썬다 싱은 어떤 분인가?
위대한 어머니
썬다 싱은 1889년 9월 3일, 인도의 북부 펀잡주 람풀이라는 작은 동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 지방의 아주 부유한 지주로서 가정생활은 매우 단란하고 평화로 왔다. 썬다 싱은 여러 아들 중 막내 아들로 부모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고, 특히 어머니의 사랑과 종교적인 감화를 크게 받아 후일에 위대한 성자가 되는데 아주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종교적인 인물로서 아주 고상하고 순결하고 사랑받을 만한 행실이 많은 사람이었다.
또 종교적인 인물과 교제하기를 좋아해서 그 집에는 항상 덕망이 높은 스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여름철이 되면 여기저기 명산 큰 절을 순례하기도 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자라난 썬다 싱은 자연히 종교적인 성향이 많이 발달될 수밖에 없었다. 후일 썬다 싱은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저에게 믿음을 갖게 하신 것은 예수님이시고, 저를 사두(종교가) 되게 하신 것은 어머니입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신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어머니 품속이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그의 사랑과 존경은 이토록 깊은 것이었다.
절망과 방황
썬다가 열네 살 되던 해, 그의 인생에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그토록 사랑하고 존경하던 어머니와 손위 형이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이 일은 어린 썬다의 마음에 너무나도 큰 충격과 슬픔을 던져주었고, 삶에 대한 회의와 절망을 느끼게 했다. 고독과 불안으로 병들어버린 그의 마음은 이제 신에 대한 믿음 없이는 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는 날마다 비탄에 젖어 기도했다. “신이시여! 당신없이 나는 한 순간도 살지를 못하나이다. 내가 당신을 연모하고 갈급하오니, 오직 당신 안에서만 내 영이 쉴 수가 있나이다. 질식할 것 같은 이 불안을 거두어 주시고, 내게 평안을 주옵소서.” 그는 여러 종교를 기웃거리며 갖가지 방법으로 평안을 갈구하였지만 마음의 괴로움과 방황은 깊어만 갔다.
한편, 썬다는 교육을 받아야 했으므로 동네에 있는 장로교 소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런데 그 학교가 기독교 학교니 만큼 자연히 썬다의 힌두교적 수행 태도는 교사와 학생들의 주목을 받게 되고, 놀림의 대상이 되었다. 교사들은 썬다에게 기독교 교육을 더욱 강요하였다. 그는 점점 교사들과 학교를 미워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성경과 예수님에 대해서도 증오하기 시작했다. 그의 성격이 갑자기 돌변하여 갔다. 성경과목을 싫어하여 교사가 성경을 읽으라고 해도 책잃기를 거절하며 말썽을 일으켰고, 어떤 때는 그 시간에 불참하기도 했으며, 또 어떤 때는 고의적으로 당혹한 질문들을 하여 교사를 괴롭히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학생이 되어갔다. 그의 행실이 날이 갈수록 나빠지는 것을 보다 못한 아버지는 결국 썬다의 원대로 3마일이나 멀리 떨어진 공립 소학교로 그를 전학시켰다. 그랬더니 그는 이제 아예 발벗고 나서서 기독교를 박해하는 자가 되었다.
그는 제 또래의 악동들을 모아 장터에서 전도하고 있는 전도자들에게 돌을 던지게 하고, 전도집회 장소마다 쫓아다니면서 오물과 쓰레기를 집어 던져 집회 분위기를 풍지박산 내었다. 아무도 이 소년이 어머니 손을 잡고 매주 착실하게 사원을 다니던 그 썬다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은 교장 선생님께 찾아가 성경을 한 권 사고 싶다고 제의를 해서 얼마 후 성경을 얻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가져다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갈가리 찢어 케로신 기름으로 흔적도 없이 불태워 버렸다. 그의 기독교에 대한 반항심은 날이 갈수록 높아만 갔다. 그런 반면 그는 자기 종교로 마음에 만족을 얻으려고 요가의 달인(達人)을 찾아가서 묻기도 하고, 명상도 해보는 등 갖은 애를 써 보았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때인가는 번민하다 못해서 자기가 찢은 성경 가운데 혹시 무슨 도움받을 만한 게 없을까 하고 펴보니 “무릇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는 말씀을 보게 되었다. 그는 기뻐하며 ‘아! 이것이 바로 내가 찾는 참 평안이 아닌가’하고 한순간 몹시 감격했다. 또 한 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보고 두 번째 감동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썬다는 예수님을 믿겠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자살 결심
참된 진리를 찾지 못한 썬다 싱의 마음은 더욱 분열과 충돌과 번민으로 들끓었다. 그는 갑자기 모든 것을 단념해 버리고 자살을 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구하는 평화를 얻지 못하면 차라리 자살을 해서 저 세상에 가서 구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생사의 기로에 서서 단호하고 비장한 마음으로 신에게 매달리며 절박하게 간구했다. “이 천지간에 신이 있거든 소원을 이루어 주소서. 저에게 바른 길, 참 도를 가르쳐 주소서. 만약 당신께서 나타나 저를 붙들어 주지 않으시면 저는 아침 첫 특급 열차가 지날 때 레일 위에 저의 목을 깔고 자살할 것입니다. 그러하오니 신이시여, 참으로 당신이 계신다면 제게 나타나셔서 이 암흑의 공포를 거두어 주시고, 저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그리스도의 현현
1904년 12월 18일, 자정 무렵이 되자 그는 밖으로 나와 찬물로 온 몸을 깨끗이 씻었다. 그리고는 단정히 앉아 생의 마지막 기도를 드렸다. 달도 어느덧 서편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죽음의 순간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얼마 후면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썬다는 등에 땀을 흘리면서 최후의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새벽 4시 30분쯤 갑자기 방안 가득히 강렬한 빛이 비취었다. 썬다는 불이 났는가 하다가 곧 신이 응답을 보내 주신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계속 기도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그 찬란한 광채 속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영광과 사랑이 넘치는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 며칠 전까지만 해도 모욕을 가했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가! 그는 거의 정신을 잃을 뻔했다. 그 때 그 빛 속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썬다야, 너는 왜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너와 전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나의 생명을 버렸단다.”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쓰러지듯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렸다. 그리고 이 때까지 얻지 못했던 놀랄 만한 평안을 얻었다. 참으로 오랫동안 갈망했던 행복을 얻게 된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이심을 깨달았다. 썬다가 일어났을 때 예수님의 거룩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썬다 싱의 마음에는 평안과 기쁨이 가득찼고, 그 후로 언제까지나 남아있게 되었다.
썬다는 잠을 자고 계시던 아버지께 달려갔다. 놀라는 아버지께 예수님을 뵈었다고 하니 아버지는 그가 잠꼬대 하는 줄 알고 “가서 자라. 엊그제 성경을 불태우지 않았니? 그리고 벌써 기독신자가 되었다고 그러느냐?”고 하였다. 그러자 썬다는 똑바로 서서 두 손을 내려다 보며, “이 손이 악을 저질렀습니다. 이제 죽기까지 그 죄를 씻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아버지께 결연한 각오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부터 저는 생명이 다할 때까지 온전히 예수님의 것입니다.”
박 해
1904년 12월 18일 새벽의 그리스도 발현 사건은 썬다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그는 자신의 전 생애를 그리스도께 바치기로 한 것이다. 썬다는 그날로부터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님을 증거하기 시작했고, 곧 그의 기이한 개종소식은 람푸르 일대에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시크족의 전통을 목숨처럼 중요하게 여기는 아버지는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는 썬다의 이러한 행동을 가만히 두고만 볼 수 없었다. 그렇게도 다정스럽던 아버지와 가족들이 매질을 하고 침을 뱉으며 돌아섰다. 그러나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10:37-38)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모든 슬픔을 이겨 나갔다.
썬다에게는 아버지 못지않게 조카를 대단히 사랑하던 숙부님이 계셨다. 한 번은 조카의 마음을 고쳐볼까 하고 썬다를 데리고 지하실로 들어가더니 많은 돈과 값진 금은 보석이 가득 들어있는 금고를 열어 보였다. 그리고는 자기 머리의 두건을 벗어 그의 발 아래 놓고 아주 겸손한 말로 “네가 만약 그 외국 종교를 버리고 우리와 같이 있게 된다면 이 모든 것이 다 네 것이 될 것이다”하고 설득하는 것이었다. 썬다는 이때 숙부님의 이토록 겸손한 청을 거절하기가 너무나도 어려워 괴로움과 슬픔의 눈물을 한없이 흘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또다시 썬다의 눈에는 영광과 자비가 가득찬 예수님의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숙부님께 담대히 말했다. “숙부님, 죄송합니다. 비록 이 세상의 모든 부귀를 다 준다 할지라도 내 마음 속에 가진 이 평안과 바꿀 수 없습니다. 내 몸이 불사름을 당할지라도 나의 사랑하는 주님을 배반할 수 없습니다.”
썬다 일가는 학교측과 람푸르 선교측에 항의를 해서 교장을 다른 학교로 전임시켰고, 선교회측의 뉴톤 목사를 법정에까지 서게 하였으며 미션 학교는 문을 닫고 몇 안되는 교인들은 박해를 견디다 못해 로푸르라는 곳으로 집단이주를 해야만 했다.
견디다 못한 썬다는 학교가 문을 닫을 때 그도 고향을 떠나 루디아나시에 있는 장로교 계통의 고등학교로 갔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그곳 학생들은 이름만 신자였지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보고 적이 실망하고 얼마 후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썬다는 계속해서 설복하고 박해하는 가족 친척들에게 자신의 각오를 보이기 위해 시크족의 경전도 버리고, 태어나면서부터 한 번도 잘라보지 않았던 두발도 밀어버렸다.
모든 사람들 특히 그 형들은 몹시 격분하여 입으로 말할 수 없는 욕설과 학대를 했다. 밥도 같은 상에서 먹지 못하게 하면서 음식물을 개처럼 던져주었고, 가축과 같이 생활하게 했다. 그러나 썬다는 그렇게 마음 아픈 일을 많이 당하고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려는 결심은 변치 않았다.
집에서 쫓겨남
아무리 박해를 해도 변치 않는 썬다 싱의 마음을 알게 된 아버지는 마침내 최후 선언을 하였다. “가문의 이름으로 말하거니와, 우리는 너를 영원히 버리고자 한다. 이제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니 다시는 돌아오지 말아라. 지금 입은 그대로 가거라.” 그렇게도 사랑하던 막내 아들을 아버지는 이처럼 단호하게 버렸다. 십자가를 각오했지만 썬다 싱의 가슴은 터질 둣 아팠다.
집에서 쫓겨난 그 날 밤은 몹시 추웠다. 그가 가진 것이라곤 신약 성경 한 권 밖에 없었는데, 썬다는 그것을 꼭 쥐고 로푸르쪽을 향하여 하염없이 걷다가 숲 속의 큰 나무 밑에서 밤을 새웠다. 날이 밝자 그는 자신 때문에 쫓겨난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는 로프르를 향하여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몇발자국 못가서 갑자기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에 배를 움켜 쥐고 기진맥진하여 겨우 로푸르에 닿았고, 우팔 목사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기다시피 하여 문지방을 넘었다. 목사에게 안기자 그는 피를 토하기 시작했고, 의사가 올 때까지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를 진찰한 의사는 그가 독약이 든 음식을 먹었다는 것과 너무 늦어 살릴 가망이 없다고 말했다.
집을 떠날 때 점심밥이라고 준 그 밥덩어리 속에 독약을 넣었던 것이다. 가족들은 썬다가 살아남아서 부끄러움을 나타내면서 기독 신자로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여 없애버리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썬다에게는 강한 확신이 떠올랐다. ‘주님께서 나를 무의미하게 죽게 하려고 암흑 중에서 구원하여 한없는 그 축복을 주실 리는 없다. 나는 더 살며 주님의 증인이 될 사명이 있다.’ 이렇게 생각한 썬다는 심한 고통 속에서도 있는 힘을 다해서 주님께 기도하였다. 다음 날 궁금해서 와 본 의사는 그늘에서 성경을 읽고 있는 썬다를 보자 벼락을 맞은 듯이 놀랐다. 이 일로 충격을 받은 의사는 후에 기독교 신자가 되어 버마에서 주님을 위한 전도 활동을 열심히 하였다. 1905년, 건강이 회복되자 썬다는 루디아나의 또다른 장로교계 학교에 보내졌다.
썬다 가족들의 무례한 침입 때문에 교장은 썬다를 수바투의 나환자 수용소로 보내어, 성공회의 레드만 신부님께 세례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9월 3일, 16세의 그는 성 토마스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그곳에서 병원일을 거들어주면서 시간이 나면 우거진 숲 속에 고요히 앉아 묵상을 했다. 자신과 온 세상을 잊어버리고 마음과 뜻을 다 바쳐 눈물을 흘려가면서 성경을 읽었다. 핍박을 모르고 살아가는 자유 세계의 사람들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모습이었다.
홍포를 입은 썬다
그는 어머니의 평생 소원대로 세례를 받은지 33일 만에 전생애를 주님께 바치는 사두로서 세상에 나서기로 작정했다. 사두(인도 종교가)가 입는 사푸론 로브를 입고 인도 말로 쓴 성경책 한 권을 손에 들고 길을 나섰다. 그 외 그의 소유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다만 살아계신 주님 한 분만이 그의 전 재산이고 소유이고 생명이고 힘이었다.
사두의 도복을 입은 16세의 어린 소년 썬다는 마음 속에 불붙는 사랑의 열정을 가지고 인도 사람들의 영혼을 건지기 위해 사나운 물을 건너 전도의 길에 나선 것이다. 인도 사람들은 인도 종교가의 의복을 입은 썬다를 보고 처음에는 무조건 존경을 하였지만 일단 기독교인인 것을 알면 박해를 하였다.
그는 반석과 같은 믿음과 불같은 정열을 가지고 먼저 자기 고향으로 갔다. 몇 달 전에 죽음을 겨우 면하고 쫓겨난 그 곳에 가서 집집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이 받은 그 평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은 구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를 했다. 그리고 후로 가사울리, 솔론, 딕사이 그리고 심라에서 야외 전도를 했다. 그리고는 대륙을 횡단하는 장도에 올라 북쪽의 펀잡주로부터 연합주를 거쳐 봄베이, 마드리스, 켈커타까지 전국 순회전도를 하였다. 많은 고난과 핍박이 썬다의 길을 가로 막았다. 동상을 당하며 주리고 목마르고 굶고 사람이 없는 산림 가운데 쫓겨나며, 짐승들의 굴에 들어가며, 벗은 발로 이곳 저곳 다니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받는 고난과 핍박은 땅 위의 그 어떤 행복보다도 귀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늘 감사한 마음으로 감당했다.
첫 번째 입신
1906년 17세 되던 해, 썬다는 코드갈이라는 곳에서 스토크스씨를 만나 함께 북인도를 돌며 수바투와 라호르에서 나환자를 돌봐주는 일을 했다. 스토크스씨는 프랜시스의 청빈정신을 몸소 실천해 보고자 고국의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먼 타국에까지 와서 탁발봉사생활을 하고 있던 전도인이었다. 썬다는 그와 2년 동안 함께 동행하면서 프랜시스 성자의 정신에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더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즉 어느 것에도 얽매임이 없이 자유롭게 온 세상을 다니며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주신 평화와 기쁨에 대해 전하는 전도자로서의 사명을 더욱 확고히 하게 된 것이다.
1911-12년동안 썬다는 북인도로 전도여행을 다녔는데, 그때 수많은 기적을 체험하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게 되었다. 특히 1912년에는 코드갈이라는 곳에서 처음으로 입신을 체험하게 되었다. 하루는 기도하는 중 문득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 천사들의 무리 가운데 있는 경험을 했다. 때때로 그는 이러한 입신 상태에서 몇 시간씩 있기도 했다.
그는 이 경험에 대해 말하기를 “나는 결코 입신상태에 들어가려고 애쓰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이것을 장려하지도 않는다. 입신은 주께서 주신 선물이다. 인간이 받을 것이지 구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받은 사람에게는 값높은 진주이다. 나는 사두로 있는 14년간의 생활 동안 많은 고통과 핍박을 받았으며 혹 이 생활을 버릴만한 유혹도 당하였지만, 이 입신 경험을 생각할 때는 결코 전 세계를 준다해도 이 생활을 버릴 수 없었다”고 하였다. 이처럼 썬다는 입신 체험을 통하여 영계에 대한 신비로운 경험과 지식을 많이 쌓았으며, 하나님으로부터 큰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위로는 그의 사명감을 더욱 불타오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마하리시와의 만남
1912년 이른 봄, 두 번째 티벧 전도길에 오른 썬다는 히말라야 산맥 중 카일라스산 동굴 속에서 아주 신비로운 노성자를 만나게 된다. 그는 골짜기를 내려오다가 그만 미끄러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정신을 차리고보니 자신이 어느 동굴 안에 있었으며, 그의 앞에 한 노인이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소스라치게 놀란 썬다를 그 노인은 깊고 조용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주님께 기도를 드리십시다.” 기도를 마쳤을 때 비로소 썬다는 그가 그리스도인 마하리시(大聖師)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낡은 양피지로 된 희랍어 성경을 펴서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을 읽어주었다. 썬다는 그토록 깊은 산속에 기독교 성사가 있다는 것에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며 그의 지난날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신상에 대해 말했을 때 썬다는 믿기가 어려웠다. “나는 애굽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나서 엄격한 이슬람교도 부모 밑에서 자랐소. 그러나 서른이 되도록 모하메드의 종교에서 안식을 얻지 못하였는데, 그때 성 프랜시스 사비에르의 조카 중의 한 사람인 쟈르노스가 알렉산드리아에 들렸다가 나에게 세례를 주시었소. … 그 이후 75세가 될 때까지 나는 세상의 이곳 저곳에서 전도를 하였소. 그리고 이 카일라스산에 거주해온 지는 209년이 되었소.” 썬다는 하루동안 그 노성사와 함께 머무르면서 큰 기쁨과 평화를 느꼈다. 1912년에 이어 1916년과 1917년에도 썬다는 마하리시를 만나 영적으로 큰 유익을 얻었다.
썬다는 마하리시를 만난 감회를 ‘누르아프산’이라는 신문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여러번 히말라야를 넘나들었지만 이런 마하리시를 만난 일이 없다. … 그의 신앙 인품을 어찌 필설로 다 적을 수 있으랴!” 썬다는 그의 인격 안에 넘쳐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보았다. 그래서 그토록 험란한 전도의 여정 중에 참으로 큰 기쁨과 평화를 맛볼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또한번 썬다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맛보게 해 주심으로, 험준한 히말라야산맥을 넘나드는 그의 발을 튼튼하게 하셨던 것이다.
40일 금식
썬다는 세례를 받은 후 두가지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성지 팔레스틴을 찾아가서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를 깊이 추억하고 싶은 것이고, 둘째 소원은 주님을 본받아 40일 40야를 금식기도하는 것이었다. 첫째 소원은 여러 가지 일로 중지되고, 둘째 소원은 1913년에 실행하게 되었다. 이 기간 중 썬다는 다시 예수님을 보는 귀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처음 회심할 때 본 모습과는 달리 못박힌 손과 피흐르는 발과 빛나는 얼굴을 하고 계셨다. 또한 육체의 힘이 거의 없어졌을 때 사자와 맹수의 울음소리도 들었는데,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소리였다. 40일이 못되어 그는 쓰러져 있었는데, 대나무를 베러 온 나무꾼이 그를 발견하고 안필드로 보내 생명을 구했다. 이 금식 중의 체험은 그의 생애에 한 시기를 긋는 중대한 경험이다. 이 금식 중의 체험이 그를 어떻게 변화시켰는가에 대해 그 자신은 이렇게 고백한다.
“금식 전에는 나에게 유혹이 있었다. 그것은 내가 피곤한 때 누가 와서 질문을 한다든지 이야기를 하려하면 나는 늘 괴롭게 생각되었다. 또 먹지 못하고 피곤할 때면 ‘하나님께서는 왜 나를 돌보시지 않는가’, ‘돈이 있으면 필요한 것을 살텐데 왜 돈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는가?’ 하는 불평이 마음에 틈타기도 했다. 그러나 금식 이후로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경륜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 어떤 때는 ‘집에 가서 결혼하고 행복된 생활을 하며 좋은 신자가 되어 하나님과 교제해도 무방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일어났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금전을 가지고 행복된 생활을 하는 것이 죄가 아니나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것은 특별한 사명이 때문이요, 신이 나에게 주신 입신체험은 세상의 어떤 가정의 행복보다도 나은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나의 참 결혼은 그리스도와 맺었다. 다른 사람에게 있어 결혼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나 이미 그리스도와 결혼한 내가 달리 어찌 결혼할 수 있겠는가!”
티베트에 빛을...
썬다 싱은 스물네 살이 되던 1913년 봄, 티베트으로 또다시 전도여행을 떠났다. 라자르시라는 곳에서 전도를 하고 있었는데 매우 큰 핍박을 받게 되었다. 처음 전도하기 시작할 즈음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그의 설교를 들었는데, 이 소식이 수(首)라마에게 전해지자 썬다는 즉각 체포되어 끌려갔다. 그리고 수라마의 명에 의해 깊게 파진 마른 우물 구덩이에 처넣어지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는 옷을 벗기운채 우물 안으로 처넣어졌다. 오른팔이 부러지면서 떨어진 우물 안에는 이미 먼저 떨어져 죽은 사람들의 시체들과 더러운 뼈다귀들이 뒹굴고 있었고, 돌틈으로는 징그러운 뱀들이 기어다니고 있었다. 밤과 낮이 없는 그 처참한 암흑의 구덩이에서 음식도 물도 공기도 없이 사흘 밤낮을 잠 한숨 자보지도 못한 썬다는 죽음이 가까와 옴을 느꼈다.
썬다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간절히 기도했다. 정말 죽음을 넘나드는 간절한 기도를…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점점 그의 마음 속에는 큰 기쁨이 흘러들어 왔고, 그토록 소름끼치는 무서운 곳에 있다는 것을 잊을 정도의 큰 평화가 마음 속에 가득차게 되었다. 썬다는 이 때처럼 예수님께서 주신 평화와 희열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예수님의 평화는 그 지옥같은 우물을 천국의 문으로 변화시켰다. 죽은 사람들의 뼈와 시체속에서,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썬다는 더욱 분명하게 예수님께서 살아계신 것을 체험했다. 기쁨에 들떠 있을 때, 우물 뚜껑이 열리더니 “로프를 잡으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로프를 잡고 위로 올라갔다. 밖으로 나온 썬다는 주변을 돌아보았으나 구조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주님께서 기적을 베푸신 것이다. 날이 밝자 썬다는 몸을 씻고 다시 전에 전도하던 시장거리로 나갔다. 그는 또다시 체포되어 추방되었다.
라자르에서 추방된 후에도 썬다는 죽을 각오로 티베트 곳곳에서 전도를 계속했다. 썬다에게 있어 티베트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결심은 이제 하나의 신념이 되었다.
“살아생전에 이 십자가를 지지 못하면 나는 영원히 이 십자가를 지지 못하고 말리라. 아무리 그 십자가가 무겁더라도 나는 주님 발치에서 묵묵히 그를 따라 골고다로 올라가야 한다. 히말라야의 일각, 이 작은 티베트에만은 주님의 빛을 비춰주어야한다.”
거머리 형벌
1914년 6월 7일, 썬다는 히말라야의 동쪽 산령에 있는 네팔의 일람으로 향하고 있었다. 다음 날인 6월 8일, 썬다는 일람부락에 닿아 사람들에게 네팔어 성경을 읽어주고 있었다. 관리들이 와서 몇 번 하지말라고 경고를 했는데 썬다는 계속해서 전도를 하다가 결국 체포되어 칙칙한 지하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들은 썬다의 옷을 전부 벗기고 착고를 채워 꼼짝을 못하게 한 후 그의 앞에다 많은 거머리 떼와 뻘오물을 두고 욕을 하며 나갔다.
얼마 후 거머리 떼는 썬다의 전신으로 기어오르며 피를 빨기 시작했다. 썬다는 두서너 시간 동안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견디다가 온 힘을 다해 찬송과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순간 고통이 멎고 감옥은 천성같이 변하였다. 큰 기쁨 속에서 썬다는 더욱 힘차게 찬송을 불렀다. 그랬더니 이 예상치 못한 광경을 보려고 사람들이 몰려왔다. 썬다는 착고에 채인 채로 그들에게 또다시 전도를 하였다. 관리들은 그토록 큰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쁨이 충만하여 찬송하며 전도를 하는 썬다를 보고는 놀라움과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며 다음 날 그를 석방시켜 주었다.
썬다는 풀려나서 자신이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렸다. 그리고 휘청거리는 몸으로 100리밖에 떨어져 있는 다르질링까지 하루를 꼬박 걸어갔다. 다르질링에 살고 있던 탈진은 썬다를 만나자 그의 피부가 옥도정기 같이 붉게 변해있고, 전신은 온통 뜯겨 부어올라 있는 것을 보고 매우 놀라고 궁금해 했으나, 썬다는 그 박해사건에 대해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주님의 겸손을 본받고 싶어서였다.
주여! 저를 붙들어 주소서.
1916년 11월부터 1917년 1월까지 3개월 동안 썬다는 북인도의 소읍들을 찾아다니며 전도했고, 1918년에는 멀리 에베레스트산의 봉우리가 보이는 지역에서부터 캄바종지역, 팅그리지역, 귀이롱, 니아람딩게, 강쯔 일대까지 두달 동안 전도를 했다. 그는 그곳에서 많은 핍박을 받았고, 가는 곳마다 내쫓김을 당했다. 그 때마다 그는 “긍휼이 많으신 주시여, 이 보잘 것 없는 것을 붙들어 주옵소서. 제가 어둠을 이기지 못하여 믿음을 잃을까 두렵사옵나이다”하고 간절히 기도하며 다음 마을을 찾아가곤 했다. 신기하게도 기도만 드리면 주님께서는 그의 상한 마음을 위로하여 주셨고, 무너져 앉은 신심을 되살아나게 하셨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그의 겸비를 배우겠다고만 하면 주님은 언제나 산성처럼 확고하게 썬다의 영혼 깊이 거하여서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인도하여 주셨다.
남서부 인도로
1918년, 29세가 되던 해부터 썬다는 전 인도의 기독교계에 명성이 높아져 여러 곳에서 초청을 받게 되었다. 집회시마다 청중들은 그의 인격의 진실함과 겸비, 또 회개의 능력을 갖춘 설교로 인하여 눈물의 바다를 이루었다. 어느 때는 수백명, 어느 때는 수천명의 청중이 운집하여 그의 말을 들었다. 가는 곳마다 교회가 부흥되었고 많은 결신자들을 내었다.
그러나 썬다는 꽉 짜인 전도일정 가운데서도 기도생활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복음전파란 기도가 피어내는 영성의 꽃 이외 다른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자신을 ‘사두’가 아닌 ‘작은 형제’라고 소개하곤 했는데 그의 뇌리에는 늘 이러한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나면서부터 요람이 없어서 마굿간의 구유통에 뉘여지셨고, 돌아가셔서도 묻힐 곳이 없어서 남의 무덤자리에 묻히셨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낮아짐을 배우는 일이요, 그의 고난에 참여하는 일이다. 천대받는 말석의 군중 속에 계신 예수님. 그 낮은 사회적 희생자들과 함께, 그 낮은 민중들과 함께 혁명을 해나가는 정신적인 왕국. 이 불굴의 해방정신, 영원히 사는 것이 기독교인의 정신이 아닌가!’
남서부 인도를 돌면서 인도문명이 낸 상처, 그 빈민굴들과 하리잔 제도를, 크리스천들부터 돌보아 주고 타파하라고 외치며 썬다는 그의 전도지를 동으로 향하였다.
티벧의 순교자 카타르 싱
썬다는 그의 선교지 티벧을 찾아갈 때마다 매번 살아오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은채 떠나곤 했다. 이교 포교죄로 자기 한몸 찢겨 죽을지언정 그 피가 티벧 교회의 주춧돌을 놓는데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어떠한 순교도 기꺼이 받고 싶은 심정이었다. 1912년 봄, 썬다는 또다시 티벧에 들어가 전도를 하였는데 사람들은 그를 심하게 박해하고 출국명령을 내렸다. 그들은 경고하기를 “만약 당신이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카타르 싱과 똑같은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오. 그가 불응하기에 우리들은 그를 죽였소”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썬다는 그 미지의 순교자가 누구인지 궁금했는데 후에 알게 되었다. 그는 파티알라시에 사는 부호 하르남 싱의 아들 카타르 싱이었다.
아버지 하르남은 개종한 아들에게 분개하여 추운 겨울밤에 그를 속옷바람으로 내쫓았다. 그는 굶주림과 추위에 떨면서 숲속에서 지내다가 아는 사람을 찾아가 품팔이를 하여 번 돈으로 터번과 옷을 샀다. 사두복장을 한 그는 세례를 받고 티벧어를 배운 후 티벧에 들어가 전도를 시작했다. 전도를 하던 중 그는 심한 핍박을 받게 되었는데, 출국명령을 내려도 아랑곳하지 않는 그를 주민들은 천으로 꽁꽁 묶어서 교외에다 갖다 버렸다.
그런데 이틀 후 카타르 싱은 또다시 사람들의 눈 앞에 나타났다. 화가 난 라마승은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때 카타르 싱은 말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피를 흘리고 죽을지라도 당신들을 진리 안으로 이끌 것입니다. 십자가 주의 사랑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하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은 카타르 싱을 소가죽으로 꽁꽁 싸서는 뙤약볕에 몇날이고 내버려두었다. 소가죽이 마르면서 수축하여 카타르 싱을 압사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카타르 싱은 사흘이 지나도록 죽기는 커녕 계속 그들을 위해 기도와 찬송을 드리고 있었다. 나흘째가 되자 그는 성경을 갖다 달라고 하여 마지막으로 이렇게 적었다. “주님이시여, 주님께서 주신 몸이오매 주님의 것이나이다. 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어느날 썬다는 파티알라역 앞에서 이 이야기를 하면서 전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청중 속에 서있던 점잖은 어른 한분이 갑자기 비통하게 울음을 터트리는 것이었다. 그는 바로 카타르 싱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그는 몇 년동안이나 아들의 생사를 모르고 있다가 아들의 장렬한 순교를 듣자 눈물이 흘리면서 썬다의 옷자락과 성경을 꼭 잡고는 말했다. “내 아들이 그렇게 독실한 그리스도인인줄을 몰랐소. 내가 잘못했소.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는데 … 나도 예수님을 믿겠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 많은 열매를 맺은 것이다”(요12:24).
살려고 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썬다는 만 서른살이 되는 1919년 7월 초에 또다시 열번째로 티벧에 들어갔다. 이 여행에서 썬다는 하루 평균 사십리 정도를 걸으면서 구월말까지 마흔 여덟곳을 전도했다. 그해 티벧에는 큰 눈이 내렸고, 9월 말께가 되자 길이 얼고 산천은 눈속에 싸여서 전도하기에 여간 어려운 형편이 아니었다.
어느날 썬다는 랑케트쪽으로 가는 중에 티벧인 한 사람과 동행하게 되었다. 그들은 앞을 분간 할 수 없는 눈보라와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함께 걷고 있었다. 사력을 다해 걷고 있는 중이었는데, 길에서 약 십미터나 떨어진 가파른 비탈쪽에 웅크리고 있는 동사체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썬다는 동행에게 “얼어 죽어가고 있는 그 사람을 구조하여 업고 가자”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는 “그러다가는 우리도 얼어죽소. 나는 살아야겠소” 하면서 매정하게 혼자 가버리는 것이었다.
썬다는 비탈을 조심스럽게 더듬어 내려가서 아직 살아 있긴 했으나 넘어져 다친데다 거의 얼어 죽은 목숨 같은 그를 끌어 올려 업었다. 업었다가 안았다가 넘어졌다 일어섰다 하면서 가까스로 고갯마루에 거의 다다랐을 때 썬다의 시야에 또 하나의 동사체가 나타났다. 그는 바로 몇시간 전 자기만 살겠다고 먼저 가버린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이미 꽁꽁 얼어 죽어 있었다. 썬다와 등에 업힌 사람은 서로 밀착한 열기로 인하여 체온이 내려가지 않아 살았는데, 혼자만 목숨을 건지겠다고 앞서가던 동행자는 혼자만의 체온으로 버틸 수가 없어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이 장면을 목격한 썬다는 문득 다음의 성경말씀이 머리에 떠올랐다.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눅17:33).
생사의 갈림길에서 선한 사마리아인같이 죽어가는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죽음을 각오하고 이웃을 구한 썬다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이다. 썬다는 또 다시 목숨을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면서 의식을 되찾은 동행과 함께 랑게트로 향했다.
아버지의 회심
1919년 10월 10일, 썬다는 저녁 늦은 시간에 고향 람푸르의 집으로 돌아왔다. 전과는 달리 아버지는 그를 박대하지 않았다. 15년전 회심의 그 순간을 기억하면서 썬다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기도를 드렸다. “생명을 다시 주신 주님이시여, 주님 외에 누구를 찾으리이까? 늘 나무 밑이 나의 잠자리가 되고, 바위밑이 나의 기도실이 되게만 하옵소서…”
지나간 세월을 되돌아보면서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또 자신의 불충에 통회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썬다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고개를 숙이고 목이 매인채 띄엄띄엄 말했다. “아들아, 못난 애비를 용서해다오. 그동안 너에게 못할 짓을 내가 너무 많이 했구나. 나도 이제 예수님을 믿고 싶다만 그분이 내 죄를 용서해 주실는지…” 썬다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아버지의 손을 꼭잡고 말했다. “아버지, 함께 주님께 기도를 드리시지요.” 기도를 마치자 아버지는 기쁨이 충만하여 자신의 눈을 뜨게 해준 아들에게 세례를 받고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썬다는 “아버지, 그 일은 딴 분이 하실 일입니다. 저는 오직 주님의 평화와 사랑을 증거하는 소명만을 받았을 뿐입니다”하고 겸손히 거절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아버지와 가족 그리고 안정된 미래를 기꺼이 포기하고, 오직 성경 한권만을 손에 쥔채 15년동안 맨발로 온 세상을 두루다닌 썬다! 어둠속에서 방황하다 지옥으로 떨어져가는 수많은 영혼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해주려고 엄청난 고생을 감수한 썬다! 이러한 썬다이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너무나 사랑하셨고 또한 그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해 주신 것이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6,27).
저는 날로 작아지고 예수님만 높이기를
썬다는 1920년 1월과 1922년 봄에 구주 전도를 했다. 기독교가 유럽에 들어간지 수천년 동안 많은 선교사들이 복음전도의 사명을 가지고 동양으로 파송되었는데, 이제는 동양의 도복을 입은 성자가 서양을 향하여 하늘의 신비한 뜻을 전하기 위해 가게 된 것이다. 물질문명의 안개 속에서 참빛을 잃은 유럽의 기독교계는 썬다의 방문으로 큰 각성과 자극을 받았다. 그는 동양에서와 같이 유럽전도에서도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다만 맨발에 성경 한권만을 간직한채 전도했다. 그의 모습을 본 서양사람들은 마치 예수님 같다고 하거나 성경에서 빠져나온 1900년 전의 사도들과 같다고 감탄했다.
그는 영국과 미국을 비롯하여 팔레스틴, 스위스, 독일, 스웨덴, 러시아, 노르웨이, 덴마크,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을 차례로 방문하면서 메마른 유럽인들의 영혼에 빛을 비추어 주었다.
나는 날로 작아지고
썬다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해 주기를 바랬으나 한번도 안수기도로 축복을 하지 않았다. 한번은 베를린에서 온 어느 목사가 자기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축복해 줄 것을 청하니 썬다는 “성경을 찢어 불태운 손으로 어떻게 축복 안수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못찔린 주님의 피묻은 손만이 축복을 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원하시니 주님께 아이들에게 복을 달라고 기도를 하여 드리겠습니다” 하고는 아이들을 위해 기도를 드렸다.
썬다의 겸비와 영성을 살피던 스웨덴의 대주교 소더블롬 박사는 “썬다는 온전히 그리스도인이다. 그는 진실로 성경적 그리스도인의 화신이다. 그의 예수님께 대한 순명, 그의 평화와 경건, 그의 십자가길의 실천, 썬다야말로 그리스도인의 한 전범(典範)이다”라고 하며 그의 겸비한 인격을 찬탄해 마지 않았다.
위대한 영적 지도자
늘 전도로 일관해 온 그의 삶이었기에 썬다는 또다시 1924년 봄 티벳행을 시도해 보았으나 준령 하나도 넘지 못한채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위궤양 뿐만 아니라 폐결핵, 영양실조, 2년 동안의 세계 일주 전도여행으로 인한 과로로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있었다. 의사는 그에게 평지전도도 중단하고, 오직 요양만 할 것을 당부했다. 썬다는 자신의 몸이 그토록 허물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순간 절망을 느꼈으나, 다시 평온을 되찾고 문서선교를 시작했다. 삼년 동안의 정양 기간 동안 썬다는 여러 편의 글을 써서 세상에 내보내는 한편, 인도 선교회 당국에다 티벧선교와 히말라야변 북인도 부락 선교를 촉구했다. 특히 이 기간 동안 인도교회의 인사들은 썬다의 ‘토착화’ 정신에 부응, 범인도교회라고 하는 새독립 개혁교단을 창설하고, 썬다에게 총회장직 수락을 제의해 왔다. 그러나 썬다는 조용히 이 제의를 거절했다. 그의 생각으로는 교회가 더 이상 분열되어서는 안되며 무엇보다도 조직에 관계됨이 없이 전도활동을 해온 그로서는 교단에 묶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썬다가 정양하는 사이 독일에서는 저명한 하일러 박사가 1924년에 [사두 썬다 싱]이란 큰 책을 내었는데, 썬다를 신비주의 성인이라고 구명(究明)했다. 그러나 일부 교회에서는 썬다에게 카톨릭에서나 붙이는 ‘성인(聖人)’의 칭호를 붙인다는 것과 그의 신비체험에 대한 기사내용이 책마다 다르게 묘사되었다는 이유 등으로 그를 이단으로 몰았다. 적에게 둘러싸인 것 같은 이런 와중 속에서 썬다는 침묵을 지켰다. 오직 그가 하는 일이란 몸이 조금이라도 나으면 문서를 하나라도 더 준비하는 것이었고, 집 가까운 곳에서 개인전도를 하는 것이었다.
썬다의 전기를 쓴 하일러 박사는 생명을 걸고 그의 성인됨을 옹호하고 나섰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썬다 싱은 교회에 있어서 성인 전통의 승계이며, 그의 가르침은 성 어거스틴, 아씨시의 성 프랜시스, 성 아퀴나스, 제노아의 캐더린, 성 십자가의 요한, 성 아빌라의 데레사 등의 영적 거인들과 견주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는 계속 말하기를 “서방 그리스도교계에 썬다 싱이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밭에 감추인 보화이다. 가진 것을 다 팔아서라도 산다고 하는 예수님의 복음, 그 중핵으로 빛나는 산상수훈의 도, 그 광채나는 진주이다. 오늘날 많은 서방 그리스도인들은 이 진주 보화를 모르고 있다. 혹 보는 사람도 있으나 그만 그 가치를 모름으로써 내던져 버리고 있는 형편이다. … 썬다 싱이야말로 오늘날 눈먼 서방인들을 깨울 수 있는 영적인 힘을 갖고 있다”고 하였다.
사라진 불꽃
1928년 봄, 인도쪽에서 겨울을 지낸 티벧 상인들이 그들의 고향을 찾아 수바투를 통과하고 있었다. 집 밖에서 봄볕을 쪼이고 있던 썬다는 그들의 고향을 물어보았다. 귀에 익은 지명들이 들려오자 그의 마음은 벌써 티벧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었다. 그는 상인들을 따라 조용히 집을 나섰다. 그로부터 며칠 후, 썬다는 인도쪽 히말라야의 한 산길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져 있다가 행인에게 발견되어 수바투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끝내 포기하지 않고 1929년 4월 18일, ‘살아오리란 기대를 하기 어렵다’는 말을 남기고 또다시 티벧을 향해 떠났다. 그는 떠나기 전에 리들 목사에게 이러한 편지를 띄웠다. “오늘 티벧을 향해 떠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모르는 험로이긴 하지만 사도행전 20:24에 있듯이, 내가 사명을 완수하고 하나님의 은총의 복음을 전하라고 주 예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임무를 다할 수만 있다면 나는 조금도 목숨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 저에 관해서 안부를 알 수 없으면 7월경에 수바투의 제 숙소로 오시어서 방을 좀 정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 날 이후 썬다는 영영 소식이 없었다. 티벧 정부의 협조 하에 백방으로 탐문해 보았으나 그의 행방은 알 길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의 실종에 대해 여러 가지로 말하였다. 카일라스산의 마하리시에게 갔다고도 하고, 은수 중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또 어떤 사람은 에녹이나 엘리야처럼 하늘로 들려 올라갔을 거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카타르 싱처럼 순교했으리라 추측이 가장 많았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벧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 없으니라”(신34:5).
담요 두장과 성경 한권만을 든 채 오대양 육대주를 돌고, 히말라야의 얼음길을 열번이나 넘나들며 복음을 전파한 인도의 성자 썬다 싱의 일생은 이렇게 마감되었다.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은 아련히 사라져간 성자를 그리워하며 오늘도 그의 빛나는 생애를 기리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영혼들에 대한 사랑으로 불꽃같이 활활 타오르다 사라져간 히말라야의 성자 썬다 싱! 그의 시신은 비록 찾을 수 없었으나 그의 정신은 우리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밝게 비추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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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사두 썬다싱의 교훈(1-10)
1. 어느 어두운 밤 나는 기도하려고 숲 가운데 들어갔다. 바위 위에 앉아 나의 깊은 요구를 내어놓고 도와주시기를 구하였다. 잠깐 있노라니 한 가난한 사람이 나를 향하여 오는 것을 보고 아마 구차한 사람이 나에게 빌러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다. 가지고 있는 것은 이 담요 하나밖에 없다. 그대는 이 가까운 동리에 가서 구걸하는 것이 좋겠다.” 그런데 보라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번개와 같이 빛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물 붓듯 하는 은혜를 나에게 부어주고 문득 사라졌다. 아아! 이는 내가 사랑하고 섬기는 주님이시다. 주님은 나같이 가련한 피조물에게서 아무것도 얻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다. 나에게 은혜를 주고 부요 하게 하시려고 오신 것인 줄 밝히 알았다. 그래서 나는 나의 미련하고 통찰력 없음을 슬피 울며 그곳을 떠났다.
2. 나는 눈물로서 기도하며 주께 나의 영을 바쳤다. “나의 주이신 신이여! 나의 생명의 생명, 나의 영의 영이시여! 긍휼로서 나를 살피시며 성신으로서 부어주소서. 나의 마음은 당신을 버리고 달리 받칠만한 사랑의 전당이 없나이다. 생명과 일체의 부여자인 당신 자신 외에는 당신에게서 아무 은혜도 구하지 않습니다. 세상과 그 안의 보배와 하늘까지도 요구하지 않나이다. 다만 당신을 사모하며 또 구하옵니다. 당신이 계신 곳 거기가 천국이므로 내 마음의 기갈은 다만 이것을 지어주신 당신에 의해서만 만족할 수 있나이다. 오! 나의 창조주여! 당신은 나의 마음을 다만 당신을 위하여서만 지은 것이요 다른 아무것도 위한 것이 아니옵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마음은 당신 안에 있는 외에는 평화와 휴식을 얻을 수 없나이다. 나를 창조하시고 또 평안을 구하는 욕구를 주신 당신 안에서만 만족할 수 있습니다. 나의 심중에서 당신을 거역하는 모든 것을 없이하여 주시고 내 마음 안에 들어와 계시며 이와 같이 영원히 지배하여 주시옵소서.”
3. 내가 이와 같이 기도하고 일어날 때에 한 빛나는 모양을 보았다. 그는 광휘 찬란한 아름다운 모양으로 내 앞에 섰다. 그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또 나의 눈은 눈물에 젖어서 밝히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생명을 주는 광선과 같은 빛이 몹시 힘 있게 나의 마음에 부어들어 올 때 나의 영혼은 그 중에 잠겨들어 갔다. 그때 곧 나는 사랑하는 나의 구주가 내 앞에 선 것을 알았다. 나는 곧 나의 섰던 바위에서 내려서 그의 발 앞에 몸을 던졌다. 그는 그 손으로 친히 내 마음의 열쇠를 잡았다. 그리고 나의 열쇠로서 나의 내부의 실을 열고 그의 거룩한 임재로서 내 마음에 충만하였다. 그래서 나는 안을 보나 밖을 보나 어디든지 다만 그만을 보았다.(천사나 성도나 악마나 다 우리 마음의 자물쇠를 열 권리와 능력이 없다. 또 우리 자신도 할 수 없다. 다만 우리 마음을 지으신 창조주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인간의 마음이 신의 보좌요 성인 것을 알았다. 이와 같이 그가 들어온 때부터 나의 마음속에는 천국이 열리었다.
4. “나의 참된 아들아! 참된 행복은 육안으로 보는 자에게는 없다. 그것은 영의 눈을 뜰 때에야 아는 것이요 마음에 있는 것이다. 팔레스틴에서는 수천인이 나를 보았다. 그러나 모두 참 행복을 얻은 것은 아니다. 썩어질 육안을 가지고 볼 수 있는 것은 썩어질 물건밖에 없다. 육안으로는 영원하신 영적 실재자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네 자신이 네 영혼조차 볼 수 없거든 어떻게 그 창조자를 볼 수 있느냐. 그러나 영안이 열리는 때에는 너는 확실히 영인 그를 볼 수 있다. 또 지금 네가 나를 보는 것은 육의 눈이 아니요 영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팔레스틴의 모든 사람들은 다 육안으로 나를 보았다. 또 썩어 없어질 인간으로 된 줄 생각하였다. 내가 죽을 육체를 취한 것은 이로써 세상 죄를 소멸코자 함이다. 그리고 죄인을 위하여 구원의 업이 완성될 때에 죽을 육체는 죽지 않는 영광중에 변모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부활한 후에 나를 볼 수 있는 자는 영적 시각을 받은 자뿐이다.
5. 이 세상에 나에게 대하여 아는 자는 많으나 나를 아는 자는 적다. 그것은 저들이 나와 개인적으로 직접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들은 참 이해도 없고 나의 안에 있는 신앙도 없고 나를 저들의 구주와 주로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마치 소경으로 난자가 붉고 푸르고 누른 여러 가지 빛깔에 대하여 말은 하나 그 미와 관상적 희열은 전혀 모르는 것과 같다. 눈을 뜨기 전에는 참 빛깔을 알 수 없다. 비록 박학한 사람이라도 그 영안이 뜨이기 전에는 나를 알 수 없고 나의 영광을 볼 수 없으며 내가 신의 화신인 것을 깨닫지도 못한다.
많은 신자들은 저들의 마음에 내가 임재 하는 것이 영적 생명과 평화를 주는 줄 알고 있다. 그것은 옳으나 직접 나를 볼 수는 없다. 마치 사람이 눈으로 모든 것을 보고 있으나 눈약 한 방울을 그 눈에 떨어뜨리면 눈은 그것을 보지 못하나 눈약이 눈 안에 있으므로 눈을 상쾌하게 하는 것같이 나의 내재가 그의 내적 광명의 눈을 밝히고 시력을 증진케 한다. 참 평화는 내가 신자의 마음에 임재 하는데서 생긴다. 그러나 나를 볼 수는 없고 다만 그 힘을 느끼며 그로 말미암아 그들은 행복하게 된다. 또 나의 현재에 의하여 그들은 평화와 기쁨을 느낄 수는 있으나 그 감정의 본체인 정신이나 마음을 볼 수는 없다. 이와 같이 나는 영이기에 나의 사랑하는 무리에게 숨긴 만나가 되어 생명과 기쁨을 준다. 그것은 이 세상의 지혜로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6. 병중에는 입맛이 없어진다. 비록 그에게 맛있는 음식을 주어도 도리어 맛이 나쁘게 느껴진다. 그와 같이 죄는 영에 관한 미각을 상하게 만든다. 이런 상황아래서는 나의 말이나 은혜, 나의 임재도 죄인의 주의를 끌지 못한다.
7. 아무리 아름다운 꽃동산도 어미를 잃은 어린아이에게는 무용지물이다. 울며불며 보채던 그에게 어머니가 다가와 품에 안을 때에야 비로소 그의 마음은 평화를 찾고 다시 그 아름다운 꽃동산에서 여유롭게 뛰노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나의 사랑하는 무리들은 이 큰 세계의 동산에 있어 여러 가지 아름다운 것들이 마음을 끌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참 기쁨을 맛볼 수 없는 것이다.
8. 석탄의 한 조각을 취하여 그것을 아무리 씻어도 검은 것을 씻어버릴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을 불 가운데에 넣으면 검은색이 변하여 붉은 빛으로 변한다. 그와 같이 죄인이 성령을 받을 때 그는 불세례로 인하여 검은 죄의 더러운 것은 소멸되고 그는 세상의 빛이 된다. 석탄 속의 불과 같이 나는 나의 자녀들 안에 있고 그들은 내 안에 있어 나는 저들을 통하여 나 자신을 세계 중에 나타낸다.
9. 내 아들아! 만인의 심중과 그 형편은 내가 잘 안다. 나는 각 사람들의 중심의 요구에 응하여 나를 계시한다. 그러므로 아무 때나 나를 나타내지 않는 것인데 이를 모르고 사람들은 전 세상에 다시 나를 나타내주기를 바라며 그리하면 나를 믿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사람을 바른 길에 돌아오게 함에는 나만이 아는 적절한 시기에 그때 나를 계시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 인간을 위하여 나는 인간이 되었다. 즉 그들에게 신을 알리기 위함이다. 무서운 자나 또는 이상한 무엇이 되지 않고 사랑이 충만한 그들 자신과 같은 자가 되었다. 인간은 신의 모양으로 창조된 까닭이다.
인간은 자기의 믿고 사모하는 것을 보고자하는 자연의 욕구가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볼 수가 없다. 아버지는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를 이해함에는 그와 동질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신을 조금 이해할 수밖에 없는 피조물에 불과하므로 신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신은 사랑인고로 인간에게 자기와 같은 사랑의 동질성을 부여하였다. 이 인간이 가진 사랑의 요구가 만족되기 위하여 나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형체를 취하였다. 그래서 내가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런고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인간으로 있을 때 나는 아들이라 불렸으나 나는 영원하고 무한한 아버지이다.
10. 나와 아버지와 성신은 하나이다. 마치 태양 중에 열과 빛이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열은 빛이 아니요 빛은 열이 아니다. 그 나타남은 다르나 근본은 하나이다. 그와 같이 나와 성신은 아버지께 로서 나와서 세상에 빛과 열을 준다. 불세례를 주는 성신은 신자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죄와 악을 태워 없이하고 그들을 순결하고 거룩하게 한다. 참 빛인 나는 모든 암흑과 악한 요소를 쫓아버리고 그들을 의의 길로 인도하며 마침내 영원의 본향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세 개의 다른 몸이 아니요 하나이다. 마치 태양이 하나인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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