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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영재교육

영어 광풍이 가져온 토플 대란

이덕환의 과학문화 확대경 (84)

토플(TOEFL) ‘대란’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토플을 치려는 우리 학생의 수가 너무 많고, 토플을 주관하는 미국의 교육평가서비스(ETS)의 대응이 부실해서 생긴 일이다.

 

ETS는 예고된 날짜에 접수 사이트를 열어주지도 않았다.

시험을 치려는 학생들은 ETS가 ‘깜짝 접수’를 시작할 때까지 컴퓨터 앞에서 꼼짝도 못하고 한없이 기다려야만 했다.

물론 대부분의 학생들에게는 응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토플을 치기 위해 단체로 외국 여행을 하는 학생들도 있다.

시험을 치지 못해 난처하게 된 학생들이 수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물론 일차적인 책임은 우리 학생들의 수요를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미국의 교육평가서비스 사에 있다.

작년 9월부터 새로 시작한 ‘인터넷 토플’(iBT)이 문제였다.

거의 매일 시험을 칠 수 있었던 과거의 ‘시험지 토플’(PBT)이나 ‘컴퓨터 토플’(CBT)과는 달리 인터넷 토플은 한 해 40여 차례밖에 치를 수가 없다고 한다.

 

전 세계의 모든 시험장이 함께 시험을 쳐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터넷 토플을 시행하려면 충분한 규모의 시험장을 확보하는 것이 필수였다.

그런데 ETS가 우리나라에 마련한 시험장은 겨우 300석 규모였다는 것이다.

결국 토플 대란은 처음부터 예고된 것이었다.

새로운 시험에 대한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면 당연히 시행을 연기했어야만 했다.

그러니까 ETS는 악덕 기업 또는 부실 기업이나 할 수 있는 횡포를 부린 셈이다.

국내 외국어 평가 시험 시장의 90퍼센트 이상을 독점하고 있는 ETS의 그런 횡포를 막아내지 못한 우리 정부의 책임도 크다.

당연히 우리 정부가 진상을 철저하게 조사해서 강력하게 제재를 해야만 한다.

물론 당분간 우리 학생들이 불편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지만, 작은 불편이 두렵다고 외국 기업의 횡포를 그냥 둘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토플 대란의 원인이 ETS의 준비 부족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자신의 책임도 결코 가볍지 않다.

빠르게 늘어나는 우리 응시생의 구성이 정상이 아니다.

2001년에 5만 명에 지나지 않았던 응시생이 이제는 거의 세 배나 늘어난 15만 명에 가까운 수준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토플 응시생의 70퍼센트가 초등학교와 중학교 학생이다.

본래 토플은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는 학생이 영어를 사용하는 ‘대학’을 다니기 위해 필요한 영어 쓰기, 말하기, 듣기의 능력을 평가하기 위한 것이다.

초등학생과 중학생을 위해 마련한 시험이 아니라는 뜻이다.

외고의 영어 특기생 선발이 초등학생과 중학생에게 불어닥친 토플 열풍의 원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외고의 영어 특기생 선발 인원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토플 열풍의 진짜 원인은 무책임한 영어 사교육 시장이다.

일부 지역의 사설 영어 학원들이 자신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학생들에게 토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초등학생과 중학생들은 알량한 사설 영어 학원에 등록하기 위해 토플 시험에 몰려들고 있는 셈이다.

토플 몇 점 이상의 학생들만을 교육시키는 수준 높은 학원이라는 광고가 학부모들에게 놀라운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토플이 사설 영어 학원의 교묘한 광고의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설 영어 학원의 인기를 위해 엄청난 외화와 노력을 낭비하고 있는 셈이다.

몰지각한 일부 대학이나 기업들도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영어로 강의를 하는 것도 아니고 업무를 보는 것도 아니면서 공연히 토플과 토익을 요구한다.

전국의 모든 대학이 ‘토플/토익 준비 기관’으로 변해버린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토플은 대학의 강의를 수강하기 위한 영어 실력을 알아보기 위한 시험이라는 사실은 완전히 무시한다. 토플과 토익 점수가 우리 대학에서의 수학 능력이나 기업에서의 업무 수행 능력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우리 대학과 기업들이 저울을 이용해서 농구 선수를 선발하는 것과 같은 기막힌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토플을 본래의 목적에 어긋나게 활용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을 방치하고 있는 ETS도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ETS가 토플로 우리나라에서 한 해에 올리는 수입이 200억 원에 가깝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TOEIC에서도 한 해에 700억 원에 가까운 수입을 올리고 있다.

GRE와 SAT까지 합치면 ETS가 우리나라에서 올리는 수입은 1천억 원에 가깝다.

결국 ETS는 수입에 눈이 멀어서 자신들의 시험이 잘못 활용되고 있는 것을 방치하고 있는 셈이다.

‘교육의 질과 기회 균등을 위해 노력한다’는 ETS의 설립 목적도 엄청난 수입 앞에서는 빛을 잃어버린 것이다.

더욱이 토플에 몰려든 초등학생과 중학생들이 토플의 신뢰도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사실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세계화 시대에 영어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진정한 세계화는 우리의 고유한 전통을 바탕으로 할 때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우리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후의 세계화는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영어 광풍(狂風)은 절대 정상이 아니다.

영어는 우리의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필요한 보조 수단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영어만 잘 한다고 세계화 시대의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우리말과 글에 대한 관심과 애정도 중요하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지식기반 시대의 핵심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전문성이라는 사실이다.

전문성을 갖추지 못한 영어 전문가는 진짜 전문가를 도와주는 ‘통역사’와 ‘번역사’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 사회의 무분별한 영어 광풍은 진정되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