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홍정균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야기는 열왕기 상․하에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신명기 사가의 작품으로서 역사적 사실을 신앙의 눈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특히 엘리야․엘리사 이야기에서 핵심을 이루고 있는 내용은 바로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아니면 “이방신을 섬길 것인가?” 선택하라는 양자택일의 내용이다. 즉, 하나님을 섬기면 복(福)과 구원의 길로 인도되며, 이와는 반대로 이방신인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면 화(禍)와 멸망이 있을 따름이라는 것을 역사를 재해석함으로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신명기 사가가 활동하고 있던 그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신과 야훼 하나님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종교혼합주의가 팽만하고 있던 가운데 엘리야․엘리사 시대의 이야기를 언급함으로써, 과연 우리의 신앙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선택하라고 신명기 사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하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토라(Torah)의 가르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복(福)을 받고, 이와 반대로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 다는 가르침을 토대로 하여 전하고 있다.
⑴ 엘리야
엘리야의 이야기는 신비적인 요소와 기적적인 요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가령 가뭄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 까마귀들이 날라다 주는 음식을 먹으며 그릿 시냇가에서 연명한 이야기와,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과 대적한 이야기, 그리고 사르밧 과부에게 행한 기적과, 하늘로의 승천은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뛰어 넘어 하나님의 거룩함과 놀라움 앞에 숙연해질 따름이다.
엘리야의 이야기 중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사르밧 과부 이야기는 엘리야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전능성과 위엄을 만 천하에 공포하고 있는 것이다. 한 과부가 아들과 함께 살았는데 그들이 가진 것이라곤 고작 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엘리야의 말에 순종(엄격히 말하면 엘리야의 하나님에게 순종)하였을 때, 가뭄기간 동안 먹을 양식과 기름이 없어지지 않고 기적적으로 남아 있었다. 더욱이 과부의 아들이 죽었을 때 엘리야가 아들을 다시 살아나게 함으로써, 그 과부의 입을 통하여 엘리야의 하나님 야훼(YAWH)가 참으로 진실된 하나님임을 만 천하에 선포하고 있다. 엘리야의 이야기에서 이러한 “야훼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앞으로 엘리야가 펼쳐 나갈 많은 일들이 바로 참되신 야훼 하나님의 역사임을 전하려는 강한 의도를 포함하고 있다. 이 이야기를 출발로 하여 엘리야의 생에서 가장 절정의 이야기인 갈멜산 이야기로 연결 되고 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는 [850 Vs 1]로서 승부를 하고 있다. 즉 바알신의 제사장 450명과 아세라신의 제사장 400과 홀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합왕은 정치적으로 북왕국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평가가 된다. 하지만 이것은 신명시 사가의 눈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다. 신명기 사가의 눈에 비친 아합은 종교혼합주의를 야기한 왕으로서 하나님 앞에 불순종한 왕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신의 제사장들과 엘리야의 대 격돌은 종교혼합주의를 거부하는 십계명의 제1의 계명에 근거를 두고 있다. 바로 “하나님이냐 아니냐”라는 선택인 것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나님이냐 아니면 죽음(멸망)이냐”의 것이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격돌의 현장 앞에 모여 이 사실을 지켜보고 있다. 물론 여기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명기 사가가 활동한 그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엇을 택해야 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먼저 바알신과 아세라신의 제사장들이 자신의 신(神)의 이름을 통하여 불을 내리겠다고 제사를 드린다. 그러나 아무런 변화도 없이 시간만 흐르고 있었다. 그때 엘리야는 그들을 조롱하면서 바알신과 아세라신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하고 있다. 이들의 제의는 결국 응답이 없었다. 그 다음으로 엘리야가 나아가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린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 위에 많은 물을 부었다. 그러나 엘리야의 기도에 하나님은 즉시 응답하여 그 제물을 불로써 주위의 흙과 돌까지도 모조리 태워버리셨다. 그때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정리하고 하나님께로 마음을 고정 시켰던 것이다. 이 일이 있은 후 바알과 아세라의 제사장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이 갈멜산의 사건은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꺼져가는 계약을 다시금 살려놓은 사건으로써, 엘리야를 제2의 모세로서 부각시키고있는 것이다. 모세는 전형적으로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중개자로서 여기서 엘리야는 바로 모세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후에 세례자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도 연관되어 나타나게 된다.
엘리야의 이야기를 정리해 보면, 한마디로 “하나님을 선택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최종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엘리야는 제2의 모세로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중개자(mediator)인 것이다. 엘리야를 제2의 모세로서 부각시킨 신명기 사가의 의도는 명확하다. 즉, 과거에 모세에게 역사 하신 하나님이 지금도 동일하게 엘리야에게 역사 하심을 보여 줌으로써, 하나님의 역사는 모세와 엘리야를 통하여 지금 이 시간에도 동일하게 역사하고 계심을 나타내려는 의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바알 혹은 그 외의 다른 우상들 사이에서 방황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통하여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이 동일하게 역사 하심을 깨닫고 그분에게로 돌아오라는 신명기 사가의 가르침을 엘리야의 이야기를 통하여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막을 내리지 않고 그의 후계자인 엘리사에게 이어진다. 이러한 전환은 모세의 역할이 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에게 이어지는 것과 유사한 패턴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것으로 짐작해 볼 때 의도적으로 [모세-여호수아]의 패턴을 [엘리야-엘리사]에게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⑵ 엘리사
엘리사의 이야기에서도 우상숭배 타파가 핵심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엘리사의 사역은 엘리야의 뒤를 이어 계속 전개되고 있다. 즉 모세가 죽은 후 모세가 이루지 못한 하나님의 약속들을 여호수아가 이루듯이, 엘리야가 이루지 못한 하나님의 약속을 엘리사가 바턴을 이어 받아 이루어 가고 있는 것이다.
엘리사의 행적에도 매우 신비적이고, 기적적이며 때론 잔인하기까지도 한 일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엘리사는 샘에 소금을 넣어 이 샘을 고친다는 야훼의 말씀을 지킨 사건이다. 물론 여기서도 엘리사는 엘리야와 마찬가지로 기적을 행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엘리사 자신의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함과 신실하심을 선포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야기를 통하여 미루어 볼 때, 예언자들의 기적 행위는 하나님이 예언자들과 함께 하신다는 일종의 “세상을 향한 선포”인 것이다. 이것은 몰트만(J. Moltmann)의 견해를 통하여 생각해 볼 때, 장차 일어날 일들을 지금 이 시간에 가지고 오는 것이다. 바로 “희망”의 시작인 것이다. 그러나 이 “희망”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으로서, 하나님을 거부하고 다른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아닌 “절망”인 것이다.
엘리사 이야기에서는 빚 때문에 두 아들을 빼앗긴 과부에게 조그만 한 항아리의 기름으로 이웃에서 빌려온 많은 그릇들에 기름을 채움으로서 아들을 되찾게 해준 기적의 이야기와,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다시 살려준 사건은 엘리야의 이야기와 매우 유사하다. 즉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식량과 기름이 가뭄동안 떨어지지 않게 한 기적의 이야기와 그의 죽은 아들을 살려준 이야기는 엘리사의 이야기와 매우 유사한 형태와 내용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실제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바로 엘리야와 엘리사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며, 또한 이들을 구원하고자 하신다는 상징적인 내용을 전하려는 의도로서 생각된다. 하나님은 과부와 억눌린자의 하나님으로서 그들의 고통과 괴로움을 사랑으로 끌어안음으로서 해결해 주시는 전능하시고 유일하신 분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엘리사 이야기에서 특색 있는 이야기로는 부족한 떡으로 많은 사람들이 먹고 남았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기적과 매우 유사한 것으로 아마도 엘리사의 이야기를 통하여 오명이어의 기적이 재구성되지 않았는가 추측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 많은 사람들이 엘리야 혹은 엘리사와 동일한 분으로서 예수님을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어쨌든 엘리사는 제2의 모세인 엘리야의 후계자로서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즉 예수님도 세례자 요한과 연관하여 생각해 볼 때,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뒤를 이은 분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제2의 모세로서, 또한 엘리야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그러므로 엘리아의 후계자인 엘리사는 제2의 여호수아로 비춰지고 또한 세례자 요한의 뒤를 이은 예수님의 모습에서도 여호수아와 엘리야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는 모세와 여호수아의 모습과 같이 매우 유사한 패턴으로 전개되고 있다. 물론 이것은 후에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에까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주는 의미들은 다름이 아니라 유일하신 야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신다는 “사랑과 약속(계약)”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십계명)을 잘 지키고 행하면 복(福)을 받고 그렇지 못하면 화(禍)를 당한다는 것이다. 복(福)과 화(禍)의 길목에서 신명기 사가는 역사적 사실들을 신앙의 눈으로 재해석함으로써, 갈팡질팡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화(禍)의 길로 향하지 말고 복(福)의 길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때론 폭력적이고 잔인하게 나타날 때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하고 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이러한 의도가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야기에서 특별히 명료하고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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