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05월 16일 (목) 05:33:14
한국서번트리더십훈련원(대표 협성대 유성준교수)의 5월 한국서번트리더십학교 강좌가 협성대학교 국제회의실에서 진행되었다. 미국 세인폴신학대학원의 조직신학교수인 전영호교수의 ‘왜 기독교인들의 모임을 에클레시아라고 정의하는가(본질, 특징, 사명)’ 주제강연을 양승준교수(협성대 기독교교육)가 정리한 내용을 소개한다.
왜 기독교인들의 모임을 에클레시아라고 정의하는가(본질, 특징, 사명)
SPST(Saint Paul School of Theology) 박사과정을 졸업한지 10년째이다. 나에게 조직신학을 가르쳐 주신 스승이신 전영호박사님께서 네팔 감리교신학교 강의 후 한국에 잠깐 방문하시어 한국서번트 리더십 훈련원에서의 강연이 협성대 이공관 국제회의실에서 진행되었다.
점심식사 후 나른할 법한 강의실의 청중들에게 전박사님은 그 흔한 파워포인트나 유인물도 없이 스크린보드와 마카 펜 하나로 강의를 시작하셨다. 최근 각종 혁신교수법에 심취해 있는 나로서는 제공되는 강의자료가 없어 아쉬웠으나 이내“청중의 경청을 위한 것”이라는 스승님의 큰 그림(big picture)를 깨닫게 되었다.‘에클레시아(Ecclesia)’라는 단어로 시작된 강의는 한 문장도 간과할 수 없는 깊은 의미를 담아 청중들의 마음을 향해 다가왔다.
1. 에클레시아(Ecclesia)로서의 교회
교회를 에클레시아라고 한다. 에클레시아는 사도바울이 사용한 단어이다. 바울은 헬라의 시의회를 의미하는 에클레시아를 교회라는 뜻의 용어로 사용했다. 에클레시아는 데모크라티아(Demokratia)와 연결하여 이해된 단어이다. 데모크라티아는 데모스(Demos: 다수, 시민)와 크라티아(Kratia: 지배, 통치)로 이루어진 단어로 민주주의를 뜻하는 데모크라시(Democracy)다. 공동체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공동체의 구성원 스스로 대화와 타협을 통해 의사를 결정하여 실행에 옮기는 것을 의미하는, 현대적 의미의 민주 정치와 같은 맥락이다.
에클레시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지 단어의 합성어 조합인 "~로부터 from”의 뜻을 지닌 전치사 에크(ἐκ)와 "부르다 call summon”의 뜻을 지닌 동사 칼레오(καλέω)를 합쳐 "~로부터 불려나온 사람들” 혹은 "~로부터 부름 받은 사람들”이라고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에클레시아가 신약성서 시대의 실생활에서 어떤 의미로 쓰여 졌는지 탐구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기원전 5-6세기경부터 이미 사용되던 이 단어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차용하여 "교회”라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이 단어를 차용하기 전 에클레시아는 "시민들의 모임 혹은 총회”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스 도시국가를 일컫는 폴리스(πόλις)에서 직접민주주의가 시작되었다. 한 도시국가의 시민권자들이 모여서 폴리스의 중대사를 직접 의논하는 자리, 예를 들어“아테네는 델로스나 스파르타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페르시아의 침입 앞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와 같은 일들을 시민들이 모여서 결정하는 자리가 에클레시아였다.
신약성서 사도행전 19장32절, 39절에서 ‘민회(lawful assembly)’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시민들의 총회, 합법적인 집회나 모임을 뜻하는 정치적인 용어이다. 다시 말해서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 시절 에클레시아는 아테네의 모든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주제에 대해 듣고 토론하고 법령을 통화시키기 위해 정기적으로 모이는 집회였다. 이는 사도 바울 시대에 이르러서도 민주주의의 이상과 시민들의 총회 및 책임감과 같은 특징들을 지닌 채 남아 있었다. 비록 여성과 노예는 소외된 아테네 남자 시민들만의 공적인 모임이었지만(미국 건국자들도 마찬가지) 고대 그리스인들은 에클레시아에 참여함으로써 명예롭고 영광스러운 인간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확신했다.
우리가 잘 아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정치적 동물”이라고 말한다. 이 말의 함의는 폴리스, 즉 에클레시아를 통해서만 좋은 삶(good life)을 이룩할 수 있고 에클레시아를 떠나서는 인간다운 삶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다른 단체들이나 관계들은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만, 폴리스(에클레시아)만은 아름답고 좋은 삶을 살기 위해 필요불가결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나아가 아테네 시민들은 폴리스(에클레시아)에 참석한다는 것보다“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음을 중시했다. 단순히 행사와 모임에 참석하는 ‘attend’가 아닌 여러 사람이 같이 하는 일이나 활동, 행사에 끼여서 함께 하는 ‘participate’의 의미를 핵심으로 여겼다. 즉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면 그것을 행사해야만 참다운 인간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다. 참여의 능력은 인간 조건(Human Condition)이며 아름답고 의미 있는 삶은 참여하는 능력을 발휘하는 가운데,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행위에서 추구하고 발현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에클레시아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과 참여하는 일 자체를 매우 큰 명예와 영광으로 여겼다.
그렇다면 왜 초대교회 교인들은 교회를 가리켜 에클레시아라는 말을 사용했는가? 지금의 교회를 에클레시아로 정의하고 표현할 때 그 안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
초대교회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그리스도를 기억하며, 성령님과 교통하는 자신들의 모임에 에클레시아를 사용했다. 그 모임은 사적인 모임(private gathering)이 아니라 공적인 모임(public gathering)이었고, 후에 이방인들까지 포함하는 모임으로 확장되었다.
아렌트(Hannah Arendt)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정치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을 엄밀히 구분하는 정치철학자이다. 아렌트는 18세기 후반에 시작된 근대사회의 발생으로 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 사이의 고대적 구분이 붕괴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근대성에 기초한‘사회’는 공적영역의 자유를 새로운 소비중심주의 및 순응주의 문화로 훼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공영역의 위축에 대응해 아렌트는 고대 그리스 폴리스 모델에 관심을 갖고 연구한 학자이다.
우리는 ‘공적인(public)’이란 말을 ‘정치적인(political)’이라는 단어와 거의 동의어로 사용한다. 그러나 공적이라는 단어는 정치적이라는 단어와 동의어가 아니다. 정치적이라는 말은 라틴어 ‘poplicus’에서 유래했는데, “사람들에 관련된”이라는 뜻이다. 그 단어의 변별적인 의미는 ‘pubes(어른)’라는 라틴어와 관련해서도 드러난다. ‘pubes’는 ‘puberty(사춘기)’의 어원이기도 하다. 원래 공적인 삶은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이행하여 자신을 돌보고, 타인을 돌볼 준비가 된 사람들의 활동무대로 이해되었다. 반면에 ‘사적인(private)’이라는 단어가 ‘privare’라는 라틴어에서 왔다는 것, 거기에서 ‘박탈당한(deprived)’이란 단어가 파생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현대인이 그토록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사생활이 고대에서는 성인들이 뭔가를 박탈당한 형태로 여겼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과 만나고 익숙하고 편안한 장소에 가는 것을 선호한다. 즉 동질성의 공동체(community of sameness)를 추구하며, 편안한 장소(comfort zone)에서 편안한 사람들과 만나려고 한다. 똑같은 사람들, 편한 사람들만 계속 만나면서 동일한 경험과 태도와 생각을 주고받는 사생활의 영위처럼 사람을 멍청하게 만드는 일이 어디 있을까? 고대에 완전히 사적인 사람을 그리스어로 ‘idiotes’- 바보(idiot)의 어원이다-라고 하면서 어리석은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으로 여겼다. 고대 그리스의 에클레시아를 교회로 표현한 것은 다양한 사람들, 낯선 사람들이 참여의 능력을 발휘해 서로 얼굴을 마주하며(face to face) 자유롭게 섞일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지금의 교회가 에클레시아를 살려내려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뭉쳐야 한다. 한 분 하나님을 섬기지만 다양성 있게 섬길 수 있어야 한다.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는 자로서, 자신의 능력을 행사하며 참여해야 한다. 다양한 잠재성들이 아름답게 꽃 피우고 열매로 영그는 것을 축하하며, 참다운 하나님의 창조물로 거듭나야 한다.
이것이 고대 그리스 시민들이 에클레시아에 참여하며 얻고자 했던 명예와 영광의 발현, 즉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참여해 모임과 비전과 책임을 공유하고 실천하며 얻고자 하는 명예와 영광인 것이다.
2. 커뮤니타스(Communitas)와 임뮤니타스(Immunitas).
전박사님의 두 번째 강의 주제는 에클레시아(ecclesia)의 심도 있는 앎과 실천을 위해 커뮤니타스(communitas)와 임뮤니타스(immunitas)의 깊은 탐구이다. 커뮤니타스(Communitas)의 사전적 의미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평등한 구조화되지 않은 공동체 또는 공동체 정신에 대한 라틴어 명사이다. 커뮤니타스는(Communitas)는 자신을 밖으로 드러내려고 하는 움직임이다. 즉, 자신만의 세계를 벗어나서 자기 안에(inside)만 머무르지 않고 바깥(outside)을 향하는 것이다.
임뮤니타스의 사전적 의미는 세금과 공공 서비스의 자유, 면제이다. 그러나 공동체와 결부된 임뮤니타스는 자신, 자아라고 하는 본질이 드러난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다른 이들과 관계성을 갖고 접촉하며 영향을 받는데, 이러한 관계, 접촉, 영향으로부터 왜곡되지 않은 자신을 찾는 것이 임뮤니타스다. 임뮤니타스에서 파생된 ‘면역(immune)’이라는 단어처럼, 인간의 면역체계(immune system)는 자신의 몸에서 이질적인 것들과 자신을 오염시킬 수 있는 것을 거부하며, 오염되지 않은 자신의 온전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올바른 교회 공동체로서 에클레시아는 커뮤니타스와 임뮤니타스의 상호관계를 필요로 한다. 다른 이들을 향하는 커뮤니타스와 다른 이들의 영향으로부터 자신을 잃지 않는 임뮤니타스가 공존해야 한다.
만일 커뮤니타스만을 강조한다면, 자아가 상실된 공동체에서 ‘군중 속의 고독’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집단 안에서 인간은 결국 소외감과 외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타인들의 생각과 관심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며 그 집단에서 격리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외부지향형’ 인간으로의 변화만을 추구한다. 자신의 취향을 포기하고 집단에 녹아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이는 겉으로 드러난 사교성과는 달리 내면적으로 고립감과 불안으로 번민하는 고독한 군중을 만들어 낸다. 최근에는 극한의 “군종 속의 고독”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조차 포기하고 스스로 혼자이려는 사람들(혼족)이 많아지고 있다. 반면에 임뮤니타스만을 강조한다면 면역 시스템의 시대, 즉 안과 밖, 친구와 적, 나와 남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이 그어진다. 낯선 것은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맹목성이 드러나 아무런 적대적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 타자도, 아무런 위험을 초래하지 않는 타자도 이질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제거의 대상이 되고 만다.
베네치아 건축대학 교수인 아감벤(Giorgio Agamben)은 로마시대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를 현대 정치를 비추어 쓴 "호모 사케르"로 주목받았다. 그는 정치가 그 기원으로부터 생정치였다고 주장하면서, 로마시대의 특이한 수인(囚人)이었던 '호모 사케르'란 사회적, 정치적 삶(bios)을 박탈당하고 생물적 삶(zoe) 밖에 가지지 못한 존재였음을 밝힌다. 아감벤은 그러한 삶을 "박탈의 삶"이라 하고 생정치는 이 "박탈의 삶"을 표적으로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나폴리 대학 정치철학 교수인 에스포지토(Roberto Esposito)는 ‘면역화 패러다임’을 통해 모호하게 정의된 정치와 삶의 유기적 연계성을 탐구한다. 그는 임신-출산의 생물학적 과정을 예로 들어 면역화 패러다임을 설명하는데, 산모의 면역체계는 자기 몸속에 존재하는 태아의 상이한 면역체계에 내성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태아를 유산의 위험에서 막아주기도 한다. 이 경우에 면역은 이질적인 것을 가로막는 방어벽이나 무기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질적인 것과 상호소통 할 때 사용하는 ‘여과장치’ 같은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산모가 자신의 몸과 태아에게 실천하는 생명의 보호는 태아의 생명에 대한 순수한 긍정과 완벽히 일치하는 것으로서, 산모의 면역은 신생아에게 삶을 선물(munus)의 ‘형태’로 증여하는 것이자 나(산모)와 타자(태아)의 ‘집단적 현존’임과 동시에 ‘사회적 흐름’인 공동체성을 가능케 해주는 원인이다. 이런 면역화 패러다임에 입각해 삶(비오스)과 정치(노모스)의 관계를 보면, “양자는 한쪽이 다른 쪽의 세력권에 종속되는 외재적 형태로 덧붙여지거나 병치되기보다는 어떤 단일하고 확고한 전체의 두 가지 구성요소, 서로와의 관계맺음을 근거로 해서만 의미를 갖게 되는 두 가지 구성요소로 나타난다.” 요컨대 한 사회의 면역체계는 삶과 권력을 연결시켜주는 관계일 뿐만 아니라 삶이 지니고 있는 보존능력이기도 하다.
아감벤과 에스포지토의 쟁점들은 커뮤니타스와 임뮤니타스의 상호관계를 통해 에클레시아를 이루어가는 원리에 대해 심도 있는 성찰을 확산시킨다. 커뮤니타스는 인간을 어떤 것에 연결할 수 있게 하며, 인간 자신을 초월하도록 한다. 이는 속박이 아니라 자신을 밖으로 내보낼 수 있는 힘을 경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공동체에 소속하고 연결하면, 자기 존재의 틀(frame)이나 상자(box)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하는 힘을 제공 받는다. 자기 존재의 틀과 박스 안에만 머물러 있으면 발전하거나 초월할 수 없다. 커뮤니타스에 속해야만 자기에게 매몰되지 않고 자기 밖으로 이탈할 수 있다. 반면에 임뮤니타스를 통해 개인의 개성, 독특성, 나의 핵심을 보존하며 공동체와 연결되고 관계를 맺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커뮤니타스와 임뮤니타스의 공존을 실천했다. 예수는 공생애를 통해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가며(hanging together) 새로운 공동체인 커뮤니타스를 이루었고, 내면을 돌보고 성찰하며 자기정체성을 확고히 하면서 임뮤니타스를 이루었다.
결국 그리스도인들이 이루어야 할 기독교 공동체는 커뮤니타스와 임뮤니타스의 경계선에 위치해 양쪽 극단(pole)에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임뮤니타스에만 가까우면 자신만 존재하고, 커뮤니타스에만 가까우면 자신을 잃게 된다. 진정한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개인의 강한 정체성과 더불어 공동체에 연합하기 위해 밖으로 향하는, 둘 사이의 긴장은 매우 중요하다.
3. 에클레시아(ecclesia)와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
다양성(diversity)은 연합(unity)과 상관관계가 있어야 한다. 다양성이 공동체에서 연결될 수 있는 상황, 환경, 조건들이 있어야만 연합할 수 있고 의미(meaning)를 만들 수 있다.
많은 학자들의 연구에서 발견되는 것은 “함께 연결되어 있을 때 의미가 발견된다(meaning appears when things are hanging together)”는 것이다. 예를 들어, 퍼즐 맞추기(jigsaw puzzle)에서 퍼즐 판과 퍼즐 조각들이 모두 연결되어 있어야만 퍼즐 맞추기가 가능하다. 퍼즐 조각(fragment)이 따로 놀거나, 맞출 수 없는 퍼즐 판은 의미가 없다.
커뮤니타스는 자신을 내보내려고 하는 것으로, 자기 자신을 초월해서 자기 안에(inside)만 머무르지 않고 밖으로(outside) 연결하도록 하는 관계 맺기이며, 임뮤니타스는 밖의(outside) 것들이 자기 안으로(inside) 들어오지 않도록 막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역동적으로 관계하고 공존해야만 참다운 관계를 누리면서 살 수 있고, 올바른 상호관계를 가질 수 있다.
구체적으로, 교회가 생존하고 존립하고 활성화되려면, 서번트 리더십을 통해 공동체 밖에 있는 개인과 연결시키는 섬김(serving)이 있어야 한다. 안에서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밖에 것들과 연결하는 것이다. 그러나 밖에 것들에 연결시키기만 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밖으로 나가(reach out) 관계 맺기(relationship)를 해야 하지만, 관계 맺기에서 거리를 두는, 자신의 면역체계를 유지하는 임뮤니타스가 필요하다. 내가 밖에 것과 연결되기만 하면 나 자신이 흡수되어 나를 잃게 되고 만다. 섬김을 실천할 때 너무 타인들에 귀착되면 감염되어 탈진(born-out)할 수 있다. 이러한 섬김은 내가 비어(empty) 버리게만 되는 위험한 일이다. 나를 버리고 내려놓는(letting go)를 지혜롭게 잘하기 위해서는 내가 생각 하는 것보다 더 굳건한 핵심이 내 안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나의 강한 정체성과 나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커뮤니타스(communitas)와 임뮤니타스(immunitas)를 통해 공적인 세계의 질서(koinos kosmos)와 사적인 세계의 질서(idios kosmos)가 병행되어야 한다. 우리의 삶이 공적 생활에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며(serve) 의미 있는 연결을 하려면, 내 자신(idios)과 관계성 있는 공적인(koinos) 연결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자신이 고립되지 않으면서 의미를 찾고, 자신이 흡수되지 않고 참여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의미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사적인 세계와 공적인 세계가 함께 연결되어 섬김의 리더십(servant leadership) 발휘되어야 한다.
정리하면, 에클레시아는 고대 그리스의 정치, 경제, 사회의 측면과 생활에서 새로운 가치의 집단으로 인정을 받았다. 많은 이들이 무의미한 삶을 살다가 참여와 연합을 이루고, 치리하는 주권을 갖고 가치 있는 멤버가 되는 평등한 모임이었다. 혼자가 아닌 함께, 그리고 에클레시아 안에서 변화(transformation)를 경험했다.
초대교회는 자신이 고립되거나 격리된 보이지 않는 존재로서의 개인(individual)이 아닌, 커뮤니타스에 소속되어 참여하고, 가치 있는 일을 함께 하며 변화를 경험하는 개인(personal)이 날마다 더해졌다(행 2:42-47). 그 결과 이방인까지 소속하며 참여할 수 있는 공동체로 확장되었다.
전박사님의 강의에서 화두처럼 던져지고 짤막하게 설명한 에클레시아(ecclesia)와 임뮤니타스(immunitas), 커뮤니타스(communitas) 등의 단어들은 당위와 현실 사이의 비극적 간극에 의해 마음에서 혼돈을 일으키며, 신앙 공동체에 대한 깊은 탐구로 이어졌다. 며칠 동안 정리되지 않을 공동체에 대한 혼란스러운 탐구는 마음에서 부서져 흩어질 것인지(broken apart), 아니면 부서져 열릴 것인지(broken open) 양자택일의 요구에 이를 것이다.
모쪼록 기도와 연구로 심연에 이른 계시적 단어들이, 부서져 열린 마음을 통해 매우 섬세하고(detail) 꼼꼼한 섬김과 돌봄의 목회로 드러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임뮤니타스(immunitas)-개인의 강한 정체성과 은사를 발휘와 참여.
커뮤니타스(communitas)-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바깥으로 향한 공적 역할의 실천.
이 둘의 회복과 공존을 통해 주님의 명예와 영광을 높이는 진정한 에클레시아(ecclesia)를 이루어야 한다. 그래야만 온 백성에게 칭송 받았던 초대교회가 우리의 교회(에클레시아)에서 다시금 발현될 수 있을 것이다.
글을 마치며 본회퍼가 성도의 공동생활(life together)에서 피력했던 글귀가 떠올라 적어본다.
보라 형제끼리 한마음으로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좋고 즐거운고! 이것이 말씀 아래서 함께 사는 삶을 찬양하는 성서의 말씀이다. 형제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함께 산다는 것, 우리의 평화이신 그리스도만이 하나로 묶으신다는 것, 그분을 통해서만 우리가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설 수 있고, 서로 즐거움을 나누며 사귈 수 있다.
정리:양승준(협성대학교 기독교교육 초빙교수) wesley4865@naver.com
에클레시아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에베소서 4:1).
그림 설명 :
중앙에 십자가가 있고 다양한 색깔들이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모여 있다. 신앙공동체 안에서 다양한 이들이 모여 연합하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협성대 시각디자인 전공 왕희빈).
한편 5월20일(월) 한민족(조선족, 탈북인, 교려인)을 위한 서번트리더십학교는 베다니교회(곽주환목사 시무)에서 열린다. 오전에는 장성배교수(감신대)의 ‘선교적교회와 지역사회선교’와 오후에는 김학종목사의 ‘교회의 사회적기업과 협동조합 모델’에 관한 발제가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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