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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교육정책

[스크랩] 소위 ‘팔 복’ 과 그 의미(마5:3-12)

소위 팔 복 과 그 의미(마5:3-12)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 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 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 임이요  의에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 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 임이요  마음이 정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것 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 걸음을 받을 것 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 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


1 성경에서 말하는 에 대한 개념

복이란 무엇인가? 모든 인간들은 복을 받기 원한다.  모든 사람들은 복을 받기를 원하는가? 우리나라에도 오복칠 복이 있다. 오죽하면 자식의 이름을 칠 복이라 지을까? 우리 성도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받아 들여야 할까?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성도들은  세상에서  이상 받을 복이 없다. 하나님을 알지못하는 세상 사람들이 복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상 진정한 복이 아니다. 그것은 복이 아니라 도리어저주가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이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위해 복 있는 자라는 말과 복 받을 자 라는 우리말의 어의를 주의 갚게 구별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복 받을 자가 아니라  있는 자이다. 

이는 존재와 관련된 의미이다. 여기서 말하는 복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되는 영원한 천국에 속한 것이다.  복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그러나 복 받을 자라고 할 때 복은 현상적인 의미로서  세상에서 말하는 오복 칠 복과 같은 복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받고 싶어하는 복은 과연 어떤 유형의 복인가?

우리 하나님은 세상에서 말하는 그런 류의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그런 류의 복을 달라고 기도할  없다. 만일 성도라 하면서 그런 복을 달라고 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영원한 복을 하찮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거나 이 세상에서 자기의 욕망을 누리기에 열중하는 사람이다. 성경은 성도가 그런 사람이 되도록 가르치지 않을뿐더러 그런 사람은 세상을 탐하는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세상의 좋아 보이는 것들을 해로 여기며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 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길 뿐 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여김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 3:7-9)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거나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바울이 해로 여기며 배설물로 여긴 것들을 많이 달라고 기도하며 그것을 얻기 위해 이방인 식의 성대한 집회를 개최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신년맞이 축복 대 성회’, 수험생을 위한 기도회 등과 같은 집회를 한국교회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그런 류의 모임은 역사상 건강한 교회들에서 찾아볼  없는 형태의 집회이다.

팔 복을 이해하기에 앞서 우리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진정한 복의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성도에게 있어서 복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 복에 관한 직접적인 말씀을 찾아볼 수 있다. 그와 관련된 말씀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 몇 군데를 살펴보려 한다.


①창세기 12장에서는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과 자손을 약속 하시면서   대해 말씀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의 근원이  것이라 12:2) 고 하신다.

여기서 말하는 복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복이  세상에서 받는 복을 말하는 것일까? 세상에서 부자가 되고 성공하는 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  된다는 의미이다. 마태복음 1 1절에서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고 있는 부분에서 그것이 확실하게 증거되고 있다.


 시편 1 말씀에서  있는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시절을 좋아 과실을 맺으며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행사가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하리로다 (시편 1 ).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 아니라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여호와의 인정을 받는 사람들이다. 이는 죄악 세상 가운데 살면서 율법을 통해 계시된 메시아를 소망하는 성도들에관한 기록이다.

이외에도 성경에는 복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 모든 복에 대한 내용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귀착이 된다. 아브라함에게 말하는 복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귀착이 되며 시편 1편에 언급 된 복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모든 복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된 개념이다.

  

2. 산상수훈에서 말 하는 복의 의미 

이제 산상수훈에 기록된 복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과연 산상수훈에서 말하는 복이란 무엇인가?  의미들을 구체적으로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제각기 분리된 상태로 이해하지 않아야 한다. 소위 팔 복이라고 허는 내용들은 전부 하나로 엮어져 있는 것이며 개별적이지 않다. 엄밀한 의미에서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 즉 결코분리될 수 없는 한 덩어리의 복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 자기는 심령 가난함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복은 있지만 애통함으로써 얻는 복을 받기는 어렵다고 말할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온유한 자세를 가지기는 쉬운 것 같은데 의에 주라고 목마른 자세를 가지는 것은  된다고 할 수도 없다. 나아가 남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잘 할 수 있는데 청결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어렵다든지, 화평케 하는 것은 자신이 있지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더라는 말도 성립될 수 없다.

산상수훈의 팔 복에서 나타나는 조건  하나에 진정으로 참여하는 성도라면 나머지 모든 조건에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된다. 동시에 그 중 하나를 감당하지 못한다면 나머지 아무것에도 참여하지 못하는 자이다.

우리는 팔 복에 나타나는 모든 내용들에 대해 모두 참여할  있거나 하나도 참여하지 못하거나  하나이다. 물론  참여라는 것은 윤리적 참여가 아니라 진리에 참여함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분리하여 해석하면서 일부에 대해서는  하고 있으므로 그에 해당하는 복을받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팔 복을 윤리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팔 복을 받기 위해 그에 요구되는 조건들을 신앙의 연륜에 따라 하나씩 이행해 나가야 한다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산상수훈의 팔 복은 산상수훈의 전체적 특성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팔 복 이후에 나오는 마태복음 513 -7 27절에 나타난 진정한 가르침의 의미는 이것에 비추어서만 이해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팔 복을 산상수훈 전체를 깨닫는  key 기능을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팔 복에 관련된 말씀이  마태복음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며 가서 신약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키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아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열두 사도들에게 주신 산상수훈은 그 이후에 세워지게 될 모든 교회의 초석과 기초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산상수훈의 앞부분에 나타나는 팔 복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한다는사실이다.  열두 제자들에게 복을 말씀하시고 계신 주님께서는 자신이 곧 복의 근원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분 홀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팔 복에서 언급된 그런 삶의 중심에 있으며그의 성도들은 그 진리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의  산에서 교회의 기초가 되는 열두 제자들에게  말씀을 주실  복의 근원이되는 나(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너희(교회)  나로 인해 복을 소유한자들이라며 가르치고 계신 것이다. 거기 있는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은 그와 함께 영원한 복을 누리게 된 것이며  그 기초 위에 세워질 교회의 모든 성도들도 그와 동일한 복을 누리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종교 지도자들이 대단한 복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제사장들, 장로들,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 누리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일반 사람들은 그들을 부러워했으며 그들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종교인들이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저주아래 놓여있음을 강조하셨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살고 있으면서 종교활동을 하는 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 , '귀의 자식 이라는 저주의 말씀을 거침없이 쏟아 내셨던 것이다. 약속의 땅에 약속된 메시아가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그를 죽이려 했던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저주받은 자들이었다.

그에 비해 갈릴리의 보잘것없는 사람들 같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아 메시아를 알고 그를 약속된 구주로 믿으며 복의 근원이신 주님과 함께 있는 열두 제자들이 참으로 복된 자들이었다. 그는 그 놀라운 복음을 선언하셨으며 그 기초 위에 세워질 교회가 진실로 복됨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세상에서 화려한 삶을 누리지 못하고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도 주님의 자녀가 되어 그와 함께 있는 그 자체가 복이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3. 성경 본문을 통한 구체적인 이해

마태복음 5 3 기록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 임이요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 학자들은 이에 대해 다양한 설명들을 하고 있다. 물질적 가난에 대한 것이라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의도적 가난을 추구하는지를 말한다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겸손한 자세를 의미하는 것으로 주장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들은 온당한 해석이   없다. 윤리적 입장에서 본다면 그런 설명이 부분적으로 타당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경은 물질적 가난함 자체를 덕목으로 삼지 않는다. 자주장사 루디아삭개오아리마대 요셉  고넬료 빌레몬 등은 가난한 자로 보여지지 않는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자기 의의를 세우기 위해 의도적 가난을 추구한 신앙인들을 찾아 볼 수 없다. 아가 믿음의 선배들가운데는 윤리적 관점에서 보아 겸손한 사람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물론 그에 속한 모든제자들과 성도들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겸손한 모습을 가졌던 자들 아니라 진리를 지키기 위해피 흘리기까지 싸운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가난한 자는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즉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자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심령이란 사람의 정신마음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심령이 부유한 자는 외부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자기 능력과 세상의 형편로 인해 하나님 없이도 스스로 만족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심령이 가난한자가 되어야만 성경이 말하는 메시아를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 당시의 메시아를 소망하던 일반적인 환경을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산상수훈 앞부분에서 말하는 심령이 가난한자란 메시아를 필요로 하는 자를 의미한다. 그들은 메시아가 오시지않는 상태에서는 삶의 이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고 있는 지들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연약함을 깨달아 진정한 메시아를 영접하게  주의 자녀들이  복 있는 자인 것이다.


마태복음 5 4에서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 임이요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애통하는 자란 무슨 의미인가? 애통 한다는  자체는 심하게 슬퍼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애통해야 하는지 그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것이 일반윤리적인 의미가 아님은 명확하다.  슬퍼해야  만한 명백한 이유가 없다면 애통하는  자체로서 의미가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학자들은 대개  말씀을 언급하며  세상에서 당하는 슬픔을 참는 것이 곧 복의 조건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세상에 살고 있는 성도들 가운데 그런 류의 깊은 슬픔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하면서 향상 기뻐하라"(살전 5:16)요구하고 있다.  진정한 의미 해석은 미루더라도 항상 기뻐하는 것과 애통해 하는 것은 상호 조화되는용어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산상수훈을 읽을 때는 애통하는 삶을 살기로 작정하고 데살로니가 전서를 읽을 때는 기뻐하는 삶을 살도록 애써야 하는가? 그것은 결코 그렇지 않다.

산상수훈에서 말하는 애통하는 자란 세상의 오만함과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처참한 형편에대해 애통하라는 의미이다. 구약성경에서 지속적으로 약속되어  메시아가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핍박하고 죽이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며 애통해 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예수님의 고난이 끝난 지금의 시대에 와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지 못하고 조롱하는 숱한 인간들을 보고 있다.

소위 기독교 지도자를 자처하면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하고 윤리교사 정도로 생각하며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자들을 수없이 많이 보고 있다.  그들은 1세기 유대 땅에서 예수님의 속성을 알지 못한 채 그를 박해하며 조롱하던 부류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러한 사악한 형편을 보는 성도가 세상을 기쁨의 대상으로 생각하며 삶을 누리려 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애통하는 자들에게는 천상의 위로가 임하게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5 5에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 임이요라고 기록하고 있다. 온유한자는 싸움을 하지 않는 부드러우면서 완력을 쓰지 않는 사람이다. 우리는 교회가 세상과 전투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고 했는데 여기서 온유한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주님께서 산상수훈을 말씀하시는  시간도 영적 전운이 감도는 긴장되는 순간.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성경에 나타나는 신앙의 선배들 가운데는 진리로 인해 과격한 인물들이 많이 있다. 그렇다면 성도는 어떨 때 온유해야 하며 또 다른 어떨 때 과격해야 하는가?

 나아가 그 기준에 대한 판단은 누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수의 학자들은 성도들은 성품이 온유해야한다고 가르치지만 그것은 윤리화된 개념으로 본질적로 잘못 된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 의해 보증된 믿음의 선배들이 그런 류의 온유한 성품을 가지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아모스 호세아 사야 같은 선지자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바 온유한 삶을 살았는가? 세례 요한이나 베드로바울 같은 믿음의 선배들이 온유한 모습의 삶을 보였는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온유하기는커녕 진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 놓을 만큼 강한 성품을 가진 분들이었다.

그러므로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은 세상에 저항하는 자로서 전투를 하는 군사이지만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온유함을 견지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성품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대한 의미와 더불어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천상의 왕이시면서 더러운 인간들에 의해 모진 박해를 받고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다. 그의 온유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교회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함에 참여하고 있는 지들이다.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기초가 되는 열두 제자들에게  점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세상에서는 힘이 있고 능력이 있는 자가 땅을 취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는 자기 힘으로 땅을확보하려는 인간들에게 돌아갈 땅이   평도 없다.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이 세상의 땅은 잠시 취했다가 버리게 될 허망한 땅에 불과하다. 우리가 여기서 눈 여겨 보아야  점은 세상 사람들은 자기 능력을통해 땅을 쟁취하게 되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땅을 하나님으로부터 상속 받는다는 사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온유함에 참여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땅이 유업으로 약속되어 있다. 산상에서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열두 제자들과  기초 위에 세워지게  교회와 성도들에게는 영원한 땅이약속되어 있으며 그것이 곧 참된 복이다.


마태복음 5 6에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 임이요라고 말한다. 학자들 중에는  본문이 마치 사회 정의를 말하고 있는  주장하는 자들이 상당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성경에는 일반 사회정의를 목적으로 삼아 투쟁에 나선 믿음의 사람이 없다.

성경에는 오직 예수그리스도 한 분만 의로운 자라 가르치고 있다. 노아를 비롯한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것은 그들의 삶이나 행동이 의롭기 때문이 아니라 의로운 자 에게 온전히 속해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인정 받은 것 이었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란 영원히 의로운 메시아를 갈망 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자기가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는 참 의에 목말라 할 이유가 없다. 

자기가 불의한 자라는 사실을 깨닫는 자라야만 참 의를 갈망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누가복음 18 9-14절에 기록된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알고 있다.  비유의 말씀은 자기를 의롭다고 스스로 믿고 있는 자들(18:9), 곧 자기 의를 믿고 있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주신 비유의 말씀이다. 

바라새인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믿고 있는 자 들이었기 때문에 달리 의로운 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기의 의만으로 충분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필요로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리는 자기의 불의를  알고 있었다. 그는  불의로 인해 자기가 영원한 멸망에 처해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의로운 하나님께 불쌍히 여겨주시도록 기도한 것이다  그는 자기에게 의가 없음을 알았으므로  의에 목말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본문에서 말하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인간이 얼마나 불의한 존재인가 하는 점을 깨닫는 사람이다. 자신의 불의가 영원한 멸망에 빠지는 심판의 대상이 됨을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만이의에 주리고 목말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신 뜻은 인간이 스스로 마련하는 의와 공로를 통해 주어지는 만족은 생명이 아니라 도리어 죽음의 길임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지들은  점을 명확히 깨달아야 하며 그 후에 세워지게 될 교회 역시 그와 동일한 깨달음을 삶의 중심에 두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그들에게 영원히 보장되는 흡족한 삶을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5 7에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 임이요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수의 학자들은 이 말씀 또한 윤리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이웃에게 긍휼을 베풀면서 가는 것이 성도의 윤리적 덕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올바른 해석이 아니다. 성도들 가운데는 이웃에게 긍휼을 베풀 만한 형편에 놓여 있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긍휼을 베풀기는커녕 도리어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형편에 놓여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들 일부에게만 해당하는 말을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말씀은 일반적인 생활의여유가 있는 성도이건 그렇지 못한 성도이건 모든 성도들이 차별 없이 공히 받아들여야  진리이며 특정 성도들이 긍휼을 베풀며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보편적인 윤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 앉아있는 제자들은 시실 남에게 긍휼을 베풀 만큼 여유 있는 형편이 아니다. 그리고성경에 나타나는 많은 성도들이 그와 유사한 열악한 형편에 있었으며, 초대교회의 모진 박해를 받던 성도들이 그러했던 것을 우리가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면 긍휼히 여기라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 아담이 하나님을 배반한 후부터 모든 인간들은 죄인이다.  죄의 구렁텅이에서 스스로 빠져 나올 만큼 대단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인간 가운데 자기 능력을 자랑할 만한 존재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 점을 온전히 깨달아야만 한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다른 인간들에게뿐 아니라 하나님께 마저 교만하게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철저하게 부패하고 무능한 인간의 한계를 알고 인간이 멸망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하나님 앞에 그나마 겸손해질  있는 것이다. 물론 그 겸손 마저 도 미덕으로서 겸손이 아니라 진리앞에 처참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는 본질적 겸손이다. 그러므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 말씀은 결코 교만 할  없는 인간의 존재를 깨달아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만이 예수그리스도의 긍휼을 바라게 되며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입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마태복음 5 8에는 '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 임이요라고 말씀하고 있다. 마음이 청결한 자들이란 어떤 자들인가? 이 가르침을 오해하는 자들은  말씀을 종교적자기 수양과 연관 짓는 것을 보게 된다. 즉 욕심을 버리고 청결한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오해를 불러오기 십상이다. 

이는 불교나 도교에서 도나 선을 수행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 했으므로 결코 스스로 청결할 수 없는 존재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칼빈주의 신학에서는 인간의 전적 부패에 대한 의미를 매우 중요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미는 무엇일까? 필자는  가르침의 의미를 세상의 탐욕에 얽매이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이해 한다.즉 하늘나라와 세상에 대한 탐욕으로 인해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있는 인간은 세상을 탐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회개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세상을 탐하는마음을 버린 자들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자로서의 조건이 세상에 대한 포기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목숨을잃으면 찾으리라:'( 16:24, 25).

이는 세상에서 가지는 모든 욕망을 포기하고 자기 목숨을 위해 삶을 추구하는 자세를 포기하라는 말이다. 또한 사도바울은 성도들이 세례를 받는 것을 두고 세상에 대한 죽음이라고 가르치고 있다{6: 1-4;  2;20). 그러므로 '음이 청결한자  세상에 대한 탐욕을 포기하고 천상의 왕이신 주님만을 따르는 자를 의미한다. 그들은 그로 인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5 9에서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 임이요라고 말씀하신다.  말씀에 대해서도 많은 목회자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여기의 화평케 하는 자를 일반 윤리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 우리는 피스 메이커 Peace-maker 라는 말을 외래어구로 빈번하게 시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와 반대되는 말을 트러블 메이커trouble-maker라고 한다. 한국어가 아니라 영어인데도 누구나 사용할 만큼 이미 우리말처럼 되어 있다. 

그것은 그만큼 중요하게 널리 사용되고 있는 언어라는 의미이다.

산상수훈에서 말하는 화평케 하는 자를 오해하고 있는 자들은  의미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피스 메이커 생각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잘못된 해석이다. 

성경은 본질적인 측면에서 그런 식의 피스 메이커 요구 하지 않는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성경에 나타나는 믿음의 선배들은 거의 모두가 피스 메이커가 아니라 트러블메이커 였다.

우선 예수님 자신이 유대인들을 비판 하며 그들을 독사의 지식 이라 부르면서 화평의 제스처를 보이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 모진 핍박을 받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그들의 잘못된 평화주의에 화답하지않으셨 때문이다. 구약시대의 여러 선지자들과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피스 메이커는 없었다. 교회사 가운데서도 동일한 모습을 발견한다. 촌위클리프  후스,  칼빈 마르틴 루터 울리히 쓰쯔빙글리쉬  종교개혁자들은 결코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아 화평케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화평케 하는  peace-rnaker 였다. 

그들은 일반 윤리적 개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진리의 편에서 참된 화평을 추구한자들 이었다. 그 화평의 중심에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선 예수그리스도가 계셨다.

 중보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상태에서는 영원하고 참된 화평이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가 없는 상태에서 보여지는 화평은 진정한 화평이 아니라 도리어 저주가 됨을 기억 해야 한다.

진정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평화 즉 죄로부터 보호받고 모든 악으로부터 구별되는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이 세상과는 다른 통치 아래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에서 말하는 화평케 하는 peace-maker 그리스도 안에 존재함으로써 참된 화평을 선포 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오늘날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 역시 그와 동일한 교훈 아래 존재하고 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의롭게 되어 하나님의 이들로 안정 받는 것이다.

 

마태복음 5 10에서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지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 임이라고 기록 되어 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참 의로운 자는 예수그리스도  분밖에 없다.  의로운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세상에서 통치 하는 권력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핍박을 받게 됨을 시사하고 있다. 이는 당시 메시아를 기다리던 일반적인 이스라엘 민족의 메시아관 과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

그들은 메시아가 오시게 되면 당시 압제국이던 로마제국을 통치하는 권력을 가지게  것이며 이스라엘민족이 그들 이방인들 위에 군림할 것으로 기대했다.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메시아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을  그는 일반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개혁을 시도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전혀 다른 시각을 지니고 있던 대다수 이스라엘 백성이 메시아를 알아볼 수없었던 것은 당연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에게 의로운 자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그들이 권력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도라어 핍박을 받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주님께서는 자기가 멸망을 향해 나아가는  세상의 왕이아니라 영원한 천국의 왕임을 분명히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자기 백성 아닌 지들로부터 왕으로 인정 받고자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오늘날 잘못된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에서 가질  있는 힘을 추구하는 것을보지만 그것은 잘못된 자세이다. 적어도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셨다.  세상은 아담이 타락한 이후부터 마귀에게 내어준   공간이다.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편지하면서 점을 명확히 했다.

 때에 너희가  가운데서 행하여  세상 풍속을 좋고 공중의 권세 잡은  따랐으니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2:2,3). 

주님과 주님의 제자들그리고 그의 몸 된 교회가 마귀의 권세 아래 있는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당하는것은 마땅하다. 그리고 그것은 성도가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세상으로부터의 증거가 된다. 그들에게영원한 천국이 약속된 것은 어떤 것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 참된 복이다. 

마태복음 5 11 ,12에는 주님께서 주신 복이 제시된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라고 하심으로 열두 제자와 그 이후에 설립되는 교회가 욕을 당하고 핍박을 당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즉 주님으로 인해 세상에서 칭찬과 명예를 얻는 것이 아니라 더욱 힘든 삶을 살게  것임을 말씀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게 됨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신다.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 역시 세상에 살면서 인정을 받아 성공하여 영예를 누린 것이아니라 도리어 견디기 어려운 핍박을 당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이 교훈은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교회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에서 권력을 추구하지 않으며 세상으로부터 주어지는 영화를기대하지 않는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보아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주님께서 받으셨던 그런 핍박을 받고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현재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권력으로부터 직접적인핍박을 당하거나 그로 인해 생명을 잃을 염려가 전혀 없다. 그렇다면  말씀은 시대와 지역적 형편에 따라 차등적으로 주어지는 말씀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교회에게 공히 주어진 말씀이다. 그렇다면 이제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말씀의 본질은 세상이 가진 상이한 가치관과 연관된 것이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신체적인 핍박을 받은 것은 천상의 가치와 다른  세상의 가치를 본질적으로 비판 했기 때문이다. 즉 어떤 시대에는 마귀의 통치 아래 놓인 세상의 가치를 비판 했을 때 선체적인 박해가 따랐으며 어떤 시대에는 다른 방식으로 핍박이 따르게 된다

오늘 우리의 시대에도 예수그리스도와 연관된 의를 절대적으로 추구하게 되면 그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자들로 말미암은 핍박이 따를 수 밖에 없다. 그런 자들에게는  세상 아니라 그리스도가 왕이신 영원한 천국이 허락되는 것이다. 그것이 열두 제자를 기초로 하여 세워질 교회에 허락된 궁극적인 복이다.

우리는 가치관을 달리하는 이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 칭찬 듣는 것을 자랑스러워  것이 아니라 도리어 견제해야 한다.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듣고 좋은 말을 들을  결코 좋아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마귀의 통치를 받고 있는 세상과 상통하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이 교회를 칭찬한다면 그것은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요구하는  온전한 모습이 아니라 죄악 된 세상과 조화되는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임을 기억해야 한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산상수훈에서 이를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6:26),

교회와 성도들은 세상과 결코 조화될  없는 가치관으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욕을 당하고 핍박을 받을때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 물론 우리시대처럼 교회가 세상 사람들보다 차라리 못한 윤리적 수준으로 인해 욕을 먹는데 대해서는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이다. 우리는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세상으로부터 욕을 당하고 핍박을 당할 때는 기뻐해야 한다. 우리가 여기서 주의를 기울여야  점은 구약시대 선지자들이 누구로부터 핍박을 당했느냐 하는  이다. 그들은 이방인들로부터가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있는 거짓 지도자들과 그들에게 속한 자들로부터 핍박을 당했다. 예수님의 제지들을 비롯한 사도들 역시 하나님의 선민이라 주장하는 유대인들로부터 심한 고난을 당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 시대도 그와 같을 것이라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가 경계해야  자들은 기독교 밖의 이방인들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을 핑계 대며 교회를 어지럽히는 교회 안의 불신자들이다.

교회 안의 거짓 지도자들이 세상에 추파를 던지며 영적 간음을 시도할  참된 주의 자녀들이 그것을 비판하면 어떻게 될까? 그런 과정에서 핍박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지들은 역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렇지만  성도들은 그것을 통해 그들과 다른 천상의 가치관을 소유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며 그로 인해 약속된 천국을 보증 받게 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천국에서 이루어질 보상에 대해 말씀하신다.

5 12 한글 번역에서 상()으로 번역된 것은 옳지 않다. 여기서 말하는 상은 등수에 따라 주어지는 (prize) 아니라 보상(reward) 의미한다.  세상에서 당하는 어려움과 고통에 대해 그 외는 비교할  없이  보상으로 채워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조건은 세상의칭찬 때문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로부터 욕을 당하기 때문이다. 성도는  세상의 가치관에 의해 칭찬 받고 인정 받 것을 주의하며 경계해야 한다. 교회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처럼 세상과 다른 가치관에대한세상으로부터의 확증과 더불어 하늘나라에서 있을 보상을 소망하는 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들으려 하고 좋은 말 듣기를 원하며 그로부터 얻어지는 기쁨을 추구하지는 않는가? 기독교 내부의 배도자 들로부터 즐거움을 얻고자 추파를 던지지는 않는가? 우리는 주님께서 열두 제자들과 교회에 허락하신 진정한 복에 관한 산상수훈의 교훈을 우리 시대 교회의 굳건한 기초로 이해해야 한다.


이광호 목사(실로암 교회)

출처 : 예수 코리아
글쓴이 : 예수코리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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