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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모음/다산 칼럼 모음

일본의 저력

제 624 호
일본의 저력
염 재 호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우리에게는 종종 일본을 우습게 아는 습관이 있다. 매사에 일처리가 답답하고, 관료주의적 원칙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본인들이라고 비웃곤 한다. 게다가 최근 우리의 경제 및 외교적 위상이 높아지고, 한류 붐의 영향과 스포츠의 약진으로 일본사회를 별로 대단하지 않은 사회로 여기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다.

  삼성이나 현대의 부상에 비해 소니와 토요타가 경쟁력을 잃어간다는 소식에 우리는 한국이 일본을 쉽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1990년대 일본 거품경제 붕괴 이후 지속된 경기침체와 거의 매년 수상이 바뀌는 일본 정치의 난맥상이 국내 정치뿐 아니라 국제사회에서도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한심한 나라로 여기게 만들었다.

최근 일본을 경쟁력 없는 국가로 보는 한국

  일본 사회가 미래지향적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국내문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을 답답하게 바라보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 완전히 경쟁력 없는 국가로 퇴보한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비록 후쿠시마 원전사고 복구 과정에서 나타난 정치권의 안이한 대응과 관료조직의 비효율성은 비난을 받았지만 일본인들이 보여준 질서의식은 세계를 감동시켰다. 경제도 수출의존 경제가 아니기 때문에 국내시장은 탄탄하고, 국제금융시장에서 일본의 영향력으로 아직도 엔고 현상은 지속되고 있다.

  지난달 한 국제회의에서 히토츠바시대학(一橋大學) 혁신센터장인 요네쿠라 세이치로(米倉誠一郞)교수의 일본경제에 대한 평가는 흥미로웠다. 하버드 박사로 다른 일본 학자들과 달리 비교적 자유분방하고 솔직한 스타일의 그는 한국학자들에게 “일본 경제는 죽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결론적으로 그의 답은 “아니다”였다. 한국에서 삼성이나 현대처럼 세계적 브랜드 명성을 얻고 있는 제품들이 최근 급속히 늘어나고 있지만, 실제 한국제품 안에 있는 고부가가치의 핵심 부품이나 소재는 일본제품이 많다는 것이다. 혁신의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이제는 조립완제품에 자신의 브랜드를 붙여서 판매하는 것보다 제품의 핵심구성요소를 생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디스플레이 산업이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낼 때 3M이 화면에 붙이는 필름만으로 수익의 상당 부분을 갖고 갔다는 사실을 봐도 일리가 있는 이야기다.

  우리는 일본사회가 한 목소리로 국익을 주장하는 단일사회인 것처럼 오해하고 있다. 독도와 댜오위다오 문제로 한국과 중국과 영토분쟁을 빚고 있는 것은 국내정치로 인한 이슈이지 일본 국민 전체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몇 년 전 기미가요와 일장기를 부활시키는 국가국기법이 제정되자 이는 일본을 군국주의와 전체주의로 되돌리는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자살을 택한 교장선생님도 있었다.

국익보다는 보편적 가치를 중시하는 일본의 지식인들

  지난주에 노벨 문학상 수상자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를 비롯한 지식인들 1270명이 정부를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 정부가 국제법을 이유로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넌센스이고 식민지 지배 과정에서 나타난 침탈이었다는 역사적 인식을 상기시킨 것이다. 세계적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도 아사히신문 기고문에서 새로운 동아시아 문화권이 확산되고 있는 시점에 정부가 감정적으로 영토분쟁을 일으키는 것은 출구 없는 위험상황이라고 진단하고, 영토문제로 국민을 선동했던 히틀러의 결말을 되돌아 봐야 한다고 비판했다.

  조용하고 정치에 무관심한 것 같지만 중요한 시점에 국익을 초월하여 결연히 목소리를 높이는 일본 지식인들을 보면서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정치적 편향성을 보이고, 대선 캠프에 앞 다투어 참여하는 우리 지식인들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된다. 이제 최근 성취한 경쟁력에 도취되어 일본사회의 저력을 간과하기 보다는 냉철하게 우리의 미래를 위해 지혜를 모으는 것이 더 필요한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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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염재호
· 고려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 고려대 법대 졸업
· 미국 스탠포드대 정치학박사
· 한국고등교육재단 이사
· 한국정책학회 회장 역임
· 저서 : <딜레마 이론>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