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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1-6)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내 잔이 넘치나이다


1990. 7. 12

시편 23:1-6

시편 23편은 다윗의 고백시이며 간증시입니다. 시인 자신이 일생동안 체험했던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아름답고 잔잔한 시어로 엮어 읊은 노래라는 점에서 애송되고 있습니다. 시편 23편 속에 나타난 시인의 신관과 신앙을 조명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신앙성장과 확립을 위해 뜻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십니다. 다윗의 전직은 목자였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목자와 양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양과 목자의 관계는 주종관계가 아닙니다. 먹고 마시는 것, 잠자는 것, 건강과 생명을 온통 책임져 주는 것이 목자의 할 일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라는 고백은 하나님이 나의 안전과 생명과 사는 것과 죽는 것을 전적으로 책임져 주신다는 신앙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셨을 때 오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인 것입니다. 엘니뇨 현상은 전세계 기상에 이변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홍수, 가뭄, 폭설, 폭풍 등 지구 곳곳을 할퀴고 있습니다. 미국의 월드워치 연구소의 발표에 의하면 엘니뇨는 식량난을 부채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삼림 화재가 휩쓸고 지나간 브라질의 아마존강 유역의 페르남보코추에서는 4천 5백만 인구 중 3분의 1이 기근에 시달리고 있고 아프리카의 이디오피아에서는 계속된 가뭄으로 5백만명이 굼주리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수단 남부에서는 5만명이 아사 위기에 처해 있고 부룬디, 르완다, 콩고도 가뭄과 홍수로 굶어 죽는 사람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아시아의 경우 북한, 태국, 파푸아뉴기니가 기아에 허덕이고 있으며, 산불로 40만 ha의 논밭과 산이 타버린 인도네시아는 750만 명이 식량난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필리핀의 경우 이상 고온으로 옥수수 생산이 30만톤 정도 감소될 것이라고 합니다. 세계 식량기구에 의하면 37개국이 식량난을 겪게 될 것이며 세계적인 곡물파동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경고 했습니다. 현재 세계의 곡물 비축량은 48일분에 불과하며 2015년 까지는 8억 인구가 식량난으로 허덕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곡물 비축량이 8백만석인데 3개월 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지하를 흐르는 지하수가 말라가고 지하자원인 석유도 바닥이 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모자라도 보통 모자란게 아닙니다. 그런데 인 다윗은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만족과 자족하는 신앙이 있을 때 가능해 집니다. 수천억을 굴리면서도 헐덕거리는 사업가가 있는가 하면 수억원짜리 회사 운영하면서도 감사하고 자족하는 사업가가 있습니다. 적게 벌고 적게 써도 감사하는 사람이 부족함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시인은 계속 노래 합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소극적 표현입니다. 그러나 “내 잔이 넘친다”는 것은 적극적 표현입니다. 잔이 넘친다는 것은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뜻합니다. 수안보에서 문경 쪽으로 가느라면 병풍처럼 산자락이 펼처진 산언덕에 집한채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화대학 총장이었던 고 김옥길 박사의 자그마한 별장입니다. 그 집 뜰 정원에는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이름이 붙은 아주 작은 분수가 솟고 있습니다. 계속 솟고 있는 작은 물 줄기가 잔을 채우고 있는 그런 작품입니다. 폭포도 아니고 분수도 아닙니다. 소리도 들리지 않는 작은 물줄기가 잔을 채우고 넘치도록 만든 소품에 불과 합니다. 저는 곰곰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거기엔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쉬지도 않고 그치지도 않고 계속 솟고 흐르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365일 계속 넘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지속성, 연속성, 충만성이 넘치는 잔의 의미인 것입니다.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전기불은 답답합니다.나오다 말다 하는 수돗물은 감질납니다. 달리다 말다 하는 자동차는 고장난차입니다. 되다 말다하는 사업은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작아도 그치지 않는 것, 그리고 계속 넘치는 것이 행복이고 축복입니다. 부산 해운대나 강릉 경포대 상인들은 여름한철 벌어서 1년 내내 먹고 산다고 합니다. 강릉 산다는 분에게 불었습니다. “여름 한철 돈 벌고 겨울엔 뭘 합니까?”라고 그의 대답은 “다는 아니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여름에 벌고 겨울철엔 술마시고 도박으로 탕진해 버린다”고. 그것은 축복도 성공도 아닙니다. 계속되는 것, 연속적으로 넘치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런 축복이 어디 있으며 누가 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내 잔을 지금도 계속 넘치게 채워 주고 계십니다. 이미 넘치도록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넘치는 잔을 관리하는 태도입니다. 어떤 사람은 다 쏟아 버리고 빈잔만 들고서서 투덜거리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잔을 깨뜨려 버립니다. 어떤 사람은 소중히, 아주 소중히 그 잔을 갈무리하고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미 잔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시인의 감동적인 노래는 계속됩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했고 3절에서는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실직당한 40대 초반의 어떤 남자는 심경을 묻는 기자에게 “갈곳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밥을 급식소에서 먹고 잠은 서울역 지하도에서 잔다고 했습니다. 200만명을 육박하는 실직자들은 무능한 정치가들과 욕심사나운 기업가들과 철부지처럼 날뛰던 국민들이 만들어 낸 실패의 산물입니다. 구조조덩과 노조의 반발에 부딪쳐 매일 밤을 뜬눈으로 지새는 어떤 기업가를 만났습니다. 그의 소원은 ‘편히 누워 발 뻣고 쉬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갈곳없는 우리들, 쉴 곳없는 우리들, 그래서 길거리의 미아가 돼버린 우리들에게 들려오는 한가닥 희망의 노래소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읊었던 노래입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그가 나를 의의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물이 없고 숲이 없는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푸른초장이나 물가는 곧 오아시스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푸른 초장이 있고 물이 있는 영혼의 오아시스로 인도하십니다. 아닙니다. 시인의 본뜻은 오아시스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영혼의 숨터이며 오아시스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쉴 수 있는 영혼의 오아시스입니다.

마태복음 11:28에서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씁하셨습니다. 주는 내 영혼의 영원한 오아시스이십니다.

2. 내 영혼을 책임져 주십니다. 3절에서는 “내 영혼을 소생시키신다”고 했고, 4절에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리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했고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6절을 보면 “평생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목자이신 하나님은 우리 영혼을 구원하시고 다시 살려 주셨다는 것과 거칠고 험한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지키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것과 내 일생 다하는 날까지 평생에 그 일을 계속 해 주신다는 감격사건을 재확인해야 합니다. 소생시킨다는 것은 목말라 죽어가던 짐승이 물을 마시고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뙤약볕에 시들어 가던 들풀이 소낙비를 맞고 되살아 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에 빠져 죽어가던 내 영혼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나를 다시 살려 주시는 하나님이야말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빠져 있습니다. 예레미아 애가 3:55을 보면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라고 했고 시편 130:1에서 시인은 “여호와여 내가 깊은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경제적 구렁텅이, 도덕적 웅덩이에 빠져 있습니다. 전직 두 대통령과 대통령아들이 나라돈을 챙겼다는 이유로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 이젠 더이상 돈을 챙기다가 교도소에 들어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연일 터지는 사건은 돈 챙기다 걸린 사람들에 관한 것들입니다.구렁텅이가 너무나 깊고 지저분합니다. 시인의 노래를 들어 봅시다.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 나를 안위 하신다.”… 얼마나 감격스럽고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안위하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도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팡이와 막대기 입니다. 지팡이는 인도하는 도구이고 막대기는 지키는 도구입니다. 지팡이는 갈길을 가르키고 막대기는 맹수나 독를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지팡이와 막대기가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지팡이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 본다면 막대기는 정의와 공의, 심판과 통치를 의미합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서부 헤자즈 지방에 있는 메카는 마호메트의 출생지로 회교도들의 성지로 유명합니다. 인구는 55만 정도로 옛날엔 인도양과 지중해 연안, 메소포타미아와 홍해 연안으로 통하는 통상의 중심지였습니다. 매년 순례의 달이 되면 250만명의 회교도들이 이곳을 찾게 되는데 매년 메카에서는 참사가 일어납니다. 금년에도 150명이 압사하는 대형참사가 벌어졌습니다. 악마를 상징하는 기둥을 향해 돌을 던지는 의식을 행하다가 노인 몇사람이 넘어지면서 뒤따르던 사람들이 넘어지면서 일어난 사고 였습니다. 94년에는 270명이 압사했고 90년도에는 1400명이 압사했습니다. 메카는 편히 쉴 곳도 잔이 넘치는 곳도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겐 갈곳이 있습니다.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에겐 쉴 곳이 있습니다. 나를 지키시고 이끄시고 내 잔을 채워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느헤미야 9:12을 보면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 행할길을 비취셨다”고 했습니다. 미국 격언 가운데 “불행속에도 함께 하는 사람이 있으면 슬픔이 덜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당면한 현실과 여건은 사람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습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맙시다. 포기하지 맙시다. 원망하지 맙시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주님 때문에, 영원한 쉼터이신 주님때문에, 지팡이와 막대기로 인도하시는 주님때문에, 내 잔을 넘치게 하시는 주님 때문에,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시는 주님 때문에 힘과 용기와 믿음을 가지고 일어섭시다. 시인의 마지막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집에 여원히 거하리로다”였습니다. 그의 소원은 지상적인 것, 눙에 보이는 것이나 손에 잡히는 그런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주의 집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었습니다. 주의집은 교회와 천국을 의미합니다. 교회를 멀리하지 맙시다. 천국 소망을 가지고 고난을 이겨냅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출처 : 일만구역이상
글쓴이 : 충실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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