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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모음/학교장 훈화자료

누렁 송아지(얼룩 송아지가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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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렁송아지 찬가


우리는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할 무렵부터 “송아지 송아지 얼룩송아지, 엄마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라는 정겨운 노래를 익혀왔다.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걸음마를 익혔던 나도 이 노래를 들으며 컸고, 또 그것은 나의 아들딸들에게도 보증수표처럼 어김없이 상속되었다. 그러나 어떤 우연한 기회에 ‘누렁송아지’와 관련된 얘깃거리를 접하고는 나는 가슴과 무릎을 동시에 쳤다. 그렇다. 우리의 것은 얼룩송아지가 아니라 누렁송아지인 것이다!

우리 소는 얼룩송아지가 아니라 누렁송아지

이 단순한 사실하나를 깨닫기 위해 나는 무려 수십 년 이상을 소비해야 할 정도로 어리석었다. 우리의 들판과 산하에서 항상 부딪치던, 양순하고 너그러운 슬픈 눈망울의 누렁 소를 나는 내내 잊고 살았던 것이다. 나를 공부시키고 먹여 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누렁 소들이 죽임을 당했을까. 하지만 나는 그들을 찬미하는 노래를 한번도 불러준 적이 없다. 그러면서도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저 머나먼 이국의 홀슈타인 얼룩송아지만을 꼭지 빠지게 예찬해왔다. 누구는 나의 이 때늦은 각성을 과장되고 소아병적인, 심지어 국수주의적인 망발이라고 비난할는지도 모른다.

물론 외국의 것이라고 모두 배척해야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단지 우리의 것을 보지 못하고, 아니 외면해버린 채 남의 것만을 넋이 빠지게 찾아 헤매는 한심스러운 작태만은 그만두자는 말이다.

이 ‘얼룩송아지 정신’이 활짝 꽃피어 엄청 값비싼 수입품 보트 장난감을 들고 일류 호텔에서 생일잔치를 벌이는 동화세계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까? 수 년 전 청소년 여론조사 결과 혐오하는 음식의 윗자리를 당당히 차지하는 것이 단연코 김치라는 서글픈 망발이 태연히 만들어지기도 한다. 어른이 되어서는 고액의 이탈리아 제 손수건과 타조가죽 지갑세트가 들어 있는 프랑스 제 장 루이 세레 정장을 걸치는 신사가 된다. 그리고는 엄청난 고액의 블랙 그래머 모피코트를 즐겨 입는 여성과 역시 고가의 미제 오이코시 아동복 정장을 입힌 아이를 데리고, 독일제 BMW를 타고 나들이 가는 가정의 주인으로 행세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고귀한 샹들리에가 장엄한 색조를 던지는 양옥집과 골프장 만한 잔디밭, 하다못해 일제 양념통과 조미료, 타이 제 금도금 수저세트까지 갖추어진 집안에서 삶의 즐거움을 창조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렇게 인생을 살다가 죽어서는 이탈리아 제 대리석 관에 묻히는 사람들. ‘요람에서 무덤까지’ 신의 축복이 약속된 사람들……

‘형식적’이라는 것과 ‘격식을 갖춘다’는 것은 물론 그 의미하는 바가 서로 다른 것이다. 가령 막걸리를 소주잔에, 맥주를 바가지 등에 마시는 것은 오히려 형식적인 행동이라 이를 수 있다. 과장이나 만용은 진실과 동떨어져 있는 탓이다. 허니 격식에 어긋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경우가 바른 사람’이라는 우리의 전통적 칭송 속에는 형식이 아니라 격식과 어우러지는 몸짓을 높이 기리는 정신이 배어 있다. ‘뚝배기보다 장맛이 좋다’던 우리들 아니었는가. 이를테면 보잘것없는 겉모양보다는 훌륭한 내용을 뒤좇던 게 바로 우리의 전통이었음에랴. 허나 지금은 안에 든 것보다는 그릇이나 포장에 더욱 신경 쓰는 형편으로 뒤바뀌어버렸으니, 어쩌다가 이런 곱던 마음가짐이 행방불명되어버렸을까. 예컨대 삼풍백화점이 겉이 허술해 무너져 내렸던가. 다들 그야말로 ‘빛 좋은 개살구’들이었다.

먼저 속을 우리 것으로 채워야

형식주의라 함은 한편으로는 남들과 똑같아지고 싶어하는 마음과, 다른 한편으로는 남들과 못내 달라지고 싶어하는 마음이 이율배반적으로 뒤섞인 상태를 이른다. 첫 번째 것은 예컨대 병적인 ‘물신숭배’나 ‘사대주의’처럼 뛰어나다고 믿는 타인을 무조건 모방하고 추종하려는 의지로 귀결되지만, 반면에 두 번째 것은 ‘일류 병’처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을 앞지르고 남과 결정적으로 격차를 만들고야 말겠다는 결의로 나타난다.

우리의 ‘누렁송아지’가 ‘얼룩송아지’에 떠밀리어 저 가난한 농촌의 들판에서 날로 사위어갈 때, 우리의 머릿속에는 ‘민족’이 점점 메말라가고 있었다. 통째로 수입한 캐나다 제 통나무 주택에서 이탈리아 제 가구의 감미로움을 즐기며 사는 사람과 새벽마다 공중변소 앞에서 다리를 배배꼬며 차례를 기다려야 하는 달동네 주민들은 서로를 도대체 같은 민족이라 여길 수 있을까? 이런 게 이른바 ‘양극화 현상’ 아니겠는가.

나는 누렁송아지를 사랑한다. 우선 우리 것부터 찾자. 그래야 다른 나라의 것을 여유 있게 끌어안을 수 있지 않겠는가. 속을 우리 것으로 가득 채운 다음 외부의 다른 형식을 빌려 올 때, 겉이 더욱 아름다워질 수 있지 않겠는가. 형식과 내용은 항상 품위를 같이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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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호성
· 서강대 사회과학대 학장 겸 공공정책대학원 원장(정외과 교수)
· 한겨레 신문 객원 논설위원
· 학술단체협의회 대표간사
· 미국 Berkely 대학 및 캐나다 뱅쿠버 대학(UBC) 객원교수
· 저서 :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와 전망>,<우리 시대의 상식론>,
           <21세기 한국의 시대정신>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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