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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자료/교회

우리는 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는가?

임종석  |  seok9448@daum.net

예수께서 그리하라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는가? 하나마나한 질문이다. 하나님이신 그분 예수께서 그리하라 하셨기 때문에 그리 하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무엇이든지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다 받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14:14>

-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15:16>. 

-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16:14>)

 

그뿐 아니라 성경은 말이든 일이든 무엇이든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골3:17)고 말한다. 

그러니 더 말해 무얼 하겠는가. 크리스천은 성경이 하라는 것이라면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그대로 하는 것이 상책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분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의미도 모른 채 문자대로 그리하라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세상에 온 것은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마10:34)다 말씀하신다. 그러나 말 그대로를 믿어 분란을 일으키는 사람은 없다. 그 말씀이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데에 있어 불화도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을 두려워 말라는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게 때문이다.

 

그러니 말씀을 대할 때면 이 말씀을 왜 우리에게, 나에게 주셨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왜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라 하셨을까. 그분께서 오직 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너무 거룩하셔서 죄투성이인 우리가 직접 나아갈 수가 없다. 기도도 직접은 드릴 수가 없다. 드린다 해도 이뤄 주시지 않는다. 그러기에 중보자가 필요한 것이다. 낮고 낮은 우리가 높고 높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분에게까지 닿는 사다리가 필요한데 그게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드릴 자격이 없고, 기도드린 것을 받을 자격은 더더욱 없다. 그러니 자격이 차고 넘치시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름은 무엇이 됐건 누가 됐건 그 전존재를 의미한다. 예수님의 이름은 그분 그 자체를 의미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그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을 때 가능하다. 그분의 말씀, 그분의 뜻에 순종할 때 정말로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그분만이 하나님과 나 사이의 중보자라는 확신 가운데 그분으로 인해 지금 내가 드리고 있는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이루어 주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나의 안에 모시고 있는 나의 주인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그 이름을 주문처럼 되뇌지 말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말로 마친다 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되는 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의미를 담아 하느냐에 있지 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의미가 실리지 않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는 의미도 모른 채 외는 주문(呪文)에 불과하다. 기도할 때마다 항상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로 마치다보니 그게 습관이 되어 더 중요한 의미는 생각지도 않게 되는 경우가 허다한데, 안 될 일이다.

 

필자가 아는 어느 장로님은 구역예배를 인도할 때 ‘주기도문을 암송함으로 예배를 마치겠습니다’ 하고 마치는데, 적절한 표현은 아니라고 본다. 여기에서의 암송에서는 주문의 냄새도 약간이긴 하지만 스며나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 예수께서 기도의 모범으로 가르쳐 주신 기도이니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라는 표현으로 한다면 좋을 것 같은데, 어떤가. 어떻든 우리는 ‘예수님 이름으로’가 주문처럼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가 들어있지 않다. 들어있지 않지만 그 의미로 충일되어 있으니 문제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기도하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 말을 빠뜨리고 말았다 해서 큰일 날 것도 없다. 의미 없이 되뇌는 것보다 그 의미로 기도하다 어쩌다 빠뜨리는 것이 비교도 안될 만큼 낫다.

 

필자는 얼마 전에 <당당뉴스>에서 10년도 더 오래전에 올라온 것이기는 하지만, 하나의 글을 읽고 벌레를 씹는 것 같은 기분이 든 적이 있다. 그 글을 쓴 사람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은 민중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이라고 생각”한다며, 그래서 자기는 기도할 때면 “고난 받는 당신의 아들·딸들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했다. 그러며 자기는 “기독교의 대속의 교리 같은 것은 잘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도 했다.

이 무슨 망발인가.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도 그 같은 글을 쓴 사람을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는가. 필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기독교는 성경을 경전으로 하는 종교이다. 그도 그냥 경전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분의 뜻이다. 그러니 그와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은 기독교인이라 할 수가 없다. 그런데 필자가 그 글을 읽고 아연한 것은 글의 내용 때문만이 아니었다. 글에 대한 반응이 대단했다. 조회수뿐 아니라 추천수도 놀랄만했다.

 

 

온 몸과 온 마음으로 하라

 

필자는 여기에서 이제 너무 많이 회자되어 영양가 없는 말이 되었지만,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외치고 싶다. 믿는다는 사람들이 성경과의 괴리가 심한 말들을 이러쿵저러쿵하는데, 이제 그런 말들은 그만 좀 했으면 좋겠다. 말씀에 따르려는 마음이 없거든 말만이라도 삼갔으면 좋겠다. 아니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적어도 말씀에 따르려는 노력만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이 곁길로 빠지고 말았는데, 기도는 이뤄 받기 위해 하는 것이다. 이뤄 주시면 좋고 이뤄 주시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하는 것이라면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런 식으로 하는 기도는 열 번을 하고 백 번을 해도 이뤄 주시지 않는다.

 

흔히들 기도는 중노동이라 하는데, 온 몸과 온 마음으로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생각해 보면 알 일이다. 물론 모든 기도를 다 그렇게 드리는 것은 아니다. 깊은 사색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 조용조용 말씀을 드리기도 하고,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그렇게 하는 기도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하는 기도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라 했는데, 나의 안에 품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하는 기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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