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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자료/교회장로

[스크랩] 목사와 교사?

목사와 교사?

(엡4:11)




성경에 보면 다양한 직분들이 나타납니다.

그 가운데 구약적 직분인 선지자, 제사장, 왕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압니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에 나오는 다른 직분들은 어떻습니까? 지금도 모두가 존재하는 것입니까?

고린도전서 12장 28절에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사도는 예수님의 11명의 제자와 맛디아 그리고 바울입니다. 그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사도는 예수님을 직접 보았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교회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시대에는 사도가 없습니다.

선지자는 어떻습니까? 이들은 구약의 선지자와는 다른 직분입니다.

사도행전 13장 1절을 보면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엘과 및 사울이라”

고전12장 28절에 말하는 선지자와 교사는 아마도 초대교회에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직분으로 보입니다.

사실상 고전12장 28절에 있는 직분은 오늘날의 교회에는 없는 직분들입니다.



에베소서에도 낯선 직분들이 나옵니다. 엡4장 11절에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 본문을 유의해서 볼 때에 성경에 나온다고 무조건 오늘날에도 그 직분이 존재해야 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사도도 없고, 선지자도 없기 때문입니다.

단 하나 “목사와 교사”라고 언급된 직분은 오늘날의 교회에도 존재하는 직분입니다.

참고로 여기에서 말하는 ‘교사’는 일단은 행13:1과 고전12:28에 나오는 ‘교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직분입니다.

그렇다면 이 직분은 무슨 직분입니까?

설마 여기에서 말하는 교사를 주일학교 교사라고 생각하시는 분 계십니까?

어떤 설교자들은 성경의 전체적인 흐름은 무시하고 위의 본문에 나오는 ‘교사’를 단순히 주일학교 교사라고 생각하고는 “(주일학교의) 교사는 목사만큼이나 중요하다” 라고 설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성경에서 사용되는 ‘단어’를 너무나 naive하고도 단순하게 접근하는 방법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에베소서가 기록된 당시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주일학교의) 교사는 없었습니다. 주일학교 자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일까요?

본문을 자세히 보시면 ‘어떤 사람은’이라는 말이 각각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에게 한 번씩 붙습니다. 그런데 ‘목사와 교사’에게는 각각 붙지 않고 한 번만 붙습니다. 이 사실을 통해 볼 때 ‘목사와 교사’는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직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한글번역에 “목사와 교사”라고 되어 있는 부분을 원문에 따라 제대로 번역하면, “목사들 즉 교사들”(τοὺς ποιμἐνες καὶ διδἀσκαλοι)이라는 뜻입니다.

헬라어를 잘 읽을 줄 몰라도 대충 보면 정관사(τοὺς)가 하나만 나오고, 그 뒤에 두 단어를 ‘접속사’(καὶ)로 이어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1) 다시 말해, ‘목사들’이라는 말 앞에는 정관사가 있는데, ‘교사들’이라는 말에는 정관사가 없습니다. 이것은 목사와 교사를 하나로 본다는 말입니다.

이에 따라서 1900년대 중반 칼빈신학교의 조직신학자였던 벌코프는 에베소서 4:11의 “목사와 교사”라는 말은 “두 종류의 다른 직임들(two different classes of officers)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연관된 기능을 지닌 한 종류의 직임(one class having two related functions)을 구성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라고 말했습니다.2)

시카고의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는 웨인 그루뎀은 아예 “목사-교사”(pastor-teacher)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고까지 합니다.3)

다시 말해 엡4:11에서 말하는 “목사와 교사”는 “목사 즉 교사”라고 해야 맞고, 목사의 중요한 역할인 ‘말씀의 교사’로서의 특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는 ‘가르치는 일을 하는 직분’이라는 사실을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4)



전통적으로 장로교회는 디모데전서 5장 17절 말씀 “잘 다르시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에 근거하여 두 종류의 장로가 있다고 봅니다.

그 중에 하나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장로입니다.

치리 장로라 부르는데, 이들이 하는 중요한 역할은 딤전5:17에 따라 ‘다스리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치리(治理) 장로’라고 부릅니다.



다른 한 장로는 우리가 흔히 목사라고 부르는 직분입니다.

목사라고 불리우는 장로는 다른 말로 ‘가르치는 장로’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중요한 역할이 가르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이 엡4:11에도 강조되고 있습니다. 바로 “목사 즉 교사”라는 표현을 통해서 말입니다.

목사의 중요한 역할을 교사의 역할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공적예배 이외에 여러 방법으로 가르치는 일을 합니다.5) 

이 사실이 딤전5:17에서는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οἱ κοπιώντες ἐν λὀγω καὶ διδασκαλἰᾳ)로 표현되어서 목사의 본래적이고도 중요한 직무가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6)

그래서 전통적으로 목사를 가리켜 ‘교회의 교사’라고 불렀습니다. 목사는 각 교회에 허락하신 교사입니다.



이처럼 목사의 중요성은 목사라는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감당하는 직임, 즉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잘 가르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7)

이러한 사실은 딤전2:7에서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을 가리켜 “내가 이방인의 스승(교사)이 되었노라”라는 문장에서 목사의 직분적 역할이 사도의 역할에서 이어진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딤후1:11에서는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라는 말로 목사의 직분적 역할과 사도의 직분적 역할이 어떤 점에서 연관성이 있는지를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반대로 치리 장로는 목사와 달리 다스리는 일에 치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목사가 장로의 역할을 다 감당하려고 하거나, 장로가 목사의 역할을 대신하려고 하는 것은 성경에 충실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말씀에 근거하여서 ‘가르치는 장로(teaching elder)로서의 목사’와 ‘다스리는 장로(ruling elder)로서의 장로’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성경에 근거한 직분을 유지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8)



나아가 목사가 교사로서의 본분 외에 다른 일에 치중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크게 벗어나는 일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목사의 직분을 맡은 자가 ‘설교’와 ‘가르침’의 일은 전혀 하지 않고 ‘행정’ 혹은 그 밖의 다른 사역에 치중하는 것은 교회를 말씀의 반석 위에 든든히 세우지 못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심지어 ‘음악목사’와 같은 이상한 목사직의 존재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교회는 각각의 직분에 합당한 은사에 따라 적절히 시간과 사역을 부여하여 하나님의 참된 교회로 세워져 가야 할 것입니다.



 


1) 여기에서 “카이”(καὶ)는 중언법(重言法, hendiadys)으로 사용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2)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41), 586; 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An Introduction to Biblical Doctrine (Grand Rapids: Zondervan, 1994), 913. See again F. F. Bruce, The Epistles to the Colossians, to Philemon, and to the Ephesians, NICNT (Grand Rapids: Eerdmans, 1984), 348: “it is appropriate ... that the two terms, ‘pastors and teachers’ should be joined together to denote one order of ministry”; Ralph P. Martin, “Ephesians”, in New Bible Commentary (Leicester: IVP, 1970), 1116; A. Skevington Wood, “Ephesians,” in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11 (Grand Rapids: Zondervan, 1978), 58와 Alfred Martin, “Ephesians,” in The Wycliffe Bible Commentary (Chicaago: Moody Press, 1962), 1311은 그리 강하지는 않으나 자연스럽게 이런 해석에로 나아가고 있다. Harold W. Hoehner, “Ephesians,” in The Bible Knowledge Commentary (N. P.: Victor Books, 1983), 635도 그렇다. 그러나 그는 Wood보다는 좀 더 강하다. Francis Foulkes, Ephesians, Tyndale New Testament Commentaries, Revised Edition (Leicester: IVP, 1989), 127f.는 자연스럽게 이 둘을 연관시키면서도 디모데서와 연관해서 교사로서의 교훈 장로와 치리 장로의 구별을 시사하기도 한다. 그는 그 둘 모두가 목회자라는 좋은 해석의 시사를 주고 있다.


3) Grudem, Systematic Theology, 913.


4) Bruce, The Epistles to the Colossians, to Philemon, and to the Ephesians, 348.


5) 칼빈은 한편으로는 크리소스톰, 어거스틴, 암부로시우스에게 동의하면서 (또 제롬의 견해와 같이) 목사와 교사의 직무를 연결시켜 말하면서(Comm. Eph. 4:11), 또 한편으로는 목사와 교사를 분리시켜 언급하기도 하였다(Institutes, IV. iii. 4; Comm. Eph. 4:11). 그 때 교사는 박사들(doctors)이라고도 불리며, 이는 오늘날의 신학교 교수와 비슷한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는 일만을 하는 이들을 지칭하는 것이었음에 유의하라. 그들은 “교회의 선생님들”(doctor ecclesiae)이라는 뜻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칼빈이 이해하는 교사는 성찬을 집례하지 않고, 학교와 교회에서 가르치는 직무를 전담하는 이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가르침은 모든 목사들의 의무이지만, 바른 교리를 유지하는데는 성경을 해석하는 은사만 있어도 된다”고 하면서 목사가 아닌 교사가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해석에서 목사직의 교사로서의 기능, 가르치는 기능이 배제되는 것이 아님에 유의하라.

     이와 같이 목사와 교사직을 구분하여 논의하는 대표적인 예들로 다음을 보라: C. Leslie Mitton, Ephesians, The New Century Bible Commentary (London: Marshall, Morgan & Scott, 1973; reprinted, Grand Rapids: Grand Gapids, 1989); Andrew T. Lincoln, Ephesians, WBC, 42 (Dallas, Texas: Word Books, 1990), 250-52.

     이하에서 우리가 취할 해석과 이 해석을 모두 다 허용하고 있는 견해로는 Francis W. Beare, “Exegesis to the Ephesians,” in The Interpreter's Bible, vol. 10 (Nashville: Abingdon Press, 1953), 691; Richard J. Erickson, “Epehsians,” in Walter A. Elwell, ed., Evangelical Commentary on the Bible (Grand Rapids: Baker, 1989), 1027을 보라.


6) 이렇게 에베소서 4:11의 “목사와 교사”는 디모데전서 5:17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들과 동일하다는 것을 명확히 확언하는 논의로 다음을 보라. John Murray, “Office in the Church,” in Collected Writings of John Murray, 2: Systematic Theology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977), 361. Ralph Earle은 이 구절에서 교훈 장로와 치리 장로의 구별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보는 것에 반대하나, 그가 이에 대해서 주고 있는 설명은 장로교인들이 교훈 장로와 치리 장로를 구별하는 것에 정확히 상응한다. Cf. Ralph Earle, “I Timothy,” in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11 (Grand Rapids: Zondervan, 1978), 380.


7) R. B. Kuiper, The Glorious Body of Christ: A Scriptural Appreciation of the one Holy Church(Grand Rapids: Eerdmans, 1966;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967), 141. 목사의 설교하는 일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한 강조로 허순길,『개혁교회의 목회와 생활』(서울: 총회출판국, 1994), 53-62를 보라.


8) 많은 이들을 이를 분명히 하지만 특히 회복에 대한 강조로 허순길,『개혁교회의 목회와 생활』, 71, 74를 보라. 디모데 전서에 이런 구별되는 장로들의 시사가 있을 수 있다는 해석들로 다음을 보라. Walter Lock, The Pastoral Epistles, ICC (Edinburgh: T. & T. Clark,, 1924), 62; 특히 Donald Guthrie, The Pastoral Epistles, Tyndale New Testament Commentaries, Revised Edition (Leicester: IVP, 1990), 117: “which may point to a particular class within the presbyterate.”


손재익 목사

출처 : 예수 코리아
글쓴이 : 예수코리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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