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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자료/교회

[스크랩] 강단에서 설교자가 갖추어야 할 몸가짐

강단에서 설교자가 갖추어야 할 몸가짐


▲정장복 총장(한일장신대학교) 

Q. 오늘 묻고자 하는 저의 질문은 설교자가 성단에 올라오는 모습이나 설교를 위하여 앉아 있는 모습에서 참고해야 할 말씀을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 목사님은 단에 오를 때부터 정중함이 결려되는 인상을 너무 심하게 풍깁니다. 단에 올라와 앉기가 무섭게 주위를 두리번거리거나 회중 가운에 누구인가를 찾는 듯한 인상을 풍깁니다. 때로는 옆에 있는 전화를 들고 지시를 하는 등 너무 산만한 모습을 보입니다. 성단에 오른 인도자나 설교자가 갖추어야 할 첫 몸가짐은 어떤 것이 좋을까요? 

A. 설교란 단순한 언어로 진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의 권위가 그 언어와 내용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몸가짐과도 절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연출을 맡은 사람들은 연기자들이 대중 앞에 나타날 때 어떤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갖추어야 할 것인지를 먼저 훈련시킨 후에 그 다음 단계의 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주일 예배가 시작될 무렵 설교자가 성단을 올라가 정중한 몸가짐을 보이지 못한 경우를 저도 많이 보고 있습니다. 설교자가 무엇을 잊었는지 다시 내려왔다가 다시 오르는 모습이나 옆에 있는 전화를 들고 통화를 하는 모습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좌우로 돌려가면서 회중들을 살피는 모습도 봅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단에 오른 설교자로서 적절한 몸가짐이 아닙니다. 

우리 한국의 문화권에서는 종교지도자란 언제나 그 몸가짐이 정숙하기를 기대합니다. 자신들은 세상 속에서 흐트러진 삶을 살았어도 종교지도자만은 모범된 삶의 내용과 몸가짐을 갖추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요구는 오랜 전통의 종교를 문화의 바탕으로 하는 곳에서는 더욱 심합니다. 이러한 문화권에 있는 한국교회 역시 자신들의 설교자에 대하여 그 삶의 질과 몸가짐에 남다를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러한 현상은 설교자가 성단에 오를 때부터 정숙한 분위기를 그 몸가짐에서 풍겨주기를 기다립니다. 그들은 어떤 경우도 설교자의 경망스러운 언어나 몸가짐을 환영하지 아니합니다. 

일반적으로 많은 설교자들은 성단에 오르면 바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점은 매우 좋은 출발이라고 생각합니다. 설교자가 그 시간에 예배를 인도한 일이나 설교를 하는 일에 성령님의 손에 잡힌 도구로서 성직을 수행하게 해 달라는 기도는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인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할 막중한 책임을 앞에 두고 목사가 엄숙하게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는 한국교회 초기부터 있어온 일입니다. 지속적으로 우리의 목사들이 그 자세를 이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Q, 제가 사역하고 있는 교회에서는 부목사가 예배를 인도하고 저는 설교와 축도만 합니다. 그래서 성단의 의자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습니다. 이 때 설교자가 갖추어야 할 몸가짐을 듣고 싶습니다. 두 다리의 무릎을 벌리고 앉아 있는 것보다는 서양인들이 흔히 하는 것처럼 한 다리를 올려 두 무릎을 모으는 자세가 저에게는 편합니다. 흔히들 일컫는 말로 다리를 꼬고 앉을 때가 많습니다. 여기에 대한 찬반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의견을 말씀해 주시면 합니다. 

A. 매우 현실적인 문제를 질문하셨습니다. 사람들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사람이 두 무릎의 자세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몸가짐이 달라집니다. 군사 독재 시절 TV 앞에 매일 비추어진 대통령에 대한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가 의자에 두 무릎을 떡 벌리고 앉아 있는 모습을 자주 보이고 있었습니다. 사병들 앞에서 예의를 갖출 필요가 없었던 그는 좀처럼 체질화 된 자신의 앉은 자세를 고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교양미 없는 대통령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의 예의문화는 어른 앞에 나가 앉을 때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대중 앞에 나타나 앉아 있을 때도 거기에 버금가는 예의 있는 자세를 갖추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어른들이나 회중 앞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모습은 눈에 거슬린 자세입니다. 남녀 모두가 이러한 자세는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단정하게 허리를 펴고 두 무릎을 합치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바른 몸가짐입니다. 어려워도 이점은 지켜져야 합니다. 저의 유학시절에 은사님이셨던 분이 한국에 오셔서 설교하시게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단에 오르기 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기는 한국입니다. 두 무릎을 합쳐 단정히 앉아 주십시오. 절대로 다리를 꼬는 자세는 취하지 말아 주십시오. 한국 문화에서는 회중들 앞에서 단정하고 예의 바른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그 때 그분은 자신은 한국의 높은 예의범절을 누구보다 존중하기에 최대한 노력을 하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염려말라는 말을 몇번이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수님은 단에 올라 의자에 앉자마자 나의 조언을 깜박 잊으시고 두 무릎을 상하로 겹치면서 두 다리를 꼬고 앉으셨습니다. 그때 저는 지체 없이 내 손으로 그분의 무릎을 가볍게 쳤습니다. 그 분은 깜짝 놀라 저의 충고를 따라주시었습니다. 설교가 끝난 다음에 그 분은 나의 충고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맞는 말인데 미국에서는 그러한 지적이나 예의가 필요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말을 하면서 동방예의지국인 한국을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시대가 변해가면서 모든 것이 서구화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앉은 자세 마저 서구의 모습을 닮아 가는 것을 봅니다. 불편하시더라도 두 무릎을 수평으로 모으고 허리를 펴 단정히 앉아 있는 설교자의 자세를 취함이 좋다고 봅니다. 


Q. 저는 설교자로서 설교대에 섰을 때 누구보다 단정한 몸가짐을 갖추었다고 생각합니다. 전혀 불안한 몸가짐을 가진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설교를 끝내고 집에 오면 저의 아내는 어딘가 몸가짐이 안정감이 없다는 지적을 합니다. 비디오에 담은 저의 모습을 보아도 그러한 감각을 느낍니다. 그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A. 목사님이 질문하신 문제는 저가 지도하는 [설교의 실제] 시간에 흔히 발생되어 많이 지적하는 문제입니다. 사실 설교자가 그 몸가짐에서부터 안정감을 준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설교자가 인상이나 몸가짐에서 안정감을 주지 못한다면 설교 그 자체가 막대한 손상을 입게 됩니다. 그래서 설교자의 안정된 인상과 몸가짐은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설교자가 의도적으로 몸을 흔들고 있다던가 본래의 위치를 자주 벗어난 것 등은 삼가야 할 자세입니다. 


우선적으로 권하고 싶은 것은 설교자가 설교대과 몸을 연결(connection)을 시키라는 부탁입니다. 몸의 연결이란 몸의 본체를 설교대에다가 붙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두 손을 이용해야 합니다. 양손을 설교대에 올리거나 한 손을 설교에 올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손이 필요한 제스처를 사용할 경우를 재외하고는 두 손 중에 한 손이 설교대를 붙잡던지 아니면 올려놓던지 하는 자세입니다. 회중들이 바라볼 때 설교자가 두 손 모두를 내리고 있으면서 설교대와 연결을 맺지 않고 있을 때 비록 설교자는 흔들림이 없다고 생각해도 회중은 안정감이 결려된 것을 쉽게 느낍니다. 

이러한 충고를 받아 드린 어떤 설교자는 설교의 처음부터 끝까지 두 손으로 설교대의 양쪽을 붙잡고 어깨를 올리고 있는 자세를 취한 경우가 있습니다. 매우 부자연스런 몸가짐으로 비추어집니다. 안정감이 없다는 것과 부자연스러운 모습은 동일한 개념의 문제입니다. 경직된 자세를 유지하는 몸가짐은 회중들에게 평안한 마음을 주는데 장애물이 됩니다. 설교자는 여유를 보여야 합니다. 그래서 두 손으로 설교대를 잡는다던가 오른 손 왼손이 번갈아 가면서 설교대를 잡는 여유와 변화가 매우 필요합니다. 

그리고 참고로 말씀드린다면 설교를 할 때는 그 자세가 단정하고 당당해야 한다. 두 어깨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수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고개가 한쪽으로 기우는 일이 없이 바로 하여야 합니다. 


Q. 저는 우리 목사님의 설교에서 많은 은혜를 받고 신앙생활에 큰 영양을 공급받고 삽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나 목사님을 정면으로 가장 뚜렷하게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일찍이 자리를 잡고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어느 주일에 저의 개인 사정으로 교회에 늦게 오게되어 맨 오른쪽 뒤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설교자가 거의 시선을 주시지 않고 설교를 하신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에 앉아 있는 교인들은 자유롭게 졸거나 다른 행동들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경험한 충격이었습니다. 이러한 문제가 어찌 저의 교회 목사님만의 문제이겠습니까? 이러한 문제의 분석과 해결을 위한 좋은 조언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A. 귀하께서 주신 질문은 많은 설교자들이 범하고 있는 문제점을 바르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예배당에서 어떤 이는 설교자와 호흡을 함께 하면서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는가 하면 한 편에서는 설교 동안 내내 졸다가 집으로 가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이러한 불균형을 가져오는 원인은 여러 가지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설교자의 시선교환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아주 중요한 문제이기에 별개의 주제로 좀더 자세하게 취급하고자 합니다. 이 심각한 문제의 답변은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합니다. 

그러나 여기 설교자의 몸가짐을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설교자가 설교대에 팔목을 올리고 몸을 기대고 설교를 할 때에 흔히들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오른 팔을 올리고 설교를 하는 설교자는 자신의 오른쪽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반대로 왼편의 팔을 올리고 있을 때는 왼편만을 바라보게 되는 신체의 반응을 가져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설교자는 어느 한 팔을 올리는 자세를 취하지 아니해야 합니다. 질문에서 지적한대로 설교자가 한 편에 치중된 몸의 자세를 지속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합니다. 설교자는 중앙과 좌우를 보기에 전혀 지장이 되지 않는 몸의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그리고 두 팔을 올리는 자세도 바람직한 것이 못됩니다. 두 팔을 올리는 경우 허리를 굽히게 되고 설교대에 몸을 기대는 행위로 보입니다. 이러한 것은 강의실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입니다. 설교시간에는 철저히 금지된 자세입니다. 그 이유는 회중을 정중하게 대하는 태도가 결려되는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강의실에서는 의자에 앉아서 강의를 하거나 몸을 숙여 단에 몸을 기대는 것이 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설교만은 그러한 자세가 허용되지 아니합니다. 



Q. 어떤 설교자는 설교대에 서기만 하면 그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아니합니다. 눈의 위치를 비롯하여 고개의 움직임도 고정되어 있고 몸의 자세도 설교가 끝날 때까지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살아 움직이는 인간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리 느껴지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 회중들은 설교자가 우리와 동일한 감정을 갖고 사는 인간이기를 바랍니다. 생활가운데서 만나는 설교자와 설교대에 나타난 설교자의 몸가짐이 너무 차이가 많습니다. 

A. 40여년 전에 지도급에 속했던 어느 설교자의 이야기입니다. 그 분은 언제나 자신의 눈은 15도 정도의 위를 쳐다보고 회중을 전혀 쳐다보지 아니했고 좌우도 전혀 보지 않았습니다. 그 사연은 그 분이 1920 년대에 여학교 교사를 지냈는데 수업 시간에 여학생들을 쳐다보지 말라는 교장 선생님의 지시를 따르다 보니 그것이 습관이 되어서 설교자가 되어서도 동일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동물입니다. 동물이라는 뜻은 움직이는 생명체를 말하고 있습니다. 설교자는 누구보다 풍부한 정서와 이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운반하는 종입니다. 설교자가 고정되어 있는 몸가짐으로 설교를 할 때 회중들은 생명체가 아닌 로버트나 마네킹을 연상하게 됩니다. 설교자가 몸가짐을 인위적으로 움직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연스러우면서도 어색하지 않고 굳어진 몸이 아니라 유연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몸가짐을 갖추도록 설교자는 노력해야 합니다. 설교는 설교자와 회중이 감정이 오고 갈 때 생명력이 있는 말씀으로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그 감정은 단순한 언어에서뿐만 아니라 설교자의 몸가짐에서 더욱 활발하게 움직입니다. 



대화의 정리 

기독교의 설교는 신성하게 여겨졌다. 지금도 말씀 중심의 교회들은 설교를 가장 소중한 사역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신성한 설교가 누가 어떤 형태의 몸가짐으로 하느냐에 따라 그 양상은 달라지기 마련이다. 설교자가 회중 앞에 섰을 때는 그의 말이 있기 전에 그의 몸가짐을 먼저 보게된다. 그의 정숙한 인상과 몸가짐 등은 일차적인 만남의 출발이다. 

설교가 진행되는 동안 설교자의 감정이 극도에 이르렀을 때 보여주는 설교자의 몸가짐은 매우 다양하다. 그 몸 전체가 설교대를 벗어나 뛰고 있는 모습을 보이는가 하면 안정감이 없는 여러 형태를 취하고 있다. 어느 경우는 앞에서 지적한데로 석고상처럼 움직임이 없는 설교자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설교자가 가지고 있는 몸가짐은 누구로부터의 모방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성격과 감정표현의 방법에 따라 각각 다르게 보여진다. 누구도 완벽한 설교자의 몸가짐을 갖추고 설교대에 선 사람은 없다. 그러기 때문에 설교자마다 바로잡아야 할 부분들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부분들은 누구의 충고보다는 비디오를 통하여 자신의 모습을 냉정하게 점검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일반적으로 설교자들은 자신의 몸가짐을 보면서 거의 불만스러운 생각을 갖는다. 그 이유는 자신의 생각대로 자신의 몸가짐이 보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교의 진정한 발전은 설교의 내용뿐만 아니라 몸가짐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 나아가야 한다. 여기서 설교자가 특별히 유의해야 할 것은 어느 때 발견하고 바로잡은 자신의 몸가짐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얼마 후에 재발된다는 점이다. 버렸다고 생각되는 몸가짐은 영원히 설교자를 떠난 것이 아니다. 잠복해 있을 뿐이다. 설교자가 조금만 주의를 게을리 하면 바로 등장할 채비를 갖추고 있는 것이 버려야 할 항목들의 실체이다. 

설교란 어떤 경우도 완벽이란 있을 수 없다. 오직 쉼 없이 이어지는 발전을 향한 몸부림이 있을 뿐이다. 보다 성숙한 설교를 향한 설교자의 눈물과 땀이 있을 뿐이다.


본 글은 정장복 교수님(장신대)의 글로 월간목회에 6월호에 연제된 글입니다

 


출처 : 예수 코리아
글쓴이 : 예수코리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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