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거스틴의 ‘타락의 여덟 가지 뚜렷한 결과들’에 대한 요약
첫 번째, 죄의 결과는 “타락 그 자체”에 있다. 사람은 포세
페까레(죄를 범할 능력)를 지닌 존재로 피조되었으므로, 처
음부터 타락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선하게
피조되었지만, 변화의 가능성도 아울러 자녔다. 이 겉은 범
죄 가능성을 가리켜 후에 칼 바르트는 “불가능한 가능성”
이라 불렀다. 이것은 분명 넌센스요 모순된 말이다. 하지만
바르트는 선한 피조물이 죄에 빠지는 일의 불가해성을 지
적하기 위해 일부러 이 같은 모순된 표현을 사용했을 것이
다. 타락은 분명 불합리해 보이는 것이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타락의 심각성은 이것이 인간의 숭고
한 원태 상태와 뚜렷이 대조된다는 점에서 드러나게 된다.
샤프는 이렇게 설명한다. “만일 우리가 아담의 높은 신분과
그 속에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을, 온갖 종류의 과실들이 풍
성했던 낙원에서의 하나님의 명령은 단순했다는 점과 그것
을 순종하기기 쉬웠던 점을, 그리고 그를 지으신 분이요 그
의 가장 위대한 보호자이신 하나님의 무서운 징벌을 고려
한다면, 아담의 타락이 징벌을 받아 마땅한 짓이었다는 사
실은 더욱 분명하다.”
죄의 두 번째 결과는 “자유의 상실”이다. 창조시에 인간은
선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대해 적극적인 성향을 갖고 있
었다. 비록 사람이 죄를 범할 가능성은 있었지만, 그가 죄
를 범해야 한다는 도덕적 필요성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타
락의 결과 인간은 악의 속박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타락
한 의지는 선의 원천보다는 악의 원천이 되었다.
죄의 세 번째 결과는 “지식의 장애”이다. 창조 당시 인간의
지적 역량은 타락 후보다 훨씬 우수했다. 타락의 결과에는
신학자들이 지칭하는 바 “죄의 지적 영향”이 포함되어 있
다. 영어 단어 “noetic"은 ”지성“을 의미하는 헬라어 노우
스에서 파생되었다. 원래의 인간 지성은 정보를 받아들이
고 분석함에 있어 현재에 비해 훨씬 더 낫고 정확했다. 그
는 진실을 왜곡됨 없이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전지성을 받은 것은 아니다. 이것
은 하나님이 피조물과 더불어 나누지 않으시고 또 나누실
수도 없는 그분의 “비공유적” 속성들 중 하나이다. 실재 전
반에 대한 무한하고 영원한 통찰력을 지닌 전지한 존재는
영원하고 무한해야 한다. 그러므로 아담은 자신이 받은 지
식에 있어 한계가 있었고, 처음부터 배운 과정에 있었다.
그의 학습 역량은 원죄에 의해 방해를 받지 않는 상태였다.
창조 당시에 학습 과정은 힘들지 않았다. 사람의 지성이 죄
로 인해 어두워진 상태가 아니었다.
타락 후에도 사람은 여전히 지성을 소유하고 있다. 여전히
그는 생각할 수 있다. 여전히 논리적으로 사유할 수 있다.
그는 지성의 역량을 잃지 않았다. 그 역량은 남아 있지만,
편이성이 상실되었으므로 한때 쉬웠던 것이 지금은 힘들다
. 분명하게 사유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 훼손되었다. 이
제 우리의 생각이 혼란스러워지기 쉬우며 논리적인 잘못을
범하기 쉽다. 우리는 어떤 자료로부터 비논리적인 추론을
하거나 논리적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우리의 논거들이 항
상 건전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들이 결부되어 있다. 하나는
지성의 힘과 그 사유 역량의 약화요, 또 하나는 죄악 된 선
입견과 편견의 부정적 영향-특히 선이나 하나님께 대한 우
리의 이해력과 관련하여-이다. 성경은 우리의 마음이 “어
두워졌고” “타락했다”고 말한다. 우리는 생각 속에 하나님
을 두기 싫어한다. 이는 단순한 정신적 타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극단적인 도덕적 타락까지도 의미한다.
타락 후의 마음의 작용과 몸의 작용 간에는 유사점이 있다.
우리의 몸은 여전히 물리적인 힘을 발휘한다. 몸은 여전히
활동한다. 그러나 몸의 활동이 지금은 땀과 고역을 동반한
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도 여전히 활동하지만, 올바른
생각을 위해서는 힘들게 수고해야만 한다.
죄의 네 번째 결과는 “하나님의 은혜의 상실”이다. 창조 시
에 하나님은 사람에게 아듀토리움, 곧 선을 위한 은혜로우
신 도움을 제공하셨다. 타락 후에 하나님은 이 도우시는 은
혜를 피조물에게서 거두셨다. 어떤 의미에서 사람은 자신
의 죄에 넘겨졌고 자기 마음의 악한 생각을 따르게 되었다.
이제 그의 마음이 기만으로 채워졌고 그의 욕구는 줄곧 악
할 뿐이다. 분명, 하나님이 자신의 율법과 섭리를 통해 인
간의 악을 제재하시는 은혜는 아직 남아 있다. 하지만 하나
님의 이 같은 제어는 선을 행하도록 적극적으로 도우시는
은혜가 아니라 악에 대한 부정적인 제재이다.
죄의 다섯 번째 결과는 “낙원의 상실”이다. 타락에 뒤이은
저주의 일부는 에덴에서의 추방이었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를 낙원에서 내쫓으신 후 화염검을 든 파수꾼 천사로
하여금 에덴 입구를 지키게 하셨다. 이 파수꾼이 아담과 이
브를 에덴에 다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따라서 그들
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와 친교를 누렸던 환경은 제거
되었다.
추방과 함께 여자와 뱀과 남자 모두에게 저주가 임했다. 여
자는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 했고, 뱀은 배를 땅에 대고 기
어 다녀야 했으며, 또한 남자는 자신의 노력에 저항하는 땅
에서 땀 흘리는 수고를 해야 했다. 이 새 환경의 특징은 잡
초와 가시와 엉겅퀴라 할 수 있었다. 에덴 동산에는 잡초가
없었다.
죄의 여섯 번째 결과는 “정욕의 현존”이다. 어거스틴의 저
서들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정욕이라는 개념은 감각적인
것에 대한 선호를 내포한다. 그것은 감각적인 것 그 자체가
아니라 감각적인 성향을 가리킨다. 그것은 육신의 정욕으
로 향하는 의지의 성향을 내포하며, 이 정욕은 영을 대적한
다.
“원래 몸은, 마치 사람이 하나님께 즐거이 순종했듯이, 영
에게 즐거이 순종했다”고 샤프는 설명한다. “단 하나의 의
지만이 작용했다. 그러나 타락에 의해 이 아름다운 조화가
깨졌고,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묘사한 것과 같은 반목이
일어났다. ... 그러므로 ‘정욕’은 바울이 나쁜 의미에서 ‘육
신’이라고 부르는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그것은 그 자
체가 감각적인 성격을 지닌 것은 아니지만, 보다 높고 합리
적인 인간 본성을 지배하여 ... 따라서 ‘정욕’은 단지 육체적
인 것이라기보다는 성경에서 말하는 사르크스로서, 영혼
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것이 없이는 아무런 탐욕도 일어
나지 않는다.”
죄의 일곱 번째 결과는 “육체적인 사망”이다. 창조 당시에
인간은 포세 모리(죽을 능력)와 포세 논 모리(죽지 않을 능
력)를 모두 지니고 있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경고하기를,
만일 금단의 열매를 먹으면 죽을 것이라고 하셨다. 뱀은 이
경고를 부정하며, 아담과 이브는 죽지 않고 신들처럼 될 것
이라고 했다.
우리는 하나님이 즉각적인 사망을 경고하셨던 점을 주목할
수 있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 그러
나 아담과 이브는 범죄한 바로 그 날에 육체적 사망(사나토
스)을 경험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혹자로 하여금 죄에
대한 “실제” 형벌이란 곧장 경험된 영적 사망이었다고 결
론 짓게 한다.
그러나 성경 본문과 어거스틴의 입장에 의하면, 죄에 대한
형벌은 영적 사망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아담과 이브
가 마침내는 경험했던 육체적 사망도 포함한다. 이것은 그
리스도께서 후에 자기 백성을 위해 정복하셨던 큰 대적이
었다. 타락의 결과, 육체적 사망은 이제 단지 가능성이 아
니라 필연성이 되었다.
어거스틴은 설명하기를, 아담과 이브에게 있어 육체적 사
망이란 그들이 마지막 숨을 헐떡일 때까지 완전히 연기된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들이 범죄한 그 순간에 육체적 사망이 시작되었다. 바로
그 순간부터 사망의 폐해들-노쇠, 육체적 쇠약, 그리고 질
병-이 인간의 삶을 따라다녔다.
아담의 범죄 이래로, 모든 아기들이 산고 속에서 태어나게
되었고, 출산의 고통과 신생아의 첫 번째 울음소리와 함께
사망의 과정이 시작되었다. 삶 전체가 바로 이러한 과정이
다. 생은 무덤을 향해 쉼 없이 나아가는데 이것이 바로 죄
의 정가표이다.
죄의 여덟 번째이자 마지막 결과는 “유전되는 죄책”이다. “
원죄”는 죄가 단지 하나의 행위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시조
로부터 우리 각자에게 유전되는 하나의 상태이기도 함을
의미한다. 죄는 우리의 인간 본성에 “거하는” 그 무엇이다.
이러한 상태 혹은 죄악 된 습성은 출산을 통해 세대를 거듭
하여 지속된다. 원죄는 출산의 자연적인 과정을 통해 직접
유전되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직접적이고도 즉각적으로
각 영혼을 새로이 창조하시는가? 어거스틴은 이 두 가지
입장(영혼 전이설과 영혼 창조설) 사이에서 오락가락한다.
왜냐하면 그는 성경이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하게 대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유의지와 믿음( R.C. 스프룰 )
첫 번째, 죄의 결과는 “타락 그 자체”에 있다. 사람은 포세
페까레(죄를 범할 능력)를 지닌 존재로 피조되었으므로, 처
음부터 타락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선하게
피조되었지만, 변화의 가능성도 아울러 자녔다. 이 겉은 범
죄 가능성을 가리켜 후에 칼 바르트는 “불가능한 가능성”
이라 불렀다. 이것은 분명 넌센스요 모순된 말이다. 하지만
바르트는 선한 피조물이 죄에 빠지는 일의 불가해성을 지
적하기 위해 일부러 이 같은 모순된 표현을 사용했을 것이
다. 타락은 분명 불합리해 보이는 것이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타락의 심각성은 이것이 인간의 숭고
한 원태 상태와 뚜렷이 대조된다는 점에서 드러나게 된다.
샤프는 이렇게 설명한다. “만일 우리가 아담의 높은 신분과
그 속에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을, 온갖 종류의 과실들이 풍
성했던 낙원에서의 하나님의 명령은 단순했다는 점과 그것
을 순종하기기 쉬웠던 점을, 그리고 그를 지으신 분이요 그
의 가장 위대한 보호자이신 하나님의 무서운 징벌을 고려
한다면, 아담의 타락이 징벌을 받아 마땅한 짓이었다는 사
실은 더욱 분명하다.”
죄의 두 번째 결과는 “자유의 상실”이다. 창조시에 인간은
선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대해 적극적인 성향을 갖고 있
었다. 비록 사람이 죄를 범할 가능성은 있었지만, 그가 죄
를 범해야 한다는 도덕적 필요성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타
락의 결과 인간은 악의 속박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타락
한 의지는 선의 원천보다는 악의 원천이 되었다.
죄의 세 번째 결과는 “지식의 장애”이다. 창조 당시 인간의
지적 역량은 타락 후보다 훨씬 우수했다. 타락의 결과에는
신학자들이 지칭하는 바 “죄의 지적 영향”이 포함되어 있
다. 영어 단어 “noetic"은 ”지성“을 의미하는 헬라어 노우
스에서 파생되었다. 원래의 인간 지성은 정보를 받아들이
고 분석함에 있어 현재에 비해 훨씬 더 낫고 정확했다. 그
는 진실을 왜곡됨 없이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전지성을 받은 것은 아니다. 이것
은 하나님이 피조물과 더불어 나누지 않으시고 또 나누실
수도 없는 그분의 “비공유적” 속성들 중 하나이다. 실재 전
반에 대한 무한하고 영원한 통찰력을 지닌 전지한 존재는
영원하고 무한해야 한다. 그러므로 아담은 자신이 받은 지
식에 있어 한계가 있었고, 처음부터 배운 과정에 있었다.
그의 학습 역량은 원죄에 의해 방해를 받지 않는 상태였다.
창조 당시에 학습 과정은 힘들지 않았다. 사람의 지성이 죄
로 인해 어두워진 상태가 아니었다.
타락 후에도 사람은 여전히 지성을 소유하고 있다. 여전히
그는 생각할 수 있다. 여전히 논리적으로 사유할 수 있다.
그는 지성의 역량을 잃지 않았다. 그 역량은 남아 있지만,
편이성이 상실되었으므로 한때 쉬웠던 것이 지금은 힘들다
. 분명하게 사유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 훼손되었다. 이
제 우리의 생각이 혼란스러워지기 쉬우며 논리적인 잘못을
범하기 쉽다. 우리는 어떤 자료로부터 비논리적인 추론을
하거나 논리적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우리의 논거들이 항
상 건전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들이 결부되어 있다. 하나는
지성의 힘과 그 사유 역량의 약화요, 또 하나는 죄악 된 선
입견과 편견의 부정적 영향-특히 선이나 하나님께 대한 우
리의 이해력과 관련하여-이다. 성경은 우리의 마음이 “어
두워졌고” “타락했다”고 말한다. 우리는 생각 속에 하나님
을 두기 싫어한다. 이는 단순한 정신적 타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극단적인 도덕적 타락까지도 의미한다.
타락 후의 마음의 작용과 몸의 작용 간에는 유사점이 있다.
우리의 몸은 여전히 물리적인 힘을 발휘한다. 몸은 여전히
활동한다. 그러나 몸의 활동이 지금은 땀과 고역을 동반한
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도 여전히 활동하지만, 올바른
생각을 위해서는 힘들게 수고해야만 한다.
죄의 네 번째 결과는 “하나님의 은혜의 상실”이다. 창조 시
에 하나님은 사람에게 아듀토리움, 곧 선을 위한 은혜로우
신 도움을 제공하셨다. 타락 후에 하나님은 이 도우시는 은
혜를 피조물에게서 거두셨다. 어떤 의미에서 사람은 자신
의 죄에 넘겨졌고 자기 마음의 악한 생각을 따르게 되었다.
이제 그의 마음이 기만으로 채워졌고 그의 욕구는 줄곧 악
할 뿐이다. 분명, 하나님이 자신의 율법과 섭리를 통해 인
간의 악을 제재하시는 은혜는 아직 남아 있다. 하지만 하나
님의 이 같은 제어는 선을 행하도록 적극적으로 도우시는
은혜가 아니라 악에 대한 부정적인 제재이다.
죄의 다섯 번째 결과는 “낙원의 상실”이다. 타락에 뒤이은
저주의 일부는 에덴에서의 추방이었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를 낙원에서 내쫓으신 후 화염검을 든 파수꾼 천사로
하여금 에덴 입구를 지키게 하셨다. 이 파수꾼이 아담과 이
브를 에덴에 다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따라서 그들
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와 친교를 누렸던 환경은 제거
되었다.
추방과 함께 여자와 뱀과 남자 모두에게 저주가 임했다. 여
자는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 했고, 뱀은 배를 땅에 대고 기
어 다녀야 했으며, 또한 남자는 자신의 노력에 저항하는 땅
에서 땀 흘리는 수고를 해야 했다. 이 새 환경의 특징은 잡
초와 가시와 엉겅퀴라 할 수 있었다. 에덴 동산에는 잡초가
없었다.
죄의 여섯 번째 결과는 “정욕의 현존”이다. 어거스틴의 저
서들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정욕이라는 개념은 감각적인
것에 대한 선호를 내포한다. 그것은 감각적인 것 그 자체가
아니라 감각적인 성향을 가리킨다. 그것은 육신의 정욕으
로 향하는 의지의 성향을 내포하며, 이 정욕은 영을 대적한
다.
“원래 몸은, 마치 사람이 하나님께 즐거이 순종했듯이, 영
에게 즐거이 순종했다”고 샤프는 설명한다. “단 하나의 의
지만이 작용했다. 그러나 타락에 의해 이 아름다운 조화가
깨졌고,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묘사한 것과 같은 반목이
일어났다. ... 그러므로 ‘정욕’은 바울이 나쁜 의미에서 ‘육
신’이라고 부르는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그것은 그 자
체가 감각적인 성격을 지닌 것은 아니지만, 보다 높고 합리
적인 인간 본성을 지배하여 ... 따라서 ‘정욕’은 단지 육체적
인 것이라기보다는 성경에서 말하는 사르크스로서, 영혼
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것이 없이는 아무런 탐욕도 일어
나지 않는다.”
죄의 일곱 번째 결과는 “육체적인 사망”이다. 창조 당시에
인간은 포세 모리(죽을 능력)와 포세 논 모리(죽지 않을 능
력)를 모두 지니고 있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경고하기를,
만일 금단의 열매를 먹으면 죽을 것이라고 하셨다. 뱀은 이
경고를 부정하며, 아담과 이브는 죽지 않고 신들처럼 될 것
이라고 했다.
우리는 하나님이 즉각적인 사망을 경고하셨던 점을 주목할
수 있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 그러
나 아담과 이브는 범죄한 바로 그 날에 육체적 사망(사나토
스)을 경험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혹자로 하여금 죄에
대한 “실제” 형벌이란 곧장 경험된 영적 사망이었다고 결
론 짓게 한다.
그러나 성경 본문과 어거스틴의 입장에 의하면, 죄에 대한
형벌은 영적 사망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아담과 이브
가 마침내는 경험했던 육체적 사망도 포함한다. 이것은 그
리스도께서 후에 자기 백성을 위해 정복하셨던 큰 대적이
었다. 타락의 결과, 육체적 사망은 이제 단지 가능성이 아
니라 필연성이 되었다.
어거스틴은 설명하기를, 아담과 이브에게 있어 육체적 사
망이란 그들이 마지막 숨을 헐떡일 때까지 완전히 연기된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들이 범죄한 그 순간에 육체적 사망이 시작되었다. 바로
그 순간부터 사망의 폐해들-노쇠, 육체적 쇠약, 그리고 질
병-이 인간의 삶을 따라다녔다.
아담의 범죄 이래로, 모든 아기들이 산고 속에서 태어나게
되었고, 출산의 고통과 신생아의 첫 번째 울음소리와 함께
사망의 과정이 시작되었다. 삶 전체가 바로 이러한 과정이
다. 생은 무덤을 향해 쉼 없이 나아가는데 이것이 바로 죄
의 정가표이다.
죄의 여덟 번째이자 마지막 결과는 “유전되는 죄책”이다. “
원죄”는 죄가 단지 하나의 행위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시조
로부터 우리 각자에게 유전되는 하나의 상태이기도 함을
의미한다. 죄는 우리의 인간 본성에 “거하는” 그 무엇이다.
이러한 상태 혹은 죄악 된 습성은 출산을 통해 세대를 거듭
하여 지속된다. 원죄는 출산의 자연적인 과정을 통해 직접
유전되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직접적이고도 즉각적으로
각 영혼을 새로이 창조하시는가? 어거스틴은 이 두 가지
입장(영혼 전이설과 영혼 창조설) 사이에서 오락가락한다.
왜냐하면 그는 성경이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하게 대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유의지와 믿음( R.C. 스프룰 )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죤.웨슬리 원글보기
메모 :
'교육자료 > 교회장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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