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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자료/교회장로

교회란 무엇인가?

예수 코리아 2020. 5. 1

마태복음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교회사에서는 예수님 오시기 전을 율법의 시대라고 하고, 예수님이 오신 후에는 교회의 시대라고 구분합니다. 율법의 시대와 교회의 시대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율법 시대는 제사장에게 법의 집행이 위임된 시대입니다. 제사장의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법은 하나님이 만드셨는데 법 집행은 인간이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왜 법치주의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습니다. 왜 법보다 주먹이 가깝고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까? 헌법은 자유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정신이 담긴 것이기에 큰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민법, 사법, 형법 등 실행법은 헌법을 기초로 제정된 것이기에 한계는 있지만 그 자체가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국회에서 좀 더 좋은 법을 만들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문제는 그 법을 집행하는 행정부와 법을 위반여부를 가리는 사법부에 있습니다. 망치를 든 자들이 정직하지 않고 공정하지 않기에 많은 자들이 불이익을 받는 것입니다. 심지어 형법의 경우에는 무고하게 사형까지 당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법 시대에는 하나님의 법을 다루었기 때문에 오늘날 불완전한 세상의 법보다는 상대적으로 완전한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은 헌법과 같은 십계명의 실행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시대적인 차이로 인해 실행에 옮기기 제한되는 것이 있지만 그러나 율법은 그 시대에 있어서 완전한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법을 완전히 지키는 것이 어려웠을 뿐 아니라 제사장들 역시 백성들이 암암리에 짓는 죄까지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결국 율법은 백성들이 죄를 깨닫게는 하지만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본질적인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죄를 가리기 위해 위선적인 행위뿐 아니라 율법을 자기 해석으로 가져가 남들에게 불이익을 끼치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제사장들까지 부패하여 율법에 의한 재판을 불의하게 자행하는 사태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 사법부와 행정부 등 국가기관까지 불의를 저지름으로써 부패공화국이 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죄가 근본적으로 다뤄지지 않으면 법은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예컨대 A라는 법을 사람들이 지키지 않으면 이것을 막기 위해서 B라는 법을 만듭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B라는 법을 피하기 위해 또다른 부정을 저지릅니다. 이것을 막기위해 C라는 법을 만들지만 이렇게 법은 눈덩이처럼 커지기만 했지 결국은 새로만든 B와 C라는 법때문에 오히려 선량한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보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법과 집행의 한계입니다.

제사장의 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율법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또다른 장로들의 유전법을 만들었습니다. 예컨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무려 서른아홉 개의 규칙을 만들어 지키게 했습니다. 결국 관습적 종교 덕목은 사람들을 위축 시킬 뿐 아니라 아무런 매력도 주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셨습니다.

막 7:6-8,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렇다면 오늘날 교회 시대는 어떻습니까? 교회는 예수님께서 명령하셨고, 성령께서 세우신 교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왜 많은 교회들이 복음과 멀어지고 예수님과 무관한 교회들이 되고 있습니까? 심지어 율법 시대의 제사장과 같은 목회자와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신자들이 난무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령께서 능력이 부족하신 것입니까? 이에 대해서는 먼저 교회의 의미에 대해선 분명하게 선을 긋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유무형 교회

교회는 크게 유형 교회와 무형 교회로 나눌 수 있다. 유형 교회는 눈에 보이는 가견적 교회(visible churcn)를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속해 있었던 유형 교회는 점차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믿음을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교회를 말한다. 한편 무형 교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불가견적교회(invisible church)는 시대를 초월하여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되도록 택함 받은 사람들의 영적 공동체를 가리킨다. 영적이므로 눈으로 식별한 수 없으나 마지막 때에 완전한 교회의 모습으로 비칠 것이다. 이 두 교회의 형태는 다른 두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하나의 교회이다.

문제는 처음에는 참된 믿음의 고백으로 시작한 가견적 교회가 시간이 갈수록 타락의 길을 걷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법을 따르지 않고 세상의 법과 윤리와 문화를 슬그머니 교회 안으로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시간이 지나다보면 성령이 부재한 교회는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지 않으면 부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에 의하여 세워진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실 때 이미 완전한 목적과 계획으로 세우고,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모델을 주셨습니다. 교회는 단지 시각적으로 보기 좋은 교회(visible church)만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보이지 않는 교회(invisible church)의 모습이 바르게 세워져야 합니다. 사도행전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목적을 가지고, 성경의 원형과 원리가 살아있는 교회(church principle)입니다.

삼위일체 교회관

하나님은 Acts29 교회를 세우시기 위하여 오랫동안 준비해 오셨다. 사도행전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설립된 교회이다. 에드먼드 클라우니(Edmund P.Clowney)도 "성경적인 교회론을 새롭게 조망하기 위해서는 삼위일체적 접근이 제일 좋은 방법이다.'라고 했다. 지상의 교회는 하나님이 설계하신 것이고 그 교회의 분명한 기준은 그리스도가 정하신 것이다. 그리 고 교회 설립은 성령에 익해 시작되었다.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협력한 작품입니다. 하나님이 디자인하셨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 흘려 희생하심으로 교회를 회복하셨고, 성령님은 교회와 탄생과 완성을 이루셨습니다(행 20: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교회는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엡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사랑한다는 것은 가치에 대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즉 그 모든 것보다 교회를 우선순위로 두는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분명한 가치를 세우지 않는 한 교회는 부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인들이 믿음이 없어서 교회가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가치변화가 없기에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천국의 가치를 안다면 당연히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사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가치의 문제로 접근되었기 때문에 자기 것에 대한 소유욕을 갖지 않고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대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헌금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 자신의 소유권, 내 인생의 통치자가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광야 같은 세상에서 천국 같은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것은 교회를 통해서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는 본능적으로 교회를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항상 교회를 사모하는 것은 진리와 성령이 우리를 교회로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순절 성령 임재 사건은 하나님의 의도대로 성령의 힘이 이끌어가는 교회와 말씀의 부흥으로 세워지는 교회의 시작을 보여주었습니다(행 2:1-4). 사도행전은 우리들에게 교회가 어떻게 세워지고,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며, 어디를 향해서 가야 할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1) 교회란 무엇인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신앙을 정의한다면 "구원받기 위해 예수를 믿고, 상급 받기 위해 교회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구원받는 믿음에 머무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의 가치를 모르기에 교회를 섬김으로 받는 상급을 모르기에 형식적인 봉사, 보이기 위한 봉사에 그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최근에 교회를 떠나는 성도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교회가 숨 막히도록 답답하다'라는 것입니다(숨 막힘), 둘째는 '교회에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로 가득 차있다'라는 것입니다(위선), 셋째는 교회에 가면 서로 싸우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것입니다(분쟁),

사단은 지금도 교회의 혼란을 틈타서 우는 사자처럼 입을 벌리며 성도들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바르게 알고 교회 안에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교회를 섬기고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교회(에클레시아)

교회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ekklesia)인데, 하나님이 어떤 목적을 위해 사람들을 불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①죄와 사망으로부터 부름받고, ②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 부름받았고, ③장래의 유업을 받도록 부름받았고, ④하나님 소유의 특별한 백성으로 부름받았다는 것이다. 즉 성경적 교회의 뜻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자들이 모인 곳이 된다.

우리가 교회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누구의 명령대로 교회를 세웁니까? 만약 우리의 생각과 욕심대로 세우는 교회라면 그것은 주님의 교회가 되지 못합니다. 교회의 유일한 근거는 말씀이며, 그 말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마 16:18,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베드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교회를 세운다는 뜻입니다. 천국 백성이 되는 유일한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신앙 고백에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 위에 세워질 때 바른 교회라 할 수 있으며 승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고백은 교회의 설립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다는 교회의 주권에 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단순한 사람의 모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교회는 어떤 구조로 되어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몸인 유기체적 구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 만물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온 우주 만물의 권세자로 삼으시고 주관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head)로 우리는 교회의 몸(body)으로써 밀접한 유기체(an organic body)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고 우리를 그의 몸으로 하나 된 지체들로 연결하셨기 때문에 교회는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에베소서 1:22-23, 22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교회는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성도들은 교회의 몸입니다. 몸은 떨어질 수 없도록 생명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웹 4:25), 그러므로 지체와 지제가 그리고 지체와 예수님이 함께 연결되어있지 않으면 생명을 잃는다는 것을 교회를 통하여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생활은 서로(each other) 함께(together) 하나 되어 덕을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고전 14:26, 고후 12:19, 살전5:11).

2) 교회의 권위

역사상 교회의 위기는 언제나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위기가 크게 느껴지는 것은 교회의 권위가 전면적으로 부정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모든 사람들은 절대적 권위를 부인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유일한 복음이니, 교회의 권위, 절대적 말씀에 대한 반감이 매우 커졌습니다. 한편 이단들의 극심한 교회 위협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교회의 분열과 신앙의 약화로 인한 교회의 권위 상실이 큽니다. 신자는 교회 신앙보다 개인 신앙을 중심으로 하고, 말씀의 기반보다 이성을 기반으로 하여 교회의 권위는 스스로 무너지는 실정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외부의 영향이 교회를 공격하기도 하지만, 더 큰 적은 항상 내부에 있는 것입니다. 교회일치를 주장하는 에큐메니컬 운동의 영향으로 세워진 WCC는 종교통합이라는 다원주의로 오히려 교회가 나서서 타종교를 하나로 묶고 있습니다. 모 장로는 도덕과 윤리의 잣대로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교회 개혁을 회개와 사도행전 교회에서 찾지 않고 윤리에서 찾으려는 어리석은 자의 외침에도 교계의 지도자(지도자가 없어진지 오래지만) 위치에 있는 목회자나 신학자는 꿀먹은 벙어리처럼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러한 자들을 벙어기 개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사 56:10,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 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 

하나님은 교회를 친히 세우셨을 뿐만 아니라 교회에 필요한 권위를 주셨습니다. 교회는 이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를 세우며 복음을 세상에 전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교회의 권위는 말씀입니다.

초대교회에서 가장 시급한 일은 외부로부터 이단의 교리에 대한 공격을 막아 내는 일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내부적으로는 말씀에서 벗어난 영적인 부패와 타락을 막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명확히 하고 사도성에 근거한 말씀의 범위를 정하기 시작했고 지금의 성경 66권이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권위는 '사도성' (apostleship)에 있습니다.

신사도 운동으로 미혹하는 자들도 있지만 오늘날 사도는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사도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무너졌던 이유는 모세와 같은 지도자의 부재이기도 하지만 저들이 말씀에서 떠났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초대교회의 사도는 없지만 성령께서 사도들을 통해 세우신 교회를 본받아야 하고, 오직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교회를 다스리스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적 교회를 추구하는 것은 그저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이식하는 작업입니다. 이미 주님께서 명령하셨고, 성령께서 친히 세우셨으며, 말씀으로 검증된 그 교회를 그대로 이식하는 작업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미국 교회를 새롭게 세우고 있는 Church Planting입니다. 오직 복음의 기초 위에서 세워지는 교회인 것입니다. 세상의 윤리와 도덕과 가치관과 유행을 가져다고 복음과 섞어서 세우는 그런 교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교회의 기둥

신약의 교회를 떠받치는 중요한 기둥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와 전도와 기도입니다. 예배와 전도와 기도는 교회의 삼위일체와 같은 요소입니다. 이중에서 어느 한 가지라도 소홀한다면 그것은 모두에 소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늘 이 세 기둥을 바로 세우는 데 힘써야 합니다.


1) 예배의 기둥

예배(worship)의 히브리적 의미는 '누군가의 앞에서 땅에 이마를 대고 엎드리는 것'이다. 신약에서는 입과 손에 입을 맞추는 것(프로스쿼네오), '경의를 표하는 것'(라트류오)을 말한다. 그래서 누군가를 예배한다는 것은 '당신이 나보다 더 귀하다'라고 말하는 것과 함께 '나는 당신보다 못하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높이고 자신은 낮아지는 것이다(요 3:30).

나님을 높이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죄의 속성은 하나님과 같아지려 한다는 것입니다(사 14: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그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죄는 피조물이 거룩한 창조주로부터 떨어져나간 실체입니다. 사탄은 바로 죄의 마루, 즉 꼭대기에 앉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말처럼 자신과 함께 땅으로 떨어진 졸개들, 즉 타락한 천사들 위에 자신의 보좌를 높이고 있을 뿐 아니라 수많은 인간을 타락시켜 그 위에 군림하고 있는 것입니다.

뱀은 하와를 유혹할 때도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을 때 가졌던 생각을 그대로 말합니다(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즉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말합니다. 속된 말로 아랫사람이 자신과 대등한 위치에서 소리를 높이고 대드면 기어오른다고 합니다. 바로 사탄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기어올랐던 존재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한 대 엊어맞고 하늘에서 추방당한 사탄과 그 무리는 어리석게도 자신들의 세력을 규합하여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 전쟁입니다.

영적 전쟁은 바로 인간의 마음에서 벌어집니다. 끝없는 유혹과 두려움 등으로 믿음에서 절망과 포기로 이르게 만듭니다. 실제 전쟁에서 총을 맞아 죽은 군인은 10%도 되지 않습니다. 대부분 전투기나 포탄의 폭격으로 인해 사망하게 됩니다. 우리 안의 영적 전쟁에서도 마귀가 주는 두려움보다는 대부분 유혹으로 넘어집니다. 두려움에는 경계심을 갖지만 유혹은 그럴싸하게 보이기에 경계심을 늦추기 때문입니다. 피아식별이 잘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어려운 전투가 야간 전투입니다. 미군이 아프칸과 같은 전투에서 아무런 희생없이 수많은 적을 물리치는 것은 첨단 무기의 힘때문입니다. 공중에서는 아파치 헬기가, 지상에서는 잘 훈련된 특전 대원이 야시장비로 적을 조준하여 사격합니다. 적은 앞이 보이지 않기에 그저 당하기만 할 뿐입니다(잠 4:19,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걸려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 싸움을 싸우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빛 가운데로 나가는 것입니다. 마귀와 야간전투를 벌이면 백전백패입니다. 그것은 아프칸 병사가 야간에 미군을 상대하는 것(오해하지 말기 바랍니다)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로 나갈 때 주님과의 사귐이 있고, 그럴 때 주님의 우리의 대장이 되시며 우리를 그의 피로 정결케 하시기에 마귀가 힘을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요일 1: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러므로 하나님을 높이는 예배의 전제는 우리가 먼저 거룩한 존재로서의 자격을 갖추는 것입니다. 그 자격은 그저 가만히 있는다고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신분 상으로는 예배를 드릴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도 성소에 나갈 때 먼저 물두멍에서 자신과 모든 제사의 도구를 정결하게 했듯이 우리 각자는 영적 싸움을 통해서 죄로부터 멀어진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자의 기본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란 영적 싸움을 싸운 자가 주님 앞에 나아가 목숨이 보존되었음과 죽을 상황에서 건져주심과 보호하여 주셨음에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전리품을 주님 앞에 감사함으로 바치는 것입니다. 나의 목숨이 대장 되시는 주님께 속해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영광은 입으로만 돌리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최상의 가치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예배입니다.

자로서 온전한 주일예배 참석과 헌신은 믿음의 정도를 평가하는 기준이 됩니다. 그러므로 주일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신자가 신앙생활을 올바르게 하는 신자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관계 형성'을 목표로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예배 생활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녀가 부모와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가정에서 규칙적으로 식탁을 같이 해야 합니다. 오늘날 가정이 무너지고 부모와 자식간의 끈끈한 관계가 멀어지는 것은 식탁문화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시대가 바뀌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핑게입니다. 저는 자녀들이 어릴 때 미국 시민권을 딸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녀들을 불러들였습니다. 부모와 식탁을 같이하지 않으면 한국인도 아니고 같은 가족의 정체성을 잃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부모와 한 식탁에서 교제를 나눠야 하듯이 성도들도 적어도 주일예배를 규칙적으로 드려야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수요예배, 새벽기도회를 나온다면 금상첨화라 할 수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식탁을 마주하는 자녀와 매일 식탁을 마주하는 자녀가 어떻게 같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주일 성수는 신앙의 마지노선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주일은 다른 예배와는 대체할 수 없는 거룩하게 구별된 날입이라는 것입니다.

신자의 영적 회복은 오직 주일예배로 회복으로 가능합니다. 규칙적으로 주일예배에 참석해서 지속적으로 공급받는 예배의 풍성함을 통해 믿음이 성장합니다. 믿음을 성장시키는 최고의 수단을 주일예배로 목표삼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철저하게 주일을 구별하고 주일예배를 사랑해야 합니다.

열광적인 예배를 추구하는 기본자세

① 이 신앙을 잃어버리거나 소홀히 취급하는 것은 가장 큰 영적 손실임을 알아야 하고 스스로 주일예배를 위해 수평적 활동(식당, 봉사, 주차 등)을 잠시 멈추라.

② 열망하는 몸짓(머리는 눈을 늘어 하늘을 항하고, 손바닥을 치고, 무릎은 꿇고, 어깨를 바짝 올리고 허리를 쭉 펴고 목청껏 소리를 높임)으로 찬양을 하라. 하나님은 다양한 표현을 기뻐하신다.

③ 복잡한 찬양이 아니라 일정한 패턴을 갖춘 단순한 찬양으로 직접적인 찬망을 드려야 한다. 단순한 가사와 곡조로 '반복' 이 있어야 감정이 우러나온다.

④ 내 취향의 음악 스타일이 아니라 영적 예배'를 추구하라. 예배 중에 진정한 감정. 애정이 자유롭게 발산되도록 하라. 그것은 하나님 임재를 위한 '계획된 예배' 가 되고, 하나님 중심적인 예배가 되는 것이다.

⑤ 가장 중요한 것은 영으로 드리는 예배다(요 4:24). 영적으로 보좌 앞으로 나가는 예배가 되게 하라. 하나님을 향한 시선으로 성전에 오르고(시 122:1), 김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고(시 100:4), 찬양과 고백이라는 거룩한 간증의 뜰을 통과하고(시 24:3-4, 145:4), 대제사장이 신 그리스도의 대속을 함입어 하나님 임재를 경험하는 거룩한 성소에 들어가라(히 9:25)

성공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의식이 확고해야 합니다. 주일예배는 바른 신자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하나님이 신자에게 허락한 은혜의 기회입니다. 주일예배를 온전히 드리기 위해 우리는 힘써야 합니다.

'수직적 예배' 가 되고, 충만한 은혜를 경험하는 '변혁적 예배' 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예배를 준비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열광적인 예배를 추구'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말씀과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경험하기 위하여 갈망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2) 전도의 기둥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들과 만나는 경험을 갈망해야 합니다. 세상으로 복음을 들고나가서 굶주림. 타락, 음행. 무관심, 반대, 욕설, 비난을 받아도 복음전도를 할 때 교회가 교회로써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전도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두려움을 없애고 담대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담대함은 성격과 취향의 문제이지 전도자의 필수조건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성경적입니다(엡 6: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여기서 담대함이란 막무가내식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긴급한 메시지를 전하듯 말하거나 분명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우회적으로 전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전도하도록 만나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요 4:35-36, 익은 사과 전도법). 익은 사과를 만나기를 기도하고 만난 후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그 사람은 교회를 오게 되고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 전도의 가장 중요한 방식은 "담대함"입니다. 담대함은 반대자들 앞에서도 분명하고도 직접적으로 복음을 말하는 것입니다(잠 28:1, 행 2:29, 행 4:2-4).

사도행전 4:19-20,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3) 기도의 기둥

교회를 세우는 가장 강력한 기둥은 기도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충성되게 교회를 섬긴다고 해도 기도를 드리지 않는 교회는 약합니다. 왜냐하면 신자가 교회를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전혀 일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이미 준비하신 것을 받을 만한 그릇으로 우리들이 빚어지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은 끈기로 기도하도록 만듭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끈기 있는 기도를 드리기 바라시는 이유는 기도가 기도하는 사람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큰일을 이룰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기도하면 승리하고 기도하지 않으면 실패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큰 역사에 참여해도 교만하지 않으며 당장 응답과 성과가 없다고 실망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시작과 끝은 기도입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세워집니다.

기도가 살아 있을 때 교회가 살아있고 은혜와 사랑도 충만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개인 기도를 기도로 나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필요를 위한 응답을 넘어 교회를 위한 갈망하는 것보다 교회를 사랑하는 영적 갈망에서 나오는 기도는 교회를 견고하게 세워줍니다.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갈망함 속에서 부르짖는 것'입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라고 말씀하는데(약 5:16), 여기서 간절함과 큰 목소리가 함께 합니다. 큰 목소리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사 40:9, 시 116:1, 롬 8:15),

이런 태도는 오직 자신이 기도로만 난관을 헤쳐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 보여주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달리 희망이 없다는 간절함 속에서 부르짖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이든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도 간절히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렘 33:2-3,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기도에 있어서 중요한 두 가지 교훈은 첫째로 구체적으로 기도드려야 한다는 것과, 둘째로 더 뜨거운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눅22:44)와 사도행전적 기도(행 4:29-30,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수많은 기도 응답이라는 선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그 선물을 주신 하나님을 주목하고 그분과 지속적으로 긴밀한 교제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응답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하는 집과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마 21:13).

마가복음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교회의 참된 표지

교회가 어려움을 겪는 것은 교회의 기초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신론. 장소와 인간론, 기독론, 성령론, 구원론, 교회론,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 집중력이 상실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단과 신비주의와 탈교회로 성도들이 이탈하고 많은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참된 교회를 가르치지 않으면 교회 회복은 어렵게 됩니다. 교회의 질서, 교회의 신앙, 교회의 직분, 교회의 설립에 기여할 수 있도록 말씀을 사도들처럼 가르쳐야 합니다(행 2:42).

진정한 교회의 표지는 무엇입니까?

1) 하나님 말씀을 전파하며 증거하는 일입니다(요 8:31-32).

교회의 참된 표지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말씀의 기초로 세워졌고, 이 말씀을 가르쳐 지키는 사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엡2:20-21,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교회는 시작부터 끝까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선포와 가르침이 중요압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추상적이 아닌 실존적으로 보여주는 곳입니다.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분명하게 가르쳐야 진리의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분열과 권위 상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의 확신과 주권적 고백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은 예수행전이며 구원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메시지를 오늘의 교회도 끊임없이 가르치고 전할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행 15:25)

교회의 표징


사도들은 진리의 수호와 선포에 최선을 다하고(딤 전 1:3-4, 딤후1:13), 교회의 순결과 거룩을 지키고(롬 15:14, 골 3:16, 실전 5:11, 딤전1:20. 딜3:10), 세상을 향하여 선한 영향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야 한다(막 7:27-30. 업 2:12, 약 2:5), 사도들은 교회에서 말씀을 참되게 선포하고, 거룩한 성례(세례식, 성찬식)를 집행하고 교회의 순결을 위해 철저한 권징으로 교회를 지켰다. 이러한 교회의 표징이 진정한 교회를 세우게 한다.


2) 성례를 바르게 집행하는 것입니다(마 26:26-28. 28:19).


성례는 예수님이 명하신 말씀대로 바르게 진행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교회에서 올바른 세(짐)레를 베풀고(마 28:19), 성찬을 집행하도록(마 26:26-28) 하셨습니다

(고전 11: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세워진 사도행전 교회는 초대교회의 원형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진리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는다. 성령 충만으로 세워진 사도행전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와 초대교회로부터 종교개혁을 통한 교회와 현대 교회에 이어지는 영원한 교회의 기준이다

3) 권징입니다(마 13:24-30, 18:17, 히 12:1-13).

세상에 있는 교회는 알곡과 가라지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 말씀으로 바르게 세우기 위하여 징계와 권징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무기력해지고 세상에 영향력을 잃어버린 이유는 권징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권징이 없으면 교회는 영적, 도덕적 기준이 크게 떨어지고 절제력을 잃어버려 가치와 기준이 무너져 세상과 같게 됩니다. 비록 징계를 받는 당시에는 아픔과 슬픔이 있지만 결국에는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히 12:7-8,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4) 사도행전 교회의 회복입니다(행 2:42-47).

교회의 가치는 얼마나 하나님이 말씀하신 원형의 모습을 갖추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도행전 2:42-47절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원형 교회(prototype church)의 모습입니다. 이 교회는 예수님이 명령하신 교회를 회복하고 이루기 위한 헌신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현장에는 살아 있는 믿음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거나 기대하지 않은 높은 수준의 가치와 삶의 영향력이 나타나는 교회였습니다. 우리 교회는 사도행전의 원형 교회를 닮아야 가치가 회복됩니다. 성령의 강력한 임재를 경험하고 한마음으로 기도하며 열광적인 예배를 드리며 놀라운 부흥을 이 시대에 보여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사도행전 교회의 가지를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일곱 가지 참된 교회의 모습을 회복해야 합니다(사도행전 2:42-47).

① 말씀의 가치로 세워진 교회입니다.(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② 교제하는 일에 힘쓰는 교회입니다.(서로 교제하고)

③ 성례를 바르게 지키는 교회입니다.(떡을 떼며)

④ 함께 기도하는 일에 힘쓰는 교회입니다.(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⑤ 서로 모이는 일에 힘쓰는 교회입니다.(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⑥ 날마다 살아있는 찬미의 예배를 드리는 교회입니다.(하나님을 찬미하며)

⑦ 복음을 전함으로 영혼 구원이 일어난 교회입니다.(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교회의 직분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을 사는 근본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것이 인간 본연의 목적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61:6절에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 자리라 할 것이며 너희가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소요리 문답 제1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을 아는 것입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고전 10:31)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시 73:25-26).

구약시대에서 하나님은 성전을 섬기도록 세사장을세우셨습니다. 그들을 뽑는 기준, 입는 옷. 행동하는 것, 표정까지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성전에서 활동할 때는 반드시 하나님이 말씀하신 옷을 입어야 하며, 하나님이 정하신 걸음걸이, 얼굴 표정은 물론 세밀한 동작까지 주의해서 행동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교회의 직분자들은 하나님이 특별히 교회에 말씀하신 의도를 주의해서 행동하며 실천해야 합니다(고후 2:15).

성도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봉사자' 가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위해 살며 세상 사람을 섬기는 자들만이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높이는 제사장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봉사자로 살아가는 영광스러운 존재들입니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우리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 소유된 백성' 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어두운 죄의 흑암에서 구원하여 찬란한 영광의 빚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우리는 각처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직분 주심을 감사해야 합니다(고후 2:14). 우리의 삶을 통하여 세상에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향기가 퍼지는 꿈을 꾸어야 합니다. 절망적인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편지가 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고후3:3).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4:11-12,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교회는 비전을 제시하고 가치를 점김하며 결과를 평가하여 생명력과 활동성으로 살아 움직이도록 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사람을 세우고 직분과 역할을 효과 있게 운영하도록 자신들의 못을 찾아주고 배치하는 일을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이 교회의 몸을 세우는 일을 하기 위하여 어떤 위치에 서야 하는지를 자세히 검토하고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할 것은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청지기, 일꾼, 직분사들의 충성으로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사들은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자신을 발견하고 영광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알고 사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리고 고난이나 짐을 지려고 하는 믿음도 충만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영광된 교회를 섬기는 교회의 일꾼은 고난의 길을 가는 사람이라고 말씀했습니다(고후 11:23-28).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조금 더 고난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선택한 고난은 예수의 고난을 그대로 짊어지는 것입니다. 고난이 없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요 일꾼이요 증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신없이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무늬만 직분자가 아니라 본질에 충실한 직분자가 되어야 합니다. 고난의 분명한 징표가 있어야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사람은 많으나 고난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적기에 교회가 생명력을 잃어갑니다. 교회를 살리는 길은 고난을 사모하고 이겨내는 영적으로 준비된 사람들에게 달려있습니다.

- 참조 : '평신도 신학' / 21C 목회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