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당시 유대적 표현들
예수님이 살았던 시기의 고대 문화를 이해하는 것을 성경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성서시대의 유물들은 성서의 진실성을 입증할 뿐 아니라, 예수님 당시의 상황과 그의 가르침의 유대성(Jewishness)를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바울에 의해 세워진 로마교회에서 기독교 신앙의 유대적 뿌리를 결코 부인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방인 교회는 실제적으로 이 뿌리에 접목된 가지였다. (롬 11: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
바울은 히브리 문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주었졌기 때문에 교회의 유대적 배경이 큰 유익이 된다고 하였다. (롬 3:1-3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플러서(David Flusser)는 “랍비 비유의 이해 없이 유대 비유를 통해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교훈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철저하게 유대적이었음을 알아야한다.
1. 찌찌트(tzitzit)와 예언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마 9:21-22)
이 구절을 대부분 잘못 해석하고 있다. 21절에는 ‘겉옷’으로 번역되었지만, 사실은 기도 보(tallit, paryer shawl)겉옷의 가장자리에 실을 꼬아서 만든 단 (tassels)을 만진 것이다. 유대인들은 술에 대한 계명을 준수하였고 지금도 착용한다. 민수기 15장 37-41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 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그리하여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었느니라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니라 ”과 신명기 22장 12절(너희는 너희가 입는 겉옷의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이다.
민 15: 38의 ‘귀’라는 말은 카나프(kanaph)로 ‘날개’로 번역되기도 한다. 그래서 기도보의 모서리를 ‘날개’라고 부른다. 개개의 찌찌트는 여덟 개의 실과 다섯 매듭이 달려 있어 찌찌트의 히브리어 자음의 숫자를 환산한 600과 합치면 토라의 613 계명과 일치하는 숫자가 된다.
예수님 시대에 유대 남자들은 할?(halluq) 라는 단순한 소매가 없는 겉옷(tunic)을 가정에서 일터에서 입었다. 그러나 공공의 장소에서는 사각형의 천을 어깨를 덮고 발목까지 내려오게 착용하였다. 이를 탈릿(tallit) 이라고 하는데 추위와 비를 막는 용도였다. 이 천의 네 귀퉁이에 율법대로 만든 찌찌트이다. 그러나 유대인에 대한 핍박의 시기에 찌찌트를 착용이 금지되자 옷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1세기에는 찌찌트가 메시야와 관련된 전설이 있다.
먼저 매듭은 치료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조금 후의 일이지만 유대인의 부적이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말라기 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 (NIV But for you who revere my name, the sun of righteousness will rise with healing in its wings. And you will go out and leap like calves released from the stall.)의 예언에 근거한 것이다.
혈루증에 걸린 여인은 분명이 이 같은 전설을 알고 있었다. 민 15:38의 ‘귀’ 와 말 4:2의 ‘날개’는 동일한 단어가 사용되었다. 이 같은 개념을 가지고 유대인들은 기도보 아래서 이렇게 고백하였다 시편 91:1-4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혈루증에 걸린 여인은 치료의 능력의 가지신 의의 태양이신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였고, 예언자의 말씀에 대한 신앙을 선언하였던 것이다.
2. 매고, 풀고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binding)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loosing)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마 16:19)
기독교에서 오해하고 있는 구절이다. 그러나 유대교에서는 법적 자격을 의미한다. 예수님 당시에는 종교적 결단을 의미하였다. ‘매다’는 금지, ‘풀다’는 허가를 의미하였다. 랍비문서에 많은 예가 있다. 1세기에 랍비들은 성서를 해석해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예를 들어 안식일의 노동을 금지하고 있지만 어떤 일인지는 규정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매다’는 어떤 행위를 금지하는 것이고, ‘풀다’는 허락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초대교회에서 영적 질문에 대해서 허락과 금지를 결정할 수 있는 권위를 부여 받은 것이다. 이 예는 사도행전 15장에서 볼 수 있다.
이방인들이 구원 받기 위해 할례를 받아야 하는지, 안 받아도 되는 지의 문제를 허락한다.(행 15:5-11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야고보도 이방인과 관련하여 네 가지를 금지한다.(행 15:13-20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3. 갈대와 상수리나무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마 11:7)
1세기에 잘 알려진 유대인의 비유는 “갈대와 상수리나무”(The Reed and the Oak Tree)이다.
이 비유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 구절의 비유적 묘사를 이해할 수 없다. 거대한 상수리나무와 가냘픈 갈대는 모두 강가에서 자라난다. 강한 바람이 불어오면 상수리나무는 흔들림이 없이 서 있다가도, 더 강한 바람에 뿌리째 뽑혀 넘어질 때도 있다.
그러나 갈대는 약한 바람에도 이리 저리 눕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다. 이 비유의 교훈은 현실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버티다 쓰러지는 상수리나무와 현실과 타협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갈대를 생존 방식을 대조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 친숙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묻는 것은 “너희는 하나님의 예언자가 줏대 없는 타협가이길 기대하였느냐?”라고 물으신 것이었다.
막 4:34(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 시더라)에 의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1/3은 비유였다. 유대인 가르침인 아가다(aggadah)에 의하면 비유가 대부분이었다. 에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법조문은 결정을 위한 것이고, 아가다(aggadah)는 감화(inspiration)를 위한 것임을 믿었다.
4. 제사장 가문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요 20:3-5)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와 요한이 급히 빈무덤을 찾아갔다. 요 20장에는 베드로는 급히 갔지만, 요한은 멈추어 서서 기다렸다. 요한이 주저한 이유는 제사장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유대 율법에 의하면 시체가 있는 방에 들어가면 부정하여 진다.
다른 경우에서 요한은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지만 베드로는 문 밖에서 기다렸다. (요 18:15-16 대제사장의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
행 4: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에서는 요한이 대제사장의 문중임을 말하고 있다. 신약에 요한이라는 이름이 여럿 나오기 때문 논란의 여지는 있다. 베드로와 무덤에 동행한 제자가 요한인지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의 행동으로 볼 때 대체적으로 요한임에 동의한다.
5. 황금포도나무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요 15:1)
예수님 당시 황금 포도나무가 성전 입구의 네 기둥을 싸고 있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 가지는 아름다워서 “크기와 예술성에서의 경이로움은 보는 이로 하여금 이렇게 값진 재료로 만들어진 것은 없을 것이다”라고 감탄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미쉬나(Mishnah)에 의하면 황금 포도 잎이나 포도송이를 자원하여 봉헌하여 제사장으로 하여금 넝쿨에 달게하였다. 혹자는 그 황금 포도잎에 자신의 이름을 세기기도 하였다. 예수님께서 자신은 참포도나무라고 하신 것은 인공적 포도나무와 대조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께 헌신하려는 제자들은 이 황금 장식에 자신의 물질을 드리는 정도는 되어야 풍성한 영적인 열매를 맺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6. 자격을 상실한 종
곁에 서 있는 자 중의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막 14:47)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대제자상의 종의 귀를 베드로는 잘라버렸다. 이 종은 평범한 종이 아니라, 세간 하코하님(segan hacohanim) 이리고 알려진 대제사장의 수석 보좌관이었다. 베드로는 말고의 목을 베려다 실패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귀를 잘랐다고 볼 수도 있다. 유다 율법에 의하면 귀가 잘려나간 사람은 수치일 뿐 아니라, 성전에서 일을 할 수 없었다,
레 21:18-21(누구든지 흠이 있는 자는 가까이 하지 못할지니 곧 맹인이나 다리 저는 자나 코가 불완전한 자나 지체가 더한 자나 발 부러진 자나 손 부러진 자나 등 굽은 자나 키 못 자란 자나 눈에 백막이 있는 자나 습진이나 버짐이 있는 자나 고환 상한 자나 제사장 아론의 자손 중에 흠이 있는 자는 나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지 못할지니 그는 흠이 있은즉 나와서 그의 하나님께 음식을 드리지 못하느니라)에 의하면 장애인은 성전에서 일 할 수 없었다. 70인 역에 의하면 제물을 가까이 할 수도 없었다.
다른 유사한 사건들도 있었다. B.C. 40년 페르시아의 대제사장 후보자였던 안티고누스(Antigonus)가 그의 경쟁자이며 삼촌인 힐카누스 2세(Hyrcanus II)의 귀를 자름으로 자격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요세푸스는 헤롯 대왕의 시절에 이 같은 일들이 여러 번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미쉬나는 우리 몸의 돌출부인 귀가 잘려지는 풍습을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7. 칼 바호메르(Kal-ve-chomer)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마태복음 5:29-30)
이 구절은 유대적 배경을 벗어나서 이해한다면 어리석은 짓이 아닐 수 없다. 에수님 당시의 전형적인 교육 방법으로 ‘칼 바호메르’(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로 두 가지를 비교하여 가르치는 방법이었다.
예수님은 이 방법을 자주 사용 죄의 두 단계를 설명하였다. (마 23:23-24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이는 죄의 싹이 나올 때 즉 가벼운 단계에서 잘라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무거운 단계까지 가지 않도록 해야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유사한 가르침이 유대문서에서 발견된다.
8. 두 번째 장례식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8:21-22)
이 제자의 요구는 예수님으로부터 심한 책망을 받는다. 예수님은 부모를 돌보는 일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범하는 장래에 관한 유대 전통을 언급한 것이었다. 유대 전통은 당일 망자의 시신을 묻어야 하는 것이었다. (신 21:22-23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요 19:31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이것이 첫 번째 장례식(first burial)이다
집안에 초상이 나면 쉬바(shivah)라 불리는 7일간의 애도기간이 있는데, 이 기간에든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무덤에서 시신이 부패하여 뼈만 남도록 안치한다. 예루살렘 탈무드에 의하면 뼈만 남게 되면 이를 거두어 납골함(ossuary)에 넣었다. 이때 비로소 애도기간이 끝나는 것이다.
뼈를 거두어 납골함에 넣는 것을 두 번째 장례(second burial)라고 한다. 이 두 번째 장례식은 장남이 거행하는데, 뼈를 가지고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나 또는 가족묘(동굴)로 가져가 그들 선조들 옆에 안치한다. 이 같은 풍습은 1세기에 유행하였다.
예수님은 비성경적 개념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육체가 뼈로부터 부패되어 사라지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장례식 사이에 사자의 죄가 속죄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녀들은 아버지의 유골이 열조와 함께 눕게 되는 두 번째 장례식에 기뻐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제5계명의 실천을 방해한 것이 아니라, 비성경적 믿음을 조장하는 두 번째 장례식을 지적한 것이었다. 이 제자의 첫 번째 장례식은 1년 전 쯤으로 그렇지 않았다면 예수님과 함께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사건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장막절 직전에 일어났을 것이다. 그래서 이 제자는 이시기가 적절한 것이라 판단하였던 것이다.
9. 나팔을 불지 말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태복음 6:1-4)
신명기 15:7-1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대로 유대인들은 기도, 구제, 회개를 3가지 미덕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1세기의 성전의 여인의 뜰에는 모두 13개의 자선함이 있었다. 그 모양은 바닥은 넓고, 입구는 좁아서 마치 나팔모양으로 생겼고 동전 떨어지는 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바리새인들이 때로는 많은 동전을 가지고와 자랑삼아 한꺼번에 떨어뜨렸다. 이를 “나팔을 불다”(sounding the trumpet)라고 한다.
10. 좋은 눈(good eye) vs 나쁜 눈(bad eye)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good)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bad)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마태복음 6:22-23)
좋은 눈(single eye aiyin tovah)은 인자한 사람을 의미하고, 나쁜 눈(bad 또는 evil eye aiyin ra'ah)은 인색한 사람을 의미한다. 랍비들은 “만약 사람이 선물을 주면, 좋은 눈을 가졌다고 하라” 랍비 힐렐(Hillel)은 수입의 1/40을 기부하면 좋은 눈이요, 1/60을 기부하면 나쁜 눈이라고 하였다. 물론 모든 사람들은 1/10을 기대하였다.
“예수님은 모든 점에 있어 유대인이었다. 예수님은 유대인 현자들의 핵심이었다. 예수님은 무지한 촌뜨기가 아니며, 기록된 율법과 구전 율법을 숙지하고 계셨다.” (David Flusser)
옮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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