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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자료/교회장로

[스크랩] 성경적 예배의 회복

성경적 예배의 회복


1. 예배를 말한다. 

예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믿음의 표현이요, 마음의 표현이다. 그것은 곧 신앙의 표현이라 할 것이다(대하7:14).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핵심이다. 성경은 예배로 가득 차 있다. 창세기에서부터 시작하여 계시록까지 쉼 없이 예배의 대상이 누구이며 어떻게 그분은 예배할 수 있는지에 관한 예배의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예배란 무엇인가?’라는 예배의 정의에 관한 질문이 주어졌을 때 성경적인 정의는 차치하고서라도 나름대로의 정의를 가지고서 그것에 대해 자신 있게 설명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왜 그런가?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한 목사님이 성탄절 즈음에 헨델의 메시야 공연에 참석하시고 나서는 하신 말씀이다. 

“There is music, but no spirit is in it." 
예배를 드리는 오늘 우리에겐 없는 것이 없다. 예배당도 그랜드 피아노도 멋진 마이크 시설도 에어컨과 파이프 오르간 까지도 있다. 아니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의 하나인 예배 드리는 사람들이 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있다. 외형적으로는 ‘없는 것이 없는 시대’를 살면서 모든 것을 갖추고 예배를 드린다. 하지만 오늘도 우리가 예배를 드리며 무언가 허전하고 아쉬움을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정말 있어야 할 무엇을 놓치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된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사람들이 예배를 추상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우리가 실제로 드리는 예배 역시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배를 추상적으로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추상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추상적으로 아는 사람들의 예배와 신앙인으로서의 삶은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사람이란 아는 만큼 행동할 수 있다. 추상적으로 알면 추상적으로 행동한다. 구체적으로 알면 구체적으로 행동한다. 그러므로 예배에 관해 알면 알수록 우린 하나님께 참다운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예배를 알아야만 한다.  

* 가인과 아벨의 제사 (창4장) 
* 나답과 아비후 (레위기10:1) 

성경 속의 인물들만 그런 것은 아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교인들도 일반적으로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한편의 감동적인 설교를 듣는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예배를 통하여 복과 은혜를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예배의 진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데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는 데 있다. 예배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 편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우리 자신의 전체, 즉 우리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 태도, 소유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그분의 탁월하심에 합당한 존귀와 찬송을 그분께 돌려드리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모든 것이 예배는 아니라는 것이다. 예배는 예배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이 드릴 수 있다. ‘예배가 무엇이며, 예배는 어떻게 드리는 것인가’를 알 때에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런 바른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드릴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예배를 찾아가 보자. 


2. 예배의 어원적 의미 

1) 예배의 현대적 용어 
예배(禮拜)라는 “예를 다하여 절한다.”  
예배를 지칭하는 영어의 “worship”(예배)은 앵글로 색슨어인 “weorthscipe” - “worth”(가치)와 “ship”(신분) - 에서 유래했는데 그 뜻은 ‘존경과 존귀를 받을 가치가 있는 신분(자)’이라는 말의 어원을 가지고 있다. 결국 이 단어가 의미하는 예배는 하나님께 대한 최대한의 존경으로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리는 것(to ascribe Him supreme worth)”이다. 우리가 예배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사용되고 있다(시96:8,99:9, 계5:12). 

2) 예배의 구약적 용어 
“예배”로 번역되는 구약 성경의 중요한 단어는 “봉사”와 “섬김”을 나타내는 아바드(abhadh)라는 단어와 “굴복하는 것” 또는 자신을 “엎드리는 것”을 뜻하는 샤하아(shachah)가 있다. 

① 아바드(abhadh) 
봉사 또는 섬김의 의미를 지니는 아바드(abhadh)는 성전에서 드리는 공식적 예배에 사용된 단어로 본래 노예나 고용된 종들의 노동을 의미하였다(창15:13,14:4, 레25:40). 이것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자주성을 버리고 그의 뜻을 따르는 존재임을 가르친다. 

② 샤하아( shachah) 
‘엎드린다’, ‘굴복한다’는 의미로서 예배자들이 숭배의 대상에 대하여 최대한으로 존경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대하 29:30, 욥1:20). ‘엎드린다’는 것은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완전히 복종해야 하는 존재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 자신들의 죄 됨을 깊이 깨달아 알게 하는 것이다.  
구약의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는 무한의 겸손으로 자기를 낮추고 그분의 뜻을 좇아 봉사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그 외적 표현은 ‘육체적인 겸손의 자세’와 ‘물질적인 희생으로서의 봉사행위’로 예배자의 진실한 마음과 생활의 표현이어야 한다. 

3) 예배의 신약적 용어 

① 프로스쿠네오(προσκυνεω) 
그 문자적인 뜻은 “누구의 손에 입맞추는 것” 혹은 “존경의 표시로 다른 이 앞에 자신을 엎드리는”것이다. 예배에 사용할 때의 주도적 의미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마음을 가지고 무릎을 꿇어 경배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마28:9,17 고전 14:25 요4:28등). 예수께서 수가의 여인에게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말씀하실 때 이 낱말을 사용하셨다(요 4:24). 

② 레이투르기아(λειτουργια) 
이 말은 “백성을 위하여 일한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명사이든 동사이든 간에 단 한 번도 사도, 선지자, 교사, 장로, 감독과 같은 교직자의 드리는 제사적인 봉사로는 사용된 적이 없다. 이것은 신약에서의 예배가 개인적으로 나아가는 구약의 제사적인의 희생의 예배와는 달리 예배가 집례자 등 어떤 특정인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회중 전체가 참여하여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봉사를 뜻한다. 예배가 전체 회중의 일이요 행위라는 것이다. 

③ 라트레이아 (λατρεια) 
이 말은 ‘섬긴다’는 의미이다. 이 말은 ‘종으로서 자신의 상전만을 섬겨야 할 신분을 확인시키는 일’에 사용된 말로서 ‘지위가 높은 자에 대한 봉사’(요16:2, 롬 9:4, 12:1 히9:1)를 뜻한다. 이 용어가 종교적 의미를 지녀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섬긴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상의 용어에서 신약 성경의 예배는 최대한의 존경으로 하나님께 경배하고 교회를 위한 공적인 봉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 믿음의 순종으로써 말씀선포,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섬기는 삶 자체 등의 개념이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예배란 사람이 존경, 경외감을 갖고 최상의 존재 앞에 엎드려 절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기독교적 맥락에서 하나님에게 적용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절하며 또 그분에게 최상의 성품에 합당한 영광을 드리며, 존경과 경의를 표하면서 그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예배는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께 경의와 존경을 드리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에 함께 모이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존 맥아더(John MacArthur)가 그의 책 [참된 예배]에서 지적한 것처럼 우리가 주님을 예배하기 위해 함께 모였을 때, 우리는 그분께 무엇을 드릴까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며 그것은 우리 자신, 우리의 마음의 태도 및 우리의 소유물을 드리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예배의 성격 

기독교의 예배는 다만 경험될 수 있을 뿐이다. 아무리 많은 이론과 설명을 가지고 설득한다고 해도 경험되어진 예배를 대치할 수는 없다. 백 번, 천 번 설명을 듣고 강의를 들어도 예배를 경험하는 것을 대치할 수 없다. 그렇지만 다른 모든 종류의 경험에서와 같이 기독교의 예배도 분석과 이해를 요구한다. 살아있는 경험은 분석될 수 있으나 법규와 신조와 예배의식에 완전히 포함시킬 수는 결코 없다. 
하지만 경험만으로는 어렵다. 왜냐하면 예배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부족은 예배를 무질서하고 위험하게 만들 위험성이 있으며 단지 불교와 유교의 형태를 바꾼 탈선적인 예배행위의 연출로 끝나 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 인도자나 참여자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어야 하는 기독교 예배의 본질적인 성격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예배 드리려는 선천적인 욕구가 사람에게 다 있지만 예배의 의미와 성격에 관해서는 때때로 혼란이 있다. 그러므로 예배를 정의하려는 모든 노력이 타당하지 못한 것 같으나, 한편 예배의 어떤 형태는 설명할 필요가 있다. 

1) 신비(Mystery)적 성격 
예배는 놀람에 대한 반응이다. 하나님의 계시를 발견한 사람은 놀라게 되고 놀람은 예배로 표현되어진다. 출애굽기 15장에 모세의 누이 미리암은 온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홍해를 건너는 사건 속에서 발견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그들은 상상하지 못했던 경험을 하고는 그 신비와 하나님의 인도 앞에 나아와 하나님을 예배하며 찬양하고 있다. 신약 성경을 통하여 만나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는 3년간 예수님과 동거동락했다. 하지만 그들이 언제나 경험했던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신비였고 놀람이었다. 
이와 같이 예배는 계시와 신비 둘 다이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우리로 하여금 예배로 인도한다. 계시를 보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할 수 없다. 사람은 계시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신비의 면전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사람은 자신의 생활에서 하나님을 의식 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은 결코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예배에서 신비(하나님의 초월성)와 의미(하나님의 내재성)를 둘 다 경험한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계시가 기적이고 교회에서 성령님의 계속적인 활동이 기적인 것과 꼭 같이 하나님과 사람과의 교제도 언제나 기적이다. 사무엘 밀러(Samuel Miller)가 진술한 것처럼 예배의 기적은 “세상의 환경을 통하여 보이시는 하나님의 모습이다; 이것은 어두움을 통하여 비치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이것은 다른 모든 능력이 실패할 때 느끼게 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것은 시간 속에 영원히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를 인도하는 목회자가 앞에서 회중들이 신비감과 경외심과 경이감을 가지고 예배에 임하도록 인도할 때 교회의 예배는 보다 더 진실하게 될 것이다. 

2) 축제의 성격  
기독교 예배는 본질적으로 역사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활동 - 그의 창조, 그의 섭리, 그의 구속의 언약, 예수 그리스도의 수육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하나님의 구속적 계시, 그리고 성령님의 강림을 통한 하나님의 능력의 나타나심-을 찬양하고 축하하는 축제이다. 
예배의 축제적 성격은 구약의 예배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구약 시대의 장막(성막 또는 회막) 예배는 이스라엘의 3대 명절인 유월절과 오순절 및 초막적에 집중되어 있는데 유월절은 해방의 축제일이었고(출3:18, 신16:1-8 눅22:11), 오순절은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한 감사 축제일이며(출23:16, 신16:10-11, 행20:16), 초막절은 이스라엘이 광의 길을 방황할 때 하님께서 인도하심의 기념축제였다.(출23:16, 신16:13-15).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기쁨과 감사의 축제예배였던 것이다. 이 축제는 하나님의 승리에 대한 기쁨의 축제라고 할 수 도 있었다. 
신약의 예배도 본질적으로 축제의 성격을 띠고 있다. 신약의 예배가 축제의 성격을 가진 것은 부활의 승리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승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승리이다. 그러므로 승리의 축제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우리 예배에서 빠져서는 안된다. 이런 뜻에서 오스카 쿨만이라는 사람은 “주의 날은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축하하는 날이었으며, 때문에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예배를 위하여 초대 교인들이 함께 모여 축제하는 잔치였다.”라고 하였다. 

3) 섬김과 봉사의 성격 
교회에서 행하는 예배는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임재하셔서 그의 백성과 교제하시고 그의 백성은 예배에 임재하시는 하나님께 봉사한다는 영적 진리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신약의 예배는 인간 영혼 깊은 곳에서 사랑, 충성, 복종, 헌신으로 응답하는 예배이며 인간의 전인격이 하나님과 만나서 변화를 받고 갱신되면서 그의 계시에 날마다 새롭게 응답하는 예배이다. 
예배는 헌신의 행위와 의식 그리고 예식에 국한되지 않는다. 예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생활 전체를 의미한다. 가장 넓은 관점에서 예배는 사람이 하는 모든 것과 관계가 있다. 사람은 그의 생활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기 위하여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서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의 일부분으로서 자신을 보고 자신을 바치고 그의 창조주에게 헌납하기 위하여 가진 모든 것을 바친다. 생활의 모든 영역이 다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다. 어떤 의미로 예배는 생활의 모든 경험에 하나님의 임재를 실현하는 것이다. 
예배는 주일만이 아니라 매일 드리는 것이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살다가 주일에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정말 잘못된 것이다! 예배는 진공 가운데서 일어나지 않는다. 또 그것은 인위적인 장치에 의해 고무되지도 않는다. 당신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 건물에 있어야 한다면, 또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어떤 종류의 음악을 들어야 한다면, 당신이 하고 있는 것은 예배가 아니다. 당신은 출퇴근 시간 동안 도로 위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마음이 바르게 되어 있어야 한다. 성도의 회중 가운데서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때 그게 삶의 연장이 아니라면, 참된 예배가 드려지지 않을 것이다.  
바울도 로마서 12:1-2절에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고 했다. 이것은 곧 성도의 삶 전체가 섬김과 봉사의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께 자신의 몸과 몸으로 날마다 행하는 모든 것을 드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께 정교한 기도를 드리는 것과 장엄한 의식을 드리는 것이 아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매일의 삶을 드리는 것이다. 

4) 교육적 성격 
예배는 비의도적 교육프로그램이다. 예배의 목적은 교육이 아니다. 오로지 하나님 한 분만을 찬양하고 영광 돌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는 언제나 교육적 성격을 가진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예배의 교육적인 의도와 본질을 인식하고 벌써 그의 글 ‘독일미사(Deutsche Messe 1562)’에서 “예배는 우리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도울 수 있어야 하는데, 먼저 하나님에 대한 자의식을 일깨우고, 신앙을 강화시켜주며, 믿음을 도우는 역할로 표현되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비의도적인 학습으로서의 예배는 먼저 하나님은 누구신가에 대한 물음에 대답을 준다. 루터의 지적처럼 인간은 도대체 모든 만물 위에 계신 무엇을 경배하고 사랑해야 하는지, 인간은 의지하는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어떤 표준과 가치를 인간의 삶의 행동에 적용해야 할 것인지, 인간은 삶의 희망을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지 등의 인간의 현 존재의 근거와 삶의 의의에 따른 인간적인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대답을 예배 가운데 해석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안에서 해결한다. 
아무리 아니라고 고집하더라도 우리는 지금도 예배를 가운에서 교회를 위한 신앙적 삶의 원리를 강화시키고 있다. 예배의 가장 중요한 한 요소인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인 가르침으로써, 항상 윤리적 관점 하에서 사람의 지표로써 선포되는 것이며, 개개인의 신앙강화에 교육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4. 예배순서가 갖는 의미들 

모든 예배가 통일성이 있고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예배의 제요소에 대한 이해가 절실히 필요하다.  

(1) 전주 
(2) 예배의 선언(또는 예배에의 부름) 
(3) 개회 찬송(경배의 찬송) 
(4) 예배의 기원(祈願) 
(5) 참회의 기도 
(6) 사죄의 선언 
(7) 신앙고백 (사도신경) 
(8) 성시교독 
(9) 찬 송 
(10) 목회기도 
(11) 성가대의 찬양 
(12) 말씀 (설교) 
(13) 설교 후의 기도와 찬송 
(14) 헌금 
(15) 교회의 소식(성도의 교제) 
(16) 축도 


황성철 교수

출처 : 예수 코리아
글쓴이 : 예수코리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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