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3장 원어 해석
(32:1) 그를 만난지라 (와이프께우 보).
‘만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파가’가 본문에서와 같이 ‘베’란 전치사와 함께 쓰이면 ‘도달하다’, ‘이르다’란 의미를 지니게 된다(수18:7;17:10;19:11;22:26).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으로부터 파견 받은 천사들이 야곱을 만나려고 미리 계획을 세워 그에게 다가왔음을 보여준다.
(32:3) 세일 따 에돔 들에 있는 (아르타 세이르 세데 에돔)
‘거친’, ‘척박한’이란 뜻을 지닌 ‘세일(세이르)’은 사해와 엘람만 중간에 있는 험준한 산지였다 (33:14,16 ; 36:8). 또한 ‘붉다’란 뜻이 있는 ‘에돔’은 불그스름한 피부 빛깔을 가진 에서의 별명으로(25:25) 후에 에돔 족속이 세운 나라나 그들이 살던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에서가 굳이 이런 ‘거칠고’, ‘험한’ 산지를 자신의 거주지로 삼은 이유는 자신의 직업이 사냥꾼이어서(25:27) 수렵생활을 하기에 세일이 적합했기 때문이거나 이방인 아내들로 인한 부모와의 갈등으로 부모 곁을 떠나려 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26:34,35 : 28:8,9).
(32:3) 사자들을 자기보다 앞서 보내며 (와이쉬라흐...말르아킴 레파나이우).
‘사자’에 해당하는 ‘말르아크’는 ‘대리인’(삼상 16:19; 왕상 19:2), ‘사신’(사 14:32;33:7)을 뜻하는 말이다. 여기서는 복수형 ‘말르아킴’으로 사용되어 야곱의 종들 가운데 몇 사람이 야곱의 대리인으로 파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보내며’에 해당하는 ‘솰라흐’는 ‘보내다’(27:45; 삼하11:6; 느2:5)는 뜻 외에 메시지를 ‘전하다’(왕하 17:12; 느 6:19; 슥7:12), 선물 등을 ‘주다’(38:17, 욜2:19)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야곱이 그의 종들을 사신으로 보낸 것은 형 에서에게 메시지와(4,5절) 선물을 전달하고 동시에 형 에서가 자기에 대해 어떠한 감정을 갖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32:4) 부탁하여 (와예차우).
기본 어근 ‘차와’는 일반적으로 ‘명령하다’(레25:21; 삼하18:5; 왕상1:35)란 뜻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이를 ‘부탁하여’라고 약화시켜 번역하여 원문의 뉘앙스를 온전히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원문의 뉘앙스를 살리자면 본문은 ‘단단히 이르다’로 번역하여야 한다. 즉 야곱이 에서의 거주 지역을 지나면서 과거 자신이 형에 대하여 저지른 잘못에 대해 형으로부터 보복당할까 두려워 안절부절 못하는 마음으로 사자들에게 자기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전할 것을 다짐시키고 있음이 이 단어에서 잘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32:4) 내 주 에서에게...주의 종 야곱이(라도니 레에사우...아브데카 야아코브).
‘아돈’은 ‘주(lord)’ 란 뜻으로 하나님께 대한 호칭이기도 하지만 상전을 부를 때도 사용되었다. 야곱은 여기서 ‘라도니 레에사우(내 주 에서에게)’ 란 말을 그의 사자들에게 사용하고 있다. 야곱이 과거에 그 형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사자들은 야곱이 에서를 ‘재 주’로 부르는 것을 보고 에서를 더 높이 대우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간접적으로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사자들이 에서를 향해 경솔히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한 야곱의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실제로 제18절의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종들이 에서를 ‘나의 주(아도니)’로 부르는 것을 보게 된다. 더욱이 그들이 전달해야 할 말이 ‘아브데카 야아코브(당신의 종 야곱)’ 로 시작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사자들을 주의시키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그러나 에서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는 야곱의 곤본 의도는 그 형의 환심을 사서 노여움을 다소나마 누그러뜨리고 화해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32:4) 내가 라반에게 붙여서 (임 라반 까르티).
‘붙여서’에 해당하는 ‘까르티’의 어근 ‘꾸르’는 ‘살다(욥 28:4), ’머물다‘(21:23), ’유하다‘(시 120:5; 사 23:7)로 번역되며, 주로 나그네가 자기 가족이나 고향이 아닌 곳에서 잠시 머무는 것을 의미한다. 나그네에게는 언제나 돌아갈 고향이 있다. 야곱에게는 그의 아버지 이삭이 있는 약속의 땅 가나안(31:3)이 바로 그곳이다. 비록 야곱은 밧단아람에서 20년간이나 살았으며 많은 재산을 모았음에도 불구하고 고향이며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했던(28:13) 가나안을 결코 잊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약속의 땅 가나안을 간절히 사모하였던 야곱과 같이 우리 성도들도 세상에 잠시 머물러 있으나 반드시 돌아갈 영원한 본향 천국이 있음을 명심하고 그곳을 사모해야 할 것이다(대상 29:15; 벧전 2:11).
(32:6) 우리가...이른즉 그가...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빠누 엘...홀레크 리크라테카).
‘빠누’는 완료형으로 전치사 ‘엘’과 함께 쓰여서 ‘우리가 도착했다’란 뜻이다. 이에 비해 ‘홀레크‘는 ’할라크(오다)‘의 분사형 이어서 오고 있는 진행 상황을 말해 주고 있다. 또한 ’만나려고‘로 번역된 ’카라‘는 우호적인 목적을 가지고 만날 때뿐만 아니라 적대적임 목적을 가지고 마주칠 때(15:10; 삼상 4:2)에도 사용된다. 따라서 에서는 야곱에게 자신의 힘과 능력을 과시하며 20년간이나 참고 기다려 왔던 피의 보복을 위해서 야곱을 향해 진행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에서가 호의적인 목적으로 야곱에게 온 것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필요 없었을 뿐 아니라 이처럼 급하게 서두르지 않고 오히려 차분히 영접 준비를 했을 것이다.
(32:7) 두 떼로 나누고 (와야하트...리쉬네 마하노트)
'떼'로 번역된 ‘마하노트’는 ‘마하네(진영)’의 복수형으로 ‘쉬네(둘)’와 함께 쓰여서 ‘주 진영’으로 번역할 수 있다. '마하네‘는 ’군대의 진영‘이란 뜻이 있기 때문에 야곱이 두 진영으로 나눈 것은 준전시 체제를 갖춘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야곱이 이러한 자구책을 취한 더 근본적인 이유는 적어도 자기의 아내돌과 모든 재산을 한꺼번에 잃을 수 없다는 인간적인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제 33장에 나오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는 에서의 마음을 변화시켰고 결국 야곱의 용의주도한 사전 계획은 아무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이 사실은 결국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자는 여호와이심(잠 16:9)을 깨닫게 해준다.
한편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이미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어 야곱에게 확신을 주셨음에도(1,2절)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심하고 인간적 계략을 세우는 야곱의 불신앙적인 태도를 볼 수 있다. 즉 야곱의 행동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려는 인간의 얕은 계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성도들이 시험당할 때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 10:13)는 말씀과 같이 당신의 백성들로 하여금 모든 시험을 감당하도록 해주셨다는 시실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시험을 당할 때 무엇보다 그 시험을 통하여 이루고자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으므로 능히 시험을 이겨나가야 할 것이다.
(32:9) 내가...은혜를 베풀리라 (웨에티바).
어근 ‘야타브’는 ‘기쁘다’(왕상 21:7), ‘선대하다’(12:16), ‘좋게 하다’(신 5:28; 8:17)란 뜻으로 본문에서는 사역형 능동 연장형으로 쓰였다. 야곱은 지금 20여 년 전 하란에서 도피하던 중 하나님께서 꿈속에 나타나셔서 하신 벧엘의 언약을 기도 가운데 회상하고 있는 것이다(28:13-15).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기초한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가져온다(33:18). 따라서 성도들이 기도의 응답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인 성경 말씀에 의지하며 기도하여야 한다.
(32:16) 각 떼로 상거가 뜨게 하라 (웨레와흐 타시무 뻰에데르 우벤 에데르).
‘상거’에 해당하는 ‘레와흐’는 ‘공간(space)’, ‘간격(interval)'을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본문을 직역하면 ’그리고 너희들은 떼 사이와 떼 사이에 공간을 두어라‘이다.
(32:19) 각 떼를 따라 가는 자에게 (에트 콜 하홀레킴 아하레 하아다림).
한글 개역 성경에는 잘 드러나지 않으나 히브리어 성경에는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이란 의미의 ‘콜’이 있다. 이는 야곱이 맨 앞에 간 종들에게만 에서에게 할 말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그 뒤를 따라가는 자들에게도 일일이 할 말을 가르쳤음을 보여 준다. 또한 야곱이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에서의 분노를 풀기 위해 용의주도하게 계획하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
(32:22) 얍복 나루 (마아바르 얍보크)
‘나루’에 해당하는 ‘마아바르’는 ‘건너다’라는 뜻을 가진 ‘아바르’와 장소 혹은 수단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멤’이 결합된 단어이다. 따라서 이는 배를 대는 ‘나루’로 번역하기 보다는 걸어서 건널 수 있는 얕은 ‘여울’로 번역하는 것이 합당하다. 즉 이 용어는 물살이 약하고 수심이 얕아서 사람이나 가축들이 강을 쉽게 건널 수 있는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다(삿 3:28).
(32:24) 홀로 남았더니 (와이와테르...레밧도)
‘홀로’에 해당하는 ‘레밧도’는 ‘떨어지다’(사 14:31), ‘외롭다’(시 102:7) 란 뜻을 지니는 ‘빠다르’에서 유래하여 ‘분리된 상태’를 보여 주는 ‘빠드’와 전치사 ‘레'가 결합한 것이다. 따라서 이 단어는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상태를 나타낸다. 그리고 ’남았더니(와이와테르)‘는 ’남다‘는 뜻이 있는 ’야다르‘의 단순재귀형으로 야곱이 스스로의 결단으로 남아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처럼 야곱은 힘겨운 문제를 앞에 두고 어찌해야 할지 몰라 다른 사람과 격리된 장소에 혼자 남아 고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는 상태에 있을 때 야곱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당면한 문제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있는 근본적인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모든 것을 뒤로 하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러할 때 야곱과 같은 놀라운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32:24) 씨름하다가 (와예아베크)
어근 ‘아바크’는 원래 ‘먼지에 쌓이다’, ‘붙잡다’란 뜻이다. 이는 땅에서 먼지가 일어나 쌓일 정도로 서로 붙잡고 격렬하게 싸우는 모습을 묘사하는 말로써 ‘씨름하다’, ‘맞붙어 싸우다’란 뜻을 지녔다. 본문에서 이 단어가 사용된 것은 야곱과 하나님의 천사와의 씨름이 매우 격렬했음을 보여준다.
한편 일부 학자들은 야곱이 씨름했다는 말을 야곱의 필사적인 기도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야곱의 환도뼈가 실제로 위골된 것과(25절) 호세아 선지자의 말을 종합해 볼 때(호 12:2-4) 실제로 하나님의 사자와 야곱이 씨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씨름은 단순한 힘겨루기만은 아니었다. 즉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에게 매어달려 울부짖으며 처절하게 간구하는 기도까지 포함된 씨름인 것이다. 물론 야곱은 처음에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사자인지는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가 곧 하나님의 사자임을 알게 되었고(26절) 자신의 생애 최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하나님께 복을 간구했던 것이다.
(32:25)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와야르 키로 야콜 로)
직역하면 ‘그리고 그는 그가 그를 이기지 못할 것을 보았다’이다. 여기서 ‘이기지’에 해당하는 ‘야콜’은 ‘승리를 얻다’(삼상 26:25)란 뜻 뿐만 아니라 ‘능력이 있다’(13:6; 출 7:21), ‘우세하다’(왕상 22:22; 렘 3:5)란 의미도 있다. 따라서 본문의 뜻은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에게 패배를 당했다는 말이 아니라 야곱의 매달리는 것을 눌러 꺾을 수 없었다는 의미이다.
이는 성도가 하나님께 필사적으로 매어달리며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시지 않을 것임을 암시해 주는 말이기도 하다. (마 7:7, 8)
(32:25)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와익가 뻬카프 예레코)
본문을 직역하면 ‘그러자 그는 그의 넓적다리 바닥을 쳤다’이다. 여기서 ‘넓적다리’에 해당하는 ‘야레크’는 ‘넓적다리’(24:2,9; 출 1:5; 28:42; 민 5:22)외에 ‘허리’ (출 32:27; 시 45:3)로도 번역된다. 허리나 넓적다리는 다같이 인간의 생식기관과 관련된 부분이며 생의 원천을 상징한다(히 7:5). 또 넓적다리를 손바닥으로 치는 것은 깊은 슬픔과 수치나 애절한 회개의 표시였고(렘 31:19; 겔 21:12) 서약을 행할 때에는 넓적다리 아래에 손을 넣고 서약함으로써 서약에 대한 보증과 신실성을 표현하였다(24:2; 47:29).
그리고 ‘바닥’에 해당하는 ‘카프’는 ‘우묵한 곳’, ‘바닥’, ‘구멍’을 뜻하는 말이나 여기서는 ‘넓적다리의 우묵한 부분’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문이 말하는 환도뼈의 정확한 부위는 둔부 아래쪽에 있는 좌골로 엉덩이의 골반을 형성하는 좌우 한 쌍의 뼈(24:2)이다.
한편 ‘쳤다’에 해당하는 ‘나가’는 ‘닿다’ (3:3; 레 5:3; 단 8:5), ‘만지다’(잠 6:29)란 뜻으로 분문에서는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을 때린 것이 아니라 단지 만지기만 하셨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사자가 만지기만 했는데도 야곱이 무기력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위대성을 보여 준 것임과 동시에 인간의 무능함과 한계를 다시 한번 보여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을 알고 이를 의지해야 한다.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 19:26).
(32:25) 위골되었더라. (왓테카)
이에 해당하는 어근 ‘야카’의 기본 의미는 ‘찢어지다’, ‘탈골되다’란 의미가 있다. 따라서 본문은 뼈가 살을 찢고 삐져 나가 탈골된 상태나 뼈가 부러진 상태라고 볼 수도 있다. 한편 하나님께서 야곱의 환도뼈를 위골시키신 이유는 육신을 믿고 살아온 야곱에게 육신의 나약함을 일깨워 주기 위한 것이었다. 동시에 야곱이 하나님을 상대로 씨름할 때 버티던 힘의 근원을 치심으로써 더 이상 하나님을 경쟁자로 여기지 못하게 하셨으며, 꺾인 다리를 통해 그가 붙들고 의지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란 사실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신 것이다. 어느 부모가 불구자가 되게 하려는 목적으로 자식을 치겠는가? 여기서도 하나님은 더욱 의지가 되어 주시기 위해 징계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랑의 징계를 내리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히12:11). 또한 생식과 관련된 환도뼈를 위골시키신 것은 앞으로 태어날 야곱의 후손들 즉 언약의 우사들인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하나님만은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32:27) 네 이름이 무엇이냐 (마 쉐메카)
‘이름’에 해당하는 ‘쉠’은 단순히 어떤 사물이나 사람의 호칭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존재, 성격, 속성을 대표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어보신 것은 야곱에게 새롭고 영광된 이름을 부여하기 전에 ‘발뒤꿈치를 잡은 자’, ‘속이는 자’ 등의 부정적인 의미의 옛 이름(27:36)을 고백시킴으로써 새롭게 부여할 이름의 가치와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함 인 것으로 이해된다.
(32:28) 이스라엘이라 (임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사라’ 와 ‘엘’ 이 결합된 단어이다. 그런데 히브리어 ‘엘’은 하나님을 뜻하는 것이 명확하지만 ‘사라’는 본절 후반부에 ‘겨루다’ 외에는 성경에 단 한 번 밖에 나오지 않으므로 (호 12:5) 그 뜻이 다소 모호하다. 이 단어는 ‘고집하다’, ‘견디다’, ‘노력하다’는 뜻이 있는 것으로 보여지지만 본문에서는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대로 ‘겨루다’ 즉 ‘싸우다’란 의미로 사용된 듯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이 ‘하나님에 대항하여 싸운 자’란 뜻은 아닌 듯 하다. 왜냐하면 감히 인간은 하나님과 대항하여 싸울 수 없으며, 또한 이름의 뜻으로도 적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과 더불어(with) 싸운 자’ 즉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싸운 자’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다.
(32:31)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웨후 촐레아 알 예레코)
한글 개역 성경에는 ‘그리고 그가’에 해당하는 ‘웨후’가 생략되었다. 그러나 이 단어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은 히브리어에서는 보통의 경우 인친 대명사를 독립하여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굳이 여기서 ‘그’란 인칭 대명사를 따로 사용한 것은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던 자가 바로 다름 아닌 야곱이라는 사실이 이 단어 가운데 암시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절었더라’에 해당하는 ‘촐레아’는 ‘절뚝거리다’를 뜻하는 ‘찰라’의 분사형으로서 ‘계속 절뚝거렸음’을 보여 준다. 이는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한 것이 간절한 기도를 나타내는 문학적 표현이거나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실제 사건임을 보여 주는 강력한 증거이다. 이러한 야곱의 환도뼈의 위골이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은 첫째 야곱의 옛 사람이 깨어졌다는 것이요, 둘째 야곱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은혜의 흔적을 가진 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갈 6:17).
이와 같이 변화된 야곱처럼 우리 성도들도 이제는 과거와 같이 인간적인 지혜를 따라 살던 옛 사람의 모습을 버리고 언약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야 할 것이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쫓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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