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린교회 김남준 목사가, 한국교회와 합동 총회에 전하는 메시지에서 "신앙의 선조들이 누렸던 예배의 영광 보게 하소서, 예배를 `견디고' 있는 조국교회여, 장엄한 성경진리의 감동을 갈망해야 한다"고 호소해
- 2017.07.31 22:30 입력
본 기고문은 열린교회 김남준 목사(총신대학교 교수)가 한국교회와 합동 총회 산하 목회자들과 성도들을 향해 전해준 특별한 메시지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예배, 회심, 설교, 교리, 성화, 목양, 신학교육, 소명, 현대사회, 목사, 그리스도인의 삶 등의 주제로 12회에 걸쳐 전해준 메시지다. 기독신문을 통해서 발표한 기고문을 더 많은 독자들과 공유하기 위해 크리스천포커스가 편집 수정하여 보도한다. - 편집자 주 -
신앙의 중심부에는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있다. 루돌프 오토(R. Otto)의 표현에 따르면, 이 경외심은 “두려우면서도 동시에 기쁨으로 열광하게 하는 신비”이다.
역사적으로 개신교의 영적인 영향력은 진리의 말씀과 성령에 의해 장악된 예배가 주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에게 주는 힘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조국교회의 예배 현장은 어떠한가? 대다수의 예배가 깊은 침묵과 형식주의, 또는 오락주의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지 않는가?
종교개혁은 예배의 개혁임
로마 가톨릭은 이미 교회에 부여된 권한을 따라 사제들이 구원에 필요한 은혜를 미사 참여자들에게 베푼다고 믿었다. 그래서 누구든지 미사에 참석하기만 하면 저항할 수 없는 은혜가 그들에게 주입되고, 미사 행위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공로가 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미사의 이러한 미신적인 요소가 교회의 영적인 호흡을 질식시킨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이러한 미사는 예배 속에 반드시 깃들여야 할 두 가지 요소, 즉 진리와 성령이 결핍됐기 때문이다(요 4:24). 이런 의미에서 종교개혁은 예배의 개혁이었고, 이것은 곧 설교의 회복으로 나타났다. 종교개혁자들이 모두 `말씀의 종들'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영국의 청교도들은 자신들이 성경적이라고 믿는 방식을 따라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박해를 받았고, 성경이 말하는 예배를 재건하기 위해 신대륙으로 건너갔다. 개신교의 위대하고 놀라운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생각해 보라. 엄청난 핍박과 고난을 받으면서도 많은 성도들이 순교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예배 속에서 놀라운 힘을 공급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그 말씀과 더불어 성령이 역사하실 때 예배에는 회심의 은혜가 넘쳐난다. 그리고 이러한 예배를 드릴 때 교인들은 언약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갈 힘을 공급받게 된다.
오늘날 예배는 어떠한가?
조국교회를 가장 위협하는 것은 이단이 아니라, `세속주의'이다. 세속주의는 현상적으로는 교회의 도덕적 수준이 저하되는 것을 가리키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계셔야 할 자리에 인간을 두는 것”을 말한다. 가치의 최고 기준과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인간 중심성과 인간의 행복이 돼버렸다.
오늘날 조국교회의 예배에서 참된 회개와 믿음의 경험이 사라지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세속주의가 교회에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교단에서는 “착하게 삽시다. 주님이 도와주십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복 받습니다”라는 설교가 울려 퍼진다. 이러한 세속주의 가치관 속에서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되묻는 일은 예배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러면 우리의 예배 현실은 어떠한가?
영화관에 가면 15분 전에 도착해서 표를 사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러 나올 때는 5분 전에도 도착하지 않는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예배가 이미 시작되어 찬양이 울려 퍼질 때에야 비로소 예배당 속으로 몰려 들어온다. 세월이 흐르면서 짧아져만 가는 예배 시간은 설교 시간의 단축으로 이어졌다.
주일과 수요일, 많은 교회에서 설교 시간은 교인들의 `예배 견디기'의 극치를 보여준다. 설교 시간에 주보를 읽는 사람, 성경을 읽는 사람, 딴 생각을 하며 허공을 응시하는 사람, 고개를 숙인 채 졸고 있는 사람, 심지어는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 통화를 하는 사람까지….
그리고 축도가 끝나기 무섭게 교인들은 우르르 예배당을 빠져 나간다. 예배를 귀찮은 숙제처럼 생각하며 무미건조하게 시간을 때우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심지어 어느 교회에서는 예배당의 강대상을 치우고 토크쇼 같은 무대를 차리기도 했다.
또 연극 공연이나 영화 상영으로 설교를 대신하는 교회도 있다고 하니, 종교개혁자들이 조국교회의 예배 광경을 본다면 얼마나 통탄할까! 나는 목회자로서, 신학인으로서 말한다. 그러한 예배의 대부분의 현장에는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예배 가운데 만난 하나님으로 인한 감격과 하나님 앞에 모자라기만 한 자신에 대한 참회의 눈물을 닦으면서 예배당을 걸어 나와도 세상이 바뀔까 말까인데, 이렇게 예배를 견디다가 나온 교인들 앞에 놓여 있는 한 주간의 삶에 어떻게 영적 승리가 보장될 수 있겠는가?
나는 예배를 드리고 나온 교인 중 95%의 사람들이 방금 드린 예배에서 선포된 성경 본문이 어디인지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어느 설문조사 결과를 사실이 아니라고 믿고 싶다. 어쩌다가 조국교회의 예배가 이 지경이 되었는가?
예배의 영광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이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목표를 성취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으로 당신을 예배하는 자들을 만나주심으로써 그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이다.
본체적으로는 하나님 자신이 곧 영광이시지만, 효과적으로는 당신을 알고 경외하는 인간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니, 이 효과적인 영광은 곧 지상에서 그분의 이름이 높아지는 영광이다(시 113:3).
반면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성수주일의 개념이 무너져 가는 현실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개탄하지만 그 직접적인 원인이 예배의 감격이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사실에는 직시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이 다양한 잡족들로 이루어진 개방적 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언약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한 장소, 한 시에, 한 하나님을 함께 만나는 경험을 하였기 때문이다.
단지 주일 예배에 참석하였다고 교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지 말라. 모든 성경적 의무에는 그것을 따라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신령한 복들이 깃들여 있다. 예배를 단지 견디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진리 안에서 드림으로써 실제적으로 그러한 복을 누릴 때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그런데 예배에 임하는 우리의 마음이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만큼도 준비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경외심은 어디에 있는가?
김남준 목사/ 열린교회, 총신대학교 교수
이신덕 기자 i-cody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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