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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모음/다산 칼럼 모음

살인보다 더 큰 죄

2012. 8. 28  태풍 볼라벤 불던 날

제 619 호
살인보다 더 큰 죄
서 지 문 (고려대 영문학과 교수)

  동급생 여학생을 친구들과 집단 성폭행한 죄로 기소된 고려대 의대생의 어머니가 아들의 형을 가볍게 하려고 피해자 여학생이 행실이 나쁘다는 소문을 유포시킨 죄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았다.

  아들이 5년여를 같은 학급에서 공부하던 여학생에게 그런 인면수심의 범죄를 저지르고 피해자의 입을 막기위해 장면사진까지 인터넷에 올렸다면 그 어머니는 그 여학생에게 속죄와 보상을 하는데 여생을 바쳐도 모자랄 터인데 쓰러진 사람을 짓밟아 버리는 것과 다름없는 그런 인격말살을 획책하는 것이 아들을 위하는 어머니의 정성인가?

피해가 죄가 되는 사회

  우리 사회에는 성폭행 범죄의 ‘책임’을 피해자 여성에게 뒤집어 씌우려는 음모가 만연해있다. 십여년 전에 두 여교사가 학교행사에 참석 후 밤 늦게 귀가하다가 성폭력을 당했을 때, 매스컴이 집중적으로 파고 든 것은 왜 두 여교사가 그렇게 늦게 귀가했느냐는 것이었다. 마치 자정이 넘어서 귀가하는 여성은 성폭력의 제물이 되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라는 듯이, 당시에는 여성은 직장의 행사가 늦게 끝나서 마음조리며 귀가하다가 성범죄의 피해자가 되어도 자신의 책임이고, 남성은 술 취한 상태에서 자제력을 잃고 성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로 인정되는 분위기였다.

  성범죄의 피해자가 된 여성이 가해자를 고발하면 수사과정에서 그 여성의 복장이나 언행이 ‘도발적’이었느냐에서부터 남자교제의 내력 및 기타 온갖 소문과 추측에 대해 모욕적인 심문을 당하며 피해자가 아닌 죄인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성폭력 피해자는 피해사실을 은폐하고 일생 신체적, 정신적 후유증을 안고 살았다. 1990년대 초에 10년간 의붓아버지의 성노리개가 되었다가 견디지 못하고 의부를 살해한 김보연양 사건이 터졌을 때, 검사가 보연양에게 ‘의붓아버지와의 성관계를 즐기지 않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법이 대행해야 할 징벌

  20년 남짓한 생애의 황금기 5년을 같이 학업을 연마하며 같은 꿈을 키우던 클라스메이트들에게 성폭행을 당하던 순간 그 여학생의 경악과 공포와 절망을 무엇에 견줄 수 있겠는가? 그 여학생은 지금 의과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도 정상적인 수련의 과정을 밟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배울만큼 배운, 사회지도층인 가해자 부모가 이 여학생을 두 번 죽이기에 나선 것에 대해 1년형은 오히려 가볍다고 생각되지만 우리나라 사법사상 성범죄 피해자 인권보호의 시발점으로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인류가 문명사회를 이룩하면서 사회의 지도층이 된 사람은 목숨보다 명예를 중시하게 되었다. 물론, ‘명예’의 개념과 함께 위선이 탄생했겠지만 그래도 인간이 정신문명을 이룩할 수 있고 도덕률이 인간관계의 근간이 된 것은 ‘명예’의 개념과 함께였다. ‘명예’에는 수치스러운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측면이 있고, 모욕을 받았을 때 설욕한다는 측면이 있다.

  기사의 후예인 서양의 신사는 명예를 훼손당하면 즉각 결투를 신청해서 자기 이름에 끼쳐진 오점을 신속히 씻어내야 했다. 일본의 무사는 자신에 대한 모욕에 설욕함은 물론, 자기의 아버지나 형제나 또는 혈육이 없는 가까운 친족이 상해를 입었을 때, 전국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기필코 가해자를 찾아내어 응징하지 않으면 무사로서의 명예는 물론 신분까지 박탈당했고, 보복의 의무를 완수할 때 까지는 무사의 녹봉이 정지되고 모든 일상적 업무에서 제외되었다.

  이런 사적인 정의실현 방식은 도리어 피해자가 다시 피해를 입을 위험도 크고 복수의 사이클이 대를 물려가며 점점 더 확대될 위험도 크기 때문에 법치가 확립된 사회에서는 사적인 복수를 엄격히 금한다. 그 대신 법이 국민의 피해를 응징해 주고 훼손된 명예를 설욕해 준다. 법의 응징은 필연적으로 시간이 걸리지만 그러나 제 기능을 다할 때 가장 효율적인 사회안전망이다.

  법이 국민의 명예를 중히 여겨 명예에 대한 침해를 엄격히 응징할 때 그 국민은 명예롭게 처신하는 국민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인터넷 실명제가 위헌이라는 헌재의 이번 판결은 많은 국민에게 인터넷 공간을 통한 의사표현 방식에 대해 심히 잘못된 개념을 심어줄 것 같아 몹시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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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서지문

· 고려대 영문과 교수
· 한국아메리카학회 회장
·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 미 뉴욕주립대학교 영문학박사


· 저서 : <인생의 기술: 빅토리아조 문필,사상가들의 윤리적미학이론 연구> 
           <Faces in the Well> (英文隨想集) 
           <어리석음을 탐하며> (칼럼집) 
           <Remembering the Forgotten War> (공동집필, 편집) 
           <서양인이 사랑한 공자 동양인이 흠모한 공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