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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꼭 알아야 할 기독교 핵심진리 20

꼭 알아야 할 기독교 핵심진리 20

 

 

 

 

 

01 성경이란 무엇인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Ⅰ. 본과의 요점

 

 

 

성경론은 ‘기독교 핵심진리 20가지’에서 처음으로 가르칩니다. 성경론은 모든 교리의 처음, 서론에 둡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이 우선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모든 가르침이 성경을 기초로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러 형태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 : 예수님의 인격과 말씀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으로서 법령으로 수신자들에게 주셨던 말씀, 인간의 입술로 주셨던 말씀, 그리고 하나님은 기록으로 남겨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성경으로 있게 하셨습니다. 본 단원에서 배우고자 하는 초점은 성문화 된 형태의 말씀(성경)입니다.

 

 

 

Ⅱ. 성경의 4가지 특성

 

 

 

1. 성경의 권위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만큼의 신적인 권위가 있습니다. 성경을 믿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믿는 것과 동일합니다. 성경의 내용을 믿는 것은 곧 하나님을 믿는 것과 같고, 성경의 어느 부분을 불신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에 있는 말씀을 통해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그들이 읽고 있는 책이 결코 다른 책과 같지 않고, 그들의 가슴을 향해 말하는 참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이 있는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듣고,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10:27)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양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그들의 위대한 목자의 말씀을 들으며 그 말씀들을 진실로 그들의 주님이 주신 말씀으로 확신합니다. 성경은 그런 차원에서 신적인 권위가 있습니다. 그 확신이 있기를 바랍니다.

 

 

 

2. 성경의 명확성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씌어졌습니다. 성경을 성경학자들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가? 일반 성도들은 성경을 이해 할 수 없는가? 그런 질문과 관련이 있습니다. “주의 말씀을 열므로 우둔한 자에게 비추어 깨닫게 하나이다.”(시119:130) 하나님의 말씀은 이해가 잘 되고, 명확해서 건전한 이해력이 부족해도 말씀을 통해서 지혜롭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적으로라야 분별되기 때문에 성경의 정확한 이해는 어떤 사람의 지적인 능력의 결과라기보다는 영적인 상태의 결과인 경우가 많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자신의 모자람 때문에 성경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르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이 당신의 말씀인 진리를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3. 성경의 필요성

 

 

 

신자가 되고, 신자로 살고, 신자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성경에 분명하게 제시 되었습니다. 어떤 목적에서 성경이 필요한가, 성경 없이 하나님을 얼마나 알 수 있는가하는 질문과 관련이 있습니다. 성경의 필요성이란 우리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우리의 죄를 용서 받으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행하기를 원하시는지를 알기 위해서 성경을 읽거나 다른 이들에게 성경의 내용을 듣는 일이 꼭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롬10:17)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고 바울은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성경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사도는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은 성경으로 시작하고, 성경을 통해서 삶이 풍성해집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신체적인 생명이 물리적인 음식 속에 있는 양분으로 매일 유지되듯이 영적인 생명도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는 양분으로 매일 유지 됩니다. 규칙적인 성경 읽기를 소홀히 하면 영혼의 건강에 해롭습니다. 또한 깨달은 말씀과 들은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그의 계명들”을 지킴으로써 입증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은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하나님은 일반적으로도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롬1:19)고 했습니다. 악한 이들도 하나님에 대해 알 뿐만 아니라 자기 마음과 양심 속에 하나님의 도덕법에 대해 어렴풋한 이해가 있습니다.(롬1:32) 하나님의 존재, 성품, 도덕법에 대한 이런 일반계시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습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일반계시라고 합니다. 그러나 일반계시는 하나님의 영적인 사역을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심어 주신 내적인 의식을 통해 비로소 바르게 볼 수 있습니다. 그와 달리 특별계시는 하나님이 특정한 사람에게 주시는 계시입니다. 성경 전체는 특별계시며, 그러므로 성경의 역사적인 이야기에 기록되었듯이 하나님이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에게 직접 주신 메시지입니다.

 

 

 

4. 성경의 충분성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려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시 119:1) 성경에서 “모든 선한 일”에 필요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딤후 3:16-17) 성경이 충분하다는 말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신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기에 성경의 가르침으로 충분한지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충분성에 힘입어서 어떤 문제에 대해 생각하거나 어떤 상황에서 행동 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를 발견할 수 있도록 성경을 뒤져야 합니다. 성경이 우리가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문제를 직접적으로 답변해 주지는 않겠지만<“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신 29:29)> “모든 선한 일”(딤후 3:17)에 필요한 지침들은 우리에게 제공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매일 매일의 특정한 상황에 따라 특정하게 우리를 인도하실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우리에게 어떤 현대적인 계시나 지시 또는 하나님에게서 나왔다고 믿어지는 다른 형태의 인도를 성경과 동등하게 여길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문. 성경을 우리 믿음의 기초로 삼는다는 일이 왜 중요합니까?

 

2문. 성경은 우리가 제기하는 모든 문제에 결정적인 답을 줄까요?

 

3문. 성경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는 문제는 무엇입니까?

 

 

 

 

 

02 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하나님 자신에 대한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곧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만났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것이고,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했다는 말입니다. 모든 은혜는 하나님의 성품과 관련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함께 나누겠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인류의 오랜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밝혀준 내용은 이것입니다. 1)모든 인간에게 내적의식(신 의식)이 있음으로 앎(롬 1:19) 2)하나님께서 직접 말씀으로 창조하신 만물에 두신 흔적이 있음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증거 함. 3)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내적의식’이나 ‘만물에 창조하신 하나님의 성품의 흔적’으로는 구원에 이를 만한 지식으로 충분하지 않아 특별한 계시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리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하나님을 아는 완전한 지식이 아니라, 참다운 지식을 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알게 되느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또는 특별한 이들에게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모두 아는 완전한 지식을 알 수는 없어도 참된 지식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 지식은 성경에 집약되어 있고, 그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하나님의 성품에는 비공유적 성품인 자존성, 불변성, 완전성, 영원성, 전지성, 전능성이 있고, 공유적(도덕적) 성품으로는 거룩하심, 의로우심, 진실하심, 선하심, 사랑이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자로서(사 43:7),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감으로써 하나님을 닮게 됩니다. 하나님을 닮아 갈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함께 생각하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신 분이십니다.(하나님의 자존성 시 115:3, 출 3;14) 하나님은 어떤 존재에도 의존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모든 만물은 다 하나님께 의존하여 존재합니다. 물론 사람은 하나님을 의존하여서만 참된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존재의 의미는 상실됩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참된 인간으로서 존재의 의미는 없는 것입니다.(26-27)

 

 

 

둘째, 하나님은 영원히 변치 않으십니다.(하나님의 불변성 약1:17, 히 6:17) 하나님의 불변하심은 하나님의 존재, 성품, 목적, 약속에 있어서 변치 않으신다는 의미입니다. “나 여호와는 변역치 아니하나니”(말 3:6)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십니다.(시 33:11) 약속에 있어서 변하지 않으십니다.(민 23:19)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인격성을 이해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자이시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 대하여 인격적인 감정을 나타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현재적 태도나 현재적 의도를 실제적으로 표현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 성품, 목적, 약속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불변성은 상황에 따라서 달리 행동하시거나 느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행하시고, 감정을 느끼십니다.(27-28p)

 

 

 

셋째,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영원성 느 9:5, 벧후 1:11) 시간에 제약을 받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시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시간 세계를 초월하기도 하시고, 시간 세계에도 오셔서 자신을 나타내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셔서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벧 3:8) 같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역사 전체를 영원히 생생하게 보십니다.(29p)

 

 

 

넷째,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하나님의 편재성 신 10:14, 렘 23:23-24) 하나님은 공간 세계에 제한받지 않으십니다.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아십니다. 장소적으로 모든 곳에 계십니다. 즉 어떤 존재도 하나님의 눈길을 떠날 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시 139:7-10) 하나님은 때때로 하나님의 임재를 특별하게 나타내신 장소와 때가 있으십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만물을 붙들고 운행하시기 위하여 어디에나 계시므로 어떤 존재도 하나님의 눈길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십니다.(히 1:3)

 

 

 

다섯째, 하나님은 영이십니다.(요 4;24) 그래서 공간에 제한을 받지 않으시고, 어떤 신체적인 감각으로 인식할 수 없습니다. 우주의 어떤 실체로 생각할 수 없고, 어떤 실체로 하나님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에게 하나님의 영적인 본성(하나님의 형상)과 닮은 것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 할 수 있도록 영혼을 선물로 두셨습니다.(고전 6:17)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온 세상을 붙들고 계십니다.(창 1:2 “운행하시더라.” 의미 : 새가 날개로 새끼를 품음과 같이) 또한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께서는 우리를 양자 삼으신 것을 증거 하십니다.(롬 8:16)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보이지 않습니다.(요 1:18) 보이는 것으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체적인 본질을 아무도 볼 수 없지만 계시로 나타내 주십니다.(다양한 방식과 그리스도)

 

 

 

여섯째,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하나님의 전지성 대상 28:9, 요 2:25) 하나님은 단번에 영원히 하나님 자신과 실재하는 모든 것, 실재 할 수 있는 모든 것, 일어나는 모든 것과 일어날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히 4:13) 그래서 모든 존재의 목적을 향하여 이끄십니다. 그런 능력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변하지도, 늘어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나님을 놀라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성품 중에서 사람이 가질 수 없는 비공유적 성품에 대하여 생각하였습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문. 나님이 우리와 가장 분명하게 공유하시는 속성들은 무엇입니까?

 

2문. 하나님의 어느 한 속성이 다른 모든 속성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에는 어떤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을지 말해 봅시다.

 

3문. 여러분은 하나님의 어떤 속성이 가장 매력적으로 보입니까? 그런 속성을 통해 여러분이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무엇입니까?

 

 

 

 

 

02 ②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의 성품 중에 공유적(도덕적) 성품으로 거룩하심, 의로우심, 진실하심, 선하심, 사랑이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어(사 43:7)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감으로써 하나님을 닮아갈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을 생각하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지혜로우십니다.(하나님의 지혜로우심 롬 16:27, 욥 9:4)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지혜로우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최선의 목표와 최선의 수단을 택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창조와 섭리에 나타납니다. 지혜로 만물을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지혜로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룹니다.(롬 8:28)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혜를 주기도 하십니다.(약 1:5)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전부 공유하지는 못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롬 11:33)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호와를 의뢰”해야 합니다. 우리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잠 3:5)

 

 

 

둘째, 하나님은 선(히, 토브)하십니다.(하나님의 선하심 눅 18:19)

 

 

 

하나님은 모든 선의 최종적 기준이 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와 행하심은 전적으로 선하십니다. 선은 하나님의 성품과 그 성품에 합치되는 것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신 것입니다.(창 1장) 하나님의 선하심은 하나님이 참 하나님 되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선은 모든 선의 기준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선의 원천이십니다. 그래서 모든 선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심지어 징계조차도 하나님의 선하심이요, 하나님의 사랑도 선하십니다.(히 12:10) 하나님의 선하심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인간이 비참함과 낙심에 빠져 있을 때에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선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형벌 인생에게 내려주신 하나님의 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에게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갈 6:10) (35p)

 

 

 

셋째,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하나님의 사랑하심 요일 4:8, 요일 4:10)

 

 

 

하나님의 사랑을 구약의 인자하심(핫세드), 신약에서는 신적인 사랑(아가페)으로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당신의 자녀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인간의 에로스라는 사랑은 사랑의 대상을 소유하는데에 이르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적인 사랑, 아가페는 사랑의 대상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는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7-39)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우리는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해야 합니다.(요일 3:18) (36p)

 

 

 

넷째,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하나님의 거룩하심 시 99:9, 레 19:2)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지체로서 거룩하게 빚어지는 과정에 있습니다.(엡5:26-27) 점점 속된 것으로부터 하나님을 닮아 구별되어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거룩하심의 발산입니다. (37p)

 

 

 

다섯째,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 신 32:4, 롬 3:25-26)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신 32:4) 하나님은 무엇을 행하시든지 옳은 것에 부합하게 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옳은 것으로 기준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행하려 할 때에 하나님의 도덕적인 성품에 부합되는 일을 행하려 애써야 합니다. 그와 같은 일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심을 두 방향으로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는 심판을 통하여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에 대하여 벌하시고, 또 하나는 죄에 대하여 용서하시는 사랑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면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어떻게 용서로 공의를 나타내시는가? 그런 의문이 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대신 형벌을 내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들의 죄에 대하여 대신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누구를 택하시고, 누구를 유기하셨는지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롬 3:25-26) 결국 하나님은 모든 것을 바로 잡아 정의를 실현하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정의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의 파편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의(체다카: 옳음)와 공평(미쉬파트: 옳은 판결)을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잠 21:3) (38p)

 

 

 

여섯째,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출 20:5, 사 48:11)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독점적 사랑을 요구하시고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영광을 보존하십니다. 그 때에 질투로 나타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은 고유하기 때문입니다.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8:11) 그래서 “신앙은 삶의 열매로 알 수 있지만, 그 열매들은 다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매들인지 살펴봐야 알 것입니다.”(존 칼빈) 세상에는 아름다워 보이는 열매가 있지만 대부분 자기 영광을 위한 것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열매를 오히려 질투하십니다. 불신자의 선행도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39p)

 

 

 

함께 생각해 봅시다.

 

 

 

1문. 하나님이 우리와 가장 분명하게 공유하시는 속성들은 무엇입니까?

 

 

 

(참고)

 

 

 

여러분이 매일의 삶에서 더 많이 닮고 싶은 하나님의 속성은 무엇이고, 그 이유는 무엇인지 말해 봅시다. ‘하나님의 의로우심’ 하나님께서 우리와 공유하시는 성품은 거룩함, 의로움, 진실함, 선하심, 사랑입니다. 그 중에서도 닮고 싶은 하나님의 성품이 의로우심”이라고 할 때에 의로움(체다크)은 공의(미쉬파트)와 같은 어군에 속하고, 결국 하나님의 한 속성에 속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옳은 행위만 하시고 하나님께서 옳음의 기준이 되십니다. 그래서 “여호와는 의를 말하고 정직을 고한다.”(사45:19)고 하셨습니다. <공의:미쉬파트>는 특별히 공적인 재판에서 옳은 판결을 내리는 행위를 배경으로 합니다. <하나님의 칭의>를 생각하자면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옳음의 기준을 가지시고 옳다고(의롭다) 판결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칭의>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에 대한 대가(삯)를 대신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유일하게 옳음의 기준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칭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가 <옳은 판단>을 할 때, 우리가 무엇을 판단해야 할 때에 믿음의 분별력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옳은 판단들은 ‘의’에 대한 갈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배경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마5:6)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갈망하는 믿음이 생명력 있는 신앙의 척도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 신실하심(faithfulness)은 진실하심과 동의어입니다. 참되신 하나님이시며, 그의 지식과 말씀이 참되셔서 진리의 최종 기준이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관련되어 <렘10:10-11>의 말씀이 계시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약속하신 대로 행하시기 때문에 말씀을 믿는 것은 곧 하나님의 그 성품을 믿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신자는 고난의 기간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지 못하도록 유혹을 강하게 받습니다. 고난에서 요구되는 믿음은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그래야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고난 중에서 특히 요구됩니다. 결국 인내하는 삶에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있기 때문에 참다운 인내가 뒤따르게 됩니다. 정확하게 고난 속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인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성품>을 신뢰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성품 중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 인내하고, 오래 참는 것은 그런 배경 안에 있습니다.

 

 

 

 

 

03 삼위일체란 무엇인가?

 

 

 

아버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님 세 이름은 단순히 한 분에 대한 세 가지 별칭이 아닙니다. 서로 구별되는 세 분의 이름입니다. 세 분(위persons)으로 영원히 존재하시지만 하나님은 오직 하나(only one)이십니다. 이를 가르침을 ‘삼위일체 교리’라고 합니다. “세 분(three persons)이 오직 한 하나님(only one God)”이시라는 개념은 인간의 이해로 어려운 신비에 속한 부분입니다. 하지만 이 개념은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진리입니다.

 

 

 

Ⅰ. 삼위일체의 교리에 대한 성경의 관점

 

 

 

이 단어는 성경에 없지만 이 단어의 개념은 성경에 여러 곳에 나타납니다. 예를 찾아보면, 창 1:16에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언급하신 것은 하나님이 한 분(한 위one persons) 이상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6-17) 이때에 삼위일체의 세 분(three persons of the Trinity)은 각각 다른 활동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 하실 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셨습니다. 이때에도 세 분은 각각의 인격성(personhood)이 있으셔서 서로 구별되셨습니다. 사도들의 글에서도 밝혔습니다. 고후13:13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유다서 1:20-21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Ⅱ. 삼위일체의 의미

 

 

 

1. “삼위(three persons) 하나님”이라는 의미

 

 

 

하나님은 구별되는 세 분(three distinct persons)으로 존재하시므로 “성부는 성자와 성령이 아니시고, 성자는 성부와 성령이 아니시며, 성령은 성부도 성자도 아니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각각 인격적인 분으로 모두 완전한 하나님입니다. (1)성부 하나님이 그러하시고(창 1:1), (2)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오신 성자 하나님도 완전한 하나님입니다. 골2:9에서 “그(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고 했습니다. 요 20;28, 요20:31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라고 하였습니다. (3)성령 하나님도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도 하나님이시기에 마 28:19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에서 “성령을” 속인 것을 두고 하나님께 거짓말을 했다고 했습니다.(행 5:4)

 

 

 

2. “일체(only one)의 하나님”이라는 의미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은 셋(three)이 아니시고, 오직 하나(only one)라는 사실도 분명히 밝힙니다. 신 6:4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이사야 45:5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는 없느니라.”, 롬3:30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딤전2:5 “하나님은 하나이시요”

 

 

 

삼위일체는 우리가 부분적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직 하나(only one)이시면서 삼위일체의 각각 구별되는 인격(three distinct persons of the Trinity)이 각 완전한 하나님인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피조 세계에서 이와 비슷한 예를 찾으면 조금 도움이 될 것 같아도 결국 ‘하나님의 존재’를 피조물의 측면에서 설명하려고 하면 오류에 빠집니다. 어떤 것도 “하나님의 존재”와 정확하게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어떤 부분에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오묘한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신 29:29) “삼위일체 교리”의 신비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매우 중대한 교리입니다. 만약에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면 곧 예수님이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성부 하나님과 구별이 되지 않으신다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모든 진노를 십자가에서 받으신 것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하심은 즉각 부정됩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을 부정하면 곧 우리의 믿음은 다 어리석은 일입니다.(고전 15:19)

 

 

 

Ⅲ. 삼위 하나님의 서로 다른 역할

 

 

 

1. 창조역사의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때에 성자 하나님은 그 하나님의 말씀은 실행했다고 했습니다. 요1:3에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창1:2에서 하나님의 신(성령)은 “수면에 운행”했다고 하셨습니다. 즉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를 유지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2. 삼위일체 하나님은 구원역사의 때

 

 

 

성부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 주셨다고 했고, 예수님의 역할은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6:38-39에서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창조와 구속의 역사에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각각 서로 다른 역할을 분명하게 담당 하셨습니다. 성부와 성자 성령께서는 각각 신성을 지니시고, 자기 역할을 계속하셨습니다. 이는 삼위 하나님간의 영원한 관계의 결과입니다. 이런 삼위 하나님의 차이점은 이처럼 삼위 사이의 관계방식, 피조물에 대한 관계방식의 차이점입니다. 이는 각 사람이 서로 완전히 다른 존재인 우리와는 매우 다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서로 나뉘지 않으시고, 동시에 구별되는 세 분(three distinct persons)의 관계로 나타내셨습니다.

 

 

 

삼위일체 안에서 “통일성과 다양성의 조화”는 우리 생활에서 경험하는 모든 “다양성과 통일성의 조화”에 놀라운 기초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미 성경에서 예를 들었습니다. “결혼 생활”과 “교회의 특성”에서 예를 들어서 나타내셨습니다. 엡5:31에서 두 사람이 “한 몸”이라고 했고, 교회도 많은 지체들의 모임인데 “한 몸”이라고 했습니다.(고전12:12)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통일성과 다양성”을 함께 허락하시고 그 조화를 이뤄가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피조세계의 다양성과 통일성은 삼위일체 안에서 비춘 빛들입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문. 삼위일체에 대하여 가르쳐 주는 핵심적인 성경 구절을 서너 가지 정도 열거해 보시면...?

 

2문. 어떤 유사한 예로도 삼위일체를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문. 성부 성자 성령님이 서로 관계를 형성하시는 방식은? 우리가 서로와 관계를 형성하는 방식에 대한 모델은?(삼위일체 하나님의 다양성과 통일성의 조화)

 

 

 

 

 

04 우주란 무엇인가?

 

 

 

본과에서는 ‘하나님에 관해 아는 지식’ 중에서 하나님께서 사역하신 가운데 창조사역과 섭리사역에 관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떻게, 왜 우주를 창조하셨는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는 어떤 우주이며, 우리는 오늘날 창조된 이 우주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Ⅰ. 어떻게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는가?

 

 

 

1. 창조된 우주

 

 

 

천지 또는 만물이라고 하는 이 우주는 창조되기 전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1:3) “만물은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골1:16) 삼위 하나님께서 이 창조의 전 과정에 관여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없는 중에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창1:3-25) 무(無)에서 창조하셨다는 말씀은 하나님만 영원하시다는 의미요, 하나님만 우주의 주관자시라는 의미요, 온 우주 가운데 하나님만 경배의 대상이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2. 우주 가운데 인간창조

 

 

 

남자와 여자는 모두 하나님의 손으로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숨결로 생명을 받았습니다.(창 2:7,22) 이것은 하나님의 친밀하고 특별한 창조요, 하나님이 온 우주 안에서 인간에게 주시려는 ‘특별한 지위의 한 징표’입니다. 더구나 인간은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신 유일한 존재입니다.(창 1:27)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과 ‘하나님을 대표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우주의 정점(頂點)에 두셔서 다른 모든 피조물보다도 하나님을 더 닮아 있으며, 하나님을 대표하는 존재로서 천지만물을 다스리도록 세우신 유일한 존재입니다.(창1:28-31) 인간의 존귀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 인간의 타락이 얼마나 불합리합니까!

 

 

 

 

 

3. 창조와 과학

 

 

 

성경적인 창조론에 과학이론이 충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단지 이론에 불과한 어느 과학 이론에서는 모든 생물은 하나님의 지적인 계획과 무관하게 오랜 세월동안 무작위적인 돌연변이의 결과로 생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창조자로 보지 않는 이런 과학이론은 인간의 존재의 존엄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합니다.(천동설/지동설)

 

 

 

성경에서 명백하게 밝혀주지 않는 문제에 대하여 말할 때에 신중해야 합니다. 자연계를 관찰한 결과가 성경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모순되어 보일 때는 양자 모두 재검토하여 우리의 제한된 이해력과 불완전한 지식이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찾으려고 힘써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과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면 아무 모순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충족적인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필요성을 갖지 않으시지만, 사랑으로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가운데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인 우리를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창조하신 존재임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깨닫게 되고, 동시에 피조물로서 우리는 더욱 하나님 앞에서 겸비해야 합니다.

 

 

 

Ⅱ.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는 어떤 우주인가?

 

 

 

하나님과 구별되고, 하나님께 의존하는 우주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고 우주는 그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우주는 상호간에 구별이 되십니다.(불연속성=초월성) 하나님은 결코 우주의 일부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유물론, 범신론 배격) 하나님은 우주를 지으셨고, 그 우주를 다스리시는 분입니다.(창조와 섭리) 하나님은 우주와 독립적으로 존재하십니다. 또한 자충족(自充足)적인 분으로 스스로 완전한 존재이십니다. 그래서 우주가 필요할 만큼 부족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주에 밀접하게 관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숨결로 하나님 자신의 형상에 생명을 주셨습니다. “생물들의 혼과 인생들의 영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욥12:10)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기 때문입니다.(행17:25, 28) 이처럼 하나님은 우주에 의존하지 않으시며, 우주는 하나님께 의존하여 존재합니다. 하나님은 우주보다 크시며, 우주는 스스로 존재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는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삶과 수고에 밀접하게 관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란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십니다.(시46:1) <그러므로 우리는 ‘이원론’과 ‘이신론’을 배격합니다.>

 

 

 

Ⅲ. 우리는 오늘날 이 창조된 우주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1.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주

 

 

 

우주 전체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지음을 받았습니다.(시19:1) 우리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시43:7) 하나님이 지으신 천지만물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로 창조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다.”(렘10:12)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주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창조세계에 드러내셨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모든 영광이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영원히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주의 영광을 더 받으실 필요(결핍)가 없으셨습니다. 창조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유로운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자신의 기뻐하실 일을 위해 우주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2. 선한 우주

 

 

 

우주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므로 하나님은 그 지으신 우주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만물을 보시니 “심히 좋으셨습니다.” 인간의 타락이 있은 후 비록 우주가 죄 때문에 제 기능을 다하지는 못하지만 자연세계는 선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딤전4:4)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창조하신 선한 것들을 기뻐해야 합니다. 비록 피조물 중에 어떤 것은 악한 목적에 이용될 수도 있지만, 그런 잠재적으로 해로운 용도 때문에 그 피조물 자체가 모든 상황에서 악하게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를 위하여 이 땅을 활용해야 합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문.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어떤 면에서 우리를 겸손하게 합니까? 또 어떤 면에서 우리에게 존엄성을 부여합니까?

 

 

 

2문. 이 땅과 동물들과 여러분 자신이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방법을 말해 봅시다.

 

 

 

3문.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지으신 천지만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에는 천지만물을 보시는 하나님의 관점이 어떻게 변했습니까?

 

 

 

 

 

05 기도란 무엇인가?

 

 

 

본과는 하나님의 섭리사역 부분에 속한 내용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와 여러 가지로 관계를 맺으십니다. 우주는 하나님께 의존하는 존재입니다. 그 우주의 정점에 있는 인간이 우리 하나님을 가장 바르게 의존하는 것은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지속적인 하나님의 통치로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은 흔치 않은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어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의존하는 행위이며,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입니다. 기도에는 중보(탄원과 도고)기도, 죄의 고백, 찬양과 감사가 있습니다.

 

 

 

Ⅰ. 기도가 필요한 이유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할 것을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마6:8) 기도는 더욱더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 신뢰,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응답 하시리라는 신뢰를 표현한 것입니다. 아이가 아버지에게 자신의 필요한 것을 주실 줄 믿고 기대하듯이 우리도 믿음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실 것으로 기대해야 합니다.(눅 11:9-12) 그래서 주님도 “너희가 기도 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 21:22)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하여 우리에게서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하나님과의 관계도 깊어지고, 점점 자라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진실하게 기도할 때 하나님의 모든 성품과 관계된 우리의 전인격으로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품고, 생각한 것을 기도를 통하여 표출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과 이해를 심화시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관계를 돈독하게 합니다. 기도는 영원한 중요성을 지닌 활동에 관계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뤄짐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Ⅱ. 기도의 효력(응답)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구할 때, 그 기도에 자주 응답하십니다. (눅11:9-10) 우리가 받지 못함은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일 때가 많습니다.(약4:2)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자신의 행동방식을 바꾸면서까지 반응하십니다. 성경은 그런 많은 사례를 제시합니다. 이스라엘을 멸하시려다가 모세의 기도에 응답해서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출32:12) 응답하셨습니다.(출32:14) 개인적으로도 그러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이 두 가지는 오로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면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행하셨기에 우리에게 기도를 독려하시고 용기를 줍니다.

 

 

 

Ⅲ. 기도할 자격과 기도할 때의 자세

 

 

 

우리에게는 구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의 기도에 효력을 나타내십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거부한 이들에게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요16:23) 매번 기도할 때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권위를 바탕으로 예수님의 성품에 부합되게 드려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의 뜻대로 무엇이든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5:13-14)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뿐만 아니라 “그에게 구한 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5:15)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이런 효력 있는 기도를 하려면 “그의 뜻대로” 기도해야 합니다.(요일5:14)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일은 우리 편에서 겸손을 요구하는 일일 경우가 많습니다. 단순히 우리가 바라는 것을 기도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Ⅳ. 하나님의 뜻을 나타낸 것을 구할 때와 명확하지 않을 때

 

 

 

그런 때에는 하나님의 바라시는 것을 우리가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명백히 알고 구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에서 알고 있을 때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기도 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으라.”고 권면합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그런 때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역사하시도록 구하고 우리가 이해하는바 최선을 다하여 간구를 드리되 성경의 일반적인 원칙에 맞게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은 자신의 뜻에 부합한 때에만 응답하신다는 것을 알고 겸허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더디 응답하심으로 우리가 기도 중에 더욱 우리의 이해가 깊어지도록 하여 우리의 마음을 감화하십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어려운 때에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것보다는 침묵하시는 것이 더욱 낫다는 것을 깨닫고 우리는 거기에 만족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에 이미 받았다고 믿고 구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어떤 확신을 갖고 밀어붙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믿음)입니다. 즉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는 믿음”입니다.(히11:6)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은 모두 기도의 장애물입니다.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하시며 의인의 기도”를 들으십니다.(잠15:29)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 하는 자들을 향하십니다.”(벧전3:12) 그러나 죄에서 자유로운 완전한 사람에게만 응답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의 선물을 활용하여 용서를 구하라고 촉구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 죄를 고백하면 그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 매일 매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그 죄로 인하여 우리를 벌하시지 않으십니다.(요일1:9) 그리스도가 죄의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해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용서만 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난 자”(시19:12)로 선언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겸손의 문제입니다. 기도에 대한 응답이 없을 때에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한 사람일 뿐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도 기도에 응답을 받지 않으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응답이 없을 때에는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서 승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바울도 응답받지 못한 때가 있었습니다. 세 번이나 구했지만 응답하지 않으시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 12:8-9)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응답 받지 못한 기도도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롬 8:28) 하나님은 오늘날도 여전히 우리에게 약속하십니다.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 13:50) 그러므로 상황에 관계없이 우리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네게 어찌 하리요.”(히 13:60 )

 

 

 

함께 생각해 봅시다.

 

 

 

1문. 하나님은 왜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은 최근에 기도의 유익을 어떻게 경험했습니까? 감사의 기도를 바랍니다.

 

 

 

2문. 우리가 기도로 간구한 것을 하나님은 꼭 우리에게 주셔야 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자기의 의견을 말해보십시오.

 

 

 

3문. 여러분의 기도에 방해가 될 만한 것이 지금 여러분의 삶 속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십시오.

 

 

 

 

 

06 천사, 사탄, 귀신이란 무엇인가?

 

 

 

지금까지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를 논의할 때에 논의의 범위를 물질세계에 한정했습니다. 하지만 천사와 귀신이라고 불리는 영물(영적인 피조물)도 분명 존재합니다. 천사들이란 도덕적 판단력과 지성을 가졌으나 육체를 지니지 않은 피조 된 영물들입니다. 그리고 귀신(또는 마귀)들이란 하나님께 범죄하고 이 세상에서 지속적으로 악을 행하는 악한 천사들입니다. 사탄은 바로 그 귀신(마귀)들의 우두머리입니다. 그래서 본과에서는 “천사들은 누구인지” “하나님은 그들을 왜 지으셨는지” “오늘날 우리가 사단에 관하여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Ⅰ. 천사들 (도덕적인 피조물이며, 영으로 존재함)

 

 

 

천사는 도덕적인 판단력과 높은 지력이 있지만 육체가 없는 영적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또한 천사는 언제나 존재한 것은 아닙니다. 천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의 일부입니다. 에스라의 고백과 같이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host,하늘의 천군)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느9:6)라고 고백한 것처럼 천사는 “영물”이므로(히1:14) 육체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영은 살과 뼈가 없습니다.(눅24:39)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거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천사가 육신적인 형태를 취하고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는 한 천사들은 보통 우리 눈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범죄한 천사들”(벧후2:4)이 하늘에서 쫓겨난 것을 보면 천사들에게는 도덕적 판단력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천사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림으로써 그들도 지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지만 천사가 통상적인 활동을 할 때에는 대개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천사들의 세계(골1:16)도 창조하신 것입니다.

 

 

 

천사에게는 큰 능력이 있습니다.(시 103:20) 그렇지만 “하나님이 범죄 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처벌하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은 천사보다는 인간에게 더 큰 사랑을 보이십니다. 천사와는 대조적으로 아담과 하와가 범죄 했을 때는 비록 낙원에서 쫓겨났지만 지옥으로 던져지지는 않았습니다. 천사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계획을 순종적으로 수행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본이 됩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영화롭게 하므로 우리에게 본이 됩니다.(사 6:2-3)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 눈에는 안 보이지만 천사들이 늘 곁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천사들은 우리의 예배에 동참하거나 나그네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찾아올지도 모릅니다.(히13:2) 그렇다고 우리가 천사에게 기도하거나 천사를 숭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의 일부인 천사를 하나님 대하듯이 해서는 안 됩니다. 천사도 스스로 인간의 경배를 거부했습니다. “...삼가 그리하지 말고 다만 하나님께 경배하라”(계 19:10)

 

 

 

Ⅱ. 귀신들(또는 마귀: 하나님께 범죄하고 지속적으로 악을 행하는 악한 천사들)

 

 

 

귀신(마귀)들이란 하나님께 범죄하고 지금은 계속해서 세상에 악을 저지르는 악한 천사들을 말합니다. 귀신들은 하나님이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둔 천사들입니다.(벧후 2:4) 그들은 한 때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었던 피조물이었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의 일부였습니다.(창 1:31) 그들이 창조된 때와 사탄이 하와를 유혹하여 죄를 짓게 한 때 사이 어느 땐가 사단은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유 6) 악한 천사들입니다. 그들은 지옥에 던져졌습니다. 사탄은 귀신(마귀)들의 우두머리를 일컫는 이름입니다. 성경에 사단의 활동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증거를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대상21:1)고 했습니다. 또 예수님도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 사탄에게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사단아 물러가라”(마 4:10). 또 제자들의 보고를 들으시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눅 10:18) 성경은 사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름들도 사용합니다. “마귀”(마 4:1) “뱀”(창 3:1) “바알세불”(마 10:25) “이 세상 임금”(요 12:31)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 2:2) “악한 자”(마 13:19)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사단은 “처음부터 살인자요.” “거짓의 아비”입니다.(요 8:44)

 

 

 

사탄은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케 하기 전부터 죄를 지은 죄의 창시자입니다. 예수님이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시는 중대한 사명에 실패하게 하려고 사단은 그리스도를 죄로 유혹하려 안간힘을 썼습니다. 사탄과 귀신(마귀)들은 사람들을 혼미하게 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고후 4:4) 하려고 갖은 술책을 다 부릴 것입니다. 사탄과 귀신(마귀)들은 그리스도인의 증거와 유익을 훼방하려고 사람들을 유혹하며, 의심, 거짓말, 살인, 죄책감, 두려움, 혼돈, 질병, 질투, 교만, 비방 등 온갖 해롭고 파괴적인 술책을 다 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3)

 

 

 

하지만 사탄과 그 졸개들(마귀)은 능력도 제한적일 뿐입니다. 사단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로 하나님께 제한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귀신들을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습니다.(유 1:6) 우리는 그리스도의 권세로 사탄을 넉넉히 대적할 수 있습니다. 마귀(귀신)들은 우리의 생각을 알 수 없으나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일들은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근거로 마귀가 우리의 일상을 알 수는 있습니다. 우리의 어떤 일들을 도출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결심을 했는지,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마귀가 확실히 알지 못합니다.(단 2:27-28) 영물들(천사들이나 마귀들)이 미래에 관하여 무엇을 알 수 있다고 언급한 성경구절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Ⅲ. 깨어 있어야 할 신자들

 

 

 

사탄과 귀신들도 천사들처럼 오늘날 땅 위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악을 저지릅니다. 그러나 귀신들에게만 세상의 모든 악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의하면 모든 죄와 악이 사탄이나 귀신들 때문만이 아니라 각 사람들 자신의 행동 때문에 죄를 범하는 일이 발생합니다.(약 1: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근신하여 깨어 있어야하기 때문에 성경은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라고 권면합니다. 따라서 “저를 대적”하고(벧전 5:9)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엡 4:27) 사탄과 귀신들의 공격이 여러 형태와 다양한 수준으로 닥쳐 올 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히 2:14)의 권세를 무력화하셨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골 2:15) 그러므로 그들이 우리를 공격해 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확신하고 “우리의 싸우는 병기”인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을 사용해야 합니다.(고후 10:4)

 

 

 

우리는 귀신들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늘 귀신들이 우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우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롬 16:20에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합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복음의 기쁜 소식이 전파되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될 때는 또 하나의 영적 전투가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리스도가 오셔서 사탄과 귀신(마귀)들의 권세를 이 땅에서 완전히 제거 하실 것입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문. 천사와 우리가 닮은 점은 무엇입니까?(도덕적 피조물) 그리고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영적인 피조물)

 

 

 

2문. 오늘날 세상에서 천사들의 주된 역할은 무엇입니까? 성도를 돕는 일. 성경의 충분성과 완결성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천사의 나타남을 배제 하지는 못하지만, 천사의 나타남에 대하여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마귀들이 광명의 천사를 가장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고후 11:14)

 

 

 

3문. 성경에서 사탄에 대해 말하고 있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이런 내용들로 인해 여러분은 사탄을 어떻게 경계하게 됩니까? 또 이런 내용들은 여러분이 사탄에 대해 품고 있을지 모르는 두려움을 어떻게 없애 줍니까?

 

 

 

 

 

07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땅 위에 동식물들을 창조하신 다음에 창조의 절정을 이루는 피조물을 하나 더 창조하셨습니다.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7-28)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이유는 하나님께 무엇이 부족하시거나 필요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충족되신 분입니다. 누군가의 찬양이나 누군가의 영광이 필요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시기로 작정하셨고,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사 43:7)고 말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께 큰 영예와 찬양을 드린다는 뜻입니다.

 

 

 

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존재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은 우리의 삶의 목적이며, 우리가 살아 있는 이유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삶은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하게 얻게 되는 것도 이에 속한 일입니다.(요 10:10)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한 가지 방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 사실을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 16:11)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일에서 충만한 기쁨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할 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게 됩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우리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 하시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습 3:17)

 

 

 

Ⅱ.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

 

 

 

성경에서 우리 자신에 대해 증거 하는 내용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비길 데 없는 인간의 가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창 1:27) 지음 받은 유일한 피조물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는 하나님을 닮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더욱 이해할수록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더 많이 이해하게 됩니다. 반대로 우리 자신에 대해 이해할수록 하나님에 대해서도 더 많이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는 창조된 도덕적 피조물입니다. 단순히 육적인 피조물이 아니라 영적인 피조물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어느 정도 닮았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본성을 반영한 것이며,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련을 맺게 해 주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생각하고 정보를 처리하는 우리의 능력은 하나님의 지식을 반영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남들과 관계를 맺고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은 삼위 하나님 간의 완전한 교제를 반영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서로 내주하시며, 서로 교제하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Ⅲ.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될 하나님의 형상

 

 

 

우리는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부분적으로 뒤틀렸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은 타락 전처럼 분명하게 관찰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약 3:9)고 분명하게 밝히지만 그 형상은 죄로 더렵혀져 원래 의도된 모습을 다 보여 주지 못합니다. 죄는 우리의 도덕적 판단력을 왜곡시키고 우리의 생각을 흐려 놓으며, 타인과의 교제를 방해합니다. 복음은 그런 우리를 회복하게 하시는 길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당신의 자녀들을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인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롬 8:29) 구속하셨습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골 3:10)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있는 동안에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릅니다.(고후 3:18) 그리스도는 완벽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고후 4:4)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원래 의도된 하나님의 형상을 봅니다. 또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결국 원래 우리에게 의도된 바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도록 변화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 끝 날에 예수님을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닮게 될 것입니다.

 

 

 

Ⅳ.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피조물로서의 의무

 

 

 

또한 우리는 지상에서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통치영역에 당신의 형상으로 지은 우리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모든 통치영역을 나타내는 표입니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시 24:4)이라는 사실을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땅에 충만해질 때에 하나님의 통치영역을 표시하며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려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는 하나님 명령에 따라 이 땅을 누리며 다스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을 마음껏 누리고, 다스리고, 보호하는 것이 우리의 복이요 사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을 좀 더 발전시키고 기회를 선용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려드리게 됩니다. “만물을 새롭게”(계 21:5) 하시는 왕과 더불어 일할 기회를 얻은 우리의 “사명” 자체는 우리에게 더 없는 복입니다. 그러므로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소망을 갖습니다. 모든 사람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무한히 지혜롭고 오묘한 창조의 걸작 품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에서 돌이켜 창조주 하나님께로 향함으로써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골 1:15), 곧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세상에 대해서도 큰 희망과 관심을 갖습니다. 우리가 이런 거룩한 목표를 향해 기쁜 마음으로 노력할 때, 우리는 창조된 목적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회복되어야 할 일입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문. 우리는 왜 창조되었습니까? 우리가 창조된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방법의 구체적인 예는 무엇입니까?

 

 

 

2문.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 되었다는 말은 어떤 의미입니까? 여러분은 이 사실로 인해 여러분 자신을 보는 관점에 어떤 영향을 받습니까?

 

 

 

3문.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서 우리의 책임은 무엇입니까? 여러분과 여러분의 교회가 이 책임을 다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08 죄란 무엇인가?

 

 

 

죄는 모든 것을 파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래의 계획하신 세상에서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죄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합니다. 죄 때문에 모든 것이 원래 의도된 참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대부분 망가진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Ⅰ. 죄의 정체

 

 

 

죄란 행위, 태도, 본성 면에서 하나님의 도덕법에 따르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성경 전반에 걸쳐 여러 곳에서 도덕법을 제시하십니다. 그것이 곧 십계명(출 20:1-17)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도덕법에 어긋나는 태도에서도 발견됩니다. 죄는 우리의 본성, 즉 우리 자신의 본질을 이루는 내적 성품에서도 발견됩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거부하는 이들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 2:3)라고 말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선하시기에 하나님의 전 존재는 하나님의 도덕법과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덕법에 어긋나는 것은 무엇이든 하나님의 성품, 즉 하나님 자신과 어긋난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모든 것과 모순되기에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Ⅱ. 죄의 근원

 

 

 

죄는 하나님과 완전히 모순되므로 하나님은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비난하거나 죄의 책임이 하나님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모든 것이 공평하며 진실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신 32:4)하십니다. 하나님은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도록 정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도덕적인 피조물들이 자기의 뜻대로 죄를 짓기로 선택할 수 있도록 작정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는 신학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들입니다. 이 문제를 완전히 이해 할 수 있는 이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이것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의 능력 밖입니다. 신비한 부분이라는 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하기 전에는 죄가 사탄과 귀신들 속에 존재 했다가 이후에 인간의 결정을 통해 인간세계에 들어왔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 나무의 실과를 먹었을 때(창 3:6) 하나님의 계명을 직접적으로 어긴 것입니다. 그들이 자기 뜻대로 그렇게 했으며 자기 뜻대로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 결과 아담의 본성은 죄악으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본성적으로 저지른 일이며, 하나님과 하나님의 도덕법을 거역하는 본성을 물려받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렘 17:9)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라고 다윗이 고백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본질상 죄악 된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절망적인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죄를 짓기 쉬운 성향을 물려받았습니다. 아담이 범죄 한 이후부터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우리 자신 안에 선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에는 어쩔지 모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사 64:6) 우리의 전 존재가 죄의 영향을 받습니다. 우리의 지성, 감정, 의지, 욕구, 마음, 목표, 동기, 심지어 육체까지도 그러합니다. 모든 것이 부패와 파멸에 종속되었습니다.

 

 

 

우리는 아담의 죄악성만이 아니라 죄가 낳은 죄책도 물려받았습니다. 아담의 죄악은 자신만의 죄책이 아니라 우리 모든 인간의 죄책도 가져 왔습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고 했습니다.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에 하나님은 인류의 모든 사람이 죄를 지은 것으로 간주하셨습니다.(롬 5:19)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류를 유기적인 전체, 즉 인류의 머리인 아담으로 대표되는 한 몸으로 간주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우리 모든 신자들을 한 몸으로 간주하십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새로운 인류인 것입니다. 혹시 아담의 죄 때문에 우리가 죄인으로 간주 된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 가운데 있더라도 우리 모두의 태도나 행동에 있어서 하나님의 도덕법을 어겼음을 기꺼이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죄과가 있고,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잡을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에 대한 대답을 복음은 명확하게 제시합니다. 인류의 불순종을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바로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제시한 진리가 복음입니다. 우리의 죄도 그리스도의 무죄함으로 볏겨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Ⅲ. 죄의 영향

 

 

 

성경은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다.”(왕상 8:46)고 단언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3)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또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요일 1:8)이요.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그 형벌이 사망입니다.(창 2;17) 사망은 모든 죄의 형벌이기도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롬 6:23)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에 대하여 즉각 사망(지옥)의 형벌을 내리시지 않고,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망의 자리에서 자유를 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케 하셔서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셨습니다.(벧전 2:24) 예수님을 바라보아 구원을 얻는 사람들에게 “이제...결코 정죄함”(롬 8:1)이 없습니다.

 

 

 

Ⅳ. 신자가 범하는 죄에 대하여

 

 

 

따라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받은 신자는 죄를 짓게 되어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법적인 신분은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의 모든 죗값을 지불했으므로 우리는 여전히 용서받은 것입니다. 바울의 말처럼 과거, 현재, 미래의 어떤 죄든 용서받은 것입니다.(원론적인 용서의 은총) 죄는 하나님과 관계된 우리의 지위나 신분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교제에는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로 인하여 근심하시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죄를 범하면 “주께서 그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므로(히 12:6) 우리 삶 속에 하나님의 징계가 임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이런 징계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유익을 주시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히 12;10) 죄는 우리와 타인의 관계를 깨뜨리는 결과를 가져 옵니다. 죄악 된 말이나 행위들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파손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과 함께 거룩함과 화평함을 이루라고 하였습니다.(히 12:14)

 

 

 

그리스도인도 모두 죄를 짓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장기적으로도 하나님의 도덕법에서 갈수록 순종하는 방식으로 동참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요일 3:9) 즉 신자는 죄를 습관적으로 짓지 아니한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죄악 된 생활방식은 그가 그리스도인지 아닌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의 죄를 지을 때에 하나님께 자기 죄를 진지하고 신속하게 “자백”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일 1:9)

 

 

 

함께 생각해 봅시다.

 

 

 

1문) 죄란 무엇입니까? 죄는 우리의 삶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칩니까?

 

 

 

2문) 그리스도인들도 계속 죄를 지을까요? 그러하다면? 또는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를 말해 보십시오.

 

 

 

3문) 신앙생활에 있어서 죄의 부정적인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지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09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가?

 

 

 

이 과에서 우리는 “예수님은 어떻게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어떻게 완전한 인간이 되시는가?”의 주제를 함께 생각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은 물리적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은 한 인격, 즉 과거와 미래를 막론하고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어떤 다른 사람과도 다르게 한 인격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전(성육신 하신 때)에도 앞으로도 영원히 한 인격 안에서 완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한 인간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인성,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모든 점에서 완전한 인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머니의 태에서 성령의 기적적인 역사로 잉태되었습니다.(마 1:18) 예수님이 평범한 인간으로서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나신 것은 예수님의 인성을 확인시켜 줍니다. 우리가 인간의 몸을 가지고 태어났듯이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린 시절에 예수님은 “자라며 강하여지시고”(눅 2:40) 점점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워 가셨던 것입니다.(눅 2:52)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은 몸을 가지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더 이상 약함이나 질병이나 죽음에 매이지 않는 물리적인 “인간의 몸”을 입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당신의 몸을 만져보라고 확인시켜 주셨습니다.(눅 24:39) 예수님은 하늘에서도 여전히 인간과 같은 몸으로서 부활하신 부활체로 계십니다. 예수님의 “지성”도 우리와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여느 아이들처럼 배우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지혜가 자라갔다고 말합니다.(눅 2:52) 또한 예수님은 모든 “감성”을 다 느끼셨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기이히” 여기셨고,(마 8:10) 친구 나사로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셨으며,(요 11:35) “심한 통곡과 눈물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히 5:7) 우리와 동일한 감성을 가지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와 모든 면에서 같으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생애 끝자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요 15:10)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라고 했습니다.(고후 5:21) 요한은 또 “그에게는 죄가 없으시니라.”(요일 3:5)고 말합니다. 분명 예수님은 “모든 일에 우리와 한 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신” 분입니다.(히 4:15)

 

 

 

인성을 입고 성육신하신 이유

 

 

 

왜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까?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완벽하게 순종하는 우리의 대표자 역할을 하시기 위해 완전한 인간이 되셔야 했습니다. 인간으로서 우리를 대표한 완전한 순종을 대신 하셨던 것입니다. 불순종한 아담과 대조를 이룹니다.(롬 5:19)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이 되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순종하심으로 우리에게 의미가 있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사시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인성을 가지시고, 동시에 신성을 가지고 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 역할을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딤전 2:5)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히 2:18)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신성, 완전한 하나님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에 성령의 기적적인 역사를 통해서 잉태되셨습니다.(마 1:18)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초자연적인 역사였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로 말미암아 어떤 사람에게도 일어날 수 없는 신성과 인성의 결합이 일어난 것입니다. 제3장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신성의 전체를 논의할 때 살펴보았듯이 성경은 예수님이 완전한 하나님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예수님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골 2:9)고 증거 합니다. 구약에서 “여호와”라는 단어가 신약에서는 “주”라고 불렸습니다.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눅 2:11) 그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주”라고 칭하여 하나님이 오신 것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에게 있어서 존재의 영원하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느니라.”(요 8:58) “나는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 22:13)고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히1:6)라고 성부 하나님께서 하신 이유도 예수님의 신성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골 1:19)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완전한 하나님이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온 세상의 죄를 충분히 감당하지는 못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감당하지 않으셨다면 결국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셨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동시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은 예수님 한 분 안에서 영원히 갈라놓을 수 없이 연합되어 있으면서도, 영원히 구별되며 각각의 특성을 유지하십니다. 영원히 인성을 입으시고 영원히 완전한 신성을 동시에 입으신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의 영원하고 완전한 결합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커다란 기적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그리스도의 “존재적 연합”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한 존재 안에 무한과 유한을 영원히 결합하심으로써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이 모든 역사는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일이였습니다. 무한하고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인간이 되어서 자신을 인성과 영원히 결합하신 것입니다. 제한된 인간과 한 위격을 이루셨다는 이 사실은 영원토록 가장 심오한 기적인 것입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문.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은 여러분에게 어떤 면에서 위로가 됩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완전히 감당하신 것입니다. 영원힌 우리의 죄를 감당하신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하여 위로가 됩니다.

 

 

 

2문.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십니다. 이 사실은 여러분에게 어떤 면에서 위로가 됩니까? 육체를 입으시고 완전한 순종과 죽음으로 우리를 대신 하신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를 체휼하신 분이십니다.

 

 

 

3문. 예수님께서 영원과 유한의 결합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위대한 역사를 이루심으로서 창조의 영광보다 더욱 영광되게 하신 주님께 감사합시다.

 

 

 

 

 

10 속죄란 무엇인가?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전에 천사가 요셉과 마리아에게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어주었습니다.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로 알려 주었습니다.(마 1:21) 그 천사의 말대로 예수님은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삶과 죽음을 통해 이루신 일을 우리는 ‘속죄(贖罪)’라고 합니다.

 

 

 

Ⅰ. 속죄의 원인

 

 

 

하나님의 공의는 예수님을 ‘화목제물’,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롭게 바라보실 수 있도록 “하나님의 진노”를 충분히 감당해낼 제물로 삼으셨습니다. 롬 3:25에서 확증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제물로 삼으신 것입니다.(롬 3:26) 하나님이 의롭게 되시려면 하나님이 오랫동안 간과하신 죄, 즉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기 전에 형벌을 내리지 않으신(구약 시대의) 그 죄를 어떤 식으로든 처벌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죄들에 대하여 누군가는 처벌을 받아야 했는데, 그 “누군가”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으심에서 우리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게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Ⅱ. 속죄의 필요성

 

 

 

하나님은 그 사랑으로 사람들 가운데서 일부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한 번 하나님이 그렇게 작정하시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공의로 인해 이 땅에서 그처럼 죽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주님이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 24:26)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우리 대신 죽는 길 외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다른 길이 없음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셔야 했습니다. 구약시대의 희생제사는 영원한 효력이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히 9:12) “자기를 단번에 제사의 제물로 드려”(히 9:26) 죄를 없애셨던 것입니다.

 

 

 

Ⅲ. 속죄의 본질

 

 

 

그리스도가 자기를 희생 제물로 드려 우리의 죄를 없애는 일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완벽한 순종의 삶을 드려서 그 순종의 “적극적 공로”가 우리의 것으로 간주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한 사람이 순종함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는 바울의 말은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의(義)’에 의지하지 않고 대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義)”에 의지하는 것입니다.(빌 3:9)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는 죄 없는 자신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의로움”이 되셨습니다.(고전 1:30)

 

 

 

예수님은 고난의 삶을 사셨습니다.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였습니다.(사 53:3) 심지어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단의 유혹과 공격을 받으셨습니다.(마 4:1-11) 예수님은 “죄인들의 반역”(히 12:3)을 참으셨습니다. 또한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그 죽음을 매우 슬퍼하셨습니다.(요 11:35) 예수님은 이런 고난과 순종을 통하여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히 5:8-9)

 

 

 

Ⅳ. 고난의 절정, 십자가

 

 

 

주님에게 죽음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고난도 커졌습니다. “심히 고민이 되어 죽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마 26:38) 예수님은 자신이 고통을 경험하고 있는 것을 친히 제자들에 내비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가장 끔찍한 형태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겪으신 고통은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몸무게로 인하여 질식됨으로 서서히 죽어가셨습니다. 온 몸은 짝 펴져서 십자가에 못으로 고정되었습니다. 양 팔은 몸의 전 무게를 지탱했습니다. 몸은 사방으로 잡아당기는 형태로 달리셨기 때문에 숨을 쉬기 어려웠습니다. 숨을 쉬려는 순간마다 사지는 대못에 고정되어 격렬한 고통을 주었던 것입니다. 사지에서 느껴오는 통증은 이미 채찍으로 벗겨진 온 몸의 상처들과 함께 고통을 더욱 극심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육체적인 고통은 영적인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죄 없으신 주님은 죄를 미워하셨습니다. 그런데 죄인들의 죄를 자신에게 자진해서 짊어지셨습니다. “그가 많은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었으며”(사 53:12) 가장 미워했던 죄가 예수님에게 쏟아졌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 2:24)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그리스도로 “죄를 삼으신” 것입니다.(고후 5:21) 예수님은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저주”를 받으셨습니다.(갈 3:13) 그 때에 제자들이 모두 주님의 곁을 떠났습니다.(마 26:56) 심지어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주님을 버리셨습니다.(마 27:46)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그 순간 예수님은 슬픔으로 가득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과의 감미로운 교제에서 단절을 경험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고난의 정점에 홀로 계셨습니다. 육체적인 고통보다 영적인 고통이 더욱 극심하셨던 것이 자명합니다.

 

 

 

Ⅴ.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받으심

 

 

 

주님은 창세 이후로 쌓아 오신 죄에 대한 강렬한 증오와 복수의 대상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필연적으로 흔쾌히 우리의 죄에 대하여 모든 형벌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는 충족되었습니다.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셨습니다.(히 9:26) 이처럼 그리스도가 완벽하고 죄 없는 삶을 사시고, 끔찍한 죄인의 죽음을 당하신 것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가 죄인으로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감당하신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받으셔서 우리에게서는 하나님의 진노를 푸셨습니다. 우리의 죄로 인하여 단절된 하나님과 교제가 열리고, 죄의 속박에서 우리를 해방하셨습니다.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구원입니까!

 

 

 

함께 생각해 봅시다.

 

 

 

1문. 예수님은 왜 이 땅에 오셔서 완벽한 삶을 사셔야 했습니까?

 

2문. 왜 예수님은 죽으셔야 했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실 다른 방법은 없으셨습니까?

 

3문. 속죄를 이해함으로 여러분은 어떻게 겸손해지고 위로를 얻게 됩니까?

 

 

 

 

 

11 부활이란 무엇인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은 삶과 죽음에서 그치지 않으시고 부활하심을 통하여 사망을 이기신 사역으로 이어집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사역이 속죄 사역에서 끝났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된 것입니다. 사도는 이렇게 증거 했습니다.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15:14-19)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셨고. 이기고 정복하신 왕이 되어 승천하셨습니다.

 

 

 

Ⅰ. 부활의 경과

 

 

 

1. 신약성경의 증거

 

 

 

사도들은 사도행전 전체를 통해 계속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며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살아 계셔서 하늘에서 다스리시는 분으로 믿으라고 권면합니다. 신약성경 나머지 전체는 예수님이 새롭게 형성된 교회의 머리이시며 살아 계셔서 다스리시는 구주라는 전제에 전적으로 기초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부활에 대한 방대한 증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2. 부활체의 특징

 

 

 

그리스도의 부활은 나사로(요 11:1-44)처럼 단순히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것과는 다릅니다. 그와 달리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실 때에 더 이상 쇠약해지거나 늙거나 죽거나 썩지 않는 완벽한 몸으로 새로운 인간의 삶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실 때에 영생할 몸을 입으셨습니다.(고전 15:53)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새 몸은 물리적인 몸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자 “그 발을” 붙잡았습니다.(마 28:9)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주님을 “모시고 음식을” 먹었습니다.(행 10:41) 예수님은 새 몸으로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눅 24:30) 또한 예수님은 도마에게 자기 손과 옆구리를 만져 보라고 권하셨습니다.(요 24:39) 예수님은 육체적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과 뼈”(눅 24:39)로 이루어진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Ⅱ. 부활의 결과

 

 

 

1. 미래의 생명을 주심

 

 

 

결과적으로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셨습니다.(벧전1:3)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의 사역을 통하여 자기 생명과 같은 미래의 새로운 생명을 우리들에게 가져다 주셨습니다. 우리 몸은 아직 예수님의 새 몸과 같지는 않지만 우리 영은 이미 새로운 부활의 능력으로 되살아났습니다.

 

 

 

2. 부활의 능력

 

 

 

이 부활의 능력은 우리가 마땅히 살아야 할 바대로 삶을 살도록 도와줍니다. 또한 우리에게 삶 속에서 죄에 대해 점점 더 승리를 얻을 수 있는 능력을 줍니다. 부활 때문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롬 6:11)로 여길 수 있습니다. 현세에서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롬 6:14) 죄가 우리를 다스리거나 통제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부활의 능력은 또한 성령의 능력을 포함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감당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행 1:8)

 

 

 

3. 그리스도의 사역의 완성을 인정하심

 

 

 

더 나아가 부활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장합니다. 사도는 예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은 곧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고난당하시고 죽으신 일에 대해 자신의 사역을 확증하여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이 일이 완성되었음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이제 죄 값을 지불하셨기에 더 이상 죽음 가운데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게 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히브리서에서 예수님은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다고 선언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것은 사명을 완수하셨기 때문입니다.

 

 

 

4. 우리도 경험하게 될 부활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으므로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고전 6:14) 또한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그 앞에 서게 하실” 것입니다.(고후 4:14)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도 그와 같은 부활을 경험할 것임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 속에서 우리가 장차 우리에게 임할 일의 그림을 보게 된다고 말합니다.(고전 15:20)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우리는 “다 변화”할 것입니다.(고전 15;51) 우리의 썩을 몸은 썩지 않을 몸으로 바뀔 것입니다.(고전 15:53) 우리가 부활하는 마지막 부활 때 우리는 현재 예수님이 입으신 몸과 똑같은 새로운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Ⅲ. 예수님의 승천

 

 

 

1. 부활 후 하늘로 가심

 

 

 

부활하신 지 40일 후(행 1:3)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 밖에 제자들을 데리고 가셔서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눅 24:50-51) 예수님은 이 땅을 떠나실 때 하늘이라는 특별한 곳으로 떠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자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셨습니다.(행 2:33) 하나님은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주셨습니다.(빌 2:9) 예수님은 승천하신 뒤 하나님인 동시에 인간인 분으로서 이전에는 누리지 못한 영광과 영예와 권세를 받으셨습니다. 천사들은 이제 이와 같은 말로 예수님께 대한 찬양을 합창합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12)

 

 

 

2. 우리의 모본으로서 부활과 승천

 

 

 

이제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서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 하실 것입니다.(고전 15:25) 그리스도의 일생은 우리에게 본을 제시하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종말에 우리에게 일어날 일을 알려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승천은 우리가 결국 어디로 갈 것인지를 알려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가 재림하셔서 우리가 이 땅에서 영광스런 새 땅으로 옮겨지게 될 그 날을 “고대”합니다.(롬 8:19) 그 때 우리는 완전한 새 몸으로 완전한 새 땅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문. 예수님의 부활이 왜 중요합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생명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2문.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삶과 온 세상에 어떤 결과를 가져왔습니까?

 

3문.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당신은 당신 자신의 부활을 고대하게 됩니까?

 

 

 

 

 

12 선택이란 무엇인가?

 

 

 

선택이란 하나님이 창세전에 어떤 사람들을 택하시되 하나님이 미리 아신 그들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한 뜻으로 그들을 택하신 일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 교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선택에 대한 신약의 가르침

 

 

 

신약성경의 여러 본문에서 하나님이 구원받을 사람들을 미리 정하셨다고 확증하는 것을 봅니다. 누가는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여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고 기록했습니다. 바울은 훗날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고 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2)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자기에게로 부르시는 이유는 우리가 선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영원 전의 계획과 값없는 은혜 때문입니다.

 

 

 

선택이 의미하는 것

 

 

 

신약성경 기자들이 선택 교리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주는 위로로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다음 두 절에서 그 이유를 제시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음(롬 8:29)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그들로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하셨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롬 8:30) 또한 바울은 미래를 바라볼 때 하나님이 언젠가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완전하고 영화롭게 된 몸을 주시겠다고 이미 결정하셨다는 점에서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하셨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롬 8:30)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선을 염두에 두고 일하셨고, 앞으로도 그렇게 일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택은 하나님이 오늘날에도 우리의 선을 위해 일하실 것이라는 위로와 확신의 근거입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 때문입니다.(딤후 1:9)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에 대한 우리의 자연스런 반응은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살고자 하는 마음입니다.(엡 1:12) 우리의 구원과 그에 따른 모든 선한 일을 궁극적으로 책임지신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임을 알고 하나님이 택하신 이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살전 1:2-4)

 

 

 

선택이 의미하지 않는 것

 

 

 

선택교리를 주장하는 것이 곧 우리의 선택과 행동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아무런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신약성경은 구원의 모든 역사를 인격적인 피조물을 깊이 사랑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일로 표현합니다.(엡 1:5) 하나님의 선택에는 하나님이 친히 택하신 이들에 대한 인격적인 사랑이 스며 있습니다.(요 3;16, 롬:28) 더 나아가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일지 아니면 거부할지 자원하는 마음으로 선택하는 인격적 피조물로 봅니다.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2:17)

 

 

 

부름 받은 그들은 진정으로 이 초대를 듣고, 자기의 뜻에 따른 결정으로 이에 반응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실제적인 결정은 영원한 결과를 가져옵니다.(요 3:18) 선택에 대한 바른 이해는 우리의 선택과 결정에 실제적인 가치를 부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선택이 우리의 선택에 바탕을 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로마서 8장 29절에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라고 말 할 때에 하나님은 이들의 구원과 관계된 맥락에서 이들을 “미리”아셨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알미니안>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각 개인의 믿음의 결정이나 행동을 미리 아신다.’고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사실 성경은 결코 믿음을 하나님이 누군가를 택하신 원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이는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비록 우리의 선택과 결정에 실제적인 가치를 부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선택이 우리의 선택에 바탕을 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구원하시기로 계획하신 사랑으로 우리를 택하신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때가 되어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인격적인 존재를 입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선택하게 하신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 아래 우리가 인격적으로 설복되어 자원하는 마음을 갖고 선택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선택이 원인이 되어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로운가?

 

 

 

‘선택의 교리가 사실이라면 우리는 자유롭지 않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또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수백 번이나 ‘자발적인’ 또는 ‘자기 뜻에 따른’ 결정을 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호소하거나 명령합니다. 우리의 자발적인 선택에 대한 성구들과 우리에게 반응하고 순종할 것을 요구하는 성경의 모든 계명을 살펴보십시오. 그래서 ‘인간의 선택’이라는 의미 속에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의 부분적인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 자신이 자기 성품에 부합되는 일을 하기로 선택하시는 모습을 그대로 본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일을 하기로 선택하시는 모습을 그대로 본받아 선택할 성향을 갖게 된 것이 ‘하나님의 형상’의 일부인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작정하심 속에 예정된 구원계획에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이 보전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초청에 긍정적으로 반응한다면 우리는 진실로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께 반응하기로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음과 동시에 하나님이 그렇게 작정 하셨다고 말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충분히 그 내면을 다 이해 하지는 못하지만 말입니다. 비록 우리가 이 진리를 다 이해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우리는 성경이 모든 면에서 이 사실에 대해 가르치는 대로 말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원하는 선택’과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에 부합해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능력의 말씀대로 만물을 붙드시고,(엡 1:11) 또한 우리의 자원하는 선택을 그 안에 보전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선택의 결과에 대한 복을 주기도 하시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선택한 사람들에게는 그에 마땅한 책임을 묻고 계십니다.

 

 

 

모든 것이 은혜이다.

 

 

 

선택 교리는 우리 자신이 행한 일이나, 앞으로 우리가 행할 일 때문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바른 반응은 영원토록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또 타인에 대한 우리의 바른 반응은 사랑과 겸손입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주장할 만한 권리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모든 은혜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선택교리를 그런 차원으로 봐야 합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문. 여러분은 선택교리를 이해하면서 기쁘십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2문. 하나님의 선택교리에 대하여 우리의 선택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3문. 하나님의 일반 은총에 대하여 말하고, 구원은총과 비교하여 생각합시다.

 

 

 

 

 

13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울은 로마서 8장 30절에서 구원의 복이 그리스도인에게 다가오는 순서를 제시합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우리는 앞 장에서 예정을 다루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른 측면을 다룰 것입니다.

 

 

 

Ⅰ. 효력 있는 부르심

 

 

 

로마서 8장 30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부르심이란 사람들이 때때로 어떤 직업을 선택하거나 어떤 교회의 등록 회원이 되기로 결심한 이유를 설명할 때 말하는 그런 유의 ‘부르심’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부르심’이란 “미리 정하신” 이들, 의롭다 하신 이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이 부르심은 특별히 예수님을 믿는 모든 신자에게 임하는 부르심입니다.

 

 

 

복음의 부르심은 사람들의 복음전파를 통해 전달됩니다. 바울은 이 점을 데살로니가후서 2장 14절에서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우리 복음”, 즉 바울 및 다른 이들이 그들에게 전한 복음을 통해 전달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효력 있는 부르심을 통해 사도행전 16장 14절에서 리디아에게 하신 일을 똑같이 행하실 것이라고 믿고 복음을 담대히 전파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모든 복음의 부르심이 다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자가 할 일은 복음의 메시지를 설명하는 일이고, 그 메시지 즉 부르심을 효력 있게 하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Ⅱ. 복음의 부르심의 요소

 

 

 

모든 복음의 부르심에는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세 가지 핵심적 요소가 있습니다. 구원에 대한 사실의 설명, 개인적으로 회개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반응하라는 초대, 죄 용서와 영생의 약속이 그것입니다. 구원에 관한 사실은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롬 3:23)는 것이며 둘째, 우리의 죗값은 사망이다(롬6:23)선언이며 셋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죗값을 치르시기 위해 죽으셨다(롬 5:8)는 것입니다. 이어서 이 복음을 믿으라고 하는 초대가 있는 것입니다. 마 11장 28-30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복음의 부르심에 반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용서의 은총을 주시고,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경험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요 3:16) 결국 주님께 오는 자는 결코 쫓아내지 않으리라고 하셨습니다.(요 6:38)

 

 

 

Ⅲ. 거듭남, 부르심을 받아들임

 

 

 

사람이 복음에 반응하라는 초대를 받은 후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하나님이 그 사람의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일이 먼저 있어야만 합니다. 영적인 생명을 전해주시는 은밀한 역사는 때때로 거듭남이라고 일컬어집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하시는데 이 순간적인 사건은 모든 것을 변화시킵니다. 이런 일이 한 번 일어나면 이 변화를 겪은 사람은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처럼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이런 변화는 곧바로 인식되지 않더라도 이 변화는 다시 변화된 성품으로 이어져 변화된 삶을 가져옵니다.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새로운 사랑(마 22:37-40),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진심어린 순종(요 14:15), 바울이 성령의 열매라고 칭한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의 특성(갈 5:22-23)들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Ⅳ. 회심, 부르심에 반응함

 

 

 

하나님이 효력 있는 부르심을 통해 부르시고 거듭남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킨 이후에 반드시 뒤따라야 하는 반응은 회개와 믿음입니다. 복음의 부르심은 개인적인 부르심이므로 개인적인 반응을 필요로 합니다. 복음의 부르심에 대한 이런 자발적이고 인격적이며 개인적인 반응을 일컬어 우리는 ‘회심’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참된 구원을 얻는 믿음이 있다면 여러분은 더 이상 예수님에 대해 단순히 사실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예수님이 여러분을 구원해주셨음을 믿습니다. 성경은 이런 개인적인 신뢰를 설명하기 위해 강한 어조의 표현을 사용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믿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신뢰하고 구분께 의지해야 합니다.

 

 

 

Ⅴ. 회개와 믿음

 

 

 

이러한 신뢰에는 회개와 믿음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 관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죽은 행실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회개란 죄에서 돌이키겠다는 의식적인 결단을 뜻하며, 믿음이란 그리스도께 그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진심으로 죄를 끊고 버리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께 믿음을 바치며 자신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만을 신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최초의 회개와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남은 평생 동안 회개와 믿음에 대한 지속적인 마음가짐의 본보기를 제시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라.”(골 2:6)는 말씀이 그런 맥락에서 주신 말씀입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문. 사람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됩니까?

 

 

 

2문.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해 보시오. 진심으로 죄를 회개한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3문.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습니까?

 

 

 

 

 

14 ‘칭의’와 ‘양자됨’이란 무엇인가?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 바울은 로마서 8장 30절에서 구원의 복이 그리스도인에게 다가오는 순서를 제시합니다. 우리는 앞 장에서 부르심에 대하여 먼저 다루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른 측면, 즉 믿음으로 반응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행하시는 ‘칭의’와 ‘양자 삼으심’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Ⅰ. ‘칭의’란? 하나님의 법정에서 선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사람이 회개와 믿음으로 반응할 때에 하나님은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그 사람의 것으로 여기심으로써 그 믿음에 화답하십니다. 그 순간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 사람을 의롭다고 선언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행동을 ‘칭의’라고 합니다. ‘칭의’는 즉각적이며 법적인 하나님의 선언으로서 믿는 우리의 죄를 용서받은 것으로 간주하십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것으로 여기십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도덕적으로 옳다고 선언하십니다. 이러한 ‘칭의’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반응한 이후에 오며, ‘칭의’란 우리의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라고 바울은 밝힙니다. 바울은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롬 3:26) 하신다고 말하며,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더 상세히 말하기를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줄 안다”고 했습니다. 분명 ‘칭의’가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야고보 2:21,24,25의 말씀은 하나님께 의롭다고 일컬음을 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의롭게 보인다는 차원의 말씀입니다. 이미 믿음이 있는 사람의 외적인 증거를 논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2장 18-26절의 본문은 그런 문맥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Ⅱ. ‘칭의’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선언입니다.

 

 

 

‘칭의’는 하나님의 법정의 선언입니다. ‘칭의’는 하나님이 재판관으로서 한 개인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일입니다. 원론적인 차원에서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모두 용서하시며 ‘의롭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롬8:1)이 없습니다. 33절에서도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은 아무도 정죄 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신 자들은 자신의 죄를 완전히 용서받은 것입니다. 의롭다 함을 받은 이들의 죄가 용서 받은 것으로 간주되는 까닭은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그리스도의 것으로 여기시고, 그리스도는 이미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의 것으로 간주하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것으로 여기십니다. 우리가 바라는 열납의 자리를 우리에게 주시려고 우리가 져야 할 죄과를 당신이 치르셨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역사로 인하여 하나님은 ‘칭의’를 통하여 우리의 죄를 완전히 용서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충분히 의로운 존재로 여기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Ⅲ.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롬 3:24)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또 바울은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상세하게 설명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칭의’를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칭의’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칭의’는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으로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신이나 우리의 선행으로 인하여 얻은 것이 아닙니다.

 

 

 

‘칭의’는 우리의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으로 일어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 앞에 공로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의 믿음 때문이 아닙니다. ‘칭의’는 오로지 그리스도가 이루신 공로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공로가 될 수도 없습니다. 믿음 자체도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가치를 우리가 이룰 수 없고, 우리의 죄 값을 우리가 치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은 다르게 생각합니다. 개신교는 ‘칭의’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우리의 공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에서는 말하기를 ‘칭의’는 믿음과 더불어 교회의 성사들을 사용함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합니다.(성사: 견진, 미사, 성만찬, 고해성사) 성경은 우리가 믿는 순간 우리를 의롭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기 때문입니다.(롬 8:1) 결국 로마 카톨릭은 이 땅에서 우리가 완전히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고, 죽은 후 연옥에서 정결케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연옥은 사실 성경에서 언급하지 않은 자기들의 주장에 불과합니다.

 

 

 

Ⅳ. 양자 됨이란 하나님의 새 식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녀 삼으심은 ‘칭의’와 더불어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바라보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또 다른 특권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지 않던 때에 “불순종의 아들들”이요, “진노의 아들들”에 속했던 것입니다. 이제 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간주됨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로 그 많은 혜택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노예의 영’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자녀의 영’으로 사는 존재들이 된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모든 복의 상속자로 살아가는 기쁨을 마음껏 누리게 된 것입니다.(롬 8:15) 하나님의 양자가 된 우리가 자녀의 축복과 혜택의 일부를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까지 그런 축복들을 충만하게 경험하지는 못하지만,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됨의 충만한 축복을 누리게 될 날을 기다립니다.(롬 8:23) 그동안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에는 많은 축복과 더불어 고난도 따를 것입니다.(롬 8:17) 이런 고난은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바울은 확언합니다.(롬 8:18) 이 땅에서 신자의 삶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칭하시고 양자 삼으신 것입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문. 의로다 함을 받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2문.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의롭다함을 받습니까? 여러분은 한 번에 영원히 완전히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믿습니까?

 

 

 

3문.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가족이 된 기분이 어떻습니까? 왜 그런 기분을 느낍니까? 양자됨에서 비롯된 구체적인 축복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15 성화와 견인이란 무엇인가?

 

 

 

처음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신뢰하는 회심은 이후의 신자의 신앙생활에 본보기를 제시합니다. 회개와 믿음은 이른바 성화에도 도움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성화란 그리스도인이 실생활에서 점점 더 죄에서 멀어지고 그리스도를 닮아 가도록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자신이 더불어 일하는 점진적인 과정입니다. 성화는 분명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며, 신자는 그 사역에 협력합니다. 신자의 성화는 점진적으로 성숙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는 결코 완성되지 않습니다.

 

 

 

Ⅰ. 성화는 과정입니다.

 

 

 

성화는 거듭난 순간부터 시작되어 평생토록 진전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거듭날 때 “죄에게서 해방”(롬 6:18)되었으므로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롬 6:11) 여겨야 합니다. 그러니까 죄가 신자들을 주관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신자가 죄의 권세에서 해방되는데 이것은 참 신자가 더 이상 죄의 지배나 통치를 받지 않으며, 더 이상 죄 짓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 신자는 모두 성화의 과정에 있습니다. 그는 이 땅에 사는 동안 결코 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라고 한 것입니다. 전도서 7장 20절에서도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다고 하였습니다. 주님도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우리가 매일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명하셨습니다.(눅 11:14) 그리스도인은 죽어서 하나님께로 가게 되면 성화는 완성됩니다. 우리의 영혼이 마음속에 거하는 죄에서 해방되어 완전해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른 측면에서 볼 때에 성화는 전인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전인격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에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빌 3:21) 변하게 하실 때 비로소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의 몸도 완전해져서 모든 죄의 권세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이 땅에서는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성화의 꾸준한 진척은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빌 3:13-14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말씀은 평생토록 계속되는 한 과정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죄에서 큰 자유를 맛보았다가도 다른 죄로 깊이 몸부림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은 죄와의 싸움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변화되기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죄와 싸우는 가운데 로마서 6장 14절과 같이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결국 죄가 신자들을 주관치는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Ⅱ. 성화에 있어서 하나님의 역할과 우리의 역할

 

 

 

성화는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하시는 일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살전 5:23)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의 뜻을 행하시고...”(히 13:20)라고 증거 합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들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덧입히십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역사하셔서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거룩하게 만드시며 더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이렇게 성령 하나님은 우리 안에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갈 5:22 이하) 우리가 점점 성화되어 갈수록 “성령을 좇아” 행하게 되고, “성령의 인도 하시는 바가” 됩니다.(갈 5:16-18) 그래서 우리는 점점 더 생활과 성품에 있어서 성령의 요구와 감동에 민감해집니다. 성결의 영이신 성령께서 이렇게 우리에게 거룩함을 낳으십니다.

 

 

 

한편 우리는 성화에 수동적인 동시에 적극적으로 참여 합니다.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라고 합니다.(롬 6:13) 이는 수동적인 참여입니다. 그리고 로마서 8장 13절에서는 “몸의 행실(죄)을 죽이라”는 권면도 하는데 이는 우리 편에서의 능동적인 역할을 함축합니다. 이렇게 성경의 증거로 볼 때에 알 수 있는 것은 성화는 성령의 능력으로써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적극적인 역할을 권면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빌2장 12-13절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신자는 담대히 ‘거룩함’을 좇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히 12:4) 신자가 되면 성화에 동참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누구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성화’라는 동일한 소명을 주셨습니다.

 

 

 

첫 믿음도 중요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의 지속적인 믿음과 순종의 행동도 귀하게 여기십니다. 이런 일은 성경읽기와 성경묵상(시 1;2, 마 4;4, 요 17;17), 기도생활(엡 6;18, 빌 4;6) 예배(엡 5;18-20), 말씀증거(마 28;19-20) 자비와 의의 행실(마 23:23,약 1:27), 성도와의 교제(히 10;24-25), 절제와 자기통제(갈 5;23, 딛 1;8) 등등을 통해서 나타나게 하십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성화에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과 그런 믿음의 삶에 순종하는 노력 속에서 우리가 성숙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역사를 믿지 못하면 곧 우리는 교만하여 자신을 과신하게 됩니다. 동시에 우리가 적극적으로 성화의 삶에 힘쓰지 않으면 성화의 삶은 불완전하게 되고, 기쁨과 평안을 경험하지 못하게 됩니다.(갈 5:22, 롬 14:17) 그러므로 우리는 사는 동안 더욱더 거룩해지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Ⅲ. 성도의 견인

 

 

 

때때로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구원의 복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우리의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하나님이 능력으로 지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자는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그리스도인으로 보존됩니다. 모든 참된 신자는 끝까지 인내할 것입니다. 동시에 인내하는 사람만이 참된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양면적인 가르침을 “성도의 견인”이라고 합니다. 성도의 견인교리는 예수님의 약속에서도 확증합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8-29) 또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요 10:27)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3-14) 신자에게 영원한 생명의 보증으로 ‘약속의 인 치심’인데, 바로 하나님의 임재, 즉 신자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입니다.

 

 

 

결론적으로 볼 때에 성화의 과정은 평생의 과정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 신자라면 때때로 성화의 진전이 자신에게서 확연히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 신자는 자신을 더 낮게 여기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을 신뢰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성화의 과정에서 자신에 대하여 낙심이 될 정도로 실패한 상황에서는 자신을 돌아보아 자신에게 믿음이 없음을 인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막 9:24의 말씀에서처럼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함께 생각해 봅시다.

 

 

 

1문. ‘성화와 칭의’는 어떻게 다릅니까?

 

 

 

2문. 성화에 있어서 우리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이번 주에 여러분이 성화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3문. 견인의 교리를 뒷받침하는 성구들을 열거해 보십시오. 그런 성구들이 내게 어떤 의미로 다가옵니까?

 

 

 

 

 

16 죽음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에게 육체적 죽음은 성화의 일부를 완성시킵니다. 임종할 때 그리스도인의 영혼은 즉시 완전해져서 하나님이 계신 속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야만 그리스도인의 몸과 영혼은 모두 충만한 완성을 경험합니다. 그 때에 비로소 몸까지도 부활하여 완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여기서 임종과 재림의 때와 임종에서 재림 사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Ⅰ. 그리스도인은 왜 죽는가?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형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기 때문입니다.(롬 8:1) 그리스도인의 죄에 대한 모든 형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지혜로 신자가 즉시 구원의 모든 혜택으로 경험하는 것은 최선이 아니라고 판단하셨습니다. 예컨대 그리스도인도 죄를 짓고 병도 나며 자연 재해를 겪기도 하고, 악하고 불의한 행동에 희생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도 죽습니다. 바르지 못한 세상, 죄의 저주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을 때에 사망을 이기셨지만, 사망은 아직 이 타락한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죄의 마지막 결과로 두셨습니다.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 15:25-26)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화를 완성시키기 위해 죽음의 경험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더 닮게 만드시는 수단으로 육체적인 죽음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이 신자의 생활에서 고난과 고통을 사용하여 신자의 성화에 도움을 주시는 일은 일반적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러므로 고통과 고난은 하나님이 자녀들을 징계하시는 데서 비롯된 결과일 때가 많습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고...비록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鍊達)하는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히 12:6-11)

 

 

 

징계는 우리의 잘못을 바로 잡는 역할과 우리를 강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결국 징계는 우리의 성화의 한 수단입니다. 예수님도 죄는 없으셨지만 고난을 통하여 온전케 되셨습니다.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히 5:8)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히 2:10) 되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위한 대속의 고난으로 온전케 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일생을 보면 예수님은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순종하는 힘은 점점 더 증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생활에서 위안거리만을 주시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화를 완성하시기 위해서 죽음을 통해 경험시키십니다. 그래서 신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순종하고, 신실한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죽음은 자연적인 것에 그친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죽음으로 이루시는 우리의 성화의 한 단계인 것입니다.

 

 

 

Ⅱ. 그리스도인이 죽을 때

 

 

 

예수님을 믿는 신자라면 자신의 죽음을 두려움으로 바라보지 말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죽으셨습니다.(히 2:15) 따라서 신자가 죽은 후에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된다는 사실에서 자신의 죽음을 기쁨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 5:8)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빌 1:23)

 

 

 

신자라면 우리는 죽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더 분명하게 알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더 확실히 믿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한번 죽으면 그의 영혼은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지내기 때문에 죽은 신자를 위해 더 이상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카톨릭 교회에서는 신자가 연옥에 가며, 연옥에서 벗어나려면 지상의 신자들이 기도하여 이룬다고 생각하는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비성경적 견해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죽을 때에 우리가 느끼는 슬픔은 영원히 절망적인 슬픔이 아닙니다. 신자는 이 땅을 떠나 하나님과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말라고 말입니다.(살전 4:13) 물론 떠나보내면 슬픔을 느끼는 것이 사실입니다. 믿음의 선조들도 그의 가족이 이 땅을 떠나 이별하는 과정에서 모두 슬퍼했습니다. 신자의 죽음은 슬프지만 결코 영원히 절망스러운 슬픔은 아닙니다.

 

 

 

Ⅲ. 불신자가 죽었을 때

 

 

 

그리스도를 거부한 사람들은 죽을 때에 그 영혼이 즉시 영원한 형벌의 장소에 갑니다. 그러나 그들의 몸은 그리스도가 재림 할 때까지 땅 속에 남아 있다가 그 때가 되면 마지막 심판의 날을 위해 영혼과 재결합할 것입니다.(마 25:31-46, 요 5:28-29) 하지만 사람이 한 번 죽으면 영원히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눅 16:24-26)에서 주님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거부한 사람이 죽었을 때 느껴지는 슬픔은 소망 섞인 슬픔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이 끝까지 그리스도를 거부하며 세상을 떠났는지 우리가 구별하기 참으로 어렵습니다. 임종의 시기에 접어들어서 참된 구도자의 마음이 생겨날 수도 있습니다. 한 마디로 어떤 상황을 함부로 판단하기란 참 곤란합니다. 그러나 불신자가 죽은 후에 천국에 갔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단지 그 불신자의 죽음을 두고 그 사람의 생전에 보였던 미덕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감사를 표현하는 편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다윗도 사울의 죽음을 두고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왕하 1:19-25)

 

 

 

Ⅳ. 그리스도인은 언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 하는가

 

 

 

그리스도인이 죽을 때에 몸은 땅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영혼은 하나님 곁으로 즉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립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롬8:23-24) 그 날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는 날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롬8:17) 이미 세상을 떠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는 날은 구속의 적용에 있어서 마지막 순서일 것입니다. 그 날에 새롭고 완벽한 몸은 영혼과 재결합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런 부활의 몸으로 다시 살아난 첫 사람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신자들도 그와 같이 부활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고전 15:22-23)

 

 

 

그 때에 신자들이 살아 있다면 그들은 불완전한 몸이 순식간에 완전한 몸으로 변할 것입니다.(고전 15:51-52)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신자는 구주께서 입으신 몸과 똑같은 새로운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이 과정을 우리는 ‘영화’라고 합니다. 우리 몸이 새로운 하늘의 영광을 덧입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새로운 몸은 “썩지 아니할 것”(고전 15:52)입니다. 새 몸은 하나님이 원래 계획하신 몸과 같이 우리가 이 땅에서 상상할 수 있는 어떤 몸보다도 아름답고 매력적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이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창조해 주신 모든 탁월한 특징을 다 가진 몸으로 영원히 살 것입니다. 이 몸은 영원토록 우주, 즉 하나님이 “심히 좋았더라.”(창 1:31)고 말씀하신 그 우주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지혜의 산 증거가 될 것입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문. 그리스도인은 왜 죽습니까? 이 사실은 언젠가 닥칠 여러분 자신의 죽음에 대한 생각에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2문. 그리스도인은 죽을 때 몸과 영혼에 각각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이 사실에 여러분은 어떤 기분이 듭니까? 그렇게 느낀 이유는 무엇입니까?

 

 

 

3문.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그리스도인의 몸에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여러분은 특별히 부활한 몸에 있어서 어떤 측면이 기대가 됩니까?

 

 

 

 

 

17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는 모든 시대, 모든 참된 신자들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참 신자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교회란 그리스도가 구속하기 위하여 죽으신 모든 사람을 일컫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기 전에 구원을 위해 하나님을 바라본 모든 사람을 포괄합니다. 모든 참 신자는 자신이 살았던 그 시대를 막론하고 참 교회를 구성합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하나님을 예배 하려고 함께 모여야 했던 것처럼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그와 같은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Ⅰ.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눈에 보이는 교회

 

 

 

사람들의 마음과 영적인 상태를 꿰뚫어 볼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참 신자들의 교제로서의 실재(實在), 곧 참된 교회가 지닌 영적인 실재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들의 마음의 상태를 보실 수 있습니다.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는 하나님이 보시는 교회입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는 하나님이 보시는 교회인 반면에 “눈에 보이는 교회”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보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구분을 지을 때 참된 신자들처럼 보이는 이들의 영적인 지위를 지나치게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관대한 시선으로 신앙 고백이나 생활양식으로 볼 때 신자처럼 보이는 모든 사람을 보편적 교회의 일원으로 생각하여 교회라는 어머니의 품에 품어야 할 것입니다.

 

 

 

Ⅱ. 교회에 대한 다양한 묘사들

 

 

 

구약의 교회와 다르게 신약의 ‘교회’라는 말은 소규모 가정교회(롬 16:5, 고전 16:19), 도시 전체교회(고전 1:2, 살전 1;1), 한 지방 전체교회(행 9:31), 온 세상의 모든 교회(엡 5:25, 고전 12:28) 등 다양한 형태의 신자들의 모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는 어떤 규모든 교회라고 지칭해도 무방합니다. 또한 교회라고 지칭하는 다양한 묘사들이 있습니다. 이런 교회들에 대한 다양한 묘사에서 일단 교회란 하나의 가족이며, 교회 구성원들은 대가족 식구들과 유사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신랑인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라는 가족적인 용어로 표현도기도 합니다.(엡 5:32, 고후 11:2) 몸의 이미지로 교회를 설명하기도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는 그 몸의 머리가 되신다는 것입니다.(엡 1:22-23) 그러면서 몸의 각 지체들이 자신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 밖에도 교회를 표현하기를 신령한 집(벧전 2:4-8), 거룩한 제사장(벧전 2:5), 포도나무와 가지(요 15:5), 감람나무(롬 11:17-24), 하나님의 밭(고전3:6-9) 등으로 비유합니다. 이런 다양한 비유는 어느 한 가지만 집중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한 가지에 집중하면 다른 교회의 비유에 걸맞게 하는 다른 교회의 기능들이 배제됨으로 균형을 잃게 됩니다.

 

 

 

Ⅲ. 무엇이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가?

 

 

 

그러면 어떤 활동이 교회를 교회답게 만듭니까? 전통적으로 많은 기독교 저술가들은 모든 교회가 참 교회로 인정받기 위해 반드시 보여주어야 할 두 가지 활동(또는 표지)이 있다는 데 동의했습니다. 첫째, 성경을 올바르게 가르치는 일입니다. 이러한 표지는 설교의 형식보다는 설교의 내용과 더 관계가 있습니다. 교회의 설교가 지속적으로 잘못된 교리를 담고 있거나 오직 믿음에 의한 구원이라는 참된 복음의 메시지를 숨긴다면 그런 설교가 전해지는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닙니다.

 

 

 

둘째, 참된 교회의 표지로는 성례(교회의 의식)가 있습니다. 두 가지의 성례, 곧 세례와 성찬식이 바르게 시행 되느냐에 있습니다. 바르게 시행 되는 교회라면 그 교회는 교회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례와 성찬이 바르게 시행되는 것이 바른 교회의 표지가 되는 이유는 성례가 교회의 구성원을 통제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세례는 각 개인이 교회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는 수단이며, 성만찬에 참여하는 교회 구성원들이 교회 전체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음을 계속해서 보여주는 한 방편입니다.

 

 

 

참 교회는 신약에서 강조하는 바와 같이 그 밖에도 두 가지 특징이 더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어느 정도 순수하고 화합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순수성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계시된 뜻과 어느 정도나 일치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목표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엡 5:26-27) 그러므로 우리들은 교회의 일원으로서 능력껏 최선을 다해 모든 면에서 교회의 순수성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 나아가 가능한 최선을 다해 화합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분열을 피해야 합니다. “다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신 예수님의 기도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참 교회가 다른 참 교회 및 단체(선교 단체)와 협력하여 연합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Ⅳ. 교회는 어떤 일을 해야 합니까?

 

 

 

교회는 하나님과 교인들과 온 세상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골로새서 3장 16절에서 바울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권면합니다. 교회의 예배는 무엇을 준비하는 단계가 아닙니다. 그 자체로 주요한 목적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곧 이것은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이 되기 위해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엡 1:12)

 

 

 

우선 교회는 교인들을 섬기는 일이 있는데, 교회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골 1:28) 세울 수 있도록 교인들을 양육하고, 세우는 일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교회의 재능이 있는 지도자들을 주신 것은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섬기는 일은 말과 행실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복음은 말(전도, 퀘리그마)과 행실(자비한 마음으로 섬기는 일)로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 사역에는 구제 사역이 있습니다. 복음전도 뿐만 아니라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을 섬기는 일(갈 2:10, 약 1:27)도 포함해 말과 행실을 통해서 온갖 종류의 섬김에 참여해야 합니다. 모든 교회는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세 가지 목적인 예배, 양육, 전도와 구제를 이루기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어느 목적이 다른 목적보다 중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어느 교회도 이 중에서 어느 하나만 중하다고 주된 목적을 삼고 다른 요소를 소홀하게 할 수 없습니다.

 

 

 

Ⅴ. 사명을 성취하기 위한 교회의 능력

 

 

 

그리스도는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약속을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성령을 보내셨습니다.(요 14:26, 행1:8) 성령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섬기는 일에 필수적인 은사(영적인 은사)들을 주셨습니다. 성령은 오늘날에도 교회를 섬기도록 은사들을 내려 주십니다. 영적인 은사에는 선천적인 능력에 속하는 은사들(각종 달란트 : 가르침, 구제, 행정 등등)과 그보다는 초자연적으로 보이는 은사들(예언, 병 고침, 영분별)이 모두 여기에 포함됩니다. 바울은 선천적인 은사와 초자연적인 은사를 구별하지 않고 기록합니다.(롬 12:6-8, 고전 7:7, 12:8-10, 엡 4:11) 바울은 이런 초자연적인 은사들이 초대교회 사역에 특별한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사도들에게만 주신 것이라고 하지 않는 듯합니다. 왜냐하면 사도시대에 초자연적인 은사가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초자연적인 은사들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때에 사라질 것입니다.(고전 13;8) 이와 같이 모든 은사들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다고 말합니다. 성령이 이와 같이 각각 은사들을 주신 것은 “교회를 세우기”(고전 14:26) 위해 사용하시려는 목적 때문입니다. 영적인 은사들은 교회가 부름 받은 사명을 위한 능력을 공급할 뿐 아니라, 세상에 장차 도래할 시대를 미리 맛보여 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오실 그리스도는 각 사람들의 죄 없는 삶(요일 3:2) 속에서만 아니라, 신자들의 영화롭게 된 몸(고전 9:53)을 통하여 충분히 알려지고 경험될 것입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문. 외부의 ‘성경공부 모임’이나 ‘수련회’등이 교회와 어떻게 다릅니까?

 

 

 

2문. 그리스도인은 왜 교회의 지체가 되어야 합니까? 지역 교회의 교인이 되지 않는 것은 어떤 위험성이 있습니까?

 

 

 

3문. 교회가 해야 할 일들을 열거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교회에서 하는 일에 성령님이 능력 주시고, 축복하신 구체적인 예가 있다면 말해 보십시오.

 

 

 

 

 

18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미래에 대한 여러 질문들은 교회 역사상 많은 논쟁이 있어왔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 천년왕국, 마지막 심판, 불신자의 영원한 형벌과 신자들의 영원한 보상,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삶을 중심 주제로 삼았습니다. 이에 대한 연구를 '종말론'(eschatology)이라고 부릅니다.

 

 

 

Ⅰ. 그리스도의 재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땅에 다시 돌아오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3) 예수님이 다시 오시리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한편으로 재림의 정확한 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습니다.(막13:32) 생각지 않을 때에 인자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마24:44) 하지만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응답해야 할 것입니다.

 

 

 

Ⅱ. 재림의 때

 

 

 

아무도 모르는 때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을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지만 성경의 다른 본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이 전에 어떤 징조들이 있을 것임을 시사하는 듯합니다.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입니다.(막 13:10, 마 24:1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택하신 백성들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막 13:22, 마 24:23-24) “그 때에 그 환란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권능들이 흔들리리라.”(막 13:24-25)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롬 11:25-26)

 

 

 

이런 징조들이 언급된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웠느니라.”(눅 21:28) 어떤 이들은 이런 징조들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그리고는 아무 때나 다시 오시지 않을 거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권면하셨습니다.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를 알지 못함이니라.”(막 13:33) 그리스도인 가운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곧 재림하실 리가 없다고 말하는 견해를 주장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권면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듯해 보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여러 징조들이 이미 성취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어느 때에든지 오실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견해가 가장 성경에 부합한 의견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갑자기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대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Ⅲ. 재림의 때에 일어날 사건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교회의 다양한 의견의 차이는 결국 계시록 20장 1-6절의 해석에 관한 것입니다. 특히 계20:4-5에서 언급한 “천 년”에 관한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천 년”을 “천년 왕국”이라고 말하며 이 기간의 때와 성격에 대해 다음 세 가지 중에 하나를 주장합니다.

 

 

 

1. 무천년설(Amillennialism)

 

 

 

이 견해는 ‘천년왕국’이 지금 이 시대(현, 교회시대)이며, 이 시대가 끝나면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것입니다. 천년왕국에 대한 견해 중에서 가장 간단한 주장입니다. 천년왕국으로 지칭된 미래가 현재의 교회시대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견해입니다. 계시록 20장 4절에서 언급한 “천년동안 왕 노릇 함”은 이미 죽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고 있다는 뜻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그리스도의 지상사역 기간에 그 권세가 현저하게 줄었고, 사단이 결박되어서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견해를 ‘무천년설’이라고 합니다. 도표로 그려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교회시대(그리스도의 재림/신자,불신자부활/심판/새하늘과 새땅) ⇒ 영원한 상태 ⇒ 계속됨” 이 견해에서는 천년왕국이 따로 없는 것입니다. 교회시대가 곧 ‘천년왕국’ 자체입니다.

 

 

 

2. 후천년설(postmillennialism)

 

 

 

천년왕국은 점점 점진적으로 다가오며, 예수님은 ‘천년왕국’ 이후에 재림하신다는 것입니다. 계시록 20장 4-5절에 언급된 천년 이후에 주님이 재림하실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교회가 성장하고 신자들의 영향력이 강화되면 그 영향력이 점점 커져서 사회가 하나님의 기준에 부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점차적으로 온 세상에 큰 평안과 의가 넘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천년의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직접적으로 다스리시는 것은 아니지만 신자들의 영향력이 강화되어 그런 천년왕국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년왕국 시대가 끝날 때에 그리스도가 재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신자와 불신자들이 부활하게 되고, 그 때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되어 영원히 계속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육신을 지닌 모습으로 지상에 다스리기 위하여 임하게 되실 것입니다. 이 견해를 ‘후천년설’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통치가 미래의 천년왕국 이후에 일어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교회시대>>>천년왕국 ⇒ 그리스도의 재림/신자, 불신자 부활/심판/새 하늘과 새 땅 ⇒ 영원한 상태〕

 

 

 

3. 전천년설(premilliennialism)

 

 

 

천년왕국은 갑자기 도래하며 예수님은 천년왕국 이전에 재림하신다는 것입니다. 천년왕국이 임하기 전에 그리스도가 재림하신다는 의견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이 땅은 대 환란이 오고, 큰 고난의 시기가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마24:21-31) 그리스도는 재림하셔서 천년 동안 육신을 지닌 모습으로 다스리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천년 동안 다스리실 때에 예수님은 믿은 모든 사람은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실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그 천년 동안 사단과 그 모든 졸개들은 모든 권세를 다 잃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땅 위에서 의와 평강으로 다스리실 것이므로 지상의 많은 사람이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의지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천년 지상 통치 이후에 마지막 심판이 있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다스리며 예수님을 거부한 많은 사람들은 영원히 저주를 받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이 입장을 보다 더 지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전천년설’은 다시 두 가지 견해로 나뉩니다. 하나는 ‘역사적 전천년설’이 있고, 또 하나는 ‘세대주의 전천년설’(환란전 전천년설)이 있습니다. ‘역사적 전천년설’에서는 다음과 같은 시대가 진행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교회시대(T-대환란) ⇒ 휴거/그리스도의 재림, 공중에 거함/신자의 부활/새하늘과 새땅 ⇒ 천년왕국 ⇒ (불신자의 부활)그리스도의 통치 ⇒ 영원한 상태〕가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대주의자들은 〔교회시대 ⇒ 신자의 휴거(주님의 은밀한 재림)/7년 후 주님이 다시 공개적 재림/(T-대환란)공중에 함께 거함/신자의 부활 ⇒ 천년왕국 ⇒ 주님통치/불신자심판/새하늘과 새땅 ⇒ 영원한 상태〕가 될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이런 세대주의 주장은 성경에서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입니다.

 

 

 

Ⅳ. 승리하신 왕

 

 

 

그리스도인들이 미래에 대한 시각에 대하여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은 어쩌면 놀랄만한 일은 아닙니다. 이는 부분적으로 미래라는 주제 자체 때문이기도 합니다. 미래는 아직 일어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무언가 불투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와 관계없이 모든 그리스도인은 사단에 대한 그리스도의 최종적인 승리가 장차 있을 것을 믿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탄이 “그 옥에 놓여”(계20:7) 자기가 속인 사람들을 한 데 모아 전쟁을 벌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단은 그 마지막 전쟁에서 멸망하여 영원히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짐으로 거기서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을 것입니다.(계20:10) 승리하신 그리스도는 마지막 심판을 집행하실 것입니다. 그 후에 주님은 영원히 다스리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큰 소망을 품을 만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신실하고 참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계22:6) 계시록 20장 1-6절의 말씀에 대한 해석이 각 각 다를지라도 상관없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말씀에 대해 요한과 같은 반응을 보여야 마땅합니다.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계22:20)

 

 

 

함께 생각해 봅시다.

 

 

 

1문. 모든 신자들이 동의할 종말론에 대한 사실은 무엇입니까? 그 사실이 주는 기쁨은 무엇입니까?

 

 

 

2문. 다양한 종말론의 차이에는 무엇이 쟁점입니까? 이런 견해 차이를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3문. 계시록 22장 10절에 나온 요한의 기도를 같이 생각하고 함께 기도합시다.

 

 

 

 

 

19 최후의 심판이란 무엇인가?

 

 

 

어떤 종말론의 견해를 따르더라도 그리스도의 천 년 통치와 사단의 마지막 패배 이후 예수 그리스도는 “크고 흰 보좌”에 앉아 온 인류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마지막 심판은 하나님이 의에 상을 주시고 불의에 벌을 주신 역사상 여러 전례(창 6-8장의 홍수심판 사건이나 창 19장1-26절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를 완결 지으시는 사건입니다. 마지막 심판은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롬 2:5)”이 될 것입니다.

 

 

 

Ⅰ. 마지막 심판 때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행 10:42)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심판 하시는 권세”는 하나님께 받은 것입니다.(요 5:27) 불신자들에 대하여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롬 2:8) 이미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4)는 확증이 있었습니다.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 자들은 결국 자기들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계 20:12) 하나님은 공평하실 것입니다. 형벌의 정도는 각 사람이 행한 일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고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눅 20:47) 사람이 하나님의 요구사항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에 따라 형벌도 다를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게 될 것입니다.(롬 14:10-12) 그러나 신자들에 대한 마지막 심판은 형벌을 받는 심판이 아니라 상급을 받는 심판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바울도 증거 하기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그러므로 마지막 심판은 신자들에게 두려움의 원천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고후 5:9) 하는 일을 자신의 목표로 삼게 만드는 자극제가 되어야 합니다. 심판 때 우리는 “산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고후 5:10) 일에 함당한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악행은 사라지고 선행은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고전 3:12-15) 천국에서 상급의 차이가 있기는 하겠지만 누구나 다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쁨은 우리가 가진 것이나 우리의 지위가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 하나님을 충만하게 기뻐하는 데서 오는 기쁨과 하나님이 계신 곳에 함께 있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엎드려 그분께 경배할 수 있다는 데서 오는 즐거움은 어떤 상급에서 오는 기쁨보다도 클 것입니다.(계 4:10-11)

 

 

 

우리가 행한 일에 따라 상급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은 경쟁심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야 합니다.(히 10:24-25) 마지막 심판은 하나님을 반역한 천사들도 받게 될 것입니다.(유 6절, 벧후 2:4) 천사들도 각각 섬기는 일에 따라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고전 6:3)

 

 

 

Ⅱ. 마지막 심판의 목적

 

 

 

마지막 심판은 하나님이 각 사람의 마음의 상태를 판단하시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모든 심령의 최종적인 상태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온 인류에게 자신의 공의와 자비를 함께 보여 주심으로써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한 것입니다. 각 사람은 영원한 영광을 누리든 영원한 저주에 차하게 되는 마지막 심판대에서 이전 어느 때보다 공평한 판결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실 것이며(벧전1:17) 하나님은 마지막 심판으로 큰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외칠 것입니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계19:1-2)

 

 

 

Ⅲ. 마지막 심판의 적용

 

 

 

마지막 심판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가 공평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됩니다. 마지막 심판은 세상에 정의가 존재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우리의 내적인 의식을 만족시킵니다. 하나님이 모든 상황을 다스리시고 계시며 끝내는 올바른 결과를 가져오실 것이라는 확신을 줍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마지막 심판에 비추어 보건대 그리스도인들은 각 사람을 아무 대가 없이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날에 모든 빚이 청산될 것이며, 모든 잘못이 바로잡힐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원수를 갚으려 들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겨야 합니다.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롬12:19) 우리는 억울한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공의로 역사해 주시도록 간구하면서 하나님을 향해 정의에 대한 열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는 합당한 형벌이 집행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 형벌이 그리스도에게 임하든 죄를 지은 사람에게 임하든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으로써 “보물을 하늘에 쌓아”(마6:20) 두도록 동기를 부여합니다. 이 보물은 구원을 가져다주지는 않지만 우리가 행한 선행에 대하여 보상해 줍니다. 마지막 심판은 예수님에 대한 복된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게 하는 자극제가 됩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벧후3:9)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이 믿는 복된 소식을 다른 이에게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Ⅳ. 지옥은 어떻게 되는가?

 

 

 

마지막 심판 때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한 이들은 영원한 형벌의 장소에 가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그 영원한 형벌의 장소가 바로 지옥입니다. 예수님은 지옥을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불이라고 일컬으시며 자신을 거부한 이들도 그 곳에 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곳은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곳입니다.(막9:48) 그 곳은 “고통 받는 곳”입니다.(눅16:28) 그 곳은 예수님을 거부한 이들이 마귀와 그 사자들과 함께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며” ”거룩한 천사들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계14:10)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며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계14:11)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지옥에 대한 두려움은 없지만 그래도 지옥을 생각할 때면 늘 진지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지옥의 교리는 생각하기조차 끔찍하지만 성경에서 너무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어서 지옥을 부정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를 수 있는 납득할만한 방법은 없어 보입니다. 더구나 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정당한 진노를 불러일으키시는 깊고 심각한 악이 엄존하는 우주에서 우리는 악을 처벌하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심판은 의롭고 올바릅니다. 하나님 “그분에게는 불의가” 없기 때문입니다.(시92:15)

 

 

 

함께 생각해 봅시다.

 

 

 

1문. 마지막 심판 때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한 이들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2문. 마지막 심판에 대한 이해는 오늘 여러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여러분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는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20 천국이란 무엇인가?

 

 

 

마지막 심판 이후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갈망해왔던 삶을 충만하게 만끽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4)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이 나라를 단순히 “천국”이라고 부르지만 성경은 실제로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훨씬 더 풍성한 그림을 그려 줍니다. 성경은 완전히 새로워질 우주를 약속합니다. 이 우주는 하나님이 만드실 “새 하늘과 새 땅”이며(사 66:22) 아주 풍요롭고 좋고 새로워서 죽음, 고통, 슬픔, 고난 같은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입니다.(사 65:17) 그 곳은 하늘과 땅이 함께 만나는 곳이 될 것입니다.(계 21:2)

 

 

 

Ⅰ. 새로워질 하늘과 땅과 우주

 

 

 

성경은 대개 하나님이 현재 거하시는 곳을 “하늘”이라고 일컫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 6:9)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고 말합니다.(벧전 3:22) 하늘은 하나님이 가장 완전하게 자신의 복된 임재를 알리시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지만 하나님의 복된 임재는 하늘에서 가장 분명히 나타나며 하나님의 영광도 하늘에서 가장 분명히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새롭게 하시는 것은 물론 땅에 속한 만물, 즉 땅과 그 안에 거할 사람들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벧후 3:18, 계 21:1) 바울은 로마서 8장 2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분명 낙원이 회복될 것입니다. 새로워진 땅에서 살게 될 사람들은 결코 늙거나 쇠약해지거나 병들지 않는 새롭고 영화로운 몸을 갖게 될 것입니다. 죄의 저주가 없어져 온 우주가 “심히” 좋았던 원래 상태로 회복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서 먹고 마실 것입니다.(눅 22:18) “생명수의 강”이 “ 길 가운데로” 흐를 것이며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날마다 그 실과를 맺힐 것입니다.(계 22:1-3) 인간은 아마도 기술적, 독창적, 창의적 수단들을 통해 땅과 땅의 자원들을 계속해서 다스리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할 것입니다. 인간은 새로운 몸에 있어서는 그리스도를 닮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과 같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예컨대 우리는 무한한 지식을 갖는 것이 아니라 홀로 무한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계속해서 자라갈 것입니다.(골 1:10)

 

 

 

마지막으로 새로운 하늘과 땅은 우리가 이 땅에 있는 동안 스스로를 위해 쌓아 둔 하늘의 보물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곳일 것입니다.(마 6:20) 이는 우리가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 놀라운 자극제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신자로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벧후 3:11,13)

 

 

 

Ⅱ.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

 

 

 

하늘은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는 곳인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이 매우 명백히 드러나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부합되도록 움직이는 곳일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더 이상 “어그러진” 상태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신 대로 만민이 일하고 행동하며 서로와 관계 맺을 것입니다. 고통이나 슬픔, 비통이나 비극은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눈물은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이보다 훨씬 더 신나는 일은 우리와 하나남과의 교제에 아무런 방해가 없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신 대로 영원히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을 예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의 도성에는 빛도 쓸 데 없을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시기 때문입니다.(계 21:23) 우리는 영원히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될 것입니다.(유 24, 롬 8:18, 고전 15:43, 고후 4:17, 살전 2:12, 벧전 5:4,10)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은 우리가 그의 얼굴을 볼” 것이라는 사실입니다.(계 22;4)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우주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선하고 의롭고 소망스러운 모든 것이 성취되는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에서 우리는 우리가 지금껏 가진 모든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시 16:11)

 

 

 

함께 생각해 봅시다.

 

 

 

문1) 성경에서 천국에 대해 말하고 있는 내용들을 열거해 보십시오.

 

 

 

문2) 천국에 대한 성경의 묘사는 어떤 면에서 여러분에게 놀라움과 격려와 천국에 대한 더 큰 소망을 가져다줍니까?

 

 

 

문3) 천국의 구체적인 모습을 알게 된 데 대해 하나님께 잠시 감사의 기도를 드려 봅시다.

 

 

 

 

 

 옮긴글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임마.누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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