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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관리/CEO

60대 정주영, 이병철, 구인회는 청년이었다

60대 정주영, 이병철, 구인회는 청년이었다 사람

2011.11.24.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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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가정신1 2011/04/01 09:43  http://blog.hani.co.kr/june/33722 
 
 
 

 

 

 60대 그들의 몸은 늙었지만 그 정신은 결코 늙지 않았다. 60대 그들의 삶은 청년과 같은 열정을 불살랐다.

 

한국비료 사태로 은퇴한 이병철은 전격적으로 복귀한다. 그의 나이 60살이었다. 이병철은 곧바로 삼성전자를 세운다. 당시만 해도 삼성전자가 지금과 같은 세계적인 글로벌 기업이 될 줄 그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60살이 넘었지만, 이병철의 사업가적인 마인드는 녹슬지 않았다. 그는 나름대로 국내외 정세를 파악한 뒤 전자사업에 뛰어들었다. 1960년대 후반 일본에선 전자사업 붐이 일었다. 소니와 마쓰시타 같은 일본의 전자업체들이 나름의 시장을 개척하고 있을 때였다. 대만 역시 전자사업에 나설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병철은 국내 상황을 두고도 사업성을 검토했다. 흑백텔레비전은 웬만한 월급쟁이 봉급으로 엄두를 낼 수 없는 비싼 수준이었다. 그는 전자제품이야말로 기술, 노동력, 부가가치, 내수, 수출발전 등 어느 모로 보아 우리나라의 경제특성에 꼭 알맞은 산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삼성이 전자사업에 진출하는 것을 보면, 이병철의 성격을 읽을 수 있다. 치밀하고 단계적으로 사업을 추진하는 스타일이다. 이병철은 정부가 1960년대부터 추진해온 중화학 공업에 비판적이었다. 시기상조라고 본 것이다.

중화학 공업은 방대한 자금이 들어가고, 고도의 기술과 부품의 안정적인 공급이 필요하고, 계열화된 중소 생산시스템이 있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1960년대는 그럴만한 시기가 되지 못했다.

이병철은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이렇게 얘기했다. “우리나라 산업계는 사회경제적인 요건이 미처 구비되지도 못한 채, 그 과정을 뛰어넘어 1960년대 후반부터 중화학공업에 다투어 진출했다. 그 결과가 어떠했을까. 허다한 유휴설비를 안게 되고 생산성은 낮아 경쟁력이 약해지고, 덤핑 아니고는 수주가 어려운 오늘의 현실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병철은 기업이 자선단체가 아니기 때문에 이익을 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익으로 직원에게 월급을 주고, 국가에 세금을 내고, 주주에게 배당을 주고, 재투자를 하는 것이 기업경영의 최고선이라고 본 것이다.

그는 기업이 적자를 내게 되면 하나의 사회악이라 여겼다. 자본과 재료, 사람 등 사회의 귀중한 자원을 낭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업부실화의 부담은 결국 국민에게 돌아온다는 얘기다.

“생산하는 재화가 소비재냐 생산재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국민에게 필요불가결하냐 않으냐가 문제다. 양질의 제품을 얼마나 저렴하게 사회에 공급하느냐, 바로 이것이 기업의 사명이고 그 존재가치다.”

이병철의 이런 분석으로 삼성은 전자사업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바로 사돈기업인 락희의 금성이 전자사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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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회장, 우리도 앞으로 전자사업을 하려고 하네.” 

1960년대 말 어느 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구인회 LG그룹 회장과 야외 테이블에서 커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다 전자사업 얘기를 꺼냈다. 구 회장이 벌컥 화를 내며 “(이익이) 남으니까 하려고 하지!”라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다. “돈이 되니 사돈이 하고 있는 사업에 끼어들려고 한다”며 분노한 것이다. 사실 삼성과 LG는 사돈 집안이었다. 이병철의 차녀 와 구인회의 삼남이 결혼해 사돈을 맺었다. 게다가 이병철과 구인회는 경남 진주의 지수초등학교에서 책상을 나란히 맞대고 공부하던 사이였다. 하지만 삼성의 전자사업 진출로, 두 사람은 끝내 서먹서먹해지며 맞수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로 갈라선다.

 

구인회는 이병철이 자신의 텃밭과 다름없는 전자사업에 뛰어드는 것에 대해 참 섭섭했다고한다. 구인회는 아들 구자경에게 “그쪽에서 꼭 그래 하겠다면, 서운한 일이지만 우짜겠노. 서로 자식을 주고 있는 처진데 우짜노 말이다. 한 가지 섭섭한 점이 있다면 금성사가 지금 어려운 형편에 있는 점을 노려서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자고 덤비는 것 같은 기라. 그러나 내는 내 할 일만 할란다. 나도 설탕 사업 할락하면 못할 거 있나. 하지만 나는 안 한다. 사돈이 하는 사업에는 손대지 않을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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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이 전자사업에  진출할 때 이병철은 이렇게 말했다. “문제의 핵심은 우리가 어떤 사업을 시작해 물건과 서비스를 제공했을 때, 이를 반겨 사주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를 생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줄 사람이 많을수록 시장은 넓은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그런 넓은 시장에는 항상 먼저 들어가 있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시장은 넓은데 공급하는 사람이 적거나 독과점인 상태가 되면 안주하게 되어 경쟁력이 떨어집니다.”

이병철은 전자사업에 뛰어든 동기를 이렇게 얘기했다. “적절한 경쟁을 하기 위해서는 선점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할지라도 뛰어 들어가야 합니다. 전체 시장은 넓은데 경쟁 상대가 없으면 반드시 외국에서 침범해 오기 때문에, 국내에서 먼저 경쟁을 통해 임을 키운 뒤에 우리도 해외로 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이병철과 구인회의 관계는 최악의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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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인회의 정유 사업 진출은 마지막 불꽃이었다. 락희는 정유 사업으로 또 다른 도약의 발판을 마련할 수 이었다. 1965년 석유공사의 매출이 20억원이었다. 삼성의 외형이 50억원이었고, LG가 30억원이었으나, 20억원을 거머쥔다면 재계 1위를 넘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구인회는 “장사를 하던 럭키가 기업을 하는 그룹으로 탈바꿈하기 위해선 정유 사업 추진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구인회는 정유 사업을 하면서 락희의 새로운 기업문화를 만들어 갔다. 바로 합작이었다. 구인회는 미국의 다국적 석유 기업인 칼텍스와 합작투자협정을 맺고 50퍼센트씩 출자해 550만달러 규모인 호남정유회사를 설립한다.

자신에게 없는 기술과 자본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LG그룹의 성장을 주도해온 기본철학은 합작정신이다. 럭키는 에너지 사업에 참여한 국내 최초 기업이었다. 한국 최초로 외국 기업과 합작투자를 이끌어낸 선례를 만들었다. 그 뒤 LG는 LG필립스LCD LGEDS 등의 합작회사를 만들어 냈다.

 

LG의 기업문화는 '인화'와 '단결'로 요약된다. 개인 간의 인간관계를 중요시하고 사람에 의해 일이 된다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삼성은 인간관계보다는 조직을 더 강조한다. 삼성은 LG에 비해 철저한 능력 중심의 인사가 이뤄지고 따라서 개인의 능력을 키우는 기회가 많이 부여된다고 알려진다. 이러한 기업 문화는 실제 경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합작을 위해서는 자신의 고집을 버리고 상대를 배려해야 한다. 구인회는 그랬다. 그의 스타일을 잘 읽어볼 수 있다.

락희의 전임직원을 상대로 한 세미나에서다. 고려대 조익순 교수가 “결국 독창력이 결여한 사람은 기업가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구인회가 갑자기 질문했다.

“내가 지금 럭키그룹의 회장 자리에 앉아 있지만, 하나도 내 아이디어를 갖고 사업을 한 일이 없소. 모두가 남의 독창력으로 일을 발전시키고 있는 기라. 처음에 크림통을 플라스틱으로 맨들자고 한 것은 내 동생 태희의 착안이고, 금성사를 세워서 전자공업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저기 앉아 있는 윤욱현 상무의 아이디어였고, 석유시대가 올 것이니 호남정유를 설립하자 한 것은 내 동생 평회가 내놓은 이야기였어요. 내가 독창적으로 착안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나는 기업가 될 자질이 없는 거 아닙니까?”

조 교수는 빙그레 웃으면 이렇게 말했다.

“15세기 탐험가 콜럼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도, 부하 선원들의 작은 독창적 의견을 참고로 해서 큰 독창적 결단으로 이룩해 낸 성과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참모진이 내놓은 아이디어를 슬기롭게 판별하고 선택해서 즉각 실천에 옮겨 성공적으로 추진해 나가는 기업인이라면, 이는 충분한 자질을 갖춘 기업가라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질문자인 구회장께서는 독창력이 뛰어난 사업가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구인회는 공개석상에서 자신의 부족한 점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고, 성과에 대한 공로를 아랫사람에게 돌리는 상사로서의 자세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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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은 달랐다. 그는 합작을 싫어했다. 어떤 분야에서 1인자가 되지 않으면 적성이 풀리지 않는 정주영은 합작으로 일하는 것을 내키지 않아 했다.

”나는 이날까지 어느 공장이고 땅을 마련하는 데서부터 시작해 말뚝을 박고 길을 닦아서 그 위에 내 손으로 내가 지어서 시작하지 않은 공장이 없다. “

정주영은 포드와의 합작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변했다. “우리는 포드의 하청업체밖에 안 되었다.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었다. 우리를 하청업자로 만들어 값싼 노동력으로 부품이나 만들어내자는 속셈이었다. 그 속셈에 놀아날 바보가 어디 있나. 우리는 합작을 포기해 버렸다. 그리고 당장 독자적인 개발로 100% 국산자동차를 만들어낼 방안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정주영은 이병철과도 달랐다. 이병철이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단계적으로 사업을 추진했다. 그러나 정주영은 건설 붐을 타고 국내 제일의 건설업체로 부상했고, 중화학 붐을 타고 자동차 생산에 뛰어든데 이어, 조선업에도 뛰어들었다. 선도적으로 앞서나간 것이 그의 주특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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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은 구인회, 땀흘린 정주영, 운 이병철
기업가정신1 2011/03/18 09:41  http://blog.hani.co.kr/june/32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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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구인회는 황금기였다.

“우리도 라디오 한번 만들어 보자!”던 구인회의 소박하지만 원대한 꿈은 우리나라를 전자산업 대국으로 이끈 주춧돌이 됐다. 국산 1호 라디오는 전쟁의 폐허 속에 꿈을 잃고 살던 국민들에게 한마디로 희망을 주었다. 사람들은 왕관마크가 새겨진 골드스타 라디오에 새로운 꿈과 희망의 주파수를 맞춰 나갔다.

구인회는 특유의 도전과 개척자 정신을 바탕으로 라디오를 개발한 이후 우리나라의 전자산업 역사를 써 나가기 시작했다.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이었다. 전자산업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척박한 환경에서 순수한 우리 기술로 전자제품을 만들어 보겠다는 도전정신, 역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개발에 성공해 우리나라 전자산업 성장의 시금석을 놓은 개척자 정신은 50대의 나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돋보이는 대목이다.

당시 사람들이 마땅히 즐길 것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단지 라디오만이 빠른 소식과 정보, 다양한 오락 프로그램 등으로 전쟁으로 피폐해진 사람들에게 위안과 재미를 주고 있었다.

그러나 군내 상황은 라디오 생산기업이 전무한 상태여서 늘어나는 라디오 수요는 모두 외제에 의해 충당되었을 뿐, 국내 전자산업 발전으로는 연결되지 못했다.

전자산업의 발전 가능성과 시장의 흐름을 파악한 구인회는 아무도 라디오 생산에 나서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홀로 전자산업 진출에 관심을 갖고 사업성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전자회사인 금성사를 세웠다.

회사의 형편이나 기술 수준을 생각하면 부품 수입이 현실적인 선택임에도 부품 국산화를 추진 한 것은 높이 평가할만하다. 물론 이 과정에서 숱한 시행착오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금성사가 이룩한 라디오 국산화 성과 중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생산초기부터 부품 국산화율을 60%까지 높은 점이다. 당시 금성사가 사용한 부품 중 외제부품은 전체의 3분의 1 정도에 그쳤다. 이러한 성공은 락희화학이 플라스틱 제품 생산을 통해 축척한 금형기술에 힘입은 바 컸다. 라디오, 선풍기 등에 필요한 플라스틱 제품은 락희화학의 플라스틱 경쟁력을 높이는데 기여하게 된다. 사업다각화의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 셈이다.

만일 구인회가 주변의 반대로 자신의 생각을 접었다면, 현재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는 우리나라의 전자제품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을지 모른다.

전자시장을 만든 금성사는 삼성이 반도체를 진출하기 전까지 초기진입자의 어드밴티지를 살려 1위 업체로 군림하게 된다.

 



 

50대의 정주영은 여전히 에너제틱했다. 현대건설에서 조선과 자동차 사업까지 사업을 확장한다. 정주영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희박한 가능성에 도전해 숱한 성공신화를 남긴다.

백사장 사진 한 장을 갖고 대형선박 두 척을 수주한 것은 바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그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그가 50의 나이에서도 여전히 젊은 열정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처럼 ‘할 수 있다’는 그의 긍정적인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정주영은 500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이용해 상대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에게는 보통사람들이 눈으로 보면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짝지어 생각해 보는 자유분방한 연상력이 있다. 이것이 바로 그가 갖고 있는 창의적인 아이디어의 열쇠인 것이다. 그는 어떤 외부적인 압력이 가해지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떠오르는 엉뚱한 생각을 생산적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그에 따른 값진 성과를 일궈냈다.

그는 본질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갖고 있었다. 구구한 설명보다 핵심에 곧바로 접근하는 스타일이다. 건설, 조선 등 수주업은 신속한 접근과 결정, 추진력이 생명이다. 톱다운 방식은 토론의 필요성을 약화시켰다. 그러면서도 위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일단 결정된 사안에 대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완수해야 그 의미가 존재한다. 지연은 죽음이며 패배며 도태로 통한다. 정주영의 스타일이다.

기발한 착상, 가능성 있는 것에 대한 육감, 이런 것들은 기존의 사물과 현실을 특이한 방식으로 재조합하는데서 나온다. 그리고 여기에는 정신적 융통성이 뒷받침된다. 이미 현실에 존재하는 사실들이 문제해결과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일 때라도, 그는 시공을 뛰어넘는 연상력을 발휘해 그것들을 연결시키고 조합함으로써 문제해결에 맞게 변형시키는 것이다.

자신이 현장에서 막노동으로 출발했고 특히 건설현장에서 많은 세월을 보냈기 때문에 정주영은 일단 현장을 중시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현대 경영진들은 현장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으로 구성돼 있다. 또 신입사원을 뽑을 때도 성적보다는 성격이 활달하고 행동력이 강한 사람을 선호하고, 업무수행 과정에서는 기획능력보다 현장에서의 순발력 있는 일처리를 강조한다.

 



 

 

50대 이병철은 시련의 세월이었다. 기업가는 좌절에 익숙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치는 때이기도 했다.

이병철은 사업의 번창과 더불어 수차례에 걸친 시련을 겪는 등 영욕의 세월을 보냈다. 한국 제일의 거부로 떠오른 그는 1960년 4.19혁명 뒤 전 계열사가 탈세혐의로 조사를 받으면서 그해 7월 난생처음 검찰에 출두해 조사를 받았다. 또 이듬해에는 일본 도쿄 체류 중 5.16 쿠데타가 터지면서 다시 한 번 부정축재자로 몰려 100억환이 넘는 추징금을 부과받기도 했다.

1960년대 군사정부의 '경제 제일주의'에 힘입어 이병철의 사업은 더욱 번창했지만, 다시 한 번 큰 좌절을 맛보게 된다. 바로 '한비 사건'이다.

삼성이 그의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내놓은 평전인 '담담여수(淡淡如水)'는 이 사건을 '파란 많았던 호암의 생애에서 더할 나위 없는 쓰디쓴 체험'이라고 적고 있다.

이병철은 ‘좌절을 겪어야 큰 그릇이 된다’고 말하곤 했다. 평생 사업을 하면서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던 호암은 ‘일이 잘 되어나갈 때는 오히려 다가올 불행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을 체득했던 것이다. 

“떫은 감도 정성스레 잘만 말리면 단감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급히 서두르거나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감은 달게 되지 않는다. 이렇게 떫은 감을 달게 만들기 위해서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업가에게는 항상 지난날에 겪은 일들을 돌이켜보는 마음이 필요하다. 이런 마음가짐이 없으면 아무리 많은 경험을 쌓는다 하더라도 살이 되고 피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가 강조했던 ‘단감론’이다. 기쁨 뒤에 반드시 슬픔이 따르는 경우를 많이 겪어봤던 터라 항상 다음에 닥칠 불행을 염두에 둬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지난 불행을 잊지 않고 거울삼는 것이 오늘의 행복에 도취되는 것보다 몇 배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50대의 꿈이 담겨 있는 공장은 완성을 바로 앞두고, 그의 손에서 멀어져 갔다. 10년간 가져온 그의 꿈은 사라져 버렸다.

이병철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당시를 떠올렸다. “천리의 둑도 개미구멍 하나로 무너진다. 비운의 한비공장은 물론이거니와, 오랜 세월에 걸쳐 각고 끝에 쌓아 올린 사업가로서의 업적도 모두 허사가 되고 마는 것일까.”

이병철은 이렇게 자신을 위안을 삼았다. “10년에 걸쳐서 세 번씩이나 도전해 겨우 완성시킨 한비공장이다. 손을 데는데 아무런 감상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틀림없는 보람과 기쁨이 있었다. 국가가 시급하게 필요로 하는 세계 최대의 비료공장을 내 손으로 완성시켰다는 바로 그 사실이다.”

그리고 용하게 자기 자신을 잃지 않았다. 아들 이맹희는 당시 이병철을 이렇게 떠올렸다. “아버지는 대범한 분이었다. 한비를 헌납하고 나서도 일상생활은 여전했다. 저녁 10시만 되면 잠자리에 들었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6시40분에 식사하고 8시에 목욕하고 출근을 했다.”


이병철, 구인회, 정주영의 40대는 터닝포인트였다
기업가정신1 2011/03/09 09:46  http://blog.hani.co.kr/june/32460 

이병철, 구인회, 정주영은 불혹의 40대에 어떻게 세상에 대응했을까?

이병철과 구인회에게 이 시기는 해방 전후, 한국전쟁이라는 소용돌이가 몰아치던 때였다. 정주영에게 이 시기는 한국전쟁이 막 끝난 뒤 재건사업이 진행되던 때였다.

이병철과 구인회는 40대에 들어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맞는다. 그들은 본격적으로 제조업에 뛰어들면서 비로소 장사꾼에서 사업가로 거듭나게 된다. 40대 정주영은 야전사령관이었다. 그는 한강인도교와 단양 시멘트 공장 건설을 진두지휘하며 현장에서 노동자들과 싸우며 뒹굴며 40대를 보낸다. 그에겐 열정이 있었다.

 

이병철과 구인회는 해방과 한국전쟁이라는 격동기를 맞으면서 다시 한 번 자신을 되돌아 봤다. 자신들의 삶이 과연 사업가의 길을 걸었는지를 성찰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무모한 도전이라는 일부의 비판에 맞서 새로운 사업에 자신을 던졌다.

물론 비판적인 시각은 있다. 그들이 해방 전부터 다소나마 자본을 갖고 있었고, 그런 자본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한국의 대표적 산업자본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 최고 갑부였던 화신백화점의 박흥식은 해방 뒤 몰락했다. 해방과 전쟁은 구체제의 종말을 의미했다. 어떤 사람들에겐 위기였으나, 다른 사람들에겐 기회였다.

이병철과 구인회는 해방과 전쟁을 맞아 새로운 기업가정신을 불어 넣었다. 즉 이들은 40대 중년의 나이였지만, 새로운 도전을 했고 끝내 성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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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이 제조업에 뛰어 때는 40대 중반이다. 이때 이병철은 인생의 절정기를 맞는다. 도정업, 땅 투기, 무역업으로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 본 그였다. 그는 제일제당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제조공업에 뛰어들며 쓴맛 단맛보다 더 한 달콤한 성취감을 느낀다.

그는 한국전쟁 기간 무역업으로 꽤 많은 돈을 벌었다. 그 돈이면 자신은 물론 가족들까지 충분히 먹고 살만했다. 그러나 그는 돈을 많이 벌었다는데 만족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흔 나이에 쉽지 않는 도전을 한 것이다. 물론 그가 대박을 노리고 돈이 될 만한 사업에 뛰어들었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최소한 편한 길, 쉽게 돈을 버는 사업은 하지 않았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이병철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에 보답하기 위해 사업을 했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사업보국’이다.

“독립국가 한국의 기업가로서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 나라 부강의 기초가 되는 민족자본의 형성이야말로 당면한 최우선의 과제이다. 사회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업보국의 결의를 몇 번이고 다졌고, 또 바꾸기도 여러 번 했다. 구태의연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나의 뜻을 이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한다. 26세 때 무위도식의 방황 끝에 사업 입지(立志)를 굳혔던 것을 제1의 각성이라고 한다면, 해방과 함께 결심한 사업보국의 신념은 제2의 각성인 셈이다. 꼭 10년 후인 36세 때의 일이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은 30대 중반이었지만, 어쨌든 그런 생각을 실천에 옮긴 건 40대였다.

 

그가 거창하게 말한 사업보국을 무조건 믿을 수는 없겠지만, 제조업 기반이 전무했던 당시 일자리를 만들고 사람들에게 좀 더 싸게 설탕과 양복을 입게 해준 제조업은 결과적으로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만든 셈이다.

이병철은 이 시기에도 치밀한 분석력을 드러내 보였다. 미국의 전문가가 한국 기술로는 어렵다고 했을 때 48개 항목에 걸쳐 미리 준비해놓은 메모를 보여주는 치밀함을 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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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인회 역시 40대는 인생의 전환기였다. 그 이전까지 그는 포목상에 전념한 장사꾼이었다. 그러다 40대에 들어서면서 포목상에서 벗어나 화장품 사업으로 업종을 전환한다. 안 깨어지는 크림통 뚜껑을 찾다 플라스틱 사업을 하게 된다. 우리나라 화학 산업의 길을 연 셈이다.

 

이병철이 밤늦게까지 노름을 하다 집으로 돌아온 뒤 달빛을 안고 잠든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사업 결심을 했다면, 구인회도 달빛 아래 기업가로의 결심을 하게 된다. 플라스틱 사업에 첫발을 들여 놓은 뒤, 처음 내놓은 빗이 빅히트를 쳤을 때였다. 그는 사업을 더 계속해야 할지, 아니면 스스로 만족하며 거기서 그만둬야 할지 달빛 아래 고민을 했다.

“지금 나는 내 인생의 어디쯤에 와 있는가?”

스스로 자문하며, 그동안 경황없이 뛰어만 왔던 자신의 발자취를 되돌아 본 것이다.

“지금 나는 어디로 가고 있고,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일제 식민지의 억압과 소외 속에서 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냈고 이제 해방된 조국이 앓고 있는 처참한 전란. 그 포연 속의 임시 수도 부산에서 고생 끝에 어찌어찌하여 새로운 사업의 실마리를 잡은 셈이 아닌가. 그러나 사람이란 스스로의 분수를 알아야 하는 법이다. 어떤 일에서나 좌절을 맛보지 않으려면 먼저 지피지기하는 하는 슬기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나는 지금 이 수준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사나이 대장부가 칼을 한번 뽑았으면 끝장을 봐야지. 이 좋은 길목에서 몸을 사리다니 될 법이나 한 소리냐. 갈 데까지 가야 한다. 그것이 사업하는 사람에게 씌워진 굴레이자 소명임에 틀림없다. 구인회! 너 무엇을 꾸물대고 망설이냐, 아침 해돋이와 같은 오늘의 운세를 더욱 힘껏 펼쳐 나가야 한다. 어서 나가야 한다.”

두 갈래 길에서 나그네가 고민하듯, 그는 몇 주일 동안 자신의 앞날에 대해 고민했다. 그런 고민 끝에 내린 결정으로, 그는 우리나라 화학 산업의 선구자란 명예를 받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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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은 두 사람과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현장에서 뛰었고, 현장에서 그런 고민은 배부른 소리였다.

40대 정주영의 키워드는 열정이었다. 그 열정 안에는 현장이 있었다. 정주영은 현장을 장악하려 했다. 

40대에 들어서면 현장과 동떨어져 일하는 경우가 많다. 정주영은 달랐다. 현장은 그의 일터였다. 그는 마치 야전지휘관처럼 현장을 장악했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그는 도전적으로 대응했다. 책상머리에서 계획한 뒤 추진했다면 중도에 포기했을 일들이 수두룩했다. 그러나 정주영은 일단 뛰어든 다음 그때그때마다 순간돌파력으로 헤쳐 나갔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거나 반응 속도가 느린 사람들에겐 말보다 행동으로 밀어붙이는 호랑이 노릇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지 않았다. 동시다발적인 일을 즐겼다.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벌여 놓았지만 수많은 일을 제대로 집약할 줄 알았다. 도저히 어려울 것 같은 일은 단순하게 생각해 풀어나갔다.

 

정주영은 불확실성에 대해 도전했다. 그런 불확실성에 대한 도전은 현장을 장악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현장의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호랑이처럼 으르렁대고, 장애물이 발생하면 인력과 장비 등 모든 자원을 집중해 진두지휘해 나갔다.

그는 순간 기획포착이 강한 동물적 감각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아무리 어려운 장애가 발생해도 그 특유의 저돌성과 적응력으로 해결하곤 했다.

현장에선 ‘적당히 적당히’라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 역시 ‘적당히’라는 말을 대단히 싫어했다. “나는 그 ‘적당히’라는 적당주의로 각자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을 귀중한 줄 모른 채 헛되어 낭비하는 것보다 멍청한 짓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인간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한 생애 동안, 우리는 역사에 남을 훌륭한 정치가가 될 수도 있고, 학자가 될 수도 있고, 혁명가가 될 수도 있고, 문학가나 음악가, 화가, 그리고 기업가가 될 수도 있다. 지금 그렇게 살고 떠나서 우리의 존경을 받은 많은 인물들처럼 말이다.

그 사람들이라고 두 생애, 세 생애 동안 이룬 일들이 아니다. 한 생애에 그만한 일들을 해놓고 떠난 것이다. 개인의 소질이나 능력, 환경, 우수성의 차이로 물론 누구나 다 한 생애에 그만한 일들을 해날 수는 없다.

그러나 주어진 시간을 적당히 낭비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는 삶을 산다면, 누구나 나름대로의 분야에서 나름대로의 성과를 거두면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그 삶은 성공적인 삶인 것이다. “

 

정주영은 현장 사람들과 뒹굴었다. 이병철은 아랫사람을 업무 이외에는 거의 만나지 않았지만, 정주영은 공석이나 사석을 가리지 않고 자주 만났다. 정주영은 “나는 성공한 기업가가 아니라 단지 부유한 노동자‘라고 말할 정도로 사원들과 즐겨 어울렸다.

정주영은 ‘아무개를 데리고 있다’는 말을 아주 싫어한 기업인이었다. 자신이 경영주이기는 하지만 함께 일하는 것이지 월급을 준다고 해서 데리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40대, 정주영은 여전히 젊었다. 젊은 그는 솔직했다. 당시 정주영은 “나라를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해 그때까지는 내 가족들, 내 직원들만 챙기면서 나 자신의 발전만을 생각하며 살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철이 늦게 들었다고 할 수도 있고, 그가 여전히 젊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 역시 기업이 커지면서부터 돈이 아닌 다른 가치를 추구하게 되었고, 그 결과 정치판이나 통일운동에도 뛰어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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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과 이병철, 한때는 실패자였다
기업가정신1 2011/02/16 09:29  http://blog.hani.co.kr/june/32041 

정주영, 이병철, 구인회. 20대엔 그들은 모두 실패자들이었다.

세 사람 모두 재기가 힘들 정도로 쫄딱 망했다. 정주영은 자신이 설립한 첫 공장에 화재가 나 빚 방석에 앉았다. 이병철도 무리한 땅 투기로 그가 벌었던 대부분을 것을 내놓아야 했다. 구인회는 1년 만에 100석에 이르는 적자를 보고, 염치없게도 아버지에게 땅문서를 담보로 잡아달라는 요청까지 해야만 했다. 

 

그들은 크고 작은 두어 번의 실패를 겪었다. 동업한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고, 주위 사람들은 그들의 재기에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실패 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범부로 살았거나, 술주정뱅이가 됐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보란 듯 일어난다.

그들이 사업에 실패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1930년대 세계 공황 여파에 따른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 또 한 번의 실수가 모든 것을 앗아가기도 했다. 빈약한 자본으로 제대로 사업을 벌이지 못하기도 했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처럼 실패를 하고 좌절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위기에 대처하는 자세는 달랐다. 그 차이가 위대한 기업가와 실패한 사업가로 갈라놓게 된다.

정주영은 중일전쟁으로 경일상회 문을 닫아야 했다. 갑작스런 국제정세 변화로 사업은 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첫 번째 사업 실패였다. 그러나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쌀가게를 하면서 돈을 조금 모아 둔 상황이었다.

 

정주영이 큰 타격을 받은 것은 그가 자본을 빌려 시작한 아도서비스 공장에서 예상치 못한 화재가 일어나면서다. 맨주먹으로 시작해 직원 50여명의 회사로 성장시킨 곳이었다. 외상 빚도 다 못 갚은 처지에 타버린 자동차 값도 물어줘야 했다. 그는 빚에 빚을 진 빚쟁이로 추락했다. 

 

보통사람들이라면 쉽게 포기를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정주영은 그 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그러나 나는 좌절할 수 없었다. 좌절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길은 오직 하나뿐이라는 결론을 내고 다시 오윤근 영감을 찾아가 무릎을 꿇고 앉아 사정을 했다.”

그리고 그는 사업을 하면서 한평생 신조로 간직하게 되는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를 가슴속 깊이 묻어두게 된다.

 

정주영이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신용이었다. 정주영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성공할 수 있는 사업이 있는데 돈이 부족하다며 빌려 달라는 소리를 많이 듣습니다. 그렇지만 돈을 빌리기 어려운 것은 빌려주어도 되겠다는 믿음을 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용만 있다면 돈은 어디든지 있습니다.”

오윤근 영감이 담보도 없이 두 번씩이나 큰돈을 빌려 주었던 것도 정주영이라면 틀림없이 갚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서다. 정주영은 “약속은 신용이고, 신용은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는 재산”이라고 말했다. 신용은 기업가의 마음가짐이자 그의 자산이었다.

 

정주영은 실패를 겪으며 두 가지를 깨닫는다. 하나는 ‘빈대의 교훈’이다. “나는 빈대한테서도 교훈을 얻었다. 사람들은 곤경에 처하면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길이 아무 데도 없다는 체념의 말을 곧잘 한다. 그렇지 않다. 찾지 않으니까 길이 없는 것이다. 빈대처럼 필사적인 노력을 안 하니까 방법이 없어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실패에 위축되는 사람을 빈대만도 못한 사람이라며 내려 보았다. “나는 지금도 어려운 일에 부딪히면 빈대의 노력을 상기한다. 대단치도 않는 난관에 실망, 위축되어 체념하려는 사람을 보면 나도 모르게 빈대만도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하나는 ‘운’에 대한 도전적인 시각이다. “운은 무엇인가? 운은 별 것 아닌 때를 말한다. 좋아질 수 있는 기회 즉, 좋은 때가 왔을 때 그걸 놓치지 않고 꽉 붙잡아 제대로 쓰면 성큼 발전하고, 나쁜 때에 부딪쳐도 죽을힘을 다해 열심히 생각하고 노력하고 뛰면 오히려 좋은 때로 뒤집을 수 있다.”

운이 사람의 성패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운을 결정한다는 얘기다. “운 타령을 잘하는 게으른 사람은 좋은 때가 와도 게으름과 불성실로 어영부영하다 그냥 놓쳐버리고 평생 좋은 때가 없는 불운의 연속 속에 불행하게 산다.”

 

그가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젊음이었다. 젊다는 것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놓는 큰 밑천이다. 정주영이 현대건설 회장이었을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젊을 때였으니까 그것을 했지 지금 같으면 좌절을 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병철은 그 스스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고 할 정도로 큰 사업 실패를 맛보게 된다. 그러나 그 역시 위기에 대처하는 자세는 남달랐다. 실패를 분석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실패를 통해 더 크게 사업을 일구는 탁월함을 보였다.

 

이병철은 협동정미소를 설립한 뒤 1년 만에 자본금의 3분의2를 까먹으며 부도 위기에 몰렸다. 그가 어려움을 겪은 이유는 사업을 큰 시각에서 보지 않고, 좁은 시각에서 사업을 바라봤기 때문이다.

이병철의 사업스타일은 처음부터 최고의 기계와 최고의 규모로 시작하는 데 있다. 협동정미소도 그랬다. 그는 최고, 제일 좋은 정미소 기계를 사들여 정미소 사업을 벌였다. 규모의 경제를 벌이겠다는 전략이었다. 도정할 쌀을 충분히 확보하는 것을 사업 성공의 핵심전략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도정할 쌀을 확보하는데 급급했다. 쌀값이 어떻게 움직일 것이라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

 

그러나 쌀값은 마산지역에서 결정되는 게 아니었다. 쌀값은 인천의 미곡소 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에서의 영향을 받았다. 최고의 도정기계로 쉴 새 없이 돌려도 쌀값을 예측하지 못하면 적자가 나는 구조였다.

결국 사업한지 채 1년도 안 돼 자본금 대부분이 잠식당하는 실패를 겪게 된다.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도정업을 쌀을 빻는 것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도정업은 미곡, 도정, 운송, 유통의 큰 흐름에서 수요와 공급을 꿰뚫고 있어야 성공할 수 있는 사업이다.

 

그는 실패에 그냥 머물러 있지 않았다. 왜 실패했는지 원인을 분석하고 대안을 찾아 나갔다. 이런 노력 끝에 1년 만에 다시 사업을 제자리에 올려놓았다.

사실 사업에 실패했을 때 실패 원인을 찾고 그 사업을 계속해 나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패닉상태로 빠져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 쉽지 않다. 실제로 그와 동업한 친구 중 한명은 더 망하기 전에 나머지 자본금이라도 건지자며 사업을 접자고 이병철에 요구하기도 했다.

이병철은 실패 원인을 이성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냉철함과 다시 사업을 해서 성공할 수 있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 뒤 그는 운수업에도 진출했고, 곡물거래 사업까지 나서게 된다.

 

실패를 딛고 일어선 이병철은 교만해진다. 은행 빚을 왕창 빌려 땅 투기를 한다. 그러나 일제의 비상조치로 땅값은 폭락한다. 은행 대출로 땅을 사들였던 이병철은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내몰린다. 그때 사두었던 땅은 모두 시가보다 싸게 되팔아야 했다. 정미소와 운수회사까지 넘겨야 했다.

 

이병철은 술회한다. “교만한자 치고 망하지 않는 자 없다.”

정주영은 실패를 직관적으로 분석한 반면, 이병철은 상당히 분석적으로 실패를 분석했다. 실패를 통해 이병철이 얻은 교훈의 내용은 이렇다.

첫째, 사업은 시대의 움직임을 정확히 통찰해야 한다.

둘째, 무모한 과욕을 버리고 자기 능력과 한계를 냉철히 판단해야 한다.

셋째, 우연한 행운을 바라는 투기는 절대로 피해야 한다.

넷째, 직관력의 연마를 중시하는 한편 제2, 제3의 대비책을 강구해야 한다.

다섯째, 대세가 기울어 이미 실패라는 판단이 서면 깨끗이 미련을 버리고 차선의 길을 택해야 한다.

 

이병철은 비스마르크 시대의 명장 몰트케 원수의 명언을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나는 항상 청년의 실패를 흥미롭게 지켜본다. 청년의 실패야말로 그 자신의 성공 척도다. 그는 실패를 어떻게 생각했는가, 그리고 어떻게 거기에 대처했는가. 낙담했는가. 물러섰는가. 아니면 더욱 용기를 북돋아 전진했는가, 이것으로 그의 생애는 결정되는 것이다.”

 

이병철이 얻은 실패의 추억은, 그 뒤 그의 사업에 밑거름이 된다. 이병철의 신규 사업을 보면 무모한 과욕에서 비롯된 것이 거의 없다. 수십억 달러의 자금을 투자해야 하는 반도체 사업을 시작했을 때, 그는 국내외의 상황을 치밀하고 꼼꼼하게 읽은 뒤 투자를 진행했다. 이는 삼성의 기업문화로 발전하게 된다.

 

구인회는 협동조합을 운영하면서 포목 수요와 유통경로를 치밀하게 조사한 뒤 사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소규모 개인 경영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점포규모가 작고 진열된 포목의 종류나 재고량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기존 업체와 경쟁은 벅찼다. 무엇보다 자본이 더 필요했다. 경영규모를 확대했다.

 

1936년 7월 남강이 범람하는 대홍수로 진주의 전 시가지가 물속에 잠기는 병자년 침수피해가 있었다. 구인회상점도 침수됐다. 그러나 구인회는 모든 재산이 휩쓸러 갔는데도 남들같이 절망하지 않았다.

고객의 신뢰와 거래처와 맺어온 신용, 재기의 도전정신과 집념의 개척주의 정신으로 다시 일어났다. 더 나아가 구인회는 대홍수 뒤 풍작에 따른 포목경기의 상승을 예견했다. 그 뒤 그는 쌀2백 가마 값에 해당하는 거금 1만원을 빌려 포목을 사들였고 풍년의 호경기에 팔아 많은 이익을 올렸다.

 



 

  

부자들에겐 인문학이 있었다
기업가정신1 2011/01/28 07:52  http://blog.hani.co.kr/june/31709 

정주영, 이병철, 구인회의 삶 속에 공통적으로 녹아들어가 있는 게 하나 있다. 인문학이다. 그건 다름 아닌 대학이나 논어와 중용 같은 유교적인 가치관이었다.

 

정주영은 훈장인 할아버지에게 3년 동안 한학을 배웠다. 서당 3년에 <천자문>에서 시작해서 <동몽선습><소학><대학><맹자><논어>를 배우고, 무제시, 연주시, 당시도 배웠다. 이렇게 공부 한 뒤 보통학교에 들어간 정주영은 학교 공부는 배울 것이 별로 없어서 학교에 있는 시간이 나한테는 실컷 노는 천국이었다고 회고한다.

소학교에 들어가기 전 3년 동안 할아버지의 서당에서 열심히 암기하고 뜻을 익혀 할아버지이자 훈장이었던 어른 앞에서 달달달 외워 보여드렸던 것은 공부가 재미있어서도 뜻을 이해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회초리로 사정없이 종아리를 맞아야 하는 매가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그때 한문 공부는 종아리를 맞아 가면서 괴롭게 배웠지만, 그 한문은 정주영의 일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지식 밑천의 큰 부분이 되었다.

 

정주영의 공부는 초등학교에서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가 배운 <대학>이나 <자치통감> 칠언시 오언시는 요즘 대학생들도 한문으로 읽고 해석할 수 없는 높은 수준이었다.

가방끈이 길지 않았지만, 정주영은 어릴 때 배운 인문학에서 세상이치를 터득하는데 필요한 대부분을 배운 셈이다.

그때 배운 한문 글귀들의 진정한 의미는 자라면서 깨닫게 된 것이다.

 

정주영이 서울로 세 번째 가출했을 때도 그는 책에 빠져 들었다. 학원에서 열심히 부기를 배우고, 학원 공부가 끝나면 숙소에 처박혀 죽어라 책만 읽었다. 나폴레옹전, 링컨, 삼국지 등을 읽은 것도 그때였는데, 돈이 없어 책을 많이 사들이지 못하는 대신 읽은 책을 읽고 또 읽곤 했다.

정주영은 그와 비슷하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백절불국의 강인한 정신력과 용감무쌍한 투쟁력만으로 마침내 프랑스 공화국 황제가 된 나폴레옹전은 그에게 무한한 희망과 용기를 북돋워 주어 수없이 반복해 읽었다.

링컨 역시 그와 아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산골에서 태어나 도시로 온 것도 비슷했고 노동을 한 것도 비슷하고, 나처럼 항상 책에 굶주려 있었던 것도 비슷했다.

 

서울에 와서 그토록 굶주렸던 책을 한두 권씩 사볼 수 있는 것도 그에게는 더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소설도 읽었지만 내 돈을 주고 산 책은 주로 위인전이었다. 위인들의 전기를 읽다가 특별히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은 공책에 일일이 베껴놓았다가 틈틈이 반복해 읽기를 거듭했다.

첫 새벽에 일어나 밤늦도록 위인전에 도취되어 읽기를 거듭했다. 부기 공부 외에 그것도 나름대로의 공부였던 셈이다.

 

이병철도 어린 시절 5년 동안 자연스럽게 서당 문산정에서 <천자문>과 <통감> <논어> 등을 배웠다. 이병철은 최고의 경영 바이블로 삼았던 책이 <논어>이었다.

“가장 감명 받은 책 혹은 좌우에 두는 책을 들라면 서슴지 않고 <논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나라는 인간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은 바로 <논어>다. 나의 생각이나 생활이 <논어>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만족한다. <논어>에는 내적 규범이 담겨 있다. 간결한 말 속에 사상과 체험이 응축되어 있어, 인간이 사회인으로서 살아가는 데 불가결한 마음가짐을 알려 준다.”

 

이병철이 논어 구절을 자주 인용하면서 자신의 경영철학을 피력했다. 다섯 살부터 열 살 때까지 서당 시절에 그는 논어의 요체를 외우고 익혔던 것이다.

‘사람을 의심하면 쓰지 말고, 일단 쓰면 의심하지 말라’는 논어의 한 구절은 이병철이 기업가로서 자우 인용하던 문구였다. 실제로 이병철은 기업경영을 할 때 일단 채용한 사람은 의심하지 않았다. 의심하지 않은 것에서 더 나아가 그에게 모든 일을 믿고 맡겼다.

 

이병철의 논어경영은 일본재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시부자와 에이치(澁澤榮一, 1840~1931)의 경영철학과 닮은 점이 있다. 시부자와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 이후 논어사상을 기초로 500여개의 기업을 세운 일본 자본주의의 창시자다. 시부자와는 ‘한손에는 논어를, 한손에는 주판을’이라는 슬로건 아래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 ‘도덕과 경제가 하나’라는 그의 주장은 얼핏 모순돼 보인다. 하지만 그는 “올바르게 번 돈을 올바르게 쓰는 것이 진정 국가와 사회에 공헌하는 길”이라고 주창했다.

 

2년6개월 만에 복원된 삼성그룹 컨트롤타워(옛 전략기획실)에 내정된 직원들도 <논어> 읽기가 한창이라고 한다. ‘학(學)’으로 시작해 ‘지인(知人)’이란 단어로 끝나는 <논어>가 인재 중시와 미래 신기술 연구라는 그룹의 핵심가치를 잘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회사가 이른바 ‘뉴 삼성’의 모토를 ‘기본으로 돌아가자(back to the basic)’에서 찾고 있다는 얘기다.

 

구인회 역시 홍문관 교리를 지냈던 할아버지에게 여섯 살 때부터 한학을 배웠다. 구인회는 13살이 되면서 <논어> <맹자> <대학> <중용>과 <시경> <서경> <역경> 등 사사삼경을 거의 다 떼었다고 한다.

구인회는 18살에 서울에 상경해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입학하자마자 교내 독서회에 가입해 많은 책을 탐닉하며 정신적인 교양을 쌓아나갔다. 마치 지식에 굶주린 사람과도 같이 마음을 살찌게 하기에 힘쓴 것이다. 책을 통해 새로운 문화를 밀물처럼 받아들였다.

구인회 역시 ‘인화’라는 유교적 가치관을 평생의 덕목으로 삼았다. 요즘 같은 시대에 “웬 구닥다리 같은 유교적 규범이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인화는 구씨와 허씨가 동업한 회사가 큰 말썽 없이 단합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되었다.

 

정주영, 이병철, 구인회의 공통점은 어렸을 때부터 배우고 익힌 한학, 즉 유교적 가치관을 기반으로 철저한 자기관리(수신)를 통해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한데 있다. 자기관리를 하지 않고서는 탐욕과 공포를 오가는 치열한 사업경쟁에서 제대로 원칙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원칙을 지키게 하는 좋은 방법이 바로 인문학이다. 인문학에는 사람으로서 지켜야할 당연하면서도 쉬운 말이 나오지만, 평생을 이를 지키며 살아가기는 쉽지 않다. 세상과 자기와의 싸움에서 탐욕과 유혹에 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틈틈이 인문학을 다시 보며 그 뜻을 다시 내면화하는 것이다.

 

지금 젊은이들에게 그동안 박물관에나 가 있어야 할 고리타분한 학문으로만 생각했던 한학, 즉 인문학이 왜 지금까지 열풍을 불고 있는 것일까.

과거는 무조건 버려야 하는 지나가버린 쓸모없는 시간의 흔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논어>에 나오는 ‘온고지신’처럼, 역사를 통해 과거의 소중한 지혜를 배우고 익혀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하는 새로운 지혜의 근간으로 삼아야 된다는 아주 평범한 진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재벌 아들을 만든 어머니는?
기업가정신1 2011/01/26 07:53  http://blog.hani.co.kr/june/31651 

아들은 갖은 가출로 어머니의 속을 무던히도 썩였다. 아들이 가출했을 때 어머니는 아들이 벗어놓고 간 옷을 찢으면서 소리 내어 울기도 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10살이나 났다. 가난한 살림에 책임질 형제는 여섯이나 매달려 있는 아버지에게 딸을 내줄 사람은 없었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노총각으로 지냈다. 장남인 아들이 태어난 해는 1915년. 그때 아버지는 32살이었고 어머니는 22살이었다.

아들은 가난해서 장가도 못 간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무엇 때문에 시집 온 이유를 몰랐다. 다만 동네어른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굴러온 복덩어리였다. 어머니 역시 부지런한 아버지에게 절대로 뒤지지 않는 일등 농사꾼의 일등 아내였다.

무뚝뚝한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매사에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 중에서도 맏아들에 대한 사람은 유난했다. 과일도 감자도 강냉이도 제일 크고 잘 생긴 것은 맏아들에게만 주었다. 남동생은 “형한테는 밤낮 큰 것만 주고 나는 작은 것만 줘서 내가 이렇게 작단 말이야”하며 투정을 부릴 정도였다.

여동생은 “어머니가 어디를 가시건 큰 바위를 보시든, 큰물을 보시든, 산을 보시든, 나무를 보시든, 일념으로 나 잘되라는 기도를 하셨다”고 말했다.

그런데 기도 내용은 남편을 위한 것도, 다른 형제들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오직 맏아들을 위해서였다.

“나는 잘난 아들 정주영이를 낳아놨으니 산신님은 그저 내 아들 정주영이 돈을 벌게 해주시오.”

이 한가지뿐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들은 한 번 더 가출해 어머니의 속을 썩인다. 물론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처럼 그는 한국에서 평생을 다 쓰고도 모자랄 만한 돈을 번다.

 

그가 네 번째로 집을 나간 것은 가난으로 빚어진 부부싸움이었다.

서울 부기학원에서 아버지에게 붙잡혀 동물원 구경을 하고 고향에 내려온 뒤, 그는 아버지를 생각해서 죽어라고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

“부지런히 농사지어 농토 넓히고 열심히 소 키워 아버지처럼 동생들을 결혼시키고 그렇게 살아보자.”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그해 또 다시 흉년이 들었다. 흉년이 들면 집집마다 부부싸움이 잦아진다. 어렵고 힘든 살림에 신경이 날카로워져서다. 아들이 기억하는 부부 싸움은 언제가 먹고사는 문제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양식이 떨어질 때면, 아버지에게 양식이 떨어졌다는 말을 하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말을 꼭 아침 밥상머리에서 했다. 그러면 사는 게 힘들었던 아버지는 언제나 같았다.

“살 판게 언젠데 어느새 다 먹었냐?”

궁색한 가장의 궁색한 답변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면, 어머니는 그냥 “글쎄 그러네요” 정도로 받지는 않았다.

“나 혼자 다 먹었소?”

“양식 떨어졌다는 소리를 왜 꼭 아침 밥상머리에서 하냐?”

“밥상머리에서 안 하면 언제 하냐, 누구는 하고 싶어 하냐?”

성격이 강한 어머니는 한마디도 지지 않으셨다. 결국 감정이 격해지고 밥상이 날아가곤 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서울로 가서 농사가 아닌 다른 일로 꼭 성공하고 말겠다.’ 열아홉 살 되던 해 봄, 아들은 네 번째로 집을 떠났다. 그 네 번째 가출이 정주영의 마지막 가출이 되었다.

 

정주영의 화끈한 성격과 센스 있는 말솜씨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다. 정주영의 말 그 자체는 어눌해 그의 말에는 유머가 녹아져 있었고 센스가 들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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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아들을 36살에 낳았다. 늦둥이 아들은 할머니와 어머니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면서 자라났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엄한 편이었다. 아들은 아버지와는 나이차이도 꽤 있었고, 게다가 장남도 아니었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에 가까이 다가가기를 두려워했다.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정에 약했다. 부잣집 아내였지만 어려운 사람을 그냥 보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마을에 해산한 집이 있으면 꼭 미역과 쌀을 보냈고, 양식이 떨어졌다고 하면 늘 쌀이나 보리쌀을 들려 보냈다. 

“어려운 사람을 동정할 줄 알아야 한다. 이른 봄 찔레꽃이 필 무렵은 가난한 농촌에서는 가장 어려울 때니 무심히 넘겨서는 안 된다.” 어머니는 이따금 아들에게 타이르곤 했다. 찔레꽃이 필 무렵은 바로 보릿고개였다. 아들이 나이 들어 찔레꽃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그 모습을 문득문득 떠올렸다.

 

아들은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잡고 늘어지며 조르기 일쑤였다. 학교를 여러 차례 옮길 때마다 아들은 아버지 보다 어머니에게 먼저 다가가 부탁했다. 어머니는 막내아들을 대신해 아버지를 설득해 허락을 얻어냈다. 아들은 정서적으로 아버지 보다 어머니가 훨씬 더 가까웠던 것이다.

다가서기 힘든 아버지, 장남인 형에 대한 부담으로 막내아들은 어머니에게 보다 집착했다. 이른바 막내 콤플렉스였다. 어머니 역시 늦둥이 막내아들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결국 막내아들은 자신이 설자리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10대와 20대를 보낸다. 학교를 이곳저곳 옮긴 것도 그렇고, 20대에 노름에 빠져든 것 역시 그랬다. 그러다 보니 막내아들은 스스로 결정하고 독립하는 일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좋은 환경에서 교육을 받고 대기업 총수로 성공한 예는 드물다. 하지만 이병철은 달랐다. 그가 사업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다른 부모들은 하루 빨리 자기 자식을 남들이 인정하는 일정한 수준까지 끌어올리려 하며 여기서 벗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병철의 어머니는 정해진 궤도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이것을 눈감아 주었다. 자식이 바라는 모든 것을 다 허용해 준 어머니의 태도는 이병철의 성격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병철은 자신의 삶을 자신이 선택했다. 스스로 판단했고 주저 없이 행동했다.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그냥 따라가고 있거나, 또는 사회의 정해진 틀에 따라 살려고 하지 않았다. 이병철은 주어진 조건에 자기를 맞추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주관적 판단에 의해 자신의 삶을 주장하고 관철했다. 그는 오랫동안 자신의 의지를 바탕으로 선택을 해왔고, 여기서 사업가의 기질을 갖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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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집안의 유교문화가 강했기 때문이다. 가문에 여자들의 경영참여 전례가 없고, 장자승계 원칙을 창업세대부터 3대째 내려오고 있다.

구인회의 어머니는 존재감을 찾을 수 없다. LG에선 며느리는 물론 딸들조차도 거의 드러나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그룹에서 운영하는 문화 사업에도 다른 그룹과는 달리 여자들이 간여하는 경우는 없다. 

오리온그룹과 동양그룹처럼 두 딸이 각자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아 여성 경영인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경우도 있지만 LG가의 경우 여자 가족은 경영 참여가 철저하게 배제되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