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근의 <알이랑 민족>은 유해물질로 가득 찬 ‘쓰레기통’이다
유석근의 <알이랑 민족> 비판(2)
유석근 목사 (예장 합동, <알리랑 민족> 저자) |
글을 시작하며
영적인 유해물질로 가득 찬 유석근 목사의 <또 하나의 선민 알이랑 민족>(이하 ‘알이랑 민족’)이라는 책은 2001년에 초판을 시작으로, 2005년 개정판 1쇄에서 2015년 개정판 15쇄까지 찍으면서 불황으로 허덕이던 기독교 출판계에서 기염을 토했다. 또 2009년에 출판한 <알이랑 고개를 넘어 예루살렘으로>는 <알이랑 민족>만큼은 아니었지만, 2013년에 4쇄를 찍으며 나름대로 승승장구했다. 아마도 유석근 목사는 2001년 이래로 지금까지 영적 쓰레기통인 <알이랑 민족>이 주는 명예와 부를 상당히 누렸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이런 유석근 목사의 쓰레기통 호황은 이제 끝이 보이는 것 같다. 왜냐하면 늦은 감이 없지는 않으나, 이번 10월에 있을 장로교 합동 총회에서 유석근 목사를 조사해 달라는 ”헌의안”이 다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여전히 한국교회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증거이며. 오래 참으신 하나님의 일하심이 분명하다. 필자도 그 동안 물론 몰라서 그랬지만, 이 책을 그냥 방치하고 지나쳤던 직무유기의 자책감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 계속 보겠지만, 유석근 목사의 [알이랑 민족]은 한 마디로 비성경적이며, 사기와 거짓말로 가득 찬 영적 쓰레기통이다. 다시 말하면 [알이랑 민족]은 ‘택하신 백성을’ 미혹하려는(막13:22) 사탄의 메시지로 가득 차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알이랑 민족]의 추천사에서 보듯이 신학 훈련을 한 목사들(이들은 상당히 유명한 목사들이다)마저도 이 책에 매료되어 정신 나간 소리들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신학 훈련을 받지 않은 상당수의 사람들에게는 [알이랑 민족]이 너무나도 매력적인 복음으로 들려질 것 같다. 그래서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미혹되어 자신도 모르는 채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십자가’(롬1:16)에서 떠나버렸을 것으로 추측된다.
유석근 목사는 자신이 만들어낸 영적 쓰레기들을, 성경을 교묘히 이용하여 진리인양 위장하고 있다. 유석근 목사는 여타 이단들과 다르지 않게 성경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재단해서, 또는 엉터리로 해석해서 [알이랑 민족]이 대단히 성경적인 것처럼 교묘하게 속여 신자들을 미혹한다. 그는 [알이랑 민족]의 머리말인 <이 책을 쓰는 까닭>에서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잠29:18)를 제시하면서 이스라엘의 멸망의 원인이 묵시 부재로 말미암은 것이며, 한국교회의 침체도 그 원인이 이스라엘과 동일한 묵시 부재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런 한국교회의 침체의 해결책으로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위해 오래 전에 주신 ‘묵시’를 한국교회 성도들이 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알이랑 민족, p.10-11).
여기서 그가 말하는 ‘묵시’는 자신이 성경에서 발견했다는 ‘제2의 선민, 알이랑 민족’에 관한 것이다. 즉 한민족은 욕단의 후손으로서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과 함께 ‘알이랑’ 찬송가를 부르면서 험산준령 고개고개를 넘어 동쪽으로, 동쪽으로 와서 한반도에 정착한 민족으로, 하나님께서 마지막 선교를 위해 준비하신 제2의 선민이라는 ‘묵시’를 말한다. 유석근 목사는 한국교회가 이 ‘묵시’를 알지 못하면 이스라엘처럼 망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나 다행스럽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묵시’를 주셔서 그 ‘묵시’를 책으로 기록한 것이 바로 [알이랑 민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유석근 목사의 허접한 속임수이다. 그는 잠29:18을 인용하면서 후반부의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를 슬쩍 빼버리고 앞부분만 인용함으로써 성경의 본 의미를 왜곡했으며, 그것으로 독자들을 속였다. 이런 속임수는 이단들이 흔히 쓰는 수법들인데 이런 수법을 요일2:12로 쉽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5:12)에서, 전반부의 ‘아들’은 후반부에 언급된 ‘하나님의 아들’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후반부를 빼버리고 전반부인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만 인용하면서, ‘미혼은 자녀가 없을 것이므로 무조건 구원을 받을 수 없고, 기혼이라도 자녀들 중에 아들이 없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유석근 목사가 잠29:18을 인용해서 [알이랑 민족]이 ‘묵시’라고 말하는 속임수와 다를 바 없다.
유석근 목사가 인용한 잠29:18의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의미를 제대로 알려면, 이것과 대조를 이루고 있는 후반부의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를 반드시 함께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잠29:18은 명백히 ‘묵시’와 ‘율법’을 대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잠29:18에서 말하는 ‘묵시’는 ‘율법’임이 명백하고, ‘묵시가 없는 백성’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백성’임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유석근 목사는 잠29:18의 후반부를 슬쩍 빼버리는 꼼수를 써서 본문이 말하는 ‘묵시’가 마치 자신이 발견한 [알이랑 민족]인 것처럼 독자들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또 그는 자신의 [알이랑 민족]이 한민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묵시’라는 속임수를 위해 놀랍게도 ‘욕단의 후손이 동으로 이동해서 한반도에 왔다’는 주장의 근거로 창10:30의 “동쪽”을 주목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창10:30의 ’동쪽‘은 오역한 한글 번역이지 원문의 의미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유석근 목사의 [알이랑 민족]은 잘못 번역된 한글 성경을 근거로 쓴 황당한 소설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창10:30의 “동쪽”에 대한 설명은 <바른믿음>(2016-07-06)의 [유석근 목사의 <알이랑 민족>은 fact 없는 fiction]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간단히 요약만 하겠다.
“그들이 거주하는 곳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쪽 산이었더라”(창10:30)”
위 본문의 “동쪽’을 근거로, 유석근 목사가 쓴 소설 [알이랑 민족]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욕단의 후손은 어디로 갔을까? 성경은 그들이 동방의 산악 지대를 넘어 아시아로 갔다고 말한다. 욕단의 후손은 동쪽의 산악 지대를 넘어서 파미르 고원을 지나 찬산 산맥을 넘어, 알타이 산맥을 지나 아시아로 이동했으며, 이동할 때 불렀던 인류 최초의 찬송가가 “알이랑”이다. 따라서 욕단의 후손은 단군 자손의 시조이며, 그러므로 한 민족은 셈족이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듯이 한 민족은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숨겨놓으신 또 다른 선민이다.
유석근 목사가 근거로 삼은 창10:30의 ‘동쪽’은 히브리어 원문은 ‘qedemah’이다. 그런데 ‘qedemah’의 원래의 의미는, 유석근 목사에게는 당혹스러운 일이 되겠지만, ‘동쪽’이 아니라 ‘앞쪽’ 또는 ‘위쪽’이다. 이것은 과거 우리 조상이 ‘남산’을 ‘남쪽에 있는 산’이 아니라 ‘동네 앞에 있는 산’의 의미로 쓴 것과 다르지 않다.
‘앞쪽’(위쪽)을 의미하는 ‘qedemah’에 방위상의 ‘동쪽’이라는 의미가 들어온 것은 아무리 시간을 앞당겨 잡아도 모세오경 시대보다는 한참 후의 일이다. 따라서 모세오경에 언급된 “qedemah”는 반드시 ‘앞쪽’ 또는 ‘위쪽’으로 번역해야 하며, 또 모세오경 이후에 기록된 구약성경의 “qedemah”도 우선은 ‘앞쪽’ 또는 ‘위쪽’으로 번역하되, 전후문맥 상 ‘동쪽’이 분명하면 ‘동쪽’으로 번역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므로 유석근 목사가 창10:30에서 “qedemah”를 잘못 번역한 ‘동쪽’을 근거로, “욕단의 후손이 동쪽으로 갔다‘는 [알이랑 민족]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이 소설인 것처럼, 그의 상상에서 나온 소설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후로 [알이랑 민족]은 서점에서 소설책을 진열하는 곳에 두어야 할 것이다.
또 유석근 목사는 자신의 [알이랑 민족]이 한민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묵시’라고 속이기 위해 놀랍게도 성공회 신부의 이야기를 동원한다. 개신교 목사가 성공회 신부의 글을 인용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그는 여기서도 인용한 글의 의미를 교묘하게 왜곡해서 독자들을 속이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보기엔 한국은 자신의 참모습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 흡사 기억상실증 환자와 같은 인상을 준다. 만일 우리가 진정 하느님을 믿는다면 하느님께서 한국 백성에게 공동의 선(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어떤 특별한 역할을 부여하셨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러니만큼 한국으로서의 가장 긴급한 과제는 스스로를 재발견하고 qhs연의 모습을 회복하는 일이다."(대천덕, ‘기독교는 오늘을 위한 것’, [생명의 샘터], 1987년, p.70)....(알이랑 민족, p.19)
그는 대천덕 신부(R. A. Torrey Ⅲ)의 글을 인용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그가 무엇을 염두에 두고 “한국은 자신의 참모습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 흡사 기억상실증 환자와 같은 인상을 준다”라는 말을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아는 것은 그의 말은 분명히 예언적인 말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인은 자신의 참모습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토레이의 말과 같이 스스로를 재발견하고 본연의 모습을 속히 회복해야 할 백성이 바로우리 한민족이다. 실로 그것은 새 천년을 맞이한 한국인의 긴급한 과제이다.
한국인, 우리는 누구인가? 기록된 계시인 성경에 의하면 한국인은 천손민족, 즉 하느님의 택함을 받은 선민(選民)이라는 것이다. 비로 이것이 한국인의 참모습이며, 우리 겨레가 회복해야 할 본연의 모습이다."(알이랑 민족, p.19-20)
유석근 목사는 대천덕 신부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른다고 말한다(그러나 누구라도 쉽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음만큼 그 내용이 뻔한데,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마 문제가 되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기 위함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바로 뒤이어 대천덕 신부의 말이 ‘예언’이라고 단정하고 나서(의미는 모른다면서 그것을 예언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놀라운 거짓말이 아닐 수 없다), 대천덕 신부가 말한 ‘기억상실증’이 마치 한민족이 제2의 선민으로 선택된 알이랑 민족이라는 오래 전의 기억을 한국교회가 잊고 있는 것을 묘사하는 것처럼 그 의미를 비틀어버린다. 대천덕 신부가 언급한 한국교회의 ‘기억상실증’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그 신분을 망각한 채 도덕적으로 타락 일로를 걷고 있는 한국교회의 현실을 풍자한 말인데도 말이다.
또 유석근 목사는 마치 자기만이 한국교회가 망각하고 있는 ‘묵시’에 대한 중요성을 깨달은 것처럼 다음과 같이 한국교회를 향해 촉구한다.
"그래서 금일 한국교회에서 가장 긴급히 요청되는 것은 ‘묵시’이다! 이제 한국교회 성도들은 주님 앞에 나아가 우리 겨레와 우리나라를 위한 ‘말씀’을 달라고 전심으로 구해야 한다. 민족의 본질이 변화될 수 있는 ‘계시’를 달라고 큰 소리로 부르짖어야 한다."(알이랑 민족, p.12)
그리고 유석근 목사는 우리 겨레가 알아야하는 계시가 바로 자신이 쓴 [알이랑 민족]이라고 말하면서 이 책이 성경과 동일한 성령의 계시임을 은근히 암시한다.
“하느님은 오래 전에 나의 눈을 열어 그것을 보게 하셨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 한국교회의 성장이 점차 멈추고 있을 때, 내 안에 있는 그것을 책으로 쓰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분명히 우리나라와 한국교회를 향해 예언적 비전을 풀어놓으라는 분부이셨다. 그리하여 집필된 책이 본서이다.”(알이랑 민족, p.12-13)
유석근 목사는 [알이랑 민족]이 또 다른 성경이라는 이단적인 거짓말을 하고 있다
유석근 목사는 [알이랑 민족]을 성경과 같은 수준의 것으로 올려놓기 위하여, ‘빌 헤몬’의 예언에 의존한다.
"빌 헤몬 목사는 나에게 이렇게 예언하였다: “내가 능력과 지혜로 말미암아 서판에 쓸 수 있는 기술을 에스겔에게 준 것같이 잘 쓸 수 있는 기술을 너에게 허락하였다. 네 마음에 지혜를 주었고 네 손으로 집필할 수 있게 하였다. 내가 너를 예언적 서기관으로 사용하노라. 내 영으로 네 심령에 준 말을 너는 집필하라, 내가 준 계시가 네 심령에 있다. 너는 그것을 기술하라. 내가 이 교계에 너를 통하여 많은 자원을 공급하려고 한다. 네가 나의 하고자 하는 일을 하면 내가 너의 필요한 일을 행하여 주리라.........”(알이랑 민족, p.13)
사탄의 하수인인 빌 헤몬은 신사도주의의 대부로서 거짓예언, 거짓방언 등의 유포자이다. 유석근 목사는 장로교 합동 소속 목사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거짓 예언자 ‘빌 헤몬’에게서 찾고 있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아이러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이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이단적인 사명이 성경에 있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그러니 사탄의 하수인인 ‘빌 헤몬’의 헛소리에 의존해서라도 [알이랑 민족]을 하나님의 계시인양 위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유석근 목사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또 유석근 목사는 신사도주의자 ‘고든 그리브’의 예언에도 의존한다.
"그 후 몇 년 뒤 캐나다의 ‘고든 그리브’(수 년 간 한국을 방문, 전국 대도시에서 기름부음이 충만한 성회를 인도한 바 있음/<필자 주>고든 그리브의 예언: "속초, 광주, 인천, 부산, 서울에 하늘 문이 열린다", 하늘 문이 열리는 이유는 우리의 중보기도, 찬양으로 어둠의 세력이 물러갔기 때문이다)를 샬롬선교회의 사무실에서 만났을 때 주님은 그를 통해 나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책을 써라!” “아는 대로 쓰라”는 예언에 나는 그만 충격을 받았다. 아는 대로 쓰라니! 그렇게까지 성령께서 촉구하시는데도 더 집필을 지연했다간 나는 하느님께 매를 맞을 것 같았다. 그 짧은 예언은 나에게 견책과 격려를 동시에 주었다. 성경은 “예언을 멸시치 말라”(살전5:20)고 말씀하고 있다. 나는 더 이상 주저할 수 없었다."(알이랑 민족, p.13-14)
이렇게 유석근 목사는 허접한 사탄의 하수인들의 예언에 근거하여 자신이 쓴 [알이랑 민족]이 신의 명령에 의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라고 큰소리친다. 그러므로 그의 주장에 의하면, [또 하나의 선민 알이랑 민족]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하나님의 계시가 기록된 또 하나의 성경인 셈이다.
[알이랑 민족]은 유석근 목사의 용감한 무식으로 이루어진 쓰레기통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Dunning–Kruger effect: 잘못된 결정을 내려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지만, 능력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심리학 용어이다)는 심리학 용어처럼, 유석근 목사의 ‘무식한 용감’은 부러울 정도로 황당무계, 감당불감당이다. 그러면 그가 얼마나 무식이 충천한지 그가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는 [알이랑 민족]의 이야기 일부를 살펴보자.
“아리랑은 놀랍게도 우리 한민족의 선조들이 홍수 후 셈계의 일신신앙을 가지고 동방으로 이동할 때, 험한 산과 높은 고개, 그리고 고원들을 넘어 오면서 부른 ‘찬송가’였다”(알이랑 민족, p.31).
"‘아리랑’은 원래 ‘알이랑’이다(알이랑->아리랑). [알이랑]은 ‘알’과 ‘이랑’으로 구분된다. ‘알’은 ‘하느님’을 의미한다. ‘하느님’이라는 신명(神名)은 처음에 ‘알’이었다. 그런데 ‘알’ 앞에 ‘한’이라는 관형사를 붙이고, ‘알’ 뒤에 ‘님’이라는 존칭명사를 붙여서 ‘한님’이라고 했다. 그것이 한알님→하늘님→하늘님→하느님으로 바뀐 것이다. 그래서 ‘알’은 ‘하느님’이다. 유대인의 ‘엘(EL)’, 아랍인의 ‘알아(알라)’는 바로 이 ‘ᄋᆞᆯ’에서 파생된 말이다(‘알라’는 아랍어로 하느님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인 아랍 사람들도 이 단어를 사용한다). 즉 창조주 하느님을 뜻하는 인류 최초의 신명이 ‘ᄋᆞᆯ’이었는데, 노아 홍수에 의해 홍수 이후 세대로 전해졌다.)" (알이랑 민족, p.32-35 요약).
‘알이랑’이 시간이 지나면서 발음이 변해 ‘아리랑’이 되었다는 말은 그럴듯한 것 같지만, 다른 근거들은 전혀 없이 단지 발음만 가지고 그렇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허접한 넋두리에 불과하다. 더구나 하나님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엘’이 ‘알’에서 왔다는 말은, 더욱 황당무계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지 ‘엘’이 ‘알’과 발음상으로 유사하다는 점과 저자의 황당한 상상력 말고는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다른 증거들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유석근 목사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아리랑’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아랑’이라는 말이 ‘아리랑’으로 변했다는 것도 문법적으로 납득할만한 설명이 아니다."(알이랑 민족, p.26).
"설령 ‘알영’이라는 여자가 있었다고 해도 그 ‘알영’이란 말이 ‘아리랑’으로 음전했다는 것은 어설픈 비약이기 때문이다."(알이랑 민족, p.29).
"‘악랑 고개’가 ‘아리랑 고개’라는 것은 억측이기 때문이다. 단지 ‘악랑’의 발음이 ‘아리랑’과 약간 유사하다고 그렇게 단정하는 것은 무리다."(알이랑 민족, p.30).
위의 유석근 목사의 비판은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흉보는 형국’과 다르지 않다. 필자가 보기에도 전통적인 ‘아리랑’의 유래보다 유석근 목사가 주장하는 ‘알이랑’이 훨씬 더 납득할 수 없는 어설픈 비약처럼 보인다.
또 유석근 목사가 주장하는 히브리어 ‘엘’(하나님)이 ‘알’에서 온 것이며, ‘이랑’은 ‘함께’라는 뜻이므로 ‘알이랑’은 ‘하나님과 함께’라는 뜻이라는 유석근 목사의 주장은, 황당무계를 넘어서 무아(무식)지경의 수준이다. 왜냐하면 우리말 ‘이랑’에 ‘함께’라는 의미가 있다는 것만으로, ‘알이랑’이 ‘알과 함께’(여기에 자기 마음대로 ‘알’ 앞에 관형사 ‘한’을 붙여 놓고/알이랑, p.37)이며, 그래서 ‘아리랑’은 ‘하나님과 함께’라는 주장은 ‘밭이랑’이 ‘밭과 함께’라는 의미라고 떠드는 헛소리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밭이랑’에서 ‘이랑’은 밭의 한 두둑과 고랑을 함께 이르는 말이다), 필자가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은 필자가 만들어낸 이야기들이다. 유석근 목사의 ‘알이랑’보다 훨씬 더 믿을 만한 주장이 아닌가?
주장1>
지금부터 약 4000여 년 전에 달(moon)에서 우연히 새 한 마리가 지구로 날아들었다. 지구촌 사람들은 그 새를 신성시하여, 최상의 먹이를 제공하며, 귀하게 보살폈다. 달(moon)에서 온 새도 지구촌 사람들이 제공하는 먹이가 너무 맛있었던지, 떠날 생각은 하지 않고 날마다 과식을 하며 거기서 살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새는 자신의 고향인 달(moon)로 돌아가기 위해 날개 짓을 하며 날아가려고 했지만, 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과식으로 인해 살이 너무 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달(moon)에서 온 이 새는 지구촌 사람들과 함께 살았고, 지구촌 사람들은 이 새를 달(moon)에서 왔다고 해서 ‘달’이라고 불렀는데, 그 ‘달’이 지금의 ‘닭’이 되었다.
주장2>
‘캐나다’는 세종대왕의 후예들, 즉 세종대왕이 만드신 한글을 잘 아는 조선 사람이 세웠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멀리 타국 땅에서 세종대왕을 그리워하며, 한글 자음의 첫 세 글자를 가지고 “가나다”라는 국호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후 ‘가나다’->카나다->캐나다(Canada)로 변천해서 지금의 ‘캐나다’가 된 것이다.
위의 필자의 두 가지 주장과 유석근 목사의 ‘알이랑’이 ‘아리랑’이 되고 ... 와 무엇이 다른가? 오히려 필자의 주장이 더 훌륭하지 않은가? 또 유석근 목사는 ‘아리랑’은 욕단의 후손(한민족)이 동으로 이동하면서 부른 찬송가라는 기막히게 무식한 주장을 한다. 그렇다면 ‘아리랑’에 나오는 “스리랑”은 무슨 말인가? 슬(스리:three)+이랑->“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고개를 넘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욕단의 후손은 그때 이미 하나님이 삼위일체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는 무슨 뜻인가? 유석근 목사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문맥상 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나를 버리고 가신 님”이 된다. 왜냐하면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는 바로 앞의 가사에서 “하느님과 함께 고개를 넘어 간다”는 뜻으로서, 하느님을 섬기는 자들의 찬송이며 믿음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하느님을 불신, 배척하는 무리들을 의미한다."(알이랑 민족, p.45)
유석근 목사의 설명대로라면, 욕단의 후손은 유 목사만큼이나 정신이 나간 족속임에 틀림없다. ‘하느님을 불신하고 배척하는 무리들’에게 “님”이라는 존칭어를 쓰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이 “하느님을 섬기는 나를 버리고 가신 님”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결코 문맥상으로 도출될 수 없는, 그러나 유석근 목사의 용감한 무식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한 해석일 것이다.
문맥상 ‘하나님과 함께 고개를 넘어 간다’ 바로 뒤에 이어지는 “나를 버리고 가신 님”에서의 “님”은 초등학생이 보아도 앞 문장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나를 버리고 간 자’에게 존칭어 ‘님’을 붙인 것을 보면, ‘나를 버리고 가신 님’은, 앞에서 함께 고개를 넘었던 ‘알’, 즉 하나님임이 명백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욕단의 후손(한민족)과 함께 동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욕단의 후손(한민족)을 버리고 떠났음이 분명하다. 유석근 목사의 주장이 맞는다면 한민족은 세계 선교의 마지막 주자로 하나님이 숨겨 놓으신 ‘또 다른 선민’이 아니라, 하나님이 버리신 최초의 ‘불행한 민족’이 될 것이다.
또 ‘아리랑’이 욕단의 후손이 동으로 이동하면서 부른 인류 최초의 찬송가가 틀림없다면, 욕단족의 이주 경로에 해당되는 지역의 어느 한 군데에서라도 최소한 ‘아리랑’의 흔적은 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한반도 외의 다른 어떤 곳에서도 ‘아리랑’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단지 유석근 목사의 미친 넋두리만 한반도에 메아리칠 뿐이다.
유석근의 [알이랑 민족]은 과거 이단들이 주장한 쓰레기들의 변형에 불과하다
다음은 10년 전쯤 정윤석 기자가 쓴 글의 일부이다.
먼저 성경상의 욕단과 한민족의 연관성을 설명하는 방식부터다. 이 주장은 예장 통합측이 1995년 이단으로 규정한 나운몽 씨가 유 목사보다 먼저 언급했다. 나 씨의 글을 먼저 살펴보자.
“성경 상 계보대로 우리 민족은 아담의 후손으로 둘째 아벨인 셋의 계통 노아의 아들 셈의 증손자 에벨의 둘째 아들 욕단의 후손이다. 즉 에벨의 두 아들 벨렉과 욕단이 서로 갈라진 후 형 벨렉은 아브라함의 조상으로 성경에 드러난 계통이지만 동생 욕단은 감추인 속사람같이 계대가 이어졌다. 마치 형 에서는 아버지의 집에서 드러난 처지였지만 동생 야곱은 동방 하란 땅 어머니의 친정에 가서 숨겨져 살고 있던 처지와 같은 처지다. 이는 곧 유형은 드러나고 신령은 감추이는 이치와 같은 일이다. 이렇게 에서는 겉사람을 상징했고 야곱은 속사람을 상징했다. ••• 이처럼 형 벨렉계의 기업은 동생 욕단계에게로 옮겨진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열매 맺는 백성은 동방에 있음이 확실하다"(마 21:43)”(나운몽, <2000년 전통교리 이상 있다>, 107~108페이지, 복음신문출판국, 1993년)
‘동방’에 대한 유 목사의 해석은 교주신격화 단체들과 가장 많이 닮은 부분이다. 자신을 보혜사라는 김풍일 씨는 <생명나무>(1982) 407페이지에서 동방을 한국이라고 해석했다. 이만희 씨를 보혜사, 이긴자라고 주장하는 신천지 측의 책자인 <신탄>(1985)도 364페이지에 동방을 한국이라고 설명한다. 통일교 교주인 문선명 씨의 <원리강론>(1966년초판) 550페이지에도 ‘동방의 그 나라는 바로 한국이다’라고 말한다. 조희성 교주의 영생교 측 신도가 쓴 <단군선민의 역사>(1991년)에도 이사야서 41:2의 동방은 한국이라고 주장한다(38~39페이지).(2009년 7월15일(수) 정윤석 기자 unique44@naver.com)
이렇게 유석근 목사는 과거 이단들의 낡은 “동방 사상”을, ‘아리랑’과 창30:10의 ‘동쪽’과 또 다른 잡다한 거짓말들(예를 들면 무궁화, 삼태극 등)을 더해서 좀 더 그럴듯하게 리모델링했을 따름이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전1:9)
글을 마치며
[알이랑 민족] 페이지 페이지마다 예외 없이 이단적인 헛소리들이 난무하지만, 지금까지 필자가 지적한 사실만으로도 유석근 목사는 돌이킬 수 없는 이단의 자리에 스스로 앉았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다시 말하지만, 그가 이단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성령의 영감으로 [알이랑 민족]이라는 또 다른 성경을 기록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알이랑 민족]이라는 또 다른 성경에서 ‘한민족은 세계 선교의 마지막 주자로 하나님이 예비하신 또 다른 선민임을 성령이 유석근 자신에게 계시하셨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특히 [알이랑 민족]이 이단적인 이유는 한민족이 제2의 선민이라는 쓸데없는 우월감을 부추기는 것은 한국교회를 멸망시키려는 사탄의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알이랑 민족]은 유석근 목사가 최초로 발견하고 주장한 ‘묵시’가 아니다. 이전에도 이와 유사한 이단적인 넋두리들은 이단들을 비롯해서 일반 부흥회나 기도원 등에서도 많이 있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동방의 나라 한국을 가장 사랑하신다. 예수님은 영적인 예루살렘인 대한민국 서울에 재림하실 것이다’ 등 이다. 이런 넋두리들이 한국교회에서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이유는, 오래 동안 민족적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던 한 민족에게, 우리 민족이 가장 우월하다는 메시지는 열등감을 일순간에 날려 버릴 수 있는 생수 같은 복음이었기 때문이다.
민족적 우월감을 부추기는 이단적인 메시지는 이미 오래전에 이스라엘이 빠졌던 사탄의 함정이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선민이라는 우월감으로 이방인들을 지옥의 땔감 정도로 여겼다. 그러므로 차별 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스라엘에 임했을 때,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선민사상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는 선민이 따로 없다. 로마서 9-11장을 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어려가지 특권을 주시면서 그들을 먼저 택하신 목적은, ‘선민’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이방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도구로 쓰시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은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먼저 선택하셨을 뿐이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10:12-13)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3:28-29)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소유할 수 있는 자들은,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이나 [알이랑 민족]의 천손선민 사상을 붙드는 자들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주의 이름을 오직 믿음으로 부르는 자들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십자가의 복음 앞에서는 [알이랑 민족]의 천손선민 따위의 특권의식은 이스라엘처럼 오히려 십자가를 외면하게 하는 사탄의 함정이 되고 만다. 사탄은 [알이랑 민족]을 통해 한민족이 이스라엘과 함께 천손선민이 되게 하셨다는 민족적 우월감을 부추겨서, 한국교회로 하여금 십자가보다 [알이랑 민족]의 특권을 더 의지하도록 미혹해서, 십자가를 통해서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놓치도록 획책하고 있다. 이 획책의 선두에 유석근 목사가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유석근 목사가 주장하는 한민족이 제2의 선민, 즉 세계선교의 마지막 주자로 숨겨놓으신 민족이라는 헛소리는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우리에게 하신 마지막 명령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위험한 사탄의 메시지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28:19)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위에서 보듯이 예수님은 당시 제자들을 비롯해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땅 끝까지의 마지막 선교 사명을 주셨다. 그럼에도 유석근 목사는 [알이랑 민족]에서 우리의 구원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인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석근 목사를, 위험한 이단적 메시지를 퍼뜨리는 자로 규정하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임이 틀림없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한 가지는 유석근 목사가 정말로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 소속 목사가 맞는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총신에서 정말로 보수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했다면, 이런 미치광이 같은 헛소리를 결코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석근 목사는 총신 신학대학원에서 신학 훈련을 받은 목사가 정말 맞는가? 유석근 목사는 보수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 소속 목사가 정말 맞는가?
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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