가능성을 낳는다.

칼빈은 회복이다. 언약의 진정한 회복이다. 기독교 세계관이 형성된다.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에덴에서 아담에게 처음으로 언약 관계를 맺으신다. 그리고 창조의 모든 지시와 축복으로 주신 모드 책임들을 진정한 의미에서 다 회복한다는 것이다. 사회, 정치, 문화, 경제, 윤리, 모든 면에서 로드십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것을 가장 잘 발전 시킨 사람이 화란의 아브라함 카이퍼이다(@@@). 화란 개혁주의 신학의 세계관이 잘 정립되어 있다. 기독교 윤리나 기독교 세계관, 기독교 철학 연구는 화란으로 가야  한다. 아브라함 카이퍼 때문이다. 개혁주의 신학자, 정치가의 영향을 끼쳤다. 한국의 손봉호 교수가 유명하다. 요즘은 화란 개혁주의 신학이 많이 좌경화되었다. 순수한 개혁주의 신학을 배운다는 것이 어렵다. 
루터와 칼빈의 차이를 잘 알아야 한다. 단절의 신학과 회복의 신학이다. 
성례를 보자. 칼빈은 영적임재설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약정이라는 2가지가 있다. 우리가 성례를 베풀 때 그 자체에 은혜가 오고,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적으로 임재하신다. 이 두가지 진리를 포함하는 것이 개혁주의 성례론이다. 영적 임재설이 개혁주의 성례론이다. 우리가 행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임하시고 축복하신다. 개혁주의 성례에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이 가장 잘 조화를 이루면서 나타난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의 근간이 언약신학을 살피고, 칼빈과 루터의 신학을 비교하게 되어 감사. 개혁주의가 어떻게 뿌리가 내리고,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는가 알게 되어 감사합니다. 놀라운 축복을 받았는데 후손들로서 이 신학을 계승 발전시켜 나가게 하소서!

(광고) - 참 기가 막힌 강의이다. 두 번 째 듣는데 참 좋다. 성경신학적 입장에서 관계성 문제를 가르치는데 이 강의를 통해서 많은 보완점을 가진다. 우리 학교는 성경, 조직, 실천 신학에서 모든 통일성을 가진다. 이론은 개혁주의이고, 실천은 오순절로 가지 않는다. 우리 학교가 교수들끼리 이런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늘 대화를 많이 나눈다.     


                                  Ⅳ

처음에 97년도에 미국에서 오랫동안 살다 들어 왔다. 3년 간 교수 생활을 하다가 미국에 다시 들어갔다. 미국에서 들어올 때 가족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아이들은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미국 시민권자이다. 영어로만 하는 아이들이다. 큰 아이가 중 1, 둘째가 초등 4년, 막내가 유치원에 다닐 때이다. 막내는 문제가 없는데 큰 아이와 둘째가 문제가 많았다. 아이들이 초보적인 수준의 한국말만 하는데 알아 듣지를 못한다. 읽기 쓰기가 아주 낮았다. 미국에서 한국 학교는 일주일에 한 번 가는 것에 불과하다. 외국인 학교가 너무 비싸서 못 들어가고, 일반 한국인 학교에 갔다. 나도 이민을 가서 중 3 때부터 적응했다. 아빠  엄마도 어렵게 적응했으니 너희들도 한국 문화에 적응을 하라. 그런데 어느 날 딸 아이가 들어온다. 학교에서 단체 기합을 받았다. 나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 왜 단체 기합을 받는가? 내가 왜 벌을 받고,손바닥을 맞아야 하는가? 하면서 운다. 내가 앉혀 놓고 한국 문화를 가르쳤다. 한국 문화는 “우리 문화” 이기에 그렇다. 우리 집, 우리 엄마 라고 한다. 같이 책임을 진다고 했다. 한 사람이 잘못했을 때 같이 기합을 받는다고 했다. 문화적인 것, 전통적인 것이라고 했더니 이해를 한다. 그런데 단체 기합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성경적이다. 한 사람으로 인해서 다 같이 벌을 받는 것이 연대 개념이고 성경적 개념이다. solidarity. 결속, 연대 책임의 개념이다. 이 연대 개념은 언약의 개념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아이가 학교에서 벌을 받은 것은 연대 책임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은 연대의 개념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를 대속해서 그리스도께서 심판을 받으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다. “함께” 로마서 6장에 보면 나온다. 
롬 6:3-5  “(롬6:3)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롬6:4)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롬6:5)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합하여”, “연합”이란 단어가 모두 연대 개념이다. 그리스도와 우리가 연합하여서 함께 죽고, 함께 다시 산다. 그리스도와 내가 연합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어서 우리에게 온다. 전가, imputation 이다. 전가도 언약 신학 개념이다. ‘머리 개념’도 그렇다. 머리가 죽으면 몸도 죽고, 머리가 살면 머리가 살면 몸도 산다. 언약신학은 머리 신학이다. 대속에 이 연합의 개념이 잘 나타나 있다. 
구원론적으로 말하면 언약신학에서 가장 잘 나타난 개념이 대속이다. 대속과 전가의 개념이 핵심적이다. 종교 개혁자들은 먼저 우리에게 ‘전가된 은혜’와 그 후에 ‘주입된 은혜’를 구별하여 설명한다. 물론 다 주님에게서 왔다. 그러나 개혁신학은 구별한다. 
전가된 의 = 타자의 의 = ailien rightousness -- 이신칭의 -- 언약신학.  
주입된 의 = 자의 의 = self rightousness  --- 성화된 의 

대속을 substitution, representation 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두 가지 영어 용어로 설명한다. 이와 같이 타자의 의가 있고 나서 성화의 단계에 들어간다. 그리고 나성야 비로소 그리스도의 은혜가 주입된다.  성화에 의해서 생겨난 의가 자의 의이다. 내 속에서 내가 만들었다는 개념이 아니라 성령께서 내 안에 역사하셔서 생긴 의이다. 
천주교는 구원론의 핵심이 자의 의가 앞선다. 타자의 의는 자의 의에 뒤따라 온다. 내가 먼저 의롭게 된 것이고, 다음에 타자의 의가 따라 온 것이 은혜이다. 롬 5장에서 첫 아담과 둘째 아담을 비교한다. 이것이 바로 전가이다. 한 사람으로 인해서 죄가 들어오고, 둘째 아담으로 인해서 구원이 임한다. 구원은 언약적인 개념으로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성경 전체에서 언약적 구원론이 많지만 조직 신학적 견지에서 볼 때 롬 5장이 가장 잘 드러내 준다. 
인류는 두 머리가 있다. 첫 머리는 실패했다. 둘째 머리는 성공했다. 역사는 복잡한 것 같아도 어떻게 보면 단순하다. 구원론적 구조에서 볼 때 단순하다. 머리가 둘이다. 첫 창조와 새 창조가 역사를 이루고 있다. 구원론적으로 볼 때 언약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롬 1장에도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마틴 루터를 눈 뜨게 했던 유명한 구절을 기억하라.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의” 때문에 루터는 많은 시간 고민한다. 하나님의 의는 과연 무엇이냐? 루터는 처음에 하나님의 의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석했다. 
God's rightousness. rightousness of God. 
헬라어에는 소유격이 두 가지가 있다. 주체 소유격과 객체 소유격이 있다.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서 완전히 해석이 달라진다. 
the city of Philadelphia - 주체 소유격이다. 시티는 곧 필라델피아이다. 다른 것이 아니다. 이런 경우 주체 소유격이라고 한다. 만일 the citizen of Philadelphia 라고 하면 객체 소육격이다. 서울이 가지고 있는 시민들이란 의미이다.  
하나님 자신의 의를 말하는가?(주체) 아니면 하나님이 사용하시고 소유하고 계시는 의인가?(객체) 루터에게 객체 소유격이 될 때 하나님의 의는 심판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의는 죄인들을 책벌하는 의라고 루터는 이해한다. 죄인들을 징벌하시는 의이다. 루터 초기의 신앙은 복음 안에서 얼마나 매이고 자유를 못 누렸는가? 그는 매이고 고통하였다. 우리를 저주하고, 심판하고 책벌하시는 의이다. 그런데 후기에 루터는 변화된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주신다.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다. 이 의는 전가된 의이다. 객체 소유격으로 이해하면 무서운 심판이 되고, 주체 소유격으로 이해하면 놀라운 선물이 된다. 의라는 것은 심판이 될 수도 있고, 선물이 될 수도 있다. 
후기 루터가 롬 1:17절을 보면서 이 의가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의라고 깊이 깨닫는다. 그는 이후에 비로소 복음안에서 자유를 얻는다고 알게 된다. 그리고 나서 ‘타자의 의’를 깨닫게 된다. 우리 자신의 의로는 아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의로만, 타자의 의로만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중세 수도사 출신이다. 수도원적 고행과 선행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깨닫게 된다. 바로 여기 구절 하나에게 종교 개혁이 출발했다. 하나님의 의를 심판으로 보는가, 선물로 보는가? 여기서 갈라졌다. 내가 경건의 노력과 기타 어떤 노력으로도 안 된다. 여기서 루터는 눈을 떴고, 변화되었고, 종교 개혁은 일어났던 것이다. 

전가된 의, 이는 개혁신학의 핵심이다. 언약 신학은 영어로 무엇인가? Federal Theology 이다. 
foidus (라틴어로, ‘머리’) 에서 federal (연방) 이란 단어가 나온다. 머리로서 결속되어 있다. 정부는 머리이고, 국민은 몸이 된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를 정치적인 체제로 만든 것이 미국 연방제이다. 대표정치 개념도 언약 개념에서 온 것이다. 머리가 잘하면 몸도 복을 받는다. 정부가 잘하면 국민들이 혜택을 누린다. 정부가 잘못하면 국민들은 손해를 본다. 대표를 뽑아서 일을 시키고, 못하면 떨어뜨린다. 정부와 국민 사이에 책임의 일정부분을 갖는다. 이것이 대표민주주의이다. 이는 바로 언약 개념에서 나온 것이다. 사실 미국 대표정치가 시작되기 전에 장로교에서 시작되었다. 

칼빈의 대표정치에서 스코틀랜드로 넘어간다. 오늘날 미국의 대표정치에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장로교 민주주의와 대표 정치가 같다. 머리가 잘못하면 바꾼다. 정부에서는 머리가 잘못하면 선거를 통해서 끌어내린다.  일반 교회에서는 한 번 머리가 되면 내려오지 못한다. 미국에서는 장로들이 3년 만에 한 번씩 신임을 묻는다. 50% 이상 찬성을 얻어야 한다. 그리고 6년이 되면 무조건 1년을 쉬어야 한다. 다시 돌아와서 세울 때는 3분의 2 이상 찬성을 얻어야 한다. 작년에 3분의 원로 장로들이 모두 신임을 묻고 통과했다. 나를 목회자로 청빙하기 직전에 이 신임 제도를 통과시킨 후에 나를 청빙했다. 나로 하여금 목회를 잘 하도록 도움을 준 것이다. 3년 지나 신임 투표에서 떨어지면 일정 기간이 지나서 다시 묻는다. 떨어질 것 같으면 아예 미리 은퇴를 해 버린다. 투표 자체를 거부하고 불명예를 받지 않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책임 제도이다. 이와 같은 장로교 모델이 민주주의 정치 모델이 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책임이라는 것이다. 이런 원리에 의해서 하나님은 구약 백성을 다스린다. 그리고 지금은 새 언약이라는 개념 하에서 우리를 다스린다. 이 언약의 원리에서 가장 핵심적 개념은 ‘제사장적 소명’ 때문이다. 책임이란 무엇이냐? 책임은 왜 지느냐? 바로 제사장적 소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제사장적 백성, 나라로 부름을 받았다. 신약 백성들은 왕같은 제사장으로 소명을 받았다. 우리 책임은 율법적 책임이 아니다. 제사장 신분으로서의 책임이다. 

구약을 보라.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로 부름을 받았다. 이스라엘 주변국의 흥망성쇠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향한 자세에 의해서 달라진다. 이스라엘은 작은 약소국에 불과하다. 주변국은 강대국이다. 애굽, 앗수르, 바벨론... 이들이 잘하고 못하고  이전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했느냐에 따라서 그들의 흥망성쇠가 결정된다. 왜?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로 부름 받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잘하면 주변도 복이다. 아니면 반대이다. 
예레미야서에 보면 하나님이 헐고, 심고, 뽑고, 세우는 작업을 하신다. 이 모든 작업이 제사장적 소명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역사를 주도하는 주체세력이다. 인간의 눈으로 보고, 정치적 눈으로 보면 작고 초라한 약소국에 불과하다. 그러나 역사는 구속의 역사이다. 역사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택함 받은 선민이 있다. 수가 작고, 약하고, 부족해도 이들은 어쨓든 제사장 나라이다. 역사의 주체는 강대국이 아니고 제사장 나라이다. 그러므로 자꾸 강대국에 가서 줄을 대려고 하지 말라. 줄다리기 하지 말라. 바벨론에 가라고 하면 가야 한다. 애굽으로 가면 유리할 것  같아도 더 불리하다.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이기에 반드시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제사장의 소명을 가지고 살라. 이것이 언약적 복음이고, 언약적 구원이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은 새 언약의 백성이다. 그런데 특별히 성경은 전도와 선교를 말하면서 제사장적 소명으로 말한다.  이방민족을 하나님 앞에 데리고 나오는 제사장으로서 소명을 전도라고 한다. 이 세상 모든 민족들과 우리는 연대를 갖는다. 운명을 같이 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전도와 선교를 하라. 제사장은 이방인을 제물로 삼아서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이다. 
새 언약의 백성에게 제사장으로 살라는 것은 우리 목숨을 드려서 세상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으로 삼으라는 소명을 주신 것이다. 

(롬15:16)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방인을 복음의 제물로 드리는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려고 우리를 부르셨다. 그래서 언약적이다. 제사장은 언약적 책임을 갖고 있다. 아담의 실패는 제사장으로서의 실패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사장으로서 우리에게 오신 것이다. 제사장으로서 우리를 대신하여 제물이 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다. 언약은 제사장적 책임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와 선교에 대한 우리의 안목이 언약적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제사장적 소명에 의한 것이다. 전도와 선교를 제사장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다. 언약적 구원의 구도 안에서 우리가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전도와 선교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책임지신 것처럼 우리도 이방인들을 선교하고 전도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우리의 생명이 연합하고 살아나는 것처럼 나에 의해서 다른 사람들, 이방인들의 생명이 나와 연합되고 살아나게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선교나 전도의 관점이 달라지게 된다. 해야 하는 의무가 아니라 주님의 생명을 내어주심으로 연합하게 하는 일이 우리를 통해서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전도도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적 패턴에서 하자.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시는 패턴으로 전도하며 살아가자. 상당히 새롭고 신선한 접근이다. 나가서 전도하자, 선교하자는 것이 제사장적 소명에 의해서 하는 일이다. 아담는 제사장으로서 실패했고, 그리스도는 제사장으로서 성공했고, 우리도 왕같은 제사장으로서 나가서 전도하자. 불쌍한 영혼을 구원하자는 단순한 전도의 개념에서 좀 더 큰 안목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한다.

봉사의 문제도 그렇다. 목회적 의미를 갖는다. 봉사나 섬김도 마찬가지이다. 도덕적 율법적 의무적 차원에서 섬기라, 복을 받기 위해서 봉사하라고 하면 복음적이 아니다. 희생을 해도 복음적으로 요구하고, 전도도 복음적으로 하라고 요구하라. 구원을 복음적으로 가르치고, 봉사는 율법적으로 하라고 하면 일관성이 없다. 구원은 복음으로 받고, 생활은 율법적으로 하고, 구원은 복음으로 받고, 사는 것은 도덕으로 살면 안된다. 성도들이 헷갈린다. 우리 목사님들이 일관성 있는 설교, 일관성 있는 목회를 해야 한다. 
연대 책임을 갖는다는 것은 가정적인 개념이다. 사회나 정치에도 포괄적 안목을 가져다 준다. 복음의 제사장으로 살면서 봉사하고, 복음의 제사장으로 살면서 사회에 참여하고, 정치적 일에도 관여하게 된다. 포괄적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져다 준다. 연대 책임이다. 언약적 관점에서 아버지는 가정의 제사장이다. 내가 잘하면 가정이 성공하고, 내가 잘못하면 가정이 실패한다. 사회의 관점도 같다. 내가 잘못하면 사회가 실패한다. 복음의 제사장적 끈으로 사회와 연결되어야  명분이 제대로 선다. 복음의 제사장적 관점에서 하지 않으면 사회 참여의 명분이 약해진다. 장로가 정치가가 되고, 대통령이 되면 달라져야 한다. 교회 직분은 직분이고, 사회 직업은 사회 직업이라고 하면 언약적 삶이 아니다. 복음의 제사장적 삶을 가정, 교회, 사회, 국가 모든 영역에 확대하라. 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따로 있고, 직업은 따로 있게 되면 분리된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모든 영역에 연관시켜라. 모든 사회의 영역을 하나님과 나의 관계 영역으로 끌어 들여라. 그리스도의 대사로 서라. 그리스도가 우리 인류의 대표였듯이 나는 그리스도의 대사로 서라. 
이것이 바로 십자가 신학이다. 제사장적 삶이 십자가 신학이다.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서 제물이 되신 것처럼 내가 제물이 되길 바라는 것이다. 섬김과 봉사의 원리가 절대로 율법적 원리나 도덕적 원리가 될 수 없다. 이 부분에 대해서 충분한 이해를 가져야 한다. 성도들이 이 부분에 대해서 잘 이해하도록 목회자의 가르침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단숞나 보답이나 도덕 행위가 봉사라고 생각하니 지친다. 앞 뒤가 안 맞다. 섬김과 봉사의 원리가 십자가 신학에서, 제사장적 섬김에서, 복음에서 나오면 강력한 동기가 된다.

막 10:42-44  “(막10:42)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막10:43)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막10:44)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막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우리가 종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 섬김의 신학적 근본, 명분이 무엇인가? 예수님이 설명하신다. 섬김의 원리이다. 자신이 제사장적 소명을 받아서 섬김의 사시고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처럼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는 것이다. 자신이 제사장으로서 목숨을 드리고 섬김에 의해서 다른 사람을 살렸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우리가 봉사하고 섬기고 전도하는 것이 의무나 복받는 수단이나 도덕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봉사나 전도를 두 가지 주제로 맞춘다. 경건하게 사는 삶과 기복의 삶에 맞춘다. 우리가 경건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섬기고 전도하고 봉사해야 하지 않는가? 우리가 복 받기 위해서 섬기고 봉사해야 하지 않는가? 예수님은 봉사와 전도와 섬김을 경건이나 복 받는 것과는 별개로 설명한다. 바울도 전도의 명분을 그렇게 설명하지 않는다. 우리의 신분에 명분을 둔다. 우리 신분은 제사장이다. 복음의 제사장적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제물로 드림으로 섬기고  사랑해야 하지 않는가? 우리 신분과 명분이 제사장이니 우리가 드려서 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않는가? 행위에 맞추면 경건주의로 흐른다. 신분에 맞추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언약적 삶에 초점을 맞춘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언약적 구도 속에서 봉사하고 선교하고 전도한다. 

목회 차원에서 순종과 봉사와 전도를 요구할 때 포커스를 조금 바꿔주라. 제사장적 소명을 가진 삶이 얼마나 신나고 영광스럽고 축복인가를 가르쳐 줄 때 제대로 하게 된다. 봉사나 전도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을 돕는 사역이 아니다. 이 자체가 축복이다. 물론 이는 이론적이다. 이것이 설교로 풀어져야 한다. 그래서 쉽지가 않다. 이론적으로 알지만 실제로 풀어서 설교하고 가르치고 적용시켜야 하기에 어렵다. 나도 목회를 하면서 이를 이론적으로 알지만 실제로 가르치려고 하니 어렵더라. 신나게 사는 것이 제사장적 삶이라는 것을 알지만 실제로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은 어렵다. 어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해도 이런 방향성을 잃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아무도 가르쳐 줄 수가 없다. 성경 어느 본문을 선택해도 이런 방향성 속에서 풀어낼 수 있어야 일관성을 가진 목회자이다. 1년 반의 목회 기간 동안 얼마 안 된 목회이지만 항상 이것이 고민거리이다. 설교 강단에서 도덕 설교가 아니고, 기복 설교가 아닌 복음설교를 위해서, 언약적 설교를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늘 생각한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대속물로 주신 것처럼 제자들에게도 십자가의 원리로 살라는 것을 가르쳤다. 십자가 원리로 사는 것이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삶을 한 마디로 막 8:34절로 설명했다. “그리스도의 삶은 한 마디로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제사장적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봉사도 전도도 선교도 하는 것이다. 그러한 신학이 전제되지 않고 의식이 없는 가운데 하는 봉사나 전도는 전부다 둘 중의 하나이다. 도덕주의로 가든지 아니면 기복주의로 간다. 

십자가로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 언약 신학은 장막신학이다. 장막에는 핵심이 속죄이다. 속죄는 제사를 통해서 한다. 장막 안에는 십자가가 있다. 
십자가 신학 = 장막신학 = 언약신학 = 십자가 신학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장막을 치셨고, 속죄를 하셨다. 그래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삶을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라고 했다. 그리스도인의 축복관이 언약적 관점에서 십자가와 부합되고, 연결되어야 한다.

산상수훈의 팔복을 보라. 이 팔복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닮는 것이다. 십자가 삶이다. 산상수훈을 하면서 도덕설교, 윤리 설교  하면 안된다. 기복설교는 더더욱 안된다. 제사장적 소명을 가장 분명하게 가르쳐 주는 사례로써 팔복을 설교할 수 있어야 한다. 

마 5:1-12  “(마5:1)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마5:2)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마5: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5: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5:6)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5:7)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5:8)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5:9)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5:10)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5:11)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5: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는 것은 우리가 제사장적 소명을 가지고 살아갈 때 이를 가장 잘 실행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장막을 쳐 주신다. 하나님께서 장막을 쳐 주시는 사람이 곧 복있는 자이다. 하나님의 축복과 도우심과 은혜를 받고 살아간다. 복을 물량주의로 보면 안된다. 제사장적 삶과 물량주의는 정비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필요하면 물량적 축복도 주신다. 그러나 이것이 다는 아니다. 산상수훈에서 하나의 패턴을 가르쳐 주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제사장적 삶을 가르쳐 주신다. 

정리를 하면 언약의 개념에서 대표성을 설명한 것이다. 대표성, 연대, 연합의 개념을 언약적 관점에서 모든 것을 그렇게 이해하라. 영성과 목회에 적용하라. 창조도 언약이고, 구원도 언약이다. 첫  창조도 언약, 새창조도 언약이다. 우리 영성, 우리 목회, 우리 신앙 생활 모드것이 하나님이 구원하신 구도에 맞는 목회의 개념을 가지라. 
(질문) 예수님이 제사장이신데 우리도 제사장이라면 우리가 사람의 생명을 구원을 할 수 있다는 것인가? 우리와 그리스도의 일치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 유일한 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구원론적으로 우리가 제사장이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 신분 자체가 새롭게 되었다.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이 제사장적 사명을 가진 삶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명이다. 롬 15:16절을 더 깊이 생각해 보시라. 


                         

언약이란 관계성이다. 언약 신학의 핵심 주제는 관계성이다. 그러기에 언약에서 볼 때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영성이 관계적이어야 한다. 관계 중심의 영성이어야 한다. 관계중심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하나님께서 보실 때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 보다도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는가에 더 우선을 두신다. 무엇을 하는가 보다 어떤 사람이 되는가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기에 언약 신학은 관계 중심이다. 언제나 우선 순위가 관계이다. 
관계는 Doing 보다도 Being 에 우선권을 둔다. 하나님은 인간과 관계를 먼저 맺으시고 관계 중심으로 일을 맡기신다. 하나님은 언약적 관계를 통해서 우리를 도우신다. 언약 신학에서는 됨에 우선을 둔다. 은사보다는 열매에 우선권을 둔다. 성품적 열매가 중요하다. 사역적 은사보다는 성품적 열매에 우선한다. 성품적 열매와 사역적 은사 둘 다 중요하다. 둘 다 필요하다. 그런데 열매가 우선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능력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원하신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우리에게 능력을 구걸하시지 않는다. 우리에게 관계를 통해서 필요한 일을 맡기시고 능력을 주신다. 이 둘 사이에서 균형을 갖고 조화를 이룬 영성을 가져야 성경적 의미의 영성을 추구하게 된다. 
관계적 영성 = 성품적 영성(성품의 변화추구) = 성령의 열매 = Being = 됨의 신학
은사론적 영성 = 전투적 영성(전도 봉사, 가시적 결과) = 성령의 은사 = Doing = 함의 신학 

은사는 어떤 사역을 위해서 주시는 선물이다. 은사를 자랑하는 데 사용하거나 과시하면 절대로 안된다. 잘 못된 것이다. 하나님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일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런데 우리같은 부족한 것들을 부르셔서 함께 일하시고자 한다. 우리같이 무능력한 것들을 택해서 함께 일하고자 은사를 주신다. 일을 함께 하시고자 불쌍히 여기시고 주신ㄱ 것이 은사이다. 그런데 이런 은혜의 선물을 가지고 관계를 무시하거나 자랑하거나 하면  하나님이 본래 은사를 주신 목적에 아주 위배된다. 

은사에서 자신의 못난 점을 발견하라. 은사를  많이 주셨으면 내가 더 못난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주님이 불쌍해서 선물로 주셨다. 이것이 바른 은사론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해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관계적 영성을 추구하라. 성품적 성도됨을 우선 추구하라. 성품의 변화를 먼저 목표로 삼으라. 언약적 관점에서 볼 때 성품의 변화가 서열이 앞선다. 그 다음에 사역이다. 이런 신학과 이런 영성, 이런 목회를 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람직한 목회관이다. 

성경에 보면 성도들이 능력을 나타내는 부분과 열매를 맺는 것 두 가지를 모두 가르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보면 능력을 나타내는 것은 능력을 나타내는 것은 열매를 맺는 것보다 결코 더 앞설 수 없다. 앞서서도 안된다.
마 7:20-23  “(마7:20)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7: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7: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7:23)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예수님께서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좇아 내고, 많은 권능을 행한 사람들을 가리켜 이것이 반드시 천국에 들어가는 보장은 아니라고 하신다. 이렇게 능력을 많이 행하고도 천국에서 좇겨 났다. 능력을 행하는 것이 천국 입장권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주님은 열매를 보고 보장하신다. 열매를 보고 인정하신다. 관계성이 위이다. 성품적 열매가 분명히 앞선다. 능력의 과시가 천국 입장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그러나 능력에 반해서 열매는 나무를 보여준다. 

물론 예수님이 은사론적 영성을 부정하시는 것은 아니다. 관계적 영성을 대안으로 말하는 것도 아니다. 관계적 영성이 은사론적 영성의 대안이라고 말하면 안된다. 은사론적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관계적 영성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서열이다. 무게 중심이다. 균형을 잡되 서열은 분명히 하라. 언약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두 가지 큰 맥락이 있다. 관계적 영성과 은사론적 영성의 균형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서 위의 말씀에서 연결되는 구절을 더 볼 필요가 있다. 앞의 말씀에 연 이어서 같은 주제로 말씀하고 계신다. 예수님이 비교하고 계시는 것은 포괄적 관점에서는 산상수훈의 결론이고, 좁은 문맥에서는 열매의 문제를 다루고 계신다. 

마 7:24-27  “(마7:24)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7:25)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마7:26)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마7:27)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그러므로” 이다. 앞에서 연결되고 있다. 여기서 예수님이 중시하는 것은 기초이다. 반석 위에 지어진 집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어진 집이고, 모래 위의 집은 말씀과 상관없이 지어진 집이다. 집을 짓는 것이 포인트가 아니다. 행함이 아니다. 행위나 도덕이 초점이 아니다. 많은 경우 이 말씀을 행위로만 포인트를 두고 말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아니다. 기초이다.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관계성을 무시하고 행한 것이 아니다. 관계성을 중시하고 행한 것이다. 관계성 없이도 능력을 행하고 사역 위주로 할 수 있다. 전투적 영성을 가지고 귀신을 좇고 능력을 행한다. 그런데 적법한 관계가 아닌 가운데 만들어진 모든 열매를 인정하지 않는다. 행위에 가치를 두는 것이 아니고 관계에 가치를 두신다. 굉장히 무서운 말씀이다. 아무리 많은 행위와 아무리 많은 능력을 가진 사람도 예수님이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 관계를 우선하라. 주님이 전혀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 

다른 구절을 하나만 더 보자. 
요 13:34-35  “(요13:34)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13:35)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새 계명은 새 언약과 관계가 있다. 새 언약으로 우리에게 삶의 원칙과 규범으로 주신 계명이다. “사랑하라” 새 언약의 계명을 총합하여 한 마디로 정리한 삶이다. “서로 사랑하라” 관계적이다. 이 새 언약 속에서 선교적 개념까지 포함시켰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전도, 선교하면 은사론적 범주에 포함시킨다. 그런데 예수님은 선교적 뉘앙스를 여기서 풍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사람들이 우리가 제자인 줄을 안다. 

물론 선교는 나가서 전도지 나눠주고, 복음을 제시하고, 선교하는 전투적 영성, 사역적 측면이 있다. 당연하다. 전투적 측면의 선교사역이 있어야 한다. 나가서 전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 본문에서 예수님은 관계적 영성에다가 선교 사명까지를 포함시켰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선교도 잘 된다.  그런데 전투적 영성에 치중할 때 많은 이들이 상처를 받는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전투적 영성이 너무 강해서 문제이다. 관게적 영성이 약하다. 그래서 서로 싸우고 상처를 준다. 서로 사랑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전투적 영성이 관계적 영성에 포함되어야 한다. 
선교 전도는 꼭 전투적 영성만 가지고 하는 것은 아니다. 전투적 영성이란 언약적 관점에서 볼 때 관계적 영성, Being 의 세계, 됨의 세계로 들어와야 한다. 전도 기계를 만드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성도를  만들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성도로 만들라. 이것이 바로 언약적 관점에서 본 목회관이고, 영성이다. 

이런 문제들을 목회적 관리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성경에 보면 교회가 가정, 학교, 군대가 있다. 교회는 어디에 가장 가까울까? 가정에 제일 가깝다. 가정은 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학교의 모습, 군대의 모습도 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측면은 가정의 모습이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고민을 많이 하고 있다. 나도 목회 초년생으로서 이런 분야에서 고민한다. 관계 영성에 초점을 두고 리더십을 개발할 것인가? 아니면 강한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추구할 것인가? 당회를 운영하면서 이런 부분을 가지고 많이 갈등하게 된다. 이민 교회에서 교회론이 튼튼하게 정착이 되지 않은 사회에서 이런 리더십 문제는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대부분의 이민 교회에서는 직분자들에게 교회론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이 없다. 한국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교회론이 비교적 낫게 되어 있다. 그래서 직분을 맡기고 나서 일 중심으로 나가도 소화한다. 그런데 이민 교회는 다르다. 기초가 약하다. 교회론에 대한 철학과 리더십의 방향이 분명해야 한다. 리더십의 문제가 아주 중요하다. 관계적 영성으로 나가야 하는가? 아니면 일 중심으로 카리스마적으로 나가야 하는가? 둘 사이에서 언제나 심각한 어려움을 안고 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델을 찾고, 바울의 모델을 찾아야 한다. 
은사론적 영성과 전투적 영성의 비교. 사역적 영성 일 중심의 영성과 관계적 영성.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두 가지이다.

 

1) 무질서이다

    무질서는 과정을 초월하는 것이다. 과정을 무시한다. 이들은 일만 잘 되면 된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 나와 성도들의 관계를 무시한다. 일만 잘 하면 된다. 공동체 모습은 무시한다. 하나님의 정하신 성화의 과정, 질서를 초월한다. 성화 과정, 교회를 세우는 과정에서 초월되기에 무질서가 생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피나는 과정이다.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는 과정이다. 이런 과정은 관계에서 시작되는 것들이다. 그러기에 인격적 관계는 과정을 중시한다. 성화 많이 된 사람이 최고가 아니라 능력이 많은 사람이 최고이다. 신령한 능력이든 인간적 능력이든 능력이 우선이다. 능력 위주의 공동체에서는 질서가 필요 없다. 힘있고, 능력 많은 사람이 최고이다. 


2) 무례함이다. 

    관계를 무시하게 된다. 무질서와 함께 무례함이 은사론적 치우침에 치중할 때 관계를 무시하거나 관계를 초월한다. 능력 위주로 나가게 되면 당연하게 이렇게 된다. 
성령을 받으면 다 해결된다고 하는 것도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 한 선교사를 초빙해서 신학적 문제에 대해서 신신 당부를 했는데도 전혀 예의를 지키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 받으라” 난리이다. 당회장이 조직신학 박사라는데 웃긴다면서 나를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가지고 논다. 성령 충만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렇게 무례하고 문제가 많을 수 있는가? 성령 받으면 부흥되고, 문제 다 해결된다고 하는 것이 심각한 문제가 있다. 성령 받고, 충만하면 인격이 있어야  하고, 열매가 있어야 하고, 겸손해야 하는데 무례하다. 전투적 영성이 너무 충만하다. 재삼 재사 부탁하였는데도 무례하게 했다. 성령 충만한 다음에 겸손하여야 한다. 이것이 바른 것이다. 성령 받아도 순종의 과정, 성화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런 과정과 질서를 무시하면 안 된다. 이 사건을 통해서 내가 깨달은 것이 무질서와 무례함이 문제라는 것이다.

관계를 초월한 영성은 하나님이 정하신 성화의 과정, 교회를 세우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과정이 초월된다. 이 초월된 것에서 무질서가 생긴다. 성화의 열매를 가진 사람이 최고가 아니라 능력을 많이 가진 사람이 중시된다. 질서가 무시된다. 무례함이 따른다. 관계를 무시한다. 무질서와 관계 초월이 문제이다. 
파워 중심의 영성이 문제이다. 물론 능력이 중요하다. 능력이 없이는 설교도 목회도 어느 것도  할 수 없다. 중요하다. 그런데 관계 영성의 목회가 없으면 능력은 아무것도 아니다. 관계 영성의 큰 구도 안에서 능력을 추구해야 한다. 
파워를 주제로 한 책들이 많다. 파워 로마서, 파워 전도서, 파워 크리스챤, 기적이 상식이 되는 교회... 이런 것들 물론 좋다. 그런데 솔직히 기적이 상식이 되면 문제가 있다. 정말 하나님이 이를 원하시는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기적이 상식이 되는 것인가? 나는 의문이다. 이를 신학적으로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책을 쓴 사람이 신학자가 아니다. 단순히 목회적 관점에서 쓴 책일 뿐이다. 목회적 차원의 글을  신학적 관점에서 비판한다면 공평하지 못하다. 그러나 꼭 한 가지만을 지적하고 싶다. 기적이 상식이 되는 교회는 관계적 영성, 언약 신학의 관점은 아니다. 
결국은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그 주권에 순종하는 영성을 추구하라. 과정을 무시하고 비약적인 영성, 곧장 점프하는 영성의 추구는 잘못된 것이다. 마 7장에서 열매를 보고 안다고 하신 말씀과 거리가 멀다. 능력을 보고 나무를 아는 것이 아니다. 열매를 보고 안다. 능력은 천국 입장의 조건은 아니다. 

파워 영성과 관계 영성의 적절한 조화와 적절한 관계성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것이 목회의 관건이다. 신학에서 아주 중대한 원리적 이슈가 된다. Being 이 된다고 Doing 이 필연적으로 따라 오는 것은 아니다. Doing 이 있다고 Being 이 필연적으로 따라 오는 것은 아니다. 둘 다 필요하다. 추구해야 한다. 
나도 목회자로서 교회 성장에 많은 관심이 있다. 누구보다도 굉장히 교회를 부흥시키고 싶다. 그래서 이를 위해서 관심 갖고 많이 노력한다. 그런데 관계 영성이 무엇보다 우선이다. 관계 영성과 파워 영성 사이의 주종 관계가 분명히 이뤄져야 한다. 이것이 성경의 보편적 패러다임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관계 영성을 파워 영성의 대안이라고 하면 안된다. 어느 것 하나에 치중해 버리고 다른 하나를 버리거나 무시하면  안된다. 파워 영성을 주장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관계를 완전히 무시하지 않는다. 관계를 추구한다고 해서 파워를 무시하지 않는다. 둘 다 필요하고, 둘 다 중요하다. 다만 관계와 파워 사이의 주종관계이다. 


                         Ⅵ  

언약적 관점에서 성령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아마 앞의 강의를 통해서 어떤 방향으로  나가고자 하는가를 알고 있을 것이다. 언약적 관점에서 성령 사역이란 무엇인가? 성령 사역의 목적은 새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엡 4:21-24  “(엡4:21)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엡4: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엡4:23)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엡4: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새 사람을 입는 것이 성령의 역사의 목적이다. 새 사람이 되는 것, 온전한 성도가 되는 것, 이것도 언약적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이 말씀 바로 앞의 내용이 이러하다. 

엡 4:11-12  “(엡4:11)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엡4:12)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온전한 성도를 세우기 위해서 성령이 오셨다. 개혁주의 신학의 성화론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온전한 성도가 되는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의 무게는 이것이다. 성도를 온전케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다. 우리 신학의 무게는 바로 이것임을 알아야 한다. 성도들은 목사의 설교의 무게중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잘 표현은 못해도 다 느낌으로 안다. 우리 신학의 무게중심이 언약에 중심이 있어야 일관성을 유지하게 된다. 
개혁주의 성령론은 다분히 언약적이다. 관계 중심, 언약 중심이다. 새 사람을 만드는 것이이다. 개혁주의 성령론은 기독론적 성격을 많이 띤다. 예정론 조차도 아들 중심이다. 많은 사람이 칼빈주의 신학의 예정론이 아들 중심이 아닌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데 잘 모르는 것이다. 예정론조차도 아들 중심, 기독론적이다.  삼위 일체 조차도 아들 중심으로 전개시킨다. 구원론도 기독론적이다. 성령론도 기독론적이다. 성화론도 그렇고, 종말론도 그렇다. 성경의 대전제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tu서 장막을 치신다는 것이다. 장막신학이다. 장막의 정점은 예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오셨다. 장막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기에 모든 신학의 핵심은 아들 중심이다. 
(엡1:4-5)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아들 중심의 신학, 아들 중심의 삼위일체, 아들 중심의 성화론이다. 우리 개혁주의 모든 신학에 아들을  중심하지 않고는 안된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에서 실패하면 다 실패한 것이다. 

(요14:25-26)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성령은 보내시는데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내신다.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신다. 성령의 사역은 아들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다. 성령의 사역은 독립적이 아니다. 아들의 사역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요 16:13-15  “(요16:13)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요16:14)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요16:15)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성령의 사역은 진리의 성령으로서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와서 알리신다. 예수님의 것은 아버지의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도 구원론적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사변적으로 말하면 안된다. 구원론적으로 접근하라. 아들이 아니고서는 아버지를알수 없고, 성령이 아니고는 아들에 대해서 알 수 없다. 더 묻지 마라. 성령론은 아들 중심이 될 수 밖에 없다. 이 외에도 결정적인 말씀이 있다. 
(롬8: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주신다. 그리고 아들과 함께 모든 은사를 주신다. 아들이 있고, 아들을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서 은사를 주신다. 아들을 주시고, 아들에 딸려 오는 것이 다 은사이다. 

성령론에서 우리가 피해야 할 두 가지 극단이 있다. 


첫째는 성령 사역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가면 안 된다. 

    성령 사역에 의존하지 않는 목회 사역은 안된다. 성령 사역을 극소화시키고, 최소화하면 결국은 도덕주의, 인본주의로 나갈 수 밖에 없다. 성령의 사역을 극소화시키면 도덕주의만이 답이다. 도덕적 인간을 만드는 것을 성화의 목표로 삼는다. 특별한 하나님의 사역과 초자연적 노력이 없어도 인간이 성화되리라고 하면 안된다. 칼빈주의 신학, 정통주의 신학이 이런 점에서 오순절 측 인사들에게 성령론을 극소화시키는 것처럼 오해될 여지가 있다. 

 
둘째는 앞과 반대로 성령을 은사중심으로만 보려는 경향이다. 

     매사에 성령을 능력, 은사 중심으로만 본다. 

이 둘 다 피해야 한다. 성령의 사역을 축소화하거나 은사주의로만 나가면 안 된다. 성령의 사역을 인간의 차원에서만 이해하고 축소시켜서도, 지나치게 은사주의로 넘어가서도 안된다. 이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라.  
사도행전의 시각은 성령행전, 은사론 등으로 보지만 사실은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로 시작하여 하나님 나라로 끝이 난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하신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치신다. 사도행전 끝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일을 바울이 담대히 말한다. 
(행1: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행28:31)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바울은 모든 복음 전파에 대해서 하나님 나라라는 단어로 요약 정리하고 있다. 주제는 하나님 나라였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장막을 치시고 우리 가운데 우리 주권자요, 통치자로 다스리는 것이다. 나라는 주권자 통치자가 있고 백성이 있는 곳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있고, 핵심은 예수가 오셔서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신 것이다. 그가 오셔서 통치하시고 계시다가 이제 떠나셨다. 장막을 치시고 함께 거하시는 임마누엘을 하시다가 이제는 떠났다. 하나님 나라가 이제 우리가운데 임했고, 성취되었다. 구약에서 이제까지 예언되었던 모든 약속이 그 아들 안에서 성취되었다. 그리고 그는 떠났다. 이제 그가 우리 가운데서 로드십을 수행하시는 방편으로서 성령을 보내셨다. 하나님의 주권을 우리 가운데 수행하시는 방법. Lordship 의 exercise 를 하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성령은 누구신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다.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에게 성령의 은사를 허락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이런 모든 역사를 산발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큰 목적가운데 있다. 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시고 Lordship을 수행하시는 방편으로 주신 것이다. 성령의 역사를 이런 큰 틀 안에서 이해해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성령께서 우리 인격의 성장이나 도우시는 도덕적 방편으로 가서는 안된다. 반대로 성령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고, 파워를 안겨 주는 무속적인 방편으로 가서도 안된다. 지나치게 도덕적 성령론으로 가서도 안되고, 지나치게 무속적 성령론으로 가서도 안된다. 오순절 측에서 볼 때 개혁주의 성령론이 도덕적 성령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개혁주의에서 볼 때 오순절 성령론은 무속주의 성령론처럼 보인다. 그러나 진정한 개혁주의 성령론은 이런 두 가지 극단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신학이다. 언약적 신학의 측면에서 보려고 한다. 
그래서 개혁주의 성령론은 아들 중심의 성령론, 관계 중심의 성령론, 그리스도 Lordship 중심의 성령론을 추구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조직 신학 속에서 이런 신학 형성을 위해서 노력을 했음을 개혁주의 신학 역사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성령의 사역]


이런 성령론 오리엔테이션 방향 속에서 ‘성령의 사역’을 살펴 보자.
성령세례, 성령의 열매, 성령의 은사 3가지가 성령의 사역이다. 이 세가지 사이에는 순차적 우위가 있다. 어느 것이 우위에 있는가 성경적으로 체계를 세울 필요가 있다. 그래야 우리 메시지나 사역의 무게 중심이 결정된다. 

(1) 성령 세례 
      죄인이 거듭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중생하는 것이다. 성령 세례는 물과 세례를 통해서 거듭나는 것이다. 성령이 아니고는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를 수 없다. 고전 12장에 나타나듯이, 한 성령에 의해서 세례 받고, 한 성령을 마시고, 한 성령으로 한 몸이 되었다. 성령 세례는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거듭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관계신학, 언약신학 측면이 강하다. 거듭나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우주적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은 가장 보편적인 것이다. 가장 보편적이기에 가장 중요하다. 성령 세례, 성령의 열매, 성령의 은사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 사람들은 특수한 것에 중점을 두는 오류를 범한다. 거듭나는 것은 첫 창조의 언약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아주 우주적인 차원의 일이다.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는 놀라운 축복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는 놀라운 사실이다. 
모든 성도들에게 해당되는 매우 보편적인 사건이다. 성령세례가 바로 그것이다. 예수를 주로 영접하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자들에게는 모두 해당하는 보편적인 성격의 것이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보편적인 것을 무시하고 특별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보편적인 것을 경시하고, 남과 달라 보이고자 특수한 것을 추구한다.

(2) 성령의 열매 
     성령의 열매는 갈 5장에 보듯이 9가지이다.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성, 충성, 온유, 절제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누구든지 이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는 성경이 요구에서 아무도 자유롭지 못하다. 모든 성도들의 목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성도들이 성령의 열매를 똑같이 맺는 것은 아니다. 성숙한 사람들은 더 맺고, 어린 아이같이 젖먹는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덜 맺는다. 보편적으로 모두에게 해당하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같이 맺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는 보편적 성격을 띠는 동시에 예외적 성격을 띤다. 성품적 변화의 열매는 모두 각기 다르다. 성도마다 다르기에 예외적이다. 모든 성도에게 같은 열매를 기대할 수는 없다. 

(3) 성령의 은사
      성령의 은사는 보편적 성격을 전혀 갖지 않는다. 이는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성도는 누구나 자기에게 맞는 은사를 성령께서 주신다. 열매는 동일하게 목표를 향해서가야 한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모두가 같은 목표로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다르게 주신다. 
그래서 순위에서 볼 때 은사는 열매보다 아래에 있다.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내가 갖지 못해도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열매는 다르다. 다른 사람이 사랑의 열매를 가졌는데 내가 그런 열매 없으면 내가 아직 성숙하지 못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나에게 문제가 있고 미숙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은사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 나에게 그런 은사가 없다고 순위에서 볼 때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순차적 차원에서 은사는 따질 성질이 아니다. 전혀 아니다. 
가장 보편적인 것이 가장 귀한 것이다. 성경적으로 볼 때 그렇다. 여기서 Being 의 문제와 Doing 의 문제가 나온다. 
성령 세례 - 관계 차원 - 아주 보편적 - Being 의 시작 
성령 열매 - 관계 차원 - 보편 예외적 - Being의 진전  
성령 은사 - 관계 차원 - 특수적     -  Doing 

그래서 예수님도 나무를 보실 때 열매를 보고 안다고 했다. 능력을 나타내는 것을 보고는 그 사람이 어떤 존재(Being) 인지 분명하게 알 수가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Being에서 Doing 으로 가는 과정에서 점점 차원이 낮아진다. 보편적인 것이 가장 귀한 것이다. 특수한 것을 추구하는 습성이 나쁜 것은 아니나 거기에 매이면 안된다. 
나도 목회를 하고 설교를 하면서 많이 깨닫는 것이 있다. 너무 특수한 설교를 하면 보편적 어필을 못한다. 너무 튀는 설교를 하면 어필을 못한다. 설교를 전체에 맞추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기막힌 성경의 깨달음을 가지고 새로운 성경적 통찰을 주는 것도 좋지만 독특한 것만 터치하려는 것은 공감을 얻지 못한다. 그러기에 진정으로 튀는 설교는 가장 보편적 설교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말씀하는 것도 너무 튀려고 하지 말라고 한다. 순차적으로 볼 때 이는 가장 낮은 것이다. 그래서 그가 가장 위대한 은사는 사랑이라고 한다. 사랑이라는 것이 가장 큰 은사인데 사랑의 은사라고 하면 사람들이 이를 주목하지 않는다. 사랑을 쉽게 생각한다. 아무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특별한 은사, 남다른 은사, 남에게 과시할 은사를 추구한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바로 여기서 생긴다. 바울은 진정으로 위대한 은사가 사랑이라고 아주 쉽게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보편적인 사랑의 은사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고린도 교회처럼 사람들은 너무 특수한 것에 집착하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이단으로 나가게 된다. 우리의 신학이나 영성이나 목회 방법에 있어서 너무 특수한 것에 집착하면 안된다. 어떤 이들은 세례, 열매, 은사에 순서가 없이 다 중요하다고 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런데 바울은 “내가 가장 좋은 은사를 보이겠다” 고 말한다. 분명히 순서가 있다. 신학은 이런 섬세한 부분을 다뤄주어야 한다. 예수님도 열매와 능력 사이에 우선순위를 두신다. 우리가 중감당하는 설교에,  우리가 감당하는 사역에 이런 보편적인 방향을 가져야 한다. 무게 중심에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도들이 혼란스러워 한다. 

물론 열매나 은사는 상호 보완적인 면이 있다. 절대 둘을 나누어 버리면 안 된다. 뚜렷한 선을 그으려고 하면 안된다. 다만 이런 설명을 하려고 할 때 선을 구분하는 방법이 필요하다. 예수님도 극단적 사례를 통해서 Being 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계신다.  

이 부분에 대해서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성령의 열매든, 성령의 은사든 모두 구원을 돕는 차원에서 말해야 한다. 거듭나고 천국 가는 특수한 의미의 구원이 아니라 광의의 의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주권에 순종하고 주님을 따라 살아가는 모든 언약적 관계를 위한 열매와 은사가 되어야 한다. 구원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 자체로 과시용이 아니라, 프리미엄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구원을 위한 것이라는 분명한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 
70인 제자가 전도한 후에 돌아와서 자신들에 임한 능력을 행했다고 보고한다. 그러자 예수님이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한 그 능력을 보고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신다. 
눅 10:17-20  “(눅10:17)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눅10:18)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눅10:19)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눅10:20)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가장 보편적인 것이 하늘의 생명책에 우리 이름이 기록된 것이다. 이를 가장 기뻐해야 한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깨어졌던 언약적 관계의 회복이기에 귀하다. 열매를 가졌던 아니든, 은사가 있는 아니든 가장 기뻐해야 할 제목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은사를 무시하거나 사용하지 말라고 하신 적이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하라는 것이다. 

미국이나 영국 등 서양 교회를 보면 기독교가 도덕이나 윤리 철학으로 많이 치우쳐 있다. 서양의 교회는 긴 기독교 역사와 전통과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오랜 전통과 신학적 업적과 연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덕과 윤리 철학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문제가 있다. 너무 지나치게 성령의 사역을 배제하면서 성령의 주권적 초월적 기적적 역사, 성령의 개입과 직접적 관여를 제거하여 버리니까 결국 남는 것은 도덕과 윤리와 철학만 남는다. 기독교가 윤리화 철학화, 사변화 되어 버리고 만다. 서양의 교회의 상당수가 그렇게 되어 간다. 반면 우리 한국 교회나 동양의 교회는 기독교 역사가 짧다. 항상 기독교가 들어오면 부흥 운동으로 시작한다. 강력한 부흥운동으로 교회가 세워지고 폭발적 성장과 교회 부흥이 일어난다. 그러다 보니 기독교가 생활로써 문화로써 정착하는 것이 약하다. 역사가 짧기에 당연한 것이다. 어디서나 기독교가 들어가면 부흥으로 먼저 일어나고, 다음으로 성화로써 생활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 나라는 아직 후반 성화가 약하다. 서양 교회에서 배워야 한다. 서양의 교회는 생명력이 없어지는 것이 문제이다. 동양의 교회는 생명이 철철 넘쳐 흘러나는데 성령의 폭발적 역사와 부흐을 통해서 뜨거운데 생활이 부족하다. 동양 교회는 열매가 부족하다. 서로에게 배우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IMF를 거치면서 동양적 가치의 부족에 대해서 많은 의문이 일어났다. 동양적 가치관에 약간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지적 중에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서양은 계약 문화가 중요한 반면에 동양은 혈통 문화라는 사실이다. 학연 지연 등이 모두 계약 관계보다는 혈통관계이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학벌로, 지역관계로 나가는 것을 좋아하고, 법적으로 따지는 것을 싫어한다. 우리의 문화가 혈연, 지연의 문화이기에 그렇다. 언약이란 것이 서양에서는 중요한 것으로 자리잡고 있다. 서양의 문화에서 약속을 어겼다는 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가 된다. 신용의 상실을 의미하고 그것은 곧 사회에서의 도태를 의미한다. 

적은 단위의 모임에서는 이런 혈연 관계가 좋다. 정이 있다. 한국에 오면 정이 많다. 이것은 좋다. 일부분 필요하다. 그런데 서양은 개인주의 문화이다. 정이 약하다. 그런데 단위가 커지면 국가 단위나 큰 공동체에서는 정으로 이끌 수가 없다. 그런 경우에는 계약으로 인도하는 것이 훨씬 편하고 유리하다. 도덕성이나 윤리나 계약이 강조된다. 큰 조직으로는 훨씬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가정 단위의 그룹에서는 정이 많은 것이 좋다. 혈통에서는 웬만한 것은 다 용납이 된다. 서양에서는 심지어 가족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고소하고, 어머니를 고소하기도 한다. 서로간에 하겠다고 약속한 것을 이행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고소를 해버린다. 약간 살벌하지만 계약 문화이기에 그렇다. 너무 심한 것은 좋지 않다. 그런데 국가적 민족적 차원에 이르면 달라진다. 그 때는 진정한 경쟁력으로 말해야 하는 단계인데 여기에 이르면 달라진다. 법으로 나오고 계약을 맺어진 조직 앞에서는 국가적 경쟁력이 아주 밀리게 된다. 
내가 97년에 한국에 들어오면서 곧 IMF가 시작되었다. 모든 과정을 살펴 보았다. 그러면서 느낀 것이 우리에게 이런 환난이 오는 것은 계약 문화가 약하기에 그렇다는 생각을 했다. 국가 경쟁력이 강해지려면 이런 계약 부분에서 강해져야 한다. 언약 신학자로서 그런 생각을 했다. 언약이 교회의 모든 부분에 뿌리를 내릴 때 나라와 국가의 경쟁력을 좌우할 수 있는 힘이 나온다. 

  
                               Ⅶ

[로드십]
이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로드십이다. 사실상 지금까지 말해 온 주제는 로드십이다. 성령도 이 로드십을 세우는 부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지금 전투적 영성, 성품적 영성 두 줄기를 보면서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가지고, 적합한 주종관계를 이룰 때 균형있는 신학이 되는 것이다. 
   성품적 영성   -------  전투적 영성 
   열매를 강조   -------  은사를 강조    
   순종을 강조   -------  일을 강조                  
   Lordship 회복 -------   Lordship 무시                        

순종이 없는 영성은 있을 수 없다. 순종이 제외된 영성은 성경적 영성이 아니다. 성경 전체에 보면 이런 흐름이다. 사울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아주 유명한 말씀이다. 순종은 바로 열매로 연결된다. 물론 은사를 통해서 순종하는 법을 배울 수도 있다. 도움이 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순종은 성품의 측면이다. 오히려 일을 잘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은 순종을 잘 않한다. 대체적으로 그렇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을 보면 그렇다. 은사를 말하면서 순종이 약하면 그것은 분명 문제가 있는 은사이다.   
마 7장에서 열매로써 그들을 알리라고 하신다. 열매를 가진 자를 천국에 들이신다. 그리고 능력의 은사로써 귀신을 좇아내고 병을 고친 사람들을 천국문에서 거절하신다고 한다. 이는 둘을 완전히 구별해서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순서 문제를 말하고자 함이다. 분명히 이론적으로는 올바른 은사를 받았으면 올바른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은사를 가지고 능력을 행한 자들을 천국에 들이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성품적인 것은 순종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리고 이 순종은 그리스도의 주권사상, Lordship 으로 나타나야 한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주권사상이 가장 강조되는 사상이다. 그런데 순종은 도덕적 순종이 아니라 전적인 위탁으로 생기는 순종이다. 맡김으로 이루어진 순종이다. 믿음에서 나온  순종이다. 믿고 위탁하지 않으면 순종할 수 없다. 내가 순종했을 때 순종에 대해서 책임지는 분이 계신다. 책임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순종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정직이 사라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무리 정직하게 살아도 누군가가 책임져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정직하게 살려고 하지 않는다. 성숙한 사회일수록 평시민들의 의식속에 내가 정직하게 살면 이 사회와 국가가 나를 책임져준다는 믿음이 있다. 국가와 시민간에 이런 신뢰와 위탁의 관계가 형성되어야 법을 지킨다. 
믿음의 사람은 이래야 한다. 내가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 우리 순종은 율법주의적 순종이 아니라, 도덕주의적 순종이 아니라, 행위적 순종이 아니라, 주님께 모든 것을 맡김으로 인해서 이뤄지는 순종이다. 신뢰와 위탁에서 나온 순종이어야 온전한 순종이다. 이것이 로드십에서 나온 순종이라는 의미이다. 순교는 무엇인가? 로드십에 대한 순종의 가장 위대한 표시이다. 내가 생명을 주님께 드릴 때 이것까지도 주님께서 책임져 주신다. 로드십이 가장 위대한 표현이 순교이다. 이런 각오가 없으면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며 주님을 좇아간다는 것이 목회의 철학이 되기 어렵다. 내가 매사에 주님을 믿고 신뢰하며 순종하는 것이 올바른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매일 이런 싸움을 해야 하는 것이 신앙이다. 

그런데 이를 알면서도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내가 보기에 유익하고, 내게 좀 더 편하고 하기에 선택하기 어렵다. 쉽게 되지 않는다. 시간이 걸린다. 언약 중심의 목회, 개혁주의 신학으로 목회하는 것이 어렵다. 시간이 걸린다. 신학생들이 학교에서 신학은 개혁주의로 배우고 나가서는 개혁주의 목회를 안하려고 한다. 영광의 신학이 아니고, 십자가 신학이다. 십자가 신학의 열매는 금방 보이지 않는다. 항상 목회자가 오래 기다려야 한다. 언제나 앞서 희생하여야 한다. 항상 균형을 이뤄야 한다. 그래서 개혁주의 신학과 목회가 어려운 부분이다. 
어떤 이는 굳이 열매와 은사를 구분할 필요가 있는가, 상호보완적인 것이 아니냐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칼빈주의 신학을 하고 그대로 목회한다는 것이 약간 복잡하다. 그런데 목회 현장은 결과를 중시하고 가시적 결과를 언제나 요구한다. 그래서 어렵다. 하지만 그래도 궤도수정을 과감하게 해야 한다. 우리가 이를 잘 알고 있어야 궤도 수정을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가시적 영광과 명예를 추구하다가도 이것이 아니다 싶으면 본질로 돌아가고 주님의방법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발전하고 주님의 뜻 가까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언약의 대주제는 Lordship 이다. 우리의 구원과 성화론이 전부 이 로드십으로 요약이 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 결국 로드십을 위한 것이다. 누가 우리 인생에서 왕노릇을 하는가? 이런 문제이다. 구원이란 포괄적으로 보면 로드십이다. 거듭나는 것도, 성화도, 온전한 성도를 만드는 것도 로드십을 세우는 것이다. 
롬 6:1-5  “(롬6:1)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롬6:2)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롬6:3)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롬6:4)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롬6:5)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언약 메타포어에 크게 세 가지가 있다. 혼인 메타포어(남편과 아내), 부자 메타포어(아버지와 아들), 왕과 백성 메타포어 이다. 이 세가지는 모두 ‘동거’ 같이 거한다는 관계성 중심의 메타포어를 의미한다. 이 셋 중에서도 가장 적합한 메타포어가 혼인 메타포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와 성도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나타난다. 혼인 관계는 도덕적 행위적 관계가 아니고, 파워의 관계도 아니다. 어떤 행위로 만족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파워를 동원해서 힘으로 해결할 관계도 아니다. 아주 신비한 인격적 관계이다. 

그래서 팔머 로벗슨 교수의 책을 보면 ‘언약은 어머니와도 같다’ 고 한다. 어머니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어머니는 나를 낳아준 분이다’ 라고 한다고 어머니에 대하여 제대로 정의되는 것은 아니다. 낳아주고, 길러주고 모든 사랑과 모든 은혜를 베푼 분이다. 마찬가지로 팔머 교수는 우리가 언약을 쉽게 정의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물론 언약을 정의 내릴 수는 있다. 종교적인 것, 행위적인 것으로 언약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면 쉽게 내릴 수 있다. 종교라는 것을 행위 위주로 정의하면 쉽게 정의를 내릴 수 있다. 종교를 파워 중심으로 정의를 내린다면 이것도 쉬운 일이다. 그러나 언약이라고 들어가면 정의가 어려워진다.  마치 어머니의 정의를 내리는 것이 어렵듯이 말이다. 그런데 모든 종교는 정의를 내리기 쉽다. 둘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도덕과 행위, 아니면 신비와 파워 이다. 신비를 추구하면 파워 중심으로 나갈 것이다. 도덕과 파워는 언약 관계의 변태적 행위이다. 도덕과 파워도 언약 관계의 다른 모습이다. 그런데 사람들도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 원한다. 다만 도덕이나 아니면 파워를 통해서 변태적인 방법으로 관계를 맺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죄인 것이다. 

그런데 혼인 메타포어는 신비한 관계이다. 도덕도 파워도 아니다. 이런 메타포어를 가지고 영성을 추구하는 것이 언약신학이다. 이것이 언약신학이다. 로드십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우리 왕으로서, 그리스도가 우리 주권자로서 오신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충성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분에게 모든 것을 위탁함으로써 나오는 순종이다. 이는 도덕적 관계도 아니다. 일방적인 파워관계도 아니다. 일방적, 초월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로드십을 정의 내린다면 ‘전적인 위탁에서 나오는 순종’, ‘믿음에서 나오는 삶’ 이다. 이것은 믿음에서 나온 위탁이기에 도덕적인 것이 아니다. 또한 이것은 삶이고, 순종에 관한 것이기에 초월적인 것이 아니다. 로드십은 도덕도 초월도 아니다. 혼인 메타포어는 도덕도 초월도 아니다. 

단순한 순종이라면 도덕으로 표현이 가능하다. 행위적으로 노예적으로 하라는 것을 하며 된다. 그러나 우리는 위탁에서 나오는 믿음으로 하는 순종이다. 그러기에 도덕이 아니다. 반면 이것은 지나친 초월이 아니다. 삶의 이야기이다. 순종의 이야기이다. 중도의 개념을 갖는 것이 로드십이다. 이 균형이 언약 신학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본질이고, 핵심이다. 내가 언약 신학에 대해서 가장 매력을 갖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기독교는 도덕도 초월도 아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약정을 맺으셨다. 하나님은 은혜로 오셔서 우리와 관계를 맺으신 분이다. 로드십이 기독교에서 가장 매력적인 것이다. 언약신학에서 보면 로드십이 가장 큰 신앙의 목표요, 영성의 목표가 된다.    
창조를 생각해 보자. 언약 신학에서 창조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창조의 중심 주제는 창세기 1-3장에 나온다. 이 부분을 언약 관점에서 본다면 로드십을 중심으로 이해한다. 팔머 로벗슨은 ‘계약신학과 그리스도’ 책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는 바로 로드십을 드러내 준다. 금단의 열매에 대한 시험은 로드십에 대한 시험이었다. 그 시험에서의 실패는 곧 아담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왕, 제사장, 선지자로서 지음 받은 언약적 대표자로서 로드십에서 실패한 것이다. 이 문제의 심각성은 단순하게 선악과를 먹었는가, 아닌가 라는 행위에 있지 않다. 언약의 대표자로서 언약의 머리로서, 제사장으로서의 실패이다. 로드십에서 실패한 것이다. 
내가 볼 때 제사장과 로드십 이라는 두 가지 주제가 일맥 상통하고 있다. 언약 신학에서 로드십과 제사장 주제가 나에게 가장 큰 매력을 준다. 제사장과 로드십! 우리의 봉사, 섬김, 전도 모든 것을 제사장적 관점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성경은 제사장적 소명을 구원론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단순한 속죄론적 제사장이 아니라 성화론적 제사장이다. 크리스챤 라이프, 삶으로써의 관점에서 본 제사장이다. 속죄론적으로 보면 오직 그리스도만이 제사장이다. 반면 성화론적을 보면 우리는 제사장이다. 

지난 강의에서 본 것과 같이 이 주제는 아주 중요한 것이다. 로마서 15장에서 이에 대한 중요한 내용이 나온다. 
(롬15:16)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전도나 선교를 제사장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 또한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섬김의 삶이요, 대속물로 주려는 생애라고 하신다. 
(막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리스도게서도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함이다고 하신다. 섬김과 봉사를 제사장적 소명에 연결하신다. 자신의 제사장적 소명을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섬김과 봉사를 연결시킨다. 
아주 매력적인 이야기이다. 로드십과 제사장적 삶! 로드십을 말할 때는 기독교 진리가 도덕도 초월도 아니고, 그 중간에 위탁에서 나오는 순종이라고 했다. 제사장적 소명에 의해서 우리가 전도와 선교, 모든 봉사가 이 삶에 포함되어 있다. 언약 신학의 매력 포인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의 전도와 봉사, 섬김, 선교는 제사장적 소명에 의해서 하는 것이다.   

내가 이 사실을 성도들에게 가르쳐 주었을 때 눈이 휘둥그레지고 새로운 깨달음이라고 탄복했다. 우리가 축복 받기 위해서 전도하고 섬기고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제사장적 삶을 사셨다. 그리고 우리도 제사장으로서 섬기고, 봉사하고 전도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매력 포인트이다. 이것을 잡으라. 이 두가지 매력 포인트에서 언약 신학의 모든 갈래가 나오는 것이다. 

팔머 로버트슨 교수는 창조에서의 금단의 열매 시험의 실패는 로드십의 실패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하신 일은 로드십의 회복이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육신의 삶을 회복시킨 것이나, 영적인 영역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 생활의 모든 것을 회복시킨 것이다. 금단의 열매는 모든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창조의 역사와 금단의 열매의 시험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서 개혁주의 언약신학과 근본주의 신학이 갈라진다. 팔머 교수는 근본주의가 지나치게 이 금단의 열매를 영적으로만 해석하기에 영과 육을 분리시키는 문제를 낳는다. 세대주의도 마찬가지이다. 팔머 교수는 세대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성경적 신학이 아니고 철학적 신학이라고 지적한다. 왜? 영과 육을 분리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가 따로 있고, 육적 이스라엘이 따로 있다. 이는 형이상학적인 것이라고 한다. 성경적 해석에서 나온 차이라면 정당한 명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팔머의 지적은 이는 철학적 접근으로 인해 나오는 신학이기에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영육 구분으로 접근한 것이다. 이것이 개혁주의와 근본주의의 가장 큰 차이이다. 성경해석의 차이가 아니다. 개혁주의는 성경적 개념에서 출발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철학적 개념에서 출발했다. 완전히 하늘과 땅의 차이처럼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래서 이 부분을 말하면서 팔머 교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뤄진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창조 구조에 반대되는 방법으로가 아니라 창조 구조에 부합하는 방법으로 구원을 이루신다. 새 창조의 의미, 구원의 의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로드십을 회복하는 의미가 창조 때에 의도하신 인간, 창조 때 의도하신 세상의 목적에 반대되는 쪽으로가 아니다.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방법으로 구원을 이루신다. 그것은 복음 안에서 비로소 진정한 창조의 본래 의도가 완성된다. 창조에서 의도하신 바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권을 인정하는 방법으로 일하실 것이다. 이 세상에 대해서 책임을 지라. 이 세상을 통해서 나에게 영광을 돌리라. 여기서 노동이 있고, 결혼이  있고, 안식이 있다. 창세기 1-3장에서 보여주신 창조의 목표가 노동, 결혼, 안식이다. 
노동은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 하는 것이다. 혼인은 “남자와 여자를 만들고 혼인을 하라”고 하신다. 그 다음에 안식을 주신다. “안식하시니라 안식일을 복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 모든 것을 통해서 우리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다. 그런데 이 모든 의도가 복음 안에서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창조에 부합되는 방법으로 복음 안에서 살아야 한다. 

흔히 창 1:28절을 ‘문화명령’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문화 명령도 결국 로드십 안에 포함되는 것이다. cultural mandate. ‘문화 명령’ 말고 ‘지상 명령’이 있다. evangelical mandate, 혹은 Great Commission 이라고 한다. 문화 명령은 첫 창조에서, 지상 명령은 새 창조에서 이루어진다. 첫 창조의 실패를 회복하는 것이다. 
문화 명령 - Cultural Mandate - 창세기 1:28 - 첫 창조 - 실패 
지상 명령 - Evangelical Mandate - 마 28:18-20 - 새 창조 - 회복  

예수 믿으면 탈퇴가 아니라 회복이다. 예수 믿으면 가정을 떠나는 것이 아니고, 가정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 믿으면 직장을 떠나는 것이 아니고 직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 믿으면 사회를 떠나는 것이 아니고 사회로 돌아가야 한다. 탈피나 탈퇴가 아니라 회복이다. 문화 명령에 충실하는 것이 진정한 복음 안에서의 삶이다. 
현재 문화는 죄 때문에 변질되어 있다. 문화가 변질되었기에 가정, 사회, 예술이 다 망가진다. 그런데 이 망가진 것을 보고 탈피하는 식의 복음을 가지면 안된다. 이를 회복하는 복음이어야 한다. 지상명령, 문화 명령을 로드십의 개념으로 보면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고 서로 부합되는 일을 한다. 


문화적 측면, 윤리적 측면
여기서 매력적인 것이 다시 나온다. 언약이란 개념이 분명히 말했듯이 도덕이 아니다. 도덕으로 만족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절대 언약 신학이 도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언약 신학을 하게 되면 더 도덕적으로 가게 되어 있다. 마치 혼인 메타포어에서 도덕으로 혼인 관계를 만족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진정한 언약 관계를 유지하는 부부사이에서는 가장 도덕적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매력적인 것이다. 우리가 문화로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도덕으로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예술로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그러나 복음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도덕적으로 산다.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문화를 소중히 여긴다.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의 아름다운 것들을 인정하게  된다. 자꾸 상반되는 방향으로 가지 않고, 부합되는 쪽으로 간다. 
세대주의는 철학적 개념으로 영과 육의 분리, 신플라톤 주의, 아리스토 텔레스의 철학에 의해서 영과 육이 분리된다. 그러면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상반되게 본다. 그러면 구원은 창조 질서를 회복하는 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육적인 것으로 본다. 노동, 혼인이 다 육적인 것이다. 영육을 분리하면 그런 신학적 구조로는 복음을 받으면 문화로부터 세상으로부터 자꾸 탈피하게 되어 있다. 언약 신학은 아니다. 구조상으로 복음을 받으면 문화로, 세상으로 자꾸 들어가야 한다. 우리가 믿는 신앙과 신학은 구조적으로 필연적으로 세상에 들어가 로드십을 회복하고, 제사장적 삶을 통해서 모든 것을 회복하여야 한다. 

우리가 하는 설교나 강의가 이런 건전한 신학과 신앙으로 일관성을 가지고 성도들을 인도해야 한다. 한국의 신학은 이런 점에서 개혁주의적 신학, 언약주의적 신학으로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다. 좀 더 개혁주의적 신학에 노출될 필요가 있다. 성도들이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상반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분위기가 전반적이다. 그래서 ‘문화를 중요시 여겨야 한다’거나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 고 하면 영적이지 않은 것처럼 이해한다. 기초가 아주 약하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바탕이 바뀌어서 아주 튼튼해져야 적극적 적용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처음부터 너무 강하게 적용하지 말고 상황에 따라서 적절하게 적용을 시키라. 

교회에서 문화 활동을 하는 일을 잘 해야 한다. 현재 우리 교회에 출석이 900명 정도이다. 영어 하는 장성한 2세가 300명 정도 된다. 남은 세대는 우리 말을 사용하는 세대이다. 그 중에 청년 들이 500명 정도 된다. 청년 위주의 교회이다. 과거에 아주 청년과 1세대 사이의 마찰이 많았다. 청년들은 문화를 원하고, 예배의 개혁을 원한다. 그러나  1세대는 대다수가 이를 거부한다. 장로들 12명이 전부 60대이다. 내가 이제 40대이다. 60대 장로들이 30대 목사를 데려 오기로 결정한 것이다. 먼 미래를 생각하면서 청년의 정서에 맞고, 영어와 한국어를 다 사용할 수 있는 목사를 찾은 것이다. 32년 된 교회인데 아주 전통적인 보수교회이다. 영과 육을 분리하는 것이다. 영적인 생활과 육적인 생활이 다르다. 교회 안에서 문화를 말하면 반대하는 철저한 분위기이다. 내가 부임해서 개혁신학을 가르치고 설교를 계속하니 전체적으로 익숙하지가 않다. 은퇴하신 원로 목사님이 60대 중반에 은퇴를 했는데 내가 적응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내가 교회에서 절대로 신학이란 단어나, 개혁주의 라는 단어조차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설교 용어로 풀어서 쓴다. 
지금 다시 여기서 강의해 보니 설교보다 강의가 더 쉽다는 생각이 든다. 개혁주의 신학의 토대를 잃지 않으면서 성도들이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용어로 풀어서 설명하고 적용해 주어야 하는 설교는 매 주일 진통을 겪는다. 강의는 이론적으로 꿰고 있으면 강의는 가능하다. 그런데 설교는 영성이 없으면 안된다. 목회자 안에 복음의 은혜, 십자가의 피묻은 복음이 넘쳐야 한다. 성도들을 향한 사랑이 항상 넘쳐야 한다. 이것이 완전히 구비가 되지 않으면 설교가 되지 않는다. 주일 낮 설교 30분 이내에 한 주의 모든 승부를 걸어야 한다. 여기서 죽 쑤면 아주 맛이 간다. 여기서 내가 배운 원칙이 있는데 ‘설교를 결코 2주 연속 죽 쑤면 안된다’는 사실이다. 한 주 실패하면 다음 주에 반드시 회복해야 한다. 강의는 사람이 자꾸 바뀐다. 그리고 한 것 다시 해도 된다. 그런데 성도는 아니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같은 설교는 안 통한다.    

그런데 이런 설교를 하고 강의를 하면서 시간이 흐르자 사람이 변화된다. 이들을 보면서 희열을 느낀다. 이런 목사가 오니 처음에 몇 사람이 안 맞는다고 떠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적응이 되었다. 이제는 교회를 부흥시키는 일이 남았다. 바른 개혁주의 신학을 가지고 관계 중심으로 이끌어 가면서 전도와 부흥을 제대로 하게 하는 것이 숙제로 남았다. 이 일이 다 쉽지 않다. 교인들은 새로운 목회자에 대해서 뭔가를 기대한다. 주위의 교회를 보고 상대적으로 비교하면서 바라본다. 젊은 목사가 왔으니 선풍적 바람을 일으켜 주길 기대한다. 말은 드러내고 않하지만 그렇다. 강의 잘 해놓고 결국은 부흥으로 왔다. (폭소)
문화를 풀어낼 수 있는 신학, 문화를 수용할 수 있는 신학, 단순히 문화가 좋아서 좋아하는 문화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렇게 몰려 가니까 우리도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신학이 그러해서 문화를 수용하고 만들어 가는 것이다. 우리가 개혁주의를 하고자 작정한 이상은 우리 목회를 배운 대로 하는 것이 필요하다. 매력 포인트를 잘 알고, 그 매력 포인트를 위해서 연구하고, 그런 책을 선택해서 읽으라. 이런 것을 지향하는 설교집을 선택해서 읽으라. 아무 책이나 읽지 말라. 많은 책들이 내용은 아주 좋은데 무게 중심은 알미니안적인 것들이 많다. 우리가 개혁주의 신학다운 것을 사랑하고 그런 신학을 강단에서 풀어내고 사용해야 한다. 주관이 있는 공부, 주관이 있는 신학을 하라. 세미나만 좇아 다니지 말고, 프로그램만 찾아 다니지 말라. 개혁주의적으로 설교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라. 배우라. 
여기서 기독교 세계관이 다시 대두된다. 기독교 문화, 기독교 윤리, 기독교 세계관이 결국 언약에서 도출이 된다. 새 언약에서 더 포괄적인 의미로서의 언약적 삶을 누려야 하는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복음과 율법,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있어서도 로드십으로 풀어나가라. 복음과 율법의 관계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테크니컬하게 풀어나가려 해서는 안 된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개혁주의 교단에 속하여 칼빈주의 신학을 공부하게 하시고 어떻게 하든 배운 것을 신앙과 영성과 삶에 적용하여 개혁주의적 목회를 하게 하소서! 어렵지만 공부와 연구에 힘써서 사역과 공부 사이에 균형을 잡게 하소서! 우리가 바람직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언약에 근거하고 로드십에 근거한 목회를 하게 하소서! 
 


                        Ⅷ

제가 4년 전에 교수로서 강의할 때와 지금 목회자로 강의하는 것을 비교하면 많이 부드러워졌다. 남들도 그렇게 이야기한다. 예리한 면이 없어졌다. 나는 이것이 좋은 것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다른 교수님들이나 목회자들이 이를 좋게 평가해준다. 아마 목회를 하면서 제가 관계 중심에 더 눈이 열리고 언약 신학에 대해서 실제적이 되어 가는 것 아닌가라고 이해하는 것 같다. 

오늘 강의 주제는 복음과 율법이다. 복음 안에서 자유를 강조한 사람이 마틴 루터이다. 그는 신학에서 자유라는 주제를 강조한다. 복음 안에서의 자유가 강력하게 나타난다. 칼빈은 그 자유 안에서 순종하는 법을 가르쳤다. 신학적 균형의 관점에서 본다면 칼빈이 더 균형 있는 신학을 가르쳤다. 조금 복잡해진 경향은 있으나 균형 잡으려면 말이 많아지고 조금 딱딱해진다. 그런데 성경에는 2 가지 종류의 자유가 있다. 먼저는 구원론적 관점에서 자유가 있다. 율법의 정죄로부터의 자유이다. 이것이 구원론적 의미에서 자유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로부터, 정죄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는 죄와 사망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다. 이것이 구원론적 자유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이 이루지 못한 언약을 우리를 위해 완성해 주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아담이 실패한 언약을 성취하심으로 율법의 정죄로부터 해방시켰다. 우리를 대표한 아담의 자손인 우리를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종으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새 백성으로 우리를 만들어 주셨다. 이것이 자유요, 복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완성이 되셨다. 그것은 아담이 이루지 못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셨다. 

아담에게 주어진 언약은 순종의 언약이라 불린다. 아담이 이루지 못한 순종의 언약을 이루지 못함으로 그리스도가 성취하심으로 율법의 정죄로부터 구원하셨다. 이것이 구원론적 의미에서의 자유이다.
그런데 다른 의미에서의 자유가 있다. 그것은 옛 언약으로부터의 자유함이 있다. 은혜의 시대 안에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새 언약의 시대에 산다.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되었다. 옛 언약으로부터 우리는 실체를 보게 되었다. 더 이상 우리는 그림자에 속한 시대에 살지 않고 실체의 시대에 산다.
(히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자유는 자유인데 약간 다른 자유이다. 은혜 시대 안에서도 옛 언약의 시대가 있고, 새 언약의 시대가 있다. 그래서 우리가 이를 구분해야 한다. 시대적으로 보면 우리 역사는 크게 창조, 타락, 은혜의 시대, 완성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나뉜다. 그러면 새 언약의 시대와 옛 언약의 시대로 나뉘는 것이 은혜의 시대에 있다. 은혜의 시대는 구속의 시대를 말한다. 

이 차이를 잘 그려주는 것이 히브리서이다. 구속사적으로 히브리서가 이 두 시대를 잘 설명해 준다. 갈라디아서도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에게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시대를 비교하고 있다. 율법과 복음을 나눌 때 율법은 옛 언약의 시대를 말한다. 율법은 복음에 반대되는 의미에서 율법의 시대가 아니라 은혜의 시대 안에서 옛 언약에 속한 시대를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약간 헷갈린다. 율법의 시대는 복음의 반대로서가 아니라 같은 복음인데 복음이 나타나는 구속사적 과정에서 이스라엘이 아직 어린 아이일 때 몽학선생의 아래서 있는 것이다. 그것이 율법의 시대이다. 새 언약 아래서 복음의 시대를 은혜라고 말하는데 복음 안에는 율법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시대적 흐름 가운데서 새 언약이 성취되었다는 의미에서 복음의 시대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시대라고 해서 복음이 없는 것이 아니고, 복음의 시대라고 해서 그 안에 율법이 없는 것이 아니다. 잘 이해해야 되는 말이다.

이 구조 속에서 복음과 율법을 이해하라. 양자가 서로 상반되는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구속사적 흐름 속에서 몽학선생의 시대와 아들의 시대를 구분하는 용어로서 설명하는 것이다. 구원론적 차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론적 차이를 말하려면 창조와 구속을 비교해야 한다. 구원론적 의미에서의 자유함을 말할 때는 창조에 속한 시대와 구속에 속한 시대를 비교해야만 한다. 그것을 잘 말해주는 것이 바로 로마서이다. 루터가 복음을 로마서 안에서 발견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율법의 정죄로부터의 자유함이다. 히브리서나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자유는 율법의 정죄함으로부터라기 보다는 율법의 옛 언약의 시대에서 새 언약의 시대가 도래함으로써 우리가 누리는 자유함이다. 그림자로부터의 자유함이다. 예언과 약속과 그림자로서 표현된 복음이 실체로, 성취로 나타났다는 의미의 복음이 히브리서와 갈라디아서의 내용이다. 
로마서의 자유함은 복음의 자유이다. 율법의 정죄로부터의 자유는 창조와 구속의 시대를 서로 비교하는 것이다. 아담이 이루지 못한 것을 그리스도가 이루셨다는 의미에서 롬 5장에서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한다. 로마서에는 율법 자체를 나쁘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율법 자체를 불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정죄함으로부터의 자유를 강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본래 의도가 율법주의를 위한 것이 아니다. 율법을 자기 의를 세우는 용도로 사용하게 주신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이런 용도로 사용한 것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다. 갈라디아서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이 지적하는 것은 자기의를 세우는 방편으로 주신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를 자기 의를 세우는 방편으로 사용하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그것이 갈라디아서의 자유이다. 
갈라디아서에는 율법의 정죄로부터의 자유와 옛 언약으로부터의 자유함이 있다. 그래서 루터는 율법의 정죄로부터의 자유를 자기 신학의 주제로 삼는다. 칼빈은 후자도 포함한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옛 언약에서부터 새 언약으로 지나가는 과정에서 자유가 무슨 의미를 갖는가를 설명한다. 

          정죄로부터의 자유             옛 언약으로부터의 자유
          은혜이며 복음이다.            은혜이며 복음이다 - 동일함  
   로마서(아담과 예수 그리스도)     갈라디아, 히브리서(옛언약과 새언약)  
            루터                             칼빈          

창조와 타락가운데서 창 3:15(원시복음)에서 구원이 시작된다. 이 구절부터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 복음이다. 이후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장막을 치는 역사’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와 모든 일은 복음으로 장막을 치는 역사이다. 다만 장막을 치시는데 시대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다. 창조와 구속의 절대적 차이를 분명히 세워야 한다. 구속의 세계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은혜 안에서 이뤄지는 일이다. 그런데 첫 번 째 자유는 창조의 순종의 요구로부터 실패한 것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을 완성하시고 우리에게 의로움이 되심으로 우리가 정죄로부터 자유하게 된 것이다. 두 번 째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인해서 옛 언약, 율법의 시대에 행해졌던 제사법, 사회법, 도덕법의 형태로부터 어떻게 복음의 시대에 달라졌는가를 이해하는 차원이다. 두 가지 관점에서 자유함이 우리에게 필요하게 된다.

원시복음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아브라함의 언약이다. 믿음의 의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신다. 구속이 피흘림으로 말미암아 이뤄질 것을 보여주신다. 율법은 믿음 이후에 온 것이다. 모세 율법은 율법으로 의를 세우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모세 언약은 율법을 가지고 행위로 의를 세우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구속사적으로 이 흐름을 보아야 모세 언약 속에서 주어진 율법의 본래 의도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아담이 실패한 것을 그리스도께서 이루셨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혼란이 없다. 로마서에서도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로마서 전체의 구도는 아담과 그리스도의 비교이다. 아담이 이루지 못한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셨다. 아담이 순종하지 못한 율법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셨다. 로마서 전부가 이런 구도 속에서 진행된다. 그런데 히브리서, 갈라디아서에서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비교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와 히브리서에서 옛 언약과 새 언약으로 주신 두 시대를 비교한다. 이스라엘이 백성들이 율법을 오해하여 자기 의를 세우는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로마서 이해에는 문제가 없는데 갈라디아서 히브리서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약간 헷갈린다. 이 둘 다 은혜의 시대이다. 복음의 시대이다. 옛 언약에서 복음의 의미와 새 언약에서 복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성화적으로, 언약적으로, 윤리적으로 새 언약에서의 복음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율법에 있다.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은 한 마디로 구약은 모형이요, 신약은 실체이다. 내용적으로는 같다. 질적으로는 같다. 그런데 하나는 모형으로 주어지고, 다른 하나는 실체로 주어졌다. 
(히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다. 현재 모형만 왔다. 아직 참 형상은 오지 않았다. 참 형상은 그리스도이다. 모든 짐승의 제사는 모형이었다. 장막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치신 모든 장막은 형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육신으로 장막을 치신 것은 성취이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뤄지고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영원히 거하는 것은 완전한 성취이다. 장막의 완전한 성취이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와 고넬료가 좋은 예가 된다. 이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문제이다. 율법으로부터 자유할 수 없다는 문제가 여기서 발생한다.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자유할수 없다고 한다.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이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목적이 아니다. 율법은 일점 일획이라도 폐지될 수 없다. 율법으로부터의 자유함이 아니라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차이를이해해야 한다. 어떤 율법으로부터는 자유하고, 어떤 부분으로부터는 오히려 율법을 우리의 삶 속에서 로드십의 높은 차원에 대한 순종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이것이 중요한 과제로 남는다. 우리가 율법폐지론으로 나가면 안된다. 잘못된 것이다. 우리의 언약은 도덕이 아니다. 그러나 언약적 관계 속에서는 가장 도덕적인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다. 누군가가 도덕으로 요구하여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감동을 받아서 도덕을 행하게 되는 것이 언약적인 삶이다. 이것이 신앙의 열매이다.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것이 아니라 연속성의 문제를 잘 이해하여서 로드십이라는 차원, 산상수훈의 차원에서 로드십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복음과 율법에서 이것이 키 포인트이다. 우리는 분명히 새 언약 안에서, 성령 안에서 자유로와야 한다. 그런데 ‘자유롭게 사는 것과 로드십에 대해 순종하는 것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 하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는 것이다. 

사실 구원의 문제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 구원 받는 메시지는 단순한 것이다. 믿음으로 구원 받고 하나님의 의를 덧입는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어린 아이나 어른이나 다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구원 받은 후에 어떻게 성화되어 가는가는 단순하지 않다. 성령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면서 동시에 로드십에 대해서 순종하면서 자율적으로 지켜가는가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우리가 피해야 하는 두 극단이 있다. 하나는 율법 폐지적인 성향을 가지는 것이다. 율법 페지적인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된다. 다른 하나는 율법을 구약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율법을 구약적 수준에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율법을 지나치게 구약적으로 적용해서 사제적인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된다. 카톨릭의 모습을 보면 구약적이다. 사제나 형식, 미사 등이 구약적이다. 미사는 엄연히 예배가 아니라 제사이다. 예배와 제사는 조금 다르다. 구약적으로 믿고 구약적으로 교회론을 가지고 있는 것이 천주교이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자유로움을 누리는 동시에 율법을 자원하여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 율법을 폐지해서도 안되고, 반대로 율법주의로 나가서도 안 된다. 
어떤 이들은 생각은 구약적으로 하고, 삶은 신약적으로 사는 사람이 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성경에 구체적으로 명하거나 금하지 않은 것은 그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결정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성경에 금하지 않은 것은 내 자유에 의해 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은 모순이다. 사는 것은 자유롭게 멋대로 살고 싶은데 생각은 구약적으로 율법적으로 하는 것이다. 성경에 금하거나 명한 대로 해야  한다는 것은 구약적 발상이다. 그런데 삶의 동기는 자유롭게 살고 싶어한다. 생각은 구약적으로, 생활은 신약적으로 하고 싶어하는 모순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문제를 잘 이해하지 못할 때 이런 오류에 빠진다. 우리는 생각도 새 언약적으로 하고, 생활도 새 언약적으로 해야 한다. 율법 폐지론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 자유롭게 사는 사람은 오히려 은근히 무엇엔가 속박되기를 바란다. 아주 이율배반적이지만 실제로는 그렇다. 내가 있는 곳의 반대편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무엇인가 쾌락주의적으로 살면서 마음으로는 율법주의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다. 이것은 윤리적 모순이다. 그런데 실제가 그렇다. 진정한 자유가 아닌 이기적인 자유, 죄 안에서의 자유를 누리는 사람은 항상 반대편을 그리워하며 속박 되기를 바란다. 율법주의 성향을 그리워한다. 반대로 율법주의로 사는 사람은 자유를 그리워한다. 그러기에 절대로 율법주의도 행복하기 어렵고, 반율법주의도 진정한 자유를 얻지 못한다. 참 자유나 행복을 누릴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항상 율법주의적으로 도덕주의적으로 경건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실제로는 자유롭게 살고 싶어하며 스트레스를 받는다. 죄 안에서 만족과 희망을 가질 수 있다면 그에게는 복음이 없어도 된다는 말이 아닌가? 사람은 양 극단, 즉 쾌락으로 가든지, 율법주의로 가든지 그 안에 있다.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속박될 때 진정한 자유를 찾는 것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로드십에 속박되고 복음 안에서 자유로운 삶이다. 속박될 것에 속박되고, 자유할 것에 자유해야 사람이 균형이 잡힌다. 율법주의도, 쾌락주의도 진정한 답은 아니다. 모든 것에서 자유롭다면 그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하나님에게서조차 자유롭다는 그것은 자유가 아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행복할 수 없다. 그것이 성경적인 죄론이다. 모든 것을 소유하고 모든 것을 누린다 해도 하나님 안에 매이지 않으면 자유롭지 못하고 행복할 수 없다. 이것이 죄론이다. 진정한 윤리, 진정한 복음 안에서 자유는 속박되지 말아야 할 것에 속박되지 말고, 진정으로 속박되어야 할 것에 대해서는 속박되어야 한다.
로마서에 보면 바울은 이를 죄의 병기, 의의 병기로 설명한다. 사람이 그리스도로 인하여서 죄의 종이던 데서 의의 종이 된다. 결국 사람은 누군가의 종이 된다는 말이다. 사람은 과연 죄의 병기가 되어서 죄의 종으로 사는가, 아니면 의의 종으로 의의 병기로 드리는가? 이 둘 중의 하나이다. 윤리적으로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 사이에 생겨나는 모순이다. 윤리학에서 이 양자 사이에서의 균형을 말한다. 균형점을 찾는다는 것이 윤리학의 초점이다. 그리스도안에서 자유하면서도 로드십 안에서 사는 것이다. 십자가를 메고 예수님을 따르는데 어떻게 보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다. 고난이고 얽매임이다. 그런데 이것이 진정한 자유라는 역설이 기독교 윤리 안에는 존재한다. 

이제 율법을 성취하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다루고 싶다.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율법에 있다.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은 한 마디로 구약은 모형이요, 신약은 실체이다. 내용적으로는 같다. 질적으로는 같다. 그런데 하나는 모형으로 주어지고, 다른 하나는 실체로 주어졌다. 

(히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다. 현재 모형만 왔다. 아직 참 형상은 오지 않았다. 참 형상은 그리스도이다. 모든 짐승의 제사는 모형이었다. 장막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치신 모든 장막은 형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육신으로 장막을 치신 것은 성취이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뤄지고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영원히 거하는 것은 완전한 성취이다. 장막의 완전한 성취이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한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정죄함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셨다는 의미에서의 완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옛 언약의 그림자로부터 실체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첫째는 아담이 순종하지 못해서 성취하지 못했던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순종하심으로 율법을 완성하셨다. 그리고 둘째는 그림자가 실체로 바뀌도록 완성하셨다. 이 두 가지 의미에서의 완성을 성취하신 것이다. 
복음은 율법의 완성이다고 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하셨다고 할 때에 이 말의 의미는 율법의 폐지도, 율법의 대치도 아니다. 오히려 이 말은 율법의 완성의 의미요, 성취의 의미이다. 율법을 더 성숙한 단계로 만드신 것이다. 폐지(abrogation)나 대치(displacement)로서의 의미가 아니다. 완성과 성취로 나아간다. 구속사적으로 볼 때에 더 성숙한 단계로 끌어 올렸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짐승의 제사가 그리스도의 온전한 피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온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폐지도, 대치도 아니고 완전케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온전케 되었는가? 

율법의 종류에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도덕법(moral law), 즉 십계명이다. 그리고 

둘째는 제사법(ritual law), 즉 의식법이고, 

셋째는 민법(civil law) 이다.  


먼저 제사법을 보자. 

   제사법의 핵심 정신은 속죄이다. 속죄에 대한 법이 제사법이다. 구약에서는 속죄가 짐승의 피로 이뤄졌다. 그런데 신약에 넘어오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바뀐다. 피라는 형식은 바뀌었다. 짐승의 피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바뀐다. 피의 형식(form)은 바귀었다. 그런데 속죄의 원리는 더 강해졌다. 속죄는 구약보다 신약에서 더 강화되고 온전하게 되는 것이다. 유월절의 속죄는 덮어주고 넘어가는 것이다. 이것도 은혜의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피는 단순히 덮어주는 정도가 아니다. 양심의 죽은 행실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고 새롭게 하는 힘이 있다. 죄를 유월해 주는 것만이 아니라 온전한 속죄를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이뤄주신다. 형식은 단절이다. 그런데 속죄의 구속의 원리는 계속되어질 뿐 아니라 더욱 더 강화되고 있다. 


다음에 민법을 보자. 

   여기서도 형식이 있고 원리가 있다. 어떤 범죄에 대해서 어떤 벌을 가한다는 형식이다. 그런데 민법에 담겨진 원리는 성결과 거룩이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성결의 원리를 가지라고 하는 것이다. 범죄자를 처벌하는 형식에서 성결의 원리가 전제되고 있다. 그런데 신약에 넘어 오면서 달라진다. 
예를 들어서 간음한 여인을 보자. 존 머레이가 기독교 윤리라는 책에서 이 사건을 통해서 국가적 이스라엘에서 새 이스라엘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설명한다. 형식의 차원에서는 돌로 죽여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용서하신다. 돌로 치라고 하면 사랑이 없는 분이며 말과 행위가 달라진다. 치지 말라고 하면 율법을 어긴다. 예수님은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한다. 돌로 쳐서 죽이라는 형식은 예수님께서 폐하셨다. 이스라엘이라는 언약 백성이 민족의 형태로 존재했을 때에 그 시대에 사용하셨다. 그런데 새 이스라엘로 넘어 오면서 교회 시대가 되었을 때 예수님은 여인을 놓아 주면서 성결의 삶을 살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성결의 원리에서는 양보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적으로 처벌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국가적으로 처벌한 것이 아니다. 영적 새이스라엘 교회 시대적으로 처벌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적 민법을 종결하시고 교회적으로 징계한 것이다. 권징한 것과 같다. 교회는 사법적인 징계를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이고, 영적인 징계를 하는 것이다. 새 언약이 도래해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적 상황이 달라졌다. 그러므로 현재 팔레스틴에 이뤄진 국가 이스라엘에 대해서 성경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 이스라엘 국가를 놓고 종말론적으로 영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 
마 5-7장의 산상수훈에서는 우리에게 더 성숙하여지고 완성된 그리스도의 법을 보여준다. 구약의 신정국가 체제가 신약에 넘어오면서 국가는 국가대로 자기 기능이 있고 교회는 교회대로 기능을 가진모습으로 변화된다. 더 이상 신정 국가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산상 수훈에 나타나는 법의 모습들이 새 언약의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형식은 단절되고 원리를 강화되었다. 

이혼의 사유를 보자. 이혼의 사유가 신약에서는 구약보다 훨씬 더 어려워진다. 거의 이혼하지 말라는 방향으로 나간다. 어쩔 수 없이 이혼하는 경우는 허용하지만 하나님의 원칙에 의해서는 근본적으로 이혼 허용이  안된다. 간음이 구약에서는 사형의 사유였으나 신약에서는 이혼의 사유가 된다. 구약에서는 일부다처제가 허용되었으나 신약에서는 금지된다. 이는 구약과 신약에 있어서 하나님의 기준치가 달라진 것이 아니고 역시 구약 백성들이 아직 영적으로 몽학선생 아래 있는 수준이었기에 그러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완성으로 오셨기에 상대적 윤리가 더 이상 허용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산상수훈이다. 

많은 부분들이 우리가 볼 때에 구약에서는 윤리적인 문제들이 발생된다.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대 원리보다 형식이 더 중시되었던 시대의 문제들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형식보다는 원리가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완성된 시대에 와서는 이런 문제들이 허용될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도덕법을 보자

   도덕법의 원리는 사랑이다. 예수님이 도덕법의 원리를 사랑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로드십으로 주시는 삶의 원리요 방법이기 때문에 구약이나 신약이나 변함이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이다. 신약에서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 것으로  책임을 다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삶으로 가야 한다. 구약에서는 간음을 하지 않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었고 여기서 끝났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단순히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다가 아니고 그 사람을 사랑하는 단계까지 가야 한다. 마음으로 간음한 것도 이미 간음한 상태라고 강조한다. 살인도 마찬가지이다. 육신적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으로 다가 아니다. 마음으로 사람을 미워하면 영적으로 살인한 것과 같다. 도덕법에 있어서 사랑의 원리가 더욱 확대된다.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확대된다. 문자적인 데서 내면적인 데로 간다. 자발적인 것이 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새 언약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사랑의 원리라고 강조된다. 
예를 들어 간음한 여인을 놓고 보자. 간음한 여인을 간음했기에 7계명을 범한 여인이다. 그런데 그 간음한 여인을 사랑으로 용서하지 못하고 정죄했던 사람들은 6계명을 범한 것이다. 여인은 7계명을 범했고, 지도자들은 6계명을 범했다. 사람들이 10계명의 순차로 볼 때에 더 심한 죄를 지었다. 유대인들은 아주 모순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아마 너희는 더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고 말하시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율법의 세계는 정신은 강화되고 형식은 단절되는 방향으로 진전되었다. 이것은 옛 언약의 법에서 새 언약의 법으로 내용이 강화되고 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새 언약으로 오면 규제는 많이 줄었다. 규제는 많이 완화되었는데 요구되는 삶의 수준을 훨씬 높아졌다. 규제는 줄고 수준은 높아졌다. 사실 규제가 많다는 것은 좋은 현상이 아니다. 규제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성숙하지 못하다는 증거이다. 규제가 아예 없다는 것은 또 그것대로 문제가 있다. 경건을 생각해 보라. 모든 삶에 규칙이 없을 수가 없다. 경건의 훈련을 하고 연습에 익숙해지려면 반드시 규제가 필요하다. 규칙적이어야 한다. 순종이 필요하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어느 정도 규제를 할 것이냐가 실제적인 문제가 된다. 
요즘 시대에 와서 점차적으로 젊은이들이 도덕과 윤리 면에 있어서 점차적으로 약해져 간다. 어른을 대하는 기본적인 자세가 많이 무너진다. 우리가 아무리 관계성 중심의 영성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도덕이 아니라고만 할 수는 없다. 이 강의는 신앙생활은 관계중심이지 도덕중심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전통적으로 한국 문화에서 존중해오던 질서가 무너지고 있다. 도덕과 순종과 질서가 무너지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관계를  아무리 강조해도, 사랑을 강조해도 의미가 없다. 이상론적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사는 가정과 목회 현장에서는 기초 윤리가 무너진다. 기초 도덕이 무너진다. 밸런스를 찾으라. 결국 로드십은 매우 이상적이다. 도덕이 아니고 로드십이다. 율법이 아니고 로드십이다. 새 언약에서는 외적인 것이 아니고 내적인 것이다. 문자적 순종이 아니고 사랑으로 해야 한다. 실제적인 이 상황에서 문제가 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속 시원한 대답을 줄 수는 없다. 성경적으로 상위 원칙이 있고, 하위 원칙이 있다. 하위 원칙이 상위 원칙을 위배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너무 규제 중심으로 가면 피곤하다. 관계 중심의 대원리, 사랑 중심의 대 원리가 상처를 입는다. 아이들에게 도덕을 가르치고 행위를 가르쳐야 하지만 관계를 위배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덕을 가르친 후에 관계가 깨어지고 만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른 아이와 어른을 놓고 볼 때 아이들에게는 구체적으로 규제가 많다. 막연히 풀어 놓고 막연히 알아서 하라고 하면서 관계 중심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이것을 이해할 수준이 아닌 사람에게는 이런 일을 말하면 안된다. 어린 아이들에게 로드십을 말하면 이해가 안 된다. 옷을 벗고 일을 돕는 아이들아 모여라! 고 하면 통한다.  구약 시대에는 몽학선생의 도움과 지도를 받아야 하는 시절에는 규제가 많다. 이 시대에는 문자적으로 된 것을 지키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에는 달라진다. 다른 차원으로 바꾸어 주셨다. 
이를 교회와 사회에 적용해 보자. 내가 섬기고 있는 대상. 내가 속한 내 가족, 그 공동체 안에서 그 사람의 영적 수준이 어떤가를 알아 보자. 더 많은 규제가 필요한 상황의 사람이라면 도덕적 내용을 강조하라. 그리고 성숙한 사람의 경우에는 로드십을 강조하라. 내 목회 현장의 구성원들의 대다수가 저학력의 성도들이다 하면 상대적으로 많은 규제가 필요하다. 규제를 통해서 가르쳐야 할 것이다. 내가 대하는 형제들이 이해가 빠르고 총명한 사람들이 되면 좋겠다. 만일 이해에 대한 정도가 그렇다면 구약과 신약의 백성을 구별하는 것이다.    로드십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수준의 성도를 기르라. 이런 성도는 규제보다는 관계성에 의해서 이뤄진다. 
윤리 문제는 이렇게 어려운 문제이다. 

내가 목회자들에게 제안해 보고 싶다.

 첫째는, 도덕적 강령을 빼고 한 달간 설교를 시도해 보라. 

   하라, 하지 말라는 도덕적 내용을 성경에서 빼 보라. 그리고 하라 하지 말라는 도덕적 강요 외에 관계 중심으로만 깊이 설교해 보라. 이런 설교를 시도해 보라. 


 둘째는 이런 후에 한 달이 지나서 성도들의 삶의 반응을 보라. 

   이런 설교 후에 성도들의 반응이 어떠한가? 성경대로 살고 싶어 하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시험을 해 보라. 더욱 열심히 섬기며 살아야 한다고 결심하는지 아니면 이렇게 그냥 쉬라고 하는지를 보라. 관계 중심의 원리는 삶으로 연결되게 되어 있다. 우리 관계 중심의 언약 신학이 반드시 이렇게 설교로 나타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연구하고 대화하는 모든 것이 필요가 없다. 이렇게 설교하고 섬기면 성도들이 목사에 대해서 안다. 우리 목사님이 도덕적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안다. 
언약은 파워 중심이 아니라 관계 중심이다. 파워를 통해서 동기를 부여하고 강압적으로 봉사하게 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관계 중심으로 동기를 유발하게 하고 순종하게 하는 것은 어렵다. 이것이 더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것이다. 
십일조를 보라. 십일조도 언약적으로 설명되었다. 새 언약적으로 설명하면 십의 십조를 바쳐야 한다.     
언약이 윤리와 생활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관계성을 강조함으로써 구약적 수준의 윤리나 봉사가 아니라 예숫님이 말씀하신 산상수훈의 윤리와 도덕을 만들어 낸다. 관계 중심의 신학은 절대로 뜬구름이 아니다. 강력한 윤리와 도덕이 나타난다. 이것이 제가 이 강의를 하는 목적이다. 이상론적으로 말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관계 중심의 강의와 설교가 율법주의로 나간다면 실패다. 좋은 것이 좋다면서 되는 대로 살자, 일하지 말자고 한다면 이런 설교는 실패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새 언약적인 삶이 아니다. 이해가 적어서 그렇다.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고 살기만 하면 강압적 방법을 동원한 봉사보다 더 강력한 동기를 부여하게 된다. 
성령이 강림한 것도 바로 이런 차원에서 오신 것이다. 예레미야 31장을 보라. 
렘 31:31-33  “(렘31:31)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렘31:32)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렘31:33)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 여기서 혼인 메타포어가 나온다. 그리고 장막을  치시는 하나님이 나온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기록하신다. 고린도전서에 보면 우리의 심비에 하나님의 법을 기록하신다. 새언약 이후에 하나님이 하신 것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심비에 하나님의 법을 기록하시고 장막을 치시고 함께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떠나지 않는다.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로드십에 기초해서 살 수 있도록 도우신다. 산상수훈적인 새 언약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 주신다. 
옛 언약에서 우리는 돌비에 적힌 법을 보고 살았다. 그런데 새 언약에 기초한 삶은 우리 마음에 성령께서 기록하신 법을 보며 살게 하신다. 그러기에 언약적 삶, 관계적 삶이 우리가 먹지 못할 그림의 떡으로 온 것이 아니라 실제 그렇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신 것이다. 그러기에 성령의 오심도 로드십으로 설명이 된다. 성령은 우리에게 파워를 주시든, 열매를 주시든, 은사를 주시든 이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장막을  치시게 하신다.  
      
                           

‘언약과 종말론’에 대해서 살펴 보자. 

한국의 종말론은 전통적으로 3가지로 분류된다.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이다. 한국 교회는 전천년설 종말론을 많이 따른다. 전천년설에도 역사적 전천년설과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 있다. 오늘날은 후천년설을 따르는 자가 많지 않다. 


제가 웨민에서 공부할 때 70% 정도는 무천년설이었다. 그리고 나머지가 전천년설주의자였다. 그런데 모두가 양쪽 이론을 다 가르친다. 그러나 어떤 교수도 학생들에게 어떤 입장을 취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교수들끼리 서로 갈등을 일으키거나 이 문제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제가 거기서 받은 느낌은 언약적 관점에서 볼 때, 새창조의 관점에서 볼 때 무천년설에 매력을 느꼈다. 


전천년설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라는 것이 미래적인 사건으로 남아 있다.

   아직 천년 왕국이 미래적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통치권과 주권이 미래적인 것이다. 이들에게는 우리가 아직 하나님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천년왕국의 시대에 가서 거기서 우리는 로드십을 이룬다. 거기서 누린다. 거기서 회복이 된다. 그러기에 전천년설은 천년왕국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된다.그 때 가서 주인과 함께 왕노릇을 하기 위해서 몰두한다. 열심히 미래를 준비한다. 영적인 일에 관심이 아주 많다. 이 땅에 관심이 약하고 천년 왕국을 준비하기 위해서 열심히 영적인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반면에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고 현재 이 세상에서 주님의 주권에 순종하며 살아 가는 것에 약하다. 하나님의 주권과 로드십에 약하다. 아직 왕권이 오지 않았기에 그렇다. 세상으로부터 동 떨어진 2원론적 모습으로 가게 된다.  


무천년설은 다르다. 

  천년왕국은 이미 시작되었다. 이미 천년왕국은 왔고, 이제 완성만 기다리고 있다. 이제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가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시기만 하시면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간다. 이 땅에서 이미 하나님의 왕국이 실현되었다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첫 창조가 새 창조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그러기에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천국의 삶을 즐기고, 천국을 맛본다. 사람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이 회복된다. 그런데 영적인 일에 대해서 열심이 떨어진다. 전천년주의자들은 이 땅에 관심이 적다. 왕국을 준비하기 위해서 그 일을 위해서만 살아간다. 
무천년주의자들은 다르다. 제사장적 성역에 대한 관심이 있다. 기독교 윤리나 사회 활동에 대한 관심이 있기에 열시미 참여한다. 두 이론이 서로 다르다. 문화 활동, 정치 활동 등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동참해야 할 신학적 명분을 갖게 된다. 개혁주의 신학에 충실하고 성경적인 근거에 충실한 종말론은 무천년설이라고 교수들이 간접적으로 인도한다. 그리고 각자가 알아서 선택하라고 가르친다. 

나 개인적으로는 언약 신학을 배우면서 그 중요성을 이해하고 그 언약적 관점에 충실하고 성경에 충실한 종말론이 무천년설이라는 것을 알고 선택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임했다. 사도행전에서도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친다.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고,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에 대해서 가르치며, 성령의 역사하심이 하나님 나라와 관련되었다고 가르친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 생각하고, 하나님 나라의 주권을 세우는 일에 관심을 갖는다. 중생, 선교, 전도 모든 일에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면서 일한다. 중심 포인트가 달라진다. 교회 안과 교회 밖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대표하는 특수한 집단이고, 세상은 하나님이 모든 분야에서 역사하시는 보편적 영역이다. 이렇게 복음이 것이 언약적 포괄적 관점이다. 

그러므로 세대주의적인 종말론을 추종하는 교파들이나 근본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2분법적인 것이 강하다. 웨민에서 나간 학교가 Faith 신학교이다. 이들이 나간 결정적 이유는 종말론에 대해서 분명하게 가르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다. 종말론에 대해서 분명하게 가르치지 않고 둘 다 정보를 주고 선택하게 유도하다 보니 웨민에서 대부분의 교수들이 무천년설을 따르게 되었다. 전천년설을 가르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분개하였다. 자유롭게 선택하게 하다 보니 무천년설 중심으로 학교가 변했다. 그래서 나가 버렸다. 페이스 신학교로 나간 유명한 사람 하나가 프랜시스 쉐이퍼 박사이다. 그가 나가서 유명한 신학자가 되었다. 그래서 두 신학교가 갈렸다. 페이스 신학교에서는 종말론을 보수주의를 결정하는 리트머스 종이라고 결정지어 버린다. 종말론을 보수주의로 믿지 않으면 좌경화라고 못 박는다. 그런데 지금 페이스 신학교가 문을 닫았다. 언약의 흐름 속에서 교수들이 잘 설명해 주고, 스스로 선택하게 한다. 아마 웨민 교수들이 언약적 흐름에서 자연스럽게 학생들이 무천년설을 선택하리라고 믿고 유도했던 것 같다. 이것이 가장 일관성있고 성경과 언약 신학에 충실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천년 왕국을 미래적 사건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은 우리와 다르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키시고 여기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뤄진 것처럼 이루는 것이 남아 있다. 이를 통해서 이 땅에서 세상속에 임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강력한 동기 유발을 일으킨다. 한국 교회가 단순히 부흥만을 외치면 이것 또한 도덕주의나 윤리주의가 되어 버린다. 기독교 윤리 실천 운동을 하는 분들의 말을 들으니 아무래도 기독교 실천을 위해 아무리 말해도 듣는 사람에게 설득력이 부족할 때가 있다. 이들은 실천 자체만을 말하기에 그렇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만을 말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들에게 신학적 배경이 없어서 그런다. 목회자들은 이런 신학적 설득력을 가지고 실천에 힘써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되면 성도들에게 일관성있는 신학을 가르치고, 성화론, 종말론, 신론, 인간론 등을 통일성있게 가르친 후에 봉사와 전도 섬김 등을 요구할 수 있다. 일관성 속에서 우리가 순종하고 윤리를 말하고 생활을 말한다면 파워풀한 메시지가 전달될 것이다.




                         Ⅹ

이번에 강의하고 있는 내용은 녹취를 한 후에 더 손질해서 좋은 책으로 출판하려고 계획하고 있다. 원장님이나 여러 사람들이 주위에서 출판을 독려하고 있다. 지금은 바쁜 나머지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 그래서 녹취를 통해서 책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자 한다.
이제 강의의 결론 부분에 이르렀다. 언약 신학에서 제일 핵심은 ‘하나님의 주권성’과 ‘관계성’ 두 가지이다. 이 두가지는 우리 개혁주의 신학의 두 기둥이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분이시지만 동시에 관계속에서 역사하신다. 어떻게 보면 역설적이다. 인간의 편에서 생각하면 주권과 관계가 동시에 가기가 어렵다. 인간의 논리로는 설명이 어렵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사 방법이다. 

하나님의 주권성  ---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성 
안토니 후크마의 책 「개혁주의 구원론」 에 보면 개혁주의 신학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다뤄야 할 책이 하나님의 주권과 관계성이다. 이것은 역설적 성격을 갖는다고 말한다. paradoxical 한 면을 갖는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만일 우리가 관계를 빼놓고 생각하면 우리 인간의 결정이나 인간의 모든 의지, 인간의 감정 등은 제외시켜야 한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로봇이 되고, 꼭두각시가 된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인격적 존재로 지으셨다.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결정하게 하시고, 체험하게 하시고, 느끼도록 하신다. 우리 경험 속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그러기에 관계를 빼놓고 주권만 이야기하면 지나친 초월주의로 간다. 반대로 주권을 빼놓고 관계만 이야기하면 알미니안주의가 된다. 우리가 결정하는 것에 의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올 수도 있고, 안 올수도 있다. 우리가 결정하고 느끼고, 체험하는 것에 의해서 은혜를 받을 수도 안 받을 수도 있다. 이것이 펠라기우스적인 성격이다.
안토니 후크마 교수는 개혁주의 신학을 하기 전에 대 전제가 있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역사하시지만 관계적으로 역사하신다는 사실이다. 예정론이 언약적 관점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칼빈주의에서도 초칼빈주의가 있다. Hyper Calvinism 이다. 하나님의 역사에서 인간의 의지나 감정, 사상을 다 배제시키는 것이다. 인간이 아무 것도 안해도 구원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구원은 성경적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속에서 역사하심으로 우리 마음을 감동시키시고 감정과 의지를 불러 일으켜서 구원을 이루신다. 이것이 지금 우리 신학의 대전제이다. 우리 설교나 양육, 모든 목회에서 대원리가 되는 것이다. 


일방성과 쌍방성  
하나님의 일방성 가운데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쌍방성 가운데서 우리에게 로드십을 요구하신다. 이것이 하나의 대전제가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흐르고 있는 주제이다. 
조직신학이란 것은 성경의 논리를 취급한다. 성경에 나타난 Logic 을 다루는 것이 조직신학이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어떤 논리로 되어 있는가? 성경신학은 논리보다는 역사 중심으로 풀어나간다. 그래서 성경신학은 History를 중시한다. 조직신학에서 제일 중심은 구원론이다. 구원론이란 말 자체가 논리를 의미한다. 반면 성경신학에서는 구속사가 중요하다. 조직신학에서는 Logic 중심으로 구원론을 다룬다. 구원의 서정을 가장 많이 다룬다.  Ordo Salutus. Order of Salvation 이다. 구원이 어떤 논리적 순서, 질서로 되어 있는가? 시간적 순서가 아니다. 성경신학에서는 구속사의 서정을 더 강조한다. History of Salvation 을 다룬다.    
           조직신학                        성경신학          
       논리(Logic) 중심                 역사(History) 중심 
       구원론이 중요                    구속사가 중요
       구원의 서정(논리적 순서) 강조    구속의 역사를 강조 
       원(circle)으로 표시                선으로 표시

조직신학은 논리화하는 것을 강조하고, 성경신학에서는 시간화하는 것을 강조한다. 조직신학은 logical 한 면을 강조하고, 성경신학을 crono - logical 한 면을 강조한다. 하나는 개념적 논리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적 논리이다. 우리가 성경을 온전하게 이해하고 온전하게 가르치기 위해서는 개념적 논리와 시간적 논리를 잘 조화시켜야 한다. 그래서 신학자들이 조직신학을 하나의 원(circle) 으로 표현한다. 원 안에 모든 것을 통합시켜서 통합적 진리 체계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어떻게 논리적으로 서론, 신론, 인간론, 구원론, 성령론, 성화론, 종말론이 어떻게 통일성을 가지고 전개되는가를 연구한다. 반면에 성경신학에서는 성경을 선으로 설명한다. 구속사적 전개과정에서 살핀다. 조직신학에서는 완성된 결과, 그 안에서의 논리, 그 안에서의 조직을 강조한다. 반면에 성경신학은 과정을 중시한다. 하나님이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이를 설명하시는가? 

조직신학에서는 통일성의 방식으로 성경에 접근한다. 성경신학에서는 다양성의 방식으로 성경에 접근한다. 어떤 정황속에서 누적되어서 어떻게 발전되어 나가는가 하는 과정을 중시한다. 조직은 완성된 진리체계라는 원칙 하에서 어떻게 서로 연계되었는가 하는 연관성을 중시한다. 주제별 연관성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조직신학에서는 주제별로 성경을 가르친다. 연계를 서로 설명한다. 필연적으로 주제별로 가게 되어 있다. topical 한 방향으로 간다. 한국 목사님들이 주제별 설교를 좋아하는 이유가 조직신학이 전통적으로 강했기 때문이다. 반면 요즘 강해설교를 많이 말하는데 아직 이것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성경신학이 약했기 때문이다. 성경신학은 서양에서도 발전한 역사가 짧다. 한국에도 조직신학이 먼저 들어왔다. 배운대로 설교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조직신학에서는 Topic 이 중요하다. 성경신학에서는 정황이 중요하다. 성경신학에서는 원어를 강조한다. 역사적 배경이나 문화적 상황을 중시한다. 문법적 역사적 성경 해석방법을 중시한다. Grammatical Historical Method 이다. 일직선 상에서 설명하려고 한다. 그래서 다양성을 중시한다. 어떤 정황 속에서 계시의 발전을 이뤄가시는가? 그래서 아무래도 조직신학자들과 성경신학자들의 관심이 다를 수 밖에 없다. 과거에는 그래서 조직신학이 주요, 성경신학이 종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둘 다 대등한 관계이다. 오늘날 성경신학자들은 조직신학자들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심지어 유럽에서는 조직신학이란 학문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유럽에는 조직신학과 자체가 없다. 보수신학을 가르치는 학교에서는 조직신학이 있다. 

항상 통일성과 다양성이 조화를 이루고 다양성이 통일성에 지배를 받는 구도 내에서 신학이 전개되어야 한다 그런데 주종이 대등을 이루다가 이제는 성경신학이 주를 이루고 있다. 다양성이 주가 되어서 통일성을 이끌어 내고 있다. 성경신학과 조직신학 사이에 대화가 많이 이뤄져야 하는데 대화가 없기에 따로 간다. 앞으로 한국에서 조직신학과 성경신학 사이의 큰 갈등이 일어날 것이다. 제가 예견하건대 신학교마다 이 두 부류 사이에서 큰 갈등이 일어나고 분쟁으로까지 번질 가능성이 있다. 이런 문제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과연 이런 문제를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까? 나는 언약에서 이를 풀어간다. 언약 속에 통일성과 다양성이 같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을 묶어 줄 수 있는 고리가 언약 개념에 있다고 믿는다. 제 박사 학위 논문이 ‘언약 개념을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풀어보는 것’ 이었다. 저는 성경신학적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성경신학적으로 언약 개념을 풀어내는 연구는 많다. 책도 많다. 팔머 교수의 책 한권만 떼어도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언약 개념을 거의 섭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는 항상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원리에서 약간 혼란을 겪거나 문제가 생기면 언제나 팔머 교수의 책으로 간다. 그의 책은 아주 단순한 논리로 엮은 교과서이다. 포괄적으로 쓴 책이고 얇다. 복잡하지 않다. 성경신학 언약을 아주 잘 보여준다. 그 책 한 권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조직신학에서 다루는 내용은 구원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통합시키는 것이다. 두 가지를 통합시키는 것이 조직신학의 큰 과제이다.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들어와서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는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권적으로 일하시면서도 어떻게 우리의 의지와 감정과 체험을 무시하지 않고 구원의 과정에 참여시키시는가? 이것이 조직신학의 과제이다. 언약은 조직신학의 중요한 토픽이다. 조직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 그대로 조직이요, 논리이다. 초월성과 내재성을 논리적으로 어떻게 연결시키는가가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여기서 언약이 필연적으로 다뤄지지 않으면 안된다. 학위 논문이 출판은 되었는데 아직 번역은 되지 않았다. 

미국의 유명한 인터넷 책방에 들어가면 내 책이 금방 나온다. 아마존에 들어가서 ‘영재 송’ 누르면 목차까지 다 나온다. 학문적인 책이기에 출판 권수가 적고 가격도 약 90 달러 정도나 된다. 국제적인 학문적 결과로 인정을 받았다. 
현대 신학 교과서 중에 Grants and Olson 이 쓴 [20세기 신학] 이란 책이 있다. 그 책의 주제는 초월성과 내재성이다. 이것이 신학의 가장 큰 관심사이다. 2000년 동안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다. 철학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철학은 인간 논리에 근거한 것이다. 인간 논리로는 초월성과 내재성을 절대 통합시키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주권이라는 것과 관계라는 개념을 절대로 인간은 통합시킬 수 없다. 인간 논리의 한계성이 거기에 있다. 이 문제는 성경적으로 밖에 해결될 수 없다. 성경에서 주권적인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를 맺으신다. 신학적으로밖에는  해결할 길이 없다. 그런데 사실상 철학의 가장 큰 이슈가 바로 이것이다. ‘존재의 다양성’과 ‘존재의 통일성’을 다루는 존재론이 철학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주제이고,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ontology 이다. 존재라는 것이 너무 다양한데 어떻게 하나의 통일된 목적 가운데서 존재할 수 있는가? 현상적인 것은 세상이 너무 다양하다. 세상 인구가 현재 60억에 달한다. 세상에 60억이라는 다양한 개별적인 존재가 어떻게 하나의 의미있는 통일된 존재가 될 수 있는가? 철학에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별 노력을 기울이지만 못 푼다. 다양한 개별적 존재들이 어떻게 하나의 통일된 목적을 가지고 존재하는 인간이 될 수 있는가? 풀지 못한다. 이것은 종교적 이슈이다. 

그래서 조직신학에서 변증학을 하게 되면 가장 먼저 다루는 것이 이 존재론이다. 다양한 개체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모습을 통일성안에 설명하는 것이다. 인간 존재의 하나의 통일된 목적(goal) 이 있는가? 이를 찾는다. 이것이 철학의 주제인데 인간의 논리로는 풀 수 없다. 그래서 개혁신학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처음부터 전제를 하고 시작한다. 하나님은 주권의 하나님이시오, 또 우리와 관계 맺으신 하나님, 우리 안에 장막을 치시는 하나님이시다. 더 이상 이에 대해서는 묻지 말라. 이것을 물으면 하나님의 계시를 부인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계시로서 출발한다. 그런데 철학에서는 이 계시를 수용하지 못한다. 그래서 철학과 종교가 부딪치는 것이다. 

칭의와 성화의 통합 


조직신학에서는 칭의와 성화를 통합하려고 노력한다. 어려운 문제이다. 칭의와 성화를 시원하게 설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 문제로 고민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절대저긍로 의롭다고 선언하신 문제가 있다. 반면 도저히 구원 받지 않아 보이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의롭게 되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내 자신을 인정할 수 없다. 쉬운 문제 같아 보이지만 상당히 어려운 문제이다. 칭의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피를 믿는 믿음을 보시고, 나를 의롭다고 선언하신 부분이다. 그러나 성화는 무엇인가? 내 자신을 보니까 도저히 의롭게 여김을 받은 사람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 그런 부분들이 많다. 교리적으로는 그런가보다 하지만 심리적으로는 굉장한 요동과 파장이 있다. 그런데 이 역설적 사실을 통합시키는 것이 바로 언약신학이다. 
복음과 율법의 통합 - 복음과 율법도 통합시키기 어렵지만 언약신학 안에서는 통합의 가능성을 본다. 
영과 육의 통합 - 개혁주의 신학은 영과 육을 구분할 수 없는데 이를 통합시키고 하나의 통일된 주제 아래 넣을 수 있다. 

구원과 윤리 - 통일된 주제 안에서 하나의 통일된 주제아래 넣기가 어렵다. 영혼 구원과 사회 윤리 문제를 보는 관점. 항상 충돌을 일으킨다. 

개인과 사회 - 한 개인을 앞세우느냐? 아니면 사회를 앞세우느냐? 개인주의냐, 공동체냐 하는 사이에서 언약이라는 것을 통해서 답을 찾아야 한다. 관계이다. 

조직신학에서는 개념적 어려움들을 통합시키고 풀어주는 것에 항상 관심을 둔다. 그런데 조직신학은 완성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모든 것을 바라본다. 즉 하나님의 계시는 절대로 상반될 수 없다. 하나님은 모순 되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 하나님은 앞뒤가 분명하신 분이시고, 일관성을 가지신 분이시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의 통일된 주제를 가지고 있다. 우리 눈에 보기에는 어렵고, 반대이고, 역설적 개념이지만, 분명히 하나님의 성품 안에는 모순이 있을 수 없다. 하나의 완성된 목적 가운데 계신다. 이것을 버리지 못한다. 어떤 모순 가운데 부딪치더라도 어떤 갈등이 생겨도 이를 버리지 못한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시론은 하나님의 주권에서 나온다. 

조직신학은 언약이라는 개념 속에 주권과 관계라는 두 축이 있다. 이 두가지 축 속에 조직신학은 개념적으로 설명하면 주권에 가깝다. 항상 완성된 통일체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모든 것을 시작한다. 현상 속에서 나타나는 어떤 모순도, 우리 체험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모순도, 이 세상 속에서 바라보는 어떤 현상도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이런 전제를 가지고 시작하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 안에서 모순이라는 것이 없다. 그러니 철학자들이 볼 때는 어떤 면에서 우습다. 세상이 모순 투성이인데 조직신학은 모순이 없다고 한다. 양자가 시작부터 다르다. 출발이 다르다. 이런 것들 때문에 조직 신학 하려면 어렵다. 

주권과 관계 2가지 성격에서 볼 때 조직신학은 주권에 더 가깝다. 반면 성경신학은 관계에 더 가깝다. 왜냐 하면 성경은 역사와 정황을 따지기 때문에 주권을 주권으로 수행하시지만 어떻게 역사 안에서 관계를 맺으시는가? 역사는 다양성이다. 역사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를 맺으신다. 역사를 보면 다양한데, 이를 역사주의라고 한다. Historicism 이다. 이 세상에서 절대적인 것은 역사 하나 뿐이다. 변한다는 것, 자체를 모르고는 그 외에 아무것도 절대적인 것이 없다. 변하는 것만이 절대이다. 절대적인 것은 절대로 없다는 원리가 역사주의 출발이다. 역사 앞에서는 절대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성경은 역사의 산물이기에 절대적일 수가 없다. 역사는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아무래도 성경신학을 하다 보면 역사와 관련이 깊어진다. 그러다 보면 역사주의에 빠진다. 물론 조직신학의 통일성을 전제로 한 상태에서 성경신학을 하면 잘 된다. 그러나 점점 조직신학을 부인하고 성경신학만 하게 되니까 역사주의에 빠진다. 실상이 그렇다. 그러다 보니 역사주의에 많이 빠진다. 그 대표적 케이스가 세대주의이다. 역사와 정황에 따라서 하나님은 다른 목적을 가지시고 다른 방법으로 설명한다. 역사에 따라서 인간이 죄를 짓고 나서 아담 이후에 ‘도덕의 시대’, ‘양심의 시대’가 있다. 이렇게 시대를 나눴다. 그러나 개혁주의에서는 창 3:15절 이후에 모두가 다 은혜의 시대이다. 하나님이 모든 역사를 이뤄가신다. 거기에 무슨 도덕의 시대, 율법의 시대, 양심의 시대가 있고, 그러다가 끊기고 한다. 다음에 교회의 시대가 있다고 한다. 이것이 다른 말로 하면 역사주의이다. 역사 안에서 역사가모든 것을 상대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신학에서는 신조, 교리라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신조가 우습게 여겨진다. 성경신학을 하는 사람에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우습다. 17세기에 만들어진 신조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의미를 줄 수 있는가? 그 17세기라는 역사적 상황에서 만들어진 역사적 산물이 우리에게 지금 신앙적 교리적 기준이 될 수 있는가? 그래서 성경신학이라는 것이 역사주의로 빠질 위험을 가지고 있다. 만일 우리가 조직신학이라는 통일성 안에서 성경신학을 하면 하나님의 계시라는 축복과 선물을 풍성히 가져다 줄 수 있다. 반면에 우리가 조직신학에서 떨어져서 성경신학이 따로 놀면 역사주의에 빠지게 된다. 

조직신학만 가지고 논리만 가지고는 우리가 신학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조직신학은 싸움 신학이다. 역사를 무시하기 때문에 그렇다. 역사를 무시하고 논리만 강조하면 싸움 신학이 될 수 밖에 없다. 구속사가 없이 조직신학을 하면 사변화되고 싸움신학이 되어 버린다. 제가 강의를 하면서 역사를 무시하는 방향으로 전개하는 인상을 받는데 내 의도는 그것이 아니다. 역사와 철학이 잘못되어 있을 경우를 말한 것이다. 사실 역사의 통일성 속에서 조직신학도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그런 역사관 자체가 조직신학적 전제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지금 말하는 역사주의라는 것은 전제가 다르다. 역사철학, 역사관이 다르다. 역사주의의 역사관은 역사가 절대적인 통일성을 갖지 않는다는 전제 속에서 출발한다. 이들에게는 누적이 아니고 대치이다. 기독교적 역사는 누적되어진 역사이다. 통일성 속에서 차곡차곡 쌓여져 가는 것이다. 통일성이란 전제 속에서 역사를 보는 것이 기독교 역사이다. 그런데 지금 역사를 말하는 사람들은 이런 전제를 갖고 있지 않다. 

헤겔의 역사철학은 역사주의의 뿌리가 된다. 역사는 정반합이라는 원리를 통해서 새로운 역사로 나아간다. 옛 것은 다 그 시대의 산물이고, 상대적 역할을 했을 뿐이다. 이제는 다 지나갔다. 옛 것은 소용이 없다. 신학도 마찬가지가 된다. 이들에게는 3세기의 신학과 4세기의 신학이 지금 우리에게 쓸모가 없다고 본다. 15-16세기의 신학이 지금의 우리에게는 소용이 없다. 현재의 역사,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역사 안에서 만들어진 것만이 지금 우리에게 의미를 준다. 그리고 그것조차도 10-20-100년이 지나면 상대적이 되어 버린다. 
헤겔의 정 - 반 - 합 의 원리. 정이 반에 의해서 뒤집어지고 새로운 합이 나온다. 옛 것은 버린다. 헤겔의 역사철학은 자체가 통일성을 갖지 못한다. 이런 역사철학의 학문적 풍토 속에서 성경신학이 스며들어 왔다. 그래서 성경신학을 하다 보면 조직신학과 충돌을 일으킬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구속사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놓고 설명하기에 이런 관점에서 보면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은 뗄 수가 없다. 역사가 있고 계시가 있다. 역사를 통해서 계시가 온다. 역사를 떼어 놓고 계시를 말할 수 없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나님의 언약 백성과 관계를 맺어 오셨는가? 구속사를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 구속사를 빼고 신학을 말할 수 없다. 언약이란 관점에서 볼 때 조직신학은 하나님의 주권적 측면을 강조하고, 성경신학은 관계적 측면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과 장막을 치시고 관계를 맺으신다. 관계적 측면에서 이 정황을 살펴서 신학이나 설교로 만들어 내는 것이 강해설교가 된다. 강해설교는 아무래도 구속사적 측면을 잘 설명한다. 

성경신학에서는 논리의 통합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 반면에 우리가 볼 때에 약간 상반된 개념, 즉 영과 육, 개인과 사회, 구원과 윤리 등 개념을 통합시키는 것이 조직신학이다. 그러기에 개념적 설교를 하게 되면 조직신학적이 된다. 이것은 이해를 돋우는 데는 좋다. 개념적 설교는 지식인들은 좋아하지만 생각을 하기 좋아하지 않는 일반 성도들에게는 먹히지 않는다. 관계를 무시하게 된다. 일반인들은 느낌이 있는 것을 좋아한다. 관계를 유념해야 한다. 설교는 Feel 이 꽂히는 설교를 해야 한다. 저도 조직신학을 가르치기에 개념적 설교가 많아진다. 아무래도 Feel이 부족하다. 좋아하는 사람은 있는데 개념 따라가기가 피곤하다. 들으면서 피부로 와 닿고, Feel 이 꽂혀야 한다. 따라가면서 개념을 정리하여 가는 작업이 힘든다. 개념을 줄이고 상황 속에서 삶을 보면서 설교를 해 나가야 한다. 사람들이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관계를 좋아하기에 그렇다. 설교도 드라마 쪽으로 개발할 필요가 있다. 구속사적 설교를 잘 하려면 구속사적 드라마를 만들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구속사적 설교가 단순히 구속사 설명이 아니다. 구속사적 드라마를 연출해 내야  한다. 원어를 연구하여서 아무리 문화를 이야기해도 Feel 이 꽂히는 것이 아니다. 드라마를 펼쳐낼 수 있는 효과를 낼 수 잇어야 한다. 차라리 그림 없는 구속사적 설교를 하느니 주제 설교가 낫다.

그러므로 둘 다 문제이다. 개념적 설교에 치우치면 사변적 설교로 흐르기 쉽다. 하나님의 주권성이나 통일성을 잘 다룰 수 있을지 모르나 관계성이 약하다. 그러나 관계적 설교를 한다고 하면서 항상 구속사적 정황 설명이나 하다가 그치게 되면 역시 사람들이 존다. 개념 정의가 서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조직신학에서는 개념적 통합을 하려고 노력하고, 성경신학에서는 시대적 통합을 하려고 한다. 구약과 신약을 통합하려고 한다. 시대적으로 어떻게 이를 연결시킬 것인가? 이스라엘과 교회를 시대적으로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 전혀 다른 공동체를 통합시키는 것이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을 통합시키는 문제. 약속과 성취라는 시대적 통합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일반 역사과 구속 역사를 어떻게 통합시킬 것인가? 일반 역사 속에서 구속사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렇다. 당시 사람들의 관습이나, 사고방식, 문화 등을 터치하면서 구속 역사를 말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조직신학에서는 개념적 차이를 통합하고, 성경신학에서는 시대적 차이를 통합시킨다. 조직신학에서는 주권적 성격을 많이 갖게 되고, 성경신학에서는 관계적 성격을 갖고 있다. 그래서 우리 목회자들은 이 둘 다를 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만 할 수 있게 되면 절름발이가 된다. 그래서 저도 설교를 하면서 절름발이 설교를 했다는 것을 시인하게 된다. 관계적 측면을 더 개발하지 않으면 안되겠구나 하고 뉘우친다. 관계적 측면을 개발하지 않으면 항상 개념적 설교만 하고, 개념적 성도만 만들게 되겠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는다. 개념만 가지고 개념적 설교만 하면 개념적 성도만 키운다. 관계적 설교를 하지 못하면 성도의 온전함을 이루지 못한다. 아직도 나는 구속사적 설교를 잘 못한다. 자신감이 떨어진다. 자신감이 떨어지면 감동을 줄 수 없다. 

물론 조직신학 성향인지, 성경신학 성향인지 자신이 잘 안다. 조금 은사가 앞서는 부분이 있다. 그런 사람은 그런 부분을 살려야 한다. 그러나 치우치면 안된다. 목회자 자신이 개념 부분에 강한지, 관계 부분에 강한지 자신이 안다. 이를 대충이라고 진단하고 있어야 한다. 대개 한국 목회자들이 조직신학적으로 간다. 가만 내버려 두면 조직신학적으로 간다. 왜냐 하면 쉽기에 그렇다 30분 안에 설교를 만들어 내기에는 조직신학적 설교가 가장 쉽다. 시간에 좇기면 주제로 나간다. 시간이 없는데 언제 원어 살피고 역사적 정황을 살피는가? 시간이 없으니 조직신학으로 가는 것이다. 목회가 바쁘니까 그렇다. 궁지에 몰리니까 발에 땀나면서 준비한다. 그렇게 하면 한 두 번은 은혜로 하나님이 봐주신다. 그런데 반복되면 은혜가 없다. 시간이 없으니 조직신학적으로 간다고 변명하는데 반복되면 편리주의로 가게 된다. 
그래서 저는 의식적으로 관계중심의 설교를 하기 위해서 힘쓴다. 그래야 성도들에게 온전한 밥을 먹일 수 있다. 하나님의 주권성과 관계성을 동시에 가르쳐 주어야 한다. 한쪽에 치우치면 반드시 성도들이 절름발이가 된다. 
조직신학적 설교는 연역적 성격(deductive)을 갖는다. 어떤 전제가 있다. 그 안에서 풀어낸다. 전제에서 이끌어 낸다. 반면 성경신학은 귀납적 성격(inductive)을 갖는다. 어떤 결론을 전제하고 나가지 않고, 세부적인 것을 살피면서 결론에 접근해 간다. 그래서 귀납적 접근은 과정을 중시한다. 반면 연역적 접근은 전제가 무엇인가가 중요하다. 그래서 연역적 접근은 개념이 중요하다. 귀납적 접근 은 과정을 중시하는 만큼 관계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성경신학 없는 조직신학은 과정이 없이, 하나님이 인간 역사에 오셔서 개입하시는 개념을 말하려 한다. 그래서 귀납이 없는 연역은 사변일 뿐이다. 개념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사변으로 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연역 없는 귀납은 궤변일 뿐이다. 성경신학은 조직신학의 테두리 안에서 해야 하는데  통일성이 없는 가운데 과정 자체만 중시하고, 일단 가고 보자고 하는식이 된다. 그러면 귀납은 목표도 없인 지나친 과정 중심이 되기에 과정 절대화가 되어 궤변이 되고 만다.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나가 버린다. 성경 공부 할 때에 종합적인 지식이 없이, 전체적인 오리엔테이션이 없이 하면 말씀 가지고 이상한 데로 나간다. 궤변이 된다. 

그러므로 성경 공부는 두 가지 방법이 동시에 이용되어야 한다. 일방성과 쌍방성이 동시에 있어야 한다. 연역법을 모르면 성경공부 리더가 되지 못하다. 동시에 귀납법을 모르는 사람도 성경공부 리더가 되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성경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강의만 하고 있다. 관계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개념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 지금 제일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성도들이 전통적 양육 방식에 익숙하기에 대화법을 모른다. 성도들이 대화법을 모르고 대화를 통해서 결론에 이르는 법을 모른다. 토론 문화가 심지어 미국에 사는 한국인들에게조차 잘 안되어 있다. 그래서 어떤 유형의 모임이든지 일단 강대상을 하나 준비해둔다. 집에 가든지, 교회에 가든지 목사가 한 번 설교를 하고 강의를 하라는 것이다. 내가 이것을 싫어하고 소그룹에서는 관계 중심으로 대화를 하고 모든 사람을 참여시키고 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만 교육하는 리더들만큼은 목표와 방향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연약을 모르는 채 귀납을 시키면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다. 이것을 가르쳐 주고 싶어하는데도 성도들에게 잘 안된다. 이들은 목사들에게 설교 듣는 법만 배운 것이다. 자신들이 성경 말씀을 가지고 귀납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강의 듣고, 설교 듣고 하는 일에만 익숙하다. 그래서 내가 어디 가면 설교단 가져 오지 말라고 부탁한다. 내 중심으로 모이는 자리가 있고, 아닌 자리가 있다. 성경 연구 자리에서는 대화를 통해서 결론에 이르는 것이다. 

요즘 소그룹을 강조한다. 소그룹은 관계적 형태를 중시하는 것이다. 관계 중심, 귀납 중심으로 하겠다는 것이 소그룹이다. 쌍방적인 요소가 여기 있다. 그러나 소그룹 리더는 반드시 연역을 알아야 한다. 연역 모르는 소그룹 리더는 관계 중심을 말하다가 잡담하가다 끝나 버린다. 신세 타령하고 잡담하다가 끝나 버린다. 소그룹을 하려고 노력하면서 어려움을 느끼는다. 너무 지나치게 연역 중심으로 해 왔기에 성도들이 자기 자신의 신앙을 자기 방법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지나치게 한 사람에게 의존하는 의존도가 너무 높다. 무엇이든지 목사가 해야 한다. 소그룹은 평신도 지도자들을 세울 때에 가능하다. 지나치게 연역적으로 가니 반작용으로 소그룹을 나가는데 결과적으로 소그룹도 연역을 모르면 잘 할 수 없다. 리더가 리더로써 기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소그룹 리더가 관계 중심으로 가면서도 언제나 연역으로 돌아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만 성공한다. 

설교도 마찬가지이다. 연역적 접근방식과 귀납적 접근 방식을 같이 가지고 가야 한다. 조화를 이뤄야 온전한 설교가 된다. 역시 양육 방식, 훈련 방식도 조화가 필요하다. 연역은 강의중심이다. 주일학교나 성경학교 등은 연역식이다. 강의는 일방적이다. 그러나 교육의 효과를 위해서는 쌍방적이 되어야 한다. 이 강의가 그렇다. 연역식이다. 듣고 그냥 가 버리면 다 잊어 버린다. 강의를 듣고 자신만의 언어로 이를 표현해 보고 실천할 수 있는 장을 연습을 해야 한다. 이해하고 소화하고 실천을 돕는 것을 다뤄주는 것이 소그룹이다. 이것이 귀납적 방법이다. 두 가지가 언제나 조화를 이뤄야 한다. 한 쪽이 약해지면 온전한 훈련이될 수 없다. 하나님의 구원 방법 속에서 주권과 관계성에서 하나가 약해지면 초월과 도덕으로 나눠지듯이 우리 설교나 양육이 이렇게 치우치게 되어 버린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을 모델로 삼아서 그 패러다임으로 나가자. 그렇게 살자.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 일방적이고 쌍방적이다. 

리더십도 마찬가지이다. 일방성과 쌍방성을 잘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느 때에 일방성이 필요한가를 알고 분별하여서 그 때는 일방적으로 이끌고 나가야 한다. 그러다가 풀어줄 때에 풀어서 자신들이 스스로 하도록 자발성을 살리고 쌍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일방성과 쌍방성의 완급 조절이 리더십의 키이다. 내가 교수하면서는 이런 것을 잘 몰랐는데 목회를 하면서는 리더십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일방성과 쌍방성의 조화가 아주 중요한 것을 체험했다. 당회를 해도 두 가지 조화가 필요하다. 부교역자들과 관계에서서도 그렇다. 일방성과 쌍방성의 완급조절이 가장 어려운 문제였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이런 것 배울 수는 없다. 기업과 목회는 다르기 때문이다. 세속적 리더십과 영적 리더십은 다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리더십을 세상 세미나를 좇아 다니며 배울 수 있는가? 과거에는 이런 것 고민하지 않았다. 제가 과거에는 예리했다. 칼이었다. 강의할 때는 그것이면 족했다. 그런데 지금은 제가 목회하면서 기가 죽었다. 두루뭉실해짐을 보았다. 그래서 지금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고민중이다. 리더십은 주님의 리더십을 따라가야 한다. 주권성과 관계성의 문제를 배워야 한다. 그것이 가장 성경적인 리더십이다. 

      
                                  Ⅺ

요즘 목회 세미나를 보면 중앙 집권 체제에서 지방 자치제식으로 목회방향이 나아간다. 셀처치, 소그룹 운동, 가정교회, 평신도 운동 등이 전부 과거의 일방성 위주에서 쌍방성 관계 중심으로나아간다. 이것이 하나의 흐름이다. 언약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시계추가 일방적 목회전략에서 쌍방성 목회전략으로 나아가고 있다. 소그룹에서 독립적 권한을 주어서 그런 방향으로 나아간다. 권한 위임이다. 그런데 이런 리더십 위임이 리더십을 약화시키는가? 절대 아니다. 이렇게 리더십을 위임하는 교회일수록 아주 중앙적이고 일방적인 교회론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일방성을 포기하고 소그룹에게 위임을 넘겨주는 것인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그런 소그룹 운동이나 평신도 운동은 반드시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아주 중앙집권적인 교회론을 가진 상태에서 리더십을 위임하는 것이다. 양쪽의 균형을 가진 가운데서 이런 셀 처치를 운영하고 있음을 잘 알아야 실패하지 않는다.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는다. 

미국 LA 남가주 사랑의 교회에서 하는 제자훈련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다. 옥한흠 목사는 제자훈련 철학이나 이론과 목회전략에만 간여하고 실제적인 것은 다른 사람들이 한다. 평신도 운동을 가르친다고 하기에 제자 훈련 방법을 가르쳐주는 줄 알고 참석했는데 깜짝 놀랐다. 내 생각에는 만인제사장주의를 가르치고, 사람을 돕는 프로그램과 방법론을 기대하고 갔는데 이것은 5% 정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나머지 90% 이상이 전부 교회론이었다. 평신도에게 권한을 주는 평신도 운동이라는 주제 속에 아주 강력한 교회론이 들어 있었다. 놀라왔다. 말하자면 쌍방 관계 중심, 중앙 집권체제를 지방 자치제로 변형시키는 가운데서도 일방적 리더십에 대해서는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모순이다. 강력한 교회론과 일방적 리더십을 강조하면서도 평신도 운동을 강조한다? 이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함께 참석한 사람들과 평가회를 가져 보았는데 사랑의 교회 제자훈련을 배워본 사람이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겉으로는 평신도 운동을 한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더 큰 교권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볼 때는 아니다. 일방성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쌍방성을 가지는 것이 신학이다. 교회론 중심의 목사론이 아주 중시된다. 저는 평신도 운동을 한다고 해서 목회자와 평신도와 대등하다고 가르치는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교회론 중심의 강력한 목사론을 가지고 평신도 운동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개혁주의 언약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맞는 점이 있다. 내가 볼 때는 개혁신학적 관점에서 일방성과 쌍방성의 균형을 이루는 실천적인 모델의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미국의 윌로우크릭 처치나 캘리포니아 새들백 처치에 가 보면 역시 마찬가지이다. 전통적 교권주이는 없다. 전통적 일방주의나 권위주의, 중앙집권주이ㅡ는 없다. 거의 관계중심으로 나간다. 현대적 폭발적 성장의 교회는 관계 중심의 모델을 가지고 극대화시킨 교회들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일을 하는 리더들의 모습을 보면 일방적 리더십을 가진 사람들이다. 교회성장에 이런 리더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이런 교회론을 가지고 목사론을 가지고 일해야 한다. 물론 그들은 이런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내가 볼 때 신학적 관점이 있다는 것이다. 옥 목사님은 교회론에서 끝난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얼마든지 더 들어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교회론에서 끝나 버린다. 그런데 훨씬 더 이론적으로 신학적으로 끌고 들어갈 수 있다. 신학적 입장에서 성령론이나 다른 신학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런 운동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 제 신학을 배워서 해야 한다. 
미국의 남가주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가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의 후임으로 온다고 들었다. 그런데 오정현 목사는 성령운동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 오정현 목사는 전통적 제자훈련의 약점이 성령론이 약하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그는 제자훈련과 성령론의 접목을 반드시 시켜야만 제자훈련이 제대로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얼마 전에 옥 목사님도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 가서 순복음 교회에 가서 수백 명 지도자들을 데리고 제자훈련 세미나를 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론과 제자훈련이 함께 손을 잡아야 한다고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결론을 내렸다. 오순절 교회에서는 제자훈련을 선택하고, 제자훈련을 하는 장로교에서는 성령론을 선택하여서 둘이 손을 잡고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아마 옥 목사가 은퇴하고 오정현 목사가 오면 반드시 그런 방향으로 이끌고 나갈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볼 때 답답한 것이 있다. 충분히 개혁주의 안에 오순절 신학을 능가하는 성령론이 있고 그 부분을 커버할 수 있는데 이들이 그 부분까지 터치를 할 힘이 없다. 그런 신학적 식견이 없다. 교회론에서 끝나니까 그렇게 된다. 그런 방식으로 하기에 성령론을 다른 곳에서 빌려와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그런데 신학은 교회론 하나로 설 수 없다. 교회론은 분명히 구원론과 성화론과 성령론과의 결합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교회론 하나로서 독립된 것이 아니다. 교회론을 가지고 제자훈련을 만들었다면 반드시 그 아래에 커다란 신학적 원리가 있다. 내가 볼 때는 충분히 교회론을 뒷받침해 줄 중요한 신학적 명분이 있다. 그런데 이를 터치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를 터치해 줄 수 있는 신학적 명분을 연구하기 위한 시도가 없다. 만일 내게 의뢰를 해 온다면 이 부분을 충분히 보완해 줄 수 있겠는데 안타깝다. 그래서 내가 이 부분을 신학적으로 정리해서 내 놓고자 하는 것이다. 

언약적으로 목회를 하고, 언약적으로 신학을 하고, 언약적으로 설교를 하고, 언약적으로 제자 양성을 한다는 것이 새로운 영역이다. 그래서 제가 볼 때는 이 부분에 있어서 처음으로 터치하고 있다. 제 논문 자체가 조직신학을 언약적으로 풀어나가기 위한 시도였기에 제 나름대로 이 부분에 대해서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그래서 성령이 필요하면 오순절에 가고, 다른 것이 필요하면 천주교에 가고 손을 잡아야 성공할 수 있다고 하면 문제가 있다. 이런 것 보다는 다른 대안이 필요하리라 본다. 언약적 관점에서 볼 때 평신도 운동을 하면서도 강력한 리더십이 교회론적 관점에서 왜 필요한지 분명히 신학적으로 주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런 부분에 대해서 제가 터치하고 싶다. 
우리 개혁주의 신학에서 제일 취약한 부분이 교회론이라고 한다. 왜 그런가? 개혁주의 교회론을 칼빈, 루터, 쯔빙글리가 만들었다. 이들은 모두 16세기 사람이다. 이들은 모두 16세기로서 중세의 연장에 있다. 이 시대는 온 세상이 기독교이다. 교회이다. 이들은 기독교에서 태어나서 기독교권에서 살다가 기독교 가운데서 죽는다. 이들은 집에서도 교회이고, 학교에 가도 교회이며, 식당에 가도 교회의 문화권 속에 있다. 모든 것이 다 기독교이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에게는 기독교가 아닌 것을 접한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 시대 그 지역에서는 그렇다. 그런 상황에서 개혁주의교회론이 형성되었다. 그러기에 이들에게 교회론의 가장 주된 관심사는 비기독교인을 기독교인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불신자들에게 가서 세상을 변화시켜 기독교 문화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보기에 전부 기독교인처럼 보이는데 이 중에 누가 진짜 기독교인가를 아는 일에 관심이 있다. 어느 교회가 진짜 교회이고, 어느 교회가 가짜인가? 이것을 판별하는 것이 당시 교회론의 주된 관심사이다. 왜? 모든 것이 다 기독교 세상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천주교는 이런 것이 문제이다.’ ‘재세례파는 이것이 문제이다.’라고 한다. 당시 교회론의 관심은 무엇이 정통이고 무엇이 비정통인가를 찾아내는 것이다. 이 시대에 교회론의 핵심은 ‘교회의 표지’ 였다. 교회의 표지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정통과 비정통을 판가름하는 것이다. 이것을 가르는 것이 교회의 끝이라고 믿었다. 더 이상의 것이 없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 시대에 만들어진 교회론이 지금 오늘날에도 적절한가?” 이런 의문을 제시해 보라. 비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많이 비평하면서 이런 의문을 제시한다. 너무 정통 비정통을 따지는 데만 국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는 교회의 표지가 중요했다. 그런 세상에서 형성된 교회론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문 밖에만 나가도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갈려 있다. 오늘은 중세 교회 세상이 아니다. 오히려 거슬러 초대 교회와 같은 분위기이다. 우리가 문 밖에만 나가면 비기독교, 나가면 반 기독교인, 이런 적대적인 분위기에 살고 있다. 그러기에 여기에 맞추어 교회론의 관심사가 달라져야 한다. 그러기에 개혁주의 교회는 지나치게 정적이다. 그 자리에 그냥 앉아 있다. 정통을 구별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그런데 사실상 오늘날 교회는 동적인 교회론을 필요로 하고 있다. 앞으로 나가는 교회이며, 침투해 들어가는 교회가 필요하다. 전도적이고 선교적이며 적극적이며 움직이는 교회론이 필요로 한다. 이것이 개혁주의 입장에서 볼 때 제자 훈련의 명분이다. 

동적 교회로 만들어가야 한다. 정적인 교회가 아니라 동적인 교회로  만들어야 한다. 이런 필요에 의해서 사람들이 내린 결론이 오순절과 개혁주의의 연합이다고 본다. 그런 움직임이 앞으로 반드시 가게 되어 있다. 오정현 목사는 한국에 와서 수련회를 인도하면서 이런 강의를 공공연히 한다. 그래서 개혁주의 교회론이 문제가 있으므로 오순절 교회론을 받아 들여야 한다. 그는 신학적 연합을 요구한다. 그는 연합을 원한다. 화합과 조화를 원한다. 그래서 지나치게 성령파로 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신학자인 제가 볼 때 우리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깊이가 약하기에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본다. 

구원을 받고도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우리가 정적 기독교가 된 것은 그런 중세적 기독교 세상에서 성령을 받아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사람들이 만든 교회론을 그대로 받아서 배웠다. 벌콮이나 다른 조직신학자에게서 그대로 배워서 행하며 지금도 그래도 배우고 있다. 교회의 표지만 맨날 외쳐가지고 무슨 쓸모가 있나? 오늘의 시대는 나가서 기독교를 대항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에게 나가서 전하고 이겨야 하는데 중세 교회의 표지만 논한다는 것은 한심한 일이다. 이런 논리이다.

그래서 이런 것을 보면서 앞으로 흐름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학자로서 우리신학이 부족하니까 다른 것과 손잡자고 하기보다는 깊이를 모르기에 그렇다고 이해하고 있다. 시대적인 상황에서 만들어진 교회론에 우리가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었다는 주장에 일리가 있다. 타당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또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는 관계중심의 신학, 관계 중심의 영성을 추구해 왔다. 칼빈주의나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관계 중심의 영성을 가진 교회다. 관계 중심의 영성은 일 중심의 영성과 다르다. 전투적 영성은 질서에서 아래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론의 특징상 정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해야 한다. 

그 다음에 우리가 오순절파에  가서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하기보다는 우리가 성령이란 누구인가를 안다. 성령은 우리에게 로드십을 주시는 분이시다. 전도나 선교 봉사 등 모든 것이 로드십이라는 큰 흐름 속에서 되어야 한다. 성령론 자체가 우리와 다르다. 성령론이 다르기에 우리에게 없으니 저쪽에 가서 성령을 받고 교회론을 보충하자고 하는 것은 맞지 않다. 관계 중심의 신학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로드십 중심의 성령론을 개발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아무것도 않하고 있으면서 대안을 주지 않으면서 비판만 하면 안된다. 우리 보수신학의 약점이 바로 이것이다. 대안을 주지 않으면서 연구도 하지 않으면서 비판만 한다. 대안을 주고 비판해야 한다. 대안을 주지 않을 바에야 아예 비판을 하지 말라. 근본주의 신학이 약해져가는 이유는? 바로 이들이 사회에 대한 대안을 주지 않고 있다가 점점 소수가 되어 간다. 그리고는 없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Faith 신학이 약해져 버렸다. 없어진다. 대안을 주지 않기에 그렇다. 어떻든 우리가 사회에 대한 대안을 주어야 한다. 다른 사람은 대안을 주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한다. 그러니 그들이 문을 닫는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청년들이 문제가 많다고 비판만  하고 책망만 하면서 대안을 주지 않으면 그들은 교회를 떠난다. 

현실상 교회 부흥은 순복음 교회가 일으켰다. 그리고 제자훈련 하는 사람들이 교회 부흥을 일으켰다. 그러니까 숫자에서 밀린다. 숫자 가지고는 할 말이 없다. 봐라! 이렇게 하며 s된다. 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도 잘 해야 한다. 옥한흠 목사님은 제가 볼 때 언약 신학에서 볼 때 아주 건전하다. 신학만 아니라 목회 현장에 이를 적용해서 부흥을 일으켰다는 것은 아주 좋다. 그런데 교회론에서 그친다. 제가 아쉬운 점은 그 외에 다른 것에도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론의 취약점을 오순절에서 배워야 한다고 하는 대안은 문제가 있다.

제가 주장하는 초점은 성령은 누구이신가? 이를 가지고 말하라. 성령은 로드십을 주신다. 그리고 제사장적 소명에 의한 삶이다. 언약 신학의 두 가지 매력이 이것이다. 의무적 봉사나 전도가 아니다. 제사장적 소명에 의한 삶이다. 제자는 스승을 따라가는 사람이다. 스승은 우리를 위해서 제사장으로 사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그 분은 제사장으로 살다가 제사장으로 가셨다. 가시면서 우리에게 제사장으로 살다가 제사장으로 죽으라고 하신다. 이것이 제자도이다. 무조건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제사장적 삶을 살라는 것이 바로 신학적 명분이다. 제가 보기에 언약 신학적으로 보기에 로드십의 주제와 제사장적 삶의 방향에서 교회론이 훨씬 튼튼해 질 수 있다. 개혁주의 교회론을 비하하고 매도할 필요는 없다. 

교회론만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만약 조금 과격한 사람이 말하기를 교회론만이 아니다. 구원론이나 성령론이나 다 그 시대 상황에서 한 것이기에 문제가 있다고 하면서 다 수정해야 한다고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기에 우리가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부족한 교회론이라는 비판에 대해서 매도하는 느낌이 있다. 우리 개혁주의 신학이 무엇인지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발상이라고 본다. 그래서 앞으로 언약적 관점에서 로드십과 제사장적 소명을 강조해서 일방적 하나님의 구원 방식과 관계적 차원에서 목회를 연결해 가는 사람이 나오면 좋겠다. 이를 할 수 있는 목회적 방안을 접목해 보라. 나는 신학적 근거를 제시하고 이 선에서 끝날 것 같다. 누군가가 젊은 세대에서 이런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목회에 적용해 보라. 그렇다면 소망이 있다. 

지금 다 이해할 수 없고, 안되면 신학을 수정하는 방향으로 나가 버리면 문제가 있다. 목회자는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신학자는 그럴 수 없다. 뜯어 맞추기 방향으로 나가면 안된다. 옥 한흠 목사는 제자훈련에 성령론이 부족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오정현 목사는 제자훈련에 성령론이 부족하다고 가르친다. 그런 뉘앙스가 부족한다. 예수님의 제자훈련이 그렇다. 제자훈련 마친 후에 성령을 받았다는 주장을 한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개혁주의 신학을 더 연구해서 우리 신학을 다 파헤쳐 본 다음에 정말 답이 없다고 한다면 수용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신학적 노력을 해 보지도 않고 다른 해법을 찾으면 안된다. 

솔직히 우리 한국 신학계를 3년 간 지켜 보면서 다 보았다. 총신, 합신, 개신, 고신, Acts 등 뻔하다. 누가 무엇을 가르치는지 다 안다. 신학자들이 보수 신학을 가지고 잘못된 현실에 대해서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제시해 줄 역량을 가진 학자가 없다. 그러기에 오순절 성령을 모시고 와야 한다는 것을 말하면 할 말이 없다. 신학 교수들조차도 더 깊이 연구하고 공부할 필요가 있다. 교수들에게 그런 환경이 필요하다. 교수들이 정치에 관여해야 하니 신학에 몰두할 여유도 없고 어려움이 생긴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답답함을 느낀다.

이 부분에 대해서 제가 추천할 만한 책이 없다. 로버트슨 교수는 성경신학적 입장에서 언약을 개괄적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서론격이다. 깊이 있는 부분, 실제적인 부분들을 터치하지 않는다. 제 논문도 학위 논문이기에 굉장히 테크니컬하게 되어 있지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다루지 못하고 있다. 이번 강의가 아주 중요하다. 이것이 보강되고 이런 운동을 펼치는 중요한 계기가 되길 바란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는데 성경에 근거한 목회와 신학을 해 나가자. 우리 목회를 통해서 귀한 열매를 맺고 주님의 뜻대로 사역하는 목회자가 되자. *


송영재 교수/조직신학

[약력]
미국 뉴욕주립대(B.A.)
미국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M.Div., Ph.D.)

[저서 및 논문]
Theology and Piety in the Reformed Federal Thought of William Perkins and John Preston. N. Y.:Edwin Mellen Press,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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