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펄젼의 시편 27편 강해
[개 요]
주제
이 시가 기록된 때와 관련하여 머리말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 왜냐하면, “다윗의 시”라는 머리말은 많은 시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이 노래의 제재로부터 판단해 본다면, 기자는 대적들에게 쫓김을 당하고 있었고(2, 3절), 여호와의 집 바깥으로 쫓겨난 상태였으며(4절), 부모와도 이별하였고(10절), 또한 위증자에게 시달리고 있었다(12절). 이 모든 상황은 에돔인 도엑이 사울에게 다윗을 대적하는 말을 하였던 때와 부합하지 않는가? 이것은 유쾌한 희망의 노래로서, 시련 속에서 전능자의 팔에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된 자들에게 꼭맞는 내용이다. 이 시는, 다윗과 교회와 주 예수의 표현을 삼중적으로 각각 생각하면서 읽을 때, 더욱 유익을 얻을 수 있다. 그렇게 할 때, 성경의 완전성이 보다 현격하게 드러날 것이다.
구성
이 시편은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3절 하나님께 대한 분명한 확신.
4-6절 그분과의 교제를 사모하는 마음을 토로함.
7-12절 기도에 전념함.
13, 14절자신의 경우에 믿음의 지탱시키는 능력이 어떠한지를 인정하고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모범을 따르도록 권고함.
[강 해]
1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2나의 대적, 나의 원수 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3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1절.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여기에 개인적인 관심사가 나타난다. “나의 빛”, “나의 구원”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러하다. 영혼이 그 점을 확신하고 있으며, 따라서 담대하게 선언한다. “나의 빛.” 신생한 상태에 있는 영혼 속에 구원의 전조로서의 신령한 빛이 가득 비추인다. 만일 우리 자신의 어둠을 보기에 충분하고 주 예수를 사모하기에 충분한 빛이 없다면, 구원의 증거도 없다. 구원은 어둠 속에서 우리를 찾아내지만, 우리를 거기 남겨두지는 않는다. 그것은 사망의 어두운 골짜기에 앉은 자들에게 빛을 제공한다. 회심 후에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기쁨, 위로, 인도, 선생이시며 또한 모든 의미에서 우리의 빛이 되신다. 그는 우리 내부의 빛이요, 우리 주위를 밝히는 빛이요, 우리에게서 반사되는 빛이며, 우리에게 계시되는 빛이시다. 주께서 단지 빛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빛이시라”고 표현된 점에 주목하라. 또한 그는 구원을 베푸시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자신이 구원이시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모든 언약적 축복들을 소유하고 있는 셈이다. 모든 빛이 햇빛인 것은 아니지만, 태양은 모든 빛들의 아버지이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에, 이로부터 추론되는 요지는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라는 질문 형태로 언급되고 있다.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이 질문은 그 자체가 대답이 된다. 어둠의 권세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빛이신 주께서 그것을 멸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지옥의 저주를 무서워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주께서 우리의 구원이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거만한 골리앗의 도전과는 판이하다. 그 이유인즉 그것이 매우 다른 기초 위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변덕스러운 육신의 팔 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시는 전능자의 실제적인 힘에 의존하는 것이다.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이는 강한 어투의 세번째 형용 어구에 해당하며, 기자의 소망이 부숴질 수 없는 삼중의 끈에 의해 단단히 매이는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주께서 은혜의 행사를 아낌없이 베푸시는 경우에 우리가 거듭 찬양을 발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의 생명은 그것을 만드신 분으로부터 그 모든 힘을 공급받는다. 그리고 만일 그가 우리를 강하게 만들고자 계획하시면, 우리는 대적의 어떠한 음모에 의해서도 쇠약해질 수 없다.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이 담대한 물음은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를 내다본 것이기도 하다. “만일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면,” 현재에든 다가올 장래에든지 간에 누가 나를 대적할 수 있겠는가?
2절. “나의 대적, 나의 원수 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이 구절은 과거의 구원을 기록하고 있으며, 시련의 때에 우리의 믿음을 격려하기 위해 경험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각 단어가 교훈적이다.
“나의 대적, 나의 원수 된.”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많으며, 그들의 종류는 다양하다. 하지만 그들은 해악을 초래하며 증오심으로 가득하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지닌다.
“행악자가.” 행악자가 우리를 미워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소망스러운 표시이다. 만일 우리의 대적들이 경건한 자들이라면 그것은 쓰라린 슬픔이 될 것이지만, 행악자들의 사랑보다는 차라리 그들의 증오가 더 낫다.
“내 살을 먹으려고.” 마치 식인종들처럼 그들은 끝장을 내려고 하며, 그 사지를 찢고, 자신의 악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축제를 벌인다. 우리 영혼의 대적들은 잔혹하기 이를 데 없으며, 도무지 관대함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아야 직성이 풀린다. 다윗이 어떤 위험에 처해 있었는지 보라. 그는 강하고 잔인한 수많은 대적들의 손아귀 안에 있었지만, 자신의 완벽한 안전과 그들의 전적 실패를 주시하였다.
“내게로 왔다가.” 그들은 공격하여, 마치 사자가 먹이에게 달려들듯이 희생물을 덮친다.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하나님의 입김이 그들의 다리를 넘어뜨리셨다. 길에는 그들이 결코 알아차리지 못한 돌들이 놓여 있었고, 그들은 이 돌들 위로 수치스럽게 넘어졌다. 이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리 주님이 문자 그대로 보여주신 사실이다. 그때 그를 붙잡으러 왔던 자들이 뒤로 넘어졌다. 여기서 그는, 믿음의 능력으로 무릎을 일으켜 대적들을 면전에서 내던질, 고투 중인 모든 신자들을 예표하신 셈이다.
3절.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아직 전투가 수행되지 않는 동안, 실제적인 싸움이 시작되기도 전에, 전사의 마음은 긴장에 사로잡혀 두근거리기 쉽다. 똑같은 군대라도 진을 친 채 대치 상태에 있는 군대는 실제적 충돌 상태에 있는 군대보다 흔히 더 큰 공포심을 불러 일으킨다. 이는 영의 다음과 같은 언급과도 일맥 상통한다-“한 사람을 두려워한 나머지 천 명이 죽은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의심의 여지 없이 예상되는 재난의 그림자가, 소심한 사람에게는 재난 그 자체보다 더 심한 슬픔을 느끼게 하는 요인이 된다. 하지만 믿음은 용기를 강력하게 뒷받침해 주며, 두려움의 잔에 남은 잔재들을 창문 밖으로 집어던진다.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실제로 창이 찌를지라도, 믿음의 방패가 그것을 막을 것이며, 설령 첫번째 가벼운 충돌이 단지 전쟁의 시작일 뿐이라고 하더라도, 대적과는 상관 없이 믿음의 깃발들이 나부낄 것이다. 비록 전투가 계속 발생하고 싸움이 거듭 이어진다고 해도, 신자는 오래도록 지속되는 전투로 인해 낙심하지 않을 것이다. 3절은 2절로부터 자연스럽고도 논리적으로 추론된 내용이다. 확신은 경험에서 생긴다. 여러분은 큰 위험으로부터 구원받은 경험이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기를 세우고서 야영용 횃불을 피워놓고 기다리라. 그리고 대적으로 하여금 제 마음껏 해보라고 하라.
4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5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
6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두른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4절.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우리가 단번에 얻을 수 없는 것을 청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소원에 의해 우리를 즐겨 판단하신다. 절름발이 말을 탄 사람은, 만일 그가 최선을 다해 서둘러 간다면, 그리고 가능한 한 더 빨리 가려고 노력한다면, 속력이 느리다는 이유로 자기 주인에게 비난을 받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어떠한 일을 실행에 옮기려는 당신의 자녀들의 뜻을 귀하게 여기신다.
“여호와께.” 이분은 우리의 소원을 아뢰기 위한 올바른 대상이시며, 우리의 두레박을 내려뜨릴 우물이요, 두드릴 문이며, 또한 우리의 돈을 찾을 은행이 되신다. 사람들에게 청하라, 그리하면 나사로와 함께 거름더미 위에 던져질 것이다. 반면에 여호와께 청하면, 천사들에 의해 이끌려 아브라함의 품으로 옮겨질 것이다. 여호와를 향한 우리의 요청은 성결하고, 겸손하며, 지속적이고, 순종적이며, 열렬해야 한다. 그리고 그 모든 바람이 하나의 덩어리로 결합된다면, 시편 기자의 경우처럼 잘 되어질 것이다. 다윗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볼 때, 우리는 그가 휴식과 안정 그리고 다른 수많은 좋은 일들을 소원했으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진주와 같이 고귀한 대상에 고정시켰으며, 휴식을 뒤로 미루었다.
“한 가지 일.” 분산된 목표들은 혼란과 쇠약함과 실망을 야기시키는 경향이 있다. 한 가지 규칙을 따르는 사람이 두각을 나타내며, 한 가지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이 성공한다. 우리의 모든 애정이 단 하나의 대상에로 결집되게 하며, 그 애착이 하늘에 속한 것들에 고정되게 하자.
“그것을 구하리니.” 거룩한 소원은 단호한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옛 격언에 이르기를, “희망과 소원만을 지니고 있는 자는 결코 알뜰한 살림꾼이 아니다” 혹은 “바람만으로는 결코 자루를 채우지 못한다”라고 한다. 소원이란 행동이라는 좋은 토양에 뿌려져야 하는 씨앗이다. 왜냐하면 소원만으로는 아무런 수확도 거두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만일 실천적인 노력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우리의 소원이 마치 비 없는 구름과 같음을 발견할 것이다.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왕되신 여호와와 교제를 나누기 위해, 다윗은 항상 그 궁전에 거하기를 갈망했다. 성막 봉사로 인해 지치기는커녕, 그는 줄곧 그 일에 종사하기를 소원했으며 그것을 일생의 낙으로 여겼다. 그는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식구 중 하나, 곧 하나님의 집에서 태어나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사는 자녀가 되기를 갈망했다. 이는 우리가 가장 사모하는 소원이기도 하며, 우리는 그것을 영속적인 삶의 날들에까지 확대한다. 물론 이러한 삶이 아직 나타나지는 않았다. 우리는 위에 있는 아버지의 집, 곧 우리 영혼의 가정을 사모한다. 만일 우리가 그곳에 영원히 거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보잘것없는 이생의 삶의 행복과 불행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황금 성 예루살렘”은 우리의 마음이 갈망하는 유일한 목표이다.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지상과 천상의 예배자들 모두에게 요구되는 사항이다. 우리는 단지 목회자를 보거나 그에게 보이기 위해 혹은 그의 말을 듣기 위해 성도들의 모임에 참석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의인의 모임에 함께 모이는 것은, 자애로우신 아버지와 영화로우신 예수 그리고 신비로우신 성령을 더 많이 알게 됨으로써 영광스러우신 우리 하나님을 더욱 사모하며 더욱 경건하게 받들기 위함이다. “여호와의 아름다움”이 무슨 말인가? 그것을 생각해 보라! 믿음을 통해 그것을 바라보라! 예수를 따르는 모든 신실한 자들이 “아름다우신 왕”을 보게 될 때 그것은 얼마나 놀라운 광경이겠는가! 그것은 무한히 복된 광경이라 할 것이다.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우리는 여호와의 집을 사모하는 자들의 모임에 참석해야 한다. 회개하는 죄인들뿐만 아니라 확신을 지닌 성도들도 그곳을 사모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그리고 어떻게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지를 사모해야 한다. 또한 천성에 대한 관심과 그곳을 더욱 확신할 수 있게 되는 방법을 문의해야 한다. 하늘나라에서는 문의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우리가 알려진 바와 같이 우리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반면에 우리는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그분에 관해 알 수 있는 우리의 모든 역량을 일깨워야 한다.
5절.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이 구절은 시인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사모하는 열망을 지닌 두드러진 이유를 제시한다. 그것인즉, 그가 위험한 때에 보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환난 날에,” 그 곤란한 때에, 다른 사람들이 나를 버리는 때에, 그가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숨기실” 것이다. 최악의 위험에 처했을 때 그가 내게 최선의 피난처를 제공하실 것이다. 왕의 초막이 진 중앙에 세워졌고, 그 주위로 모든 강한 용사들이 항상 둘러서서 지켰다. 전능하신 능력으로 굳건히 존속되는 그 신성한 주권 안에서, 신자는 평안히 숨되, 스스로 몰래 숨는 것이 아니라 자상하게 돌보시는 왕에 의해 피난처를 제공받는다.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희생 제사가 하나님의 주권을 도와 선민을 해악으로부터 보호해 준다. 구약 시대에는 위반 시 죽음이라는 형벌이 따랐던 까닭에 지성소에 감히 들어가려는 사람이 없었다. 만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그곳에 숨기셨다면, 어떤 대적이 감히 그들을 괴롭히려 하겠는가?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 여기서 불변성과 영원성 그리고 무한하신 능력이 하나님의 주권과 희생 제사에 힘을 보탠다. 하나님 당신에 의해 대적들 위에 높이 들리움을 받고, 결코 침해를 받지 않는 난공불락의 바위 위에 높이 들리움을 받는 사람의 위치는 그 얼마나 복된가! 우리가 자기 백성을 그토록 효과적으로 지켜주시는 여호와와 함께 거하기를 사모하는 것은 당연하다.
6절.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두른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그는 이 사실을 분명히 확신한다. 구약 시대의 경건한 자들은 믿음으로 기도했고, 전혀 흔들리지 않았으며, 기도 응답이 확실할 것이라고 믿었다. 다윗은 자신을 에워싸는 모든 자들에 대해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둘 것을 믿음을 통해 확신했기 때문에, 모든 대적들이 자기 앞에 엎드러질 때 자신이 어떻게 할 것인지를 마음속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그 준비란 감사를 통해 암시되어 있는 것이다.
“내가 그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그는 전투 중에도, 승리의 개선 때에 감사의 기쁨을 표현할 곳을 내다본다. 그는 자기 왕궁에서 베풀어질 축제에 대해 혹은 연회장에서의 잔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토록 신령한 구원과 어울리는 거룩한 환희에 대해 말하고 있다. “노래하여.” 이는 감사에 대한 가장 자연스러운 표현 양식이다.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이러한 맹세는 반복을 통해 강조되며, 여호와께 모든 찬양을 돌려 드리겠다는 맹세로써 설명된다. 침묵할 자는 그렇게 하게 하더라도, 신자는 자신의 기도가 응답될 때 찬양을 드리는 것이 당연하며 또 그렇게 할 것이다. 세상의 헛된 일들을 노래할 자들은 그렇게 하게 하더라도, 신자는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노래를 남겨둔다.
7여호와여 내가 소리로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8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9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10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11여호와여 주의 길로 나를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인하여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
12내 생명을 내 대적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
7절. “여호와여 내가 소리로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영성의 진자(振子)는 기도와 찬양 사이에서 왔다갔다한다. 앞절에서의 노래 소리가 여기서는 부르짖음으로 바뀐다. 다윗은 훌륭한 군사로서 자신의 무기들을 다루는 법을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기도”의 무기를 지니고서 안도감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했다. 고뇌에 찬 그의 부르짖음에 주목해 보라.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는 한, 혹은 과시적인 헌신을 통해 자신의 자만심을 만족시킬 수 있는 한, 주께서 과연 그들의 소리를 들어주실까 하는 것은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는다. 하지만 진실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여호와께서 어떻게 들으실까 하는 것만이 고려 대상일 뿐이다. 이 ‘소리’는 개인적인 기도에서도 유익하게 사용될 수 있다. 왜냐하면 비록 그것이 필수적이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종종 그것은 유익하며, 주의산만을 막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긍휼은 죄인들의 희망이며 성도들의 피난처이다. 용인될 수 있는 모든 간구자들은 이러한 속성에 크게 유의한다. “응답하소서.” 우리는 기도 응답을 기대할 수 있으며, 만일 우리가 중요한 사업차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고도 아무런 대답을 받지 못했을 경우에 응당 여유를 가져야 하는 정도 이상으로 태평스럽게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8절.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만일 우리 자신의 음성을 주께서 들어주시기를 바란다면 자신이 그분의 음성에 응답하고자 주의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운다. 알프스 산맥의 바위들이 농부의 뿔나팔 소리를 아름다운 음률로 메아리치게 하듯이, 진실한 마음은 하나님의 뜻을 반영해야 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항이 있다.
그것인즉, “내 얼굴을 찾으라”는 명령은 복수형으로서 모든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그것을 단수형으로 받아 개별적 적용을 암시하였다는 것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여호와의 음성은 다른 모든 음성들이 수그러드는 상황에서, 곧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더욱 효력을 발휘한다. 그때 내 “마음”이, 즉 나의 내밀한 성품이 움직여 순종의 반응을 보인다. 그 반응의 신속성에 주목하라. 말씀을 듣자마자 실행에 옮겼다. 하나님이 “찾으라”고 말씀하시자마자, “내가 찾으리이다”라는 대답이 뒤따랐다. 이처럼 거룩한 신속성을 더욱 함양하자. 우리가 하나님의 손길에 더욱 민감해지기를, 그리고 하나님의 영의 감동에 더욱 예민해지기를 소원하는 바이다.
9절.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멀리”(한글 개역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표현임-역자 주)라는 말은 원문에는 없으며, 역자들에 의해 불필요하게 첨가된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얼굴이 조금만 숨겨져도 신자에게는 커다란 곤경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만일 여호와께서 자신을 숨기심으로써 그 얼굴을 찾는 자들로 하여금 당신과 만나지 못하게 하셨다면, 여호와의 얼굴을 찾으라는 말은 고통스러운 명령일 것이다. 여호와의 미소는 가장 큰 위로가 되며, 그분의 찌푸리신 얼굴은 최악의 불행이 된다.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다른 종들은 불신실함이 입증되었을 때 내버림을 당했다. 예를 들자면, 다윗의 전임자인 사울이 그러했으며,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다윗은 여러 가지 결점들을 자각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 오래 참으심을 통해 계속 자신을 돌보아 주실 것을 갈망했다. 이와 유사하게, 우리 자신의 무가치함을 자각할 때에도 이것은 가장 적절한 기도이다.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과연 우리는 이러한 선언에 얼마 만큼이나 진정으로 공감할 수 있겠는가? 여러 해 동안, 갖가지 시련의 상황 속에서, 우리는 우리 하나님에 의해 지탱되어 왔으며, 따라서 우리는 자신이 받은 은혜를 고백해야 하고 또 그렇게 할 것이다. “배은망덕은 타락한 인간에게 당연히 나타나는 현상이다”라는 말이 있지만, 영적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부자연스럽고 혐오스럽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이는 거듭 묵상될 가치가 있는 귀한 제목이다.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이는 장래를 위한 기도이자, 과거로부터 얻은 추론이다. 만일 여호와께서 우리를 떠날 작정이셨다면, 왜 애당초 우리와 함께하셨겠는가? 만일 이제 영혼이 내버림을 당한다면, 때늦은 도움은 단지 헛수고일 뿐이다. “나를 버리지 말고”라는 첫번째 간구는 일시적인 유기를, 그리고 두번째 간구는 최종적으로 은혜를 거두어가심을 각각 언급한다고 볼 수 있다. 둘 다 우리에게 일어나지 말도록 기도해야 할 사항이다. 또한 두번째와 관련하여, 우리에게는 강조되어야 할 불변의 약속들이 있다.
10절.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이토록 친밀한 관계마저 최종적으로 나를 버릴 것이지만, 설사 인간의 가슴에 애정이라고 하는 젖이 메말라버린다고 하더라도, 결코 잊지 않으시는 아버지가 계신다. 가장 위대한 성도들 중에는 자기 가족에게서 쫓겨나고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 자들도 있다.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여호와는 나의 변론을 지지하실 것이며, 재난들로부터 나를 건져올리실 것이며, 나를 자기 팔로 안으실 것이고, 나를 대적들 위에 높이실 것이며, 마침내 나를 그분의 영원한 처소로 받아들이실 것이다.
11절. “여호와여 주의 길로 나를 가르치시고.” 그는 자기 자신의 길에 몰두하게 되기를 간청한 것이 아니라, 의로우신 여호와가 걷게 하시는 길을 알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이 기도는 개인적인 무지, 영혼의 위대한 학습 능력, 그리고 흔쾌한 마음의 순종 등에 대한 겸손한 자각을 시사한다.
“내 원수를 인하여.” 이러한 원수들은 할 수만 있다면 우리를 사로잡을 것이지만, 분명하고 단순한 솔직성을 지닌 자의 길은 그들의 분노로부터 벗어나 있다. 정직한 단순성이 어떻게 사악한 자들의 술책을 좌절시키고 압도하는지를 목도하는 것은 근사한 일이다. 진리는 지혜이다. “정직은 최선의 방책이다.”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 여기서는 방향뿐만 아니라 도움을 간구하고 있다. 우리는 지도뿐만 아니라, 여정 중에 우리를 도와줄 안내자도 필요로 한다. 여기서 요망되는 길은 공공연하고 정직하며 평탄한 길로서, 복잡하게 얽히고 비뚤어지고 위험한 길, 곧 간교한 길과 반대된다. 선한 사람들은 그럴싸한 투기와 의혹스러운 과정에 대해서는 결코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천국의 상속자에게는 솔직한 단순성이 최상의 정신 상태이다. 부정직한 속임수와 정치적 편의 추구는 세상 시민들에게 돌려주자. 솔직한 사람들만이 새 예루살렘 시민의 자격을 갖고 있다. 에서는 간교한 사냥꾼이었고, 야곱은 장막에 거하는 솔직한 사람이었다.
12절. “내 생명을 내 대적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만일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시면, 나는 마치 사자에게 던져진 희생물같이 되어 산산이 찢겨 완전히 삼킴을 당하고 말 것이다. 우리의 대적들이 자기 방식대로 우리를 다루지 못한다는 사실로 인해, 혹은 스미스필드(식육 시장으로 유명한 런던시의 한 지구, 여기서는 살육의 장소를 상징적으로 나타냄-역자 주)가 조만간 다시금 화염에 휩싸일 것이라는 사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위증자와······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 중상은 지옥의 병기고로부터 끄집어낸 구형 무기이며, 아직도 두루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아무리 거룩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누군가는 그를 중상할 것이다. “개를 잡으려면 그 개가 미쳤다고 하라”(‘악명의 힘은 무서운 것이다. 한 번 낙인찍히면 끝장이다’는 뜻의 속담-역자 주). 그러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여호와의 백성은 개들이 아니며, 그들에게 붙여진 악명이 그들에게 상처를 입히지도 않는다.
“악을 토하는 자.” 그들은 치명적인 독설로써 의인에 대한 증오심을 표출한다. 그들은 말할 때마다 저주를 토해낸다. 회심 전의 바울이 그러했다. 악을 토하는 자들이 지옥에 떨어져 저주를 발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원래 모습이다. 핍박자들은 그 점을 명심해야 한다!
13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
13절.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 (영어 원문상의 표현은, ‘내가 산 자의 땅에서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지 않았다면, 나는 실망했을 것이다’이다-역자 주.) 흔히 낙심은 허약한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심지어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조차 낙심의 공격 앞에서 무릎을 꿇기도 했다. 믿음은 강심제를 영혼의 입 속에 넣어주며, 낙심을 막는 역할을 한다. 소망은 현재의 슬픔을 진정시키는 천상의 묘약이다. 죽어가는 자의 땅에서 산 자의 땅에서 누릴 공정한 몫을 고대하고 열망하는 것은 우리의 축복이다. 산 자의 땅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의 사악함을 몰아내시고, 거룩한 영들이, 그들간의 교제를 통해, 사람들 중에서 중상과 경멸을 당한 핍박받은 성도들을 매료시킨다. 우리는 보기 위해 믿어야 하며, 믿기 위해 보려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정해진 때를 기다려야 하며, 주님의 영원하신 선을 미리 맛보는 것으로써 우리 영혼의 굶주림을 달래어야 한다. 그 선하심은 조만간 우리의 잔치와 노래가 될 것이다.
14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14절. “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그의 문에서 기도로써 바랄지어다. 그의 발치에서 겸손하게 바랄지어다. 그의 상에서 봉사로써 기다릴지어다. 그의 창문에서 기대로써 기다릴지어다. 종종 탄원자들은 오랫동안 아첨하며 기다린 후에도 세상의 후원자들로부터 냉담한 반응만 얻을 뿐이다. 그러나 자신의 후원자가 하늘에 계시는 자는 최대한 빨리 해결함을 받을 수 있다.
“강하고 담대하며.” 이는 군인의 좌우명이다. 이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라. 우리에게는 용기가 필요하며, 만일 우리가 왕이신 예수의 군사들이라면 우리가 필히 그것을 발휘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그리하면 그가 너희 마음을 강하게 하실 것이다”(한글 개역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표현임-역자 주). 그는 약한 부위에다 곧바로 회반죽을 칠하실 수 있다. 마음을 강하게 하라. 그리하면 전인이 능력으로 채워질 것이다. 강한 마음이 팔을 강하게 한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 마음에 주시는 이 능력은 어떤 것인가? “순교자들에 관한 책”을 읽어보라. 그 영광스럽고 용감한 행위들을 보라. 하나님께로 돌이켜, 그러한 힘을 얻으라.
“내가 말하거니와 (한글 개역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표현임-역자 주.)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내가 말하거니와”라는 말을 통해 다윗은 자신의 시 내용을 개인적으로 보증하고 있다. 그 내용인즉 그가 영감받은 사람으로서 감동 상태에서 쓴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증거이다. 사실 이 간략한 내용을 쓰는 자신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너무도 감미롭고 활력적이며 유익한 나머지,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것을 쓰지 않을 수 없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 “내가 말하거니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주해와 설명들]
1절.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순교자 앨리스 드라이버가 취조를 받을 때, 그녀는 거기 모인 박사들의 입을 모두 다물게 만들었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단지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는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 마땅하다. 여러분은 나 같은 가련한 여인 속에 계시는 하나님의 성령에 저항할 수 없다. 나는 정직하고 가난한 사람의 딸로 태어났고, 여러분들처럼 대학에 다녀보지도 못했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쟁기를 끈 적도 많았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수호함에 있어서, 그리고 나의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나는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아 여러분 중 그 누구에 대해서건 대항할 것이다. 또한 만일 나의 생명이 일천 개나 된다고 한다면, 그 모두를 희생하고서라도 나는 그렇게 할 것이다." 그래서 대법관이 그녀에게 판결을 내렸고, 그녀는 기뻐하며 감옥으로 돌아갔다. -찰스 브래드버리.
1절.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이르기를,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한다. 또한 그는,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덧붙인다(요 1:4, 5). 빛과 그것을 보는 눈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소경도 태양의 광채에 관해 많이 알 수는 있지만, 태양이 그를 위해 빛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에게는 그것이 아무런 빛도 제공해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빛"이심을 아는 것과(요일 1:5) "여호와는 나의 빛"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여호와는 빛이심에 분명하며 그 빛에 의해 생명의 길이 우리에게 분명히 드러난다. 그 빛에 의해 우리는 자신의 마음속에 숨은 죄악들을 찾아낼 수 있다. 따라서 그가 '우리의 빛'이시라면, 그는 '우리의 구원'이시기도 하다. 그는 맹세코 우리를 올바로 인도하신다. 우리의 죄악을 드러내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그것으로부터 구원하기도 하신다.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적의와 저주를 보게 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끄사 저주로부터 벗어나게도 하신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해 구원의 길을 밝히시는 한, 우리가 누구를 혹은 그 무엇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는가? 우리 생명은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졌다(골 3:3). 우리는 연약하되 너무도 연약하지만, 그분의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하여진다"(고후 12:9). 여호와께서 친히 우리 생명의 힘이 되어주실 것을 보증하시는 한, 우리가 누구를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는가? -Sacramental Meditations on the Twenty-seventh Psalm, 1843.
1절.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빛"은 모든 가시적인 것들 중 맨 먼저 창조되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체적인 예를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하셨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나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그 이래로, 하나님의 진행 방식을 본따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려고 할 때 맨 먼저 하는 일은 "빛"을 밝히는 것이다. -리처드 베이커.
1절.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성 베르나르는 이렇게 외쳤다.-숭앙받기에 합당한 태양이시여, 당신 없이 나는 걸을 수가 없나이다. 나의 걸음들을 밝히시고, 이 메마르고 무지한 마음을 당신께 인정받음직한 생각들로 채워주소서. 숭고한 빛과 열기로 가득하신 당신께서 내 영혼의 참된 한낮이 되소서. 내 영혼의 어두움을 근절하시며, 그 구름을 흩으소서. 그 모든 더러움과 불순함을 태우고 말리며 또한 소멸시키소서. 신성한 태양이시여, 내 마음에 떠오르사, 결코 지지 마소서. -장 밥티스트 엘리아스 아브리용(Jean Baptiste Elias Avrillon, 1652-1729).
1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영적 용사이건 군대 차원의 용사이건 간에, 겁을 내면 업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용기는 필수적인 덕목이다. 불굴의 용맹성을 위한 최선의 기초가 여호와 안에 있다. -윌리엄 플러머.
1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나는 소심하고 솔직하지 못하게 그리스도를 고백할 생각이 전혀 없다. 그런 설교자들이나 교수들은 마치 징두리 벽판 뒤에서 숨바꼭질 놀음을 하고 있는 쥐와 같다. 그 쥐는 대가리를 구멍으로 내밀어 밖이 한산한지를 살펴보며, 길에 아무도 없으면 밖으로 나오려 하지만, 위험이 생기면 다시 살금살금 되돌아간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담대하지 않고서는 그분께 정직해질 수 없다. 그는 우리가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을 정도로 고귀한 분이시든지, 아니면 아무런 가치도 없든지 둘 중 하나이다. -솔터(H. G. Salter, The Book of Illustrations, 1840).
2절. "나의 대적, 나의 원수 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악의를 품은 자에게는 대적자의 살보다 더 맛있는 요리가 없다. 그는 그 살을 씹지도 않고 목에 넘기며, 마치 가마우지처럼 그것을 통째로 삼킨다. 하지만 비록 악의가 게걸스러운 위를 가졌다고 해도, 그 소화력은 느리다. 비록 그 이빨이 예리하다고 해도, 그 발은 절름거리며, 최소한 실족하기 쉽다. 이는 다윗의 경우에 잘 적용된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의 대적들이 그 살을 삼키려고 들이닥쳤을 때, 그들이 악의를 품고서 다가왔던 까닭에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다." 어떤 사람이 실족하되 넘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악인"이 실족하면 당연히 넘어진다. 특히 고의적인 악행자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다윗의 대적들의 실족함이 바로 그러한 듯하다. 왜냐하면 그 대적들이 실제로 그렇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즉 내 대적들의 실족함도 그러할 것이라는 점에 대해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경우도 그렇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무엇을, 그 누구를 두려워해야 하겠는가? -리처드 베이커.
2절. "나의 대적, 나의 원수 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시인은 자기 대적들을 묘사하되, 그들의 악의와 파멸이라는 두 측면에서 묘사한다.
(1) 그의 대적들은 잔인한 자들이요, 흡혈귀와 같은 자들이며, 또한 살을 먹는 자들이다. 우리는 그들을 식인종이라고 부른다. 사실 은총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설령 그들에게 탁월한 면이 있어 대항에 직면하여도 전혀 흔들림이 없을 정도라고 하더라도, 그들은 서로에 대해 마귀 역할을 할 뿐이다. 성경은 그들을 가리켜 "이튿날까지 남겨두는 것이 없는 저녁 이리"라고 부른다(습 3:3). 큰 물고기들이 작은 것들을 삼키듯이, 탁월한 면을 지닌 자들은 마치 빵을 먹듯이 거리낌 없이 다른 사람들을 삼킨다. 또한 그들은 빵을 먹듯이 예사로 사람들을 넘어뜨리고 혼란에 빠트린다.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시 14:4).
(2) 하지만 그들의 잔혹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파멸당했다. 다윗은 이르기를,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라고 했다. 왜냐하면, 사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구원받을 때에는 그 대적들은 대개 혼란에 빠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행하신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의 각별한 고충은 안팎의 대적들로부터 말미암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을 구원하실 때에는 대체로 혹은 항상 그 대적들을 혼란에 빠트리신다. 이는 심판 날에 가장 명백한 사실로 드러날 것이다. 즉, 사탄과 그의 영에 의해 이끌림을 받는 모든 자들 그리고 모든 악의에 찬 교회들은 자신을 위해 예비된 곳으로 보내질 것이며, 교회는 모든 종류의 대적들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워질 것이다. 교회가 가장 자유로울 때, 교회의 대적들은 가장 파멸에 가까워진다. 마치 천칭과도 같이, 한 편이 올라가면 다른 한 편은 내려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올리움을 받는 때는 곧 그 대적들이 낮춰지는 때이다. -리처드 십스.
2절. "나의 원수 된 행악자." 행악자는 경건한 자를 미워한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은 적대적이다(창 3:15). 이는 포도나무와 월계수 간에, 그리고 코끼리와 날도마뱀간에 반감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독수리들은 달콤한 냄새에 대해 반감을 느낀다. 행악자의 내면에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반감이 자리잡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는 은총의 감미로운 향기를 혐오한다. 성도들에게도 결함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행악자가 미워하는 것은 이러한 결함이 아니라 그들의 거룩성이다. 또한 이와 같은 증오로부터 노골적인 폭력이 비롯된다. 도둑은 빛을 미워하므로, 그것을 꺼버리려 할 것이다. -토머스 왓슨.
2절. "나의 대적, 나의 원수 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존 웨슬리의 기도 속에는 큰 지혜가 들어 있다. "주여, 만일 제가 꼭 싸움을 해야 한다면 부디 당신의 백성과는 싸우지 않게 해주소서." 우리가 선한 사람들을 미워하는 대적들과 마주칠 때, 최소한 우리에게는 다음과 같은 위로가 있다. 즉, 하나님은 그들의 편이 아니며, 따라서 대적은 본질적으로 연약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윌리엄 플러머.
3절.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 기자는 직면할 수 있는 위험 중 가장 심한 경우를 제시한다. 설령 군대가 나를 에워싼다고 해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장래를 대비하는 위대한 용기가 여기에 있다. 경험은 소망과 확신을 북돋운다. 다윗은 원래 그토록 용감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로와 도우심을 입은 예전의 경험으로 인해, 마치 불이 연기에서 피어오르듯 혹은 태양이 구름을 헤치고 나오듯 그의 믿음이 솟아올랐다. 비록 내가 이러저러한 혼란 가운데 빠져 있었지만,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신하고 또 경험하였으므로, 장래에 나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 권능을 보는 자의 눈에는 아래에 있는 다른 모든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따라서 여기서 그는, 장차 직면할 어떤 반대에 대해서도 염려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심지어 군대가 들이닥쳐도 그는 염려하지 않는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그는 하나님의 권능을 보았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께로부터 피조물에게로 시야를 돌려보라. 그가 누구신가? 미가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았을 때 어떠했던가? 일단 그가 하나님을 보았을 때, 그에게 아합이 무엇이었는가? 선지자 다윗이 일단 하나님을 보았을 때,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리처드 십스.
3절.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 만일 내가 나의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리고 내가 숭고한 마음으로 그분을 사랑한다면, 나의 모든 대적들이 나를 칠지라도 그들은 헛수고만 할 것이다. 나는 그들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온 세상이라도 나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사랑은 해악을 당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 누구에게도 해악을 끼치지 않기 때문이다. 대적들, 시기하는 자들, 중상자들, 그리고 핍박자들이여, 나는 너희를 무시한다. 만일 내가 사랑한다면, 나는 너희의 공격을 물리치고 승리할 것이다. 너희가 내 물건들을 빼앗을 수는 있다. 하지만 내게 관용어린 사랑이 있다면, 나는 항상 부요할 것이며, 너희가 내 사랑을 빼앗지는 못할 것이다. 나를 부요하게 만드는 것은 오직 그 사랑뿐이다. 너희가 내 명예를 모독하는 말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진심으로 말하자면, 나는 너희의 찬사와 갈채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듯이 너희의 비난과 모욕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나로서는 너무도 다행스럽게도, 너희가 하나님 앞에서 나를 비방하지는 못한다. 오직 그분의 평가만이 내게 너희의 모든 경멸을 보상해 준다. 너희는 내 몸을 핍박할 수 있지만, 나는 참회하는 마음으로 그 핍박을 오히려 즐겨 받을 것이다. 내 몸이 빨리 멸할수록, 나는 내게 짐이 되는 이 대적으로부터 더 빨리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너희가 내게 무슨 해악을 끼칠 수 있는가? 만일 내가 모든 고난을 다 당하기로 결심하고 있다면, 만일 내가 너희에게서 표출될 수 있는 모든 분노들을 감내하겠다고 생각한다면, 너희는 단지 나의 사랑을 더욱 숭고하게 할 것이며 나의 면류관을 더욱 빛나게 할 뿐이다. -장 밥티스트 엘리아스 아브리용.
3절. 기꺼이 하나님을 위한 전사들이 되고자 하는 자들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정복자 이상의 존재가 될 것이다. 진정으로 신앙적인 사람들만큼 진정 용감한 자들은 없다. 그리스도인이 살아 있다면, 그는 누구의 힘에 의해 서 있는지를 알고 있다. 또한 만일 그가 죽는다면, 그는 자신이 누구를 위해 쓰러지는지를 알고 있다. 하나님께 대한 확신이 전혀 없는 곳에는,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만남도 없을 것이다. 믿음의 바람이 돛을 가득 채우기를 그칠 때, 순종의 배는 항해를 그친다. 이스마엘의 빈정거림이 이삭으로 하여금 자신의 유업을 경시하게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윌리엄 세커.
3, 4절. 총신은 왕에게서 받는 갖가지 총애, 선물, 보석, 직무 등을 통해 크게 성장한다. 그리스도인은 마치 팔찌처럼 그리고 가장 값진 보석처럼 항상 간직하고 있는 경험들을 통해 부요하게 자란다. 그 중 하나는 '에벤에셀'-"이제껏 하나님이 도우셨다"-로 불리우며, 또 하나는 '납달리'-"내가 하나님과 더불어 씨름하여 이겼다"로 불리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게르솜'-"나는 외인(外人)이었다"-이라 불리우고, 또다른 하나는 '요셉'-"하나님이 아직 더하실 것이다"-으로, 그리고 다른 하나는 '브니엘'-"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다"-이라 각각 불리운다. 이들에 대해서는, 사무엘상 7:12; 창세기 30:8; 출애굽기 2:22; 창세기 3:24; 그리고 창세기 32:30 등을 참조하라. 나는 사자에게서 구원받았고, 그러므로 곰에게서도 구원받을 것이다. 사자와 곰에게서 구원받았은즉, 블레셋인들에게서도 구원될 것이다. 블레셋인들에게서 구원받았은즉 사울에게서 구원될 것이며, 사울에게서 구원받았은즉 하나님이 나를 모든 악한 행실로부터 구원하실 것이며, 나를 흠없는 모습으로 보존하사 그분의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존 셰필드(John Sheffield).
4절.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어떤 주해자들은 시인이 목표로 삼은 것과 관련하여 다양한 견해들을 피력한다. 따라서 나는 주로 일반적인 견해-이는 분명하게 표현된다-로 이해한다. 즉, 그는 하나님과의 친교와 교제를 시사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한 가지 일'이며,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이 이것을 소유했다면 그는 더이상 무엇을 바랄 필요가 없다. 우리 모두는 그것을 거듭 사모해야 하고, 거기 애착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또한 우리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성전 안에서 정해진 규례에 따라 그분을 앙망할 때, 그분과 더불어 교통과 친교 및 교제를 나누게 된다. 오 하나님, 우리에게 그것을 허락해 주소서! 그것은 너무도 감미로운 것이었던 까닭에, 시인의 유일한 바람이자 그의 소원 전체가 되었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행복이 완성되고 온전케 되는 곳인 천상의 장막에서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존 스토턴(?-1639).
4절.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다윗은 하나님께 단 한 가지 일만을 청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그가 더 큰 무엇을 청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의 집에 거하기를 바라는 것, 이것은 그 얼마나 초라한 청원인가? 무엇을 하고자 했던가? 단지 보고자 했을 뿐 아닌가? 무엇을 본다는 것인가? 단지 아름다움뿐 아닌가? 아름다움이란 흔히 시들어버리는 것이다. 기껏해야 사모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 사모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단지 소식을 듣는 것일 뿐이지 않은가? 소식이란 흔히 헛된 공상일 때가 많다. 다윗이 하나님께 그러한 청원을 드리게 되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하지만 내 영혼아, 그 청원 속에 무엇이 내포되어 있는지에 주목하라.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와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함께 고찰해 보라. 과연 이보다 더 큰 청원이 드려질 수 있겠는지, 만일 더 큰 청원이 있다면, 만일 있을 수가 있다면, 내게 말해주기 바란다. 그리고 이러한 청원을 그토록 진지하게 드리는 이유가 달리 있다면 내게 말해 주기 바란다. 비록 세상의 아름다움은 시들어버리지만, "여호와의 아름다움"은 세상이 사라질 때까지도 여전히 존속될 것이다. 또한 비록 소식을 사모하는 것이 헛된 공상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는 것은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길이다. "모든 것이 헛되다"는 사실을 거기서 깨달은 사람이 바로 솔로몬이다. 사실, 다윗이 바랐던 이 "한 가지 일"이란, 결국 복음서에서 그리스도께서 지적하신 필수적인 일에 해당한다. 여기서 다윗이 그것을 선택하였듯이, 거기서는 마리아가 그것을 선택했다. -리처드 베이커.
4절. "한 가지 일." 하늘을 향한 마음은 한 가지 소원에로 집중되며 더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는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오 여호와여, 당신 자신을 제게 허락해 주소서, 그리하면 저는 더 이상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겠나이다. 새 피조물은 하나님께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단지 하나님을 누리나이다. 오 여호와여, 제게 이를 허락하소서.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시바로 하여금 갖게 하소서. 나는 그 한 가지 진주, 곧 천상의 부요한 은혜를 사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나누어 주겠나이다. -제레미 테일러.
4절. "한 가지 일." 그러므로, 다윗이 선택한 첫번째 사항은 "한 가지 일"이라는 말 속에 요약되어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선택을 "한 가지만"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이 선지자의 말을 확증시키신 셈이다(눅 10:42). 그 이유는 다음 세 가지이다. 첫째, 그것은 흔한 것이 아니라 으뜸되는 덕목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보다 더 차원높은 덕목이 있다면, 그것은 으뜸되는 덕목이 아니다. 그리고 만일 그것과 동일한 수준의 덕목이 있다면, 그것 한 가지만 강조될 수 없다. 그 다음에, 그것은 우리가 영원히 누리기를 소원하는 궁극적 목적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 이상의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 여러 목적들 중 한 등급에 해당하는 것일 뿐이다. 다른 모든 목적들은 그것을 위해 이용되지만, 그것은 그 자체를 위해 추구된다. 따라서 그것은 단 하나여야 한다. 셋째, 그것은 모든 이성적인 정신들의 초점이 맞추어지는 중심이다. 한 원을 이루는 모든 선들이 중심과 연결되듯이, 행복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은 자신이 지향하는 유일한 대상인 이 으뜸되는 덕목에서 적절하게 만난다. 그러므로 그것은 단 하나여야 한다. -윌리엄 스트러더(True Happiness, or King David's Choice, 1633).
4절. "한 가지 일." 나는 일생을 살아오는 동안 변화들, 큰 변화들, 그리고 사별 등을 많이 경험했다. 나는 거듭하여 비워져 왔다. 하지만 한 가지 일은 결코 쇠하여지지 않았다-그 한 가지 일은 나로 하여금 내 인생이 단 하나를 위한 것임을 느끼도록 만든다. 그것은 나의 기쁨들을 가라앉혔고, 나의 슬픔들을 누그러뜨렸으며, 곤경에 처한 나를 인도했고, 또한 연약함 가운데 처한 나를 강하게 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신실하고 자애로우신 하나님의-임재이다. 그렇다. 형제들이여, 하나님의 임재는 빛일 뿐만 아니라 통일성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것을 믿는 이의 마음에, 또한 그것에 부합하려는 삶에 통일성을 제공한다. 다윗으로 하여금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한 것은 바로 그의 영혼 속에 임하신 하나님의 임재였다. 또한 바울로 하여금 "이 한 가지 일을 내가 행한다"고 말할 수 있게 한 것 역시 그의 영혼 속에 임하신 하나님의 임재였다. -조지 와그너(George Wagner, Wanderings of the Children of Israel, 1862).
4절. "한 가지 일."
마치 아론의 뱀이 나머지 뱀들을 삼켜버렸듯이,
가슴 속에 자리잡은 단 한 가지 지배적인 열정.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
4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기서, '거한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성전에 나아가며 지속적으로 그곳을 의지한다는 뜻임에 분명하다. 돌발적으로나 변덕스럽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거하는' 것이며, 지속적으로 거기 거주한다는 뜻이다. 바누엘의 딸 안나가 그렇게 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그녀는 무려 84년 동안이나 성전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리라(Lyra)는 안나가 항상 거기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종종 그곳을 찾았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비드(Bede)도 그와 같은 목적을 품고 있었다. 안나가 한 번도, 단 한 시간도 성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종종 성전을 찾았다는 의미이다. 누가는 우리 주님의 승천 광경을 목격한 제자들에 대해 말하면서 유사한 사실을 언급했다.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눅 24:52, 53). 성 어거스틴의 어머니 역시 하나님의 집에 '거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녀는 하루에 두 번씩 그토록 진지하게 그리고 정규적으로 그곳으로 향했다. 성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 하나님이시여, 당신의 성경을 통해 어머니에게 말씀하신 바를 어머니가 들을 수 있게 해주소서. 그리고 어머니가 기도를 통해 당신께 고하는 것을 들어주소서." 또한 성 어거스틴은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도 그와 같은 언급을 한 적이 있다. 그는 그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개미들'이라고 지칭했다. "하나님의 개미를 보라. 그는 매일 아침 일찍이 일어나 하나님의 교회로 달려가며, 거기서 기도하고 교훈을 들으며, 찬양하고, 들은 바를 곰곰이 반추하며, 그것을 묵상하며, 또한 광으로부터 가져온 귀한 곡식을 차곡차곡 쌓아둔다." -존 데이(John Day, David's Desire to go to Church, 1609).
4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이 시의 서두에서, 다윗은 자기 영혼에 대한 평가를 결산하면서 엄청난 수입과 지속적으로 하사받은 하나님의 관대하심과 은총과 자비라고 하는 보화들을 요약하였다. 그 요약한 내용 전체는 다음과 같다. 여호와는 나의 빛과 나의 생명이시요, 나의 힘과 나의 구원이시다. 그러므로 이제 다윗은 자신의 빛이 있는 곳이 아니면 거처를 삼지 않을 것이며, 자기에게 힘을 주는 대상에게만 자신의 인격을 의뢰할 것이다. 그리고 구원이 있는 곳에만 자신의 거처를 고정시킬 것이다. 그곳은 바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곳이며, 특히 거룩한 예배를 드리는 하나님의 성소이다. 그러므로 그가 다른 모든 것들 위에 이 "한 가지 일," 곧 "여호와의 집에 거하기"를 바라고 추구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로버트 모섬.
4절. "여호와의 집." 그것(성막, 성소)이 하나님의 집으로 불리우는 것은, 그가 거기 계시기 때문이다. 이는 사람이 자기 집에 있기를 기뻐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더욱이 그곳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자기 집에 있을 때 탄원자들이 그를 찾아와 발견하면 거기서 그가 자신의 내밀한 마음을 다 털어놓는 것과 같다. 사람은 자기 집에서 쉬고 누우며 또한 머무른다. 자기 집만큼 친숙한 곳이 어디 있는가? 그가 자기 집을 지키고 거기다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는 만큼 정성을 기울이는 곳이 달리 어디에 있겠는가? 또한 그는 자기 집 안에다 자신의 보물과 보석들을 쌓아둔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가시적 교회 안에다 은총과 위로라고 하는 자신의 모든 보물들을 쌓아두신다. 거기서 그는 우리와의 감미로운 만남을 허락하신다. 거기에는 서로간의 영적 입맞춤이 있다.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아 1:2). 흔히 말하듯이, 집이란 그 사람의 성이요, 그가 필요한 것을 공급하며 지키는 곳이다. 분명 하나님은 당신의 교회를 지키시며 그 필요한 것을 공급하실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교회, 말하자면, 성막(그때에는 그것이 교회였다)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지칭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이를 우리 시대에 적용한다면, 성막에 해당하는 것은 특정한 목회자들의 보살핌하에 있는 특정한 가시적 교회들이다. 구원의 방책이 거기 갖추어져 있다. 이제 특정한 가시적 교회들이 바로 하나님의 성막이다. 옛적에는 단지 한 교회, 한 장소, 곧 한 성막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특정한 성막들을 세우셨다. 특정한 교회 모두가, 한 목회자의 보살핌하에 있는 회중이, 그리고 그들의 모임이 바로 하나님의 교회이며, 각 교회는 독립적이다. -리처드 십스.
4절. "여호와의 아름다움."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가 바라는 단 한 가지였다. 그것은 장관들과 아름다운 것들로써 자기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사실 성막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눈에 많이 띠었다). 그렇지 않았다. 그는 그보다 훨씬 더 영적인 안목을 지녔다. 그는 영적인 것들의 내적이고 영적인 아름다움을 보았다. 다른 것들은 단지, 사도가 지칭한 바와 같이, 외적인 것들이었다. 나는 여호와의 집에 거하기를 바라며,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기를" 원한다. 특히 여호와의 내적인 아름다움을. -리처드 십스.
4절. "여호와의 아름다움." 이 말과 관련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의 마음을 끌며 또한 우리를 감동시켜 그분께 대한 사랑을 갖게 하기에 그리고 말하자면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따르게 하기에 적합하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노력할 것이다. 이 주제에 관한 논의는 세 가지 표제들로써 정리될 수 있다. (1)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몇 가지 요소들. (2) 여호와의 아름다움이 드러날 수 있는 곳. (3) 여호와의 아름다움이 지니는 특색들.
(1)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몇 가지 요소들. 그분의 아름다움은 영적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 구성 요소들을 영적 완전함 속에서 찾아야 한다. ① 그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요소들 중 하나는 거룩함이다. ② 하지만 우리의 사모하는 대상인 그 신성한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에 대한 전반적인 묘사 속에 포함되는 것들이다. 타락한 상태에 있는 우리 인생들은 이러한 요소에 대해 더욱 마음이 이끌리며 이들의 영향을 보다 쉽게 받는다. 죄인들이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적대감을 극복하는 것은, 그리고 성령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 퍼뜨리시는 것은, 주로 이러한 수단들을 통해서이다. ③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아름다움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라고 부를 수 있는 또다른 한 가지는, 그분의 여러 가지 속성들이 하나의 전체로서 결합되는 조화이다. 무지개의 색깔들은 하나씩 따로 보아도 아름답다. 그러나 무지개에는 단일한 색조로부터는 생기지 않는 아름다움이 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색조들이 차례로 하나씩 배열될 경우에는 생기지 않는 아름다움이 있다. 그것은 색조들의 집합 및 병치로 말미암는 아름다움이며, 혼합된 광채를 드러낸다. 여러 가지 완전한 속성들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성품 안에서 공존하며 결합하여 영광스러운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거룩성은 아름답다. 자비도 아름답고, 진리도 아름답다.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 더한 아름다움은, 시편 기자가 묘사한 바와 같은 배합과 조화를 통한 아름다움이다.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시 85:10). "오 여호와여, 당신의 자비가 하늘에 있고, 당신의 신실하심이 구름에까지 닿았나이다. 당신의 의는 마치 거대한 산들과 같고, 당신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나이다."
(2) 그 다음에 우리는 여호와의 아름다움이 드러날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것은 '자연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은혜의 보좌에 무지개와 같은 아름다움이 있듯이, 자연의 보좌에도, 비록 어떤 면에서 구름과 어두움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할지라도, 무지개의 아름다움이 있다. 여호와의 아름다움은 '도덕법'에서 엿볼 수 있다. 더욱이 율법 속에서도! 공정한 율법 안에서, 그 무서운 저주와 더불어, 그 아름다움과 온화함이 광채를 드러낸다. 율법은 사랑으로 가득하다. 율법의 의무들은 사랑의 의무들이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율법의 저주는 사랑의 존속을 위해 마련되고 사용된다. 율법에 대한 순종과 사랑의 지배는 동일한 상태의 서로 다른 측면들일 뿐이다. 율법이 시사하는 가장 숭고한 교훈들 중 하나는,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사실이다. 또한 여호와의 아름다움은 '복음' 안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율법 안에 반영시키는 방법으로 그것을 본다. 반면에 복음 안에서 우리는 그것을 직접 본다. 율법은 사람들의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바이다. 그런가 하면, 복음은 하나님 당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여호와의 아름다움은 '그리스도' 안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볼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바로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이자 그분의 인격을 나타내는 분명한 형상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셈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버지의 선물로 여길 때, 그리고 그분의 직무와 성품을 살펴볼 때 우리는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그분 안에서 보게 된다. 그리스도의 성품은 사람들이나 천사들이 주목하는 도덕적 아름다움 중 가장 멋진 것이다.
(3) 우리는 여호와의 아름다움이 지니는 몇 가지 특색들을 살펴봄으로써 결론을 맺고자 한다. ① 그것은 결코 속이지 않는다. ② 그것은 결코 쇠락하지 않는다. ③ 그것은 결코 그 힘을 잃지 않는다. ④ 그것은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다. -앤드류 그레이(Andrew Gray, Gospel Contrasts and Parallels를 요약함, 1805-1861).
4절. "여호와의 아름다움." 여호와의 집에서 볼 수 있는 그분의 아름다움은 그의 본질을 목도함에 따른 아름다움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보고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출 33:18, 20). 그 영광스러운 아름다움 앞에서는 천사들도 날개로 자기 얼굴을 가리운다(사 6:1, 2). 그것은 그분의 규례들에서 나타나는 아름다움이다. 그 규례들을 통해 하나님은 성령의 감화를 받아 밝아진 인간들의 마음의 눈에 그분의 선하심, 공의, 사랑 등과 같은 아름다움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비를 계시해 주신다. -토머스 피어슨(Thomas Pierson, 1570-1633).
4절. "여호와의 아름다움." "아름다움"은 성령의 충만하심 및 하나님의 유쾌하심과 기뻐하심을 나타내기에는 너무 세부적인 단어이다. 이 말을 여러분의 이해 범위 안에서 총체적인 의미로 취해 보라. 그것은 내적 감각과 외적 감각 모두의 대상일 수 있다. 기쁨은 유쾌함을 나타내는 가장 탁월한 표현이다. 사실 하나님은 자신의 규례들을 통해 영혼의 눈에 "아름다움"이 되실 뿐만 아니라 후각에는 향기가 되시며 미각에는 감미로움이 되시며 또한 영혼의 모든 힘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시며 감미로우시며······"여호와의 아름다움"은 특히 하나님께 속한 온화한 것들을 가리킨다. 즉, 그분의 자비와 사랑이 바로 그것이며, 이는 교회 안에 있는 다른 모든 것들을 아름답게 만든다. -리처드 십스.
4절.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더 많은 은혜를 지닐수록 여러분이 하나님의 규례들 안에서 해야 할 일은 더 많이 발견된다. 은혜가 적으면 할 일도 적고, 은혜가 많으면 할 일도 많다. 시인에게는 항상 하나님께 대해 할 일이, 특히 진지한 일이 있다.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내가 사모할 그 무엇이 있다. 나는 이러한 의무에 따라 무엇인가를 해야 하며, 그러므로 시간을 허비할 수가 없다. 인사차 친구 집을 방문하는 사람은 한담을 나누고 이리저리 거닐며 시간을 보내다가 집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사업차 가는 사람은 그것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마치 아브라함의 정직하고 신실한 종과 같다. "그 앞에 식물을 베푸니 그 사람이 가로되 내가 내 일을 진술하기 전에는 먹지 아니하겠나이다"(창 24: 33). 내게는 여호와께 대해 해야 할 큰 일이 있다. 즉, 교회에 관한 일, 내 영혼에 관한 일 등이다. 내가 내 일을 진술하기 전까지는, 혹은 나를 지으신 분에 의해 내게 맡겨진 일을 완수하기 전까지는, 먹지도 말하지도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며 또한 아무것도 진척시키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목적 때문에, 거의 항상 자기 영혼을 설복시키기란, 그리고 필요한 어떤 요청이나 하나님과 상의해야 하는 문제로 가득한 마음을 그분 앞에 털어놓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시 45:1). -리처드 스틸(Antidote against Distractions, 1673).
4절.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이는 다윗의 진지한 기도였다. 다윗이 사용한 말로써 기도하는 자들은 많지만, 다윗의 마음을 가진 자는 많지 않다. 지나간 때를 위하여 한 가지 일을 내가 청하였다. 장차 도래할 때를 위해서도 나는 여전히 이를 추구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오래도록 요청해 왔으며, 그것을 얻게 되기까지 줄곧 이러한 청원을 올릴 것이다. 이것은 무슨 청원인가? 내 생전의 모든 날동안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것과 내 자녀들에게 그곳을 물려주기 위한 청원이다. 거기서 그분을 헌신적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곳을 나 자신의 소유로 삼고자 하는 청원을 올리는 자들도 있다. 이들도 하나님의 집을 나름대로 매우 사랑한다. 그들은 소유하기 위해 그리고 손에 넣기 위해 그것을 사랑한다. 하지만 양도 증서를 작성하는 자는 목회자가 아니라 변호사이므로, 그들의 권리 증서는 결국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다. 설령 그들을 제지할 배심 재판이 한번도 실시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주적인 결산이 이루어지는 그 위대한 날에 온 세상의 재판관께서 그들을 정죄하실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더욱 교회에 가까이 갈수록 하나님께로부터는 더욱 멀어진다. 여호와의 전은 우리를 그분께로 이끌기 위해 마련된 것이지, 우리로 하여금 그분에게서 그것을 취하도록 마련된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여호와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의 집에 거하기를, 그리고 그의 영예가 깃든 곳에 거하기를 사랑할 것이다." 또한 아래에 있는 그의 성전을 겸손히 자주 드나듦으로써, 우리는 위에 있는 그의 집에 속한,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나라에 속한 고귀한 성도들이 될 수 있다. -토머스 애덤즈.
4절.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이처럼 안전한 상태에 처해 있는 다윗이, 이제 무엇을 자신의 주된 전망으로 여기고 바라보는가? 로마군과 모든 대적들을 정복하고서 한가롭게 앉아 즐기려 한다고 언젠가 철학자 시네아스에게 말했던 에피루스의 왕 피로스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훗날 안나의 경우와 같이(눅 2장), 날마다 하나님의 집으로 가서 안식하는 가운데 영속적인 경건을 함양시키는 것이 바로 그의 주된 관심사였다. 그리고 이는, 첫째로, 성소의 아름다움을 봄으로써 자기 영혼의 위안을 삼기 위해서였다. 둘째로, 그가 여전히 올바로 그리고 안전하게 인도함을 받기 위해서였다. 셋째로, 그가 왕으로서 더욱 높은 영광을 얻기 위해서였다. 넷째로, 이 모든 사실에 대한 이유를 충분히 지니고 있었던 까닭에, 그는 헌신적인 찬양의 시편들을 쉬지 않고 하나님께 바쳤다. 5, 6절을 보라. -존 메이어.
4절. 오 나의 영혼이여, 하나님의 집에서 어떤 광경을 보았던가! 무엇을 맛보았던가! 어떤 위안을 받았던가! 거기서 기도 응답을 얼마나 많이 체험했던가! 그의 말씀으로 인해 그 얼마나 큰 감명을 받았으며, 때로 그가 나를 잔치석상으로 인도하셨을 때 그의 상에서 받은 위안이 얼마만큼인가! 또한 그가 사랑의 깃발을 내 위로 세우셨도다! 설령 내가 다른 어떤 이들만큼 많은 은택을 누릴 수 없다고 할지라도, 나는 내가 찾은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억할 수밖에 없으며, 더욱 많은 것을 사모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집에' 있었던 까닭에 나는 여전히 거기 거하기를 바란다. -다니엘 윌콕스(Daniel Wilcox, 1676-1733).
5절. "환난 날에." 비록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항상 환난으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영을 은혜로 채우심으로써 환난으로 인한 해악과 절망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하신다. 말하자면, 그는 환난을 통해 구원하신다. 왜냐하면 그가 환난을 이용하여 영혼들을 치유하시며, 덜한 환난들을 통해 더 심한 환난들로부터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영국 박물관에 있는 한 인쇄물(London:for D.M., 1678).
5절. "나를 숨기시며." 여기 사용된 단어는 숨기며, 은밀하게 감추고, 그리하여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억압으로부터 혹은 어떤 임박한 재난으로부터 도피한 자에 대해, 그리고 어느 집이나 동굴 안에 숨겨져야 하는 자에 대해 적절하게 적용될 것이다. 거기 숨는 자는 쫓는 자들이나 위협적인 재난으로부터 안전해질 것이다. -알버트 반스.
5절. "초막"은 나비를 뜻하는 '파필리오'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는 천막을 가리키며 장대로 고정시켜 펼친다. 그것은 형태상 어느 정도 나비를 닮았다. -아담 클라크.
5절.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시인은 범죄자들과 관련된 고대의 관습을 암시한다. 그들은 성막이나 제단으로 도피하곤 했으며, 거기로 피하면 안전하다고 생각했다(왕상 2:28). -매튜 풀.
5절. "그 초막 속에 비밀히." 만일 달리 피할 장소가 전혀 없다면, 그는 나를 '지성소' 안으로 이끄실 것이며, 그리하면 대적이 감히 내게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아담 클라크.
6절.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두른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머리가 물 위로 나와 있는 한 익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어떤 위험에 처했을 때 소망이 하는 역할이 바로 이러하다.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왔느니라"(눅 21:28). 사람들은 이를 괴이한 때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머리를 들라고 권고하시는 때이며, 다른 사람들이 두려움으로 인하여 그리고 세상에 임할 일들을 생각함으로 말미암아 기절하는 것을 그들이 볼 것이기 때문이다(26절). 하지만 지금은 그들의 태양이 떠오르는 반면 다른 사람들의 태양은 지는 때이며, 어둠의 흑암이 다른 이들을 사로잡는 때이다. 왜냐하면 이제는 그리스도인의 축제가 도래하고 있으며, 그들은 오래도록 그것을 갈망해 왔기 때문이다. "네 구원이 가까웠다." 머리를 떨구게 하는 두 가지는, 두려움과 수치이다. 소망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서 이 둘을 사라지게 하며, 그로 하여금 낙심한 표정을 짓지 못하게 한다. -윌리엄 거놀.
6절. "내가 그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분명, 그는 성전 지경을 벗어난 곳에서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다. 한 망명자로서 그가 어디를 방황하고 있든지 간에, 그는 하나님의 귀한 약속을 늘 지니고 다녔으며, 따라서 외형적인 건물에다 그다지 큰 가치를 부여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어떤 위대한 상상 따위를 통해, 하나님이 숲이나 바위로 둘러싸인 곳에 계실 수도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러나 만일 이 구절을 보다 주의깊게 살펴보면, 우리는 그가 목표로 삼은 것이 단지 근사한 건물과 그 장식물들-그것이 아무리 값비싼 것이라고 하더라도-을 보는 것이 아니었음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사실 그가 성전에 대해 말하고는 있지만, 그가 염두에 둔 아름다움은 눈에 보이는 근사함이라기보다는, 모세에게 계시된 바와 같은 거룩한 식양에서 발견되는 것이었다.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식양대로 할지니라"(출 25:40). 성전 식양은 인간의 지혜에 따라 고안된 것이 아니라 신령한 것들의 이미지였으므로, 선지자는 자신의 눈과 모든 관심을 거기다 고정시켰다. 그러므로 이곳을 그림이나 형상들 중심으로 왜곡시키는 자들의 광기는 참으로 혐오스럽다. 그렇게 하여 왜곡된 것들은 성전 장식물들에 포함될 가치가 있기는커녕, 오히려 똥이나 오물과 같은 것으로서 성물들의 모든 순수함을 더럽힐 뿐이다. -존 칼빈.
8절.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앞 절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대한 기도를 시작하고 있다. "여호와여 내가 소리로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본절은 그 기도의 바탕이 된다. 하나님은,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시인의 마음은,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라고 응답한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께 기도할 용기를 얻는다.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명령과 다윗의 순종이 내포되어 있다. 하나님의 보증과 이에 대한 다윗의 적절한 노력, 음성과 그 메아리 등이 나타난다. "내 얼굴을 찾으라"는 음성은, 은혜받은 심령에 의해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라고 다시 반향을 일으킨다. "하실 때에"는 원문에 나오지 않는 표현이다. 이것은 단지 의미 연결을 도와준다. 열정적인 연설은 대개 돌발적이다. "내 얼굴을 찾으라"는 말 다음에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가 곧장 이어진다. 하나님은 자신을 기꺼이 알리신다. 그는 기꺼이 자신을 공개하고 드러내신다. 하나님은 자신을 숨기기를 기뻐하지 않으신다. 어떤 황제들이 자신에 대한 존경심을 경감시키지 않으려고 위엄스러운 장식을 하는 것과는 달리,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니시며,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유심히 살필 수 있게 하신다. 우리는 사람에게서 어떤 결함이 발견되더라도, 곧장 파고들어 그의 훌륭한 점을 찾아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말하자면, 모든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그분을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분을 더욱 경모하게 될 것이다. 그분에 대해 많은 것을 아는 복된 천사들이 그리고 그분과 교제를 나누는 복된 영혼들이 그분을 가장 경모한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을 감추지 않으신다. 말하자면, 그는 알려진 바 되기를 바라신다. 그리고 그의 영을 소유한 모든 이들은 그분을 두루 알리기를 소원한다. 하나님의 뜻, 그가 인간을 위해 행하신 일, 그리고 그가 인간에게 요청하시는 것 등과 관련하여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감추는 자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의 원수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공개성을 은폐시키고자 하는데, 이는 "내 얼굴을 찾으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정면으로 위배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알려지기를 원하시며, 자신을 우리에게 밝히 드러내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 수 있는 바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이 어두운 상태에 처해 있을 때에는 자신에게 비취는 하나님의 빛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에, 마치 하나님이 자신을 숨기기를 원하시는 분인 것처럼 하나님께 비난을 돌려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기를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는 당신의 가련한 피조물들에게 낯선 분이 되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분의 방침이 아니다. 그분은 너무도 위대하시므로 그렇듯 가련한 존재들을 속이지 않으신다. 결함은 모두 우리 안에 있다. 우리는 그처럼 위대한 존재 앞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한다. 우리에게는 겸손과 준비가 결여되어 있다. 만일 어떤 사람 속에 어두움이 있어서 그가 느끼기를 하나님이 예전처럼 자신에게 빛을 비추지 않으시는 것 같다면, 분명 그 원인은 자신 안에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내 얼굴을 찾으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계시하기를 원하신다. -리처드 십스.
8절.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성령의 모든 감화들은 시의적절하며, 따라서 연기될 수 없다. 왜냐하면 지연이란 일종의 거부이며 너무도 배은망덕한 경멸의 기미를 띤 것으로서 그분의 혐오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응답을 기대하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부르심에 대해 곧장 그렇게 응답하기를 기대하신다. 그가 바람을 보내실 때마다, 그는 우리가 자신의 돛을 펼치기를 바라신다. 만일 우리가 그분에 의해 제공된 도움을 거절한다면, 우리는 정작 그것을 필요로 할 때 안타깝게 갈급해 할 수 있다. 이는 마치 신부가 신랑으로 하여금 너무도 오래도록 그녀의 마음 문을 두드리며 서 있게 한 까닭에 그리고 아직도 마음 문을 열기를 지체하면서 헛되고 사소한 핑계로써 애정어린 인내를 드러내는 신랑을 지치게 한 까닭에, 신랑(그리스도)이 그녀에게서 떠나버린 것과 같다(아 5:2). 하지만 그분이 주지시키시는 의무를 우리가 곧장 이행해야 하듯이, 우리는 그의 도우심이 함께하는 의무 이행에 싫증을 냄으로써 그분의 영향력을 제지해서는 안 된다. 만일 우리가 그 각별하신 도움을 너무 오랫동안 방치한다면, 이는 그분으로 하여금 떠나가시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티모시 크루소.
8절.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할 수 있기 전에 반드시 그분이 우리와 함께해 주셔야 함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수 있기 전에, 그가 우리를 찾으셔야 한다. 우리가 특정한 이유로 인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기 전에, 우리가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기를 하나님이 먼저 원하셔야 한다. 여호와께서 '내 얼굴을 찾으라'고 말씀하시고 나서야, 내 마음이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라고 말하게 된다. -토머스 호턴.
8절. "하실 때에." 하나님은 '너희는 이 일을 해야 한다'고 인간의 양심에다 의무를 부여하심으로써 기도할 것을 말씀하신다. 뿐만 아니라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처음에 그가 세상을 창조하면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을 때 빛이 있었던 것과 같은 식이기도 하다. 기도하라는 그의 말씀이 떨어지자 기도가 나오게 된다. 즉, 그가 어떤 사람에게 은총과 탄원의 마음을, 기도하려는 심령을 부어주시는 것이다. 그가 동기를 불어넣으시며, 하나님께 대한 간청과 호소를 생각나게 하신다. 여러분이 얻게 될 모든 것이 쉽게 그리고 저절로 임한다. 그 감화력이 뜨거워지고 확대됨과 더불어 그리고 우물쭈물하고 감상에 사로잡히고 불안해 하는 심령을 제쳐두고서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하고 이러한 감동과 착상을 기도로 화하게 함으로써, 여러분은 그것들을 정리하여 기도로서 표현하게 된다. 하나님은 이를 우리 마음속에다 대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때를 주시하며, 그때를 무시하지 말라. 쇠가 달구어져 있는 동안 두들겨라.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라. 그때는 그 시점에 직면된 일을 하기 위한 특별한 기회이며, 그와 같은 기회는 두 번 다시 얻을 수 없다. 법정에서 탄원자들은 적절한 때, 곧 왕의 기분이 좋아서 간청하기에 적합한 때를 엿본다. 분명 그들은 그러한 때를 잘 이용할 수가 있다. 왕 자신이 그들의 일과 관련된 말을 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특히 좋은 기회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라는 시편 10:17 말씀을 혹자는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그분이 우리 마음을 기도하기에 적합한 구조로 만드신다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이 간구 내용을 적으신다는 것은 우리의 간구를 들으심을 나타내는 위대한 표시임에 분명하다. -토머스 굿윈.
8절. "하실 때에." 이는, 단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찾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며 그러한 마음을 강화시키곤 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가 우리로 자신을 찾게끔 하신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말로 이해될 수도 있다.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시 10:17).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3). 만일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외적으로뿐만 아니라 내적으로 이르기를 "내 얼굴을 찾으라"고 하신다면, 의를 말하시는 분이 그들에게 그렇게 말하고서 그들의 기도를 좌절시키거나 그리하여 그들로 그분의 얼굴을 헛되이 찾은 셈이 되게 하실 수는 없다. 그분이 자신의 말씀에 대한 논거로 삼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야곱 자신에게 너희가 나를 헛되이 찾으라 이르지 아니하였노라 나 여호와는 의를 말하고 정직을 고하느니라"(사 45:19). 만일 아하수에로가 자기 왕후더러 소원이 무엇이냐고 말했다면, 그는 그녀의 간구를 분명 들어줄 것이었다(에 7:2). 여기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소경더러 당신께 와서 자신의 불평거리를 고하라고 부르셨을 때, 사람들이 그에게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고 말한 것과 같다(막 10:49). 본문의 경우도 그러하다. -토머스 코벳.
8절.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마음은 하나님과 우리의 순종 사이에서, 대사(大使) 역할을 한다. 마음은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실 것인지를 하나님께로부터 파악하며, 그러고 나서 자신에게 명령을 내린다. 인간의 마음과 양심은 부분적으로는 신성하고 또 부분적으로는 인간적이다. 마음속에는 어느 정도 신성이 깃들어 있으며, 그 사람이 거룩한 자일 경우에는 특히 그러하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마음도 말한다. 하나님은 마음에게 말씀하시고, 마음은 우리에게 말한다. 때로는 우리가 자신에게 말하는 양심의 소리를 들을 때 그것을 무시한다. 그리고 성 어거스틴이 자신에 대해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이 종종 내게 말씀하시지만 나는 종종 그 말씀을 무시한다." 마음의 직접적인 생각에 따라 나오는 말 가운데 아무런 명령도 내포되어 있지 않을 때(사실 불경건하고 부주의한 사람들의 집에는 성경이 거의 없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명령을 내리기도 하신다. 양심은 그들에게 지켜지지 않는 명령을 내리며, 그들은 자신의 뜻에 반대되는 명령을 듣는다. 그들은 거기에 주의하지 않지만, 다윗은 달랐다. 하나님이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의 마음은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라고 대답했다. 마음은 하나님을 우러러보고서 스스로에게 이르기를 "내 마음이 말했다"고 한다. 그것은 당신에게 말했으며, 그러고 나서 마음 자신에게 말했다. 먼저, 그의 마음은 하나님께 "여호와여, 내가 주께로부터 용기를 얻었나이다. 주께서는 내가 주의 얼굴을 찾아야 한다고 명하셨습니다"고 말했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서,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그것은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러고 나서 그 자신으로부터 말미암는 모든 것에로 시야를 돌린다. -리처드 십스.
8절.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하나님의 명령 혹은 초대에 대한 다윗의 이러한 응답과 순종 가운데에는 고려할 만한 여러 가지 사항들이 내포되어 있다. 첫째로, 그것은 시의적절했고 적절한 때에 맞춘 것이었다. 다윗은 곧바로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나님의 초청이라고 하는 첫번째 기회에 곧바로 응하는 것, 이것은 지혜롭고 신중한 모든 그리스도인의 특성이자 성향이다. 둘째로, 이 대답은 시의적절하고 즉각적일 뿐만 아니라 온전하고 완벽한 것이었다. 명령 이행이 그 명령과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세상에는,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라고 명하실 때 꼭 정반대로 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혹은 적어도, 그들은 응당 해야 하는 만큼의 일을 하지 않고 절반 정도만 하고 만다. 하지만,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한 순종으로 응했다. 하나님이 "내 얼굴을 찾으라"고 말씀하시자, 그는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라고 대답했다. 셋째로, 그것은 실제적이고 전폭적이며 또한 신실했다.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입으로 말하는 것과 마음으로 말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사실이다. 입으로 하는 말은 쉽고 평범하며, 전혀 특별하지가 않다. 여호와여, 우리가 주의 얼굴을 찾되, 우리에게 흔히 닥치는 곤경과 재난의 때에 특히 그리하겠나이다. 하지만 이 말을 마음으로 하는 경우는 그다지 흔치 않다. 넷째로, 그것은 확정적이며 단호했다.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나를 방해하거나 제지할 것은 전혀 없다. 나는 어떠한 반대에 직면하더라도 그렇게 할 것이다. 끝으로, 다윗의 이러한 확언은 절대적이고 무기한적이며 또한 무제한적이었다.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때나 장소 혹은 상황이 명시되지 않았다. 지금뿐만 아니라 향후로도, 잠시가 아니라 영원토록, 모든 시기에, 모든 상황 중에, 나는 주님과의 교제를 굳게 유지할 것이다.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의 견해나 방식에 의해 변하거나 물러서거나 거기 의존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토머스 호턴의 글에서 요약됨.
8절.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하나님은 은혜를 약속하셨으며, 따라서 그분의 백성은 그 은혜를 추구할 수 있다. 아니,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그 은혜를 찾으라고 명하셨고, 따라서 그들은 그것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제공되는 상황에서, 우리와 하나님간에 존재하는 영적 관계와 은총을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아들됨과 백성됨을 포기하는 것은 경솔한 어리석음이다. 그것은 은혜를 얻는 방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과의 자녀 관계를 포기할 때 우리는 은혜에 대한 기대로부터 스스로를 배제시키는 셈이기 때문이다. 가장 지혜롭고 확실한 방법은 하나님의 자애로우신 안색을 회복시키는 것이며, 자신의 불신을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쫓겨나는 것이 아니다. -오바댜 세지윅(The Doubting Believer, 1653).
9절.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오 하나님, 제가 주의 얼굴을 찾을 때,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만일 그것을 발견할 수 없다면 내가 무슨 목적으로 그것을 찾겠나이까? 또한 만일 주께서 감추고자 하신다면 그것을 찾을 소망이 어디 있겠나이까? -리처드 베이커.
9절.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하나님은 선한 체하는 많은 사람들을 노하여 버리시지만, 자신의 악함을 자백하는 자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존 트랩.
9절. "주의 종." 하나님의 진정한 "종"이 되는 것은 복되고 행복한 일이다. 시바 여왕이 솔로몬의 종들에 대해 했던 말을 생각해 보라. "복되도다 당신의 이 신복들이여"(왕상 10:8).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솔로몬보다 더 위대하시며(마 12:42), 더 좋은 주님이시다. "자기 주인을 시종하는 자는 영화를 얻느니라"(잠 27:18)와 "슬기로운 종은 주인의······아들들 중에서 유업을 나눠 얻으리라"(잠 17:2)는 말씀처럼, 세상의 선한 주인들은 선한 종들을 영예롭게 할 것이다. 반면에 세상의 어떤 주인들은 나발이나 라반과 같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실 것이다.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요 12:26).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눅 12:37). 주의깊은 종들은 복되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 23)라는 말씀처럼, 주의깊은 종들의 주인은 그들로 상에 앉아 고기를 먹게 하고 나아와 그들을 보살펴 줄 것이다. -토머스 피어슨.
9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나를 버리지 말고." 하나님이 한번 자비를 보여주시면 그것은 또다른 자비를 약속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미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풀었으니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말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자비를 베푸신 까닭에 더욱 많은 자비를 베풀고자 하신다. 택하심을 통해 보여주신 그분의 자비는 의롭게 하고, 양자로 받아들이시며, 또한 영화롭게 하시는 것이다. -토머스 왓슨.
9절.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나를 떠나지 마옵소서" 혹은 "나를 붙잡은 주의 손을 놓지 마소서"라는 번역이, '어떤 것을 풀어놓다', '그것을 가게 하다,' 혹은 '그것을 포기하다'는 뜻인 히브리어 동사 "나타쉬"(vfn)의 의미에 더욱 가깝다. -사무엘 호슬리.
10절.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시인의 부모가 그를 "유기했었다"고 보는 데에는 어떤 어려움이 있으므로, (뮈<Muis>가 짐작하는 바와 같이) 아마도 그들이 그를 "저버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들은 그를 마치 죽은 사람처럼 여겨 뒷전으로 방치했다는 것이다. -제임스 메리크(James Merrick, 1720-1769).
10절.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이는 사실 모든 짐승들의 특성이다. 비록 짐승들이 새끼들에게 그토록 자상하지만, 새끼들의 나이와 힘이 자라면, 그들 스스로 살아가도록 내버려둔다. 자상하기 그지없는 인간 부모 역시 이와 같은 성향을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자녀가 어릴 때에는 그들이 손을 잡고 다니지만, 그들이 성장하면 그 부모는 그들 스스로 걸어가도록 놓아둔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어쩌다가 넘어지면 가급적 그들 스스로 일어나게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때까지도 당신의 자녀를 일으켜 주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그들이 무엇으로 지음받았는지를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이 약할 때와 마찬가지로 강할 때에도 도움을 받아야 함을 알고 계신다. 또한 그는 그들이 넘어질 때 일으켜 세워야 할 뿐만 아니라 서 있을 때에도 붙들어 주어야 함을 알고 계신다. -리처드 베이커.
10절. "부모." 먼저, 그들은 누구인가? (1) 우리를 잉태하여 낳아주신 혈육의 부모를 가리킨다고 봄이 적절하다. 우리를 존재케 하고 양육시킨 분이 바로 (하나님 아래에) 그들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들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는 다른 모든 친척, 이웃, 친구, 친지 혹은 보다 일반적으로는 세상의 모든 위로와 의지의 대상 그리고 도움 등까지를 포함하여 지칭하는 대유법적 표현이다. (2) 하지만 그렇다면, 부모가 가장 먼저 언급되고 나머지가 그러한 언급 속에 내포된 것으로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우리가 다른 누구 혹은 그 무엇으로부터보다도 그들로부터 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누구보다 그들과 더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들에 대해 더 큰 관심을 갖고 있다. 또한 가장 우리를 저버리지 않을 사람이 다른 모든 이들 중 바로 그들이다. 야수들도 자기 새끼를 내버리지 않는다. 암탉은 자기 병아리들을 내다버리지 않으며, 곰은 자기 새끼들을 빼앗기는 것을 보고만 있지 않는다. (3) 그렇다면, 부모 둘 다를 언급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 중 일부는, 설령 그들 둘 중 한 사람이 냉혹하다고 할지라도 두 사람 모두가 자기 자녀를 버리리라고는 거의 생각할 수 없겠기 때문이다. 또한 그 이유 중 일부는, 부성애란 대체로 보다 신중하며 모성애는 보다 자상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풍부한 사랑을 더 잘 표현하는 것은 이 둘 각자가 아니라 둘이 함께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한하게 배려해 주시며, 가장 신중한 아버지의 보살핌이나 가장 자상한 어머니의 애정 그 이상의 사랑을 베푸신다. (4) 그렇다면, 그들이 우리를 저버렸다고 말할 수 있는 때는 언제인가? 그들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도움을 주지 않고 내버려두는 것은 언제 어느 때인가? 그들이 우리를 도우려고만 하면 도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고 싶어하지 않는가(의도적인 선택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할 수만 있다면 우리를 도우기를 원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인가(불가피한 것인가)? -로버트 샌더슨.
10절.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실제적인 사실을 말해 보자. 이는 단지 말뿐인가? 아니면 이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어떤 실제적인 사실이 있는가? 분명히 말하건대, 있다. 문자 그대로에 해당하는 사실들이 있다. 이스마엘의 어머니가, 광야에서 아들의 생명에 대해 절망감에 사로잡힌 나머지 숨을 헐떡거리는 그를 내버려두었을 때(그 상황에 도움이 될 일을 그녀는 전혀 알지 못했고 행할 수도 없었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영접해 주셨다. 여호와께서는 새 샘물이 터지게 하시고 하갈의 눈을 열어 그것을 보게 하셨으며, 그래서 그 아이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창 21장). 또한 모세의 부모가 (더 이상 모세 곁에 있을 수 없어) 그를 무성한 갈대숲에다 내버려두었을 때에도, 여호와께서 그를 영접해 주셨다. 그분이 그에게 애굽 왕의 딸을 구원자로 보내셨으며, 그 아이의 어머니로 하여금 유모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주셨다. 그리하여 그 또한 살아남게 되었다(출 2:6-9). 신구약성경으로부터 각각 하나씩 두 가지 실례만 더 들어보자. 다윗과 바울은 둘 다 사람들에게서 버림을 받았으되 하나님의 영접을 받았다. 다윗이 어떻게 버림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시편 142:4에 언급되어 있다. 즉, 그는 오른편을 보아도 자신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음을 알았다. 달아날 곳도 없었고, 그의 영혼을 돌보아줄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비록 그가 처음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그 동안 줄곧 여호와께서 오른편에서 그를 영접할 준비를 하고 계셨다. 그러므로 4절에 바로 이어 5절에서는,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생존 세계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라는 고백이 나온다. 그리고 바울이 어떻게 버림을 당했는지에 대해서는 디모데후서 4:16을 통해 알 수 있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 어려운 때에 아무도 그의 편에 서려고 하는 자가 없어 더욱 어려웠다. 하지만 다음 절에서 그는,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이라고 고백했다. 더 이상 무슨 증거들이 필요하겠는가? 그 두 증인들의 입을 통해 그 점이 충분히 확인되었다. 한편 당신은, 이 두 증인들이 그 상황에 직면하기 전에 이미 깨달은 바를 입증했을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본문에서 그것을 장래에 일어날 일로 선언하되 확신 있게 선언한다.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시편 140편에서도 그는,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당하는 자를 신원하시며 궁핍한 자에게 공의를 베푸시리이다"(시 140:12)라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확신에 대한 어떤 근거가 있는가? 분명히 있다. 이중의 근거가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성품' 속에 있고 또다른 하나는 그의 '약속' 가운데 있다. 그분의 성품 속에는 네 가지 특질들이 있다(이는 말하자면 우리 자신의 낮은 이해력에 맞춘 표현이다. 왜냐하면 정확히 말해서 신성 안에는 '특질'이라고 표현할 것이 없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특질 혹은 속성이라 부르거나 혹은 당신이 원하는 다른 표현으로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하나님께는 네 가지 완전성이 있으며, 이는 우리의 혈육상의 부모들에게 있는 결함들과 반대된다(우리 부모들이 종종 우리를 저버리는 주된 이유들은 바로 그러한 결함 때문이다). 이 사실은 다른 모든 조력자들이 우리를 저버릴 때 그분만큼은 우리를 영접하실 것임을 충분히 확신케 해준다. 그 특질들이란 그분의 '사랑', '지혜', '권능', '영원성' 등이며, 이들은 모두 그의 성품 속에 내포되어 있다. 이 네 가지에다 그분의 '약속'이 더해지면, 당신은 기대 가능한 모든 확신을 충분히 얻게 된다. -로버트 샌더슨.
10절.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히브리어 동사는 '나를 모으실 것이다'는 뜻이다. 이는 나를 그분의 보살핌과 보호 가운데로 이끄심을 나타낸다. 민법에는 떠돌이들과 무의탁자들을 위한 규정이 들어 있다. 그들을 돌보기 위한 병원들과 그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고 위안하기 위한 특별 구역들도 있다. 분명, 버림받은 자들과 고아들은 하나님 안에서 은총을 발견한다. -존 트랩.
11절. "여호와여 주의 길로 나를 가르치시고." 버림받아 유기되었다가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진 유아에다 자신을 비유하고 나서, 이내 그는 어떻게 행할 것인지를 보여달라고 간구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거룩한 모든 계명들을 지킬 수 있도록 은혜를 간구한다. 150편에 달하는 시편 전체를 통해 시인은 줄곧 그 은혜에다 초점을 맞춘다. 그가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었겠는가?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 품은 유일한 소원이자 바람이 바로 천상에 있는 하나님의 집에 이르는 것이라고 선언한 바 있으며, 거기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 바로 그 은혜였다. -로베르토 벨라르미노(추기경, 1542-1621).
11절. "내 원수를 인하여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 만일 어떤 사람이, 왕의 대로로 여행하는 중에, 낮 동안에 약탈을 당했다면, 그 사건이 발생한 곳을 관할하는 관청을 통해 보상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만일 그가 밤에 여행하는 중에 사고를 당했다면, 그 스스로가 위험을 무릅쓴 까닭에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길'로 행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보호를 확신할 것이지만, 만일 그가 그 길에서 벗어난다면 스스로를 위험 가운데 노출시키는 셈이 된다. -로버트 스키너(Robert Skinner, 1636).
11절. "내 원수를 인하여." 만일 어떤 사람이 일단 신앙고백을 시작하면, 모든 눈들이 그에게로 집중된다. 그가 세상 '안에' 살면서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것을 고백하는 까닭에,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도 당연하다. 신자들은 입술로써 정죄하는 자들을 자신의 삶으로서 도리어 정죄한다. 의로운 다윗은 그의 실수를 틈타 승리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따라서 그들이 더욱 기회를 엿볼수록 그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여호와여 주의 길로 나를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인하여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 "내 원수를 인하여"는 "나를 엿보는 자들을 인하여"로 번역될 수 있다. 만일 그리스도인인 당신이 노골적으로 방탕한 짓을 저지른다면, 악인은 신중한 셈과 야벳처럼 뒷걸음질로 나아와 당신의 수치를 가리워주는 것이 아니라 저주받은 함처럼 정면으로 다가와서 그 수치를 공표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당신의 연약함을 이용하여 자신의 사악함을 위한 핑계거리로 삼는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무자비하게 비난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약점을 전혀 동정하지 않는다. 반면에 하나님은 그들을 보다 공정한 저울로 다시고,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말씀하신다. 성도가 하나님의 눈에는 '비둘기'로 보이지만, 죄인들에 의해서는 단지 '까마귀'로 평가될 뿐이다. -윌리엄 세커.
13절. "나는 낙심했을 것이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없는 표현으로서, "만일 내가······믿지 않았다면, 나는 낙심했을 것이다"는 뜻임-역자 주.) 하나님의 충족성, 권능, 선하심, 그리고 불변하심 등에 관해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1) 하나님의 충족성. 당신이 그분을 위해 잃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충시켜 줄 만한 충만함이 그분 안에 있지 않은가! 당신이 그분을 위해 당할 수 있는 모든 아픔들을 씻어줄 수 있는 회복제가 그분 안에 있지 아니한가! 그 얼마나 충만한가! 설령 이 세상에서 당신에게 남겨진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당신에게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차라리 모든 바닷물이 숟가락 하나를 채울 수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 더 낫다. 왜냐하면 바다를 덮고 있는 물 전체가 무한하고 무진장한 그분의 충족성에 비하면 한 숟가락 정도밖에 되지 않겠기 때문이다. 그분 안에 있는 회복제는 또 어떠한가! 하나님의 감미로운 은혜가 한 방울만 떨어져도, 지극히 잔혹한 죽음의 고뇌에 처한 자로 하여금 "사망의 쓰라림이 사라졌다"는 즐거운 탄성을 지르게 하기에 족하다. 그러나 그분 안에 있는 은혜는 몇 방울이 아니라 강처럼 흐른다. 미약하게 뿌려지는 것이 아니라 무한정 충만한 것이다. (2) 하나님의 권능을 주의깊게 보라. 십자가 아래에서 당하는 고통을 그것이 어떻게 극복하게 해줄 수 있는지, 그것이 십자가에 달린 당신을 위해 무엇을 그치게 해줄 수 있는 지 눈여겨 보라. 그토록 예리하고 고통스러운 십자가도 없지만, 그분은 그것을 유쾌하고 편안하게 만드실 수 있다. 그토록 무겁고 견디기 힘든 십자가도 없지만, 그분은 그것을 가볍고 편안하게 만드실 수 있다. 그토록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십자가도 없지만, 그분은 그것을 당신의 영광으로 변화시키실 수 있다. 그처럼 당신을 옥죄는 십자가도 없지만, 그분은 그것을 쉽사리 제거하실 수 있다. (3) 그분의 선하심. 그분의 충족성과 권능이 그를 유능하게 만들며, 그분의 선하심은 십자가 아래에 달린 그 백성을 위해 그분의 충족성과 전능하신 권능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을 기꺼이 행하도록 해준다. 그의 선하심은 고난받는 성도들을 위해 그 크신 권능으로 하여금 작용하게 한다. 그분의 선하심은 그들을 위해 그 충족성과 충만하심을 공표한다. 그리하여 그분의 충만하심으로 하여금 그들 위에 넘쳐 흐르게 한다. 그리고 그들이 십자가 아래에 달려 있을 때 가장 풍족하게 임한다. "만일 내가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지 않았다면 낙심했을 것이다." 당신으로 하여금 십자가 아래에서 혹은 십자가를 생각하고 예견하면서 낙심케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라. 도움이 거기에 있다. -데이비드 클락슨의 글에서 요약됨.
13절. "나는 낙심했을 것이다." 이 내용은 역자들에 의해 보완된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필수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의미를 손상시킨다. "나는 낙심했을 것이다"는 말을 없애버리고 13절 다음에서 잠시 멈추어보라. 그리하면 시인의 멋진 수사가 되살아날 것이다. "만일 내가 산 자의 땅에서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지 않았다면" 도대체, 내가 어떻게 되었을까! -아담 클라크.
13절. "만일 내가 산 자의 땅에서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지 않았다면." 히브리어상으로 본절은, 칼빈의 번역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생략형이다. 프랑스어역본에서 그는 본절 마지막에 "내가 멸망했을 것이다"라는 말을 덧붙여 생략 부분을 보충하고 있다. 영역본에서는, "내가 낙심했을 것이다"라는 말이 본절 서두에 보충되어 있다. 칼빈이나 영역본의 보충 내용은 둘 다 본질적으로 동일한 뜻이며, 본절의 의미를 설명해주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들은 시편 기자에 의해 사용된 표현 형태인 급전하는 문체를 훼손시킨다. 그는 내용 전개 도중에 문장을 완성시키지 않고서 갑자기 중지하지만,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너무도 분명하다. -앞에서 인용된 바 있는, 칼빈에 대한 편집자 주.
13절. 쓰라린 곤경과 고뇌 가운데서, 강하고 생동감 넘치는 믿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노력이 돋보인다. 그것은 의인 욥이 보기 드문 재난들에 직면하여 보여주었던 숭고하고도 영웅적인 결단과 같은 것이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변백하리라"(욥 13:15). 그가 말한 바와 같이, 나를 찌르는 것이 제아무리 쓰라리고 심하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분의 말씀과 약속들을 놓치지 않을 것이며, 내 소망의 기반을 무너뜨리지 않을 것이다. 시인은, 그런 방식을 통해, 자신의 무거운 짐 아래로 쓰러지는 자신을 붙들었다. "만일 내가 산 자의 땅에서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지 않았다면, 나는 낙심했을 것이다."······믿음은 새로운 힘을 가져다주며, 그것이 소진될 때에는 하늘로부터의 은혜를 보완해 준다. 여기서 다윗은 바로 그러한 감미로운 체험을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의 영혼 속에 은혜를 심어 작용케 하시듯이, 억압을 당하는 긴급한 상황에 적절히 맞추어 임하사 약하고 쇠락해진 그 은혜를 다시금 강화시키며 새로운 은혜를 시의적절하게 공급하기를 즐겨하신다. 그리하여 이따금 신자의 등잔을 신선한 기름으로 채우시며, 더 많은 믿음, 더 많은 사랑, 더 많은 소망, 그리고 더 많은 바람 등을 불어넣으신다. 그리고 낙심한 자에게 힘을 주시며, 죽을 날만 기다리는 이들을 강하게 해주신다. -존 윌리슨(John Willison).
13절. "만일 내가 산 자의 땅에서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지 않았다면." 이는 세 가지 탁월한 요소들로 이루어진 일종의 강심제를 나타낸다-볼 소망,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 것, 그리고 산 자의 땅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 -리처드 베이커.
13절. "산 자의 땅." 산 자보다 죽은 자가 더 많은, 땅 위에 있는 자보다 지하에 있는 자가 더 많은, 집보다는 무덤이 더 많은 이곳에서, '산 자의 땅'이 무슨 말일까? 이곳에서는 생명이 죽음의 손아귀 아래에서 떨고 있으며, 죽음이 생명을 압박하는 힘을 발한다. 그렇지 않다. 내 영혼이여, 산 자밖에 없는 '산 자의 땅'이 있다. 거기에는 호전적인 것이 아니라 승리하는 교회가 있으며, 교회가 있을 뿐 교회 부속의 묘지는 없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죽은 자나 죽을 수 있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거기서는 생명이 활기를 잃지 않으며 사망이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거기서는 생명이 면류관을 쓰며, 사망이 승리 안에 삼키워진다. -리처드 베이커.
14절.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편안한 마음을 가지라, 굳건하라, 용감하라, 혹은 남자답게 행동하라. 이는 사도 바울이 사용한 표현이기도 하다(고전 16:13). 또한 이는 무기력함, 두려움, 마음의 낙심, 혹은 다른 결함 등에 대항하도록 격려하는 말이다. -헨리 에인즈워스.
14절.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그대의 기반 위에 서기만 하면,
영적 원수들이 달아날것이다.
하늘을 향한 눈길로 말미암아 지옥이 흔들리니,
공격하기보다는 차라리 방어하는 편을 택하라.
자만심은 전투에서 무너질 것이며,
도전을 받을 때 그대는 위험에 직면할 수 있다.
진정한 '용기'는 갑작스럽게 뜨거워지지 않고 일관되며,
항상 겸손하고, 자신을 신뢰하지 않으며,
무모하게 위험 속에 뛰어들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라, 그리하면 그대는 하나님이
체념 상태에 빠진 그대를 위하여
싸우심을 발견할 것이다.
예수를 사랑하라!
사랑 앞에는 두려움이 근거를 잃을 것이다.
예수를 사랑하라! 그리하면 승리가 보장될 것이다.
-토머스 켄(Thomas Ken, 1637-1710-11).
14절. 사람들이 여러 가지 서글픈 일들을 행하며 하나님의 일에 대해 여러 가지 심한 타격을 가할 때, 그러한 세력이 그리스도의 손에서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전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단지 그분의 손 안에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손길은 그 백성 위에 공평하게 그리고 의롭게 미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 너머를 보라. 당신은 그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분이 자신의 손길을 돌리기를 기뻐하시듯이, 문제가 전환된다. -랠프 어스킨(Ralph Erskine, 1685-1752).
[설교힌트]
1절 상반절. 영적 조명과 구원의 관계, 혹은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빛이 필요하다는 사실.
1절. 영웅적인 그리스도인, 그리고 그의 용기의 비밀스러운 원천들.
1절. 신자의 담대한 도전.
2절. 교회를 대적하는 원수들의 성격, 수효, 능력, 그리고 잔혹성. 또한 그들을 파멸시키는 신비스러운 방법.
3절. 그리스도인의 평안. (1) 어려움을 조용히 예견하는 가운데 드러남. (2) 확신 가운데 곤경을 견디는 데서 나타남. (3) 하나님의 도우심과 과거의 체험을 통해 보존됨(1, 2절). (4) 가장 풍요로운 결실들을 거두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함.
4절. 기독교적 삶의 모델. (1) 통일된 바람. (2) 진지한 행위. (3) 친밀한 교제. (4) 천상을 향해 고정된 시각. (5) 진보를 이루는 신령한 훈련.
4절. 하나님을 도덕적으로 경외함으로 말미암는 영향. -토머스 찰머스.
4절. 하나님을 향한 열망. -리처드 십스의 설교.
4절 중반절. 안식일에 할 일과 천상의 기쁨.
4절 하반절. 구약 성전에서의 문의 사항들은 신약의 조명 안에서 밝히 드러난다.
5절. 삼중의 피난처. 강해를 보라.
6절. 영적 대적들에 대한 성도의 현재적 승리, 그의 실제적인 감사, 그리고 그 입술의 찬양.
7절. 기도. 누구에게 드리는 것인가? 어떻게 드려야 하나? “부르짖어야 한다.” 언제 드려야 하나? ‘특별히 정해진 때가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무엇에 기초를 두는가? “자비.” 기도가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인가? “들으심”과 “응답하심.”
8절.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는 마음. 가르침에 대한 신속하고, 성실하며, 인격적이고, 솔직하며, 정확하며, 그리고 결단력 있는 반응.
8절. 성공적인 간구자. -리처드 십스의 설교.
8절. 메아리와 같은 반응(“Spurgeon’s Sermons,” No. 767).
9절. (1) 모든 형태의 유기를 면하고자 하는 간구. (2) 직접적인 체험에 대한 간청. (3) 하나님의 도움심을 바라는 탄원.
9절. 죄인들의 지옥에 대한 성도들의 두려움. -제임스 스코트.
10절. 고아의 몫, 핍박받는 자의 위로, 작고한 자의 낙원.
11절. 우리가 바라고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받는 행로는 “주의 길,” “평탄한 길”로 묘사되며, 하나님의 교훈과 관련하여서는 “여호와여······나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소서”라고 언급되어 있다.
13절. 믿음, 그 예견성과 목적 그리고 그 지탱시키는 능력.
13절. 볼 것을 믿음(“Spurgeon’s Sermons,” No. 766).
14절. 신자의 입장(“바랄지어다”), 그의 상태(“강하고 담대하며”), 그를 뒷받침하시는 분(“여호와”), 그의 인내(“바랄지어다”-두번째로 반복됨), 그리고 그에게 주어질 보상 등이 시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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