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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자료/잡학사전

[시론] 에너지 약소국의 역발상

백훈 중앙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2007.09.17

    • ▲ 백훈 중앙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 국제유가가 사상 최초로 배럴당 80달러를 넘어서면서 세계경제 침체에 대한 우려가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 원유 수입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중동산 원유의 기준 가격인 두바이 가격도 드디어 배럴당 70달러를 넘어섰다. 불과 3년 사이에 두 배 이상 오른 것이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석유에 대한 세계적인 수요 증가와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공급능력에 대한 의구심으로 유가가 앞으로 더욱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한 해 에너지 수입액은 870억 달러. 이는 우리나라 전체 수입의 4분의 1을 초과하고 반도체, 자동차, 그리고 철강제품 수출을 합한 액수와 맞먹는 규모다. 지난해 원유 수입액은 540억 달러로 전년 대비 32%나 증가하였다. 그동안 정부는 대규모 원유 비축시설을 확장해 오고 있지만, 고유가에 따른 예산 부족으로 필요한 원유를 미처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원유에 관한 한 뾰족한 대책이 없는 약소국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희망이 나타나고 있다. 원유를 정제한 휘발유, 그리고 경유와 같은 석유제품 생산에 있어서 우리나라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높은 원유 수입 증가에도 불구하고, 국내 석유제품 소비는 거의 늘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늘어난 원유 수입은 어디에 사용된 것인가. 우리나라가 수입하는 원유의 30% 이상은 석유제품 수출을 위한 원료로 사용되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석유제품 수출은 금액으로 206억 달러로, 우리나라의 주요 수출품인 승용차와 선박 수출에 버금가는 규모다. 한국은 사우디아라비아, 네덜란드, 러시아, 미국, 싱가포르에 이어 세계 6위 석유제품 수출국이 되었다. 석유제품 수출에 관한 한 우리는 결코 약소국이 아닌 것이다.

      우리나라의 석유제품 수출이 크게 늘면서 외국의 대표적인 석유 트레이더들이 한국에 석유제품의 물류중심지를 건설하고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우리나라에 석유물류중심지가 조성된다면, 막대한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석유제품의 대규모 상업적 저장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되고, 에너지 위기와 같은 유사시에 이를 활용할 수 있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원유나 천연가스가 생산되지 않는 싱가포르는 1980년대 초부터 정부의 전략적인 정책 추진으로 세계 3대 석유물류중심지가 되었다. 그 결과 세계적인 트레이더들이 싱가포르에 연간 5억 배럴에 달하는 석유제품을 들여오고 내가고 있다. 따라서 별도의 원유 비축 없이도 안정된 석유 가격을 유지하고 있다. 석유물류 부문은 1980년대 싱가포르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고, 현재에도 수출의 1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석유물류산업은 위험 회피를 위한 목적으로 파생금융상품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싱가포르의 금융허브가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최근 중국 경제의 급속한 성장으로 중국을 대상으로 하는 석유제품 물류에 대한 수요가 빠르게 늘고 있지만, 입지 조건이나 제도적 후진성으로 국제 트레이더들은 아직은 중국 내 투자를 꺼리고 있다. 따라서 지금이 석유물류중심지가 우리나라에 조성될 수 있는 유리한 기회다. 이러한 배경에서 우리 정부가 전남 여수에 시험적으로 석유제품 물류시설 건설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석유물류중심지는 대규모 저장시설의 건설만으로 실현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국제 트레이더들이 자신들의 석유제품을 빈번하게 이러한 시설에 저장함으로써 지역 내 석유제품의 높은 유동성이 확보되어 자연스럽게 석유시장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석유제품에 있어서의 한국의 비교우위를 활용하는 역발상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