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설립 파동으로 과학기술계 양분화... 2008년 07월 30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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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60년 과학기술 60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앞두고 각 정당과 사회단체들은 정치적 사안이 있을 때마다 과학기술자들로 하여금 특정 견해를 지지하도록 요구했다. 정치 활동에 있어서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강요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서울대학교 설립안(일명 국대안) 파동은 과학기술자들을 고민케 한 대표적인 사례. 1946년 10월16일 미 군정청은 이후 서울대를 구성하게 될 경성제대 의학부와 각 전문학교 교장을 임명했다. 아놀드 군정장관이 임명한 교수진에는 윤일선 의학부장, 백낙준 법문학부장, 최규남 이공학부장 대리, 현상윤 경성대학 예과과장, 안동혁 서울공전 교장, 장이욱 경성사범 교장, 손정규 경성여전 교장, 조백현 수원농전 교장, 최윤식 서울광전 교장, 김재원 국립박물관장 등 책임자들과 교수진 이름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10월17일 경성제대를 경성대학으로 개칭한 후, 크롭트(A. Croft) 해군대위를 초대 학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크롭트 학장은 1946년 1월21일 미군의 학교 주둔으로 인해 “(교육 여건이)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폐허”될 것이라는 점, 한국 과학교육이 “최소 10년 지체될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군정청 문교부에서는 1946년 4월27일 의전 병합을 계획했으며, 1946년 6월12일에는 예과 폐지 방침을 발표했다. 그리고 1946년 7월13일 국대안 발표가 있자 여론이 분분한 가운데 일부 교직원과 학생들이 맹렬한 반대를 시작했다. 7월31일 조선교육자협회와 전문대학교수단연합회가 공동으로 전국교육자대회를 열고, 국대안 철회를 요청했다. 어어 광산전문학교, 경제전문학교, 경성사범학교, 경성의학전문학교 등 통합대상으로 돼 있던 전문학교의 일부 교수와 학생들도 반대 운동에 적극 가담하기 시작했다. 반대운동 대표자들은 러치(L. Lerch) 군정장관을 면담하고, 국대안 철회를 강력히 요구했다.
초대 총장으로는 미군정청이 추천, 구 경성대학 총장을 지냈던 엔스테드(H. Ansted) 해군대위였다. 대학원장은 윤인설, 문리과대학장에는 이태규 씨 등이 임명됐다. 그러자 설립반대 운동은 집단화하기 시작했다. 1946년 9월 해당 대학 학생들이 등록을 거부하고, 동맹휴학에 들어갔으며, 이후 친일 교수 배격, 행정권 이양, 미국인 총장 퇴임 등 갖가지 요구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국대안 문제가 당시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좌우익의 힘 대결로 흘러가자 다급해진 미군정청은 국대안 문제를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상정키로 결정했다. 그 결과 국대안 문제는 학원 문제를 넘어 정치적 성격의 문제로 진화했고, 이에 따라 좌우익 학생 및 교수진이 국대안 문제를 놓고 격돌을 벌이는 상황으로 발전했다. 1947년 2월15일 문교 당국은 이사회 조항을 재검토하겠다고 발표한다. 이사 선출을 입법의원 비준을 받게 함으로써 사태를 수습하려는 의도였는데, 이 같은 해결방안은 반대 운동이 급격히 가라앉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러나 반대 운동 과정에서 교수 380명이 해직, 또는 퇴직하고, 학생 4천956명이 퇴학 등의 징계를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일부 교수 중에는 월북하는 사례도 발생했다. 처음에는 극히 적은 사람들이 월북했는데, 1946년 10월1일 김일성대학 설립과 국대안 파동이 맞물리면서 월북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그중에는 남한의 과학기술자들이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대부분 국대안 파동에 연루돼 교수직을 사퇴했거나, 파면됐거나, 사회단체에 참여한 일이 빌미가 돼 감시와 탄압을 받는 사람들이었다. 당시 북한 김일성대학은 사회주의 사상과 전문 지식을 갖춘 지도자들을 양성하는데 주력했다. 평양공업전문학교와 평양의학전문학교를 통합, 종합대학으로 승격한 후 소련의 대학체제를 모방, 조직구조를 종합대학과 단과대학 구조로 전문화하고 있었다. 대학 내에 박사 및 학사 학위 과정을 갖춘 대학원, 아쓰비란트라를 설치하고, 각 학문 분야별로 연구집단을 육성하기 위한 강좌, 까페드라 제도를 도입했다. 1948년에는 대학 가운데 가장 체계가 견실했던 공학부, 의학부 등을 분리해 평양공대, 평양의재, 평양농대를 설립한다. 같은 해 김책공업대학, 흥남공업대학, 함흥의과대학, 청진의과대학, 원산농업대학 등 이공계 고등 교육기관을 계속해 설립하기 시작했는데, 북한 내 이공계 대학 증설은 남한에서 설 자리를 잃은 과학기술자들이 월북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지금까지 파악된 월북 과학기술자 중 대표적 인사로는 이학 분야에서 물리학 도상록과 임극제, 화학의 최삼열과 김양하, 수학의 김지정과 정순택 등이 있으며, 공학 분야에스는 기계공학의 강영창과 유기연, 화학공학의 리승기와 려경구, 오동욱, 광산야금학의 정준택과 박성욱 등이 있다. 북한에 거주하던 과학기술자들이 월남한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남한의 과학기술 환경 때문이라기보다는 정치,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과학기술계 양분은 결과적으로 남한의 부족한 인력을 더욱 줄어들게 했는데, 당시 남한에서 과학기술자로 활동하던 고급 인력의 거의 절반이 북한으로 넘어갔다는 것이 원로 과학기술인들의 증언이다. 국대안 파동 등으로 인해 남한의 과학기술계가 반 토막 나는 비극이 발생한 것이다. [현암사 간 ‘우리과학 100년’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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