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가 6월 10일, 이른바 6·10항쟁 20돌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요즘의 보도를 통해 그 당시 목메어 외치던 시위 군중들의 함성을 듣다보면 아직도 가슴이 뛰고 정의의 피가 솟구치는 기분을 억제하기 힘들어지기도 합니다. 더더구나 6월의 ‘민중항쟁’이라는 용어는 ‘6월 혁명’이라고 바뀌면서 그 뜻과 의의가 더욱 새로워지는 기분이어서 흥분을 감추기 어려워집니다.
지금부터 200년도 더 되는 1797년 윤6월부터 1799년 4월 24일까지 1년 11개월간 다산은 최초이자 마지막인 곡산도호부사라는 목민관 노릇을 했습니다. 다산이 새로 부임하기 위해 곡산(황해도)땅에 이르자 어떤 죄인이 신관사또 앞에 무릎을 꿇고 자수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군중시위를 주도하다 오영(五營)에 수배령이 내려진 이계심(李啓心)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전임 도호부사가 집무하던 시절, 아전들이 농간을 부려 포병에게 바치는 세금인 포보포(砲保布) 40자의 대금으로 200냥을 바쳐야 하는데 900냥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이에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이계심이 우두머리가 되어 백성 천여 명이 들고 일어나 군청으로 쳐들어가 부사 물러나라는 함성을 질렀습니다. 하늘에 치솟는 함성에 천지가 흔들리는 분노의 불길이 솟아올랐습니다.
결국 아전과 관노들이 무기를 들고 강제 해산하여 군중은 흩어졌고, 이계심도 은신하였지만 수배를 내려 잡히면 요단이 날 지경이 이르렀습니다. 그럴 무렵 정부는 부사를 교체하여 다산이 부임하게 된 것입니다. 자수한 이계심을 관아로 데리고 온 원님 다산은 재판을 했습니다. “한 고을에 너 같은 사람이 있어 형벌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만백성을 위해 그들의 원통함을 폈으니, 천금은 얻을 수 있어도 너 같은 사람은 얻기 어려운 일이다. 오늘 너를 무죄석방한다”라는 솔로몬의 재판을 했습니다.
시위군중, 그들의 주장이 그렇게 옳고 바른 내용이었지만 군사독재정권은 한없이 탄압했습니다. 다산은 그런 군중을 무죄석방하고 그들의 요구대로 모든 시책을 폈습니다. 역사는 이렇게 반복되는 것인가요. 이계심의 함성이 6월 항쟁으로 재생되어 혁명으로 승화되어갑니다.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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