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만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유일한 성전으로 삼으셨습니다. 여기엔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며, 세 가지 이유에서 그렇습니다.
첫째 인간의 '하나님 형상됨'과 '성전됨'의 관련성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e)'을 지녔다 함은, '본체(substance)'인 하나님을 찾아 모시려는 속성을 가졌음을 의미합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전 3:11)"고 한 말은, '형상(image)' 인간이, '본체(substance)' 하나님을 찾아 모시려는 마음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아덴(Athens)의 수많은 제단들을 본 후에 한 '아레오바고(the Areopagus) 강설'에서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행 17:22)"고 한 것은, 단지 아덴인들(Athenians)의 종교성에 국한지어 말한 것이 아니라 '본체(하나님)'을 찾아 모시려는 '형상(인간)'의 본성을 두고 한 말입니다. 이는 어거스틴(Augustine)이 말한, "오직 하나님으로만 채워지는 인간 내면의 한 공간"을 의미합니다.
'본체(substance)' 하나님 역시 그의 '형상(image, 창 1:27)' 인간을 자신의 거처로 삼으려는 본성을 가졌습니다. '형상(인간)'이 집에 해당한다면, '본체(하나님)'는 그 집의 거주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임마누엘(사 8:8)이라는 사실 역시, 인간의 하나님 성전 됨을 시사합니다. 아담이 범죄 후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숨자, 하나님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며 찾으신 것은, 하나님의 임마누엘 갈망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전 삼을 인간이 죄로 하나님을 떠났으니, 애착을 갖고 찾으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사 66:1)"는 말씀은 '본체(하나님)'가 머물 '형상(인간)'을 찾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왕상 8:27, 행 17:24)"라는 솔로몬의 고백 역시, 하나님을 모실 성전은 물리적인 공간이 아닌, 그의 '형상(image)' 인간임을 시사합니다.
무엇보다 오순절 성령이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120문도들에게 임한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그의 성전으로 삼았다는 확증입니다.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3-4)."
초림의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은 인간으로 오셨기에, 말구유라는 물리적 공간이 필요했지만, 성령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영적 성전인 성도가 필요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천국엔 성전이 없고, 어린 양이 그 성전이라고 한 것도 성전의 비공간성을 말한 것입니다.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 21:22)." 하나님이 천국에선 어린 양을 당신의 성전 삼으셨고, 땅에선 성도를 당신의 성전으로 삼으셨습니다.
구약의 공간 성전은 송아지의 피가 뿌려졌을 때만 일시적으로 임하시는, '간헐적 방문(intermittent visit)' 장소였고, 한 번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지면 '지속적인 임재(continued presence)'가 이루어지는, 인간 성전(a human temple)의 그림자였습니다. 그리스도 이후에는 성전 파괴를 통해, 물리적인 공간 성전은 실체가 도래하기까지 한시적으로 경륜됐던 그림자였으며,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받은 성도만이 유일한 성전임을 확증해주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그리스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벧전 1:2)"라고 한 것은 "구원 택정을 입은 자" 라는 뜻과 함께, "하나님의 성전으로 택하심을 입은 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둘째, 인간 성전이 진정한 성전임은, 영접이 있는(요 1:12) 성전의 인격성 때문입니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합 2:20)"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이 머무시는 곳은 어디든 성전이지만, 영접이 있는 인간 성전(a human temple)만이 진정한 성전입니다. 노크(knocking)로 허락받아 들어가는 하나님의 겸손한 태도 역시, 영접하는 인간 성전만큼이나 인격적입니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이처럼 '노크(knocking)'와 '영접(receiving)'이 있는, 인간 성전(a human temple)은 인격자 하나님이 머무실 만한 유일한 성전입니다.
셋째, 구원이 성전 개념을 함의합니다.
얼핏 구원과 성전이 무관해 보이나, 둘은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구원받았다, 버림받았다"는 말은 사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두 이름, '예수(마1:21)'와 '임마누엘(마 1:23)'은, '구원'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뜻이며, 둘을 연결지으면 "하나님이 구원하여 함께 하신다"입니다. 하나님은 죄로 당신과 분리됐던 인간들을 구원하여 그들에게 임마누엘 하셨습니다. 구원의 결과가 임마누엘이었습니다.
반면 심판의 결과는 하나님과의 분리입니다. 예수님이 "믿지 않는 자는 벌써 심판을 받았다(요 3:18)"고 하신 것은, 믿지 않으므로 이미 "하나님과의 분리" 심판을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저주는 질병이나 가난이 아니라 하나님과 분리 된 채, 하나님 없이 사는 것입니다. 지옥 멸망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영원히 떠나는 것(살후 1:9)"입니다.
끝으로 인간 성전(a human temple)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거주 방식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인간 성전은 벽돌로 된 구약 성전과는 달리, 하나님이 성전과 분리된 채 모셔지지 않고, 인간 성전과의 연합 속에서 모셔집니다. 그리고 이 연합은 일시적인 것이 아닌 분리되지 않는 영원한 연합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연합은 서로 섞이거나 둘의 개체성이 약화, 소멸되지도 않습니다.
이는 인간과 섞이거나 인간의 죄에 오염되지 않는, 나 밖의(out of me) "전가(imputatio)된 의(義)" 개념과 일치하며, 마리아의 몸에 잉태된 그리스도가 마리아의 죄성에 오염되지 않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자신 안에 거하실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의의 주입(infusio of righteousness) 교리를 믿는 로마천주교인들이 죄인 안에 주입된 하나님 의가 죄로 손상 받을 수 있다고 믿듯이, 하나님이 성도 안에 들어오면 인간의 죄성에 오염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이 되려면, 소수의 성자 반열에 든 사람들처럼 하나님이 그에게 들어가도 하나님을 오염시키지 않을 만큼 완전 성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불특정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말씀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고후 13:5)."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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