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편 묵상 - 땅의 왕들의 반역, 그리고 여호와께서 세우시는 왕-2017.pdf
묻고 답하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 (2)
유일한 위로를 어떻게 알 수 있나?
김헌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문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우리의 유일한 위로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우리의 유일한 위로는 ‘성자 하나님의 구원과 성부 하나님의 섭리와 성신 하나님의 적용’에 있다고 고백하였다. 사람에 대하여 질문하지만 사람을 소재로 삼아 삼위 하나님으로 답하는 데에서 신학적인 성숙함을 보인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사람을 아는 지식에 대한 것을 신학적인 용어가 아니라 일상 언어로 담백하게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어서 제2문에서는 그렇게 복된 위로를 누리기 위하여 우리가 ‘비참-구원-감사’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번 글에서는 이 ‘비참-구원-감사’의 구조를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은지를 살펴보고, 이어서 4문을 중심으로 ‘율법과 사랑’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한다.
‘비참-구원-감사’의 삼중적인 구조
제2문은 우리가 유일한 위로를 맛보기 위하여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를 묻고 이렇게 답한다.
답: 다음의 세 부분을 알아야 합니다.
첫째, 나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가,
둘째, 나의 모든 죄와 비참함으로부터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셋째, 그러한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주시는 유일한 위로를 알기 위하여 우리는 ‘나의 죄와 비참함’, ‘구원’, ‘감사의 삶’ 이렇게 세 가지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이러한 삼중 구조를 따라서 우선 제3-11문에서는 죄와 비참함에 대하여, 이어서 제12-85문은 구원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제86-129문은 감사함에 대하여 가르친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사도신경과 주기도문과 십계명을 요리문답의 형태로 해설하였는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도 그러한 전통을 따른다. 그렇지만 그 배열에서는 루터의 요리문답과 차이가 있다. 루터는 ‘십계명-사도신경-주기도문’의 순서로 배열하였으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율법의 핵심-사도신경-십계명-주기도문’의 순서를 따랐다. 죄와 비참함에 대한 부분에서는 ‘율법의 핵심인 사랑’을 말하고, 구원에 대한 부분에서는 사도신경을, 그리고 감사함에 대한 부분에서는 십계명과 주기도문을 다룬다. 루터와 달리 십계명을 감사의 삶에 대한 부분에 두는 데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독특성이 있다. 구원을 얻은 신자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개혁교회들의 전통에 따라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이처럼 제1문에서 ‘유일한 위로’라는 주제를 제시하고, 2문에서는 삼중적인 지식을 요리문답의 구조로 사용한다. 성경의 교훈을 ‘위로’라는 명료한 주제로 요약하고 사도신경과 십계명과 주기도문을 ‘비참-구원-감사’라는 구조에 넣어서 명확하게 제시하기 때문에 어느 한편으로 치우침이 없다. 이 점에서 우리의 요리문답은 오늘날 21세기의 신자들에게까지 큰 유익을 준다.
‘얼마나’와 ‘어떻게’
‘비참-구원-감사’라는 단어의 배열을 보면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라도 이 삼중의 구조를 ‘세 단계’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율법으로 죄와 비참함을 깨닫고 갈등하는 시기가 먼저 있고, 그 단계를 지나면 구원을 깨닫고 확신하는 데에 이르게 되며, 더 나아가면 제자로서 감사의 열매를 맺고 사는 데에 도달하게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마치 셋째 단계에 도달하면 신앙의 최고봉에 이르게 되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제2문답은 그러한 단계론적 사고에 제동을 건다. ‘얼마나’와 ‘어떻게’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세 가지가 계속하여 서로 영향을 주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자기의 죄가 얼마나 깊은지를 더 깊이 깨달을수록 그 사람은 구원의 은혜에 대하여 더 깊이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죄에 대한 회개가 어느 지점에서 멈춘다면 구원에 대한 감사도 함께 멈추게 되고, 공허한 종교와 인간적인 열심만 남게 될 것이다. 반면에 얼마나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다가 완전함에 이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면,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부족과 결핍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회개한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더 풍성히 맛보게 될 것이다.
‘비참-구원-감사’가 어떻게 서로 영향을 끼치는지는 제115문에서 생생히 볼 수 있다. 십계명을 다 가르친 후에 마지막으로 묻는 115문은 삼중적 지식의 관계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115문: 이 세상에서는 아무도
십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그렇게 엄격히
십계명을 설교하게 하십니까?
답: 첫째, 평생 동안
우리의 죄악 된 본성을 더욱더 알게 되고,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사죄와 의로움을
더욱더 간절히 추구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둘째, 이 세상의 삶을 마치고
목적지인 완전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의 형상으로 더욱더 변화되기를
끊임없이 노력하고
하나님께 성신의 은혜를 구하기 위함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는 십계명을 ‘감사의 삶’에서 가르쳤는데, 만일 ‘구원 받은 신자가 감사함으로 행하는 규범’으로만 십계명을 가르친다면 그 계명을 계속하여 잘 지키고 살라고 말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115문에서는 십계명 설교를 통하여 우리의 죄악 된 본성을 ‘더욱더’ 알게 되고 그리스도의 구원을 ‘더욱더’ 간절히 추구하게 되며 또한 우리가 이 세상의 삶을 마치고 목적지인 완전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의 형상으로 ‘더욱더’ 변화되기를 노력하고 성신의 은혜를 구하게 된다고 말한다. ‘감사함’으로 행하는 십계명은 다시 ‘죄와 비참함’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원’과 연결된다. ‘비참-구원-감사’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여기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제115문에서 ‘더욱 더’라는 말로 세 번 답한 것은 제2문에서 ‘얼마나’와 ‘어떻게’로 질문한 것과 호응을 이룬다.
율법과 사랑, 그리고 비참함
제3문에서는 우리가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하나님의 율법에서 안다고 가르치고, 제4문에서는 그 율법의 핵심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고 가르친다.
4문: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그리스도는 마태복음 22장에서
이렇게 요약하여 가르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제4문은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고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2장에서 하신 말씀을 인용하여 대답한다. 예수님의 이 대답은 공생애 마지막 주간에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한 것에 대한 답으로 하신 말씀이다. 시험을 받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핵심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 있다고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그 주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바로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여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며, 이웃을 사랑하여서 그들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를 지셨다. 율법의 강령을 말씀으로 전하셨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서 친히 이루셨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의 강령을 친히 온전히 이루신 사실 앞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도 사랑하지 않는 자기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제5문의 표현대로 “나에게는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미워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하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엄격히 책망만 해서는 바른 회개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요리문답은 율법을 가르칠 때에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야기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자기의 죄와 비참함을 진정으로 고백하게 하는 것이다.
삼중적 구조 - 이원론적이고 단계론적 사고와 다른 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기독교 신앙의 주제로 ‘비참-구원-감사’를 제시하고 또한 ‘얼마나’ ‘어떻게’ 하고 질문함으로써 세 부분에서 함께 고루 자라게 하였다. 이것은 ‘비참-구원’ 혹은 ‘구원-감사’만을 부분적으로 강조하던 16세기의 상황에서 혁신적인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연옥과 면벌부(免罰符)로 위협하면서 ‘비참-구원’을 강조하기도 하고 다른 편으로는 선행을 강조하면서 ‘구원-감사’를 말하기도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하지 않고 부분적으로 전하여 구원의 확신이 사라진 그러한 시대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참된 위로를 제시하였다. 참된 위로를 누리기 위하여서는 ‘비참-구원-감사’를 유기적으로 이해하도록 요리문답을 구성하였다. 율법으로 사람의 양심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핵심인 사랑을 제시하여서 자기의 죄를 깨닫고 사랑의 주님께 나아가 회개하도록 인도하고, 또한 감사의 마음으로 십계명을 지키도록 가르치면서도 동시에 아직 완전에 이르지 않은 현실 속에서 겸손히 자기의 부족함을 고백하면서 나아오도록 가르쳤다.
유일한 위로를 ‘비참-구원-감사’의 삼중적 구조로 제시하고 그 안에서 세 요소가 서로 영향을 주어서 신자로 하여금 장성케 하는 이 요리문답은 21세기의 우리에게도 빛을 던져준다. 특히 한국 기독교에서는 여전히 ‘구약은 율법의 시대이고 신약은 은혜의 시대’라고 양분하여, 율법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고 이제는 은혜의 시대라는 식으로 가르치는 일들이 적지 않다. 율법과 은혜를 자꾸만 대립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이원론적 세계관에는 ‘비참-구원’만 있고 ‘감사의 삶’이 없기 때문에 신자들로 하여금 ‘종교적인’ 일에 치중하도록 만든다. 구약과 신약, 혹은 율법과 은혜를 양분하는 이러한 태도는 신자 개인의 삶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쳐 왔다. 구약과 신약의 시대적인 구분을 개인의 삶에 적용하여서, 개인적으로도 율법으로 죄를 철저히 깨닫는 단계가 있고 그 후에 은혜를 맛보는 단계가 있다는 식의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틀렸다고는 할 수 없으나 매우 부족하고 또한 신자를 오도할 가능성이 있는 주장이다. 사람의 삶이 그렇게 도식적이거나 단계론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이원론적인 태도에 대한 반발로 ‘구원-감사’를 강조하는 일도 있다. 신자는 은혜로 구원을 얻었으므로 이제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무장하고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온전히 감당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 자체는 정당하다. 그러나 조심하지 않으면 ‘죄와 비참함’을 간과하게 되고, 이 부분이 약화되기 때문에 감사의 삶, 혹은 헌신이라는 것도 피상적이 되기 쉽다. 어느 경우는 그릇된 종교적 열정을 부추기기 쉽고 잘못된 종교 영웅을 만들어 내기 쉽다. 특히 교회가 타락하고 설교가 약해지면 단계론적인 가르침과 위계질서적인 교회 조직이 뿌리를 내리고, 또한 기계적으로 단계론을 적용하는 데서 파생되는 심리적인 공허감을 메우기 위하여 심리 조작술이 기승을 부리게 된다. 이 점에서 유일한 위로를 ‘삼중적 지식’으로 온전히 가르치는 우리의 요리문답은 여전히 큰 울림이 있고 신자의 삶을 좌로나 우로 치우치는 일이 없도록 인도한다.
우리의 요리문답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율법의 정신으로 우리의 죄와 비참함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의 비참함이란 마치 고향에서 쫓겨난 상황과 같다. 실제로 에덴의 낙원에서 쫓겨난 우리는 큰 비참함 가운데 떨어졌다. 우리를 그러한 비참한 데에서 구원해 주시려고,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참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주님은 이렇게 새 계명을 주시고, 그 계명으로써 우리를 새로운 나라로 인도하신다. 우리의 요리문답은 이러한 삼중적 지식을 아는 것이 살아서나 죽어서나 유일한 위로를 누리는 길로 제시한다.
사진 소개
33쪽 사진: 성신교회와 하이델베르크 고성(古城)에 아침 햇살이 비추는 모습
34쪽 사진: 1563년에 출판된 라틴어 번역본의 2문과 3문. 왼쪽 여백에 증거 성경 구절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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