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에 대해 잘 알려지지않은 역사적 사실
임진왜란에 대한 역사서들의 내용은 대체로 '어느 날 갑자기'일본군이 침략해 들어왔다는 것에서 부터 시작된다.
'어느 날, 부산 앞바다에 일본배들이 몰려왔다. 신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들이 갑자기 조선을 침략했다.
하지만 당시에 조선은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일본군의 기습으로 인해 조선군은 제대로 준비도 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당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단 20일만에 한양까지 도달한다.'
역사서들은 대부분 이렇게 임진왜란을 서술하고 있다.
'어느 날, 부산 앞바다에 일본배들이 몰려왔다. 신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들이 갑자기 조선을 침략했다.
하지만 당시에 조선은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일본군의 기습으로 인해 조선군은 제대로 준비도 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당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단 20일만에 한양까지 도달한다.'
역사서들은 대부분 이렇게 임진왜란을 서술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선봉장은 1군 사령관 고니시 유키나가, 2군 사령관 가토 기요마사 두 명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
고니시 유키나가는 일본 규슈 지방의 영주를 지내고 있었는데 사실 그는 조선과의 전쟁을 반대한 사람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
고니시 유키나가가 조선과의 전쟁을 반대한 이유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먼저 일본은 오랜 통일전쟁을 끝내고 마침내 전쟁이 없는 시대가 되었다. 오랜만에 평화를 달성했는데 명나라에 쳐들어간다는 이유로 조선과 전쟁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또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독실한 천주교신자였다. 전쟁을 바라지 않았고 특히 아무런 실익이 없는 외국과의 전쟁은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고니시 유키나가는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해서 정말로 오랫동안 노력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조선과의 전쟁을 반대한 이유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먼저 일본은 오랜 통일전쟁을 끝내고 마침내 전쟁이 없는 시대가 되었다. 오랜만에 평화를 달성했는데 명나라에 쳐들어간다는 이유로 조선과 전쟁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또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독실한 천주교신자였다. 전쟁을 바라지 않았고 특히 아무런 실익이 없는 외국과의 전쟁은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고니시 유키나가는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해서 정말로 오랫동안 노력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조선이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도록 노력한 것도 고니시 유키나가였다.
"조선이 일본에 통신사를 보냈으니 조선과 싸울 필요가 없지 않느냐?"라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에 쳐들어갈 것을 선언하고 조선과 싸움을 준비하는 몇 년 동안 고니시 유키나가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전쟁을 막으려고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고니시 유키나가와 한통속으로 조선과의 전쟁을 막으려 했던 쪽은 대마도였다. 대마도는 일본에 속하기는 하지만 조선과 통상을 해야만 먹고 살아갈 수 있는 곳이었다.
대마도에는 거주민이 모두 먹고살 만큼의 쌀이나 물품이 나지 않았기에 조선에서 쌀을 가져와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과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 대마도 주민들은 기근에 시달릴 게 뻔했다.
전쟁 시기에는 일본에서 도와준다고는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난 후 대마도와 조선 간에 관계가 틀어지면 이후의 생존에도 문제가 생긴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한통속으로 조선과의 전쟁을 막으려 했던 쪽은 대마도였다. 대마도는 일본에 속하기는 하지만 조선과 통상을 해야만 먹고 살아갈 수 있는 곳이었다.
대마도에는 거주민이 모두 먹고살 만큼의 쌀이나 물품이 나지 않았기에 조선에서 쌀을 가져와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과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 대마도 주민들은 기근에 시달릴 게 뻔했다.
전쟁 시기에는 일본에서 도와준다고는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난 후 대마도와 조선 간에 관계가 틀어지면 이후의 생존에도 문제가 생긴다.
또 대마도 영주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이기도 했다. 둘은 서로 힘을 합져서 조선과의 전쟁을 막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처음에 도요토미를 설득하려 했다. 전쟁이 필요 없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쳐들어갈 기미를 보이자 조선에서 사신이 올테니 기다리라는 등의 연막을 쳤다.
일본 내에서만 이런 노력을 한 건 아니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대마도 영주는 조선에 지속적으로 사신을 보냈다. 조선의 사신들이 일본에 자주 오가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서로 잘지내게 되면 전쟁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에서였다.
<조선의 통신사>
하지만 이런 화친책은 실패했다. 조선은 일본을 일개 오랑캐로 생각했고, 일본과 친선을 도모할 생각이 아예 없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선의 통신사가 일본에 오면 최소한 통신사들이 일본의 사정을 알고, 이대로 가면 전쟁이 나겠구나를 느끼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다독여서 전쟁이 나지 않도록 같이 노력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이런 화친책은 실패했다. 조선은 일본을 일개 오랑캐로 생각했고, 일본과 친선을 도모할 생각이 아예 없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선의 통신사가 일본에 오면 최소한 통신사들이 일본의 사정을 알고, 이대로 가면 전쟁이 나겠구나를 느끼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다독여서 전쟁이 나지 않도록 같이 노력할 줄 알았다.
<조선의 통신사>
당시 일본이 조선에 쳐들어갈 것이라는 사실은 주변국가들도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전 일본의 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오다 노부나가 때 부터의 일본 최상부 권력자들의 꿈은 일본을 통일한 후 대륙으로도 진출해 보자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이 조선에 쳐들어갈 것이라는 사실은 주변국가들도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전 일본의 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오다 노부나가 때 부터의 일본 최상부 권력자들의 꿈은 일본을 통일한 후 대륙으로도 진출해 보자는 것이었다.
<오다 노부나가>
<왜인들이 명나라를 침범하고자 한다는 말이 류큐국까지 번져 있고 조선도 이미 일본에 굴복하여 삼백 명이 투항해 가서 길을 인도하기 위한 배를 만들고 있다는 말이 퍼져 있었다.>
- 선조실록 1581년 10월 23일-
<왜인들이 명나라를 침범하고자 한다는 말이 류큐국까지 번져 있고 조선도 이미 일본에 굴복하여 삼백 명이 투항해 가서 길을 인도하기 위한 배를 만들고 있다는 말이 퍼져 있었다.>
- 선조실록 1581년 10월 23일-
계속되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전쟁 방지 노력
조선 통신사가 일본을 다녀갔지만 일본이 조선에 쳐들어 가려는 분위기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대마도주는 조선을 대상으로 더 적극적인 설득에 들어간다." 일본 내에서는 이미 조선에 쳐들어간다는 것이 기정사실화 되어 있다. 이제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조선은 앞으로 나서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 조선 사신이 일본에 계속 와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달래거나, 조선 왕족이 일본에 오거나, 조선이 일본에 국서를 계속 보내거나 무언가가 계속 진행되어야 전쟁이 나지 않는다"라는 말을 조선에 전하고, 조선의 반응을 살폈다.
<고니시 유키나가 조선 설득>
하지만 조선 왕실은 이런 말들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조선 입장에서는 통신사를 한번 보낸 것만으로도 분에 넘치게 일본을 고려한 것이었다.
결국 고니시 유키나가는 일본의 계획을 그대로 조선 정부에 알린다. 일본 규슈 나고야에 이미 조선 정벌을 위한 기지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 어느 정도 규모의 군대가 준비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언제쯤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는 것 등을 모두 조선에 알려줬다.
이렇게까지 준비가 되어가고 있는 상황이니 제발 전쟁을 막기 위해 같이 노력해 달라고 매달리기 까지 했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이런 말들을 모두 무시한다.
마지막에 고니시 유키나가 측은 언제 일본군이 조선에 쳐들어갈 것인지 그 날짜까지 알려준다.
하지만 이런 최후통첩도 소용이 없었다. 조선 정부는 이런 정보들을 모두 헛소리로 치부했다.
하지만 조선 왕실은 이런 말들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조선 입장에서는 통신사를 한번 보낸 것만으로도 분에 넘치게 일본을 고려한 것이었다.
결국 고니시 유키나가는 일본의 계획을 그대로 조선 정부에 알린다. 일본 규슈 나고야에 이미 조선 정벌을 위한 기지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 어느 정도 규모의 군대가 준비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언제쯤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는 것 등을 모두 조선에 알려줬다.
이렇게까지 준비가 되어가고 있는 상황이니 제발 전쟁을 막기 위해 같이 노력해 달라고 매달리기 까지 했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이런 말들을 모두 무시한다.
마지막에 고니시 유키나가 측은 언제 일본군이 조선에 쳐들어갈 것인지 그 날짜까지 알려준다.
하지만 이런 최후통첩도 소용이 없었다. 조선 정부는 이런 정보들을 모두 헛소리로 치부했다.
<선조>
당시 일본이 조선에 쳐들어 간다는 것은 군사 기밀도 아니었다. 일본은 이미 몇 년 동안 조선에 쳐들어가기 위한 전쟁 준비를 했다. 일본에서는 위로는 다이묘에서부터 일반 백성들까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또 일본만 전쟁이 난다는 것을 안 것도 아니었다. 당시 일본은 류큐왕국(오키나와), 서양제국, 중국 등과 교류를 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이 조선에 쳐들어 간다는 것은 군사 기밀도 아니었다. 일본은 이미 몇 년 동안 조선에 쳐들어가기 위한 전쟁 준비를 했다. 일본에서는 위로는 다이묘에서부터 일반 백성들까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또 일본만 전쟁이 난다는 것을 안 것도 아니었다. 당시 일본은 류큐왕국(오키나와), 서양제국, 중국 등과 교류를 하고 있었다.
일본사람들은 이들과 거래를 하면서 전쟁 준비를 한다는 말을 거리낌 없이 떠들고 다녔고, 전쟁에 필요한 물자들을 거래 했다. 즉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다는 것은 동아시아 전체에서 모두 알고 있었던 셈이었다.
중국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중국은 일본이 언제 조선을 향해 출병을 하는지 까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어떤 특별한 첩보 활동으로 알게 된 것이 아니다. 이 날짜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조선에도 알려준 것이다.
그래서 당시 중국은 조선을 의심했다. 일본군이 조선에 쳐들어 간다고 하는데, 조선은 이에 대해 아무 반응이 없다.
일본군이 조선에 들어가는 이유는 명나라를 치기 위해서였다. 당시 중국은 조선이 일본과 손을 잡고 같이 명나라에 쳐들어 올지도 모른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세상이 다 아는 전쟁 문제를 조선이 일본군에 대해 중국에 아무런 언급도 안하고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조선이 일본 침략에 대해 전혀 준비를 안 한 것은 아니다. 전쟁의 징후가 점점 분명해지자 선조는 여러면에서 군비를 강화, 여러 무장을 발굴하고 성곽을 보수하고 우리나라 기존성에서는 볼 수 없는 해자까지 팠지만, 경상도를 비롯한 남부 지방은 이전 수백년 전부터 전란을 입은 경험이 없었기에 많은 마찰이 있었다.
개국 이래 200년 동안 평화롭게 살아온 백성들은 노역 동원과 세금납부에 완강하게 반발했고 결국 공사는 중단되었다.
전쟁이 발발한 후 선조는 '성을 높이 쌓을 수록 국가의 형세는 날로 낮아지고 못을 깊게 팔수록 백성의 원망이 더욱 깊어지는 걸 정말 헤아리지 못하였다.' 는 한탄의 교서를 내렸을 정도였다.
조선은 건국 후 200년 간 이렇다 할 전란을 겪지 않아 상비군 체제에서 병농 일치 예비군 체제로 전환된 상태였다.
여진족과 분쟁이 빈번한 북부지방과 남부 수군은 상비군이 그나마 유지되었지만 기타 지방에서는 문서상으로만 병력이 존재했고 실제로는 군역을 부과치 않거나 대역인을 세우고 군포를 납부토록 하는 방군수포와 대역납포가 공공연히 이뤄졌다.
임진왜란 직전 조선 전체 군인수는 14만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 정예군은 2만 3천여 명이고 이중 순수군사는 8천명, 나머지는 군사를 보충하는 보충병이다.
이나마도 8천이 항상 있던 것이 아니라 2천명씩 교대로 국방을 지켰다고 한다. 즉, 지역 고을이나 성의 수비가 아니라 치안을 담당한 군사를 빼고 나면 가용 병력은 일단 2천명이라는 이야기인데, 그나마 여진족을 막기 위해 북방국경에 배치되어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수는 약 16만명.
8천대 16만의 대결이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은 양민의 수는 줄어들고, 지배계층은 점점 부자가 되고, 결론적으로 세금 내는 양민이 줄어들어 국가의 재정 또한 빈약해지고 있었다.
이를 타개하려는 각종 노력이 많이 시도됐지만, 항상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다보니 국가 재정의 몰락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군사력의 약화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임진왜란 개전 직후 일주일 동안의 전투를 보자
부산진 전투 일본군 15.000명 조선군 800명
다대진 전투 일본군 7.000명 조선군 800명
동래성 전투 일본군 3.000명 조선군 2.500명
소요산 전투 일본군 3.000명 조선군 700명
작원관 전투 일본군 3.000명. 조선군 800명
전쟁 초기의 상황은 거의 대부분 위와 유사했다.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한양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이유였다.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면서도 병력을 늘리지 않았던 원인 중 하나는 일본이 공격해 오더라도 그 숫자는 많아야 1만 명 남짓일 것이라는 잘못된 판단 때문이었다.
1555년에 을묘왜변이 있었는데, 이때 조선을 침략한 왜구의 숫자는 약 5.000 ~ 7.000여명 정도였다.
조선정부는 일본이 침략해오더라도 일본군들의 군사가 많아봐야 1만명 정도겠지, 그리고 그들도 결국 왜구 정도의 전투력 밖에는 없을 것이라고 당시 일본의 국력과 군사력을 과소평가했다.
고도로 훈련된 정규군이 온다는 생각을 못하고 기껏해야 노략질이나 하는 왜구가 숫자만 조금 늘려 또 침략해올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전쟁 반대론자 고니시 유키나가의 그후 행보.
평양에서 멈춰버린 고니시의 진군
고니시의 1군은 승승장구하면서 6월 15일에 평양을 점령한다.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단지 두달만의 일이다. 선조는 국토의 끄트머리인 의주까지 피신해 명나라에 망명할 논의까지 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고니시는진군을 멈추고 7월 17일 조명 연합군이 처음으로 평양을 공격할 때까지 무려 한달 동안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왜그랬을까?
첫번째 가설은 보급에 차질을 빚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고니시가 평양을 점령할 무렵 이순신 함대는 일본 함대를 계속 격파시켜 나가며 서해 방면으로 진출하려던 일본군의 계획을 무산시켜 버린다. 게다가 각지에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은 고전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수륙양면에서 보급을 전혀 받지 못해 평양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지 않았나 짐작된다.
하지만 이 가설은 중대한 약점이 있다. 일본군이 평양을 점령할 당시 그곳에는 조선군이 후퇴하며 고스란히 남긴 양곡 수십만 섬과 무기까지 비축 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두번째 가설은 고니시가 전쟁을 더 이상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고니시는 일본장수 중 처음으로 강화 회담을 제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일본군의 전황과 고시니 자신이 불리한 입장에 있었을 때였고 굳이 전쟁의 승기를 잡고 있는 상황에서 망설인 것은 의문이다. 물론 그는 전쟁 전부터 전쟁 반대론자이기는 했지만.
고니시는 더 진출했다가 명나라 군대가 투입될 것이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히데요시는 명나라를 친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고시니는 이를 바라지 않았을 공산이 매우 크다. 그에 앞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고니시는 '사실상 조선 정벌은 끝났다.' 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고니시를 비롯한 일본군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배경은 이렇다.
일본은 그 당시 전국시대의 혼란이 끝나고 지방 영주 시대를 간신히 벗어나려는 시기였다. 이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영주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영주가 지배하고 있는 땅이었다는 것이다. 이를 수성하기 위해서 성곽을 높게 쌓아 올렸고, 땅이 점령당하게 되면 영주는 할복을 하던 도피를 하던 아무런 존재가치가 없어진다.
무사집단에서는 자신의 우월감으로 인해 신의를 얘기하며 영주의 복수를 위해 끝까지 항전하기도 하지만 일반 백성들은 그저 '또 주인이 바뀌었다' 라는 인식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달랐다. 선조의 몽진으로 혼란이 있긴 했지만 아무리 수도가 외적에게 점령당해도 군주가 있는 한 그를 중심으로 단결해야 한다는 유교적 의식이 조선에는 있었다.
일본군은 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영토만 점령하면 백성은 그저 따라온다는 의식을 가지고 유화정책을 펴기도 했고, 이는 어느정도 성과를 거두어 조선체제에 불만 있는 이들을 자기편으로 흡수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동 시대의 일본에 대해 상대적 우월감을 가지고 있던 이들이 조직적으로 의병을 조직해서 끈질기게 싸울 것이라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혀 예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런 의식의 차이를 이해했던 고니시는 평양성에서 더 이상 진군할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을까?
고니시는 후에 명나라의 심유경과 짜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짜 항복 문서를 작성해서 강화를 맺으려고 할 정도로 소극적으로 전쟁에 임하다가 2군 사령관으로 내려 앉기도 한다.
임진왜란이 종전 후 도쿠가와 이에야야스에게 대항하여 서군의주력으로 참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싸웠지만 패배한 후 처형 당한다. 그가 신봉하던 천주교도 박해 당해 결국 일본에서는 천주교의 저변이 확대되지 못하게 된다.
고니시는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서 공식적으로 칭송받는 것이 금기시 되었었다. 하지만 역사는 항상, 언젠가는 진실의 손을 반드시 들어준다.
임진왜란이 조서, 명, 일본 삼국에 미친 영향
임진왜란은 조선. 명. 일본에 다 같이 큰 영향을 주었다. 물롤 싸움터였던 조선이 전쟁으로 입은 타격은 가장 심각하여 오랫동안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렸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했다. 우리는 그 많은 침략전쟁의 피해를 입고도 얼마간의 평화만 지속되면 과거를 잊는듯 싶어 무척 안타깝다.
1. 조선에 끼친 영향
정치 상에 있어서는 비변사가 강화되고 훈련 도감을 비롯한 군사 기구의 개편이 시작되었다. 비변사는 원래 변경 방비를 위한 기관이었으나, 임진왜란을 당하자 그 기능이 더욱 커졌다.
<비변사문무낭관 계회도(備邊司文武郞官 契會圖)>, 17세기 종이 63 × 107.8 cm, 개인소장>
이전에는 군사 문제에만 관여했으나 이제는 국정 전반을 다루게 된 것이다. 그리해 의정부는 유명 무실해졌으며 비변사가 국가의 모든 행정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군사 문제에만 관여했으나 이제는 국정 전반을 다루게 된 것이다. 그리해 의정부는 유명 무실해졌으며 비변사가 국가의 모든 행정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조선 전기의 군사 제도는 양인인 농민이 군역의 의무를 지는 병농 일치를 기반으로 하는 제도로, 궁궐 수비와 수도의 방비를 담당하였던 중앙군은 중위.전위.후위.좌위.우위의 5위를 기간 보대로 하였다.이러한 군사 조직의 개병제 원칙은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비교적 잘 지켜졌으나, 16세기 이후 현역 복무 기피 현상이 생겨 다른 사람을 대신시키는 등 점차 문제점이 발생하였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종래 군사 제도의 허약함이 드러나자 월급을 주고 군인을 고용하는 군대인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그 후에 계속해서 어영청. 총융청.금위영.수어청을 설립하여 5군영 제도가 마련되었으며, 지방에는 속오군을 창설하였다.
한편 여러가지 무기도 제작되었다. 이장손이 비격진천뢰를, 변이중이 화차를 발명하였으며 이순신이 거북선을 제조하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왜의 조총이 보급되었고, 명군으로부터 서양 대포 불랑기포가 소개된다.
왜란 전에는 농지 면적이 170만 결에 달했으나 전란이 끝나고 광해군 시대에는 54만결로 줄어, 그만큼 농민의 생활이 어려워지고 국가의 조세 수입도 감소하였다. 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상자를 내어 인구가 줄고 가옥과 재산의 손실도 막대하였다.
이런 상태에서 인심이 흉흉하여 이몽학의 난과 같은 반란도 일어났다. 그리고 전쟁 중에 군량을 모으기 위해 발행한 공명첩은 조선 왕조의 신분 제도를 붕괴시키는 데 한몫을 하였다.
- 공명첩 : 벼슬을 내릴 때 주는 문서로 벼슬을 받는 사람의 이름을 비워 둔 것
- 결과 : 부유한 중인, 상민 중에서 공명첩을 받아 양반이 되는 사람이 생겨나, 신분제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
문화적인 면에서도 국보급의 문화재가 거의 불타 없어졌으며 많은 책들과 미술품들이 약탈되었다. 또한 전염병이 돌기 시작하자 허준이 동의보감을 편찬하기도 했다. 그리고 명나라의 군사 원조를 받아 숭명사상이 더욱 강화되어 훗날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초래하는 한 이유가 된다.
- 결과 : 부유한 중인, 상민 중에서 공명첩을 받아 양반이 되는 사람이 생겨나, 신분제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
문화적인 면에서도 국보급의 문화재가 거의 불타 없어졌으며 많은 책들과 미술품들이 약탈되었다. 또한 전염병이 돌기 시작하자 허준이 동의보감을 편찬하기도 했다. 그리고 명나라의 군사 원조를 받아 숭명사상이 더욱 강화되어 훗날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초래하는 한 이유가 된다.
2. 일본에 끼친 영향
임진왜란 전에 일본은 조선보다 문화적인 면에서 뒤떨어져 있어 조선문화를 동경하고 열망하였다. 왜군은 조선에 침입하자 한편으로는 싸우면서 또 한편으로는 문화재 약탈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일본에 영향을 미친 조선문화로는 공예품 인쇄술 성리학 등을 꼽을 수 있다. 공예품 중에서 일본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도자기 제작 기술이었다. 원래 일본의 도자기 제작술은 유치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조선을 능가하는 도자기국가로 성장하였다.
왜란 당시 일본은 도자기가 형편없이 질이 나빠 조선과 명으로부터 수입한 자기를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 장수들은 다투어서 자기를 약탈하고, 포로들 중 도공들을 일본으로 끌고 갔다. 이로써 일본의 도자기업은 획기적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일본 유학은 임진왜란 때 약탈해 간 많은 서적과 납치해 간 조선 유학자들에 의하여 발달하였다. 본래 일본의 학문은 보잘 것 없었으나 조선의 유학이 전래되면서 학문이 발달하여, 성리학이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의 대표적인 학문이 되었다. 일본 성리학은 퇴계 이황이 학문 계통이 그 주류를 이루었다.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1561년~1619년) 는 센고쿠 시대에서 에도 시대 초기 성리학자로 조선에서 약탈한 서적과 학자에 영향을 받음>
이처럼 일본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문화재를 약탈하고 학자들과 기술자들을 납치해 감으로써 문화가 급성장하여 에도 막부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3. 명에 끼친 영향
이처럼 일본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문화재를 약탈하고 학자들과 기술자들을 납치해 감으로써 문화가 급성장하여 에도 막부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3. 명에 끼친 영향
명나란는 전란 전 당쟁이 시작되었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명은 급속히 국력이 약해지기 시작하였다. 만주에서 누르하치가 나타나 여진 부족을 통일하고 중원을 노리게 되었고 결국 이자성이 반란을 일으켜 자금성이 함락되게 된다.
<누르하치>
명의 장수 오삼계는 반란군을 토벌하러 50만 군을 이끌고 자금성으로 가지만 자금성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험란한 요충지인 산해관으로 들어간다.
명의 장수 오삼계는 반란군을 토벌하러 50만 군을 이끌고 자금성으로 가지만 자금성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험란한 요충지인 산해관으로 들어간다.
<오삼계>
이 일은 청 태조인 누르하치에게 상당히 걱정을 끼친다. 중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산해관을 거쳐야 하는데 험한 곳에 50만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있으니 통과하려면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하고 통과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 드는 곳이다. 그러나 일은 쉽게 풀려버린다. 이자성이 오삼계의 가족을 죽이면서 오삼계는 청나라에 투항하게 되고... 청은 결국 산해관을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통과하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중원을 청에게 내어주게 된다.
이 일은 청 태조인 누르하치에게 상당히 걱정을 끼친다. 중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산해관을 거쳐야 하는데 험한 곳에 50만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있으니 통과하려면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하고 통과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 드는 곳이다. 그러나 일은 쉽게 풀려버린다. 이자성이 오삼계의 가족을 죽이면서 오삼계는 청나라에 투항하게 되고... 청은 결국 산해관을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통과하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중원을 청에게 내어주게 된다.
<이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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