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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모음/다산 칼럼 모음

세계화 시대와 개량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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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어느 여름방학, 나는 고요한 산사(山寺)에서 한동안 맹렬 정진할 요량으로 괴나리봇짐 하나를 싸들고 무작정 상경파처럼 표표히 집을 떠난 적이 있었다.

꽤나 힘들게 떠돌다가 한창 불사를 벌이고 있는 영동 부근의 어느 암자가 용케도 걸려들어, 며칠 묵어가도록 주지 스님의 특별한 허락을 받았다. 처음에는 빈방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절 공사를 하는 일꾼들이 다음 날 새벽 다 떠나게 되어 있으니, 이들 틈에 끼어 하룻밤만 고생하면 만사 오케이라는 말씀이었다. 다음 날부터 독방이 나에게 굴러 들어오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다음 날 이른 아침 나는 몸서리치게 잠에서 깨었다. 적잖은 수의 완전 무장한 경찰과 방위병들이 나를 기습한 것이다. 하룻밤 같이 몸을 뒤척였던 인부들이 새벽에 산을 내려가서는 아마도 ‘거동 수상자’가 나타났다고 파출소에 신고한 모양이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지독히 고약한 연분이었다. 얼마나 철저히 단련된 ‘간첩’ 신고정신인가. 심문이 시작되었다.

‘거동 수상자’로 몰렸는데

주민등록증을 보여주었더니, 그것도 위조가 많아 믿지 못하겠다고 해서 교수신분증까지 보여주었다. 그것도 퇴짜를 맞았다. 철통같은 반공(反共) 망 앞에서는 대학교수도 아무 쓸모 없는 존재였다. 모다 ‘위장분자’로만 보이는 눈치였다. 운명에 모든 걸 맡기는 도리밖에 없었다. 나는 달관한 선승처럼 체념하였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났다. 다름 아니라 주민등록증이 결국 나를 해방시켰던 것이다. 그걸 꼼꼼히 들여다보던 경관 하나가 거기에 붙어 있는 병역란에 기재된 내 출신 군대를 보더니 경례를 처억 부치며, 자기도 같은 군대를 제대했다며 반갑게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닌가. 교수신분증보다도 그 짧은 기간이나마 군대라는 휑뎅그렁하지만 동일한 공동체에 함께 몸담았다는 속절없는 ‘동지의식’ 하나가 더욱 확고한 신원증명의 근거로 작용한 것이다. 그리곤 그들은 환한 얼굴로 철수했다.

일종의 파벌의식과도 같은 형식적인 ‘끼리끼리 주의’가 서로 살벌하게 대치하고 있던 두 상대를 하나로 뭉치게 만들었던 것이다. 어디 그뿐일까. 밖으로 드러나는 허황된 겉모습, 요컨대 ‘형식주의’가 괴력을 발휘할 때도 적지 않다. 하지만 정작 우리 모두가 강강수월래처럼 손을 맞잡고 오랫동안 함께 어울려온 실질적인 우리 고유의 전통이나 미덕에 대해서는 별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눈치다.


나는 집에서는 편리하게 개량한복을 입고 지낸다. 산책 외에 별달리 할 수 있는 재주가 없는 처지라, 때로는 ‘승용차 탄 김삿갓’이란 귀여운 놀림까지 받기도 하며, 강의 없는 날 시골 여기저기를 ‘탐험’하기도 한다. 그러다 요기라도 하려고 식당에 들르면, 거기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이 거의 예외 없이 나에게 지극한 관심을 보인다. 내 인상이 좋다거나 나의 탁월한 남성적 매력에 반해서 솟아나는 일사불란한 서비스정신의 발로가 아님은 물론이다. 오직 한복 때문이다. 물론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스며 나오는 애잔한 동포애 같은 것 역시 결단코 아니다.

개량한복 입은 사람이 겪는 남다른 대접

한국 사람이 양복을 입고 있으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데, 정작 우리 고유의 옷을 입고 있으면 벌써 눈치가 달라진다. 오로지 참을 수 없는 야릇한 호기심 같은 게 발동하는 모양이다. 어쨌거나 도무지 정상적인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또라이’나 ‘사이코’ 보듯 한다. 흔히들 수군대며 그렇게도 궁금해한다. 벌건 평일 대낮에도 왔다갔다하는 걸 보면 실업자이거나 땅 투기꾼일 가능성이 높은데 또 그렇게는 보이지 않으니 무척 난감해 하는 눈치다. 나에게 ‘미술 그리느냐’ 하고 묻다가 내가 그냥 빙그레 웃으며 숟가락질만 열심히 해대면 일단 철수한다. 그랬다가 식사가 끝날 때쯤이면 다시 진군해와서는, “이젠 알겠다”며 확신에 찬 표정으로 단정짓는다. “사주관상 보시는 분이죠? 제 앞으로 어떻게 살지 사주나 좀 봐주세요” 하고 애원하며 매달리기까지 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개량한복 걸친 내 모습이 워낙 기묘하게 보여서 그럴까.

그런데 그네들이 사주 좀 봐달라고 결사적으로 매달릴 때, 불현듯 어느 신부님이 떠올랐다. 그 신부님은 정년퇴임하고 나면 점쟁이가 되고 싶다고 하셨다. 그는 점을 쳐서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삶의 용기를 북돋아주고 또 그들을 고무·격려해줄 수만 있다면 하고 염원하는 거룩한 신부님이셨다. 그 또한 명백한 종신 이웃사랑 아니겠는가. 물론 나는 두말할 나위 없이 사주 팔자에 관한 한 완전무결한 문외한이다.

하지만 사무치는 나의 인간애(?)가 두통거리였다. 그네들의 인간적 기대에 찬물을 끼얹지 않으려는 성스러운 인도주의 정신(?) 탓에, 못이기는 척하며 사주라는 것을 봐줄 때도 있다. 중년을 훌쩍 넘긴 아주머니들이 노구를 이끌고 식당에 나와 매일 소달구지처럼 부대낄 테니, 다들 딱한 형편으로 시달릴 사람들인 것만은 분명한 노릇 아닌가.

나는 권위 있는 운명철학자답게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문을 연다. “자식들 참 잘 두었다. 자식들 덕에 앞으로 복이 덩굴째 굴러들어 오겠다”는 덕담으로 시작해서, “이제 고생이 다 끝나간다.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면 앞으로 팔자가 펴서 떵떵거리며 남부럽게 살날이 곧 온다” 하는 식으로 도사다운 운명 감정을 마감하곤 한다. 그들은 나를 도사처럼 믿고, 이 봉이 김선달의 말을 확신하며 뛸 듯이 즐거워들 한다. 복채 삼아 밥값을 받지 않으려 발버둥치기도 한다.

뭔가 좀 덜 떨어지고 비정상적인 땡초나 ‘또라이’처럼 보긴 하지만, 어쨌거나 한복을 입고 다니면 함부로 무엄히 대하지는 못하는 눈치다. 허니 인간대접 받는 기분들 때도 적지 않다. 우리 고유의 것이 거의 유일하게 대접받는 순간이 이뿐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반가우면서도 참담함을 느낄 때가 잦다. 어떤 외국 것보다 값진 대접을 받는 유일한 우리의 것이 한복과 한우 정도밖에 없는가 싶어 속상할 때도 많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 또 사정이 싹 달라졌다.

살신성인하듯이 우리를 먹여 살리고 공부까지 시켜주었던 우리의 거룩한 누렁이 한우도 이제 <한미 FTA>라는 요상한 덫에 걸려 처절한 신세로 전락해가고 있다. 참으로 오랜 세월 우리 민족과 운명을 함께 해왔던 우리의 한우가 쓰러지면, 우리 역시 쓰러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한우 탓은 아니라 믿지만, 우리나라의 자살율이 급기야는 OECD 국가 중에서 1위를 마크할 정도로까지 치솟았다 한다.

현재 신자유주의가 국제적 절대군주처럼 군림하고 있다.

공동체적 연대까지 파괴되고 있는 실정이다. 무엇보다 권위주의적 국가질서의 유산인 경제성장 제일주의적 생활 양식 및 물질주의적 사고방식이 확산된 탓이 크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경향은 IMF 위기 및 세계화 이데올로기의 확산 이후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물신숭배와 황금만능주의가 바야흐로 인간성 파괴의 주범으로 기승을 부리는 현실이다. 혹심한 경쟁주의는 냉혹한 약육강식의 사회질서를 배태하고, 결과적으로 빈익빈-부익부 현상과 양극화의 심화로 인해 사회적 약자는 점점 더 설 곳을 찾지 못하는 비참한 비인도적 상황이 조성된다.

그러나 세계 인구의 불과 20%를 차지하는 것이 부자 나라 사람들인데, 이들이 세계 부의 86%를 차지하고, 전 자원의 80%를 소비하며, 이산화탄소의 75%를 배출하고 있고, 전화 회선의 74%를 점하고 있다. 그리고 60억 세계 인구 가운데 11억 내지 12억 명 정도가 기아와 식량 부족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정반대로 같은 수의 사람들이 비만으로 고통 당하고 있다 한다.

그러나 세계화가 군림한다고 해서 우리의 한복이 과연 사라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