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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관리/CEO

아산 정주영 탄생 100주년, 그가 남긴 발자취거상 임상옥 이래 가장 존경받는 갑부이자 초인

 

월요신문   2015. 11. 26김영 기자  |  young@wolyo.co.kr

[월요신문 김영 기자] 아산 정주영 탄생 100주년 기념식에 정재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24일 서울 한남동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서 열린 '아산 정주영 탄생 100주년 기념식'에서 가족 대표로 단상에 오른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은 아버지인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전 명예회장을 회상하며 목이 멘 듯 울먹이는 인사말을 전했다. 

   
고(故) 정주영 회장.

“선친께서는 그동안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해외시장을 개척해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초석을 놓으셨습니다. 저희 자손들도 선친의 뜻과 가르침을 이어받아 세계 경제의 주역으로 새롭게 도약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해 나가겠습니다.” 

정몽구 회장의 이러한 인사말은 현대가의 적통을 잇는 장자로, 생전 정 명예회장이 추구해온 ‘기업보국’의 숭고한 뜻을 계승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이날 기념식은 정홍원 아산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위원장(전 국무총리)을 비롯해 이명박 전 대통령,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등 정·관·재계 및 언론계·학계·사회단체 관계자,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됐다. 재계 인사로는 허창수 전경련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손경식 CJ그룹 회장, 구자열 LS그룹 회장 등 국내 30대 그룹 총수들이 대부분 참석했다. 

정홍원 기념사업위원장은 기념사를 통해 "아산은 전후 황무지나 다름없던 우리나라에서 처음부터 중후 장대형 생산기업으로 사업을 펼쳤고, 가장 먼저 해외시장을 개척한 한국 경제의 선구자였다"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불굴의 도전을 계속해 온 아산의 의지는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에게 큰 좌표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대학생이 가장 존경하는 기업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전쟁 폐허 속 무엇 하나 성한 것 없던 한국 경제를 맨손으로 일으켜 세운 기업가 중 한 명이다. 이런 그에 대해선 외신들 역시 불굴의 도전정신을 바탕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끌어 낸 ‘아시아의 거인’이라 부르고 있다. 기업가로서 성공 외에도 그는 우리 정치권에 신선한 바람을 몰고 온 정치인 중 한명으로 기억되고 있다. 아울러 그는 남북 관계개선 및 민간교류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가 있었기에 금강산관광도 개성공단 남북경협도 가능했기 때문이다.

지난 2010년 자유기업원은 전국 20개 대학 학생 2019명을 대상으로 ‘다시 부활하기를 바라는 기업인은?’이란 설문조사를 했었다. 

당시 조사에서 1위에 오른 이는 고 정주영 명예회장으로 득표율은 65%였다. 2위인 고 이병철 삼성 창업자(25%)와 비교 두배 이상 차이를 보인 것. 이는 산업화 시대를 경험해 보지 못한 오늘날 젊은 세대에게도 기업가로서 정 명예회장의 업적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실제 정 명예회장에 대해 우리 국민 대다수는 ‘한국 경제를 일으켜 세운 불세출의 거인’으로 기억하고 있다. 황무지뿐이던 대한민국에 건설과 중공업 그리고 자동차 산업의 토대를 닦은 이가 그였기 때문이다. 

글로벌 경쟁이 한층 치열해진 근래 들어서는 정 명예회장 특유의 도전정신에 주목하는 이들이 더 늘고 있다. 정 명예회장 탄생 100주년을 맞아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그와 같은 걸물이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하다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맨주먹으로 무작정 상경 

정주영 명예회장은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강원도 통천군 노상리)에서 6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송전소학교(지금의 초등학교) 졸업이 정 명예회장의 유일한 공식 학력으로 그의 부모님은 큰아들이 농사꾼이 돼 생계를 이어가 주길 바랐다고 한다. 

반면 정 명예회장은 농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도시로 나가 성공하겠다는 일념이 가득해 10대 시절 네 차례나 가출을 단행했다. 그 중 한 번은 소 판 돈 70원을 가지고 서울로 가출, 부기학원에 등록하기도 했다. 

19세 때 집을 나온 뒤로는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여느 조선인 노동자들이 그렇듯 인천부둣가 허드렛일부터 시작해, 온갖 힘든 중노동의 나날이 이어졌던 것.

훗날 정 명예회장은 “부둣가 인부 합숙소에서 지내며 빈대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는데, 어떤 방법을 써도 빈대가 집요하게 달라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끈기를 배웠다”고 밝히기도 했다.

사업 초창기 정주영 명예회장은 기회와 위기가 반복되는 귀중한 경험을 쌓았다.

그에게 찾아온 첫 번째 기회는 서울 신당동에 있던 쌀가게 ‘복흥상회(福興商會)’에 점원으로 취직한 것이다. 장부를 쓸 줄 알고 근무태도가 성실했던 그를 가게 주인이 마음에 들어 했고 방탕했던 아들 대신 정 명예회장에게 가게를 넘겨 준 것이다. 그러나 정 명예회장의 쌀장사는 오래가지 못했다. 쌀가게를 인수한지 2년째인 1940년부터 일제가 쌀 배급제를 실시했기 때문이다.

이후 정 명예회장은 경영난을 겪고 있던 자동차 수리공장 ‘아도서비스’(ART SERVICE)를 빚을 내 인수했는데, 그후 얼마 지나지 한 직공 실수로 공장 전체가 불에 타 없어졌다.

이와 관련 재미난 일화도 하나 남아 있다. 자동차 정비공장을 인수할 당시 돈을 빌렸던 후원자가 있는데 건물 전소 후 다시 그를 찾아가 돈을 또 빌린 것이다. 

절대로 손해를 보지 않기로 유명했던 이 투자자에게 정 명예회장은 “당신이 돈을 빌려줘 떼인 적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나에게 또 돈을 또 빌려주지 않으면 유일하게 돈을 떼이게 될 것”이라 말하고 돈을 빌렸다고 한다. 

기업가로서 정주영 명예회장의 본격적인 면모를 보인 것은 해방 이후부터다.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운영하던 그는 해방 직후 건설업자에게 돈이 몰린다는 사실을 깨닫고1947년 현대토건(지금의 현대건설)을 설립해 건설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당시 정 명예회장은 미군부대에서 발주하는 각종 공사를 수주해 회사를 키워나갔다. 특히 그는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 방문에 맞춰 진행된 미군 묘지 잔디 입히기 공사를 진행하며 사업가로서 기지를 보여주기도 했다. 겨울철이라 잔디 구하기가 어려워지자 일단 보리싹으로 묘를 덮고 봄에 잔디를 다시 심었던 것으로 그 이후 정 명예회장과 미군 사이에 두터운 신뢰가 쌓였다고 한다.

벤처정신으로 무장한 기업인 

한국전쟁 이후 정 명예회장은 각종 재건 공사를 수주해 회사를 키워나갔으며 1964년에는 자체 시멘트 공장을 설립하기도 했다. 1965년에는 태국의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에 참여하며, 국내 건설사 중 최초로 해외 일감을 따내기도 했다. 

1971년에는 조선소 건설을 위한 차관 유치에 나서며 도전정신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줬다.

조선소를 지어달라는 정부 청탁을 받은 뒤 울산 미포만 해변 사진 한 장과 외국 조선소에서 빌린 유조선 설계도 한 장 등 몇 장의 서류만 가지고 유럽 투자자를 찾아가 거액의 투자 유치에 성공한 것이다.

이때 정 명예회장은 영국 바클레이 은행의 차관 유치를 위한 추천서 부탁을 위해 만난 A&P 애플도어 롱바톰 회장에게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이나 앞선 1500년대에 철갑선을 만들었소. 그 잠재력만은 충분하다고 생각하오”라고 말하는가 하면, 선박판매처를 먼저 찾아오라는 요구에 조선소도 없는 상태서 세계적 해운기업인 오나시스 가문에 배를 팔기도 했다. 

울산에서 조선소 건립 공사를 시작할 때는 뻘 때문에 매립 작업이 난항을 겪자 큰 폐선 두척을 착저시켜 둑으로 이용하는 방법을 직접 고안해 내기도 했다. 

자동차산업과 관련해서도 그는 협력관계를 맺고 있던 일본 미쓰비시측이 무리한 요구를 하며 연구소 폐쇄를 요구하자 이를 거절한 뒤 독자개발 엔진인 알파엔진을 국내 최초로 탄생시키기도 했다.

정 명예회장은 또 오일쇼크가 일어나자 이를 기회로 판단하고 남들이 진출을 꺼리던 중동으로 진출해 엄청난 외화를 벌어들이기도 했다. 외국 건설사 입찰가의 절반 이하 수준에 공사를 따낸 뒤 이를 별다른 문제없이 마무리 지으며 신뢰를 쌓은 것. 

정 명예회장이 따낸 중동 사업 중 하나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산업항’ 공사의 수주금액은 당시 대한민국 정부 전체 예산의 25%에 달할 정도로 큰 금액이엇다.

이 외에도 그는 우리나라 경제의 대동맥으로 자리하게 된 경부고속도로 공사 등에 참여하는 등 기업가로서 숱한 업적을 남겼다. 

사업 뿐만이 아니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대한민국 국격 상승에 크게 일조한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 및 성공개최에 있어서도 1등 공신으로 평가받고 있다. 일본 나고야와 벌인 유치 경쟁 당시 유치위원장을 맡았으며 이후 올림픽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약한 것.

   
통일국민당 대선 후보로 나설 당시 정주영 회장.

정치에 도전 후 시련 겪어 

1987년 재단법인 세종연구소 이사장으로 특별 초빙된 그는 그해 말 현대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나며 경영 일선에서 잠시 손을 뗐다. 

대신 그는 1992년 1월 정계에 입문, 가칭 통일국민당 창당준비위원회 위원장에 올랐으며 김동길 박사 등과 함께 통일국민당을 창당해 대표최고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노태우 정권과의 불편한 관계 속에 직접 정치에 참여키로 한 것으로 그해 3월 치러진 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통일국민당 후보 31석을 당선시키고 본인 역시 전국구 의원에 오르는 등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었다. 

정주영 명예회장 정치인생의 클라이막스는 1992년 말 14대 대통령 선거 출마였다. 최종 투표결과 총 355만표를 얻으며 김영삼‧김대중 양김에 뒤지는 3위로 낙선했으나, 재계 1인자였던 그의 정치적 파워를 정치권에 보여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이후 정 명예회장은 대선 출마 후유증으로 인해 한 동안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현대그룹 계열사에 대한 대대적인 세무조사가 실시됐고 일가족 전부를 대상으로 비자금 조사가 이뤄지는 등 정권 차원의 압박에 시달렸다. 

결국 그는 1993년 초 통일국민당 대표직에서 사임하고 국회의원직에서도 물러나 현대그룹 경영에 복귀하는 것으로 짧았던 정치 인생을 마무리했다. 

   
소때를 이끌고 북한을 다녀온 정주영 회장.

DMZ 평화상 대상 특별 추서 

경영 복귀 뒤 정주영 명예회장은 대북사업에 마지막 혼을 불태웠다. 그 스스로 “고향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고 싶다” 말하며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한 것. 

정권이 바뀐 1998년 이후에는 김대중 정부를 도와 대북사업의 주요한 축을 담당하기도 했다.

정부의 햇볕정책에 발맞춰 금강산 개발사업을 추진한 것으로 1998년 6월에는 ‘통일소’라 명명된 소 500마리를 이끌고 판문점을 넘는 기적적인 행사를 실천해 전세계 언론으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같은해 10월에는 소 501마리를 이끌고 또 다시 북한을 방문했다. 

이후 여러 차례 더 방북한 그는 호화 유람선 금강, 봉래호를 이용한 ‘금강산관광’을 성사시켰으며, 1999년 현대아산을 설립해 남북경제협력의 상징이 된 개성공단 조성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사후인 2001년 5월에는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제5회 만해상 평화상이 추서됐으며, 5년 뒤인 2006년 11월에는 타임(TIME)지 선정 아시아의 영웅에 꼽히기도 했다. 이런 그의 업적을 기려 지난 2008년 DMZ 평화상 대상으로 특별 추서되기도 했다. 

<아산 정주영이 걸어온 길> 

1940년 3월: 합자회사 아도(Art)서비스 공장 인수 
1946년 4월: 현대자동차공업사 설립 
1947년 5월: 현대토건사 설립 
1950년 1월: 현대자동차와 현대건설 합병 후 현대건설주식회사로 개편
1967년 12월: 현대자동차주식회사 설립 
1969년 1월: 한국 지역사회학교 후원회 회장으로 선출 
1969년 12월: 현대시멘트주식회사 설립 
1971년 3월: 현대자동차, 중공업, 시멘트 중심의 현대그룹 출범 
1973년 12월: 현대조선중공업주식회사 설립 
1974년 6월: 한·영경제협력위원회 한국측 위원장 피선 
1975년 4월: 현대미포조선주식회사 설립 
1977년 2월: 전국경제인연합회 13대 회장 취임 
1977년 7월: 재단법인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 설립 
1981년 3월: 88서울올림픽 유치위원회 위원장 피선 
1981년 11월: 88서울올림픽 조직 위원회 부위원장 취임 
1982년 2월: 대한체육회 회장 취임 
1983년 2월: 현대전자산업주식회사 설립 
1983년 5월: 한국정보산업협회장에 추대 
1985년 2월 전국경제인연합회장에 재선 
1987년 2월: 현대그룹 명예회장 취임 
1987년 2월: 전국경제인연합회 명예회장 취임 
1992년 1월: 통일국민당(가칭) 창당준비위원회 위원장 피선 
1992년 2월: 통일국민당 대표최고의원 피선 
1992년 3월: 제14대 국회의원(비례대표) 당선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 선거 출마 
1993년 2월: 통일국민당 탈당, 및 국회의원직 사퇴 
1993년 2월: 현대그룹 명예회장 재추대 
1998년 6월: 소 500마리 이끌고 1차 방북 
1998년 10월: 소 501마리와 2차 방북.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경협사업 논의
1998년 11월: 금강산 관광단지 개장 
2001년 3월: 폐렴에 인한 급성호흡부전증으로 별세 

서훈 
1977년: 명예 대영 제국 훈장 3등급(honorary CBE, 외국인대상 정원외 명예훈장)
1981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동백장(3등급) 
1987년: 한국경영대상 

1988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1등급) 

1998년: IOC 훈장 

1998년: 노르웨이 왕실훈장 

2001년: 제5회 만해상 평화상 

2008년: 제4회 DMZ 평화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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