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는 그동안의 신세를 깊이 감사하면서 그곳을 물러나서는
다시 해인사(海印寺)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거기서 방 한칸을 빌리고 사정을 말하여 밥을 얻어 먹으면서 상투를
매어 달고 다리를 찌르며 글을 익혔답니다.
어느해!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숙종대왕이 정시(庭試)를보이는 영을 내렸지요.
뜻은 헛되는 법이 없었습니다. 고유는 처음 치루는
과거에서 장원급제하여 금방에 그 이름이 휘날렸습니다.
그리하여 고유는 곧 가주서(假注書)로 시립(侍立)하여 왕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왕을 가까이 모시던 어느날!
마침 소나기가 쏟아져 처마에 그 소리가 요란했으므로 왕은 대신들의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숙종은 "신료들 소리가 빗방울 소리에 방해되어 알아 들을수 없구나!라고
혼잣말을 하였습니다
그것을 고유는 초지에 받아 쓰기를,
'처마에서 나는 빗 방울소리가 귓가에 어지러우니 의당 상감께 아뢰는 말은
크게 높여라' 하니 주서들이 모두 글 잘 한다고 칭찬하였습니다.
왕은 그 쓴 글을 가져오라하여 본 다음에 크게 기뻐하여
"너는 누구의 자손이냐" 고 물었습니다.
"신은 제봉 고경명(霽峰 高敬命)의 현손(孫)이옵니다."
"허~! 충성된 제봉이 손자도 잘 두었군.그래 고향부모께서는 강령 하시더냐?"
"일찍 부모를 여의었습니다."
"그럼 처자가 있겠구나."
"예, 있아옵니다."
그날밤!
숙종대왕은 고유를 따로 불러서 그의 사연을 사적으로 듣고싶어했습니다
고유는 감히 기망할 수가 없어 그가 떠돌아 다니다가
밀양 어느 마을에서 머슴을 살게 된 이야기며, 거기서 장가들어 첫날밤에
아내와 약속하고 집을 떠나 십년동안 공부를 한
그의 이력을 모두 아?었습니다.
"허허~! 그러면 십년 한정이 다 되었으니 너의 아내도 알겠구나."
"모를 줄 믿사옵니다.
과거에 오른지가 며칠이 못되와 아직 통지를 못했습니다."
"음 그래?"
왕은 그 자리에서 이조판서를 불러들여 현 밀양부사
(密陽府使)를 다른 고을로 옮기고
고유로 밀양부사를 임명하라고 분부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고유를 바라보면서,
"이제 내 너를 밀양 땅으로 보내니 옛 살던 마을에 가서 아내를 보되
과객처럼 차리고 가서 아내의 마음을 떠 보아라."
"과연 수절하며 기다리고 있는지~
변심했는지 그 뒷 이야기가 나도 궁금하구나!
대왕이 웃는다.
"하하하!"
고유는 부복사은하고 물러나왔습니다.
그는 왕이 명한대로 신연하인(新延下人)들은 도중에서 떼어놓고
홀몸으로 허술하게 차린 다음 옛 마을 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집터에는 잡초만 무성할 뿐이었고 사람의 그림자도 없이 버려진지
수년의 세월이 지난 것으로 보였습니다.
고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요.
"못 믿을 건 여심이라던가?
첫날 밤에 맺은 굳은 언약이 가슴속에 사무치건만~"
마침 가까이 소를 끌고 가는 노인을 보고 박좌수집 형편을 물으니
그가 고유인 줄은 못 알아보고는 동네의
그 늙은 이는 그가 아는 대로 일러 주었습니다.
"박좌수 어른이요?
그러니까, 그게 3년 전이었군요. 병으로 죽었지요.
그에겐 딸이 하나 있지요. 벌써 10년 전에 이 마을 머슴을 살던
고도령에게 시집을 갔는데 웬일인지
첫날밤에 신랑이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혼자 되었지만~
"허허~
신기하게도 첫날 초야에 유복자(遺腹子)가 하나 생겼어요 참 ! 똑똑하지요.
그 여자는 현숙하고도 어찌나 부지런한지~
남편이 없는데도 크게 가산을 일으키더니
땅과 살림이 무수하고 저 건너 산 밑에 백여호가 넘는 대촌을 이뤄놓았어요
모두 그 낭속(廊屬)이요."
고유는 너무도 기뻤습니다~
가산을 크게 이뤄놓은 사실이 아니라~
사랑의 언약을 지키면서 자신을 기다려줬다는 사실때문에 !
고유는 노인에게 사례하고 자신을 따르는 군속들에게는 곧
주막에서 대기하도록 하였습니다.
어슥 어슥 어둠이 마을을 감싸올 무렵~
사람들이 가르쳐주는 대로 제일 큰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서는
구걸하는 소리를 질렀다.
'얻어 먹는 인생이 한 그릇 밥을 바라고 왔오이다."
사랑방에서 늙은 스승한테 글을 배우고 있던 소년이 그 소리를 듣고 나왔다.
"들어 오세오. 손님"
고유는 그가 아들인줄 알면서도 짐짓
"아니 처마밑에서라도 좋네." 라고 하였다.
"아니 올라오세오. 우리집에서는 과객을 절대 그냥 보내지 않습니다."
굳이 올라 오라 하므로 못이기는 체 올라가 웃목에 쭈그리고 앉았다.
"저 그런데 손님의 성씨는 무었인지요"
"허 비렁뱅이에게 무슨 성이 있나. 남들은 고가라 하지만."
그러자 소년의 눈이 더욱 빛났다.
"저 그럼 손님 처가의 성씨는요.?
"10년 전에 장가들어 그도 첫날 밤을 지내고는 헤어졌으니,
무슨 처가랄 게 있을까? 그댁호야 박좌수댁이었지만..."
그때 박씨부인이 사랑에 웬 과객이 들었는데 성이 고씨라 하는 바람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아들이 나왔다.
아들의 두눈은 기쁨과 설렘으로 어머니의 눈빛을 확인한다.
박씨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들 손을 잡고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비록 10년을 떠나 살았지만 한 눈에 알 수 잇는 남편이라
기쁜 나머지 반가운 눈물을 흘렸다.
오래 그리던 회포에 쌓인 이야기를 꺼내 놓으며 열살 먹은 아들을 인사 시켰다.
고유는 그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여전히 힘없는 소리로 그의 그간 지난 일을 꾸며댔다.
"그렇게 집을 떠나서는 뜻을 이루어 보려 하였으나,
운수가 사나워 베를 판 돈은 도적을 만나 빼았겨 버리고 이리저리
유랑 걸식하여 다니자니 글을 배울 힘도 나지 않았거니와,
혹 서당이 있어 글을 배우자하여도 돈이 없으니
가르쳐 주려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 세월만 허비하고는 글은 한 자도 배우지 못하고 이렇게
비렁뱅이가 되었지요."
그러나 부인은 조금도 원망하거나 민망해 하는 빛이 없이
사람의 궁달(窮達)은 운수에 있다고 하면서
그가 벼로도 수천석 추수를 장만해 놓았으니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고 하였다.
그리고 좋은 옷과 음식을 들여 놓으며 도리어 남편을 위로하여 주었다.
고유는 음식상을 앞에 두고 부인이 가져온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그런데~
부인의 눈길에 남편의 겉옷이 걸렁뱅이 옷차림이지만 속옷은
새하얗고 께끗한 것에 놀랐습니다.
더구나 허리춤에는 관리들이 차는 명패가 흔들거리고 있었으니!
부인이
"서방님! 사실대로 말씀해주십시오~
그러자, 고유는
"나와 동행하던 사람이 있으니,
그들도 불러 들여 함께 먹어야 겠오." 했다.
그래 부인이 하인을 시켜 그 사람을 사랑방으로 모셔 들이라 하였다.
하인이 나가서 문 밖에 서 있는 과객을 보고 들어 가시자고 하자,
그는 들은 척도 않고 대로에 나가더니 품에서 호적(胡笛)을 꺼내어 높이 불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듯이
수십명의 관속들이 달려와 안으로 들어가서는 도열하였다.
그리고,박씨부인을 향해 문안인사를 아뢰고 야단이었다.
문밖에 서있던 과객은 먼저 고유의 지시를 받은 군관이었다.
고유는 그제서야
"우리부부의 사연을 들으신 상감마마께서 지시한 것이라오.
당신의 마음을 떠보려 한것이 결코 고의가 아니었오!"
군속이 관복을 가져오니 갈아입고,박씨 부인앞에 당당하게 서게되니
부인의 기쁨은 어떠하였으랴.~
그 이튿날부터 3일간 크게 잔치를 베풀어 동리의 남녀노소를 청하여
실컷 먹였습니다.
박씨 부인은 그동안 모아놓은 전답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처음으로 글을 깨우쳐 주신 서당의 스승과 해인사 중들에게도 많은
보은의 폐백(幣帛)을 보냈음은 물론입니다.
고유는 얼마 안 있어 다시 벼슬이 경상감사에 올랐다가 이조참판에
이르렀으니,
숙종과 영조, 정조대왕등 3대를 모시면서
그 영화로움이 말할 것도 없고, 부인도 나라에서 지정하는
정부인(貞夫人)이 되어 늦도록 복록을
누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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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명(高敬命)은
1533년 전라도 광주에서 출생으로
1552년(명종 8)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동래부사로 있다가 서인(西人)이 제거될 때 파직되어 낙향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왜군이 파죽지세로 한성을 점령하자 격문을
돌려 6,000여 명의 의병을 담양(潭陽)에 모아 진용을 편성했다.
큰아들에겐 전주성을 사수하게하고
금산(錦山)에서 관군과 함께 왜군에 맞서 싸우다가 작은아들
고인후(高因厚)와 함께 전사하였다.
조정에서는
의정부좌찬성에 추존하였고
광주의 포충사(褒忠祠),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종용사(從容祠),
순창의 화산서원(花山書院)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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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점은
고경명의 후손들은고경명과 함께
임진왜란때 전사한 2명의 노비들 제사도 함께 모신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