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제국 이후와 로마의 등장(단11:1-32)
1. 페르시아 제국과 페르시아 전쟁(1,2)
다니엘서 11장 앞부분에서 다니엘은 장래 페르시아 제국과 헬라 왕국들에 관한 상세한 예언을 하고 있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허락하신 예언이다. 그러므로 다니엘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예언이 이루어지는 형편들을 예견하며 역사적 현장을 목격하는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한 사람들은 그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어리석은 자들은 분명한 예언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의미를 알지 못할 것이다.
다니엘은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개국한 다리오 왕 원년에 그를 도와 강하게 했음을 밝히고 있다. 바벨론 제국의 고위 공직자 출신이었던 다니엘이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신흥 강국으로 부상한 메대 왕국을 지원했던 것이다. 이는 일종의 정치적 배신행위로 비쳐질 수 있다. 하지만 다니엘이 그렇게 한 것은 그가 바벨론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다니엘에게 앞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에 두고 전개될 세속 왕국들의 역사적 형편에 대한 계시의 말씀을 주셨다. 그것은 통치자들의 구체적인 실명이 밝혀지지 않았을 뿐 상당히 구체적인 내용들이다. 페르시아 제국에는 그 후에 세 왕이 일어날 것이며 네 번째 왕은 매우 부요하고 강력한 힘을 갖춘 왕이 될 것이라 예언되고 있다. 그가 세력을 키워 헬라를 공격하게 되리라는 사실이 언급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다니엘서에 언급된 페르시아의 왕들은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고 있을까? 칼빈(J. Calvin)은 다니엘서 본문에 기록된 네 왕들을,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키고 정복한 다리오 왕 이후에 등장하는 고레스(Cyrus), 캄비세스(Cambyses), 다리오 1세(Darius Hystaspis), 그리고 크세르크세스(Xerxes)로 보고 있다.
다리오 1세는 그의 치세 중에 발생한 ‘이오니아 지역의 반란’(BC499-494)을 평정한 후 BC492년과 490년에 함대를 동원해 트라키아 원정에 나서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인생을 마치게 된다. 그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크세르크세스 왕은 BC480년 에게해를 건너 아테네가 있는 그리스 본토를 향해 총력적인 공격을 가한다. 하지만 페르시아 제국은 아테네 앞에 있는 조그만 섬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살라미 전투’에서 완전히 패배하고 만다. 다니엘서 11장 2절에 기록된 ‘헬라국에 대한 침공’은 장래 일어나게 될 페르시아 제국의 그리스 공격에 대한 그 상황을 예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헬라제국과 분열상황 (3, 4)
다니엘서 11장 3절은 헬라제국의 발흥에 관한 기록으로 보인다. 장차 ‘한 능력 있는 왕’이 일어나 큰 권세로 다스리며 임의로 행한다는 말은 알렉산더(Alexander) 대왕을 지칭하고 있다. 페르시아 제국의 말기 마게도니야 지역을 통치하던 필립2세 왕은 자기 아들 알렉산더를 당시 최고의 석학이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의 문하생으로 보낸다. 그가 학자적인 자질을 갖춘 인물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학문에만 전념하는 성품을 가지지는 못했다. 그는 학문의 길을 접고 용맹한 장군이 되어 BC331년에는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헬라제국을 세워 막강한 위세를 떨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학문적 관심과 자질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중 그는 이집트를 정복한 후 나일강 하구의 북부 지중해 연안에 자기 이름을 붙여 건설한 알렉산드리아에 스승을 기념하여 대형 도서관을 건립했다. 후일 알렉산드리아가 고대의 학문과 신학의 중심 도시 역할을 하며, 그곳에서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된 것은 매우 중요한 구속사적인 의미를 지닌다.
또한 그가 정복한 모든 지역들 가운데서 헬레니즘 문화를 일으키고 안착시키게 된 것은 그의 학문성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불과 십수 년 동안의 짧은 기간에 광범위한 지역을 정벌하고 그곳에 헬라문화의 씨앗을 뿌릴 수 있었던 것은 학문을 바탕으로 한 그의 사상에 기인했던 것이다. 그 점을 염두에 두지 않고는 헬레니즘 문화의 급속한 확산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알렉산더 대왕이 세운 거대한 헬라제국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BC323년, 삼십대 초반의 그가 갑작스럽게 죽음으로써 드넓은 그의 제국도 분할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시 고대 왕국들은 왕의 혈통을 지닌 자손에게 왕국이 상속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삼십대 초반의 젊은 알렉산더에게는 그의 뒤를 이을만한 왕자가 없었다. 더구나 설령 그에게 어린 왕자가 있었다 할지라도 치열한 전쟁이 계속되는 중이었으므로 섭정이 이루어질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했다.
결국 다니엘서에 예언된 대로 알렉산더 대왕의 헬라제국은 그의 신하들에 의해 네 왕국으로 분할되었다(단11:4). 알렉산더가 정복하고 세력을 넓힌 대제국이 그의 자식이 아니라 여러 명의 신하들에게 나뉘어 돌아갔던 것이다. 그 네 왕국은 서쪽의 헬라와 마게도니야 지역을 통괄하는 캐산더 왕국, 소아시아와 트레이스와 비두니아 지역 등을 포함한 북쪽의 리시마쿠스 왕국, 수리아와 바벨론과 인도 지방 등 동쪽의 광활한 지역을 통치한 셀류쿠스 왕국, 그리고 남쪽의 애굽 지역을 이어받은 톨레미 왕국이었다.
다니엘서는 그들의 장래에 관한 분명한 예언을 하고 있다. 하지만 네 왕국들 가운데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나라는 셀류쿠스 왕국과 톨레미 왕국뿐이었다. 그 두 왕국은 언약의 땅인 팔레스틴과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이는 성경의 관심이 세상의 모든 왕국들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과 직접 관련을 지닌 왕국들에 제한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3. 셀류쿠스 왕국과 톨레미 왕국의 갈등, 그리고 로마의 등장(5-20)
알렉산더 대왕의 헬라 제국이 분할된 후 남방 이집트 지역을 통치하던 톨레미 왕국은 막강한 위세를 떨쳤다. 또한 톨레미와 국경을 맞대고 있던 셀류쿠스 왕국 역시 상당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두 왕국은 상호 충돌을 피하고자 평화조약을 맺고 화친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게 된다.
세월이 지나 셀류쿠스 왕국과 톨레미 왕국은 혼인정책(婚姻政策)을 통해 화친을 도모하고자 한다(단11:6). 톨레미 왕 필라델푸스의 딸 베레니스(Berenice)가 북방 왕 안티오쿠스 2세의 후처(後妻)가 되면서 그 두 나라는 평화 조약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다니엘서에 예언된 것처럼, 베레니스는 역할을 충분히 감당할 수 없게 된다. 그녀가 낳은 자식은 본처 라오디스에 의해 피살되었으며 안티오쿠스 2세도 피살당하는 국면을 맞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평화조약을 조건삼아 정략적으로 북방왕국에 시집갔던 남방왕국의 공주는 모든 권세를 잃어버린 채 버림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으로 말미암아 결국 톨레미 왕국에서는 정치적 내분이 일어나게 되며 국력이 약화되어 간다. 아마도 혼인정책의 실패로 인해 적잖은 문제가 일어났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베레니스 공주의 형제 유엘게테스(Euergetes)가 그 위급한 사태를 평정했다. 그가 곧 톨레미 3세였다. 성경에서 ‘톨레미 왕국 공주의 본족에서 난 자중 하나’(단11:7)라고 언급된 인물은 바로 그를 지칭하고 있다.
톨레미 3세는 셀류쿠스 왕국에 대해 누이의 문제로 말미암은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동시에 국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북쪽 왕국을 침공한다. 그는 전쟁에서 크게 승리하여 금은 보물들로 만들어진 신상들과 아름다운 기구들을 대량 강탈해서 돌아갔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남 왕국은 셀류쿠스 왕국에서 금 4000달란트와 다양한 형상물 2500개를 빼앗아갔다고 한다.
그 전쟁이 있은 후에 몇 해 동안은 조용하다가, 이번에는 북쪽에 있는 셀류쿠스 왕국의 셀류쿠스 콜리니쿠스가 남쪽 왕국을 침략하게 된다. 그러나 북 왕국은 침공에 실패하고 본국으로 되돌아간다. 나중 ‘그의 아들들’(단11:10)이 전력을 가다듬어 대군을 모아 다시금 공격을 시도한다. 하지만 남쪽 왕국이 도리어 역공을 시도함으로써 북 왕국의 군대는 또다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다니엘서 본문에서 말하는 ‘왕의 아들들’이란 콜리니쿠스의 아들들인 셀류쿠스와 안티오쿠스를 가리키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안티오쿠스는 안티오쿠스 4세의 부친을 칭하고 있다. 당시 왕은 대군과 다양한 전투 장비를 예비하고 남쪽 왕국을 공격하기 위해 대대적인 준비를 갖추고 전투에 임했다.
그러자 남방 왕 톨레미 필로파토르(Philopator)는 크게 진노하여 군대를 동원해 북방 왕국을 역공했다. 그러자 북방 왕 안티오쿠스 3세 역시 대군을 동원하고 주변 왕국들의 지원을 받아 남방왕국을 공격하게 된다. 그렇지만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부친인 안티오쿠스 3세가 이끄는 군대가 남방 왕의 손에 의해 패배를 당했다. 따라서 남방의 톨레미 왕국은 많은 병사들을 포로로 사로잡아 그 마음이 교만해져갔지만 그 세력은 도리어 점차 기울어져 갔다.
그 후 셀류쿠스는 일찍 사망하게 되었으며 안티오쿠스가 많은 군대를 동원해 남방 왕을 다시 공격하게 된다. 몇 번의 승리로 말미암아 교만에 빠져 있던 톨레미 왕국의 군대가 이번에는 북방 군대를 이길 수 없었다. 그 때 셀류쿠스 왕국은 그 전에 빼앗겼던 국경지역에 있던 여러 성읍들을 되찾게 되었다.
그런 상황이 벌어지는 가운데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도 전쟁에 능한 인물이 등장하게 된다(단11:14). 그는 기회를 잡아 유다 백성들을 이용하여 셀류쿠스 왕국의 군대에 저항해 싸우며 민족독립을 위한 정치적인 이상을 구현하려 한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발생하는 자체세력으로서 정치적 야심가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는 아직 팔레스틴이 톨레미 왕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북쪽 셀류쿠스 왕국에 저항해 싸우면서 세력을 확장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일 수 있다. 따라서 당시 발생했던 상황은 일종의 독립운동의 형태와 연관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으로 구성된 세력은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남쪽의 톨레미 왕은 나중 또다시 공격해오는 북쪽의 안티오쿠스 3세의 막강한 군대를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나아가 혼란한 틈을 타 셀류쿠스 왕국에 반기를 들고 싸웠던 ‘택한 군대’(his chosen people)로 표현된 이스라엘 민족 역시 그에 저항해 이겨낼 수 없었다(단11:15). 그 전쟁으로 인해 북방의 셀류쿠스 왕국은 토성을 쌓고 전투에 임한 결과 견고한 여러 성읍들을 얻게 되었다. 결국 안티오쿠스 3세는 BC198년 팔레스틴에서 톨레미 왕조를 몰아내고 그 지역을 셀류쿠스 왕국에 병합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셀류쿠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3세는 팔레스틴 지역을 장악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땅인 예루살렘에 서게 되었다(단11:16). 하지만 그는 그 땅을 파괴할 위험한 인물이었다. 그는 또한 남쪽 왕국을 패망시키려 하여 총력을 기울여보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화친을 시도한다. 그리고는 또다시 혼인정책을 통해 톨레미 왕국을 정복하려 하지만 그것도 성공하지 못한다(단11:17).
하지만 안티오쿠스 3세의 정복욕은 쉽게 멈추지 않는다. 그는 해변 지역으로 눈을 돌려 많은 땅을 차지하지만 그 쪽 편의 장군에 의해 저지당하게 된다. 안티오쿠스 3세는 BC197년 소아시아를 침략했으며 BC192년에는 헬라 지역으로 군대의 기수를 돌렸다. 그러나 로마와 정면으로 맞싸우게 된 전쟁인 ‘시리아 전쟁’(BC192-189)에서 로마의 장군 코넬리우스 스키피오에 의해 패배하여 본토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본국으로 돌아와 일년 후에 죽게 됨으로써 모든 권력을 상실하게 된다.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자는 필로파터(셀류쿠스 4세: BC187-176)였다. 그는 백성들을 괴롭히며 토색하는 인물이었다. 셀류쿠스 4세는 로마에 조공을 바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는 ‘영광스런 나라’(in the glory of the kingdom, KJV)로 묘사된 팔레스틴 지역에 엄청난 세금을 부과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재무관이었던 신하 헬리오도루스에 의해 독살되어 싸움도 해보지 못한 채 멸망하게 되었다(단11:20).
4.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의 성전 모독(21-31)
셀류쿠스 4세가 죽은 후 그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자는 안티오쿠스 4세였다. 안티오쿠스 3세가 ‘시리아 전쟁’에서 로마에 의해 패배한 후 어린 안티오쿠스 4세는 인질이 되어 로마로 사로잡혀 가게 되었다(마카비1서1:10). 그러나 그는 후일 자기 왕국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으며, 그 와중에 왕이 자신의 신하에 의해 독살당하는 반란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로마에 패배한 안티오쿠스 3세의 뒤를 이은 셀류쿠스 4세를 독살한 헬리오도루스는 자신을 추종하는 세력을 거느리고 정부군에 대항했으나 패배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안티오쿠스 4세는 그 혼란한 틈을 타 셀류큐스 왕국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단11:21). 안티오쿠스 4세는 원래 왕위를 계승할 위치에 있던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소수의 무리를 거느리고 권력을 잡아 왕위에 올랐다. 그는 당시 불안한 정치적 상황을 최대한 이용해 모략을 써서 왕권을 쟁취했던 것이다.
왕위에 오른 그는 왕권 강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국내외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내치(內治)는 물론 외교적인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에게 저항하는 세력을 진압했으며 주변의 동맹국들에 대해서도 주도권을 행사했다. 안티오쿠스 4세는 권력의 보존을 위해서라면 법과 조약을 어기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자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후 안티오쿠스 4세는 그 조상들이 일찍이 행하지 않았던 악한 일들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탈취한 재물들을 가지고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모략을 베풀었으며 그것을 통해 얼마 동안 주변 국가들을 공격하며 승승장구하게 된다(단11:24).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는 못한다. 그의 무모한 정복행위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안티오쿠스 4세는 군대를 결집해 용맹을 떨치며 남방의 톨레미 왕국을 침공하게 된다. BC169년 그는 대군을 이끌고 남방 왕을 공격했다. 당시 톨레미 왕국의 왕은 톨레미 6세였다. 톨레미 왕국 역시 그에 맞대응하여 대군을 모아 항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방 왕은 막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맞아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북쪽의 군대를 당해내지 못했다. 결국 남쪽 왕국은 북쪽 왕의 계략으로 인해 패배하게 된다. 더구나 내란까지 일어나게 되며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게 되었다(단11:26).
그런 상황 가운데서 남북의 두 왕 안티오쿠스 4세와 톨레미 6세는 평화를 위한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지만 양쪽 모두 진심을 감추고 위선적인 회담을 한다. 북쪽의 왕과 남쪽의 왕은 서로 간 속내를 숨기면서 모략을 베풀어 상호 거짓대응을 하게 된다(단11:27). 그것으로 말미암아 평화조약은 성사되지 못하고 안티오쿠스 4세는 남쪽 톨레미 왕국의 많은 재물을 탈취해 본국으로 돌아갔다.
안티오쿠스 4세는 BC167년에 또다시 톨레미 왕국을 침공하게 된다(단11:29). 그러나 이번에는 로마가 그에게 공격을 중단하라는 강력한 요구를 했다. 로마의 해군이 동부 지중해 연안에 당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로마 군대의 위력을 잘 알고 있던 셀류쿠스 왕국의 군대는 불명예스럽게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안디오쿠스 4세는 톨레미 왕국 대신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거스르며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더럽혔다.
“이는 깃딤의 배들이 이르러 그를 칠 것임이라 그가 낙심하고 돌아가며 거룩한 언약을 한하고 임의로 행하며 돌아가서는 거룩한 언약을 배반하는 자를 중히 여길 것이며 군대는 그의 편에 서서 성소 곧 견고한 곳을 더럽히며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을 세울 것이며”(단11:30,31)
안티오쿠스 4세는 예루살렘 성전을 심하게 모독하며 날마다 드리는 상번제(常燔祭)를 중단하게 했다. 이는 유대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중에도 악한 유대인들은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저들에게 아부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그것을 지켜보던 로마는 안티오쿠스 4세와 그의 후계자들에게 대항하는 유대인들을 지원하기에 이른다. 이는 셀류쿠스 왕조를 약화시켜 로마의 지배 아래 두려는 정책의 일환이었다. 이렇게 하여 남쪽 톨레미 왕국에 대한 정복욕을 채우지 못하고 마지못해 본국으로 돌아온 안티오쿠스 4세는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임의로 거스르며 마음대로 악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거룩한 하나님의 언약을 욕되게 하였으며 그 언약을 어기고 배반하는 자들을 격려했다. 나아가 안티오쿠스 4세의 군대는 예루살렘 성전 남쪽에 주둔하면서 성벽을 헐어버리기도 했다. 그리고는 제우스 신상을 성전 지성소 안에 세우고 부정한 돼지를 제물로 바치면서 돼지의 피 냄새가 성전을 진동케 했다.
그는 또한 안식일과 절기를 금했으며 할례를 행하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그것을 어기는 자들은 사형으로 다스렸다. 그리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모든 성경을 불태워 파괴했다. 나아가 그는 언약의 백성들을 배도의 길로 몰아가기 위해 온갖 위협과 감언이설을 중단하지 않았다.
5. 마카비 전쟁 이후의 하스모니안 왕가(32)
마카비 전쟁은 안티오쿠스 4세의 참람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발생하게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군대에 유린당하던 팔레스틴 지역이 톨레미 왕국의 지배를 받다가 뒤이어 셀류쿠스 왕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최악의 상황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남쪽의 톨레미 왕국을 공격하려다가 로마에 의해 차단당한 안티오쿠스 4세가 예루살렘을 공격한 것은 사실상 병적인 태도였다. 그 상황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던 로마는 저들의 목적을 위해 암묵적으로 유대인들을 지원했다.
BC167년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교(異敎) 제사가 드려지는 것을 본 다수의 유대인들은 심한 분노에 들끓었다. 경건한 유대인들(Hasidim)은 안티오쿠스 4세의 종교정책에 강력하게 저항함으로써 목숨을 걸고 율법을 준수하려 애썼다. 그러던 중 예루살렘 북서쪽 모데인(Modein) 마을의 제사장으로 있던 하스모니안 집안의 마타디아(Mattathias)가 성전에서 더러운 돼지를 잡아 제우스신에게 제사지내도록 강요하던 자를 죽인 후 광야로 피신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듬해 마타디아가 팔레스틴을 침공하는 시리아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후 그의 아들 유다 마카비(judas maccabius)가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그는 안티오쿠스 4세의 종교정책에 저항하는 책임자의 역할을 계승하게 된 것이다. 그 때부터 유대인들의 팔레스틴에서 조직적인 민중봉기가 일어나 시민전쟁의 성격을 띠는 반란으로 이어졌다.
“그가 또 언약을 배반하고 악행하는 자를 궤휼로 타락시킬 것이나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단11:32)
결국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악행에 저항했던 용맹한 유대인들은 수년 간의 투쟁 끝에 예루살렘 성전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카비는 돈을 주고 대제사장직을 샀던 메넬라우스(Menelaus)를 제거했다. 그 모든 과정에는 로마인들의 암묵적인 지원이 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로 인해 유대인들이 BC164년 12월 25일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하여 정화함으로써 재봉헌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그 후부터 그 날을 기념하여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는 매년 수전절(Hanukka)이 지켜지고 있다. 그 절기는 구속사적 의미를 지니는 매우 중요한 절기로서 예수님께서도 그 절기를 지키셨다(요10:22).
예루살렘이 회복되던 그 해 안티오쿠스 4세는 페르시아 지역에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곳에 가있던 중 사망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 전에 그가 정했던 유대인과 예루살렘 성전에 관련된 모든 금령들이 사문화(死文化)될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유대인들은 그동안 박탈당했던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게 되었다.
BC160년에는, 유다 마카비가 시리아와의 전쟁에서 전사한 후 그의 아들 요나단(Jonathan)이 아버지를 계승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BC152년 그동안 공석으로 있던 대제사장의 자리에 앉게 된다. 그러나 ‘경건한 유대인들’은 많은 피를 흘린 요나단이 대제사장이 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마카비 가문과 점차 멀어지게 되었다.
또한 BC142년에 요나단이 피살당하자 그의 동생 시몬(Simon)이 그 자리를 계승하게 되었다. 시몬은 유다군대의 총 사령관과 대제사장직을 겸하였다. 그는 시리아 군대를 예루살렘에서 완전히 몰아내는데 성공함으로써 더 이상 시리아에 공물을 바치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평화의 시대를 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BC140년 유대의 통치권을 시몬의 가문에 위임하기로 결의했다. 그 후부터 그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왕위를 세습하게 되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 회복과 이스라엘 민족의 독립의 기틀을 마련했던 마타디아의 아버지 하스몬(Hashmon)의 이름을 따라 ‘하스모니안 왕가’라 불려지게 되었다.
우리는, 팔레스틴 지역에서 마카비 반란이 있은 후 권력의 중심에 서있던 유다 마카비는 로마와 우호조약을 맺음으로써 매우 강력한 동맹국을 얻게 되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BC161년:마카비1서8장). 그 조약은 그의 아들인 요나단(BC144년:마카비1서12:1)과 그 형제 시몬(BC140년:마카비1서14:24)의 통치 때도 계속 유지되었다. 하스모니안 왕가에 대한 로마의 지원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틴 지역에서 안정적인 체제를 구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마카비1서14:40-47).
하스모니안 왕가는 BC63년, 팔레스틴 지역이 로마왕국의 속주가 될 때까지 유지되어 갔다. 마카비 가문의 시몬(Simon)이 유대의 통치권을 공적으로 인정받은 후 그의 뒤를 이어 요한 힐카누스 1세(BC134-104), 아리스토 불루스 1세(BC104-103), 알렉산더 얀네우스(BC103-76), 알렉산드라 살로메(BC76-67), 아리스토 블루스 2세(BC67-63)가 차례대로 왕위를 계승했다.
우리는 다니엘서에 기록된 미래에 대한 예언적 역사기술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일반적인 인간역사에 관련된 장래 일을 말씀하시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약속의 땅 팔레스틴과 그 안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 그리고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여 세우신 언약의 백성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과 연관된 주변 역사들을 미리 계시하심으로써 자기 백성들에게 메시아에 연관된 놀라운 은혜를 베풀고자 하셨던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 신학자들은 이 부분을 보며 다니엘서가 후대에 기록된 책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들이 내세우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다니엘서의 기록 내용이 역사적 실제와 너무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는 역사를 경험하지 않은 상태에서 정확한 내용을 기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유 때문에 다니엘서를 후대 기록이라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만일 다니엘서가 후대에 기록된 책이라면, 이스라엘 민족은 아예 그 책을 거룩한 성경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계시인 정경을 확인하는 데 얼마나 철저했던가 하는 사실을 주의 깊게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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