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 은혜샘물교회 박은조 목사 비아돌로로사의 네 십자가 (눅 23:39-43)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39-43)
기독교의 상징은 십자가입니다. 우리 교회 십자가 종류만도 700 종류가 됩니다. 십자가는 지구상에서 최고 상표입니다. 얼마 전 강화도 갈멜산에서 3일간 집회를 인도하였습니다. 집회 도중에 5분 거리에 있는 인산 교회를 가보았습니다. 몇 년 전에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였던 교회입니다. 교회 마당에 십자가가 선명하게 나타났습니다. 1999년 5월 21일에 나타나서 2000년 8월에 사라졌습니다. 벽돌로 그 자리를 표시하여 놓았습니다. 인산 교회에서 목회하는 박찬수 목사가 배재 후배라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지질학자들이 와서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SBS 기자가 와서 보도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지질학적으로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하며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하필이면 십자가로, 그것도 교회 정면에 나타났습니다. 지질학자들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과학적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미스터리입니다.” 이것이 결론입니다. 교회사 교수인 이 석주 교수가 와서 보고 말했습니다. “이 곳은 강화도의 중심지입니다. 강화도를 하나님이 지키시는 증거이고, 강화도를 십자가로 덮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런 정도 설명외에는 없습니다. 십자가는 신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두 강도의 대화를 누가는 상세히 기록에 남겼습니다.
한 강도가 말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다른 강도가 말했습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가를 지시고 가신 길을 비아돌로로사라고 합니다. 성지 순례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길을 걷게 됩니다. 이제는 길이 아니라 골목입니다. 상가가 양쪽에 즐비한 건물들속에 길입니다. 비아돌로로사는 슬픔의 길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길에는 4 종류의 십자가가 보이고 있습니다.
1. 율법적 십자가 예수님의 십자가 양 쪽 옆에는 두 강도가 달려 있었습니다. 한 강도는 율법적 강도입니다. 평생 강도짓하고 살았으니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 자기 죄를 자기가 짊어지고 죽은 강도입니다. 법대로입니다. 율법대로입니다. 원칙대로입니다. 조금도 틈이 없습니다.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만일 그 이웃을 상하였으면 그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 파상은 파상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손상을 입힌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것이며 짐승을 죽인 자는 그것을 물어 줄 것이요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일지니”(레 24;19-21)
이것이 율법입니다. 강도는 십자가에서 죽여야 합니다. 이것이 율법입니다. 그래서 한 강도는“나는 강도니 죽어야 마땅하다”라고 율법적으로 죽으니까 구원받지 못 하였습니다.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만일 이 강도처럼 “나는 이 정도로 죄를 지었으니 이 정도 벌을 받아야 한다”라고 말한다면 이 세상에 구원받을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티끌모아 태산이라고 일생동안 알게 모르게 지은 죄를 합하면 엄청날 것입니다.
이런 것이 율법입니다. 수 십억을 거래하는 고객이 은행이 업무처리차 들렀습니다. 그런데 담당자가 출근하지 않는 날이었습니다. 은행에서 내일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 고객이 말했습니다. “그러면 주차 도장 찍어 주시겠습니까?” 직원이 말했습니다. “우리 법은 거래가 없는 분에게는 도장을 찍어 드릴 수 없습니다.” “직원이 없어서 거래를 못 하였는 데요.” “그래도 할 수 없습니다. 거래가 없으니 돈내고 나가세요. 주차도장을 찍어 드릴 수 없습니다.” 조금 생각하던 그가 말했습니다. “그러면 내가 저금한 돈 수 십억원을 모두 지불하여 주십시오.” 그는 그 은행에 맡겼던 돈을 모두 찾은 후에 말했습니다. “이제 거래가 이루어졌으니 도장찍어 주십시오.” 그는 돈을 모두 찾고 주차 도장을 찍은 후에 옆 은행으로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율법입니다.
친구 목사가 40일 금식기도를 한 후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생명을 건 40일 금식기도후에 하산하고 있었습니다. 옆에 참외밭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먹고 싶은 지 참외밭으로 들어갔습니다. 주인이 없었습니다. 일단 한 개 따서 물만 빨아 먹고 주인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한참 기다려도 주인이 오지 않았습니다. 길거리라 돈 1000원을 놓고 와도 누군가가 집어 갈 것같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도 이해하지요. 고의가 아닙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피곤하여 누웠습니다. 조용한 침묵속에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네가 기껏 힘들게 40일 금식기도하고 첫 번 한 것이 도둑질이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라는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그는 생각하여 보니 제일 먼저 범죄한 것이 눈이었습니다. 두 눈을 빼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두 발로 걸었습니다. 두 발도 잘라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두 손으로 참외를 깍았습니다. 두 손도 잘라야 합니다. 이빨로 씹었습니다. 이빨도 빼야 합니다. 목구멍으로 넘어갔습니다. 위가 소화시켰습니다. 위도 없애야 합니다.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강 목사야! 나는 40일 금식기도 하고 받은 은혜보다 참외 따먹고 깨달은 은혜가 더 커.” 그렇습니다. 이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독일에 유학간 우리 유학생이 독일 지방 학생과 함께 한 방을 쓰면서 살았습니다. 고향에서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 가시려 하여 첫 비행기를 타야 했습니다. 한국 유학생이 신호를 위반하며 달려야 그 비행기를 탈 수 있었습니다. 그 친구를 위하여서였습니다. 새벽이라 차도 별로 없어서 속도 위반으로 달렸습니다. 빨간신호도 적당이 위반하고 차가 없으면 달렸습니다. 겨우 시간을 맞추었습니다. 가서 보니 도저히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그 비행기를 탈수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며칠 후 교통위반 신호 딱지가 몇 장 날라 왔습니다. 누가 새벽에 본 적도 없는 데 위반한 것이 정확하였습니다. 도저히 이해하지 못 하고 있는 데 친구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친구야. 네 덕분에 고향에 무사히 내려와 아버지 임종을 보았습니다. 두 번째 비행기를 탔으면 아버지 임종을 보지 못 하였어. 그런데 교통 위반 딱지가 몇 장 날라 갈 것이다. 내가 신고하였다. 내게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고 교통 위반 한 것은 법을 어긴 것이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나 때문에 어긴 것이니 내가 딱지 값을 지불하겠다.” 이것이 율법입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입니다. 한쪽 강도는 율법적 십자가에서 율법적으로 죽었습니다. 구원받지 못 하였습니다.
2. 복음적 십자가 다른 한 강도가 지고 죽은 십자가는 복음적 십자가였습니다. “내가 비록 못 된 강도짓을 하고 살았지만 지금 구세주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의 축복이다. 저 분에게 뻔뻔스럽지만 부탁하면 살려주실 것이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 강도는 복음적인 죽음을 죽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요나는 처음에는 율법적 기도를 하다가 고래뱃속에서 복음적 기도로 바뀌었습니다. 요나는 다시스로 도망가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제비뽑혀 바다속으로 던져졌을 때 요나는 말했습니다. “나 때문에 풍랑이 이니 나를 바다에 던지라.” 죄값을 당연하게 받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래뱃속 기도는 복음적이었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웠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崇尙)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욘 2;4-9)
그런데 처음부터 강도 두 명이 하나는 율법적 강도로, 한 명은 복음적 강도로 갈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둘 다 예수님을 향하여 욕하고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몰랐습니다. 그래서 둘 다 예수님을 욕하였습니다.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마 27;41-44)
분명히 강도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욕하였습니다. 복수입니다. 예수님 옆에 강도는 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 수록 한 강도는 복음적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나는 강도이지만 저 분은 나를 구원할 수 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定罪)를 받고서도 하나님을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39-43)
이같이 다른 한 강도의 십자가는 복음적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있었던 두 사람의 농부 이야기입니다. 한 농부가 가파른 언덕을 개발하여 논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고랑을 파고 물을 댔습니다. 힘들고 어렵고 돈이 많이 드는 작업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다른 농부는 그 바로 밑에 논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위 논으로부터 구멍을 파고 물을 대 훌륭한 논을 만들었습니다. 화가난 농부는 자기가 나가는 교회의 목사님과 의논하였습니다.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그 농부는 모르고 그러는 것이네. 용서하고 다시 물을 대시오.”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농부는 조금의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는 표정으로 태연하게 또 자기의 물을 끌어 대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목사님에게 가서 말했을 때 목사님의 조언은 동일하였습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아예 아랫 논까지 물을 대주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렇게 하였습니다. 몇 번을 논에 물을 댈 때마다 아랫 논까지 물을 대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랫 논 농부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정중하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것이 복음적 십자가입니다.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 갚는 것이아닙니다. 악을 선으로 보상하여 주는 것입니다. 죽이는 이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십자가 현장이 복음의 저수지입니다.
3. 체험적 십자가 예수님이 비아돌로로사 슬픔의 길로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쓰러지셨습니다. 옆에 가던 로마 병정이 그 옆에 있는 남자를 붙들어 십자가를 지게 하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는 그 사람은 구레네 시몬이었습니다. 그는 갑자기 생각지도 못 한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마 27;32) 시몬은 십자가를 억지로 짐으로 십자가를 체험하였습니다. 1.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죽는 복음의 현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2.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3. 안디옥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후에 시몬의 아내를 향하여 <내 어머니>라고 말할 정도로 그의 아내도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어머니니라”(롬 16;13)
억지로라도 지은 십자가가 그렇게 축복이 되는 줄은 시몬 자신도 몰랐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억지로라도 하여야 합니다. 모세는 40살이 되었을 때 자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급에서 이끌어내고 싶어졌습니다.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행 7;23) 그러나 실패하였습니다. 미디안 광야로 도망갔습니다. 어느 날 양을 치는 데 가시떨기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애급으로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여 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5번이나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를 발하시며 가라고 강력하게 명령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를 발하시고 가라사대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뇨. 그의 말 잘 함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마음에 기뻐할 것이라”(출 4;14)
모세는 하나님이 노를 발하실 정도인 것을 알고 모세는 억지로 애급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430년만의 역사를 바꾸어 놓는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할려고 하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요나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로 가서 웨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스로 도망하였습니다. 풍랑으로 고기뱃속에 들어가 억지로 니느웨로 가서 니느웨성의 멸망을 외쳤습니다. 어린아이부터 왕까지 모두가 회개하고 새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억지로 한 일이 나중에 축복이 되는 경우를 우리는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시몬은 십자가를 지고 나서 십자가를 알았습니다. 행하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자녀일 때에는 부모의 심정을 모릅니다. 그러나 결혼하고 부모가 되면서 부모의 심정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론과 실제는 그렇게 다를 수가 없습니다. 병원에 5번 다녀야 낳겠다고 의사가 말하면 5일 다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병을 빨리 고치고 싶다고 하루에 5번 다닌다고 병이 낫는 것은 아닙니다. 솔로몬이 183,500명을 데리고 7년 걸려서 성전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렇다고 10배인 180만명을 동원시키면 두 달만에 완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론은 수학적으로 맞는 데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억지로라도 진 자만이 십자가의 진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구레네 시몬은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십자가를 알았습니다. 구레네 시몬의 십자가는 체험적인 십자가였습니다. 말씀대로 산 사람은 말씀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4. 대속의 십자가 첫 아담이 지은 죄는 원죄입니다. 원죄가 온 인류속에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지 않아도 사람들은 모두가 죄인입니다. 독사는 사람을 물지 않아도 독사입니다. 독사가 이렇게 말한다고 가정하여 봅니다. “나는 내 속에 있는 독으로 결코 누구에게 피해를 준 적이 없습니다. 개구리 한 마리 물어 죽인 적이 없습니다. 나는 의롭습니다. 지금까지 죄를 짓지 않은 것을 보면 앞으로도 죄지을 가능성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모두 믿어 줄 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독사에게는 항상 독을 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독사에게는 독사의 원죄가 들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아담후에 원죄가 흐르고 있습니다. 항상 죄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런 모든 죄를 다 짊어지고 처리하는 죄처리장입니다. 율법과 복음 그리고 체험 모두를 함께 녹여서 대속물이 되어 죽으셨습니다.
지중해에 끄레떼 섬이 있습니다. 이 섬을 다스리는 왕은 정의로운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섬에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거짓말을 잘 하였습니다. 왕은 백성들의 거짓말하는 버릇을 고치려고 선포하였습니다. “앞으로 거짓말하는 사람은 말뚝에 매놓고 죽을 때까지 채찍질할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제일 먼저 거짓말하고 잡힌 사람이 왕의 외아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왕은 사랑이 많기에 아들을 죽이지 못 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아니다. 저 왕은 공의롭기에 아들일망정 죽일 것이다. 법대로 할 것이다.” 드디어 아들을 처형한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사람들은 과연 정말 죽이는 지 보려고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왕이 과연 자기 말에 책임을 지고 아들을 죽일지 죽이지 못 할지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조금 후 왕은 명령하였습니다. “아들을 기둥에 매라.”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 말이 맞았다. 아무리 아들을 사랑하여도 공의의 왕이기에 아들을 죽일 것이라고 말했지 않느냐?” 또 한 무리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틀렸다. 어째서 아들을 그렇게 사랑하는 데 죽이냐?” “채찍으로 치라.” 왕의 명령이라 채찍으로 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왕의 몸은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조금 후 왕은 죽었습니다. 아들은 살았습니다. 이 자리는 공의와 사랑을 완성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그 후 끄레떼 섬에는 거짓말이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랑과 공의를 완성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죄값은 사망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죽게 하였습니다. 우리를 감싸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람 사랑을 동시에 이루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주님은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대속의 십자가위에서 죽으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8)
어느 해군 함정이 암초에 부딪쳐서 파선되었습니다. 그 안에 타고 있던 해군군목은 다행스럽게도 널판지 한 개를 붙들고 살아났습니다. 두 명이 매달릴 수 없는 작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병이 물속으로 갈아 앉고 있었습니다. 발버둥치다가 이제는 힘을 다 잃어 버려서 기진맥진한 것입니다. 군목은 그 병사에게 물었습니다. “예수 믿나?” “아니요” “그럼 이 널판지를 자네에게 주겠네.” “군목님은 어떻게하시려고 하십니까?” “난 예수를 믿기에 지금 죽어도 천국갈 수 있네. 자 네에게 줄 테니 살아나서 예수 믿고 천국에서 만나세.” “고맙지만 그렇게 할 수 있을가요?” “자! 난 할 수 있네.” 군목은 널판지를 사병에게 주고 그는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이것이 대속입니다.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이 대신 죽은 곳 이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같이 빌라도 법정에서 골고다 언덕까지는 4명이 십자가를 지고 행진하였습니다. 다 십자가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달랐습니다. 한 강도는 율법적 십자가를 졌습니다. 다른 한 강도는 복음적 십자가를 졌습니다. 구레네 시몬은 체험적 십자가를 졌습니다. 예수님만 대속적 십자가를 지고 지셨습니다.
나는 모스코바 박물관에서 인상깊은 그림을 본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생생합니다. 조금은 선정적인 그림이기에 더 인상깊은 지 모르겠습니다. 감옥에 갇힌 한 남자가 쇠창살 틈으로 한 아름다운 여인의 젖을 빠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그림앞에서는 얼굴을 좀 붉히면서 멈추어 섰습니다. 그리고 호기심으로 쳐다 보게 됩니다. 안내자는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아버지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죄값은 굶어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아사형이었습니다. 그래서 밥을 한 끼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굶어 죽을 때가 되었는 데도 죽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간수가 몰래 키켜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딸이 매일 면회와서 아버지에게 자기 젖을 먹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서 자기 젖먹는 아이에게는한번도 젖을 먹이지 않고 우유를 먹이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상부에 보고되었습니다. 딸의 지극한 사랑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어 그 아버지를 살렸습니다. 그런 유래가 있는 그 그림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사랑입니다. - 갈보리교회 강문호 목사 보혈의 강단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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