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님을 시험하여 질문한 내용이다.
이는 우리들이 스스로 우리 자신들에게 질문해야 할 내용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본문 내용은 율법 교사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 첫 번째 질문과 대답 : 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한 질문
ㅡ>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ㅡ>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ㅡ>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ㅡ>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나. 두 번째 질문과 대답 : 강도 만난 자의 이웃 = 자비를 베푼 자
ㅡ>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ㅡ>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ㅡ>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ㅡ>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여기서 영생은 무엇을 말하는가?
‘영생’을 가리키는 헬라어 ‘조엔 아이오니온’은 단순히 영원히 사는 삶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구원’에 상응하는 또 다른 표현으로서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을 알아 깊은 교제를 통해 누리게 되는 생명이다(요 17:3).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찾아와 영생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를 물었을 때 예수님은 십계명을 지키고 소유를 팔아 구제하라고 말씀하심으로 계명을 지키는 제자도와 구제를 영생의 자격으로 제시하셨다(18:18-23).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소유하게 된(요 3:14,15) 성도들은 그분의 계명을 따르며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구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창세로부터 우리를 위하여 예비되 나라를 상속받는 것'과 동일하다.
이처럼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영생을 얻기 위한 삶이 무엇인지를 살펴 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것으로 만족하며, 그 외의 일에는 너무나 무관심하다. 이런 일을 하지 않아도 주 예수를 믿으므로 구원받았다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는 말씀을 되새겨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예수님께서는 최종적인 답변으로 37절에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다.
28절에서는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셨다.
가서 행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그대로 행해야 한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본문의 내용을 알지 못하는 분은 거의 없을 것이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긍휼을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함을 알지 못하는 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지난 주 설교 내용 중에서 오른 쪽에 있는 양과 같이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며,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헐벗었을 때 옷을 입히며, 병들었을 때 돌보고, 옥에 갇혔을 때 가서 돌보는 일을 해야 한다.
이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적으로 행해야 하는 선택과목이 아니라 전공 필수과목이다.
그런데 우리는 행하지 않는다는 데 문제점이 있다.
1978년 사회심리학자인 존 달리(John Darley)와 대니얼 베이트슨(Daniel Bateson)은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그들은 프리스턴대학 신학생들에게 평가를 위한 설교를 준비하게 하고 그들 중 절반에게는 성경 내용 중 아무거나 설교 주제로 삼으라고 했으며, 나머지 절반에게는 ‘착한 사마리아 인’을 주제로 설교를 준비하게 했다.
그들은 학생들을 세 그룹으로 나누어 첫 번째 그룹에는 시간이 적당하다고 했고, 두 번째 그룹에는 넉넉하다고 했으며, 세 번째 그룹에는 이미 늦었다고 알려 주었다. 학생들은 실험을 하는 줄 모르는 상태로, 다른 건물로 이동하던 중 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실험의 핵심은 학생들이 ‘그를 도울 것이냐, 그냥 지나칠 것이냐’였다.
실험 결과는 놀라웠다.
착한 사마리아 인을 주제로 설교를 준비한 학생이라고 해서 쓰러진 사람을 적극 돕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오히려 중요한 변수는 학생들이 ‘시간에 쫓겨 서둘렀느냐 아니냐’였다. 시간에 쫓긴 그룹의 학생 중 10%만이 멈춰 서서 쓰러진 이를 도와주었고, 시간이 적당한 그룹에서는 40%의 학생이, 시간이 넉넉한 그룹에서는 63%의 학생이 도와주었다. 착한 사마리아 인이 되는 데 중요한 것은 ‘넉넉한 시간’이라는 ‘상황’이었지 윤리의식이나 인간성은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인가?
첫째, 우리의 이웃은 누구인가? 대상자는 누구인가?
본문에서는 '강도 만난 자'라고 하였다. 마태복음 25장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다시 되돌려 받을 수 없는 자에게 베풀라고 말씀하셨다. 되돌려 받은 자는 이미 상을 받았다고 하였다.
우리의 관심 밖의 사람, 정말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 나를 도와 줄 것이 없는 사람이 우리의 도움 대상자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교인들이 대상자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시장에서 물건을 구입할 때, 우리들은 신자들의 가게를 간다다. 이것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착각할 때가 많다. 옆집의 콩나물 집을 가는 자가 진정한 사랑의 실천자이다. 그는 우리에게 갚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의 행동은 어떠해야 하는가?
마태복음 25장에서는 자신이 선을 행하는 것을 알지 못했다고 하였다. 우리들이 선을 행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화, 습관화 되어 있어야 한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어야 한다.
가. 불쌍히 여겨야 한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나. 가까이 다가 가야 한다. 멀리 있으면 그분의 처지를 알 수 없다.
다. 자신이 갖고 있는 소중한 것(기름과 포도주)을 투자해야 한다.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소중한 것을 드릴 줄 알아야 한다.
라. 추수 지도를 한다.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집중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한 번 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아야 한다.
셋째, 가서 행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
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움직이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것이 너무 아깝고 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남을 도와 주다가 오히려 내가 어려움을 당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각설이 예수의 저자 이천우 목사에 얽힌 얘기를 통해 결론을 맺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