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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자료/교회장로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대한 안내

                                                                                                 강서제일교회 전종남 목사
1.양화진 묘지의 개요


• 명 칭 : 서울외국인묘지공원
• 위 치 :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144
• 개설허가 : 1890. 7. 28
• 묘역면적 : 13,224㎡ (약 4,000평)
• 무덤의 수 : 555기(2004년 8월 현재)
• 최초의 피장자 : J. W. 헤론
• 묘지 현황 : 선교사(167,가족포함), 직업인(117), 기타(130), 미상(141)
• 국적별 현황 : 미국(279), 영국(31), 캐나다(19), 한국(19), 러시아(18), 프랑스(7),  필리핀(5), 독일(4),

                     스웬덴(4), 이태리(2), 덴마크(2), 일본(2), 남아공(1), 호주(1), 폴란드(1), 뉴질랜드(1),

                     국적불명(18), 미상(141)

2.묘비의 명언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 (J. W. 헤론)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H. B. 헐버트)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 (A. R. 아펜젤러)

"한 목사가 하나님께 죽도록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W. V. 존슨)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 (A. K. 젠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J. D. 언더우드)

"나에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 (R. R. 켄드릭)

3.양화진 묘지의 유래


   양화진 묘지공원의 이름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일제 때에는 “경성 구미인 묘지”로 불리다가, 해방 후 “서울 외국인묘지”로 바뀌었고, 1986년 선교기념관의 건립과 함께 “서울 외국인 묘지공원”으로 개칭되었다.
   1890년 7월 26일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로 고종의 시의였던 존 헤론이 급환으로 별세하자 묘지를 설치할 장소의 선정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때 도성(都城)안에 시신을  매장하는 일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고, 그렇다고 1883년에 인천항 해안 언덕에 마련된 외국인 묘지가 있었으나 한 여름 더위에 서울에서 인천까지 시신을 운구한다는 것은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유족과 선교사들은 조정에 서울 가까이 묘지로 쓸만한 장소를 제공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조정에서 지정해 준 곳은 한강 건너편 야산 기슭 모래밭이어서 묘지로 쓸 수 없는 땅이었다. 하는 수없이 시신을 밀봉하여 헤론이 살던 집 뒤뜰에 매장하려 하였으나 선교사를 보조하는 사역자들이 한사코 반대하여 더욱더 문제가 생겼다. 이와 같은 경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헤론의 죽음으로 인해 외국인 묘지를 선정하는 문제가 생겼다.
묘지로 적당한 부지를 사용하는데 대한 정부의 동의를 얻어내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조약에 따르면, 한국 정부는 묘지 부지를 제공해야만 했다. 관리들은 연이어 추천했지만, 바람직한 부지의 구입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마침내 헤론 의사의 시신을 선교회 구내(Mission compound)에 매장하자는 제안이 들어 왔다. 그러나 4대문 안에 시신을 매장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강한 미신 때문에 겁을 낸 우리의 한국인 교사와 조사(助事)들이 완강하게 반대하였다.
   그들은 매장을 하게 되면 성난 사람들이 자기들을 죽이고 우리 집(언더우드의 집)을  불 질러 버릴 것이라고 강하게 애원했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히 망설이게 되었다.
   이 무렵 우리의 처지를 알게 된 정부는 미국 공사, 그리고 알렌과 2~3일 동안 심사숙고한 끝에 타협이 되어 서울에서 약 8km 즘 떨어진 강언덕에 적당한 장소(양화진)를 지정해 주었다." (릴리아스 언더우드)
  
   이때 미국공사관과 조정의 신임을 받고 있던 알렌과 언더우드 등이 어려운 교섭 끝에 경관이 아름다운 양화진 언덕을 묘지로 사용하도록 허가(1893.10.24) 받아 이곳에 헤론을 처음 묻음으로서 오늘의 양화진 외국인 묘지공원이 터를 잡게 되었다.

   양화진 묘지를 처음 관리한 분은 최봉인이었다. 그는 묘역 관리인의 인연으로 예수를 믿어 서교동교회의 창립교인과 제1대 장로로 피택 되어 일생을 교회와 묘역관리를 위하여 봉사하다가. 1950년 6월 25일까지 50여년을 봉사하다가 별세하여 그도 양화진 외국인 묘지 안에 묻혔다.
   그후 묘역 관리는 그의 아홉째 아들(최영구)과 며느리(이강애)에 의하여 관리되다가 최영구는 6.25이후 행방불명되고 서교동교회 교인이었던 이강애 집사는 미국으로 이민하여, 그녀의 동생 이강필씨가 현재까지 50여년 간을 이 묘역의 관리소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4.한국 개신교 (기독교) 전래의 역사
   우리나라는 청나라의 권유를 받아 1882년 5월 22일, 구미(歐美)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먼저 미국과 국교를 맺어 문호를 개방하였다. 이 때 한국 측은 신헌(申憲)·김홍집이, 미국 측은 벨트(Robert W. Shufeldt)가 참석하여 제물포 해안에서 '한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한편 미국 장로교회에서는 엘린우드(Ellinwood)가 브룩클린교회 맥 월리엄스 (Mc Williams)를 움직여 5천 달러의 선교기금으로 헌납하도록 했는데 이를 계기로 다른   사람들도 호응하여 기부금이 증가되었다.

   선교본부는 1884년 존 헤론(John W. Heron)을 한국 최초의 선교사로 임명하고  뒤이어 언더우드를 1884년 7월 28일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한국에 먼저 입국한 개신교 선교사는 중국에서 입국한 알렌이다. 언더우드는 헤론이 일본에 머무는 동안 먼저 내한하였다.

   개신교 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개시한 역사적 근거는 여러 경로에서 살펴볼 수 있다.

◇ 칼 구츨라프(Gutzlaff) 목사의 입국


   개신교 선교사로 가장 먼저 한국에 입국한 외국 선교사는 1832년 7월, 의사이며 목사였던 독일 출신의 칼 F. A. 귀츨라프(Gutzlaff, Karl F. August) 목사라 할 수 있다. 그는 충청남도 고대도(古代島)에서 성서(2권)와 교리서를 전달하고, 홍주목사(洪州牧使) 이민회의 서생에게 주기도문을 한문으로 써주고 한글로 번역하게 하였다. 또한 감자 씨를 섬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재배 방법까지 가르쳐 주어 식량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었다.
   구츨라프는 영의 양식 "주기도문"과 육의 양식 "감자"의 보급을 통하여 한국인에게 도움을 준 선교사이다. 그는 "내가 전한 복음이 하나님 섭리 속에서 열매 맺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나는 이를 믿는 고로 영광에 찬 십자가의 도를 한국인에게 전파하였습니다."라고 기도했다는 기록이 있다. 귀츨라프는 복음의 씨앗을 한국에 뿌린 고마운 선교사이다. 1851년 홍콩에서 별세하였다.

◇ 로버트 J. 토마스(Thomas, 崔蘭軒) 목사의 입국


   1865년 영국 출신(1840.9.7생)의 로버트 J. 토마스(Robert J. Thomas) 목사의 입국에 의해서도 복음이 전해졌다. 그는 중국에서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총무 윌리암슨의 주선으로 1865년 9월, 황해도 앞 바다에 1차 머물면서 한국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그 후 1866년 7월 29일 중국에서 윌리암슨이 제공한 한문 성경을 가지고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으로 들어왔다가 평양시민들에게 1866년 9월 5일 26세에 순교하였다. 이때 뿌린 성서가 뒷날 여러 형태로 복음의 열매를 맺게되었다. 토마스 목사를 한국 최초 개신교 선교사로 보는 견해가 있다.

◇ 호레이스 N. 알렌(Allen)의 입국


   미국 북장로회 의료 선교사로 1883년 10월에 중국에 부임했던 알렌(Allen, Horace Newton)이 1884년 9월 22일 주한 미국 공사관의 공의(公醫) 자격으로 입국하였다. 그 해 12월 4일에 일어난 갑신정변(甲申政變) 때 민영익의 치료로 알렌의 의술은 왕실과 한국 정부에 뚜렷하게 각인 시켰으며 고종의 시의로 임명되었다.
   1885년 4월 10일 광혜원(제중원)을 설립하여 의료 활동을 하였다. 주한 미국 공사관의 서기관, 대리공사, 공사를 역임하면서 선교사들이 쉽게 입국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05년 6월 10일 귀국하였다.
   그는 1858년 4월 23일 미국 오하이오(딜러웨어)에서 출생하여 1932년 12월 11일 오하이오(도레도)에서 별세하였다. 알렌의 일기에 기록된 1885년 6월 28일의 광혜원에서 첫 예배 활동을 한국 개신교 활동 시발점의 기준으로 삼는 사례가 있다.(주: 병원교회로 출발 한 오늘의 남대문교회의 경우 제중원에서의 첫 예배일인 1887년 11월 21일을 교회 창립기념일로 지키고 있으나 아직 교회사가들의 공인을 받은 것은 아님)

◇ 미국 북장로회(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 S. A.)


   언더우드 선교사는 미국을 출발하여 일본에서 한국에 오는 배편(船便)을 기다리며   체류하다가 이수정으로부터 한국말을 배웠으며, 한글로 번역된 성경을 입수할 수 있었다. 1885년 3월 31일 일본 나가사키를 출발하여 4월 2일 부산에 잠시 정박하였다가, 4월 5일 부활절 주일에 인천에 도착하였다. 이 배에는 아펜젤러 부부가 미국 북감리회의 파송을 받아 승선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동시에 한국 땅을 딛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에 장로회와 감리회 선교사들은 같은 날 도착한 셈이다.
   언더우드는 인천에서 서울로 들어오면서 양화진을 경유하여 도성(정동)에 정착하였다. 그 후 그는 서울에 머물면서 경기 서부지역과 황해도·평안도 지방의 선교여행을 할 때에도 양화진은 경유지가 되곤 하였다.

   이밖에 다른 선교사들의 입국 경로와 전도 여행에도 양화진은 인천과 서해안 각지를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이 되곤 하였다. 같은 해 6월 21일 의료 선교사 헤론(J. W. Heron)이 도착하였다. 뒤이어 엘러스(Annie Ellers)·홀튼(Lillias S. Horton) 두 미혼 여의사도 도착하였다. M. H. 기포드(Gifford) 여성 선교사(서교동교회 설립자)는 1888년 9월 28일 한국에 입국하였다.

◇ 호주 장로회(The Presbyterian Church Australia)


   오스트레일리아의 멜버른 출신인 데이비스 남매(J. H. Mary Davis)는 1888년에  조직된 빅토리아 장로회 신도협회의 재정 지원에 의하여 1889년 10월, 선교사로 한국에 도착하였다. 1890년 선교 지를 물색하기 위해 부산으로 선교 여행을 하다가 천연두와  폐렴으로 1890년 4월 15일 부산에서 동생이 별세하자 귀국하였다. 그러나 데이비스의   죽음은 호주 장로교인들의 한국 선교에 대한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키게 되어 1891년 10월, 맥케이(J. H. Mackay)·멘지스(Manzie)·포오셋(M. Fawcett)·페리(Jean Perry) 등을 선교사로 파송 함으로써 본격적인 한국 선교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 미국 남장로회(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 S.)


   안식년으로 미국에 돌아간 언더우드는 1891년 테네시주 내쉬빌(Nashiville)에서  열린 미국 신학생 동맹에 참석하여 한국 선교에 관해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은 많은 신학생들을 감명 깊게 하였다. 이 때 신학교 졸업반의 테이트(L. B. Tate)·존슨(C. Johson), 레이놀즈(W. D. Reynolds)와 전킨(W. M. Junkin)은 남장로회 해외 선교부에 한국 선교사로 파견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한편 존 언더우드는 한국 선교를 지원하기 위하여 5천 달러를 헌금하였다.
   결국 선교 지망자들의 열성적인 노력과, 선교 헌금이 답지하여 남장로회 해외 선교부는 테이트·전킨·레이놀즈와 데이비스(Linie Davis)·볼링(P. Bolling)·레이번(M. Leybun)과 테이트의 여동생(Mattie Tate)을 한국 선교사로 파송 하였다. 그들은 1892년 11월 3일 한국에 도착하였다.

◇ 캐나다 장로회(The Presbyterian Church in Canada)


   초기에 캐나다 선교사들은 토론토대학의 YMCA 등의 지원으로, 어떤 교단적인 배경을 갖지 않고 한국에 입국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평신도였으며, 게일(J. S. Gale)은 1888년 12월 16일 내한하여 선교 활동을 개시했다. 펜윅(Malcolm Fenwick)은 토론토 실업 인들의 지원으로 1889년 말에 내한하였다. 하디(R. A. Hardie), 홀(W. J. Hall)은 1890년 9월에, 에비슨(O. R. Avison)은 1893년 7월에 입국하였다. 1893년 12월 18일에 맥켄지(W. J. Mckenzie)가 황해도 소래에 도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