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년 5월 아프가니스탄 카불의 한 건물에 여러 민간단체 구호요원 150여명이 한데 모였다. 각자 사업 현황을 발표하고 정보를 나누는 자리였다. 갓 도착한 신참 자원봉사자들을 소개하는 순서가 됐다. 의사·간호사·치과의사·조산원·엔지니어들이 줄줄이 일어났다. 맨 끝에 빨간 머리 미국 여자 데보라 로드리게즈(Deborah Rodriguez·47)가 있었다. 신참을 인솔해온 구호팀장이 “미시건주(州)에서 온 미용사”라고 좌중에 소개했다. 로드리게즈는 기가 죽었다. “뜬금없이 미용사가 왜 왔냐고 괄시 당하면 어떻게 하나?”
좌중이 술렁거렸다. 그러나 괄시가 아니라 ‘열광’이었다. 구호요원들이 저마다 “내 머리 좀 어떻게 해달라”고 아우성쳤다. 탈레반 정권은 “여자들을 창녀처럼 보이게 만든다”며 미용실 영업을 전면 금지했다. 미용실 없는 나라에 살다 보니 “10시간 넘게 차를 몰고 파키스탄 미용실에 다녀왔다”는 구호요원도 있었다. 아프간과 파키스탄 접경 지대는 탈레반의 아성이다. 미용실 가려고 죽음을 무릅 쓴 것이다.
2일 밤, 고향인 미시건주 홀랜드에서 휴대전화를 받은 로드리게즈는 “이 세상에 머리 안하고 살 수 있는 여자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요” 했다. 외국인만 로드리게즈를 환영한 게 아니었다. 부르카(머리부터 발끝까지 내려오는 겉옷)를 입은 현지 여자들도 그녀를 찾아와 결혼식 치장을 부탁했다.
유흥이 금지된 아프간에서 결혼식은 사람들이 경찰에 잡혀갈 걱정 없이 한껏 치장하고 신나게 놀 수 있는 기회다. 식장 가운데 커튼을 친 뒤 한쪽엔 여자, 다른 쪽엔 남자끼리 모여 발뒤꿈치가 까지도록 춤을 춘다. 여자들끼리 모인 방에선 다들 부르카를 벗어 던진다. 분을 바르고 “참새 날개만한 인조 속눈썹”을 붙인 채 오색찬란한 의상을 뽐낸다. 아들 둔 어머니는 며느리 감을 찾고, 시집갈 처녀들은 미모를 겨루며, 그 중간 유부녀들은 시집살이 스트레스를 “미국 나이트클럽 뺨치는 광란의 댄스”로 푼다.
로드리게즈는 카불 미용학교(Kabul Beauty School)를 차리고 미용기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2003년 7월의 일이었다. 이 학교는 2006년 5월 치안 악화로 문을 닫기 전까지 졸업생 150여명을 배출했다. 3개월 과정 등록금(1인당 500달러)과 운영·실습 비용은 로드리게즈가 미국 기업과 민간단체에서 후원금을 끌어다 충당했다. 졸업생에겐 자립 밑천으로 미용기구 세트가 든 상자를 하나씩 나눠줬다.
이 책은 로드리게즈가 지난 4월에 펴낸, 유쾌하고도 가슴 찡한 체험기이다. 그녀는 글쓰기 수업을 받은 적이 없다. 성악가가 되려고 음대에 갔다가 성대에 혹이 생겨서 일찌감치 중퇴했다. 친정 어머니 미용실에 취직해 만 19살 때부터 줄곧 동네 여자들 머리를 말고 펴고 잘랐다. 그래도 책은 술술 읽힌다. 어깨에 힘을 빼고 자기가 직접 보고 듣고 겪은 얘기를 재미나게 풀어나간 ‘구어체의 힘’, ‘논픽션의 힘’이 있다.
“나도 내가 ‘베스트셀러 저자’가 될 줄은 몰랐어요. 처음 카불에 갈 때는 이렇게 오래 있게 될 줄 몰랐지요. 두어 달 비운 사이 내 단골이 다른 미용실에 가버릴까봐 근황을 수다 떨듯 적어서 며칠에 한번씩 단골들에게 이메일로 보냈어요. ‘여기서 열심히 남을 돕고 있으니 날 잊지 말아 달라’는 메시지였죠.” 그걸 돌려본 사람들이 여기 저기서 “재미있으니 나도 보내달라”고 청했다. 나중엔 이메일 받는 사람이 300~400명으로 불었다. 그 중 한 명이 출판사 관계자였다. 그가 로드리게즈에게 “당신 이메일을 묶어 책으로 내자”고 했다. 그렇게 나온 책이 100만부 넘게 팔렸다.
로드리게즈는 ‘수다의 힘’으로 아프간 사회에 파고 들었다. 로드리게즈의 미용실과 미용학교는 카불 여자들이 부르카를 벗고 소통하는 곳, 자기 힘으로 돈벌이 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곳이 됐다. ‘여성 해방의 전초기지’가 된 것이다. 로드리게즈는 “나도 고생을 해봐서, 이곳 여자들 마음을 안다”고 했다. 미국에서 행복했다면 아프간에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대학 동창 첫 남편과 이혼한 뒤, 아들 둘을 키우며 혼자 살다 재혼했다. 카불에 간 것은 두 번째 결혼이 파국으로 치달을 때였다.
탈레반 정권 시절 아프간은 여자가 성폭행을 당한 ‘죄’로 감옥에 가는 나라였다. 불륜을 저지른 여자는 공설 운동장에서 공개 처형 당했다. 부르카를 쓰지 않고는 외출할 수 없었다. 아파도 남자 의사에게 몸을 보일 수 없었다. 아프간은 산모 사망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였다. 로드리게즈는 책에 “탈레반이 미용실을 금지한 진짜 이유는 여자들이 남자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공간이기 때문”이라고 썼다. “내 미용실과 미용학교는 온실이었고, 학생들은 오래 짓밟히고도 꺾이지 않은 꽃과 같았다”고 했다(133쪽).
그녀는 현지 남자와 재혼하고, 커피 가게를 열고, 미국에서 대학생 장남(26)도 불러들였다. 그녀가 지난 5월 카불을 떠나 미국에 돌아온 것은 바로 이 아들이 위험에 처했기 때문이다. 현지 친구가 “탈레반 잔당이 당신 아들을 납치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귀띔했고, 로드리게즈 모자는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녀는 현재 샌프란시스코에 집을 얻고, 고향과 샌프란시스코를 오가며 내년에 펴낼 증보판을 쓰고 있다. “상황이 나아지는 대로 꼭 돌아가서 미용학교 문을 다시 열겠다”고 했다. “그 위험한 곳에 왜 또 가냐”고 묻자, “어머, 정이 떨어지긴요? 그건 그곳 사람들이 얼마나 정이 깊은 민족인지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에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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