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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근대교회사(I. 이성종교~XIV. 에큐메니컬 운동)

근대교회사

                     (I. 이성종교~XIV. 에큐메니컬 운동)



I. 이성종교


I. 이성종교
칸트에 의하면 무엇보다도 이성 종교는 계시 종교와 확연히 구분된다. 그 구분의 계기는 계시 종교가 초자연적인 경험인 계시를 인정하여 도덕적 명령도 신의 계시로 말미암아 인식된다고 주장하는 반면, 이성은 이러한 '계시'(offenbarung)를 인정 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이리하여 이성적 입장에서는 어떤 것을 신의 명령으로서 인정하기 전에 그것이 의무인 것을 먼저 알아야 하며, 만일 의무를 인정하기 전에 신적인 명령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거짓된 것이다. 따라서 자연의 도식과 은총의 관계는 그것이 도덕적.종교적 행위에 대한 보상을 위해 신이 초자연적 방법으로 노력하는 것을 의미하는 한, 잘못된 생각이며 곧 금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중략)

3. 이신론의 팽창과 소멸

이신론은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난 사상이었다. 그것은 17세기 영국에서 일어나 프랑스, 독일 그리고 미국으로 퍼져 나갔다. 이신론자들은 하나님이 피조물 위에 초월해 계시다고 믿었다. 그리고 자연은 자연의 법칙에 의해서 운행되고 그 법칙은 이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성은 모든 것을 감지하고 주관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 세계를 자연법 아래 두어 운행되게 하셨다고 믿으니 자연히 기적은 인정될 수 없었다. 그러자니 기적으로 가득 찬 성경의 내용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하나님의 계시, 예언, 섭리 그리고 신인으로서의 그리스도등등의 내용도 처치 곤란한 것이었다. 자연신론자들에게는 예수가 단지 도덕을 가르친 선생으로밖에 이해될 수 없었다.

당연히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타락 같은 교리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이 주신 최상의 것으로서 그 안에 ‘모든 덕과 경건’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 인간은 잘못을 회개하고 도덕률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도 있으니 죽음 뒤에는 선악에 대한 상벌이 있어야 공평한 것이라 했다. 그러니 몸은 죽어도 영혼은 계속 살아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신론자들에게 모든 종교는 근본이 같은 것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 레씽은“세 반지”라는 글에서 이 입장을 설파했다. 어느 부자가 신비한 반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 반지를 가진 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게 된다는 전설이 있었다. 이 부자가 죽을 때 세 아들은 각자 아버지로부터 그 반지를 받게 되었다. 세 아들은 각각 자기만 그 반지가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나중에 그들 모두가 다 반지를 가졌음을 알게 되었고 그들은 나단이란 지혜자에게 진짜 반지를 가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나단은 말했다. “나는 그런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 스스로가 자기 반지가 진짜임을 증명하라. 먼 훗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이가 진짜 반지를 가진 자다.”이 세 아들은 곧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신론자들에게 교리는 간단한 것이었다.
영국의 이신론(자연신교) 운동의 창시자인 췌베리의 허버트(Herbert of Cherbury, 1583-1648)는‘진리에 관하여’(De veritate)(1642)에서 5가지 보편적 종교원리를 내세웠다. 그것은 ① 신이 존재한다. ② 우리는 그를 예배할 의무가 있다. ③ 덕을 실천하는 것이 참 예배이다. ④ 우리는 죄를 뉘우쳐야 한다. ⑤ 사후에 상벌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 다섯 조항에 자연신론의 근본요소들이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계시의 도움 없이 이성의 능력으로 모든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보편적 종교 원리들이라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자연신론의 가르침은 곧 윤리였다. 하나님은 우리가 선행할 때 기뻐하신다는 것이 저들의 가르침이었다.

존 로크(John Locke, 1632-1703)는‘인간의 이해’와 ‘기독교의 합리성’에서 위와 같은 교리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계시의 고유한 역할을 주장하였다.

① 그는 무엇보다 먼저 전통(tradition)의 권위를 배격했다.

② 그는 종교에 있어서 이성(reason)의 역할을 재확인했고, 이성의 권위를 높였다.

③ 그는 하나님의 존재가 논증에 의해 증명될 수 있다고 했다.

④ 그러면서도 그는 계시를 부인하지 않았다. 물론 계시도 이성에 의해 이해되어진다고 했다.

⑤ 그의 기독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지적 확신이었다.
신앙의 내용을 인간의 이성만이 발견, 이해, 해석할 수 있다. 신앙은 이성 위에 세운 집이라고 했다.

⑥ 그는 기독교 진리의 단순성을 강조했다.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한 분 하나님을 믿어야 하며 예수가 메시아임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해야 하며 개선된 생활을 하여야 한다. 이와 같은 내용이야말로 얼마나 단순하고 합리적인가!라고 했다. 그래서 존 로크는‘상식의 사도’라고까지 불리었다.

⑦ 그는 도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예수가 메시아임을 믿는 믿음은 회개와 아울러 선한 생활이 병행해야 한다. 신앙에는 행위가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존 톨란드(John Toland, 1670-1722)는 1696년 ‘신비하지 않은 기독교’에서 ‘합리적’(Reasonable)이란 말을 ‘신비하지 않은’(Not Mysterious)으로 대치하면서 기독교에서 신비적이라고 간주되는 것은 모두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매튜 틴달(Matthew Tindal, 1655-1733)은‘창조만큼 오래된 기독교’에서 기독교는 창조질서와 함께 시작된 즉 자연질서와 조화되는 종교임을 주장했다. 기독교=자연종교=참종교라고 했다.

이러한 이성의 종교는 그 힘을 한없이 뽐낼 것 같았다. 하지만 얼마가지 못하여 그 힘을 잃게 되고 다른 이성의 가르침에게 자리를 양보하였다. 이성의 종교는 그 스스로 가진 모순때문에 숭배자들에 의해서 무너지고 만다. 영국의 버틀러, 데이비드 흄이나 대륙의 장 자크 루소, 임마누엘 칸트에 의해서 이성의 종교는 비판을 받고 사상계는 다른 단계로 발전해 나갔다.

이신론은 자신 스스로 단순하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너무 추상적이고 너무 지성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감정적이거나 심미적인 요소가 없었다. 너무도 메마르고 차가운 분위기만을 제공할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이성의 종교는 통일된 주장을 펴지 못했다. 무슨 공통된 의식의 예배나 함께 고백할 신앙도 없었다. 대중의 마음을 움직일 아무것도 갖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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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자연신교에 대한 반발

1) 윌리암 로

윌리암 로(William Law, 1686-1761)는 그의 저서「이성의 경우」에서 틴달의「창조만큼 오래된 기독교」의 주장을 반박했다. 틴달이 영적 교만은 가장 악독한 교만이라고 지적한 것에 대하여 반박하며 로는 이성을 지나치게 과신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악독한 교만이라고 지적했다. 이성의 능력은 죄로 말미암아 제한되어졌다. 이성은 죄의 결과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한다. 이성은 죄의 세력을 꺾지 못하며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시키지 못한다. 이성을 초월하는 것(예언, 이적)을 믿는 것은 이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로는 이성의 기능을 완전히 부인하지 않으면서 계시와 이성의 조화를 유지하려고 했다.

2) 죠지 버클리

죠지 버클리(George Berkeley, 1685-1753)는 첫째, 하나님의 존재를 복잡한 논증에 의해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 18세기 자연신교의 입장을 강력히 반박했다. 유신론증에 근거한 신앙은 무신론보다 나은 것이 별로 없으며, 신앙이란
논리적 작업 이상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둘째, 자연종교와 계시종교와의 화해를 시도했다. 이성과 자연종교는 그것으로서의 정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각기 자기의 정당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자연종교와 계시종교의 근원은 다같이 하나님이다. 자연종교에 대한 참된 신앙은 필연적으로 계시종교를 받아들이게 한다. 자연종교는 계시종교에 의해 완성된다.

셋째, 계시종교를 변호했다. 유용성에 근거해서 계시종교는 우리에게 빛, 기쁨, 평화, 믿음, 소망, 사랑을 공급해주며 선행과 학문과 문명을 격려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운동력을 자연종교는 제공하지 못한다. 또한 기독교 신앙의 진리와 개연성에 근거하여 계시와 영감이 비록 신비롭게 보일지 모르나 그렇다고 거짓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계시의 형태와 방법은 비판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도 그 내용은 만족한 해답을 제공한다. 계시비판의 대부분의 이유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개연의 논증은 신앙의 충분한 근거가 된다. 즉 버클리는 도덕적 증거와 자연적 논증에 근거하여 계시종교를 변호했다.

3) 조셉 버틀러

조셉 버틀러(Bishop Joseph Butler, 1692-1752)의 저서「종교의 유비」는 자연신교 논쟁을 종식시킨 저술이었다.

첫째, 이성의 기능과 위치를 인정했다. 이성은‘우리 속에 켜놓은 주님의 촛불’이라고 했다.

둘째, 이성의 기능의 제한성을 지적했다. 이성이 보여줄 수 없는 많은 진리들이 있다. 이성은 완전한 지식의 체계를 제공하고 증거하지 못한다. 이성은 기껏해야 개연적 결론을 제공한다.

셋째, 계시의 도움이 필요하다. 인간의 지식은 불완전하다. 그러므로 도움이 필요하다. 특별계시가 주어졌다는 자체가 자연의 빛의 불충족성을 드러내고 있다.

넷째, 계시는 이성 및 자연종교와 모순되지 않고 일치한다. 자연의 빛과 계시의 및 사이에는 큰 유사성이 있다. 자연종교는 기독교의 기초가 되고 계시는 기독교를 완성한다.

다섯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시의 요소들 가운데는 인간의 제한된 이해로서는 쉽게 파악할 수 없는 독특한 요소들이있다.

조셉 버틀러의 위와 같은 주장은 계시의 의미와 중요성은 강조했으나 계시의 절대성, 초월성, 특수성을 충분히 강조하지 못했다. 자연종교가 해결하지 못하는 모호한 문제들을 계시 종교가 해결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이점을 충분히 강조하지 못한 것은 그의 약점이었다. 그는 단지 계시종교에 대해 가해지는 반대가 자연종교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또한 계시의 진리성의 근거를 계시 내용의 개연성에 두었다. 더 나아가 종교적 신념을 논증에 의해 얻어진 견해로 보고 전인격적 확신이나 신앙의 행위로 이해하지 않았다.

4) 데이빗 흄

데이빗 흄(David Hume, 1711-1776)은 자연신교와 합리주의의 오만함을 여지없이 무너뜨린 경험론적 회의주의 철학자였다. 그에 이르러 합리주의는 몰락하고 새 시대의 장이 열리게 되었다. 흄은 자연신교와 아울러 정통신학을 동시
에 공격했다. 그의 저서 중에는「인간성에 대한 연구」, 「종교의 자연적 역사」,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등이 있다.

첫째, 자연신교는 이성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과장하여 강조했다고 지적했다. 이성은 행동을 낳지도 못하고 방지하지도 못하며 욕정을 다스리지도 못한다. 이성은 결국 노예에 불과하다. 이성의 기능은 제한되어 있다.

둘째, 경험이 유일한 근원이요 자료이다. 경험을 통해서만 존재여부를 파악하며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흄은 경험과 아울러 감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도덕적 특성은 이성에서 비롯하지 않고 감정에서 비롯한다고 했다.

셋째, 엄격한 칼빈주의를 공격했다. 유신론의 배타적 주장은 오만하고 위험한 주장이라고 했다. 그는 이적의 실재를 부인했고, 특별계시를 배제했다.

넷째, 결국 그는 종교에 대해서 하나의 중립적 관찰자의 자세를 취했다. 어떤 종교의 입장을 신종하는 것으로부터 초연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흄은 무신론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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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칸트의 계몽주의

이러한 상황에서 관념론과 경험론의 양쪽을 쥐고서 철학을 정립한 이가 그 유명한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였다.

칸트는 1724년 4월 22일 동프로이센의 수도 쾨니히스베르크(현재 리투아니아의 칼리닌그라드)에서 마구(馬具) 제조업을 경영하는 부친과 경건주의의 신
앙이 깊은 모친 사이에서 출생했다. 1740년 쾨니히스베르크대학에 입학하여 신학·철학 등을 공부하였으며 1747년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고향 근처에서 가정교사를 하면서 공부를 계속했다. 1755년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형이상학·논리학 담당 강사가 되었고, 이어 1770년에 정교수가 된 뒤 96년 노령으로 은퇴할 때까지 5기에 걸쳐 학부장으로 재직했다. 그 동안 형이상학·논리학·윤리학·자연지리학·인간학을 비롯한 여러 학과에 걸쳐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많은 저서를 썼다.

칸트는 인간이 스스로 대답을 찾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시할 수도 없는 형이상학적인 짐을 지고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그는‘순수 이성 비판’에서 이러한 갈등에 대한 해답으로“신앙이 있을 자리를 주기 위해서 지식을 거부해야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한다. 현상의 세계에서 사람은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지만 사유적 세계에서는 자유를 누린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신앙과 이성을 분리시켰던 것에 반하여 신앙을 경험적 지식과 구분시켰다. 신앙은 비이성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그가 보는 신앙의 의미는 전통적인 것과 좀 다른 것이었다. 칸트는 신앙의 이성적인 형태가 있다고 믿었다. 그가 보기에 지식과 신앙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르지만 서로 똑같이 필요한 이성의 다른 면들이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그는 새로운 가설에서 시작한다. 이성은 수동적으로 외부에서 정보가 들어오는 대로 받기만 하는 게 아니다. 이것은 능동적인 것이다. 그 안에 스스로의 기능이 있어서 마음으로 들어오는 자료들을 묶어 분석해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모든 경험은 이러한 이성의 작용에 의해서 지식으로 축적이 된다. 여기서 앞에 말한 데카르트와 베이컨이 만나는 것이다.

경험의 범주에 따라서 지식은 얻어진다. 그런데 인간 이해의 한계 때문에 경험할 수 없는 대상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경험의 범주 밖에 있는 대상을 상상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성은 그러한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지식을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 속에는 신앙의 대상들이 포함되어 있다. 즉 하나님, 천사, 마귀, 영혼 등을 어찌 이성으로 있다 없다 말할 수 있으랴!

과거에는 이성주의자들이 제멋대로 이러한 영적인 개념들을 다루고 이론들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그러한 대상들은 이신론자들의 소위 과학적인 방법으로 도저히 증명할 수도 알 수도 없는 존재가 아니던가! 그러한 존재들은 인간 이성의 범주 밖에 있는데 그들이 어떻게 기독교의 교리가 타락했는지 미신인지 간단히 판단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그는 확실한 명제를 세웠다. “순수한 이성의 한계로는 이성의 범주 밖에 있는 대상이 있다 없다 말할수 없다.”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성의 한계 안에서 설명할 수 있는 종교를 말해 보자. 순수한 이성은 초월적인 존재를 알 수 없지만 실천적인 이성은 안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도덕률이 그것이다. 배우지 않아도 양심은 도덕을 외치고 있지 않은가.

그가 볼 때 도덕심은 신의 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이성의 한 기능이었다. 이성에는 분석하고 이해하는 기능만 있는 게 아니라 선한 것을 원하는 기능이 있음은 경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천 이성이었다. 여기에 그는 종교를 세우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성의 한계 안의 종교는 단순한 윤리가 되고 말았으니 결국 이신론자들의 교리를 반복한 셈이 되고 말았다.

1789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이때부터 교회사는 현대로 들어간다. 인간의 이성이 자유를 얻어 마음대로 갈수 있게 된 시대가 된 것이다. 칸트의“감히 알려고 하라.”는 명제는 이성의 활동을 최대한으로 키우게 하였다. 인류는 새로운 시대를 향해서 힘차게 발돋움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인간 이성의 중요성이 강조될수록 계시와 은총의 차원은 움츠러들 뿐이었다.

이신론자들은 현대의 성경에 대한 고등 비평 체계를 만들어 내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기독교가 이신론으로 부터 얻은 유익도 있다. 신교(信敎)의 자유가 등장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이 이신론자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성적인 종교 사상들은 거리낌 없이 주장되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 이신론자들이 학문 연구를 자극한 것은 본문 비평과 주석 분야에서 유익한 결과를 낳았다.



II. 경건주의 운동


한 세대가 지나자 종교 개혁은 본래의 열정을 잃게 되었다. 목회자들은 예배의 열정보다 형식을 더 강조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신앙은 생활과 더욱 거리가 생겼다. 당시를 풍자하는 만화는 이 점을 부각시켰다. 목사는 원고 뭉치를 읽고 있고 신자들은 교회당 아래, 위층에서 모두 다 침을 흘리며 자고, 성탄절에 한 목사는 마구간 만드는 법을 설교하고 있었다. 끝없는 교리 논쟁은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에 대한 관심을 잃게 만들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면 되지 행위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생각했다. 이러한 분위기에 대항해 신앙을 실생활에 적용시켜 보려는 신자들의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다.

1. 경건주의의 시조 필립 야곱 스페너
(Philip Jacob Spener, 1635-1705)

이러한 풍조에 대항해 일어난 것이 스페너의 경건 운동이었다. 필립 야곱 스페너(Spener)는 1635년 알사스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때는 30년 전쟁의 중간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공작의 고문으로 경건한 사람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더욱 경건하였다. 그의 큰누나의 남편도 뛰어난 목사였다. 그의 가정은 그가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 경외하는 것을 철저하게 가르쳤다.

그의 아버지 서재에는 장서들이 대단히 많았다. 스페너는 거기서 존 아른트의‘진정한 기독교’란 책을 읽고 감명을 받는다. 거기에는 당시 기독교의 무능을 비판하는 글이 있었다. 신학적인 논쟁 자체에만 몰두하거나, 능력은 없이 교리만 외워서 하는 신앙생활은 빈껍데기와 같다. 신앙과 생활은 절대로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생활에서 실천되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그는 열여섯에 스트라스부르그 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석사 학위를 받은 후 역사학 강사로 있으면서 신학에 몰두했다. 그러다가 루터의 글을 만나 매혹되었다. 그는 구원은 죽은 뒤에나 오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현재 느끼는 것임을 배운다. 이렇게 해서 아른트에게서 배운 실천적 신앙은 루터에게서 원동력을 얻게 된다. 신자는 믿음으로 생활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을 매순간 느끼는 것이다.

경건주의는 하나님에 대한 내적인 경험을 실제적인 윤리생활에 나타나게 하는 것을 주요한 가르침으로 삼고 있었다. 참 신앙은 행동으로 표현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목사가 된 후 스페너는 루터가 가르친 믿음의 의와 실천을 설교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잘 적용되지 않았다. 그들은 교리를 외우는 정도로밖에 훈련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신자들을 자기 집에 불러 모으고 성경 공부와 기도 그리고 예배를 강조하였다. 신앙을 위한 토론회도 가졌다. 그 결과 신자들의 신앙은 성숙해졌고 교회는 크게 부흥했다.

이러한 성공의 결과 때문에 스페너는 1670년 프랑크푸르트의 초청을 받아 그 도시의 12명 이상 되는 고참 목사들을 통괄하면서 성경 과목을 강의하는 한편, 큰 교회 담임 목사가 되었다. 다른 목사들도 스페너의 모범을 따랐으며 경건주의자들의 숫자는 급속히 증가하게 되었다. 1692년에는 할레(Halle)에 대학이 세워졌으며, 그 후 오래지 않아서 그 대학은 경건주의의 중심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죽은 정통’이 있는 곳에 ‘살아있는 믿음’이 회복되었다.

경건주의는 신비주의가 아니었다. 신비주의(mysticism)는 사람들을 세상 생활로부터 격리시켜 성경에서 ‘착한 행실’이라고 부르는 것들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그러나 경건주의는 겸손을 실천하고 여러 가지 유용한 일들을 실천하기에 힘썼다.

스페너는 50세 때에 프랑크푸르트를 떠나 드레스덴(Dresden)으로 가서 선제후 게오르그 3세(Johann George Ⅲ)의 궁전에서 설교 책임자가 되었다. 여러 대신들은 그를 조롱하고 비웃었다. 결국 스페너는 드레스덴을 떠나 베를린에서 일하라는 소명에 순종하였다. 여기에서도 1705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했다.

루터교회로부터 열심 있는 신자들을 끌어내는 것이 스페너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들을 더욱 영적으로 훈련시켜 루터교회 안에 남아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더욱 유용한 신자들이 되도록 돕는 것이 그의 관심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자들은 그의 가르침을 기성 교회를 떠날 수 있다는 선언으로 이용했다. 그리하여 여러 집단들이 생겨나서 기성 교회의 틀을 벗어나서 활동하게 됨으로써 루터파 교인들을 분열시켰다는 심한 비난을 받게 되었다.

스페너는 1675년‘경건의 열망’(Pia Desideria)을 출판했다. 경건주의 운동의 헌장이 된 이 저서에서 스페너는 경건주의의 성격을 제시했고, 당대의 죄악들을 단죄했다. 그가 제기한 그 시대의 죄악상은 교회에 대한 정부의 간섭, 성직자의 합당치 못한 삶, 평신도들의 술취함과 부도덕과 이기주의 등이었다.

이 저서에서 스페너는 개신교 개혁을 위한 여섯 가지 제안을 했다.

그 내용은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가 성경을 열심히 공부할것, 만인제사장직의 실제적인 표현, 즉 모든 신자들이 제사장임을 알고 더 적극적으로 교회 생활에 참여할 것, 선한 행위가 동반된 신앙을 강조할 것(신앙과 선행은 분리될 수 없다. 이를테면 신앙은 태양이고 선행은 태양의 빛이다.), 논쟁을 피할 것, 교역자들의 영성 훈련을 강화하고 신학 교육을 현실적으로 개혁함으로써 신학과 실천이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할것, 학문적인 설교보다는 신자들의 신앙을 길러주면서 말씀에 순종하게 하는 설교를 할 것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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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

(August Hermann Francke, 1663-1727)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는 1663년 뤼벡(Lubeck)에서 법학박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프랑케는 소년 때부터 매우 종교적이었으나 대학을 졸업하면서 종교에 무관심하게 되었고, 깊은 종교적 고민과 갈등을 경험하게 되었다. 2년 동안은 깊은 종교적 회의에 빠져서 하나님의 존재까지 의심했다. “오 하나님이시여, 당신이 존재하신다면 나에게 보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고백하기를“내 자신을 구원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나는 더 깊은 불안과 회의 속에 빠져 들어갔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신약성경을 펴들고 있는 프랑케를 향해서 그의 기숙사 사감선생이 “그렇다, 이 책 속에 우리는 놀라운 보배를 소유하고 있다.”고 하였다. 바로 그때 프랑케의 눈은 고린도후서 4장 7절(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을 읽고 있었는데, 프랑케는 그와 같은‘섭리적인 일치’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고 자기의 허물과 죄악을 돌이켜 보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프랑케는 또한 1687년 요한복음 20장 31절에 근거한 자신의 설교에 감화를 받아 회의와 절망으로부터 벗어나 영혼의 평안을 체험했다고 한다. 1688년에는 스페너를 방문하여 수개월동안 그와 함께 드레스덴에 머물면서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후, 1689년 초에 라이프치히로 돌아와 성경공부 반을 지도함으로써 경건주의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의 강의가 마을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게 되자 그를 지지하는 이들이 점점 증가했다. 이에 대학 당국은 프랑케가 대학에서 분열을 일으키고 마을 사람들을 동요시킨다는 것을 이유로 프랑케의 경건주의 운동에 제재를 가했다. 그는 결국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밀려났고, 그 다음에 에르푸르트(Erfurt)로 옮겨갔다. 그런데 거기서도 그의 경건 운동은 박해를 불러왔다. 그는 경건주의자로 낙인찍혀서 에르푸르트에서 48시간 이내에 떠나라는 통지를 받았으며, 같은 날 신설된 할레(Halle) 대학의 교수로 초빙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1692년 그는 할레에서 목사와 교수가 되었으며 그곳에서 35년 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경건주의가 널리 그리고 오랫동안 힘을 발휘하도록 봉사하였다.

프랑케는 스페너의 영향과 브란데부르크 선제후의 후원을 힘입어 할레 대학에서 경건주의 운동을 주도했다. 그리하여 할레 대학은 곧 경건주의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프랑케와 대부분의 경건주의 지도자들인 할레 대학 교수들은 경건주의와 루터교의 전통적 신학을 비교하는 일에 열심을 쏟았고 전통적인 신학을 서서히 수정하기 시작했다. 이들에 의해서 경건주의 운동은 신학적으로 체계화되기 시작했다. 할레 대학은 보다 덜 논쟁적인 신학, 보다 덜 냉담하고 보다 덜 세속에 물든 교회, 성경에 정통하고 사랑의 실천에 열심을 내는 그리
스도인의 교제를 강조했다.

프랑케가 말하고 있는 사역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그의 관심에서 우러나왔다.

할레 대학의 신학 교수이자 대학 인근에 있는 마을인 글라우카우(Glauchau)의 목사였던 프랑케는 1695년에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한 무료 초등학교를 세웠고, 2년 후에는 중등학교를 세웠다. 프랑케는 가난한 사람들이 겪는 불행에 충격을 받아 기부금 상자를 만들어 거기서 생기는 돈을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전에 보다 엄청나게 많은 돈이 모금되어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다. 이것이 바로 할레에 세워지게 되는 많은 교육기관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모두 2,507명의 어린이들을 도와주고 교육을 시켰다. 이 모든 것을 기부금으로 운영했고 그들을 가르치는 교사는 175명이었다.

프랑케는 또한 고아들을 위한 고아원도 세웠다 그것은 믿음의 금자탑이었다. 왜냐하면 프랑케에게는 이러한 기관을 세울 만한 능력이나 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믿음과 기도로 고아원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독일 각지의 친구들과 뜻있는 자원자들이 기부금을 보내었고, 오로지 이 기부금만으로 운영되어 갈 수 있었다. 아울러 성경학교를 설립하여 많은 평신도들에게 성경지식과 신학적인 지식을 보급했다. 또 극빈자를 위한 병원, 과부들의 쉼터, 라틴어학교, 성경 출판사,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무료 숙박소 등 여러 기관들을 두루 세웠다. 1710년에는 성서협회를 설립하여 성서를 싼값에 출판하여 보급시켰다. 이와 같은 사업을 돕기위해 유럽 각처에서 무명의 헌금이 넘치도록 들어왔다. 이것은 프랑케가 강조했던 기도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이었다.

프랑케의 지도 하에 독일 전역으로 확산되어 가던 경건주의 운동은 성경연구와 토론 그리고 그것을 일상생활과 경건생활의 함양에 적용하는 것을 강조했다. 또 성경의 조명자로서의 성령의 기능을 강조했고 신앙의 표현으로서의 선행도 강조했다. 그리하여 독일의 루터 교회 안에 새로운 영적 활력이 주입되었다. 다시금 열심 있는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을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목회자들의 영적인 능력이 향상되고, 평신도들의 교회 사업 참여가 확장되었으며, 성경연구에 힘쓰게 되었다.

경건주의자들은 개신교 선교의 개척자들이었다. 이들의 선교에 대한 열심은 대단했다. 드디어 경건주의자들이 해외선교에 눈을 돌리게 되는 계기가 주어졌다. 경건주의의 예찬자인 덴마크의 왕이 인도에 있는 그의 식민지들에 처음으로 시도하는 선교활동을 위해 프랑케에게 할레 대학에서 선교사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프랑케는 1705년에 남 인도에 첫 번째 선교사들을 파송했다. 이들의 편지와 보고서가 독일 경건주의자들에게 큰 선교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리하여 할레는 국내외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아시아, 아프리카, 태평양 제도에서 할레 출신의 선교사들의 선구자적 사명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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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교도들
(Zinzendorf and Moravians)


스페너와 프랑케의 경건주의는 루터파 귀족인 진젠도르프의 백작 니콜라우스 루드비히(Nikolaus Ludwig, Countvon Zinzendorf, 1700-1760)의 일생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아버지는 진젠도르프가 태어난지 6주만에 죽었다. 진젠도르프는 프랑케의 개인적인 친구였던 할머니에 의해서 양육되었다. 10세 때에 할레에 있는 프랑케의 문법학교로 보내졌으며, 거기에서 그는 영적 생활에 필요한 자양분을 충분히 섭취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자 하는 결심을 굳게 했던 그는 신학을 공부하고자 했으나 그의 가족들이 설득하여 법률을 연구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비텐베르그(Wittenberg)와 유트레히트(Utrecht)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1721년에 국가의 관리가 되었으나 그의 취미와는 맞지 않았다. 그때에 예상치 못했던 일이 발생하여 그의 인생에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되었다.

진젠도르프가 살아 있을 동안에‘모라비안 형제단’(Moravian Brethren)은 매우 심한 박해를 받고 있었다. 모라비안 형제단은 15세기 종교개혁의 선구자 존 후스에게서 감화를 받아 보헤미아의 모라비아 지방에서 생겨난 프로테스탄트의 종교단체였다. 후스 전쟁(1419-36) 후 보헤미아에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화해한 보헤미아 국민교회가 성립되었는데, 거기에서 만족을 얻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보헤미아 동부 지방 모라비아에서 형성된 작은 종교 집단이 그 기원이다. 이들은 신약성서의 산상수훈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이들은 가톨릭의 반종교개혁 운동과 30년 전쟁 때에 심한 탄압을 받고 뿔뿔이 흩어졌었는데, 그들 중의 일부가 박해를 피하여 삭소니에 있는 그의 영지로 피난오기 시작했다.

1722년 당시 22세였던 진젠도르프는 모두 300명이 넘는 피난민들에게 베르텔스도르프(Berthelsdorf)의 근처에 있는 그의 커다란 사유지에 정착하도록 허락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거주지를 헤른후트(Herrnhut)라고 불렀는데, 그것은‘주님의 보호’라는 의미이다. 이들은 자기들 힘으로 집을 짓기로 결정했다. 짧은 시간 내에 나무로 지은 건물들이 완성되어 지금 서 있는 많은 헤른후트 건물의 시초가 되었고 세계 각곳에서 이를 따라 건물을 짓게 되는 모형이 되었다. 헤른후트에 세운 공동체는 철저한 공동체 생활, 선한 사업들, 엄격한 도덕 그리고 근면함에서 수도원을 닮았다.

여기에서 모라비안 교도들은 사도 시대의 교회생활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이들은 세족식, 평화의 입맞춤, 제비뽑기등을 실시했고, 이 공동체의 행정을 위해서‘장로들’을 세웠다. 1727년에 진젠도르프는 이상적인 마을로 변화되는 중에 있는 헤른후트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꿈꾸어 오던 이상이 실현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할레에서의 학생시절에 그는 선교에 대한 열정에 불타서 ‘겨자씨 선교단’이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소년들의 경건생활을 지도하면서 세계 선교의 정신을 심어주었던 일이 있었다. 이처럼 소년시절에 선교사업에 대한 강력한 동기를 제
공해준 경험이 있었던 진젠도르프의 지도 하에 헤른후트 공동체는 강력하게 복음주의적이고, 선교 지향적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진젠도르프는 1731년에 덴마크의 코펜하겐을 방문하는동안, 서인도 제도의 흑인을 우연히 만나게 되어 해외 선교에 대한 관심이 다시 불붙게 되어서 여생을 선교를 위해 살았다.

선교의 열심이 타올랐던 헤른후트 공동체는 1734년에 그들의 최초의 선교사들을 카리브인들에게 파송했다. 얼마후에는 서인도, 그린랜드, 북아메리카, 기아나, 이집트, 남아프리카, 네덜란드, 영국, 남아메리카 그리고 발틱 해 국가들에 모라비안 선교사들이 파송되었다. 그리하여 18세기말에 이르러는 서인도에 67명, 그린랜드에 18명, 라브라도에 26명, 남아프리카 희망봉에 10명, 인도에 5명의 선교사가 파송되었다. 이들이 해외 선교를 위해 자신들의 교회를
떠날 때, 그들은 교통비를 제공받았으나 선교지에 도착하고나면 그들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였다. 그들은 그곳에서 아내를 얻었고, 그곳에서 살다가 죽고 그 땅에 묻혔다. 헤른후트는 세계 각 곳과 연락을 하는 중심지가 되었고 거기를 본 딴 신앙 공동체가 많은 나라에 세워지게 되었다.

1736년에 진젠도르프는 모라비안 교회의 감독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11년동안 여행하면서 가는 곳마다 경건주의 사상을 전했다. 유럽을 두루 여행하면서 모라비안 형제단 공동체를 세웠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공동체가 네덜란드와 영국에 있다. 1741년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인디언 선교와 모라비안 교회를 세우는데 주력하면서 2년을 보냈다. 그는 1743년에 헤른후트로 돌아온 후, 영국에 있는 교회와 더불어 일한 5년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그곳에서 목회 사역에 전념했다. 그는 모라비안 교도들을 위해 많은 사재를 썼다. 말년에 개인의 비극(아내와 아들의 죽음)과 재정의 어려움으로 타격을 입기도 했다. 그는 1760년 5월 9일 헤른후트에서 60세를 일기로 소천 했다.



Ⅲ. 미국 개척과 청교도

아메리카의 개척에 가장 늦게 참여한 나라는 영국이다. 이미 스페인은 대부분의 남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의 남쪽부분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대부분은 프랑스가 차지하고 있었으며, 지금의 뉴욕 부분은 네덜란드인들에 의해서 개발되고 있었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한 몫을 얻어낸 나라가 영국이다. 하지만 가장 늦게 참여한 이 사람들이 지금의 미국을 건설하게 된다.

1. 신대륙의 영국 식민

세력이 확장되면서 영국은 전쟁을 통해 네덜란드인들의 영토를 빼앗았다. 차츰 영토를 넓혀 17세기 말쯤에는 스페인이 차지한 플로리다의 북쪽에서부터 메인에 이르는 동부해안 지역을 차지하였다. 영국 식민지의 주된 거점은 버지
니아와 뉴잉글랜드였다. 그러면서 두 지점 사이는 좁아져갔다. 그리고는 서쪽으로 영토가 넓어졌다. 소위 서부 개척이 시작된 것이다.

버지니아는 영국의 최초 식민지로서 1607년 개척이 시작되어 사람들이 보내졌다. 버지니아란 처녀 왕 엘리자베스를 존경해서 붙인 이름이었다. 여기에 보내진 이들은 주로 부랑자들이었다. 영국에는 산업의 부산물로 도시마다 부랑자들이 넘치고 있었다. 이들은 감옥이나 신대륙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하여 이 무위도식자들은 그 비싼 뱃삯도 내지 않고 신대륙으로 보내졌다.

이들을 보내면서 영국인들은 꿈에 부풀었다. ‘이제 새로운 인종이 탄생할 것이다. 그래서 미개한 인디언들은 문명을 전수받게 되고 혼혈의 인종이 새 나라를 세울 것이다. 이 나라는 영국을 존경하고 섬길 것이다. 그리고 영국은 이들
에게 발달한 모든 문명을 심어 줄 것이다. 영국에서 간 백인들과 현지의 토인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여 새로운 나라, 이상의 나라를 건설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부랑자들은 영원히 부랑자였다. 그들은 절대로 일을 하지 않았다. 이들은 영국에서처럼 먹을 것을 구걸하였다. 인디언들도 영원히 이들을 먹여 살릴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친절했지만 결국에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부랑자들은 강도가 되었다. 총으로 인디언들을 몰살시키고 그들이 저장한 옥수수를 모조리 털어 갔다. 이런 일은 한없이 계속되었다.

부랑자들 외에 신대륙에 온 이들은 종교적 불만 세력들이다. 주로 청교도들과 각종 분파들과 가톨릭교도들이었다. 1632년에는 가톨릭교도인 볼티모어에 의해서 매릴랜드가 시작되었다. 여기서 매리는 예수님의 모친을 말하는지 당시
국왕 찰스 1세의 아내 매리를 말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여기서는 모든 이주자를 환영했지만 특별히 가톨릭교도들이 좋은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식민지의 분위기를 바꾸어 놓은 것은 청교도들이었다. 이들은 미국의 건국 정신을 세웠다고 인정될 정도로 분명한 신앙적, 도덕적 기초를 다졌다. 청교도들은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에 도착한다. 본래 이들은 버지니아를 목적지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물결은 그들을 북쪽 해안으로 밀어 갔고 결국 그들이 도착한 곳이 지금 플리머스(Plymouth)라 불리는 곳이었다.

이들은 영국에서 직접 나오지 않았다.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에 11년 동안을 머물렀다. 본래 고국에서 좋은 직업을 가지고들 있었으나 네덜란드에서는 노동밖에 할 일이 없었다. 그들의 자녀들은 네덜란드 사람들의 풍습을 배워 살고
있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영국인들보다 훨씬 덜 보수적이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주일이나 교회 생활을 중요시하지 않았다. 이래저래 이들 영국인들은 네덜란드를 싫어했다.

그렇다고 영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들은 영국인으로 살면서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서 신대륙행을 결심했다. 이들의 우두머리는 후에 스스로 플리머스 식민지의 총독이된 윌리엄 브래드포드(Bradford)였다. 그는 신앙심이 투철
한 사람이었고 신학적인 지식도 깊었다. 그가 쓴 일기는 당시 플리머스 식민지 사람들의 신앙과 삶을 살펴보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메이플라워호는 백여 명의 청교도 순례자들을 싣고 있었다. 선실은 환기 상태가 불량하였다. 승객들은 너무도 비참한 여건으로 인해 신음하며 석 달을 풍파 속에서 보냈다. 배가 너무 북쪽에 도착하자 선원들에게 남쪽으로 보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선원들은 거기에 상륙하기를 고집하였다. 때는 11월 중순이었다. 해변은 춥고 황량하였다. 원주민들은 불친절해 보였다.

별수 없이 그들은 거기에 내렸다. 내리자마자 통나무집을 세워야 했다. 가져 온 식량은 얼마 남지 않았고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6개월 동안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죽었고 나머지 사람들의 생존은 기적이었다. 그들의 신앙심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세월이 20년 정도 흐른 후 그 지역은 이만 명이 넘는 청교도들이 거주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고국의 이름대로 그곳을 뉴잉글랜드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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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청교도들의 약속의 땅

뉴잉글랜드는 청교도들의 땅이었다. 이들은 성경 그대로의 나라를 건설해 보겠다는 뜨거운 의욕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땅을 종교개혁 시대까지 감추어 두셨다가, 이제야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도성을 세우라는 사명을 주셔서 신대륙에 보내신 것으로 확신하였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여호수아와 그의 백성들로서 ‘구세주의 나라’(The Redeemer Nation)를 건설하고자 했다.

저들의 이러한 확신들은 계약 신학으로부터 흘러 나왔다. 저들은 자신들에게‘분명한 운명’(manifest destiny)이 주어졌다고 믿었다. 그것은 신대륙에 ‘언덕 위의 도시’(a city upon a hill)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언덕 위에 새집을 짓는다란 말은 일상생활 속에 평범히 살겠다는 간단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지칭하며, 선교 명령을 수행한다는 전략적 뜻이 포함된 의미심장한 말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 곳을 거론한 것이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해서 가나안 땅으로 진입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듯이, 영국인들의 죄와 영국 교회의 부패를 재현하지 아니하는 참신자
의 삶을 영위해야 한다는 결단적인 선언인 것이다. 다시말해 하나님의 뜻이 지배하는 의로운 나라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서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심부름하는 아이들’로 보내졌다고 믿었다.

이 일을 위해서 총독은 진실한 신자로서 성직자 못지않은 신앙과 학문 그리고 인격을 가졌으며, 목사들 또한 총독 못지않은 권력을 가졌다. 목사들은 모든 면에서 사람들의 지도자였다. 만약 주일 성수를 하지 않고 못된 짓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대로에서 벌을 세우기 위해서 묶어 놓을 수도 있었고 채찍을 가하도록 시킬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신정 정치가 진행되는 중이었다.

청교도들은 신앙 고백의 내용을 믿을 뿐 아니라 깨닫기도 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 덧붙여서 그 내용들을 행동에 옮겨 눈에 보이도록 선행을 하여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은 인간의 선행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의가 인간에게 전가된 것을 믿어야 가능한 것이며, 이렇게 의롭게 된 다음에야 하나님은 힘을 공급해 선행을 하도록 도우신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에게 복종하여 그분의 도움으로 선한 일을 하게 되는 것이 성화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선행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할 수 있는 것이므로 그것만으로는 신앙이 좋은지 안 좋은지 알 수 없다. 또한 선행으로 얼마든지 자신을 선한 사람으로 속일 수도 있지 않은가!

청교도들은 진실로 중생한 사람인지 아닌지 밝혀내는 일에 관심이 높았다. 그래서 절대로 아무나 교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선 교회를 세울 때에도 최소한 일곱 명의 발기인들이 서로의 신앙과 인격에 대해 만족하고 있어야 했다. 교인이 될 수 있는 기준은 중생의 체험과 기초적 교리에 관한 지식이었다. 일곱 명 이상의 발기인들은 이웃 교회의 목사와 지역 행정관을 모셔 와서 자신들의 자격을 심사받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가 세워질 수 없었다.

만약 이런 절차를 밟는 과정에서 그들 중 몇 사람의 자격이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일곱 명 이상의 유자격자들이 나타날 때까지 교회 설립은 보류되었다. 일단 교회가 설립되면 칼빈의 가르침대로 목사, 교사, 장로, 집사 등으로 교회의 지도자들이 세워지고 다시 이들에 의해서 새로운 교인의 자격이 심사되었다. 여기서 교사란 오늘날의 신학교 교수 정도의 직책으로 보면 되겠다.

어떤 사람이 교회의 교인이 되고자 할 때는 장로들 앞에 나와서 자신의 신앙적 지식과 체험을 시험받아야 했다. 신앙 지식이 빈약한 자, 중생하지 못한 자, 또는 문제아는 여기에서 일단 걸러졌다. 만약 시험에 통과되었다면 전체 교인들 앞에 소개되었다. 그때 교인들이 그 사람의 문제점들을 말하는 순서가 있었고 거기서 지적당한 명백한 잘못은 공중 앞에서 회개하는 과정이 있었다.

여기까지 무사히 통과하면 몇 사람이 교회 앞에 이 사람을 교인으로 받아줄 것을 요청하는데, 약 15분 동안 어떻게 믿게 되었는지를 간증한다. 그러면 여러 질문들이 따라 나온다. 그런 연후에 교인들이 좋게 생각하면 자신의 신앙을 대중 앞에 고백하고 교인들은 투표로서 그의 영입 여부를 결정한다. 통과되면 교회로부터 교인됨을 공식적으로 통고 받았다. 얼마나 교인되기가 어려웠던가!

이들은 택한 백성이라는 분명한 긍지가 있었다. 이들은 주일을 성수하고 십일조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을을 떠나야 했다.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서 가장은 가족 전체를 포장마차에 태우고 수십리 길을 달려갔다. 설교는 보통 서너 시간씩 계속되었고 주로 성경을 강해하였다. 아이들도 어른들과 함께 설교를 들었다. 예배 후 돌아가는 길에 가장은 가족에게 목사의 설교를 정리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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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미국의 청교도 전통

17세기 전체를 통해 영국의 불안정한 정세, 특히 청교도들에 대한 박해는 많은 이주민을 북아메리카로 떠나게 했다. 특히 제임스 1세의 박해와 그 아들과 후계자 찰스 1세 치하의 박해 동안 더 많은 청교도들이 고국을 등지게 되었다. 청교도들은 회중교도, 장로교도, 침례교도 그리고 여러 부류의 좀더 특수하거나 과격 집단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17세기 후반에는 퀘이커교도들도 이주해 왔다. 이들은 청교도들 중에 과격파로 분류된다. 퀘이커는 모든 종류의 폭력을 거부하였다. 설립자 폭스는 그의 괴상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심오한 신앙적인 확신과 지도력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영국에서는 다른 청교도들보다 더욱 심한 박해를 받았지만 그 수가 급속히 늘어났다. 이들의 많은 수가 미국으로 이주했던것이다.

그들의 대부분은 지금의 펜실바니아 주로 이주하였다. 1682년 세워진 이 주는 윌리엄 펜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는 1667년에 퀘이커교도가 되었다. 이미 저명한 인물이었던 펜의 전향으로 퀘이커교도들은 지위가 높아졌다. 펜은 자신의 부와 영향력을 가지고 자신의 동료와 함께 미국으로 이주하여 안식처를 찾았다. 이곳은 처음부터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스코틀랜드 장로교인들은 주로 뉴저지 주에 정착하였다. 영국인들 외에도 독일, 화란, 스칸디나비아 등에서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1685년 루이 14세가 낭트 칙령을 철회함으로써 수많은 위그노들이 조국을 등지고 신대륙으로왔다. 이리하여 수많은 개신교도들이 본국을 떠나 신앙의 자유와 새로운 삶을 찾아 아메리카로 몰려들어 여러 인종의 집합장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청교도들의 삶은 미국의 근본적인 전통을 세워 주었다. 19세기 중반까지 백인, 앵글로색슨, 프로테스탄트의 머리글자를 조합한 와스프(WASP)란 단어는 미국 정신의 중심이 되었다. 이 기본 정신을‘녹이는 국솥’(melting pot)으로 해서 다른 이민들의 문화를 여기에 동화시켰다. 아무리 새로운 인종들이 몰려와도 여기에 흡수될 뿐이었다.

영국 청교도들의 삶이 미국의 근본적인 전통을 세워주는 기초가 된 데에는 청교도 신앙에 의거한 교육이 그 효과를 거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메사추세츠 식민지에서는 1640년에 50세대를 가진 지역마다 1명의 교사를 두어 읽고, 쓰고, 셈하는 소위 3R(Reading, Writing, Arithmetic)의 초등 교육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규칙은 급속도로 다른 미국 식민지에도 영향을 주어 식민 주민이 내는 세금으로 공립학교나 교회 학교가 설립되었고, 사람이 적게 사는 산간벽지에는 순회 교사를 파견하여 문맹을 퇴치하였다.

1636년에는 미국 최초의 대학인 하버드가 매사추세츠 주 캠브리지란 곳에 세워졌다. 대학 이름은 존 하버드(1607-1638)를 그리고 장소 이름은 그가 영국에서 나온 대학을 기념한 것이었다. 하버드는 1638년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고 자녀도 없었다. 그는 자기 재산의 절반과 장서 320권을 기증하였다. 하버드 대학은 청교도들의 거주지에서 그들의 신앙과 학문을 위한 지도자 양성에 들어가게 되었다.

저들은「학문을 발전시켜, 이것을 자자손손에게 영원히 전해주며, 장차 교회가 학문을 배우지 못한 목사에게 맡겨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동 대학 교문에 새겨져 있는 1643년의 문서)라는 신념 아래 학교를 설립하였으며, 비슷한 취지로 17세기부터 다른 주에도 대학들이 세워지게 되었다. 일례를 들면
1693년 버지니아에 윌리엄 메리 대학이, 1701년에는 코네티컷에 예일 대학이, 1746년에는 뉴저지에 프린스턴 대학이, 1754년에는 뉴욕에 컬럼비아 대학이, 1755년에는 펜실베니아에 브라운 대학이 설립되었다. 이 대학들은 성경 학습과 일반교양 학습을 교과 과정으로 채택함으로써 미국에 청교도적인 전통을 수립해 나갔다.

미국은 이 전통에 의해서 문화적인 보수 성향을 유지했다. 유럽처럼 자유주의 사상에 쉽게 물들지 않고 거의 20세기 초반까지 전통적인 신앙을 유지했다. 청교도들의 근면과 검소하고 정직한 삶의 태도는 미국인들의 자부심이었다. 계약 사상은 미국식의 중상주의와 민주주의 토대를 제공하였다. 과연 청교도들은 미국인들이 나라의 조상들이라고 여길만하였다.

청교도들의 삶은 늘 정돈되어 있었고 사는 거리는 깨끗하였다. 그들의 생활은 풍족하였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경외하였다. 하나님 말씀을 자신의 진리요 힘이요 일용할 양식으로 삼았다. 그들은 신앙을 실천하려고 하였다.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축복하셨다. 그들은 영국에서 하지 못하던 단순하고 소박한 그러나 말씀대로의 예배와 생활을 신대륙에서 마음껏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전통만큼 경건심까지 오래 계속된 것은 아니다. 겨우 한 세대로 그치고 만 것이다. 그들의 후손들은 부모덕에 부요해지고 질서가 잡힌 미국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부모의 경건은 점점 잊혀져갔다.

그래도 청교도 신앙은 장로교, 침례교, 회중교회 뿐 아니라 여러 종파들의 뿌리가 되었고 그 정신은 미국인들의 마음속에 언제까지나 살아 있을 것이다.



IV. 미국의 대각성 운동

미국의 신앙은 전세기 청교도들이 활동할 때와는 여러모로 달라졌다. 청교도들의 신앙은 한두 세대로 그치고 말았다. 그들의 활동으로 뉴잉글랜드는 질서를 잡았고 복받은 지역이 되었다. 그리고 청교도들은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후손은 조상처럼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교회 출석률은 떨어지고 교회에도 명목상의 신자들뿐이었다.

그나마 뉴잉글랜드 지역과 펜실바니아, 뉴저지 등은 나은 편이었다.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은 신앙을 찾아서 고향을 등진 이들이었다. 그러나 다른 지역은 더욱 상황이 나빴다. 특히 하류층과 버려진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는 곳은 더 심했다. 이들은 이신론과 상관없이 아예 신앙에 관심이 없는 이들이었다. 많은 이들이 열등감과 자포자기에 싸여 있었다. 이들은 쉽게 술과 방종에 빠져 들어갔다.

당시 뉴잉글랜드의 목사들이 가장 잘 사용했던 성경 구절은 예레미야 애가였다. 거기에는 이스라엘의 타락과 장차 다가올 심판을 보고 있는 선지자의 아픈 심정이 표현되어 있었다. 목사들은 이들 청교도의 후손들이 조상의 신앙을 떠나 악한 생활을 하고 있음을 신랄하게 비난하며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예고했다. 그리고 회개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상황은 변화될 것 같지 않았다.

1. 대각성 운동의 시작

유럽과 신대륙의 신앙이 대단히 침체된 가운데 있을 때, 부흥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는 존 웨슬리와 조지 휫필드를 중심으로 메소디스트 운동이 일어났고, 미국에서는 여러 차례의 큰 부흥이 일어나서 사람들의 영혼을 변화시켰다. 미국에서의 부흥 운동을 대각성이라고 부른다. 이때 일어난 영적 각성은 미국 건국의 기초가 되었다.

두 운동은 그 배경을 독일 경건주의에 두고 있다. 웨슬리는 경건주의의 한 분파인 모라비안 형제들에게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미국의 부흥 운동은 경건주의의 총본산인 독일 할레 대학에서 공부한 목사들이 이민 옴으로써 가능했다. 그리고 경건주의는 그 뿌리를 루터와 칼빈이 가르쳤던 복음적 신앙에 두고 있
었다.

데오도르 프레링하이즌(Theodore Jacobus Frelinghuysen, 1691-1747)이란 목사는 1720년 네덜란드에서 신대륙으로 건너왔다. 그는 네덜란드 프리즐란트 동부 링겐에서 태어나 당시 네덜란드 칼빈주의에서 유행하던 경건주의에 심취되어 목회 사역을 하다가 아메리카의 네덜란드인 교회들에 훈련된 목사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20대 말에 뉴저지로 이주하여 사역하였다. 그는 위대한 설교자로서 중생을 강조하였다. 그의 설교는 큰 감동을 주어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켰다. 곧 교인 수가 늘기 시작하였고 주위의 교회들도 설교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로부터 부흥회가 시작되었다.

1718 년 아일랜드에서 이민 온 장로교도 윌리엄 테넌트(William Tennent, 1673-1746) 목사는 펜실바니아와 뉴욕에서 목회를 한 후, 펜실바니아의 네샤미니(Neshaminy)에서 목회를 하였다. 그는 통나무집을 세우고 자신의 네 아들을 비롯하여 열다섯 명의 젊은이들에게 신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테넌트는 그들에게 철저하게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를 가르쳤고, 무엇보다도 열정적인 신앙을 전수하느라 노력하였다.

윌리엄 테넌트의 큰아들 길버트는 유능한 설교자가 되었다. 프레링하이즌은 그를 도와서 교회가 세워지도록 했다. 길버트 테넌트와 통나무 대학 출신의 목사들은 프레링하이즌이 시작한 부흥 운동이 계속 진행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들의 뜨거운 설교는 사람들의 영혼을 변화시켰다. 부흥은 장로교도들 가운데 일어나 뉴저지로부터 버지니아까지 숲속의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

뉴잉글랜드의 부흥은 조나단 에드워즈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는 미국이 꼽고 있는 초창기 대표적인 인물로서 미국의 정신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1703년 코네티컷 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와 외할아버지는 회중 교회의 목사였다. 그는 열일곱 살에 예일대학을 졸업하였고 2년 후에는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최우수 졸업생 기념패는 아직도 예일대학에 남아있다.

에드워즈는 하루 열두 시간 성경을 연구하면서 충실한 목회를 하였다. 그의 설교는 두 시간 이상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지루한 경우도 많았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는 별로 웅변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음성은 약했고 위엄도 없었다. 한 손에는 원고를 움켜쥐고 다른 손에는 촛불을 들고 외쳤다. 당연히 제스츄어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간절한 열정을 가지고 설교하였다.

그가 메사추세츠의 노댐프턴에서 목사로 있을 때 굉장한 부흥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1734년에 시작되어 다음해까지 이어진다. 이것이 미국 역사에서 그토록 중히 여기는 대각성 운동이다. 단지 200가구뿐인 에드워즈의 작은 마을에서 무려 300명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이 부흥 운동은 뉴잉글랜드 전역으로 퍼져 나가 주위의 다른 주들로 전해졌다.

부흥 운동은 얼마 동안 소강 상태에 빠졌다가 1740년과 그 다음 해에 다시 계속된다. 후반기의 부흥 운동은 조지 휫필드의 활동과 관계된다. 모든 부흥회에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그로부터 나오는 완전한 은총이 전해졌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악을 회개하였다. 그 회개는 너무도 강렬했
다. 울고불고, 펄펄 뛰고, 넘어져 뒹구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에드워즈는 그 부흥 운동에 관해서‘놀라운 회개의 이야기’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많은 젊은이들이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만 의로워지는 교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유럽을 떠나서 신대륙에 뿌리를 내린 이들이 이제는 신앙 문제에 모든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에드워즈는“그들이 생각하는 한 가지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었고, 모두들 그리로 몰려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의 마음은 장차 올 영원한 진노에서 생명을 건지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고 묘사하였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영혼의 대각성을 경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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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휫필드를 통해 계속되는 부흥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는 1714년 영국의 글로체스터에서 태어났다. 여관업을 하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그는 공립학교를 다닌 뒤에 옥스퍼드 펨브로크 대학의 근로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그리고 몇 권의 중요한 저서들을 읽고 율법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복음의 빛 아래로 들어왔다. 그는 이때 자신이 무슨 선한 것을 행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행한 것이 자신을 위한 것임을 믿음으로써 구원 얻는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1736년 스물두 살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당시 설교 관습과는 다르게 훌륭한 제스츄어를 섞어가며 즉석 설교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복음은 청아한 목소리만큼 명료하고 감동적이었다. 그러나 차츰 그의 열광적인 설교를 달가워하지 않는 성직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미 세례 받은 교인들에게까지 중생의 도를 설교하는 것에 분개하였다. 그에게 강단을 제공하는 교회가 줄어들었다.

이 고통스런 시기가 그에게 새로운 전도 사역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는 이제 야외에서 설교하기 시`했다. 주일에 교회에 가지 않는 많은 사람들, 이들이야말로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이 아닌가? 그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야외에서 설교하기 시작한 것이다. 1739년 휫필드는 어느 탄광촌에서 백 명 가량의 광부들에게 설교하였다. 곧 수천 명이 몰려들었다. 검은 얼굴들에는 눈물 자국으로 두 줄기 하얀 선이 생겼다.

두 달 뒤에는 무어필즈에서 3만 명을 앞에 두고 설교했다. 음향 시설이 없었던 그 시대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설교하려면 얼마나 목소리가 크고 발음이 분명해야 했겠는가? 1739년부터 34년 동안 그는 18,000회 정도 집회를 인도하였다. 이런 변화는 영국의 국교회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크고 빠른 것이었다. 결국 휫필드는 거의 대부분의 국교회 성직자들과 관계가 끊어지고 말았다.

1738년부터 1770년까지 그는 미국으로 일곱 번의 선교 여행을 감행하였다. 미국에서의 성공은 굉장한 것이었다. 뉴잉글랜드에서 시작한 부흥회는 조지아로 내려가면서 계속되었고 다시 올라오면서 많은 영혼을 감동시켰다. 그는 조지아에 고아원을 설립하였다. 그 고아원의 운영은 그에게 끊임없이 부담을 주었고 전도 여행 중에도 계속 모금을 하게 만들었다.

미국에서의 그의 전도 방법은 진취적이었다. 그는 전통 교리와 복음적인 열정을 조화시켜서 둘이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었다. 진행되던 대각성의 흐름을 타고 그의 부흥회는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 식민지 사람들은 구원의 복음을 통해서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기쁨을 누렸다. 그들은 이제 식민지로 밀려난 하층 계급이라는 열등감을 더 이상 느낄 수 없었다.

어떤 농부는 밭에서 일하다가 휫필드가 수마일 떨어진 장소에서 정오에 설교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연장을 그대로 둔채 자기의 아내와 함께 말을 타고 집회 장소로 향하였다. 그가 말의 짐을 덜어주기 위하여 때때로 내려서 걸으면서 예정된 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많은 무리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설교자는 호리호리한 체격의 젊은이로서 천사처럼 보였다. 그는 위대하신 하나님으로부터 권능을 받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그는 묘사했다.

휫필드는 설교를 통해서 청중들에게 각자가 하나님의 잃어버린 존재임을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기 전에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앞의 농부는 말했다. “그의 설교를 들을 때 내 마음은 상한 심정이 되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내가 의지했던 옛 사람과 그 힘은 무너졌다. 나의 의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영국인들 가운데 휫필드는 최고의 설교자였다. 휫필드보다 훨씬 학식이 있고 인기를 얻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보다 더 설득력 있고 감동을 주지는 못했다. 라일(J. C.Ryle)은“35년 동안 휫필드가 자신의 청중들을 사로잡았던 것처럼 완전하게 청중을 사로잡은 설교자는 아무도 없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참으로 합당한 것이었다.

1770년에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휫필드는 뉴잉글랜드의 뉴베리포트에 묻혔다.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그는 자기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렇게 말하였다.

“주 예수여, 나는 피곤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역에 싫증이 난 것은 아닙니다. 만일 나의 갈 길을 아직 끝마치지 않았다면 한 번 더 밖에 나가 주님을 위하여 외치게 하소서. 그리고 진리를 외치고 집에 돌아와 숨지게 하소서.”

그의 이러한 요청은 허락되었다. 그의 마지막 야외 설교는 2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그는 우레와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좋다. 일을 하라. 행위(일)를 통하여 하늘나라에 가려는 자여, 그것은 모래로 새끼를 꼬아 그 줄을 잡고 달에 가려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다. 내가 살아서 그리스도를 전파하기를 얼마나 원했던가? 그러나 그분과 함께 있기 위하여 죽는 것이다.”

그 날 밤 천식이 발작하여 그는 육신의 장막을 벗어나 하늘의 자유를 얻었다. 이렇게 하여 근대의 가장 위대한 전도자가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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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각성과 독립

1776년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이 독립하게 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정치, 경제적인 요소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힘은 무엇보다도 신앙이었다. 대각성은 이 일을 위해서 식민지인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바꾸어 놓은 계기를 제공하였다. 부흥 운동을 통한 회개와 중생은 이들을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했고 청교도들의 신앙을 다시 살려 놓았던 것이다.

대각성은 식민지인들에게 공통된 신앙의 감정을 가지게 만들었다. 독립 전쟁 때에 공통된 정치적 요소들을 제공했던 워싱톤이나 프랭클린 또는 제퍼슨 같은 사람들이 나타나기 이전에 먼저 에드워즈, 테넌트 그리고 휫필드 등이 공통적인 신앙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식민지인들은 부흥회를 통해서 서로 교파가 달라도 신앙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경험을 했던 것이다.

이들은 영국이 식민지의 교회들을 위해서 감독을 파송하는 일에 반발하였다. 성공회 신자들까지도 이 일을 반대하였다. 영국에서 감독이 파견되면 자신들의 신앙의 자유가 침해될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1766년 뉴잉글랜드의 회중 교회를 비롯하여 뉴욕, 뉴저지 장로교인들은 회동하여 식민지인들 스스로 감독을 뽑는 것에 대해 의논하였다.

건국 이전의 교회들은 유럽 여러 나라에서처럼 국교회 제도를 놓고 논란이 많았다. 이 제도를 택하면 한 지역에는 한 형태의 교회만 있어야 했다. 또한 그 지역의 주민들은 교회에 나가든 안 나가든 종교세를 내어야만했다. 당시 뉴잉글랜드 지역은 회중교도들이, 뉴욕이나 남부 지역은 성공회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로교, 루터교, 침례교인들은 국교회 제도를 반대했다.

결국 모든 교회를 법적으로 평등하게 대우할 것과 어느 특정 교파에게만 재정을 지원하는 것을 삼간다는 원칙이 세워지게 되었다. 독립 후에는 미국에서 어느 누구나 어떤 종교를 믿든 간에 자유롭다는 법률까지 제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미국 교회의 특성을‘자발적인 신앙’ 또는‘전도’라는 말로 표현되게 만들었다. 당시 미국의 이런 상황은 신앙에 있어서 개인적인 결단과 회개를 강조하는 경향으로 흘렀다. 그리하여 유럽식 의식 위주의 신학이 많이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개인적인 회개와 결단으로 이끄는 전도와 부흥회는 미국 개신교의 대표적 특징이었다. 미국에서는 40년 정도를 주기로 대 부흥이 일어났다. 부흥회로 말미암아 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얻고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했다. 그리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한동안 신앙적인 분위기가 사회를 이끌어 갔다. 이때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질서의 근원이 되었다.

결국 식민지인들은 독립을 위해 영국과 전쟁을 하게되었다. 그러자 성직자들은 거의 비슷한 비율로 갈라졌다. 영국에 충성하는 이들과 독립을 원하는 이들이었다. 존 웨슬리가 영국에 충성을 다짐하자 감리교인들은 대단히 어려운 입장에 빠졌고, 미국인들은 한동안 그들을 비애국자들로 간주하였다. 퀘이커 교도들과 모라비안들은 전쟁 자체를 반대하였다. 신앙적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전쟁을 위해서 많은 젊은이들이 의용군으로 지원했다. 이때 젊은이들은 자기 마을의 목사를 모시고 나가는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1774년 이스트 길포드에서 83명의 의용군이 토드 목사와 함께, 해돈에서는 100명이 메이 목사와 함께, 차탄에서는 100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보드만 목사와 함께 종군했다는 기록이 있다. 목사들은 자기 마을 젊은이들의 군대의 군목으로 지명되었다.

마침내 미국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영국의 속박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1776년 독립 국가로 새롭게 탄생한다. 독립 전에도 이미 유럽에 있는 모교회(母敎會)와 아무런 공식적 연관 없이 지내는 많은 교회들이 있었다. 하지만 성공회, 가톨릭, 감리교회 그리고 개혁교회는 유럽 본국 교단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전쟁 이후 독립하면서 유럽 본국의 지배를 벗어나게 되었다.

본래 미국의 정신적 뿌리는 유럽, 특히 영국이었다. 이제 거기에 더해서 그 나름대로의 고유한 미국 정신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던가? 복음적인 신앙의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너온 청교도 신앙, 광활한 땅에 펼쳐진 개척 정신, 수십 리 포장마차를 타고 온 가족이 달려가 참석했던 뜨거운 예배 그리고 부흥회로부터 온 대각성 운동이 이를 주도하였다.



Ⅴ. 감리교 운동

현재 감리교로 알려져 있는 개신교의 한 교파는 18세기 초부터 시작되었다. 루터와 칼빈이 죽은 지, 그리고 영국의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거의 2백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영국의 청교도 정신은 사라졌고, 국교회의 감독들은 세속에 빠져서 스포츠와 정치와 오락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설교의 내용은 복음의 진리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참된 신앙이 거의 사라져 버린 것처럼 보였다. 이때 하나님은 상황을 돌이키기 위해서 택한 종들을 일으키셨다.

1. 신성 클럽(The Holy Club)

당시의 국교회는 완전히 신앙의 형식만 남은 종교 기관이었다. 본래부터 교리보다는 의식에 더 치중해 왔던 터였다. 목사들은 다른 유럽의 교회들처럼 국가에서 주는 봉급을 받고 있었다. 그러므로 자연히 교회는 국가의 기관으로 머리 된 왕에게 충성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의식화되고 형식화된 교회는 영혼의 문제에 별로 양향을 주지 못했다.

이러한 모습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비치는 당시의 교회 모습이었다. 청교도 신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영혼 구원은 잊혀진 이야기였다. 신자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술에 빠져 있었고 성경이나 교회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간혹 신앙에 열심인 사람들도 하나님에 대해서는 막연한 이해밖에 가질 수 없었다. 그저 선하고 착하게 살면 된다는 식의 신앙이었던 것이다.

당시 상류층 사람들은 자신들의 도덕적인 수준을 믿고 있었다. 그러므로 구원은 버러지 같은 천한 사람들, 무뢰한들에게나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은 신앙을 하나의 교양 있는 삶 정도로 보는 것 같았다. 천민들은 되는 대로 살아갔고 귀족들은 교만과 악으로 가득해서 재물과 명성을 쌓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도덕은 외형뿐이었다.

신성 클럽은 이러한 상황에서 나타났다. 이 클럽은 1729년 옥스퍼드 대학에서 몇몇 학생들의 모임으로 시작되었다. 개인의 신앙 성장을 위해서 이 모임을 결성하였기에 이들은 우선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성경 벌레들’(Bible moths)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경건의 훈련을 위해 까다로운 규칙을 준수하며 서로를 감독했다. 그리하여 ‘메소디스트’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이는 지독한 형식주의자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매일 저녁에 모여서 6시부터 9시까지 기도, 헬라어 성경과 교부들의 글 읽기, 그 날의 일 검토와 반성 그리고 다음날의 계획 등을 세웠다. 일주일에 한 번은 성찬식을 하였고, 이들은 금식과 기도를 하였다. 자선, 감옥 방문, 병자 위문 등 이들의 선행은 끝이 없었다. 어찌나 열심을 내었던지 옥스퍼드 대학 근방의 술집들이 문을 닫아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수년이 지나도록 신성 클럽의 회원들은 순수한 은혜의 복음을 깨닫지 목하고 있었다. 그들은 구원이 적어도 어느정도는 자신들의 꾸준한 노력과 거룩한 생활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무엇인가 공헌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구원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단독 사역임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러한 노력은 서로를 한없이 피곤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피차간에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면 신앙이없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속 끝없이 열심을 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을 해도 웨슬리의 마음에는 평안이 없었다. 그는 그 모임의 지도자였다. 결국 그는 선교사가 됨으로써 최상의 헌신을 하려고 하였다. 그가 떠남으로 이 모임도 중단되었다.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와 동생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1707-1787)는 링컨셔의 엡워드(Epworth)에서 성공회 목사였던 사무엘 웨슬리와 수산나의 열아홉 명의 자녀들 중 열다섯 번째와 열여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저들은 어머니 수산나로부터 많은 종교적인 영향을 받았다. 존 웨슬리는 영국 국교회에서 임명을 받아 옥스퍼드와 링컨 대학에서 고전 교수로 일했다. 그러던 그는 30세가 지나서야 자기가 받은 사명이 대학에서 편안하게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보다는 복음을 위한 순회 사역자가 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존 웨슬리는 동생 찰스 그리고 다른 두 사람의 옥스퍼드 출신과 함께 1734년 조지아로 향했다. 그곳에 가는 첫째 목적은 선교사가 됨으로써 자신의 구원을 성취하기 위함이요, 다음으로는 그 구원을 인디언들에게 전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이상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가 이해한 신앙은 자기의 힘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구원을 스스로 이루어가는 것이었다.

존 웨슬리는 선교지에서 3년을 채우지 못했다. 그 짧은 시간이 그에게는 무서운 실패의 기나긴 시간이었다.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했고, 교인 처녀와 연애 사건에 말려들었다. 불명예스런 소문에 그는 연속적으로 감정적이고 조잡한 결정을 하고 말았다. 좌절과 낙망 속에 기진맥진한 그는 본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신성 클럽의 결론이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노력은 인간의 힘이 다함과 동시에 그치고 말았던 것이다. 죄에 오염된 인간의 본성만으로는 절대로 율법의 요구 사항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러므로 바울의 고백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 속 내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줄 아노니…’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하나님의 힘으로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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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웨슬레의 회심

웨슬리는 동생 찰스와 영국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몇 달 동안의 여행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폭풍이 몰려왔다. 물결에 배는 거의 뒤집어질 듯하였다. 웨슬리는 아직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무서운 하나님 앞에 설 준비는 더더욱 되어 있지 않았다. 덮쳐오는 파도에 밀리고 있는 그는 이미 죽은 사람처럼 된 가련한 인생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 그의 귀에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노래, 아니 찬송가였다. 바람 소리, 폭풍우 소리, 사람들의 비명 소리, 물결 부딪치는 소리에도 압도되지 않고 작지만 힘 있게 들리는 소리, 그것은 그와 동생이 예배 시간에 그렇게 열심히 불렀던 찬송가였다. 그는 이 무서운 상황에서 그 찬송가가 있는지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니 하나님조차 그와 아무 상관이 없는 상태가 아니었던가!

몸을 가눌 수 없는 상황에서도 동요하지 않고 노래하는 이들! 그들은 20여 명의 모라비아파 선교사들이었다.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의연한 사람들! 이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 속에는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 계셨다. 배와 함께 흔들리면서 고요히 찬송하는 이들의 모습은 진정 천사와 같았다. 이것은 웨슬리 형제들에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모라비안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웨슬레는 이들의 비밀이 믿음에 의한 구원의 경험임을 알게 되었다. 모라비안들은 자기들이 실질적으로는 하나님께 사랑받고 구원받을 가치나 자격이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용서받았으며, 용납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다.

진리는 예상치 않은 방법으로 이들을 찾아왔다. 런던에 돌아온 지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저녁이었다. 웨슬리는 신앙 문제로 계속 고민하면서 지내다 올더스게이트란 거리의 한 교회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다. 답답하고 메마른 심정으로 앉아 있을 때 앞에서 어떤 평신도가 읽는 루터의 로마서 강해 서문이 들려왔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자기의 노력이나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말씀은 계속되었다. “그리스도의 의를 내 것으로 삼는 길밖에는 없다. 그 외에는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 앞에서 받아들여지는 길은 없다.”그의 마음속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9시 15분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사람의 심령에 변화를 일으키신다.’는 루터의 고백을 들을 때 내 심령이 이상스럽게 뜨거워짐을 느꼈다.”

지금까지의 방황이 끝을 맺는 순간이었다. 그는 말했다. “나는 확신을 얻었다. 그리스도께서 정말 내 죄를 사하셨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셨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모라비아파 선교사들이 그처럼 평화로웠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졌고 죄를 모두 사함받았다는 놀라운 확신이 그 마음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 앞에 떳떳한데 무엇이 무서우랴!

웨슬리는 자신의 노력으로 선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선을 자기 것으로 삼아서 선하다고 인정받는 것이라는 하늘의 계시를 깨달았다. 이 의는 우리의 선행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온 의였다.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의 의라고 불렀다. 그것은 내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기에 루터는 그것을 수동적인 의라고 불렀다.

이제 존 웨슬리는 율법적인 믿음에서 복음적인 회심의 단계로 나아간 것이다. 그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교리를 전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당시 국교회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교리여서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국교회에서는 유아 세례와 성찬의 효력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국교회의 입장에서 메소디스트들은 광신자들에 지나지 않았다.

존 웨슬리는 며칠 전에 자신과 같은 경험을 한 그의 동생 찰스, 그리고 훨씬 더 일찍 같은 경험을 한 휫필드와 한 무리가 되어 복음을 전하기로 하였다. 찰스는 이 체험 후에 6천여 개의 찬송을 지었고 휫필드와 존 웨슬리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당신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까?” 이것이 웨슬리 평생의 설교 주제였다. 말년에 그는 “올더스게이트의 체험은 내게 믿음만이 능력의 원천임을 가르쳐 주었다. 지나간 50년 동안의 경험은 이것이 사실임을 의심 없이 증명해 주었다.”고 회상하였다. 이것은 단지 신비적 체험이 아니었다. 복음의 이해와 함께 오는 바른 신앙 체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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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순회 전도와 부흥 운동

1738년 여름 웨슬리는 모라비안의 본고장 독일의 헤룬후트(Herrunhut)와 마리엔보른(Marienborn)을 직접 방문해 그곳의 모라비안 공동체의 모습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웨슬리는 그곳에 2주 동안 머물면서 진젠도르프를 만나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영향을 받은 것은 조나단 에드워드의 부흥운동에 관한 서적을 탐독하면서였으며, 조지 휫필드를 만나 함께 사역하면서였다.

웨슬리 형제와 휫필드는 어디든지 장소만 생기면 설교하였다. 이들의 설교는 부흥회 식이었다. 그들의 설교는 상류층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 ‘사람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운 죄인이요 지옥 자식’이라는 설교 때문이었다. 교양 많고 선행 많고 도덕적으로 수준 높은 상류층은 자신들을 천한 하류층 사람들과 동일시하는 것을 참아낼 수 없었다.

차츰 이들은 일반 교회에서 설교할 기회를 얻기가 힘들어졌다. 더욱이 존 웨슬리가 1744년 옥스퍼드 대학에서 설교한 이후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는 ‘옥스포드에서는 마귀의 신앙과 불신자들의 생활 방법을 따르는 이들을 훌륭한 신자라고 부르고있다.’고 설교했다. 이때부터 그에 대한 박해는 증가되었다. 이제 그에게 강단을 허락하는 목사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설교할 곳은 이제 야외뿐이었다. 휫필드는 탄광의 광부들을 상대로 야외에서 설교하기 시작했다. 당시 야외에서 예배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불경건한 행동이었다. 웨슬리도 처음에는 휫필드의 이러한 방법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휫필드는 웨슬리에게 자기의 야외 설교를 도와 달라고 부탁하였다. 1739년 그는 처음으로 3천 명 앞에서 야외 설교를 하였다.

이것을 시작으로 그의 야외 설교와 전도 여행은 평생을 두고 계속되었다. 웨슬리는 전세계를 자기의 교구로 삼았다. 웨슬리와 휫필드는 아무 곳이나 사람들만 모이면 설교를 하였다. 술집이든, 거리든, 들이든, 감옥이든, 대상만 있으면 복음을 외쳤다. 국교회의 지도자들로부터는 계속적인 핍박을 받았다. 하지만 소외된 계층에서는 새로 예수님을 믿기로 한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다. 집단적인 부흥이 계속 일어났던 것이다. 위클리프와 그의 추종자였던 롤러즈(Lollards) 시대 이후로 그러한 전도 전략이 그토록 광범위하고 효과적으로 전개된 적은 없었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회심의 체험을 강조하는 이들의 설교는 많은 영혼들을 거듭나게 하였다. 성령의 감동에 의한 중생, 성령의 계속되는 활동으로 변화되어 가는 성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통한 사죄, 믿음을 통한 칭의 등의 교리를 강조하는 설교는 영어 문화권의 모든 지역들을 움직였다. 그리고 일
단 중생을 경험한 이들은 너무도 확실한 신자가 되었다.

동생 찰스가 만든 찬송은 당시 부흥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다. 종교개혁부터 18세기까지는 운문으로 번역한 시편이 노래되고 있었는데, 이것은 칼빈이 시작하여 청교도들이 답습했던 관습이다. 그러나 이런 찬송은 신약적인 내용이 부족했다. 그래서 아이삭 왓츠가 이러한 점을 지적하여 찬송을 많이 썼다. 찰
스도 그의 주장을 따라 찬송을 소개하는데 공헌을 하였다.

찰스 웨슬리는 모두 7,000여 편의 찬송시를 썼다. 우리나라 찬송가에도 그의 찬송이 열세 곡이나 실려 있다. 그의 찬송은 부흥에 큰 영향을 미쳤고 영어권 나라에 널리 알려졌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많은 다른 찬송 작가들을 만들어 냈고 공적인 예배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전의 단조로운 시편 찬송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예배 분위기에 혁신을 가져온 것이다.

존 웨슬리는 유능한 설교자였을 뿐 아니라 뛰어난 조직가였다. 그는 사람들의 힘을 어떻게 모으며 그들을 어떻게 지도할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전도 단체를 여러 개의 속으로 나누어서 평신도 지도자들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이 속들을 몇 개의 구역으로 묶어서 각 구역에는 감독들을 배치하였다. 결국 이것이 하나의 독립된 교단으로 성장하여 갔다.

그의 교단은 전에 신성 클럽에 붙여졌던 ‘메소디스트’란 이름으로 불리어졌다. 이번에는 조직이 강하다는 의미였다. 적어도 이 교단은 존 웨슬리가 생존해 있는 동안은 갖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국교회에 충실하게 속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국교회로부터 인정을 얻지 못하자 그가 죽은 뒤에 새 교단으로 분리되었다. 이것이 바로 ‘메소디스트’(감리교)이다.

존 웨슬리는 메소디스트답게 아주 규칙적으로 생활하였다. 그는 건강하였고 대단히 검소하게 살았다. 새벽 4시에 일어나고 첫 설교를 새벽 5시에 하였다. 거의 50이 되어서 한 결혼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더욱 열심히 전도 사업에 전력하였다. 성격은 원만한 편이었으며 85세가 되었어도 얼굴빛이 아름다웠고 마음은 행복하였다.

그는 자기 교회를 순회하기 위해 하루에도 20 내지 30km나 되는 거리를 말을 타고 다니는 것이 보통이었다. 일단 가면 45회에 걸쳐 설교를 하였다. 어떤 때는 3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기다리고 있기도 하였다. 그가 여행한 거리는 40만 km가 넘는다. 그는 일생 동안 13만 5천 명의 교인과 514명의 순회 설교자를 얻었다. 또한 웨슬리는 훌륭한 학식을 갖춘 사람으로 5개 국어에 대한 문법책을 저술하였으며, 몇몇 고전 작가들에 대한 작품을 쓰기도 하였고, 성경 주석을 썼으며, 기독교 저술가들로부터 인용하면서 글을 써나가는 50권으로 된 총서를 준비하는 등, 200여 권의 책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그 중 가장 훌륭한 것은 매일의 활동을 적은 그의 일기일 것이다.



Ⅵ. 18세기 미국의 신앙

17세기 동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유럽 대륙과 영국으로부터 대서양을 건너왔다. 그러나 18세기에는 또 하나의 대륙(아프리카)이 역사의 표면에 부각되었다. 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 사이에 악명 높은 노예무역이 엘리자베스 치세 초기부터 시작되었다. 1562년 존 호킨스(John Hawkins)는 시에라리온(Sierra Leane)의 해안에서 흑인들을 붙잡아서 대서양을 건너 서인도제도로 왔다. 거기에서 스페인 이주민들에게 흑인들을 넘겨주고, 그 대가로서 영국에 팔면 큰 이익을 남길 수 있는 짐승 가죽, 생강, 설탕, 진주 등을 받았다.

일찍이 17세기 초반부터 노예무역은 쌀과 담배 농업이 풍부한 북아메리카 남부의 식민지까지 확대되었다. 열네 명의 흑인들을 실은 화란 상선이 1619년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Jamestown)에 도착하였다. 그때부터 인육 무역의 반대와
금지를 위한 여러 가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증대되었다. 왜냐하면 유럽인들에게 있어서는 신대륙의 남부 기후가 노동하기엔 너무나 뜨거웠기 때문에 남부의 농장주들이 노동력 확보를 위하여 노예들을 사들이려고 했기 때문이다. 1713년 스페인이 독점해 오던 노예무역권을 영국에도 허용하자 수많은 노예들이 식민지에 실려 왔으며, 많은 뉴잉글랜드 사람들이 노예무역을 통하여 돈을 벌려고 혈안이 되었다.

남부의 농장주들 가운데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노예들에게도 구원받아야할 영혼이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떤 노예의 여주인은 영국 국교회 목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한다. “내 노예들 중에도 천국에 갈 수 있는 사
람이 있을 수 있을까요? 또 내가 천국에서도 그들을 만나야 할까요?” 많은 사람들이 노예들이 세례를 받으면 자동적으로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노예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종교였다.

아메리카의 흑인들을 위하여 사역했던 대표적인 사람은 엘리아스 노(Elias Neau)라는 프랑스인이었다. 그는 자기의 개신교 신앙 때문에 3년 동안 투옥되었으며 7년 동안 배에서 노를 저어야 했다. 마침내 그가 풀려났을 때 그는 당시
일천 명의 노예들이 있던 뉴욕에서 사업가가 되었다. 1722년 죽을 때까지 그는 노예들의 회심과 계몽을 위하여 수고하였다. 그는 세례가 노예들을 주인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는 신념에 반대하여 자기의 지지자들과 함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여 세례 후에도 주인이 노예들에 대한 권위를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법령을 통과시키도록 하였다.

인디언들을 위하여 사역하는 그리스도의 증인들은 특별히 어려움이 많았다. 그것은 각 종족마다 배우기가 매우 힘든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고 존 엘리오트 당시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기록된 문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음 전도자들은 통역자들의 도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설혹 존 엘리오트 같은 사람이 백 명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을 도와줄 통역자들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뿐만 아니라 인디언 부족들은 유목민들이었다. 그래서 보통 한 군데에 오래 머물지 않았으므로 그들을 체계적으로 가르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들짐승들을 따라 그들의 오두막집을 옮기고 항상 이동하는 생활을 하였다. 따라서 그들이 일하는 사역의 각 초소에 알맞은 방식의 복음 사역자들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엘리오트의 뒤를 이어 인디언 사역에 헌신한 사람은 유명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 1718-1747)였다. 그는 코네티컷 주 하담에서 태어나 1739년 산책을 하다가 갑작스러운 회심을 체험하고 예일 대학에 진학하였다. 24
세에 그는 설교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으며「스코틀랜드 복음 전파회」(1709년 창설)에 의하여 인디언들을 위한 사역자로 임명받았다. 처음에 그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자 그는 뉴저지의 뉴왁 근처에 있는 크로스윅성(Crossweeksung)에서 인디언들과 함께 살기로 결심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추수의 기쁨을 맛보았다. 그는 1745년 11월까지 이미 4천 8백km가 넘는 거리를 말을 타고 돌아다녔으며, 1745-1746년에는 자신의 표현대로‘놀랄만한 은혜의 사역’을 체험하게 되었다. 1746년 3월까지 이미 130명이 넘는 인디언들이 개종하였다.

그러나 브레이너드는 너무나 과로하여 건강이 악화되었다. 병이 악화되어 은퇴할 수밖에 없게 되자 동생 존이 그의 사역을 넘겨받았다. 그는 뉴잉글랜드에 있는 에드워드(Johathan Edwards)의 집에서 4년 동안의 사역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짧은 사역 기간에도 불구하고 브레이너드는 위대한 선교사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어느 저술가는 브레이너드의 주님께 대한 헌신과 열심은 사도 시대 이후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참으로 그의 일기는 경건 서적의 고전이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어 선교 사역에 헌신하도록 하였다. 그 가운데는 인도와 페르시아에서 하나님을 섬긴 헨리 마틴(Henry Martyn)도 있었다.



Ⅶ. 제2차 대각성 운동 및 그 후의 부흥운동

18세기가 끝날 무렵 미국에서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1776년에 독립을 선언한 식민지는 1783년 미합중국이란 이름으로 새로운 나라가 되었다. 그 후 유럽에서 많은 이민자들이 몰려왔다. 처음에 13개 주였던 미합중국은 12개의 새로운 주를 더해서 그 영토가 미시시피 강까지 확장되었다. 증기 기관의 발명으로 탄생한 배나 기차 등의 교통수단은 새 나라의 문물을 더욱 발전시켜 주었다. 전세기보다 훨씬 복합적인 상황은 신앙생활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1. 신앙의 침체기

독립 전쟁과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는 불신앙을 불러왔다. 전쟁은 언제나 사람들의 도덕률을 저하시킨다. 전쟁은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군인들은 광란 중에 사람들을 마구 죽였고 무슨짓이라도 서슴지 않았다. 여기다가 이신론은 전통적인 신앙에 근본적인 회의를 갖게 했다.

결국 새로운 시대는 신앙적으로 어두운 기간이었다. 믿음의 역군을 교육시키기 위해 설립된 프린스턴 대학이지만 1782년, 단지 두 명만이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였다. 대학의 분위기는 회의주의적이었고 교수들도 거의가 신앙에는 관심이 없었다. 조상들의 청교도 정신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지고 말았다. 술과 각종 부도덕이 일반화되어 사람들의 수준은 저하되었다.

불신앙은 일반적인 것이었다. 특히 상류층에는 이신론이 편만하였다. 그러므로 전에 활발했던 부유한 지역의 교회들은 성도 수가 격감하고 있었다. 서부 개척 운동과 새로이 밀려들어오는 이민자들의 각기 다른 종파는 전의 개신교 일색의 분위기를 바꾸어 놓았다. 특히 아일랜드에서 온 이민자들은 거의가 가톨릭교도들이었다. 문화나 전통의 동질화도 당시로는 심각한 문제였다.

1791년에는 국가와 교회는 분리되어야 하며 모든 종교는 다 자유하다는 법이 통과되었다. 하지만 신앙심이 저하된 시기의 미국 교회는 그 성도 수가 급격히 줄고 있었다. 적어도 20년 동안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 수는 대단히 적었다. 열성적인 감리교회의 경우도 1794년 한 해 동안 신자 수가 4천 명이나 줄었다.
24명의 뉴잉글랜드 목사들은 교인들에게 부흥을 위해서 열정적으로 기도해 줄 것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그 기도는 1800년까지 지속되었다.

2, 예일대학교 등 뉴잉글랜드에서 일어난 각성운동

18세기 말엽부터 미국 뉴잉글랜드에서 소위‘두 번째 대각성운동’(Second Great Awakening)이라고 불리는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요나단 에드워즈(Johathan Edwards)의 외손자 디모데드와이트(Timothy Dwight)가 1795년 예일 대학교의 총장이 되면서 예일 대학교 학생들 가운데 신앙의 각성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드와이트의 도전적인 복음적 설교가 학생들의 마음을 크게 감동하여 1802년에는 전교 학생의 1/3이 공중 앞에서 회개하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했다.

1806년에는 윌리암스 대학교(Williams College)에서 괄목할만한 복음적 각성과 선교운동이 일어났다. 다섯 명의 학생이 단풍나무 숲에 모여 함께 기도하곤 했는데, 1806년 여름 어느 날 함께 모여 기도하던 중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 비를 피하기 위해 건초더미 밑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5명의 학생이 선교에 대한 열정에 불붙게 되어 이교 세계의 복음화를 위한 헌신을 서로 다짐하게 되었다. 이 건초더미 밑에서 일어난 기도와 선교의 불길은 그 후 계속 뉴잉글랜드의 여러 대학교 안에(Andover, Princeton,Washington, Amherst 등등) 복음의 각성과 선교운동을 불러 일으켰는데, 부흥운동 연구의 권위자인 오르(Orr) 박사는 지적하기를 ‘이 건초더미 확약(Haystack Compact)으로부터 현대 미국 선교 운동이 태동되었다.’고 강조해서 말했다.

3. 중남부 지역에서 일어난 각성운동

뉴잉글랜드에서 고요하고 진지한 부흥 운동이 대학생들 가운데서 일어나던 무렵 알리게니(Allegheny) 산맥 서부의 개척지 즉 켄터키, 테네시. 오하이오 주 등 미국 중남부 지역에서는 보다 열광적인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1797년 켄터키 주 남부 지역에 모여 살던 불량배들이 스코틀랜드계 장로교 목사 매그리디(James McGready)의 도전적인 설교를 듣고 회개하면서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799년에도 켄터키 주 남부에서 괄목할 만한 부흥운동이 다시 일어났는데 이 때에는 장로교, 감리교 및 침례교의 목사들이 매그리디 목사와 합세했다. 그리고 이 때의 부흥집회에서는 극심한 감정적 폭발현상이 동반했다. 1800년에는 곳곳에 천막집회가 열리게 되었고, 1801년에는 켄터키 주 동북부 케인 릿지(Cane Ridge)에서 대부흥운동이 일어났다. 1801년 8월에 열린 케인 릿지 천막집회는 한 주간 동안 계속되었는데 많이 모일때에는 20,000여 명이 집회에 참석했다. 감정적인 흥분과 육체적 기현상이 동반되었는데 ‘죄책으로 말미암은 신음과 비명소리 그리고 기쁨에 사무친 고함소리가 뒤범벅되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정에 북받쳐 ‘넘어지고’(falling) 또는‘진동’(jerking)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소리 내어 짖고’(barking), ‘달리고’(running), ‘뛰고’(jumping), 또는 ‘무아지경에 빠지기’(trancing)도 했다. 켄터키 주의 부흥 운동은 테네시 주, 서부 케롤라이나 주, 조지아 주 및 오하이오 주에까지 계속 퍼져 나갔는데 이 부흥운동으로 인하여 서부의 교회들이 괄목할 만한 성장을 경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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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영국에서 일어난 각성운동

19세기 초 미국 곳곳에서 일어난 천막집회와 부흥운동에 대한 소식이 영국에 전해지자 영국에서도 비슷한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젊은 감리교인 휴 번(Hugh Bourne)은 미국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에 대한 소식을 듣고 크게 감동되어 1805년경부터 부흥 집회를 인도하기 시작했다. 1807년 감리교 총회가 옥외 천막집회를 금했음에도 불구하고 휴 번은 계속 옥외집회를 인도하며 부흥운동을 크게 일으켰는데, 결국 감리교에서 출교를 당해‘원시 감리교단’(Society of Primitive Methodists)을 창설하게 되었다.

원시 감리교단은 급격히 성장하여 반세기 안에 15만여 명의 신도를 가지게 되었고, 영국 교회와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중엽 원시 감리교회에 의해 개종하여 위대한 설교자가 된 사람이 유명한 찰스 스펄전(Charles H. Spurgeon)이었다. 그는 원시 감리교단에 머물러 있지 않고 침례교단에 가입하여 평생을 칼빈주의 신학적 확신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영국 교회에 큰 부흥을 가져왔다.


5. 피니의 각성운동

미국에서 일어난‘두 번째 대각성운동’의 제1기를 18세기 말엽부터 1812년까지로 잡고, 제2기를 1822년부터 1842년까지로 잡는데, 제2기의 부흥운동을 이끌어간 뛰어난 지도자가 찰스 피니(Charles G. Finney, 1792-1875)였다.

피니는 1792년 코네티컷 주 리치필드 카운티 워런에서 평범한 농부였던 아버지 실베스터 피니와 어머니 레베카 라이스 피니의 일곱 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2년 후 뉴욕주 서부로 이사가게 되었으며, 피니는 그곳에서 법률 교육을 받아 총명하고 유망한 청년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Ⅷ. 자유주의

인간의 이성에 대한 자부심과 신뢰는 19세기에 그 절정을 이루었다. 그것은 자유주의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여러 가지 이름과 형태로 나타난 이 전통 전체를 자유주의라고 부르지만, 좀더 세분한다면 특히 19세기 후반부의 사상을 그렇게 부른다. 역사와 과학의 새로운 학설이 그 시발점이었다. 자신만만한 이성은 자신의 힘으로 건설할 이상향을 바로 앞에 보고 있었다.

1. 슐라이에르마허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프리드리히 슐라이에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 1768-1834)는 독일 실레지아의 목사 가문에서 출생하여 어렸을 때부터 경건주의의 감화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소년 슐라이
에르마허를 모라비아파 학교에 보내어 교육을 받게 했고, 후에는 형제단 신학교에 보내어 교육을 받게 했다. 그는 경건주의적 교육에 반발을 나타냈는데 후에 자신을 묘사하면서‘보다 높은 수준의 모라비안 교도일 뿐’이라고 했다.

그 후 할레대학에서 칸트와 희랍 철학을 연구하며 칸트의 영향을 받았고, 베를린에 돌아와서는 자선 병원의 목사로 일하며 낭만주의 작가들(루소, 괴테, 쉴러 등)과 사귀면서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슐라이에르마허는 베를린 대학에서 교수하던 때인 1799년「종교에 대하여」(On Religion: Speeches to its Cultured Despisers)를 출판하여 그의 신학 원리를 제시하기 시작했다. 그는 여기서 종교의 본질은 신학적인 체계도 형이상학적인 사색도 아니며(정통 신학 및 합리주의에 대한 반박), 예술도 윤리도 아니며(낭만주의 또는 칸트에 대한 반박), 또한 이 둘(형이상학과 윤리)을 합한 것도 아니라고 했다. 즉, 종교의 본질은 지식의 기능에서도 또는 행위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고 했다. 종교는 좀더 깊고 독특하고 특수한 그 무엇인바, 직관(intuition) 또는 감정(feeling)에 속한다고 했다. 감정이란 근원적이고 직접적인 인식인데 그것은 일반적 지식이나 행위보다 더 근본적인 인간 경험의 독특한 요소라고 했다. 즉, 참 종교는 무한자를 직접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며 무한자를 느끼고 맛보는 것이라고 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1821년과 1822년에「기독교 신앙」(The Christian Faith)을 저술했는데 그는 여기서 종교와 신학에 대한 개념을 더욱 정확히 진술했다. 이 저서는 신학의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고 자유주 신학의 성격을 규정했는데, 칼빈의「기독교 강요」와 맞먹을 정도의 획기적인 영향을 미친 중요한 책이 되었다.

1) 신학의 특징

슐라이에르마허는 그의 조직신학 저서명을「신론」이라고 하지 않고「신앙론」이라고 했는데, 그 저서명이 그의 신학의 특징을 어느 정도 나타내고 있다. 즉 그는 신학을 교회와 신자들에게 실제로 주어진 기독교 신앙을 기술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에게 있어서 신학은‘크리스챤의 종교적 감정의 서술’또는‘기독교 교회의 경험적 신앙의 서술’이다. 그러므로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신자의 하나님 체험 또는 신자의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시작한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서술하는 모든 속성들은 하나님 안에 있는 특수한 것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절대 의지의 감정이 하나님과 어떻게 특수하게 관련되어 있는가를 가리키는 것뿐이다.”

2) 신관

슐라이에르마허에 있어서 신(神)은 신현(theophany)에 의해 객관적으로 알려진 개념의 신이 아니다. 신관에 있어 중요성은 우리에게 있고 신에게 있지 않다. 우리가 절대의지의 감정을 가질 때 신은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즉, 슐라이에르마허의 신은 인격적 존재라기보다는 모든 현상 뒤에 작용하는 지배적인 힘이고, 모든 사물의 기초이며 하나의 영성이다. 절대 의존의 감정 상태에서는 신에대한 개념이 확실하고 완전하지만, 그 경험을 언어로 표현하기는 적절하지 않다. 신을 언어로 표현할 때 신은 이미 의인화된다.

3) 계시관

신을 의지하는 절대 의존의 감정은‘내면적 의식으로 그대로 머물지 않고 외면적으로 나타나게 되는데…그래서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면적인 것을 드러내는 계시가된다.’슐라이에르마허가 계시(revelation)를‘종교적 공동체의 기원’또는‘종교적 공동체의 기초’라고 말하고 ‘신적 전달 및 선포’라고 정의하며
계시의 주관적 해석을 부인하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계시의 주관적 특성을 강조했다. 강조점이 인간적 측면에서의 전달 또는 선포에 주어지고 신에게 주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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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슐라이에르마허(2)

4) 죄 및 은혜관

슐라이에르마허는 그의 저서에서 죄와 은혜의 관계에 의해 결정지어지는 종교적 자기 의식의 문제를 취급했다. 죄와 은혜는 서로 분리할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다. 죄 의식은 은혜 의식보다 선행하는 것으로서 은혜 의식의 전제가 되고 죄의식은 구원의 불가피성을 인색케 하고 구원을 기다린다.

죄 의식은 신 의식과 관련되어 있는 바 죄란 자유로운 신 의식발전을 방해하므로 인간이 신 의식을 획득하지 못하게 한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죄와 육신을 구별했는데 육신은 죄가 아니지만 죄의 배아라고 보았다. 신 의식이 발달되지 못한 사람은 육신에 속한 사람인데 그는 육신을 야생적이며 무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육신에 반대되는 개념인 영은 본래적 완전 인간에 속해 있는 것으로 사람의 신 의식을 점차적으로 깨우치는 일을 한다. 그러나 육은 영의 발전과 영의 지향을 가로막아서 영의 하는 일을 못하도록 방해한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인간의 본래적 완전성이 상실되었다고 했는데 이를 원죄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인간의 본래적 완전성이란 인간의 완전한 신 의식을 말하는데 원죄로 말미암아 신 의식의 발전 가능성 내지 본래적 완전성이 파괴되었다고 보았다.

슐라이에르마허는 기독교인들의 죄 의식을 원죄와 자범죄로 나누었는데, 원죄란 개인 행위 이전에 받아진 죄의 상태인데 자범죄의 근거가 된다고 했다. 자범죄는 원죄가 나타난 현상이다. 다시 말해서 원죄는 개체 인간의 실존 이전에 이미 존재했던 죄성으로서 선행의 완전 불능을 초래했고, 이 상태는 오직 구원의 영향력에 의해서만 벗어날 수 있다. 거듭난 자의 모든 범죄는 영적 생활을 저지하지 않지만 거듭나지 못한 자의 죄는 신 의식을 파괴한다. 세상의 악도 죄로 인해 존재하게 되었는데, 사회악은 죄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고 자연악은 죄와 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고 했다.

인간은 죄악의 공동 생활과 대립되어 작용하는 신적 공동생활의 영향을 받아 축복을 받게 되는데 죄는 하나님을 배반한것이고 은혜는 구속자의 행위와 전달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공동 생활에서 무죄한 그리스도의 완전성을 전달받아 구원을 얻게 된다.

인간의‘완전한 죄 의식’은 완전하고 무죄한 구원자의 절대적 영력에 의해서만 가능케 된다. 이는 구원자가 완전한 신 의식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초 인간의 천성은 본래 선하고 거룩한 것으로 스스로 완전하게 발전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가능성은 죄로 인해 상실되었는데 그리스도가 그것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자연 인간의 본래적 완전은 그리스도에게서만 찾게 된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구원자가 전달해주는 완전성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신 의식이란 보편적인 신 의식이 아니고,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있어서
의 신 의식이고, 유일신론적인 신 의식이 아닌 구속자와의 공동체를 통해 발전되는 신 의식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그가 신자들을 그의 신 의식 안으로 인도함으로 이루어지는데 그는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삼중 직무를 수행한다. 선지자로서의 그리스도는 그 자신 안에 주어진 하나님의 원계시를 나타내어 가르치며 영생을 전달하는 그의 사명과 성부와의 독특한 관계를 설명한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직무는 그가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고 대속의 죽음을 죽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힘을 얻게 된다. 그리스도는 지금 성부 앞에서 신자들을 대변하는데 이로 인해서 신자와 하나님과의 교제가 성취되고 기도가 상달된다. 그리스도의 왕적 직무는 크리스챤의 공동체적 삶의 모든 필요가 항상 그리스도로부터 유래하는 데서 나타난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왕국은 은혜의 왕국이므로 기독교는 정치 종교가 될 수 없고 신정 정치도 용납될 수 없다. 그리스도는 단순히 영적 주권을 행사한다. 그러므
로 교회와 국가의 분리는 전적으로 타당하다.

5) 교회의 신학으로서의 신학의 발전

슐라이에르마허에 있어서 객관적으로 고정된 신학은 있을수 없다. 신학은 종교적 의식의 요구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내적 확실성 이상의 어떤 정당성도 내세울 수 없다. 우리의 종교의식이 장소와 시대의 변천에 따라 달라지므로, 그리고 신학이란 이와 같이 항상 변하고 항상 발전하는 종교 의식의 자료들을 모아서 분석하고 체계화하는 것이므로 신학은 항상 발전하고 변한다. “17세기의 교과서는 더 이상 그 목적에 달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신학을 순화하고 완전케 하는 것이 교의신학의 과업 중의 하나이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신학의 목적이 교회를 발전시키고 지도하는 데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신학의 공동체적 특성을 강조했다.

6) 결론

슐라이에르마허는 신학을 논함에 있어서 객관적인 요소들을 전혀 무시하지는 않았으나(예: ‘계시’, ‘그리스도’, ‘공동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관적 및 인간적인 요소들을 더욱 강조했다. 그는 신학을 내적 종교 의식(또는 체험)에 긴밀히 연결시키고, 객관적이고 형식적인 교리보다 내적 종교 의식을 높이며, 그래서 신학을 규범적인 것(normative)으로 보기보다는 서술적인 것(descriptive)으로 취급하므로, 신학이 딱딱한 스콜라주의적 체계가 되는 것을 방지했고 생생한 종교 원리로 발전시키는 데 공헌했다. 즉 그에게 있어서 객관적이고 규범적인 권위는 종교적이고, 주관적이고, 역동적이고, 실존적이고, 신비적인 인간정신으로 대치되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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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헤겔

1) 신과 인간의 종합

헤겔(G. F. Hegel, 1770-1831)은 데카르트나 파스칼과는 반대로 신앙과 이성과의 균열대신 하나의 조화를 추구했다. 즉 그는 철학적 신과 성경적 신과의 조화를 추구했다. 따라서 헤겔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이 생겼다. 합리주의나 칸트의 신인 분리로부터 무한과 유한의 통일, 신과 인간의 통일 및 삶의 통일과 마음의 통일과 심지어 신의 통일에로의 전환점이 이루어졌다. 신을 멀리 있는 초월적 존재로 보며 인간과 세계와는 상관이 없는 하나의 타자로 보는 이원론적 유신론(자연신론)이 헤겔에게서 분명히 거부되었다.

신을 세계와의 불가분적 관계의 관점에서 보는 헤겔의 신관은 분명히 스피노자의 범신론의 영향을 받았다. 스피노자의 신은 우주와 분리해서 존재하는 신이 아니었다. 신은 세계 안에, 세계는 신 안에 있었다. 자연은 신이 스스로 존재하는 특수한 방식이었고, 인간의 의식은 신이 스스로 사유하는 특수한 방식이었다. 그러면 헤겔을 범신론자라고 할 수 있는가? 모든 것이 신이라고 보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범신론자라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헤겔이 경험적 세계를 신화하지 않았고 모든 것을 신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겔을 모든 것이 신 안에서 밀접한 통일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는 넓은 의미에서의‘범재신론’(pan-en-theism)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헤겔에 있어서 타자로서의 신은 만유를 포함하는 범재신에게 정복되었다. 그래서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서술함에 있어서 인격적 관계의 범주들이 거의 제거되고 말았다.

2) 신과 세계 및 역사와의 종합(신의 세속성과 역사성)

헤겔에 있어서 신은 절대 영이고, 자연이나 역사나 인간의 사상 등 모든 실재는 절대 영의 자기 표현 현상이다. 헤겔은 역사 안에서의 절대 영의 활동 현상을 진화론적이고 변증법적인 발전 과정으로 이해했는데, 절대 영이 자기를 버리는 부정의 과정과 자기를 취하는 긍정의 과정과 아울러 부정과 긍정을 초월하는 보다 높을 종합으로 상승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절대 영의 변증법적 활동을 통해 인간은 절대 영 안에서 자신을 의식하게 되고 절대 영은 인간 안에서 자신을 의식하게 된다고 했다. 즉 헤겔은 ‘세계 안에 존재하는 신’의 개념과‘신 안에 존재하는 세계’의 개념을 내세우며, 신과 세상과의 불가분적 상관 관계를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세계가 곧 신은 아니지만 세계가 발전과정에 있는 신이라고는 할 수 있다. 이 신은 발전과정에 있는 세계에 즉 역사 안에 자신을 밖으로 나타낸다. 그리고 세계를 자기 자신에게로 즉 자신의 무한과 신성에게로 이끈다. 이 모든 것은 만유를 포함하는 전능한 순환운동 가운데서 일어난다. 즉 신에게서 나아가서 신에게로 돌아온다. 헤겔은 이것을 표현하여 신의 외출과 신의 귀환이라고 했다.

헤겔은 결국 신을 물질적 세계나 정신적 세계와 분리해서 이해하는 데카르트나 자연신론의 이원론적 신 개념을 거부했다. 신은 문자적 의미에서 세계‘위’저 하늘에 존재하며 세계와 인간을 다스리는 전능한 통치자가 아니다. 신은 또한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세계‘밖에’존재하며 세계와 상관하지 않는 객관적 타자도 아니다. 신은 세계 안에, 세계는 신 안에 있다. 신은 유한한 것 안에 존재하는 무한자요 편재한 것 안에 존재하는 초월자요 상대적인 것 안에 존재하는 절대자다. 신은 절대자로서 세계나 인간과 관계를 맺는다. 신은 상대적인 것을 포용하고 창조하며 상대적인 것과의 관계를 가능케 하고 실현시킨다. 그러므로 신은 세계 안에 존재하는 영으로서 세계를 유지하고 지탱하고 동반하며 세계와 인간의 깊이와 중심과 높이가 된다. 세속적인 동시에 비 세속적이며 가까이 존재하는 동시에 멀리 존재하는 이 신은 인간과 항상 함께 하고 인간을 품으면서 인간의 모든 삶과 움직임 모든 실패와 타락을 유지하고 지탱한다. 즉 헤겔은 신을 유한 안에 깊숙이 존재하는 무한으로 그리고 세계와 인간과 역사 안에 존재하는 궁극적 실재와 모든 존재의 소멸될 수 없는 근거로 이해했다.

헤겔은 이와 같이 절대자를 역사 안으로 그리고 역사를 절대자 안으로 끌어들여 연결시키므로‘신의 역사성’을 강조했다. 따라서 헤겔에게 있어서 신의 비 역사성은 있을 수 없으며, 변화무쌍한 물리적 세계와 상관이 없는 부동하고 불변하는 희랍의 형이상학적 신은 있을 수 없다. 또한 헤겔에 있어서 신의 초 역사성도 있을 수 없다. 성숙과 발전의 미래가 주어지지 않는 고정 불변하는 정적 신은 있을 수 없다. 초역사적 영역에 존재하다가 갑자기 이적적인 방법으로 역사 안에 들어와 역사를 간섭하는 신은 있을 수 없다. 헤겔의 신은 역사 안에서 항상 역동적으로 활동하는 살아있는 신이다. 영원히 완전한 신이지만 역사화 될 가능성을 자유롭게 포착하는 신이다. 역사의 기초를 놓고 역사를 지탱하고 완성시키는 영원한 신이며 따라서 역사의 근원적 원인이 되며 모든 역사적 실재의 근원적 의미가 되는 신이다. 그러므로 역사 안에 활동하는 영원한 신은 역사의 근원과 중심과 미래이며 알파와 오메가이다.

우리는 여기 헤겔에서 신학이 초월주의, 합리주의 및 실존주의를 지나 역사주의로 넘어서는 기초가 마련된 것을 보게 된다. 현대신학이 모든 관심을 인간과 세계와 역사에두는 철학적 기초를 이미 헤겔이 마련해 놓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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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포이어바흐

포이어바흐(Ludwing Andreas Feuerbach 1804-1872)는 독일의 헤겔 좌파를 대표하는 철학자요, 종교비평가로 형법학자였던 P.J.A.포이어바흐의 4남으로 바이에른의 란츠후트에서 출생하여 계몽주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그는 일찍부터 종교에 관심을 품어, 하이델베르크와 베를린에서 신학을 배웠는데, 헤겔의 영향을 받아 1825년 에를랑겐 대학 철학부로 옮겼다. 29년 동 대학의 시간 강사가 되었는데, 그리스도교를 이기적이고 비인간적인 종교라고 비판하여 학교 당국의 반감을 사, 32년 실직하였다. 복직을 단념하고 36년 이후부터는 브루크베르크에서 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자연과학의 연구에도 힘썼다. 철학사의 연구에서 출발하였는데, A. 루게가 주재하는 할레 연보에 ‘헤겔 철학비판’(1839) 등 독자적인 사상을 발표하게 되면서 명성을 쌓아, 41년에는 대표작‘그리스도교의 본질’을 간행하여,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48년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종교론을 강의하였으며, 60년에 아내의 도기공장이 파산하여 레헨베르크로 이주하였으며, 만년에는 빈궁 속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헤겔의 역사주의적 및 세속주의적 신 개념은 그의 좌파의 대변자인 포이어바흐에 의해 자연 및 인간 중심적, 무신론적 신 개념으로 발전했다. 포이어바흐는 19세 때부터 신학공부를 시작했으나 신학에 흥미를 잃고 철학을 공부하면
서 헤겔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하며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지 알게 됐다. 신학이 아니라 철학이다. 믿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이다.’이렇게 선언한 포이어바흐는 헤겔이 간 길 이상을 걸었다. 그는 헤겔의
절대 관념론에 반대하여 보다 실제론적이고 보다 물질주의적인 인식론을 내세웠다.

포이어바흐에 있어서 모든 철학의 출발점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인간의 첫째 대상은 인간이다.’인간의 관심의 대상은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어떤 존재가 아니라 실제적인 존재인 인간이었다. 여기 포이어바흐의 인간은 자연이나 감각적 삶에서 유리된 단순한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의지와 감정과 사랑이 겸비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전인격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며, 공동체와 유리된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인류 전체에 속한 우주적 존재로서의 인간이었다. 포이어바흐에 있어서 실제적 인간은 이제 종교의 시작과 끝이 되었다.

포이어바흐는, 인간이 무한자를 인식한다고 할 때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무한성을 인식하는 것뿐이라고 했다. ‘무한자를 인식함에 있어서 인식의 주체는 그 자신의 성품의 무한성을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다.’즉 인간은 자신으로부터 그의 인간성을 끄집어 내세운 후 그것이 마치 자기밖에 존재하는, 자기와 분리된 하나의 자율적인 존재로 인식한다. 그리고 그것을 신이라고 부르고 그것을 경배한다.

결국 포이어바흐의 신은 인간의 돌출에 불과하다. ‘인간에게 있어서 절대자는 그 자신의 성품에 불과하다. 자기에게 미치는 대상의 능력은 자기 자신의 성품의 능력에 불과하다. ’신은 인간이 돌출시켜 만들어낸 상상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의 성품들인 사랑, 지혜, 공의 등은 실제로는 인간의 성품들에 불과하다. 인간에게 있어서 신은 인간 자신이다(Homo nomini Deusest). 결국 신이 자기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형상대로 신을 창조한 것이다. 인간은 위대한 창조자요 신은 훌륭한 피조물이다.

포이어바흐는 이상과 같은 그의 무신론적 인본주의를 역사철학적 관점에서 정당화하면서 기독교 시대는 이제 돌이킬 수 없게 지나갔고 우리는 지금 ‘기독교 몰락시대’에 살고 있다고 했다. 결국 그는 큉이 지적한대로 ‘현대 무신론의 교부’가 되고 말았다.

우리는 여기 포이어바흐에서 현대 정치신학에서 발견하는 ‘탈 기독교 시대’에 등장하기 시작한 비종교화된 ‘성숙한’ 인간의 모습과, 인간의 모습을 가지고 새로 나타나기 시작한 ‘노동자 신’ 또는 ‘민중 신’의 모습이 이미 분명하게 형성되어졌음을 보게 된다. 성경과 전통적 기독교 신학이 묘사한 신의 모습은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인조적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치부하는 인본주의적 자율성의 사상적 기초를 이미 포이어바흐가 마련해 놓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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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마르크스

1) 사회 정치적 무신론

헤겔의 좌파에 속하면서 포이어바흐의 영향을 받아 사회정치적 무신론을 주창한 사람이 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 였다. 그는 유대인으로 태어나서 기독교인으로 교육을 받은 후 무신론자로 그의 생애를 마쳤다.

마르크스는 1818 년 5월 프로이센령 라인주의 트리어에서 부유한 유태계 독인인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변호사로 자유주의적 사상의 소유자였다. 트리어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본 대학, 이어 베를린 대학에 진학하여 법학, 역사학, 철학, 특히 당시 압도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헤겔 철학을 배웠다. 1841년 그가 23세 때 마르크스는 베를린에서 부르노 바우어가 이끄는 ‘베를린의 청년 헤겔파’에 속하여 역사, 철학, 문학을 공부하며 무신론으로 기울어졌다. 1842년 바우어가 그의 과격한 신학적 입장 때문에 교수에서 해직되고 그의 사상의 출판이 금지되자 ‘베를린의 청년 헤겔파’는 이제 종교적 비판에서 사회 정치적 비판으로 그 관심을 옮겼다. 포이어바흐의 인본주의적 무신론으로부터
마르크스의 정치적 무신론이 태동된 것이었다. 마르크스 자신도 프러시아 정부의 압박을 받아 1843년 독일을 떠나 파리에 가서 생활하는데 그는 거기서 사회주의적 혁명사상에 접하면서 무신론적 사회주의자와 무신론적 공산주의자로
등장했다. 마르크스에 있어서 그의 무신론은 그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설립하는 데 이념적 기초를 제공해 주었다.

2) 변증법적 물질주의

마르크스가 헤겔의 영향을 받아 세계 역사를 변증법적 진화론의 관점에서 보게 되었으나 그는 결국 헤겔의 사상체계의 중심을 이루는 변증법적 관념론을 거절하고 포이어바흐의 변증법적 물질주의를 택했다.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를 따라 인간을 의식의 존재로 보기 전에 육체적 및 물질적 존재로 보았다. 그의 세계는 추상적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회적 세계였다. 따라서 그는 종교의 출발점을 인간과 현세의 실제적 사건들로 삼았고, 신을 인간이 만들어 낸 돌출물로 보았다.

3) 인간의 역사성

마르크스는 한 걸음 나아가 포이어바흐의 종교비판을 한층 더 심화시켰다. 포이어바흐도 인간의 역사성과 사회성과 실제성을 중요시하기는 했지만 마르크스는 이를 한층 더 심화시켰다. 포이어바흐가 인간을 인류 전체에 속한 우주적 존재로 보면서도 철두철미하게 역사적 존재로 분석하지 않은데 비해, 마르크스는 인간을 본질적으로 역사적 발전의 틀 안에서 그리고 특수한 역사적 시대를 배경으로 해서 이해하려고 했다.

포이어바흐가 인간을 공동체적 및 사회적 존재로 보면서도 철두철미하게 사회학적 콘텍스트의 관점에서 분석하지 않은 데 비해, 마르크스는 인간을 사회학적 처지의 관점에서 분석했다.

포이어바흐가 계몽과 새로운 인식을 통한 인간해방과 사회개조를 주창하면서도 철두철미하게 실제적인 비판 내지 혁명 활동을 격려하지 않은데 비해, 마르크스는 인간해방을 위한 실제적인 정치활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사회 개조가 밑으로부터 사회를 개조시키는 혁명운동의 결과로 성취된다고 분석하고 노동계급이 실제적 정치투쟁에 가담할것을 요구했다. 착취 받는 무산계급이 착취하는 유산계급을 향해 정치적 계급투쟁과 사회주의적 혁명운동을 일으키는 길만이 인간해방과 사회 구조를 가져오는 길이라고 했다.

4) 공산주의 사회의 이상:사회, 경제, 정치적 인본주의

마르크스는 그의 초기 작품에서 헤겔과 포이어바흐의 영향을 받아 인도주의적 이상을 많이 언급했으나, 그의 후기 작품 특히 그의‘자본론’에서는 사회, 경제, 정치적 이상을 보다 많이 언급했다. 후기 작품에서도 인도주의적 요소가 그대로 남아 있기는 했으나, 그는 모든 인간이 참으로 인간다워지기 위해서는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는 모순이 제거되고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그대로 실현시킬 수 있는 사회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인도주의적 사회야말로 마르크스가 제시한 노동계급의 철폐와 사유재산의 철폐와 독재적 지배계급의 철폐로 이루어지는 혁명의 목표이며 계급 없는 공산주의 사회의 이상이었다. 그것은 정부도 종교도 사라져 버린 사회이며 사회 민주주의적 인도주의가 성취
된 사회이다. 우리는 여기 마르크스에서 현대 정치신학이 그 궁극적 관심을 물질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그를 규정하는 근본 요인이며 그를 해석하는 근본 틀로서의 역사적(사회, 경제, 정치적) 구조에 두는 사회, 경제, 정치사적 가치 기준이 이미 마련된 것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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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리츨

19세기 독일 신학자들 중 지대한 영향을 미친 알브레히트 리츨(Albrecht Ritschl, 1822-1889)은 1822년 베를린에서 루터교회 감독의 아들로 태어나서 본, 할레, 하이델베르크, 튜빙겐 대학에서 수학했다. 1852년부터 본 대학의 교수로, 1864년부터는 괴팅겐 대학의 교수로 활동하다가 1889년에 죽었다.

1) 사변적 합리주의 거부

리츨은 초기에는 헤겔과 튜빙겐 학파의 영향을 받아 헤겔을 추종했으나, 그는 차츰 칸트와 슐라이어마허 그리고 로쯔(Rudolf Lotze) 등의 영향을 받아 헤겔과 그의 사변적 합리주의를 거부했다. 저는 전통적인 유신논증이 제일원인 또는 절대자를 추론하는데 그칠 뿐,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보여주지는 못한다고 했다.

리츨은 형이상학을 신학에서 추방했으나 나름대로의 그의 인식론을 형성했다. 활동하지 않고 쉬고 있는‘물 자체’(things-inthemselves)는 인식될 수 없으나, 물 자체가 우리에게 행동하고 우리가 그것에 응답할 때 그것은 인식될 수 있다고 했다. 따라서 세상에서 유리된 신이 전통적 유신논증에 의해 증명될 수는 없으나, 신이 계시를 통해 인간에게 인격적 영향을 미칠 때 인식될 수
있다고 했다. 따라서 참된 계시와 계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나 느낌이나 인식이 없이 신 자신에 관해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는 모든 시도는 헛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기독교 신앙은 논증에 대한 지적 동의가 아니고 인격에 대한 인격의 응답이다. 신앙에는 지성보다 의지가 더 큰 역할을 한다. 과학자나 철학자가 사물에 대해 ‘사실적 판단’을 내리는 데 비해 종교인은 사물에 대해‘가치적
판단’을 내린다고 했다.

리츨은 칸트와 함께 사변적 합리주의를 거부하고 실천적 윤리를 종교의 중심으로 삼았다. 사변적인 관심은 부적당하다고 했다. 영적 실재는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없고 경험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슐라이어마허와 마찬가지로 자연신학과 아울러 계시 신학을 거부하면서 기독교의 본질을 크리스천의 체험으로부터 끄집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슐라이어마허가 그 체험을‘절대의존의 감정’에서 발견했던 반면 리츨은 그 체험을‘윤리의 영역’에서 발견하려고 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을 사유의 방법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행동 가운데서 그를 분별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사역도 생애와 윤리적 인격을 통하여 분별할 수 있다고 했다.

결국 리츨은 윤리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체험에 근거한 일종의 ‘인격적 유신론’(a personal theism)을 내세웠다. 사실 리츨의 신의 개념이 전적으로‘실천적’(practical)이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그가 신을 인간의 종교적‘가치판단’(value-judgement)과 관련하여 묘사한 것은 그의 신 개념이 실천적으로 기울어진 것을 말해준다고 하였다. 그는 가치 판단을 선에 대한 종교적 진술로 이해했는데 신은 선을 의미한다고 했다. 결국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할 수 있는 유일한 타당성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생한 체험이라고 썼다.

2) 역사적 예수

리츨은 경건주의나 종교적 감정주의에 대해 관심이나 동정을 나타내지는 않았다. 신비적 계시와 체험은 신앙의 기초나 윤리적 지표가 될 수 없다고 했다. 신앙의 확실한 기초는 ‘역사적 예수’의 사역이다. 슐라이어마허가 종교적 인식을 신학의 자료로 삼은 데 비해 리츨은 역사적 사건,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적 계시를 신학의 자료로 삼았다. 예수의 독특한 신 의식만이 우리의 유일한 표준이요 모델이 된다고 했다. 기독교의 계시는 근본적으로 역사적 계시인데, 그와 같은 역사적 증언이 신약에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고 했다. 신약을 통해 전해진 예수의 역사적 사건만이 무너뜨릴 수 없는 객관적인 사건이며 신자들의 유일한 권위라고 했다.

예수의 역사성을 강조했던 리츨은 결국 복음서의 저술 연대를 1세기로 잡았고 대부분의 바울 서신이 바울의 저술임을 받아들였다. 신약의 성경이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역사적으로 믿을만한 증언들을 제공해준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단순히 역사 연구의 결론이 아니라 하나의 가치판단 이라고 했다. 즉 예수가 한 사람에게 나타나서 그를 붙잡고 그를 자유롭게 할 때 역사적 사건들은 그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된다고 설명했다.

3) 하나님의 왕국

리츨은 복음의 본질을 두 개의 초점을 가진 타원으로 보았다. 한 초점은 칭의(justification)와 구속(redemption)과 화해(reconciliation)이며 또 다른 초점은 하나님의 왕국(Kingdom of God)이다.

칭의와 구속과 화해는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을 묘사한다. 이것은 인간을 자연의 노예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 세상을 지배하고 죄를 이기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모든 인종과 모든 종족이 도덕적 공동체와 형제 사랑 가운데서 연합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둘째 초점은 하나님의 왕국이 된다. 그리스도의 사명은 이 왕국을 세우는 데 있었고 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자기 생명을 바쳤다. 화해의 목적은 왕국건설에 있다고 했다. 이 두 개념 사이에는 갈등이 없다. 칭의 또는 죄의 용서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의미하는데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윤리적인 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리츨에 있어서 하나님의 왕국은 종말론적이라기보다는 윤리적이었다. 즉 역사 안에서 점진적으로 건설되어 가는 왕국이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목적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었고 공동체적인 것이었다. 교회는 기도와 예배로 연합된 왕국의 멤버들로 구성된다. 리츨에 있어서 교회는 무릎을 꿇는 왕국이었고, 왕국은 일하기 위해서 걸어가는 교회였다. 리츨이 신비주의를 거부한 이유는 신비주의가 개인주의를 강조한 나머지 왕국의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과업을 부인했기 때문이었다.

리츨은 기독교의 윤리적인 목적인 하나님 왕국의 건설을, 자연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의지와 문화적 이념의 성취와 동일시했다. 즉 리츨은 기독교의 이념과 문화적 이념을 동일시하는 문화 신학(culture protestantism)을 제창했고 후에 발전된 ‘사회 복음주의’를 태동시켰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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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하르낙과 기독교의 본질

1) 저자 소개

19세기말의 가장 위대한 개신교 역사가로 불리는 하르낙(Adolfvon Harnack, 1851-1930)은 독일 도르팟트에서 실천신학 교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에를랑겐, 도르팟트, 라이프찌히에서 수학한 후 1874년부터 라이프찌히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1879년부터는 기센대학에서 1886년부터는 마르부르크대학에서, 1889년부터 1921년까지는 베를린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다가 죽었다. 그가 남긴 최대의 업적 중의 하나는 1886년부터 저술한 3권의 교리사(history of dogma)였다. 그는 여기서 기독교의 신조들(사도신경, 니케아 신조, 칼케돈 신
조 등)이 형성된 배경과 발전 과정을 역사 비평학적 관점에서 서술했으며, 기독교 교리 형성 과정에서 기독교가 조우한 두 가지 사상 중 그 첫째 사상인 그노스틱주의는 기독교가 거부했으나 그 둘째 사상인 헬레니즘은 그대로 받아들였는데, 그 결과 기독교가 헬레니즘화 내지 지성화되었다고 비판했다. 20세기 초 하르낙의 명성을 온 유럽과 세계에 떨치게 한 사건은 1889년 겨울 베를린대학에서 ‘기독교의 본질’이란 제목으로 행한 16번의 강의 내용이 책으로 출판된 일이었다. 1900년 라이프찌히 역은 하르낙의 책을 운송하는 화물차로 붐볐으며, 1927년에는 독일어로 14판이 출판되었고, 14개 국어로 번역되기에 이르렀다.

2) 저술의 목적

하르낙이 자유주의 신학의 고전적 대표작이라고 불리는 ‘기독교의 본질’(What is Christianity, 1899-1900) 을 저술하게 된 목적은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긴박한 질문에 대한 역사가로서의 해답을 제시하려는 데 있었다. 그가 사용한 역사적 연구 자료는 공관복음서였는데, 복음서 가운데 예수가 가르친 복음과 예수에 관한 복음과를 날카롭게 구분했다.

3) 복음의 본질

하르낙은 이 저서에서 복음의 본질을 분석하고 드러내려고 시도했다. 즉, 기독교의 다양한 역사적인 형태인 신조나 제도나 심지어 성경뒤에 숨어 있는 영원히 타당한 알맹이를 끄집어내려고 시도했다. 늘 변화하는 형태 뒤에 참으로 고전적이고 언제나 타당하고 아주 단순한 그 무엇이 있는데, 그것은 교의 신학의 진술 속에서도 발견할 수 없고, 교회의 제도 안에서도 발견할 수 없고, 사도 바울의 진술 속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고 했다. 결국 우리는 그것을 기독교의 창시자인 예수에게서 발견할 수 있으며, 그분의 모습을 공관복음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의 모습을 분명히 알기 위해서는 복음서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방법을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복음서 안에는 틀이 있다. 즉, 이적에 대한 기사와 귀신이나 종말에 대한 이야기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사용된 틀에 불과하다고 했다. 솔직히 말해서 이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귀신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의 끝이 가까운 것도 아니다. 복음의 본질은 독립되어 있고 이런 것들과 관련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고 했고,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가르침에서 발견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선지자와 같이 말씀했지만 선지자와 같지는 않았다. 그의 말씀은 평화와 기쁨과 확신을 자아냈다.…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항상 의식하면서 살았고, 자기의 양식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으로 삼았다.”(제 3강의 초두)

4) 예수의 가르침

하르낙은 그의 셋째 및 넷째 강의에서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의 가르침의 내용을 다음 세 가지로 요약했다. “우리가 예수의 가르침을 개관할 때 세 가지 주제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각기 전체를 포함한다고 할 수 있으므로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도 전체를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도래이고, 둘째는 하나님 아버지와 인간 영혼에 대한 무한한 가치이고, 셋째는 보다 높은 의와 사랑의 계명이다. 예수의 메시지가 그렇게도 위대하고 그렇게도 강력한 것은 그의 메시지가 그렇게도 단순하면서도 그렇게도 풍부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제 3강의)

하르낙은 복음서 안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두 가지 상이한 견해가 있음을 지적했다.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외적 통치로 보는 견해와 이미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내적 통치로 보는 견해가 있다고 했다. 하르낙은 다시 주장하기를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인 전자의 입장을 거부하고 후자의 입장을 취했다고 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개인에게 도래하여 그의 영혼 속에 들어가 그를 붙잡음으로 인한다. 실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한다. 개인들의 가슴속에 이루어지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한다. 그것은 능력 가운데 계신 하나님 자신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견해에서 볼 때 외적이고 역사적인 의미와 관련되는 모든 극적인 요소들은 사라지고 만다. 미래에 대한 모든 외적인 소망도 사라지고 만다.”(제 3강의 마지막 부분).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일상생활의 산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의 선물’로 나타난다. 그것은 ‘순수한 종교적 축복’이며,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경험’이다. “그것은 한 인간의 전 존재 속에 침투하여 그것을 지배한다. 겸손한 자에게 임하여 새롭고 기쁜 삶을 부여하는 이 왕국이 없이는 삶의 의미와 목적이 밝히 드러나지 않는다. 이것을 예수 자신이 발견했고, 그의 제자들이 발견했다.”(제 4강의 중간 부분).

예수가 복음의 본질을 설명한 또 하나의 방법은 하나님을 모든 인류의 아버지로 선언하고 아버지로서 그가 그의 자녀들을 한없이 귀하게 여긴다고 강조한 점이다. 모든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에게는 한없이 귀하다. “실로 예수의 모든 메시지를 둘로 요약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것과 인간의 영혼이 너무 귀해서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르낙은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 된 사실과 인간 영혼의 가치를 설명하기 위해 ① 주기도와 ② “네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는 말씀과 ③ “참새 한 마리도 아버지의 허락이 없이는 땅에 떨어질 수 없다”는 말씀과 ④ “온 천하를 얻고도 네 생명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는 말씀의 뜻을 풀이했다.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과 그의 섭리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인간의 지위와 인간 영혼의 무한한 가치의 개념들 속에 복음의 전부가 표현되었다.”(제 4강의 중간 부분).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그의 모든 자녀들은 형제 사랑의 윤리적 삶을 실천해야만 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의 윤리는 ① 외부적 종교의식이나 선행과 관련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② 사람의 내적 성향과 동기에서 우러나오는 ‘보다 높은 의’인 ③ 사랑과 ④ 겸손의 삶이었다. 이것이 예수가 가르친 복음적 삶이었다. “보다 높은 의와 사랑의 새 계명의 메시지를 이 네 가지 의미로 표현하므로 예수는 윤리적 삶의 영역을 그 이전에 아무도 정의하지 않았던 새로운 방법으로 정의했다. 팔복은 그의 윤리와 종교를 포함하는바 양자는 뿌리에서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외적이고 특수한 요소들에서 벗어나 있었다.”(제 4강의 끝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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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복음의 문제들

하르낙은 예수가 가르친 복음의 근본 요소들을 정의한 후 제5강의부터 제8강의에서 복음과 관련된 6가지 문제들을 기술했다.

첫째, 복음과 세상과의 관계에 대해서 세상을 부정하고 도피하는 금욕주의는 복음 안에 설 자리가 없다고 했다. “이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 우리는 복음이 세상을 부인하는 메시지라는 견해를 거부해야 한다. 예수는 우리가 싸워야 할 세 가지 원수들에 대해서 언급했다. 그것들을 피하라고 하지 않고 싸워 없애라고 했다. 이 세 원수들은 맘몬과 염려와 이기심이다.”(제5강의 중간) 예수가 요구한 것은 금욕적 도피가 아니라 자기 부정과 자기 희생의 사랑이었다.

둘째, 복음과 가난한 자와의 관계에 대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 하르낙은 교회사에 나타난 예수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을 제시했다. 즉, 예수를 위대한 사회 개혁자로 보는 견해와 예수는 사회적 또는 경제적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고 했다. 예수의 가르침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 가난한 자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대부분의 시편과 후기 유대 문학에서‘가난’이란 말은 그들의 마음이 열려져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사용되었다. 예수도 이와 같은 말의 용도를 발견했고 그것을 그대로 채택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서에서‘가난한 자들’이란 표현을 대할 때 그 말을 경제적 의미로 사용하면 안 된다.”(제5강의 끝 부분) 따라서 하르낙은 예수가 사회 개혁의 프로그램을 제시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예수는 사회 개혁자가 아니었다. 예수는 때로 가난한 자들이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가난의 형편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을 것을 암시하기도 했다.”(제6강의 중간부분)고 했다.

셋째, 복음과 법과의 관계에 대해서 하르낙은 복음이 근본적으로 정치 질서와 같은 세속적 질문을 다루지 않았다고 했다. “합법적 정부에 대한 예수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면, 그는 정치적 혁명가도 아니었고, 정치적 프로그램을 제시하지도 않았다.”(제6강의 끝 부분)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의 권리 추구를 포기할 수 있어야만 했고, 정의가 무력의 도움으로 실현되지 않고 선에 대한 복종으로 실현되는 나라를 형성하는 데 협력해야 했다.”(제6강의 끝 부분) “복음은 내적 사람을 향하여 호소한다.…복음이 세우는 나라는 세상의 나라가 아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은 교황이 세상을 지배하려는 신정 정치와 모순될 뿐 아니라, 종교가 이 세상 일을 직접 또는 공적으로 간섭하는 것을 금한다. 복음이 말하는 것은 이것이다. 즉, 삶의 진정한 관심사는 항상 같다는 것이다. 오직 한 관계, 한 이념이 있을 뿐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의 나라의 시민이 되고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그리고 우리는 싸우고 투쟁하자. 억눌린 자에게 공의를 부여하고 세상의 형편을 이웃에게 가장 좋도록 만들자. 그러나 복음이 직접 도움을 주리라고 기대하지는 말자.”(제7강의 처음 부분)고 하였다.

넷째, 복음과 노동과의 관계에 대한 문명의 문제에 대해서 하르낙은 같은 입장을 취했다. 노동과 문명의 발전이 귀하고 가치 있는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최고의 이상이 되지는 못한다고 했다. 그것은 영혼에 참 만족을 채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르낙은 끝으로 복음과 하나님의 아들과의 관계에 대한 기독론의 문제와 복음과 교리와의 관계에 대한 신조의 문제를 취급했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세상에 전하는 자라는 의미에서 자신을 그렇게 부른 것이었다고 했다(제7강의 후반부). 하르낙은 예수가 어떻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느냐는 문제는 신비에 속하며 심리학이나 역사적 연구도 이 문제에 대해서 정확한 답변을 하지 못한다고 했다. 하르낙은 복음이 교리의 체계나 우주에 관한 철학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복음은 영생을 가져다주는 기쁜 소식이요 바른 삶을 가르치는 교훈이다. “기독론적 신조를 복음 앞에 놓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에서 멀리 떠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따라 살기 시작한 사람만이 그리스도에 대해 바로 생각할 수 있고 바로 가르칠 수 있다.”(제8강의 후반부)고 했다.

6) 복음과 교회사

하르낙은 그의 저서의 후반부인 제9강의부터 제16강의에서 교회사에 나타난 복음의 이해와 발전 과정을 취급했다. 즉 사도 시대와 가톨릭주의 시대와 개신교주의 시대에서 복음이 어떻게 이해되고 발전되었는가를 시대별로 고찰했다. 사도 시대의 기독교의 특징은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예수를 주님으로 인정한 것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산 교제를 체험한 것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대 가운데서 순결과 형제애의 거룩한 삶을 산 것이었다고 지적했다(제9강의). 사도 시대에 바울은 기독교를 유대주의와 율법의 종교에서 구출하여 이방인을 위한 세계적 종교로 만들었다. 이와 같이 바울이 유대주의적 요소들과 제한점들을 제거했지만 동시에 복음에 새로운 요소들과 제한점들을 부여했다. 즉, 교회에 새로운 형태의 예배를 수립하고 기독론을 강조하고 교회 안에 구약을 유지하도록 함으로 복음의 본래적 순수성과 능력을 변질시키게 되었다(제10강의)고 했다. 하르낙은 기독교의 가장 큰 변화가 2세기에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즉, 2세기의 기독교가 자연 종교, 정치, 종교 및 이원론적 그노스틱주의와 싸워 승리했으나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아 신앙을 지성화하고 교리와 예배와 생활이 고정된 형태를 취하므로 가톨릭주의로 변화되었다고 지적했다(제11강의). 희랍 가톨릭주의는 희랍 자연 종교의 연속에 불과했으며, 기독교의 옷을 입은 희랍의 산물이었다. 그것의 특징은 동방 교회와 그 특성들을 공유하는 가톨릭주의와 로마 제국을 계승하는 라틴 정신을 이어받은 것과 어거스틴의 종교적 정열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종교적 정열은 교회주의에 의해 패배를 당하므로, 로마 가톨릭주의는 결국 로마 제국을 계승하는 데 그치게 되었는데, 이는 복음을 전적으로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제14강의)고 했다. 종교 개혁은 교회사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운동이었다. 종교가 종교의 본질적인 요소에로 되돌아갔다는 점에서 그것은 참으로 종교 개혁이었다. 말씀과 신앙의 요소가 강조되었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진리가 선포되었다. 교회의 외적 권위와 성례주의가 거부되었고 교회는 이제 신앙의 영적 공동체가 되었다(제15강의). 종교 개혁이 복음을 회복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종교 개혁이 범한 오류도 없지 않았다. 국가 교회를 세운 일, 신앙과 감정을 지나치게 강조한 점, 수도원 정신을 폐지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하르낙은 개신교가 종교 개혁의 정신을 붙잡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복음의 단순성과 순수성을 붙잡아야 한다고 했다. 신학만으로는 부족하다. 복음 안에 나타난 크리스찬의 신실성과 자유를 유지해야 한다. 하르낙은 끝으로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의 종교라고 강조했다(제16강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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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다윈의 진화론

역사 비평학 못지않게 신앙에 피해를 준 것이 바로 진화론이다. 19세기 후반 신학의 주요 주제는 과학과 신학의 갈등이었다. 그 중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앞서 본 성경에 대한 역사 비평학과 다윈에 의해서 주창된 진화론이다. 진화론은 1859년 출판된‘종의 기원’으로 시작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 섭리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존엄성은 사라진다. 다윈 이전의 과학 세계는 뉴톤이었다. 그에 의하면 자연은 기계적인 형태였다. 과학자들은 자연의 질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질서는 자연 신학에 잘 적응이 되었다. 그리하여 낭만주의 시대까지 과학은 신학의 적이 아니라 창조물이었다. 이 신학과 자연 과학의 조화는 낭만주의에서 극치를 이루었다. “창조주 없이는 창조가 있을 수 없다.”과학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사실 이러한 과학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이나 섭리는 단지 질서와 비슷한 단어일 뿐이었다. 하나님은 수학자였다. 그래서 너무도 절묘한 질서와 조화로서 세상을 만드셨다. 생물들도 그 모양이나 종류가 너무나 조화를 잘 이루고있었다. 창조주는 자연의 법칙대로, 멋진 디자인으로 그들이 생겨나도록 한 것이다. 아니 어찌 보면 창조주는 곧 자연의 법칙이었다.

하지만 이제 자연 선택의 이론에 의해서 이러한 섭리론은 흔들리게 된다. 다윈은 자연 선택이 섭리의 개념보다 진화단계에 더 적합한 이론을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종의 기원’의 부제를 ‘자연 선택이나 생존의 투쟁에서 적응하는 종을 유지하는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모든 생물은 자연과의 투쟁에서 적응하는 종이 살아남을 뿐 아니라 더 잘 적응하도록 변화되어 간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삶의 투쟁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생물은 사라져 버린다. 단지 적응이 되는 종류들만 남게 된다. 뿐만 아니라 적응하기 위해서 생물들은 투쟁을 하게 되고 이러한 투쟁 과정에서 새로운 종류의 진화가 나타난다. 많이 사용되고 소용이 있는 기관은 발전하고 쓸모없는 기관은 퇴화한다. 이리하여 전보다 발전된 종류가 나타나고 여기서 새로운 종의 기원이 시작된다.

그리하여 가장 하급의 생물에서 고등한 생물로 수십만 년의 세월을 두고 서서히 진화해 가는 것이다. 생물들 가운데 가장 진화한 것이 유인원이다. 그 중에 원숭이는 어느 날 일어설 수 있게 되었고 차츰 허리를 펴고 걷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손을 사용하여 무엇인가 연장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렇게 인간은 고등동물로 스스로를 만들어 가장 잘 적응하는 생물이 되었다.

여기서 하나님이 할 일은 무엇인가? 없다. 생물이 적응하는 것은 스스로의 힘이다. 그러면 성경에 쓰여진 창조의 기사들은 어찌된 것인가? 당연히 진화론과 반대 입장에 서게된다. 그렇다면 성경이나 진화론의 내용 중 하나는 사실이 아닌 것이 된다. 만약 진화론을 받아들인다면 성경의 내용은 거절해야 한다. 그러면 창세기만 거절할 것인가 아니면 성경 전체를 그렇게 할 것인가?

이뿐만 아니라 다윈의 이론에 의하면 인간에게 주어졌다는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 스스로가 만든 이야기에 지나지 않게 된다. 다윈은 인간이 원숭이에서 진화되었다고 1871년 출판된 ‘인간의 가계’라는 책에서 분명히 밝혔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타락과 구원도 모두 허튼 소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논리 안에서는 전통적인 신앙이 어떤 형태로든 바뀌어야만 하게 되었고, 성경적인 인간관은 설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굉장한 논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과학자들도 다윈의 의견에 비판을 가했다. 이에 대하여 헉슬리라는 다윈 옹호자는 외쳤다. “내가 되풀이 선언하건대 어떤 사람이 원숭이를 할아버지로 두었다고 창피하게 생각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오히려 종교적인 편견으로 이끄는 인간을 조상으로 둔 것이 더 수치스럽다고.

하지만 신앙인들은 다윈이 표현하는 인간의 모습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영혼이란 것이 어디있는가? 두 가지는 분명하였다. 그 하나는 과학이 영혼에 관해서 아무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영혼은 과학의 영역 밖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혼은 아담이건 그의 후손이건 특별한 피조물일 수도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이란 생물은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창조에 있어서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모든 피조물 중에 특별한 것이었다. 어느 피조물에 하나님의 형상이 찍혀져 있는가! 또한 어느 피조물에 인간 같은 도덕적이고 영적인 삶의 차원이 있는가! 이것을 무시하고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근본적으로 같은 물질적인 차원에 놓고 다룬다면 그 결과는 너무도 자명한 것이었다. 곧 다음 세기에 나타나는 인간의 악이었다.


그는 홀로 성경을 연구하고 기도하다가 1821년 10월 10일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후 자신이 복음 전하는 사람으로 부름 받았음을 깨달았다. 피니는 2년 후 1823년 6월 25일 세인트 로렌스 노회의 배려로 자신이 다니던 교회의 담임이던 프린스턴 신학교 출신의 조지 게일 목사의 문하에서 신학 수업을 시작해 6개월 후인 그해 12월 30일 강도사 자격을 얻었고, 다시 6개월 후 1824년 7월 1일 장로교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1824년 봄부터는 서부지역여선교회의 후원을 받으며 뉴욕주 북부 지역 정착민을 상대로 선교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50년 동안 그는 미국, 영국, 스코틀랜드 등지를 다니며 부흥회를 열었다. 부흥사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은 그는 여러 도시에서 여러 해 동안 끊이지 않고 계속적인 부흥회를 진행하였다. 뉴욕이건 필라델피아건 일단 부흥회를 시작하면 일년 이상 계속하였다.

그의 설교는 능력이 있어 청중들로 하여금 죄를 뉘우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만들었는데, 1830년 뉴욕 주 롯체스터에서 가진 전도 집회 때는 롯체스터 시민 10,000여 명 중 1/10이 회개했고, 1,200명이 교인으로 새로 등록하게 되었으며, 1831년 한 해 동안에 십만 여명의 성도가 생기기도 하였다.

1832년 뉴욕의 친구들은 극장을 하나 사서 그를 위한 전용 부흥회 장소로 제공하였다. 여기서 2년 동안 일곱 그룹의 신자들이 모여서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 때쯤에 피니는 장로교를 떠나서 독립 교단을 만들었다. 장로교의 예정론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볼 때 구원은 인간의 결단이지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예정된 자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피니의 부흥을 위한 위와 같은 신학은 당시 칼빈주의적인 입장과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그는 신앙 부흥을 위한 인간의 역할을 대단히 강조하였다. 그가 보기에 부흥은 전적으로 인간에게 책임이 있었다. 인간이 부흥을 원하고 부흥을 위한 준비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부흥은 당연히 일어나는 것이었다. 피니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그냥 내버려두면 자연히 악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 속에 있는 감정에 강한 감동을 일으키신다. 그러면 그때부터 타락한 인간도 순종하게 된다. 물론 감동은 신앙이 아니다. 하지만 신앙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감동된 욕구와 감정이다. 대개의 경우 의지도 감정에게 복종하는 것이 인간이라고 그는 보았다.

피니는“사람들의 지식은 너무 부족하고 원칙은 너무 약해서, 감동되지 않으면 할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도 전혀 하지 않을 것이다.”그러기에 부흥회는 필요하다고 보았다. 세상이 여러 재미있는 일들을 통해서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신앙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처럼, 교회도 사람들이 하나님께 복종하도록 지옥과 형벌을 알려주고 말씀으로 감동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피니는 1836년 오벌린(Oberlin) 대학교의 신학교수가 되었고 1851년에는 학장이 되었는데, 그는 계속 설교와 교수에 종사하며 여생을 보냈다. 피니가 사용했던 전도방법의 특징은 개인의 자의적 회개와 헌신을 강조하면서 전도를 위한 수단과 방법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는 것을 정당화 한 점이다. 피니의 적극적이고 인위적인 새로운 전도 방법(New Measures)이 그 방법을 따르는 자들 중 성령에 사로잡힌 자들에게는 큰 성과를 가져오게 했지만, 수단과 방법에만 지나친 관심을 기울인 직업적 전도자 들에게는 전도를 한갓 감정주의와 사업주의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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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무디의 부흥운동

1857년과 1858년에는 뉴욕시의 실업인들 가운데서 기도회를 통한 부흥운동이 일어났는데, 이 부흥운동은 점차 미국 전역과 캐나다에까지 널리 퍼지게 되었다.

19세기 후반기 부흥운동을 이끌어간 뛰어난 지도자는 디 엘무디(Dwight Lyman Moody, 1837-1899)였다. 피니가 훌륭한 교육을 받은 학자였음에 비해 무디는 무식한 구두 수선공이었으나, 전도에 대한 열의로 가득 찬 점에서 두 사람은 일치했다.

무디는 메사추세츠 노스필드에서 소작농이자 석수의 다섯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술을 지나치게 마셨다. 그 때문에 그의 아버지는 무디가 4살 되던 해 세상을 떠났다. 강한 어머니 밑에서 8식구의 가족은 가난하게 성장하였다. 무디는 농장에서 일해야 했다. 때문에 무디는 제대로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초등학교 교육도 겨우 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유니테리언 신자였다. 그러나 그의 형제들은 정통적인 삼위일체를 믿는 신앙인들이었다. 보스톤의 어느 교회 주일학교에 출석하던 무디는 1855년 4월 21일 그의 주일학교 선생님의 영향으로,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서는 분명한 회심을 체험하였다. 1856년에 무디는 진취적인 대평의 신도시 시카고로 이주해 왔다. 그는 곧 제화점에 취직하였다. 그의 행복한 생활방식과 밝은 예의심, 그의 예리한 직업의식과 무한한 열정은 무디를 일약 백만장자로 만들어주었다.

무디는 1857-1858년 시카고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에 크게 감화를 받아 1858년 시카고에서 주일학교(Sunday School)를 시작하여 전도에 종사한 결과 큰 성과를 거두었다. 처음에 무디는 말씀을 전하거나 가르치기에는 너무도 학력이 없다고 느꼈다. 그러나 무디는 성경을 가르치는 값진 은사가 자신에게 있음을
발견하였다. 1860년에 무디는 판매원 직업을 포기하고 전도운동에만 전적으로 헌신했고, YMCA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1865년에는 시카고 YMCA의 회장이 됨). 1862년에 무디는 영국 태생의 유그노 에마 레벨과 결혼하였다. 그녀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겸손한 여인이었다. 그녀의 교양, 센스, 너그러움 그리고 신앙은 무디가 거대한 사역을 추진하는 데 활력을 제공해 주었다. 그들은 두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두었다. 대단히 행복했던 무디의 가정 생활은 그의 사역과 전도여행의 가장 확고한 기초가되었다.

무디는 1867년에 영국에 가서 스펄젼, 뮐러 등의 복음주의 지도자들과 사귀는 가운데 1868년에는 무어하우스(Moorhouse)의 설교에 큰 감명을 받아 설교자로서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가지게 되었다. 1870년에는 쌩키(Ira Sankey)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무디의 전도 집회 때마다 찬송을 불러 그의 전도사역을 도왔다. 1871년 뉴욕 집회 때 무디는 성령의 부으심을 강하게 체험했다. 1872년부터 1875년까지 두 번째 영국을 방문하여 영국을 비롯하여 스코틀랜드에 큰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런던에서의 집회는 거의 20주간 동안 계속되었는데, 총 250여 만 명이 집회에 참석했다. 무디의 전도운동이 영국 사회에 미친 영향이 매우 심각했으니 공산주의 이론의 창시자의 한 사람이었던 엥겔스(Engels)는 당시의 전도운동을 평하여 영국의 중산계급이 무산대중을 지배하기 위해 미국의 부흥운동을 수입한 음모에 불과하다고 했다. 스코틀랜드에서의 전도운동은 6개월 안에 ‘국내에서 가장 강한 종교 세력’으로 발전했으며 에딘버러 대학생들에게 깊은 감화를 끼쳤는데 그 중 헬리드러먼드(Henry Drummond)는 그 후 영미 학생운동에 크게 공헌했다.

무디는 1875년 미국에 돌아와 부르클린, 필라델피아, 뉴욕시 등 대도시에서 전도집회를 개최했는데 수만 명이 참석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1876년에는 시카고에서, 1877년에는 보스톤에서 집회를 인도했고, 1880-1881년에는 태평안 연안에까지 전도 집회를 인도했다.

무디는 1881년에서 1884년까지 세 번째 영국을 방문하여 에딘버러, 글라스고우, 캠브리지, 런던 등지에서 큰 부흥운동을 일으켰고, 1882년 캠브리지 방문시 스터드(C. T. Studd)를 비롯한 ‘캠브리지 7인’이 복음사역에 헌신했는데 이들은 영미 학생운동에 큰 공헌을 했다.

무디는 1885년부터 미국 각지에서 전도집회를 인도했고, 특히 1886년에는 메사추세츠의 헐몬산에서 두 주간 동안 대학생 집회를 가졌는데 이 집회에서 100여 명의 대학생들이 복음사역에 헌신했다.

무디는 1893년에 시카고에서 대전도 집회를 개최했는데 200여 만 명이 집회를 참석했다. 1899년 11월 미조리주 켄사스 시에서 무디는 그의 마지막 집회를 인도했는데, 이때의 전도 집회는 성공회, 침례교, 회중교, 감리교, 장로교 등 여러 교파의 대표들로 구성된 위원회에 의해 진행되었다. 피로에 지친 무디는 "
40여 년 동안 설교를 해 오는 동안 집회를 그만두어야 했던 일은 이번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하고 집에 돌아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세상을 떠났다. 1899년 12월 22일의 일이었다.

1886년에 무디는 시카고에 무디 성경학교를 설립하고 토레이(R. A. Torrey)를 초대 교장으로 확보하였다. 수년 후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한 수백 명의 남녀가 무디 성경학교에서 직업 기독교 사역자가 되기 위해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내가 역사에서 사라질 때 나는 얼마의 위대한 남녀를 뒤에 남겨둘 것이다.”라고 한 무디의 말처럼, 그의 설교와 가르침에 영향을 받은 수백 명의 젊은이들이 세계 각 곳에 흩어져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였다.



Ⅸ. 프린스턴 신학

뉴저지의 한 조그만 동네 프린스턴에 대학이 세워지고 1812년에는 신학교가 세워졌다. 이곳에서 미국 전역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많은 목사와 선교사들이 배출된다. 개교 이래 백년 이상 프린스턴의 교수들은 성경과 개혁 신앙을 옹호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프린스턴 신학은 정통 신학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이 신앙은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을 주어 정통 신앙의 토대가 되었다.

19세기 신학계는 크게 나누어 양단간이었다. 학문을 강조하는 이들은 쉽게 자유주의에 물들었고 신앙을 얻고자 하는 이들은 부흥 운동에 빠져들었다. 자유주의는 이성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반면에 부흥 운동은 다분히 감정적이었다. 신앙의 체험을 강조할수록 더 주관적으로 되어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신앙을 정리해 주면서 자유주의와 싸운 것이 프린스턴 신학이었다.

프린스턴 신학은 칼빈주의를 공식적 체계로 삼아서 당시의 새로운 신앙적 요구에 응답하고 있었다. 칼빈의 가르침은 이전부터 독일이나 스칸디나비아를 제외한 거의 모든 유럽 신학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런데 시대가 흐르고 계몽주의와 영국과 미국의 부흥 운동을 통과하면서 그 맥을 지키는 데 어려움을 겪어야 했었다. 이 두 극단, 자유주의와 광신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 신앙을 유지하는 것이 당시 기독교 신앙의 관건이었다.

유럽에서는 영국을 제외하고는 자유주의 분위기가 훨씬 지배적이었다. 본래 보수적이던 영국 사람들도 신앙에 대해서 전처럼 확고하지는 못했다. 독일과 프랑스는 훨씬 심했다. 계몽주의 시대를 지나 낭만주의를 거쳤고 이제 막 자유주의가 절정을 향해서 오르려는 참이었다. 미국은 국가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유럽의 모든 전통들이 흘러 들어가고 있는 상태였다.

대각성 이후 미국에서는 여러 차례 큰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부흥회에서 강조되는 것은 인간의 결단이었다. 특히 19세기 초 찰스 피니의 부흥회에서는 인간의 자유 의지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강조되었다. 부흥사들은 외쳤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정하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를 영접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의 문을 열 때까지 아무 일도 하시지 못합니다. 결정하십시오.”

이러한 강조가 아주 잘못된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부득이하게 설교할 때에는 이렇게 사람들의 결단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찰스 피니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예정론을 신랄하게 비난하고 인간에게는 회개할 능력이 있다고 가르쳤다. 그는 자기가 속한 장로교를 떠났다. 그의 이러한 가르침은 곧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구원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의 역할에 대한 강조는 인위적인 부흥회를 이끌어 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많은 부흥사들은 신앙의 체험을 얻는 데 집회의 목표를 두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복음에 대한 메시지보다는 되풀이해서 찬송하고 금식하고 기도하며 어떤 신비한 체험을 얻고자 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당연히 설교도 그런 방향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굉장한 소란 속에 집회가 진행되었다.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외형만 보아서는 그 사람이 옳은지 그른지 알 수 없었다. 울고불고 펄쩍펄쩍 뛰고 뒹굴고 이상한 소리를 지르고 하는 현상이 수없이 나타났다. 그러나 바른 부흥회는 그런 뒤에 반드시 사람들이 변화되었다. 삶이 변하고 언어와 행동도 순화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요란한 과정을 통해서 굉장한 체험을 했어도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면 바른 부흥회가 아니었다.

부흥회의 참된 핵심은 사람들의 마음을 집중시킨 뒤에 회개와 중생을 주는 그리스도의 도를 주었느냐 아니냐에 달린 것이다. 심령을 변화시키는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 의미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느냐 하는 메시지였다. 예정론을 비난하든 찬성하든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정말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해주신 일이 무엇인지 순수하게 말하느냐 않느냐가 문제였던 것이다.

부흥 운동에 대한 교회의 반응은 찬반양론이었다. 개신교는 언제나 이 두 전통으로 이어져 왔다. 복음의 뼈대인 교리를 바로잡고 전하려는 것과 그 복음의 내용을 경험하려는 것의 두 전통이다. 장로교는 부흥회에 대해 찬성하는 파와 반대하는 파로 나뉘어 논란을 거듭하였다. 이 문제에 대해 프린스턴 신학교는 교단과 공부하러 온 학생들에게 적절한 지침을 주어야 했다.

한편으로는 유럽에서 밀려들어오는 자유주의 물결을 학문적으로 막아내면서 동시에 신앙의 체험을 존중하고 그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도록 만들어 주는 일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지금까지도 정통 신학의 토대가 되고 있는 소위 프린스턴 신학이 시작된다. 이 신학은 알렉산더에 의해서 시작되어 하지에 의해서 체계가 잡히고 워필드에 의해서 강화되고 방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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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치발드 알렉산더

1812년에 설립된 프린스턴 신학교의 최초 교수였던 아치발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 1772-1851)는 저명한 목사요 부흥사였다. 알렉산더는 버지니아주 랙싱턴 근처에서 태어나 리버티 홀 아카데미(현 워싱턴 앤드리대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는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고백한 직후에 그레이엄(William Graham) 밑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1794년에 목사 안수를 받고 그로부터 2년 뒤에 햄프턴 시드니대학의 학장이 되어 10년간 학장직을 맡았다. 1807년 초에는 미국에서 손꼽히는 대교회인 필라델피아 파인스트리트교회 목사가 되었다. 1812년 소집된 총회는 프린스턴신학교 설립을 가결하였으며, 알
렉산더를 그 신학교의 초대 교수로 선출하였다.

그는 프린스턴에 온 후에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특히 후계자인 찰스 하지는 선생을 너무나 존경해서 아들 이름을 아치발드 알렉산더 하지라고 했을 정도이다. 하지의 아들도 위대한 신학자가 되었다.

알렉산더는 당시의 신학 풍조 속에서는 개혁 신앙을 올바른 전통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앙을 돕는 이성 그리고 광신이 아닌 신앙 체험이 그의 이상이었다. 이 시기 유럽에서는 낭만주의를 거쳐서 자유주의 세력이 팽창하고 있었고 미국에서는 부흥회 운동이 한창이었다. 자유주의나 부흥회운동이 인간의 의지나 감정을 강조하는 주관적인 신앙을 가르친다는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알렉산더는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의 권위를 분명하게 선포할 책임을 느꼈다. 그의 시대에 신자가 된 사람들은 신앙 체험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주관적인 체험과 교리 사이의 관계를 분명히 해줄 필요를 느꼈다. 그는 이 일을 아주 실제적으로 해결했다. 즉 신앙의 체험을 교리에 복종시키도록 요구하였다. 체험이 제멋대로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알렉산더는 프린스턴 신학이 추구하는 방향을 설정해 주었다. 그것은 당시의 회의적 이성주의나 감정에 치우친 부흥회주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신앙의 열정을 유지하려는 노력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자유주의나 감정주의 어디에도 빠지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십자가의 도의 객관적인 요소와 개인이 경건 생활에 적용하는 주관적 요소의 긴장을 유지하자는 것이었다.

주관적인 이성이나 감정은 반드시 객관적인 성경의 권위에 의지해야만 했다. 아무리 체험이 분명하고 생생해도 그것은 항상 성경에 의해서 옳고 그름을 시험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절대로 이성과 부조화하는 것이 아니다. 이성을 최상으로 사용하는 것은 성경을 통해서 밝혀진 정확무오한 진리의 교리를 받아들일 때이다. 그것이 이성이 주어진 최대의 목적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시의 자유주의의 도마 위에서 잃어버려져 가고 있는 성경의 권위를 바로 세워야 했다. 그리하여 그는 성경의 완전 영감을 주장하였다. 성경은 그 내용이 사실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것이다. 성경의 기적들은 모두가 사실이고 진실이다. 과학적으로 볼때도 너무 정확한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 덧붙여져서 성경은 영감을 받아서 기록된 특별한 책이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성경 기자들이 성경을 기록할 때 하나님의 영감은 그들이 잘못하지 않도록 감독하는 역할을 했다. 기자들은 자신의 경험과 이해를 가지고 사실들을 기록한다. 아기가 뒤뚱대며 걸음마를 옮길 때 그 바로 뒤에서 아기를 따라가며 넘어지지 않도록 붙드는 아버지를 생각해 보라. 이때 성령은 그 아버지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단지 인간일 뿐인 성경 기자가 오류에 빠지지 않게 한다.

그러다 보니 성경의 진실성과 영감은 서로 연결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기자는 관찰을 통해서 당시의 사건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이 그의 기억 속에 분명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사건을 기술할 때쯤에는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정확이나 실수를 피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만약 그 내용이 틀림이 없으려면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서 보호를 받아야만 했다.

영감을 받은 사람들은 ‘마치 그들이 영감을 받지 않고 쓰거나 말하는 것처럼’ 그들 스스로의 문체나 표현 방법을 그대로 가지고 성경을 기록하였다. 영감은 지식이나 글, 어느 면에서나 인간의 실수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정확성, 틀림없는 정확성’ 이것은 어떤 기록에서나 가장 바람직한 것이다. 바로 그 정확성이 성경에 적용된 것이다.

알렉산더는 위와 같이 성경의 완전 영감을 주장함으로써 자유주의자들 앞에 성경의 권위를 바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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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찰스 하지

알렉산더의 뒤를 이은 찰스 하지(Charles Hodge,1797-1878)는 필라델피아에서 군의관의 아들로 태어나 프린스턴에서 공부하였고, 1815년에 그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819년에 신학원을 졸업하였다. 그는 프린스턴의 대표 교수로서 이성의 힘과 성경의 권위에 대해 더욱 강조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더 나은 장로교 및 프린스턴 전통의 설립자로 인식되고 있다. 아무도 그처럼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46년간이나 일한 이가 없고 그만큼 영향을 끼친 이도 없다. 그는 바로 프린스턴 신학의 조직자였다.

그의 성격 중에 가장 특이한 면 하나가 한결같다는 것이었다. 이는 또한 프린스턴의 태도이기도 하다. 약 3천 명의 목사들이 그에게 교육을 받아 미국 전역의 장로교회 목사가 되었다. 그의 경건 생활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고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더욱 강해져 갔다. 그의 경건은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교회에서나 언제 어디서나 같았고 변함이 없었다.

열네 살에 프린스턴 대학에 들어간 그는 신학교의 교수들에게 더 큰 감명을 받는다. 그들에게 영향을 받아 그는 중생의 뜨거운 체험을 하게 된다. 그는 프린스턴 신학교가 시작되면서 알렉산더가 취임 연설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연설을 들으면서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다짐한다. “대학을 마치면 나는 저분에게 신학을 배우리라.” 이 일은 4년 뒤에 이루어졌다.

대학을 마치고 1819년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학교로부터 성서 신학의 강사가 되라는 제안을 받았다. 3년 뒤에 그는 정식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 해 그는 결혼하여 반세기 이상을 신학교 옆에 있는 집에서 보냈다. 여기에서 그는 여덟 명의 자녀를 낳았고 그중 두 명은 훗날 같은 신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하지가 쓴 세 권의 조직 신학은 현대 정통 신학의 뼈대를 세워 준 셈이 되었다.

1826년 그는 가족을 어머니에게 맡기고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프랑스나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 2년 간 배운 뒤에 그들의 방법이 신앙에 큰 해를 끼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독일의 신학자들이 신앙을 설명함에 있어서 성경보다 철학의 체계를 따르는 데 동의할 수 없었다. 신앙을 오묘하게 만드는 것 같았지만 결국 인간의 생각수준으로 떨어지게 했던 것이다.

오히려 그는 알프스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았고 그것을 평생 유지하여 신앙의 도움을 받았다. “나는 그 순간 눈을 들었다. 내 주위에는 거대한 반구형 극장이 높이 하늘까지 닿아 있었다. 알프스였다. 잠시 후 내 삶의 잘못되고 불분명한 개념들이 그 영광스런 실재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이 위대하고 장엄한 자연을 만든 하나님은 얼마나 위대하고도 장엄한 분이랴!

오랜 공부 끝에 그는 알렉산더의 입장을 그대로 전수하여 합리주의, 주관주의 양극단을 지양하고 그의 신학을 펴나갔다. 그의 조직 신학 서두에 하지는 두 오류에 대항해서 자기의 방법을 세우고 있다. 그에게 신학이란 과학이었다. 모든 과학에 방법론이 있듯 신학에 적용되는 방법론은 귀납법이었다. 과학의 내용이 자연의 사실인 것처럼 성경은 신학에 내용을 주는 사실을 제공했다.

하지는 알렉산더의 성경관을 그대로 되풀이하면서 더욱 강화시켰다. 성경의 내용은 역사적 사실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작품이다. 그가 볼 때 성경은 개신교 신앙의 규칙이고 하나님이 만드신 진리의 창고이다. 만약 철학이 계시와 모순될 때는 철학이 성경 진리에 복종해야 했다. 왜냐하면 철학이 인간 지성의 결론이라면 성경은 진리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경 기자들의 마음속에 성령의 특별한 감동을 주어서 자신의 뜻을 틀림없이 전달하도록 하셨다. 물론 한자씩 불러 준 것을 받아쓰게 하신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영감은, 신자의 마음에 단순한 영적 조명이나 성화의 능력을 주는 것이 아니었다. 초자연적인 영향으로 성경을 기록하게 하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책들과 내용들은 똑같이 영감으로 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부분이 똑같은 중요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부분이 덜 중요한 부분을 해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도덕이나 신앙 진리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과학이건 역사건 지리에 관한 것이건 모두 사실의 진술이다.”주께서도 “성경은 폐할 수 없나니”라고 하심으로 스스로 영감설을 증거하고 계신다.

이렇게 해서 프린스턴 신학은 개혁자들, 특히 칼빈과 튜레틴의 전통에 서 있음을 명백히 보여 주고 있었다. 하지는 알렉산더와 마찬가지로 신앙의 토대로서 성경의 권위를 확실히 세우고 있었다. 동시에 그 성경으로부터 구원의 도리 뿐 아니라 삶의 도리를 찾아내고 있었다. 당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인간이 만든 철학에서 모든 해결책을 찾아내려고 덤빈것과 대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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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벤자민 워필드

워필드(Benjamin Warfield, 1851-1921)는 켄터키 주 렉싱턴 근처에서 유서 깊은 미국인 가정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프린스턴 대학에 들어간 뒤 문학 분야에서 학위를 받고, 스무 살에 프린스턴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처음에는 자연 과학에 몰두해 영국과 독일로 유학을 갔다. 그러다 진화론의 가설에서 떠났다. 증거가 너무 빈약하기 때문이었다. 그 후 수학과 물리학에 집중하였다. 에딘버러에 갔다가 다시 하이델베르크로 옮기고는 신학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일 년 뒤에 그는 프린스턴 신학교에 등록하여 목사 훈련을 받았고, 라이프치히 대학교에 유학하였으며(1976-1877), 볼티모어 제일 장로교회의 부목사가 되었다. 1878년 피츠버그의 웨스턴 신학교에서 신약성경 언어와 문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1879-1887년까지 웨스턴 신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학문적인 명성을 높였다. 그 후 프린스턴으로 옮겨서 34년의 여생 동안 하
지의 후임 교수가 되어 변증신학을 가르쳤다. 1887년 취임 시에 그는 프린스턴의 전통을 잇겠다고 선언하였다. “내 안에 찰스 하지의 능력은 없어도 그의 신학은 있습니다. 나는 재능을 다해 이 신학을 앞으로 만날 학생들에게 강의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워필드는 신학과 성경을 주제로 많은 책을 출판하였고, 수많은 소책자들과 연설문들을 발행하였다. 히브리어, 헬라어, 현대 언어들에 능통하였고, 교부학, 신학, 신약 비평학에도 정통하였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을 높이 평가한 철저한 칼빈주의자였다.

워필드가 프린스턴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때는 신학적 상황이 선배들 때보다 한층 더 정통 기독교에 불리했다. 성서 비평학과 진화론이 미국에 수입되어 꽃을 피우고 있었다. 비평학으로 이성과 계시의 분명한 구분은 없어지고 성경은 인간의 체험 수준으로 설명되었다. 다윈이 가르친 자연 선택에 의한 적자생존 사상은 전통 신앙에서 말하는 인간의 완전 타락과 부합될 수 없었다.

여기에 반대하여 전통적인 기독교를 방어하려 했던 그의 노력은 그의 변증학에 분명히 표현되었다. “만약 신학이 하나님의 과학이라면 그것은 주관적인 경험이나 사상들을 다루는 게 아니고 객관적인 사실들을 다루는 것이다. ”신학의 주제가 하나님의 지식이라면 그것은 객관적 사실 위에 서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는 객관적으로 보아도 논리에 어긋남이 없어야 했던 것이다.

성경에는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 역사적 사실로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탄생, 삶, 죽음, 부활 그리고 하늘의 제사장 되심에서 절정으로 나타난다. 거기에 덧붙여서 그러한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설명이 주어졌다. “설명 없는 사실은 신앙을 줄 수 없다. 그리고 다른 설명은 기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사실과 그것의 설명인 교리 위에 서 있다.”

신학은 정확한 사실과 바른 설명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무오한 성경에서 나온다. 신학자는 이것들을 정리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거기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아 복음으로 선포해야 한다. 그의 소명은 “구주와 함께 분깃을 나누며 그 소중함을 발견해 그분을 굳게 붙들고 성령의 감동에 굴복”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려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진리와 자신의 관계를 연구해야 한다.

그의 이러한 가르침은 현대 신학의 방법에 정면 도전하는 것이었다. 현대 신학은 우선 성경을 인간들의 신앙 고백으로 본다. 당연히 내용상 맞지 않는 게 너무 많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내용을 읽는 사람은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법칙을 적용해 진위를 가리고 그것이 주는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 성경이 계시로서의 객관성은 사라지고 읽는 이의 이해 수준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에 대항해 워필드는 선배들을 따라 성경의 영감설을 주장했다. 좀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그는 축자영감을 주장했다. 이것은 시인이 받은 영감이 아니다. 신자들을 회개하게 하거나 성화시키는 성령의 일반적인 영향도 아니다. 초자연적인 것으로 기록되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되게 하는 영향이다. 그러므로 한마디씩 모든 말씀이 완전히 무오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무오함이 사본이나 번역판에까지 미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성경 기자가 처음에 쓴 그 원본만이 무오하다는 말이다. 인쇄술이 없던 시절, 한 줄씩 베끼거나 그 후에 다른 나라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기자들이 쓴 그대로의 원본은 사라지고 없다. 그러므로 원본에 가장 가까운 사본을 찾아내어 조심스럽게 번역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워필드가 보기에 성경의 영감성과 무오성은 해석의 근본 원리이지 기독교의 근본 원리는 아니었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독교의 진리됨이다. 즉 하나님께서 무오한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도리와 그 내용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이것 없이 성경의 영감성이나 무오성은 의미가 없다. 오히려 그러한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복된 소식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더 관심을 써야 할 것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렇듯 보수적이고 복음적인 프린스턴 신학은 1929년까지 유지되었다. 그 후에는 밀려들어오는 자유주의 물결을 더 이상 대항하지 못한다. 새로운 교수들이 들어오면서 결국 학교의 기본적인 신학 입장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레샴 메이첸과 몇몇 동료들에 의해서 끝까지 방어되던 프린스턴 신학은 결국 중단되었다. 그리고 그 과거 시절은 구 프린스턴으로 불리게 되었다.



Ⅹ. 사회복음주의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엽에 이르기까지 영국과 미국의 자유주의 개신교 신학자들 가운데서 일어난, 사회를 기독교화 하려는 운동을 가리켜 사회복음주의(Social Gospel) 운동이라고 한다. 사회복음주의는 개인의 구원과 아울러 사회공동체의 구원을 추구했다.

사회복음주의 운동의 배경을 열거하면, ① 중세와 종교개혁 시대가 내세를 강조한 데 비해 근세의 계몽주의가 현세를 강조한 것, ② 종교 개혁자들의‘소명론’이 17, 18세기에 이르러 세속적 직업과 활동의 긍정적 의미를 강조하게 된 것, ③ 청교도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새 교회와 새 나라 안에 실현되고 있다고 생각한 것, ④ 복음주의 각성운동이 선교와 노예폐지 운동을 통해 이와 같은 비전을 강화한 것, ⑤ 자유주의 신학이 윤리와 실천을 강조한 것, ⑥ 맑스의 사회주의가 기독교의 사회, 경제적 무책임을 통박하며, 경제 및 계급투쟁을 이상적 사회건설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1. 영국의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

19세기 중엽 영국에서 마우리스(F. D. Maurice), 킹슬리(Charles Kingsley) 등의 지도하에 일어난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Christian socialist movement)은 교회의 실패를 인정하면서 노동자 계급의 처우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이들은 산업사회 속에 뿌리박고 있는 깊은 죄악을 신랄히 비판하면서 교회는 의로운 사회질서를 창조해 나아가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역설했다. 이들은 영국과 유럽의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교황 레오 13세(Leo XⅢ, 1878-1903)와 피우스 11세(PiusⅩⅠ, 1922-1939)는 사회 개혁을 위한 종교 활동을 공적으로 인정했다.

2. 미국의 사회복음주의 운동

19세기 말엽에 시작하여 제1차 세계대전 전에 절정을 이룬 미국의 사회복음주의 운동(Social gospel movement)은 사회 개혁이 개인들의 변화와 아울러 복음의 명령임을 강조했다. 이와 같은 사회복음주의 이념은 미국 청교도들의 건국이념에서 비롯했다. 즉, 하나님의 나라를 신대륙에서, 기독교 국가에서, 그리고 민주주의 체제에서 실현시키려고 했던 것이 청교도들의 꿈이었고 소원이었다. 이 꿈은 부흥운동, 선교운동, 노예폐지운동 등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듯했다. 미국의 사회복음주의운동이 발전하게 된 직접적 원인들을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1) 사회주의와 노동조합의 도전

미국 노동조합의 지도자 사무엘 곰퍼스(Samuel Gompers)는 1898년에 말하기를 교회는 노동자의 복지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노동자를 괴롭히며 돈을 하나님으로 삼은 자본가들만 옹호한다고 비난했다.

2)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

자유주의 신학이 하나님의 임재, 인간의 거룩함, 윤리와 도덕실천 등을 강조하며 사회변혁에 대한 낙관적 견해를 나타냈다. 특히 예일대학교의 실천신학자 호레이스 부쉬넬(Horace Bushnell, 1802-1876)은 사회적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사회개혁의 필요성을 내세웠다. 부쉬넬은 말하기를 죄는 사회적이며 덕도 사회적이라고 했다. 사람이 사회와 고립돼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회 안에서 사회와 더불어 구원을 얻는다고 했다. 또한 자유주의 성경학자들이 ① 아모스나 미가와 같은 선지자들이 사회정의를 부르짖은 점을 지적하며 강조했고, ② 부, 가정, 국가, 무저항 등에 대한 예수의 교훈을 정치, 사회적 문제에 적용시켜 해석했으며, ③ 예수의 메시지의 중심이 하나님의 왕국임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왕국을 현세의 진정한 이상으로 해석했다.

3) 사회문제의 심각한 대두

산업사회의 발전에 따른 모순, 사회 및 가정생활의 파탄, 실업자의 증가, 노동자의 불만, 자본가들의 개인주의, 인권의 경시 등등 심각한 사회 문제가 대두됨에 따라 이와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회복음주의 운동이 발전했다.

3. 워싱톤 글래든

사회복음주의 운동의 선구자요 아버지로 불리우는 워싱톤 글래든(Wahshing Gladden, 1836-1918)은 부쉬넬의 영향을 받은 회중교회의 목사로 그의 저술을 통해 자본(Capital)과 노동(Labor)과의 관계를 단순한 ‘경제’(economic) 문제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윤리 및 종교적 문제로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본과 노동과의 협력을 강조했다.

“노예제도가 사라져 가는 지금 자유노동에 관한 관심이 대두되고 있다. 그 문제의 심각성을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 그것은 경제의 문제뿐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윤리적 문제라고 하겠다. 그것은 종교의 핵심을 다룬다. 강단에서 그문제에 대해서 무엇인가 말해야 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와 같은 견해는 교회의 기능을 확대하게 했고 교회는 부의 축적과 사용에 있어서의 ‘정직’과 ‘관용’을 말해야 할 뿐 아니라 노동자에 대한‘정의’(justice)를 강조해서 말해야 한다고 했다. 교회는 이제 사회 정의를 수립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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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월터 라우쉔부쉬

사회복음주의 운동의‘가장 위대한 예언자’로 불리는 라우쉔부쉬(Walter Rauschenbush, 1861-1918)는 1861년 뉴욕에서 독일 침례교 목사의 아들로 출생했다. 뉴욕의 제2독일침례교회 목사로 11년간(1886-1897) 봉사하면서 뉴욕시 서부 끝 ‘지옥의 부엌’(Hell''s Kitchen)이라고 불리는 험악한 곳에서 일하는 독일이민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을 통해 인간의 비참과 경제적 모순을 통감했다.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기에는 자기의 경건주의적 신앙이 너무 무력함을 느끼며 자기의 신앙과 성경의 교훈을 재반성하는 가운데서 새로운 확신에 도달하게 되었다. 1889년부터 노동자들의 문제와 관심사에 대한 자기의 입장을 피력했다. 1892년에는 몇몇 젊은 목사들과 함께 ‘왕국의 형제단’(Brotherhood of the Kingdom)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여름마다 한 주간씩 모여 예수의 윤리적 및 영적 가르침을 연구했다(1914년까지).

라우쉔부쉬는 1907년 ‘기독교와 사회적 위기’(Christianity and the Social Crisis)를 저술하므로 사회복음주의 운동의 지도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리고 1917년에 저술한 ‘사회복음의 신학’(A Theology of the Social Gospel)에서 그는 사회복음을 다음과 같이 주창했다.

“사회복음은 이제는 예언적이거나 부차적인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 지향적인 사회 종교 공동체 안에서만 새로운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지금 사회복음은 정통적인 것이 되었다.…사회복음은 오래된 구원의 메시지이지만 보다 확대되고 보다 심화된 메시지이다. 개인주의적 복음은 마음에 있는 죄성을 보게 했지만 사회질서의 죄성은 바로 보지 못하게 했다.…사회복음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의 집단적 죄를 뉘우치게 하며 보다 민감한 양심을 가지게 만든다. 사회복음은 나라들의 구원을 믿었던 옛 선지자들의 신앙을 불러일으킨다.

사회복음은 개인존재의 사회적 성격을 강조했다. 즉 사회를 개인들이 모인 집합체로 보는 대신 개인들로 구성된 하나의 유기체로 간주했다. 인간간의 관계를 연대적인 것으로 간주하며 매우 중요시했다.

1) 라우쉔부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기독교 메시지의 중심이었다.

즉, 사회복음은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현존하는 사회의 기관들로부터 성장된다고 생각했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현존하는 사회질서를 파괴하므로 오는 것이 아니라 항존하는 인간사회의 기관들을‘구속’하므로 온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우쉔부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단순히 인간의 노력만으로 설립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기원이나 발전이나 성취에 있어서 신적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될 것이다.…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적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노력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부분적으로 현세에서 천천히 실현되고 있는데 사람이 그 실현을 도울 수 있다고 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는 데 하나님과 협력하거나 그 발전을 방해하도록 되어 있다.”

2) 사회복음은 특히 경제정의에 관심을 가졌다.

조직화된 죄의 세력이 가장 뚜렷이 나타나는 곳이 불의한 산업사회라고 했다. 따라서 개인의 중생만을 호소하는 것은 부족하고 사회개조를 추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3) 사회복음은 사회 과학적 연구를 강조한 결과 사회학이 신학교 교과 과정에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4) 사회복음은 기독교 교리를 새로운 사회의 비전에 비추어 새롭게 진술하려고 했다.

이와 같은 노력이 라우쉔부쉬가 1917년 예일대학교에서 행한 강의들에 나타나 있는데, 그 강의들이 후에 ‘사회복음의 신학’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여기 나타난 라우쉔부쉬의 신학적 관점은 그 당시 유행하던 감상적 낙관주의를 따르지 않았고, 또한 그 당시 유행하던 자유주의 신학도 따르지 않았다. 그는 사회적 죄를 깊이 인식하며 죄가 사회적으로 전달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개인적 및 사회적 생활의 위기를 인식하며 회개하고‘악의 왕국’에 대항해서 싸
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라우쉔부쉬는 또한 자유주의자들과 같이 죄를 이기주의로 정의했다. 하나님을 독재적인 군주로 이해하면 안 되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민주적’인 아버지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의 임재는 사회적 공동체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임재는 또한 모든 인종의 영적 일체성의 기초가 된다고 했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종교적인 고집, 정치적 세력, 정의의 파괴, 군사주의, 계급차별 등의 보편적 사회악과 싸우는 것으로 이해했다.



XI. 근본주의

근본주의(fundamentalism)는 20세기 초엽 미국의 여러 교파 안에 나타난 보수주의 신학운동 또는 보수주의 신학의 경향을 가리킨다. 자유주의자들 또는 현대주의자들이 19세기의 고등 성경비평학을 도입하고, 기독교를 현대과학 및 사회적 요청에 부응하는 현대적 종교를 만들려고 시도했음에 대항하여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의 완전 축자영감과 무오성을 골자로 하는 정통적 기독교의 입장을 변호했다. 근본주의 운동은 자유주의라는 공동의 적을 물리치기 위해 칼빈주의자와 알미니안주의자, 침례교도와 장로교도 및 보수주의 인사들이 총망라하여 구성된 연합 전선적인 움직임이었다. 근본주의 운동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된 것은 1909년부터 1915년까지「근본주의 총서」(Fundamentals) 12권이 출판된 때이지만, 근본주의 운동의 기운은 1870년대에 이미 열기를 띠기 시작했다.

1. 근본주의 운동의 두 조류

근본주의 운동은 근본주의 연구의 권위자 쌘딘 교수(Ernest R. Sandeen)가 지적한대로, 19세기에 형성된 두 조류의 보수주의 신학운동인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와 프린스턴 신학(Princeton Theology)이 현대주의와 대항하여 공동전선을 이루므로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 세대주의

세대주의는 플리머스 형제단(Plymouth Brethren)이라고 불리는 영국의 조그만 분파운동에서 기원했는데 이 운동의 창시자는 존 다아비(John Nelson Darby)였다. 다아비와 그의 추종자들은 1820년경부터 영국 국교의 전통과 율법주의에 불만을 품고 매주마다 따로 모여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형식이 없는 예배를 드리며 신약교회의 정치와 예배를 재연하려고 했다. 다아비의 세대주의 운동은 1840년경부터 미국에 소개되어 그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다아비 자신이 1862년부터 1877년에 이르는 16년 동안 7차례나 미국을 방문하여 그의 세대주의를 전파했다.

세대주의는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을 강조함과 아울러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를 7세대로 구분하여 놓고 각 세대를 독특한 방법으로 다스린다는 ‘세대주의’를 가르쳤다. 세대주의자들은 에덴동산의 시대를 무죄시대, 노아까지의 시대를 양심시대, 아브라함까지의 시대를 인간통치시대, 모세까지의 시대를 약속시대, 그리스도까지의 시대를 율법시대, 재림까지를 은혜시대, 그리고 그 후의 시대를 천년왕국시대로 구분했으며, 여섯 번째 시대인 현세에 속한 모든 제도적 교회와 교파들은 타락했기 때문에 그리스도 재림 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가르치며 임박한 재림을 강조했다. 그들은 현존 종교 지도체제를 배도의 중심으로 보고 의로운 남은 자들은 항상 조소와 멸시를 당한다고 했다. 참교회는 항상 소수의 택자로 구성되며 큰 교단과 동일시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어떠한 조직체도 될 수 없고 개개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사귐으로 남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세대주의가 미국에 널리 보급된 방법은 1878년부터 개최되기 시작한 ‘성경 및 예언 사경회’(Bible and Prophetic Conferences)를 통해서였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1883년부터 1897년까지 나이아가라에서 모인 ‘나이아가라사경회’였다. 한편 1880년부터 노스필드(Northfield)에서 개최된 디엘 무디(D. L. Moody)의 부흥사경회는 세대주의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세대주의의 영향을 입게 되었고, 무디 자신이 세대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결국 그의 부흥사경회는 세대주의 운동에 박차를 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895년에 개최된 ‘나이아가라 사경회’는 기독교 신앙의 5대 근본신조를 채택했는데 그 내용은 ① 성경의 무오 ② 그리스도의 처녀탄생 ③ 그리스도의 대속 ④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⑤ 천년 왕국 전의 임박한 재림이었다. 세대주의는 스코필드 관주성경(Scofield Reference Bible)의 출판 및 성경학교들의 설립으로 점차 그 영향력을 널리 펴 나갔다.

2) 프린스턴 신학

프린스턴 신학은 프린스턴신학교가 설립된 1812년에 탄생하여 10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아취볼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 찰스 핫지(Charles Hodge), 에이 에이 핫지(A. A. Hodge) 등에 의해서 성경의 절대 권위를 강조하는 칼빈주의 신학으로 발전 형성되었다. 프린스턴 신학자들은 주장하기를 하나님이 자기의 진리를 계시하려고 하실 때 오류가 있는 책을 통해서 계시하셨을 리가 없다고 말하며 성경원본의 문자적 영감과 무오성을 강조했다. 미국 장로교 총회는 1892년 성경에 대한 프린스턴 신학의 입장을 공식으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성경의 절대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는 교수들(Charles A. Briggs 등)을 신학교에서 제명시켰다. 1910년에는 장로교 총회가 기독교 신앙의 5개 근본신조를 채택하여 교단의 모든 목사들이 받아들이게 했는데 그 내용은 ① 성경의 무오 ②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 ③ 그리스도의 대속 ④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⑤ 그의 이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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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근본주의 운동의 발전

1) 근본주의 총서

19세기 말엽부터 세대주의자들과 프린스턴 중심의 칼빈주의자들은 공동의 적인 현대주의와 대항하기 위해 연합전선을 이루어 때때로 강연과 저술 활동을 함께 해 나아갔는데(물론 상기 두 운동의 신학적 체계가 서로 조화될 수 없었고 따라서 프린스턴 신학자 워필드는 때때로 세대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Presbyterian and Reformed Review에 싣곤 했다.) 특히 1909년부터 1915년까지는「근본주의 총서」라는 12권으로 된 책자를 출판하여 근본주의 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해 나아갔다.

「근본주의 총서」는 로스엔젤스의 부유한 기독실업인 형제인 리만 스튜워드와 밀톤 스튜워드가 희사한 25만 불의 자금으로 300여 만 부가 출판되어 무료로 배부되었는데, 성경의 축자영감과 무오성을 강조하는 29편의 논문들을 중심으로 정통적 기독교의 근본 요소들(그리스도의 신성, 동정녀 탄생, 대속의 죽음, 부활, 재림 등)을 변호하는 논문들이 모두 90편 실렸다. 암지 딕슨(Amzi C. Dixon), 루벤토리(Reuben A. Torrey), 엘모 해리스(Elmore Harris), 루이 마이어(Louis Meyer)가 편집을 담당했고, 영국, 미국, 캐나다의 저명한 보수주의 신학자 64명이 집필을 담당했는데 집필자들 중 19명이 세대주의자, 3명이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D. J. Burrell, C. R. Eerdman. B. B. Warfield) 그 외 많은 사람들이 장로교, 침례교, 화란 개혁교, 회중교, 감리교, 감독교 등 다양한 교파에 속한 보수주의자들이었다. 「근본주의 총서」는 고등 비평학을 비롯한 현대 과학적 입장(다윈의 진화론)과 현대 이단들의 오류를 공격하고 기독교의 근본요소들을 변호함과 아울러 복음전파와 세계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했는데, 12권은 전적으로 복음 전파와 세계 선교에 관한 논문들을 실었다.

2) 세계 기독교 근본주의 협의회

제1차 세계 대전 후 자유주의 신학의 성장과 공산주의의 위협 및 경제 공황 등의 사회적 불안은 근본주의자들을 한층 더 굳게 결속시켰고, 그 결과 1919년‘세계 기독교 근본주의 협의회’(World''s Christian Fundamentals Association)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계속 성경의 권위와 천년왕국 전의 임박한 재림을 강조하며 현대주의와 진화론을 공격했고, 미국교회협의회(Federal Council of the
Churches of Christ is America) 의 연합운동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유니온신학교의 교수와 뉴욕 제일장로교회의 설교자로 활약하던 침례교 목사 포즈딕(Harry Emerson Fosdick)은 1922년“근본주의자들이 승리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해외 선교지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을 공격했고, 미국 장로교단 안의 근본주의자들은 결국 포즈딕목사를 뉴욕시 제일장로교회에서 축출하고 말았다.

근본주의 대 현대주의의 논쟁은 차츰 미국의 각 교단 안에 그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장로교와 침례교는 그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았다. 장로교 안에는 근본주의자들의 과격한 입장을 반박하며 신학적 관용을 주장하는 온건한 형태의 자유주의 세력이 점차 그 영향을 미치게 되어 1924년 1월에는 1274명이 서명한 ‘어번 확인서’(Auburn Affirmation)가 나타나게까지 되었다. 이 선언의 주 내용은 총회가 어떤 교리를 본질적인 것으로 정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과, 총회가 선언한 5개조의 교리가 성경과 표준들이 인정하는 유일한 이론들은 아니라는 것으로서, 이는 총회가 선언한 5개조의 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자유주의에 대한 근본주의자들의 반격은 한층 더 심각해졌다. 프린스턴신학교는 이 논쟁의 중심부가 되었고 탁월한 신약학 교수 그레샴 메이쳔(J. Gresham Machen)은 그의 명저「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 1923)를 통해 현대의 자유주의는 기독교가 아님을 주장하며 정통적 기독교만이 참 기독교임을 명쾌하게 변증했다.

3) 진화론 논쟁

미국 근본주의 역사에서 특기할만한 사건의 하나는 1925년에 있었던 테네시주 데이톤의 고등학교 교사 존 스콥스(John T. Scopes)의 재판사건이었다. 근본주의자들의 활약으로 테네시주를 비롯하여 오클라호마, 플로리다. 미시시피, 아칸사스 등이 공립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는것을 주법으로 금했는데, 스콥스는 주법이 금한 진화론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는 죄목으로 기소 당했다. 검사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 과 변호사 대로우(Clarence Darrow)와의 대결 상황이 미국 전역에 보도되었다. 근본주의의 대변자 브라이언은 창조론의 입장을 변호하기는 했으나 설득력이 없었고, 대로우는 명석한 이론과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브라이언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테네시주 대법원은 결국 기소 사실을 기각하고 피고 스콥스가 진화론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내렸으나 그 당시 사회 여론은 대로우 편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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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래샴 메이첸

진화론 논쟁의 결과 근본주의 운동은 좌절을 경험하게 되었다. 1930년「크리스챤 쎈츄리」는‘사라지는 근본주의’라는 논설문을 게재했는데, 근본주의는 미국교회에서 잊혀지는 존재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근본주의 운동이 소멸되거나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1929년 프린스턴신학교로부터 보수주의 신학 교수진의 퇴진으로 근본주의 운동은 새로운 양상을 띠며 발전했다. 프린스턴신
학교의 자유주의화에 항의하여 메이첸(Machen), 윌슨(Wilson), 엘리스(Allis), 밴틸(Vantil) 등의 교수들이 사표를 던지고 필라델피아에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신학교를 세우고 개혁주의적 근본주의 운동 또는 근본주의적 개혁주의 운동을 펴 나아갔다. 메이첸은 북장로교회의 해외 선교사업이 자유주의화 함에 항의하여 독립선교부(Independent Foreign Missions Board)를 조직했고, 1936년에는 메이첸을 비롯한 100명의 목사들이 북장로교를 떠나 ‘미국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in America)를 새로 구성했다.

5) 신근본주의 운동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근본주의 운동은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했다. 근본주의 대 자유주의 논쟁은 결국 교단 및 신학교의 재구성, 성경학교를 비롯한 복음주의 기관들의 설립및 각종신앙운동의 발생을 초래했다. 한편 근본주의자들 사이에 심각한 균열이 생기게 되어 교단의 분열은 거듭되었고 근본주의 운동은 보다편협하고 배타적인 분파운동으로또는복음주의적 신앙운동으로발전해나아갔다.

메이첸의 지도하에 새로 조직된‘미국장로교회’안에 기독교인의 자유, 천년전 재림설 등의 논제를 둘러싸고 격론이 일어났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메이첸 후계자들은 세대주의를 그 운동에서 제해야 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고, 칼 매킨타이어(Carl McIntire)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신학교의 세대주의 공격은 궁극적으로 천년전 재림설에 대한 공격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1938년 매킨타이어를 중심으로 하는 ‘성경장로교회’(Bible Presbyterian Church)가 세워졌고, 훼이스(Faith)신학교가 웨스트민스터신학교와 분리하여 새로 세워졌다. 이는 근본주의 운동이 ‘칼빈주의적 근본주의’와 ‘세대주의적 근본주의’로 양분되어감을 보여주며 자유주의와 대항하여 함께 싸우던 신학 투쟁이 근본주의 대 근본주의의 싸움으로 변화되어감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3. 근본주의 운동에 대한 평가

1) 성경 신봉주의

근본주의 첫째 특성은 무엇보다 성경에 대한 절대적 충성이라고 하겠다. 근본주의 운동이 고등 비평 및 진화론과 같은 현대 과학을 비판하고 성경의 영감에 무오성을 변호하며 일어난 운동이므로 근본주의가 성경을 절대적 내지 배타적으로 신봉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럽고 타당한 일이다. 근본주의자들의 성경에 대한 전투적 충성은 성경의 권위를 높이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해왔다고 하겠다.

그러나 성경에 대한 근본주의자들 특히 신근본주의자들의 절대적 및 배타적 신봉에는 심각한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

예를 들면 근본주의자들은 주초를 하는 것이 무조건 죄라고 단정한 후 주초를 하는 사람들을 모두 비성경적 신자로 정죄한다. 주초 문제는 심각하게 취급되어야 하지만 그것은 교회 규범과 덕에 속하는 문제이지 구원이나 성경성을 가름하는 기준이 되지는 못한다. 또한 일부 개혁주의적 근본주의자들은 조용히 기도하고 경건하게 예배드리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단정한 후, 손뼉치고 찬송하든지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정죄한다. 물론 성경은 ‘손바닥을 치며’ 찬송하고(시 47:1) ‘부르짖으며’ 기도하라(렘 33:3)고 말씀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에게 적절한 성경 구절만 택한다.

성경의 절대권위를 믿고 사랑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그러나 배타적 성경 신봉주의는 경계해야만 한다. 나의 성경 해석만이 절대적이라는 교만은 매우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2) 배타성과 분파성

근본주의, 특히 신근본주의의 두 번째 특성은 배타성과 분파성이라고 하겠다.

매킨타이어 박사가 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부터 분리하여 나가서 훼이스신학교와 성경장로교회를 세운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으나 그 이후 커버넌트신학교가 분리되고 ICCC와 ACCC가 서로 나뉘어지고, 해리스와 매크레이와 랩 등 신학자들이 다투며 분쟁과 분열을 거듭한 것은 유감스런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칼 헨리 박사는 신근본주의의 ‘부정적 사고방식’을 지적하며 비판하는 것은 일리가 있다고 인정하며, 신근본주의가 ‘명분 있는 싸움에서 사사롭고 초라한 싸움으로, 대국적인 투쟁에서 지엽적이며 말초신경적 분쟁으로 옮겨가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라고 기술했다. 결국 초기 근본주의 운동에서 볼 수 있었던 연합정신이나 인격적 고매함이 사라지고 상호 비판과 정죄를 일삼는 배타적 분리주의로 발전한 것이다.

3) 반사회, 반문화주의

신근본주의의 세 번째 특징은 반사회, 반문화주의라고 하겠다. 신근본주의가 문화적 관심이 박약하고 사회참여의 행동이 별로없는 것은 경건주의와 세대주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신근본주의자들은 금주운동과 병원과 고아원 경영과 빈민구제 등을 하면서도 사회문제나 윤리적 이슈들에 대하여는 너무나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다. 근본주의 운동이 본래 고등비평이나 진화론과 같은 현대과학에 대항하고 사회 복음주의를 비판하며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을 변호하면서 일어난 반동적 운동이었으므로 현대 과학일반과 현대 사회 및 문화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취하게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라고 하겠다.

근본주의는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주권을 제대로 높이지 못하고 그 하나님의 주권이 세상 안에 실현되어야함을 가르치는 변혁주의적 문화관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개혁주의와 구별된다. 그러나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을 신봉할 정도로 강조한 것은 역사적 개혁주의와 상통하는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신학의 위기가 신 개념의 상실과 성경관의 변질에서 왔다고 분석할때, 근본주의의 성경지상주의는 높이 평가할 만한 신학의 장점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만약 근본주의가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을 변호하고 강조하는 데 모든 정력을 다 소비하고, 기도와 목회와 선교에 대한 정열을 상실했다면 그것은 오늘의 교회에 아무 도움을 주지못하는 하나의 역사적 유물이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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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II. 선교의 위대한 세기

19세기는 유럽과 미국의 힘이 폭발적으로 팽창한 시기였다. 이 힘은 전 세계로 뻗어 나갔다. 세계는 아직도 원시 시대에 살고 있는 지역이 대부분이었기에 근대 국가를 탈피하고 현대에 들어서는 이들 나라는 넘치는 힘을 식민지 개척에 쏟아 붓고 있었다. 유럽 정신은 곧 기독교 정신이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기독교도 전 세계를 향해 팽창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때의 기독교는 식민지주의와 함께 유럽과 미국에서 다른 지역으로 확장되어 나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서구외의 지역에서도 영혼을 구원하고 그 영혼들을 바른 삶으로 인도했다.

1. 19세기 상황

소위 이 ''위대한 세기''에 유럽과 미국은 번영하였다. 물질세계의 지배와 이에 대한 지식의 증가는 사람들의 생활에 큰 변혁을 가져와 산업 혁명을 일으켰다. 인구는 급증하고 도시들이 계속 세워졌다. 자본주의, 사유 기업, 공개경쟁, 자유방임, 국가 통제의 극소화 등이 지배적인 사회분위기였다. 그 결과로 부는 급성장했다. 하지만 빈부의 격차도 무섭게 벌어졌다. 이 때문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모순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아주 낙관적이었다.

사실 이 번영에 기본적인 힘을 제공한 것은 기독교였다. 하지만 가톨릭 국가들은 대체로 쇠퇴하고 반면에 개신교국은 강해졌다. 개신교의 가르침이 자본주의에 영향을 준 것이다. 영국과 네덜란드, 독일 그리고 미국은 복음적 각성 시기를 맞이하였다. 신앙 성장은 곧 사회로 미쳐 복지 국가의 건설로 이어졌다. 19세기 미국은 자국을 자선 제국(The Benevolent Empire)이라 부를 정도로 모든 신자, 곧 거의 전 국민이 구제와 선교에 열정을 모았다.

해외 선교 활동도 왕성해졌다. 이 시대 선교 사업은 교회가 속한 국가의 힘을 배경으로 하는 강력한 것이었다. 선교사를 많이 보내려면 우선 나라가 강하고 그 나라의 교회가 또한 강해야 했다. 여기에 헌신한 선교사들의 신앙적 모험 정신과 희생이 덧붙여져야 했다. 이런 것들이 갖추어지기 시작하면서 교회사가 래토레트가 말한 대로 ‘위대한 세기’가 시작된다. 구미의 힘과 함께 그 힘을 가능하게 한 복음이 전 세계에 밀려들어갔던 것이다. 특별히 영국인들이 가장 강력하게 일했다.

선교사는 선교부에서 파송하였다. 선교사들을 보내기 위해서 모금을 하고 그를 훈련시키고 파송하며, 선교사들이 필요한 것들을 지속적으로 보급해 주었다. 그리고 선교사가 임지로 떠난 뒤에는 그 선교사가 본국에서 해결해야 할 모든 문제를 담당하였다. 반면에 선교사는 선교부의 지시를 따라 움직이고 선교지의 상황에 대해 철저히 보고해야 했다. 선교사 숫자가 많아질수록 선교부는 더욱 확장되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선교부를 운영하려면 교회의 뒷받침이 필요하게 되었다.

전에는 소수의 헌신자들이 천신만고 끝에 외국의 한 나라에 가서 그 지역 사람들과 평생을 지내면서 선교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선교 대상 국가들은 유럽 나라들에 의해 이미 문호를 열었다. 그 중에 많은 나라들은 구미와 통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은 이제 어느 정도의 국가 보호 아래 조직적인 선교를 감행할 수 있었다.

전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는 개신교 선교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성공한 예는 극소수였다. 본국 교인들의 몰이해와 선교사들의 고된 작업 속에 겨우 대표적인 지역에 대한 언어 이해와 성경 번역이라는 도구가 갖추어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부터 말까지는 구미 개신교 선교회들이 거의 전 세계를 누비고 들어갔으며, 거의 모든 교단이 이 사업에 참여했던 위대한 시기였다. 이 일은 구미 열강들의 식민지 분할과 같이 일어났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제3세계의 문명이 뒤떨어졌음을 절감하였고 복음과 동시에 서구 문명을 심으려고 했다. 많은 선교사들은 복음과 서구문명을 동일시하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선교지에 가서도 현지인들과 섞이지 않고 끝까지 서구인으로 산 이들이 많았다. 이들에 의해서는 별로 훌륭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선교를 잘한 선교사는 현지인들의 심성을 연구하여 거기에다 서구 문화보다 복음을 심은 이들이었다.

이 시대의 주인공은 그 누구보다도 선교의 개척자들이다. 그들은 새로운 방법으로 활동하여 다른 선교사들이 들어갈 길을 열었다. 때로 어떤 선교사들의 활동은 당시 동료 선교사들이나 본국 선교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많았다. 그래서 마찰이 일어나기도 했고, 간혹 선교부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자기 힘으로 선교를 계속해야만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이해할 수 없는 방법들이 오히려 이 위대한 세기를 가능하게 한 큰 힘이 되었다.

2. 선교의 개척자 캐리

18세기 말 영국 노트햄프턴의 침례교 목사들은 선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2명의 목사들이 칼빈주의 침례교 선교 단체를 창립하고 모금을 시작했다. 그 가운데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는 이 단체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다. 그는 87쪽으로 된「이방인들의 구원」이란 소책자로 선교의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캐리는 ‘현대 선교의 아버지’로 불린다. 1701년에 태어난 그는 가난하고 험한 젊은 시절을 보낸 뒤, 1785년 조그만 침례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캐리의 좌우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였다. 이 말씀은 스스로를 몰아서 선교사가 되게 한 것이다. 선교회가 조직되고 그가 선교사로 뽑히자 온 가족은 반대하였다. 그의 아버지도 그의 아내도 그가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캐리의 생각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그는 5개월을 항해하고 지친 상태로 1793년 마침내 인도의 뱅갈에 도착하였다.

그들의 삶은 고통스러웠다. 가족은 병에 걸려 신음하고 아들 하나는 죽었다. 캐리의 아내는 정신 이상이 되었고 죽을 때까지 그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상적인 선교의 꿈은 사라지고 있었다. 캐리는 농장의 지배인으로 일하면서 말을 배웠다. 7년 동안이나 일했지만 인도인 개종자는 하나도 없었다. 낙망의 나날 속에서도 그는 성경을 번역했고 틈만 나면 설교하였다. 학교도 세웠다. 1795년에는 침례교회가 세워졌다.

얼마 후에 새로운 선교사가 도착하자 캐리는 캘커타 근방에 있는 덴마크령 세람포로 옮겨갔다. 이 지역은 곧 인도에서 침례교 선교의 중심이 된다. 캐리는 남은 생 34년을 이곳에서 보냈다. 여기에는 10여명의 선교사들이 있었다. 차츰 이곳은 캐리의 지도로 모범적인 선교지가 되어갔다. 선교사들은 초대 교회처럼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토요일 저녁에는 함께 모여 서로 사랑하도록 기도했다. 그때부터 그의 사역은 성공적으로 되어갔다.

학교가 세워지고 인쇄소도 만들어졌다. 번역 사업도 꾸준히 진행되었다. 여기서 캐리는 뱅갈어, 산스크리트어, 마다리어 등 3개의 언어로 성경을 완역하였다. 여러 다른 언어와 방언들로 된 신약성경과 쪽 복음을 번역하였다. 이 번역 작업은 이전의 가톨릭 선교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본래 가톨릭에서는 말씀보다 의식에 중요성을 두었기 때문이다. 개신교의 성경 번역 작업은 선교에 가장 강한 힘을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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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람포에 선교회가 세워진 지 1년도 안되어 개종자가 나타났다. 계속 개종자는 생겼지만 전도는 매우 느렸다. 침례교 선교회가 시작된 지 약 25년이 지난 1818 년에 600명의 세례 교인과 수천 명의 신자가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캐리는 1819년 세람포 대학을 세웠다. 37명의 인도인으로 학교를 시작했는데 그 절반이 기독교인이었다. 이리하여 인도에서는 이때부터 교회 지도자와 복음 전파자가 양성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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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중국의 내지 선교회

1854년 약관 22세의 젊은 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or)가 중국 상해에 도착하였다. 그는 지금까지 중국 선교에 실패하여 거의 문 닫게 된 중국 복음화 협회(Chinese Evangelization Society)에서 파송되었다.

그는 18세 때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 중국을 목표로 의학 공부를 하였다. 그리고 선교사가 되기 위한 극기 훈련도 하였다. 그는 생각했다. “중국에 가면 도움 얻기가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내가 의지할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다.”그래서 그는 기도로써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을 배워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선교지에 도착한 후 얼마 되지 않아 테일러의 돈은 바닥이 났고 선교회로부터 후원금도 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그는 런던 선교회 지역에서 몇 달을 지냈다. 그곳의 선교사들은 너무 사치스럽게 살고 있었다. 그는 외국인 거주 지역을 벗어나서 판잣집으로 옮겼다. 결국 중국에 도착한 지 1년이 지나 그는 내륙 깊숙이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선교사가 전혀 가본 적이 없는 조그만 마을에 머무른다. 그만의 방법대로 선교가 시작되었다.

그는 중국옷을 입었다. 그리고 변발을 하고 머리를 검게 염색하였다. 그리고는 중국인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갔다. 그가 생활하는 모습이 다른 선교사들 눈에는 치욕스럽게 보였다. 선교 본부에서도 그에 대하여 대단한 불만을 표시하였다. 이미 그는 정기적인 후원금이 아닌 부정기적이고 개인적인 후원금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결국 3년이 지나지 못해 중국 복음화 선교회와는 관계가 끊어지고 말았다. 그 후 그는 마음대로 여행하며 선교하였다.

1865년 그는 중국 내지 선교회를 창설하였다. 그때 그가 세운 원칙은 다른 선교 단체들의 것과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이 선교회는 초교파적이다. 둘째, 공식 교육이 부족한 이들도 선교사가 될 수 있다. 셋째, 선교회의 본부는 영국이 아니라 중국이다. 넷째, 선교사들은 중국식 복장을 해야 하며 가능하면 자신을 중국인으로 여겨야 한다. 다섯째, 선교회의 일차적 임무는 언제나 복음 전파이지 의료나 교육 활동이 아니다.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내지 선교회는 성장했다. 중국과 본국 양쪽의 이해 부족, 불성실한 동료들과의 마찰, 약한 건강, 1870년 아내와의 사별 등으로 테일러는 대단한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그의 선교 사업은 왕성해져 갔다. 선교사 후보생들은 구름처럼 몰려왔다. 서북 변방에서 시작된 선교 사업은 1882년까지 중국의 모든 성에 선교사들을 파송하였고 거의 모든 성에 선교사가 상주하게 하였다. 테일러는 1905년 중국에서 잠들었다.

내지 선교회는 선교사가 중국 땅 어디에나 갈 수 있다는 확실한 가능성과 용기를 보여 주었다. 1914년에는 세계에서 제일 큰 선교회가 되었고 전성기인 1934년에는 1368명의 선교사가 활동하였다. 1964년부터 내지 선교회는 해외 선교회(Overseas Missionary Fellowship)로 바뀌어 아시아 선교에 주력하고 있다. 이것도 19세기 테일러와 그의 동료들이 뿌린 씨앗이 열매를 맺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4. 아프리카 선교

수백 년 동안 아프리카는‘백인의 무덤’으로 알려져 왔다. 그토록 많은 선교사의 목숨을 요구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개신교는 아시아에 비해 출발이 늦었지만 아프리카에서 더 많은 열매를 거두었다.

개신교의 아프리카 선교는 18세기 말에 시작되었지만 남쪽 오렌지 강 이남의 해안 지방 몇 곳에 국한되었다. 그러다가 차츰 그 이북으로 그리고 내지로 확대되어 갔다. 아프리카 지역은 선교사들이 식민지주의와 야합하였다는 비판을 특히 많이 들었던 곳이다. 로버트 마펫 같은 선교사는 복음이 전파되어야 서구식으로 사고가 진행되고 산업이 증대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후에 리빙스턴은 선교 활동과 상업 활동을 병행하게 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유럽의 문명이 아프리카인들의 생활수준과 도덕 수준을 높일 것이라는 전제에서 나왔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아프리카의 장래는 유럽 문물이 얼마나 들어오느냐에 달려있다고 보았다. 이들은 복음과 기독교 문명을 혼동한 셈이었다. 아니면 적어도 문명화가 되면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이 더 쉬워지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오직 소수의 선교사들만이 선교 사업이 식민지 쟁탈과 병행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이 시기에 대표적인 선교사는 물론 영국 빅토리아 왕조 시대의 영웅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이다. 그는 헌신적인 노력으로 아프리카 내지에 접근이 가능하도록 길을 닦은 사람이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힐 정도로 존경받았던 사람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명성과는 다르게 소심하고 변덕이 심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선교 사역에도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사람들의 관심을 아프리카로 집중시킨 놀라운 업적을 남겼다.

1840년 27세에 도착한 아프리카는 그가 평생 밝혀 낼 신비스런 이상향이었다. 그가 결혼한 상대는 위대한 아프리카 선교사 로버트 마펫의 딸이었다. 하지만 그의 여행벽으로 가족은 행복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가족들을 영국으로 보내고 평생을 홀로 여행하였다. 그리고 포르투갈인들과 아랍인들의 악질적인 노예무역을 목격하고 그 흉악상을 전 세계에 고발하기도 하였다. 그는 아프리카를 구하는 방법은 복음을 주고 상업을 바로 일으키는 것이라고 믿었다.

리빙스턴의 최초 탐험은 잠베지 강을 따라 중앙에서 북서쪽으로 아프리카를 횡단하는 것이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환등기를 가지고 복음을 설명하여 후에 들어올 다른 선교사들의 길을 예비하였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평생을 통해서 계속되었다. 그가 선교 사업에 남긴 업적은 크게 세 가지이다. 아프리카의 길을 찾아낸 것이요, 아프리카 선교의 가능성을 보여 준 것이요, 아프리카에 대한 선교열을 불러 일으킨 것이다.

리빙스턴이 개척하고 발견해 낸 길들을 따라서 선교사들은 별로 어려움이 없이 아프리카 내륙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노예 무역상들이 더 많이 그 길을 이용하였다. 그의 세번째 탐험이자 마지막 탐험은 나일 강의 근원을 밝히는 것이었는데, 그 탐험에는 단 한 명의 백인도 동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1873년 어느 날, 그는 자기 침대 옆에서 기도하는 모습으로 숨졌다. 그를 사랑하는 아프리카인들은 그의 심장을 아프리카에 묻고 몸은 미이라로 만들어 영국으로 보내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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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오세아니아 군도의 선교

마지막 선교지는 태평양의 섬들이었다. 이 아름다운 지역은 1,500개의 섬들로 이루어졌다. 이 섬들에 선교사가 도착한 것은 18세기 말인데 본격적인 선교는 19세기에 이루어졌다. 이 지상 낙원처럼 보이는 섬들에서는 식인 풍습, 유아 살인, 일부다처 및 성적 타락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원주민들은 거의가 무당 종교를 믿고 있었다. 그리고 본래가 순진한 원주민들은 유럽 선원들에 의해 쉽게 농락과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일세기가 다 지나기 전에 이 지역 거의 전체가 복음화 되었는데, 이는 대중 운동(people movement)이라는 방법을 통해서였다. 이것은 한 종족의 제일 높은 사람이 개종하면서 종족 전체가 신자가 되는 그런 방법이었다.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 유럽 사람들은 군함이나 총포의 위력으로 밀고 나가서 왕을 설득하고 결국은 국민 전체를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일들을 자행하였다. 제국주의의 물결은 이 태평양의 모든 섬들도 서구 여러 나라의 영토로 분할시켜 버렸다.

거의 모든 섬이 비슷한 과정으로 선교가 진행되었지만 타히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1796년 헨리 노트(Henry Nott)가 영국에서 이 섬에 도착했을 때 섬의 성적 타락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선교사들이 배를 저어 접근했을 때 그들을 마중한 것은 창칼이 아니고 벌거벗은 처녀들이었다. 처음 여기에 도착한 선교사들은 여자들의 집요한 유혹에 못견디어 함께 그들과 타락하거나 섬을 떠났다. 노트도 결국 원주민 여자와 결혼함으로써 그 유혹을 이기고 선교를 시작할 수 있었다.

타히티 왕은 반대파를 없앨 수 있는 무기를 구하려고 선교사들을 환대하고 기독교로 전향할 뜻을 비쳤다. 선교사들은 망설였다. 하지만 반대파들이 그들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하는 수 없이 왕에게 무기를 제공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은 왕과 그의 부하들에게 성경과 함께 총을 주었다. 많은 선교사들이 전쟁 중에 이 섬을 떠났지만 노트는 계속 남았다. 그리고 반란군은 진압되었다. 동시에 왕은 노트의 요구대로 조상 대대로 섬기던 우상을 버렸다.

그의 우상은 모두 열두 개였다. 이것들은 런던에 보내져 전시되었다. 그리고 큰 감동을 일으켜 기부금을 모을 수 있었다. 왕은 우상을 버린 것으로 그치지 않고 세례 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처를 여러명 두고 있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7년이란 세월을 고민한 끝에 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리하여 1819년 모든 국민이 보는 가운데 왕과 신하들은 세례를 받고 섬 전체가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동시에 유아 살해, 식인 풍습, 전쟁 등도 사라졌다.

하와이에 선교를 처음 시작한 것은 미국선교회였다. 태평양의 다른 섬들과 마찬가지로 하와이 역시 유아 살해와 식인 습관은 흔한 일이었고, 정령 숭배의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하와이는 1778년에야 서방 세계에 알려졌는데, 제임스 쿡(James Cook) 선장이 타히티로부터 북아메리카의 서해안으로 항해하는 중에 이 낙원 같은 섬을 발견했던 것이다.

미국 선교회는 1819년 10월, 7쌍의 부부를 하와이로 파송하였다. 다섯 달 동안의 항해 기간 중 앤도버 신학교를 졸업한 히램 빙햄(Hiram Bingham)이 그 선교팀의 리더가 되었다. 하와이에 도착하자마자, 저들은 거의 발가벗다시피 한 원주민들의 영접을 받아 경악하였으나 선교적 상황은 비교적 좋은 편이었다. 그 당시 하와이에는 커다란 사회 변화가 있었는데 그것은 새로운 왕이 즉위한 것이었다. 그는 우상숭배와 인간을 희생하는 제사를 금지시켰으며, 오랫동안 질질 끌어오던 부족들간의 전쟁도 끝날 것 같았다. 이런 가운데 선교사들은 입국을 허락받았으며, 기독교 선교사로서의 활동을 개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와이 선교는 원주민들을 기독교 문명의 단계로 끌어올리려는 선교사들과 이를 수용하지 못하는 원주민들의 거부감, 동족인 백인 선원들이 원주민 여자들을 마음대로 농락할 수 없게 된 데에 대해 반발하여 생명의 위협까지 받는 방해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하와이에서의 선교사역은 놀라운 속도로 진행되어갔다. 교회들과 학교들이 설립되었으며, 기독교 신앙에 대해 더 알려는 사람들과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이런 학교들 중에는 시빌 빙햄(히램 빙햄의 부인) 여사가 세운 여자 학교도 있었다. 그 학교에는 추장부인들이 많이 등록했는데,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기독교를 받아들였으며, 1823년에는 왕의 어머니가 세례를 받기도 했다. 아마 가장 극적인 개종 이야기는 한 추장의 부인이었던 카피올라니(Kapiolani)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녀는 많은 하와이인들처럼 펠레(Pele) 여신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었는데, 전설에 따르면 이 여신은 킬라우에아(Kilauea) 화산의 분화구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돌아온 뒤 그녀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며 지켜보는 가운데 화산에 올라가 분화구 용암 속에 돌멩이들과 소위 신성하다는 열매를 집어던졌다. 그리고는 구경꾼들에게 돌아와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증거하였다. 이 사건은 선교사들이 모두 합세하여 펠레신을 공격한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기독교를 전할 수 있게 한 극적인 사건이었다.

하와이 선교를 시작한 지 10년이 지났을 때, 선교사들은 섬의 구석구석까지 펴져나갔으며, 1837년에 이르자 선교사들의 수는 60여 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그들 대부분이 열심히 사역하고 헌신적이며 굳건한 기독교의 토대를 마련하였는데, 이 기초적인 사역이 끝나자 커다란 영적 부흥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840년 경 로마 가톨릭 신부들이 들어옴으로써 개신교 선교지가 잠식당하기 시작했다. 가톨릭의 타협적인 선교방법이 청교도적인 개신교의 선교방법보다 잘 먹혀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브래드포드 스미스는 “헌금을 요구하는 대신 가톨릭 사제들은 선물을 주었는데, 특히 어린이들에게 세례 줄 때 큰 효과를 보았다. 그들은 설교 없이 짧게 미사를 마쳤으며, 음주나 흡연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고, 어떤 죄인들에 대해서도 면죄를 약속했으며, 누구나 다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서양식의 훌륭한 저택에서 살
지 않고 하와이인들과 똑같이 생활하였다.”고 설명하였다.

개신교 선교가 주춤한 것은 로마 가톨릭의 유입 이외에도 빙햄 부부의 귀국과 몇몇 선교사들의 물질주의 때문이었다. 몇몇 선교사들은 토지와 부에 대한 욕심 때문에 선교사의 소명을 저버린지 오래였고, 남아 있는 대부분의 선교사들도 소위 부업으로 토지를 갖고 있어서 선교사역에만 전적으로 매달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세기가 끝날 무렵, 한때 2만 명을 넘어섰던 하와이 교회는 크게 쇠퇴하여 5,000명도 안되게 약화되었다. 선교사들은‘문명화’를 가져다 준 사명은 완수하였으나, 그 문명을‘기독교화’하는 보다 어려운 과업에서는 결국 실패했던 것이다.

19세기에는 유럽의 힘이 전 세계에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리고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힘도 그러하였다. 여기 기술하지 않은 곳 가운데 선교 역사에 큰 장을 마련한 예로는 일본, 한국 그리고 동남아가있다. 이미 살펴 본 바와 같이 19세기의 선교는 힘의 선교였다. 본국의 강력한 인적, 물적 지원과 정부의 강력한 힘이 그 밑바탕이었다. 그리고 여러 선교 영웅들의 지혜와 희생적인 봉사가 전 세계 모든 지역에 복음을 심었다.

19세기는 유럽의 힘으로 선교를 수행한 시기였다. 이때 거의 모든 지역에 선교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었다. 선교사들은 본국의 힘으로 강하게 선교를 수행할 수 있었다. 재정적 뒷받침은 물론이고 정치적인 압력도 선교를 위한 방법으로 작용했다. 그리하여 기독교는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선교를 수행할 수 있었다.



XIII. 신정통주의

자유주의는 기독교를 과학에 복종시켰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 특히 인간 속에 내재되었기에 인류는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이성에 대한 이러한 자부심은 인간이 만들어 낸 엄청난 악, 바로 세계 대전 앞에서 무너졌다. 이 전쟁을 통해 인간의 본성에 대해 완전히 착각하고 있었다는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초월하심도 깨달았다. 그러나 자연 과학에 사로잡힌 자유주의의 후손들은 다시 옛날의 정통 신앙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결국 양쪽을 다 거부하며 신정통주의라는 중간노선이 나타나게 되었다.

1. 배경

19세기 후반‘역사적 예수’운동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랑케의 새로운 역사 방법, 즉 객관적이고 과학적이며, 있던 그대로의 과거를 재현하려는 운동은 신학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인간 예수에 대한 신화를 다 벗기고 실제의 예수를 살펴보려는 시도가 일어났다. 새로운 역사 연구 방법에는 초자연이나 영적
인 영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과는 예수님을 순전히 보통 인간으로 보는 것이었다.

수없이 많은 예수전이 씌어졌다. 여기서는 복음서의 내용이 온전히 다 수용되지 않았다. 기적을 벗긴 예수는 하나의 보통 인간이었다. 그러한 그가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이 운동의 지도자는 리츌이었다. 그의 목표는 ‘교리적 그리스도에서 역사의 예수로’였다. 하지만 여기 보통 사람 예수는 스승으로 가치가 있어야 했다.

역사 비평은 예수님에게 입혀졌던 신화의 찬란한 옷을 벗겼다. 그러나 벌거벗은 예수를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다시 자기들 생각에 예수가 본래 입었으리라 생각되는 거친 옷을 입히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역사 연구는 차츰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역사가 완전히 과학적일 수가 있겠는가? 몇 천 년
전의 과거를 재현하는데 어떻게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다시 해낼 수 있겠는가?

학자들은 차츰 깨닫기 시작했다. ‘역사적 예수 연구’에 의해서 나타난 예수는 예수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 역사가 자신의 이해를 투영해서 상상한 예수일 뿐이었다. 19세기의 사고와 문화에 젖은 자기의 두뇌 속에서 만들어진 상상의 인물일 뿐이었다. 이러한 인간적인 이해의 투사체가 무슨 구세주가 될 수 있겠는
가? 현 시대의 눈으로 과거의 사람을 볼 게 아니라 그 시대의 눈으로 보아야 했다.

그래서 19세기의 부르조아적이고, 도덕적이며, 관념론적인 표현의 예수는 잘못되었기에 후기 유대교의 묵시 문학의 분위기에서 보아야 한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요하네스 바이스와 알버트 슈바이처였다. 바이스는 예수님이 임박한 무서운 종말과 초자연적인 새 창조를 기대했다고 주장했다. 슈바이처도 예수님을 당시 시대의 인물로는 자신의 죽음이 이 종말의 시작을 주리라 착각했다고 말했다.

이렇듯 ‘역사적 예수’가 19세기 사람들의 이상적인 인간을 투사한 것이라면, 바이스나 슈바이처의 방법은 1세기 유대의 상황에서 예수님을 상상해 본 것이었다. 여기 덧붙여서 ‘종교사학파’들은 예수님과 초기 기독교를 후기 헬라의 신앙과 관습에서 이해해 보려고 하였다. 리츌은 기독교의 역사적인 고유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종교사학파에서 볼 때 기독교의 현상은 비역사적인 것이었다.

종교사학파는 무엇인가? 종교사학파의 학자들은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를 똑같이 원시 상태부터 차츰 진화해 가는 것으로 보았다. 이들이 보기에 초기 기독교는 절대로 특별한게 아니었다. 기독교는 고유한 것이 아니라 후기 유대교, 동방의 종말론, 헬라의 신비주의, 영지주의, 스토아 사상 등이 모여져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다행히 기독교는 새 종교가 필요한 때 나타났을 뿐이었다고 저들은 보았다.

보우셋은「주 그리스도」라는 책에서 기독교가 원시 상태의 종교에서 헬레니즘이라는 환경 속으로 들어간 다음에 예수님이 주로 불리었다고 주장했다. 이때 비로소 예수님은 이방 제의의 신들처럼 경배되었고, 또 그 신들이 하는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기독교도 다른 모든 종교들처럼 원시 상태가 있었고, 제의적, 신비적 단계로 진보해 나갔다는 것이다. 이렇게 기독교는 상대화되었다.

이러한 상대화는 유명한 트뢸취에 의해서 더욱 심화되었다. 그는 하르낙이 주장했던 기독교의 본질을 비판했다. 하르낙 식의 사랑이라든지, 온 인류의 형제화라든지 하는 기독교의 본질이란 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중인데 무슨 본질이 있다는 말인가?’라고 반문했다. 그의 생각으로는, 기독교는 추상화된 개념으로 축소시킬 수 없는 것이고, 오히려 그러한 개념이 발전한 역사이며, 그 모든 것이었다.

종교사학파들에게 기독교는 영원한 가르침이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역사의 여러 운동처럼 새롭게 변하는 것이었고, 신적인 생명력이 역사 안에서 항상 새로운 개개의 사건에서 자신을 현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운동은 통일되지도 않았고, 보편적일 수도 없었다. 기독교도 이러한 법칙대로 보편적이지도 않고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기독교는 유럽 문명과 함께 흥하고 망할 상대적인 것이었다.

역사를 ‘일어났던 그대로’보자는 운동에서 시작된 역사 비평학은 스스로의 약점 때문에 모든 진리를 상대화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일어났던 그대로 복원시키는 일을 상대적인 인간이 하기 때문이었다. 이 상대화는 기독교 신앙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은 정신이 온전치 않은 신비주의자요, 종말주의자로 취급되었다. 그리고 기독교는 다른 종교처럼 원시 상태로부터 진화되어 온 종교 가운데 하나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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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위기 신학

자유주의 신학은 20세기 초에 들어와서 그 스스로 허구성을 드러내고 말았다. 계몽주의 때부터 일어났던 빛나는 인간 이성에 대한 예찬은 19세기에 와서 절정에 달한다. 사람들은 인간의 이성이 신의 한 부분인 것으로 착각하였다. 그리하여 인간과 신의 차이는 단지 양적인 것이요, 그것도 차츰 좁아드는 것으로 착각했다. 결과는 인간의 수준으로 신도, 구원도 끌어내린 것이었다.

이성의 발달로 그리고 인간의 계몽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땅에 조금씩 실현되어 갈 것이라는 부르조아적 낙관론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가장 이성이 뛰어난 유럽 사람들도 그것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지는 못했다. 오히려 사람들은 대량 살상하는 무서운 무기를 만들었을 뿐이었고, 온 세상은 인간의 집단적인 악에 의해서 참담하게 짓밟히고 말았다.

이 위기를 맞이하여 젊은 목사 칼 바르트는 폭탄선언을 발표했다. 이것은 1919년「로마서 강해」라는 작은 책으로 나타났다. 곧 이어 스위스와 독일의 많은 신학자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특히 투르나이젠은 도스토예프스키 연구를 출판했다. 당대 인간에 대한 낙관론을 거부하고 비극의 심연에 빠져있는 어두운 인생을 묘사했던 도스토예프스키가 신정통 신학자들의 눈을 열어 준 것이었다.

바르트는「로마서 강해」를 통해서 자신의 관심은 “어떻게하면 하나의 인간으로서 엄위하고 높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달할 수 있을까”였다고 고백하였다. 그래서 그는 성경 자체를 깊이 연구하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선배들이 볼 수 없었던 진리의 영역이 있었다. 그는 선배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사람의 말에 치중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19세기는 인간 절대주의 시대였음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을 가르쳐 온 자유주의와 결별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행복한 날들이었던 19세기의 실제적 종말이 1914년 임했다. 나 자신에게 그 해 8월의 어느 날은 암흑의 날이었다. 그 날 93명의 독일 지식인들이 황제 빌헬름 2세의 전쟁 정책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놀랍게도 나는 그들 가운데서 이제까지 신앙적으로 존경했던 스승들을 발견했다.” 이제 그에게 세상의 위기는 임한 것이었다. 결국 그는 스승의 성경 해석, 역사에 대한 가르침을 전면 부정하게 됐다.

또한 바르트는 키에르케고르나 도스토에프스키의 실존주의와 프란즈 오베르벡이나 불룸하르트 등의 정치신학, 마르하이네케 등의 헤겔 후 신학들에도 영향을 받았다.

그보다 더 결정적인 영향을 그에게 끼친 것은 성경이었다. 그가 직접 교구에서 목회를 하면서 성경을 읽은 데서 그는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1911년 스위스 사펜빌에서 목사가되었다. 바르트가 그의 친구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과 이 당시에 교환한 서신들을 보면 이러한 상황들을 보다 더 잘 알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과연 무엇을 설교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당시에 설교학을 약간 개선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할 것이 너무나도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가 실제로 설교를 하고자 한다면, 이는 단지 우리들 자신의 영성의 흥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말씀이어야만 한다고 확신하였다.

그는 “적어도 19세기 신학에는 미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이제 알았다. 19세기의 자유주의가 무슨 오류를 범했던가? 그것은 하나님을 멋대로 생각하고 인간을 과대평가한 것이었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요 본성이 선하므로 바르게 교육시키면 의롭게 살 수 있으리라 착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적인 이해가 아니었다. 바울과 어거스틴의 가르침의 중심에 표현된 복음의 내용이 아니었다. 또한 루터와 칼빈에 의해서 다시 명확하게 밝혀졌던 구원의 길도 아니었다. 인간은 악하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죄인이었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믿음으로만 구원될 대상이었다. 근본이 악한 인간들은 절대로 그 악한 본성에서 선한 것을 구할 수 없는 것이다.

바르트는 인간과 하나님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보았다. 그것은 양이 아니라 질의 차이였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인간은 인간이었다. 그리고 둘 사이에는 절대로 건널 수 없는 무서운 간격이 있었다. 인간에게서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은 없다. 가능성도 없다. 단지 하나님에게서 인간에 이르는 길만이 있을 뿐이다. 무능한 인간은 죄의 노예로서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었다.

이제 바르트는 루터와 칼빈의 중요성을 이해했다. 그리고 2천년이나 내려온 정통 신앙의 가치를 깨달았다. 자유주의는 인간의 종교였다. 거기에는 아무런 구원도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정통 신앙은 분명히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를 보여
주며 구원의 길도 열어 준다. 이것이 자유주의에는 없었다. 단지 인간의 현실에 대한 여러 가지 인간적인 이해만을 더해줄뿐이었다. 그것도 자꾸 변해 왔다.

정통 신학으로 갈 것인가? 그러나 바르트는 자유주의의 아들이었다. 그는 역사 비평학을 통해서 성경은 인간의 손으로 쓴 오류투성이의 문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전통적 신앙을 인정했지만 이미 비판을 받았던 정통 신학은 그대로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정통 신앙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신정통 신학이다. 축자영감설을 인정하지않는 정통 신앙, 바로 신정통 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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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실존주의와 변증법

바르트의 신학 방법인 실존주의와 변증법은 키에르케고르(1813-1855)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루터교를 국교로 하는 덴마크 코펜하겐의 루터교 가정에서 7번째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키에르케고르는 부친의 처음 부인이 세상을 떠나기 4개월 전에 부친과 하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 때문에 키에르케고르의 아버지는 항상 우울했고, 이 우울증이 그의 아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약간 곱사등에다가 유약한 몸을 지닌 우수의 철학자로서 학문과 예리함에 있어서 천재성을 일찍부터 보이기 시작하였다. 키에르케고르는 신학을 연구하기 위해 1830년에 코펜하겐대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철학과 문학에 더 큰 흥미를 느껴서 그의 석사학위논문을 ‘아이러니의 개념’에 관하여 썼다. 그리고 그는 신학 분야에서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그의 천재성은 그로 하여금 학교공부로 만족할 수 없게 하였다. 그는 몇 가지 인생의 문제들 때문에 정신적 위기에 떨어졌고 종교적 실존, 특히 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싸워야 했다. 첫 번째 사건은 아버지가 죄를 고백한 사건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하녀와의 불륜관계로 키에르케고르가 태어났음을 그에게 고백하였다. 두 번째 사건은 그의 약혼의 파기였다. 그는 1837년 레기나 얼선을 만나 사랑에 빠져 약혼에 이르렀으나 어느 날 갑자기 파혼하였다. 그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그의 일기에는 ‘하나님의 거부’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아마도 그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는 그의 약혼녀와 결혼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정신적 위기감
이 그로 하여금 심미적이고 실존적인 작품을 남기게 했다.

키에르케고르는 19세기 초반 사람이었으나 자기 시대에는 빛을 볼 수 없었다. 한 세기나 일찍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20세기에 미친 그의 영향은 엄청난 것이었다. 오늘날 그는 실존주의의 아버지로 불려진다. 초기 바르트의 신학은 키에르케고르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책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실존을 심미적, 윤리적, 종교적 세 단계로 보았다. 그것은 실제로 그의 생애와도 같았다. 심미적 단계는 미를 추구하면서 사는 생활이다. 이는 충동적인 삶이다. 여기에는 책임감이나 의무감이 없다. 반성도 없다. 그저 찰나적인 삶의 원리로서 관능을 따라서 움직이는 삶이다. 동물적인 삶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삶은 급기야 실망과 초조 속에서 좌절하고 말게 된다. 물 위에 던진 돌이 물을 차고 날지만 몇 번이나 튀겠는가? 결국 좌절의 심연에 빠지고 만다. 좌절 속에서 경험하는 실존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이다. 이 무의미와 절망 속에 빠져 버리고 말 것이냐 아니면 삶의 의미를 찾아서 다음의 단계로, 곧 윤리적인 단계로 도약할 것이냐, 이것은 참으로 실존의 문제였다.

윤리적 단계의 사람은, 심미적 생활은 죽음에 처한 인간이 선택할 길이 아님을 안다. 그래서 윤리적으로 살 것을 결심한다. 그렇다고 생과 죽음과 무의미가 덜해지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이런 두려운 일에 대한 불안을 짊어지고 산다. 하지만 관능적으로 자신을 잃고 뒹굴 수는 없다. 그래서 자유를 가진 인격체로 자신을 바라본다. 인류애를 발휘하며 꿋꿋이 운명과 싸우며 죽어간다.

이것이 비극적인 영웅주의이다. 넘어지고 쓰러지면서도 계속 앞으로 나간다. 까뮈의「페스트」에 나오는 의사와 같은 삶이다. 그러나 이것도 결국은 좌절하고야 만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노력에는 한계가 있다. 여기서 또 한 번 선택의 길이 열린다. 자기의 운명을 지고 싸우다 죽을 것이냐, 아니면 영원자요 절대자인 하나님에게 자신을 의탁하며 살아날 것이냐.

다음의 도약 단계가 종교적인 단계이다. 종교적 단계도 둘이다. 자기를 포기하고 절대자에게 맡기지만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고 자기의 노력, 자기의 의, 자기의 선행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려는 단계가 있다. 이것은 율법적인 단계요 바리새인의 단계이다. 이것 역시 있는 힘을 다해서 노력은 하지만 역시 한계에 도달
한다. 인간은 자기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마지막 단계인 자기 몸 전체를 정말로 내던지는 참 종교적인 단계로 나아간다. 구원이신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에 자기 몸을 던지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논리가 지배하지 않고 역설이 움직인다. 여기서는 모든 윤리적인 차원을 뛰어넘는다. 윤리와 모순해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 단계이다. 높은 바위에서 끝없는 심연에 몸을 던지는 전적인 모험이다.

우리는 키에르케고르의 중심 사상을 역설이라는 단어에서 본다. 여기에서 “진리는 주관이다.”라는 실존주의 주제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같은 백만 원짜리 수표라도 사람에 따라서 가치가 다르게 느껴지는 것처럼 신앙도 객관적으로 정보를 받고 같은 경험을 갖는 게 아니다. 신앙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이기에 주관적인 것이다. 또한 결단 역시 실존하는 개개인들이 주관적으로 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 키에르케고르의 신앙관이 나타난다. 신앙은 논리가 아니고 역설이며 합리가 아니라 비합리인 것이다. 후에 그의 사상은 신앙을 비합리적인 것으로 매도하는 이들에 의해 이용되기도 한다. 그는 신앙의 대상이 비합리적이거나 부조리하지 않다고 못박는다. 역설도 아니다. 하지만 인간의 지혜로는 그것이 부조리요 역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주관적인 결단이 요구되는 모험이라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을 비판했다. 신앙은 그들이 말하는 식의 이성의 한계 속에 있는 것도, 합리적인것도 아니었다. 또한 ‘일어났던 그대로’의 객관적인 역사 기술도 가능한 게 아니었다. 그는 이런 주제넘은 이성의 한계를 지적하였다.

이러한 키에르케고르의 신학은 20세기에 와서 실존주의자들이 만든 모든 혼란과 무의미의 시작이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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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칼 바르트의 신학

바르트(1886-1968)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금세기 최고의 신학자로 인정되고 있다. 그는 당시 최고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 배웠다. 그러나 그는 1909년 제네바에서 목회를 시작하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교수들에게 배웠던 자유주의 설교는 교인들에게 아무런 양식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강단에 오를 때마다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위선과 회의를 통렬하게 느꼈다.

그는 친구요 목사인 투르나이젠과 이 점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들은 신앙적인 위기를 경험하고 있었다. 그들은 성경 연구를 시작했다. 그래서 바르트는 ‘성경 안에 있는 신기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게 되었다. 결국 그는 로마서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를 발견하고 자유주의의 잘못된 입장을 깨달았다.

「로마서 강해」출간 이후 에밀 브룬너, 루돌프 불트만, 프리드리히 고가르텐, 투르나이젠 등이 그를 지지했다. 물론 이들은 후에 서로들 의견에 많은 차이를 보여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기도 한다. 이들은 1922년부터「시대의 사이에서」라는 신학 잡지를 발간하기 시작하여 1933년 폐간될 때까지 새 시대의 독일 신학을 이끌어 갔다. 그들의 입장은 신정통이 되었다.

바르트와 신정통 신학자들은 키에르케고르의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들은 헤겔의 변증법 곧 정반합 식의 단순한 이론을 배척하고, 진리와 진리 사이의 변증법적인 긴장에서 진리가 깨달아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인간은 유한과 무한의 중간점에 있다. 그러므로 양쪽을 다 잡고 있는 것이다. 인간 속에는 부정과 긍정이 함께 있다. ‘예’와 ‘아니오’가 서로 해석되고 의지되며 발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만물의 주인으로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만물의 종으로서 누구에게나 종속된다. ”바르트의 이 말은 루터의 말과는 의미가 다르다. 루터는 인간이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이라 했다. 그러나 바르트는 양극단 사이에서 계속 예, 아니오를 반복하면서 달리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교리주의나 신비주의에 빠지지않는 유일한 방법이라 했다.

바르트의 이러한 방법은 자유주의자와 전통적인 신자들 양쪽 모두에게 혼란을 줄뿐이었다. 그에 의하면 진리는 항상 움직이고 있는 하늘을 나는 새와 같다는 것이다. 그의 애매한 방법은 역사관에 더욱 잘 나타난다. 그는 자유주의자들의 과학적인 역사관에 반대하였다. 그런 식으로 성경을 읽는다면 그 결과는 그들이 범한 오류에 그대로 빠지는 것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역사 비평학자들과 똑같이 성경을 보았다. 그는 성경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다른 것들과 똑같이 인간의 문서이다.” 왜 그런가?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증거자로서의 기능과 그 증거를 기록하는 행위에서 우리처럼 진정한 역사적인 인간들이었고 행위에 있어서 죄악을 저지르기도 했으며, 말이나 글에서 오류를 범할 수 있었고 실제로 오류를 범"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번역을 제안할 수 없을 정도로 절대적인 확실성과 명확성을 가지고 우리에게 전해진 성경 구절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확실한 근거 위에 서 있다.” 오류와 불확실 그것이 성경의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아니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보다는 그것이 주관적으로 인간에 의해서 받아들여질 때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신구약에 기록된 성경의 역사는 절대로 실제 역사가 아니다.”라고 바르트는 선포했다. 특히 성경의 초자연적인 사건들, 예를 들어 부활이 그러하였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재림은 둘 다 같은 것이지만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그것이 역사에서 실제 일어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관심은 정말로 무엇이 일어났느냐가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 관심사인가?

그는 말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실제 역사냐 아니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내가 어떤 결단을 내리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부활의 실제 의미는 “신앙의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지 잘 증명된 역사적 보고를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를 듣고 내리는 인간의 결단이 자유주의자들의 것과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신정통주의자들은 분명하게 자유주의자들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과학적인 방법으로 과거를 재현할 수 있고 예수님의 일생도 완벽하게 재구성하리라는 생각은 인간 자신만큼이나 허구였다. 신정통주의자들은 그것을 거부하였다. 그리고는 그들 이론에 의하면 정확하지 않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주관적인 결단을 촉구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진리는 주관이었다. 구원은 이렇게 여전히 인간 수준의 차원에 머물고 있었다.



XIV. 에큐메니컬 운동

헬라어 ‘오이쿠메네’ 곧 ‘거주하는 세계’에서 나온 에큐메니컬 운동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협동과 연합을 추구해 왔다. 역사상 교회들이 서로 일치하지 못했기에 이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와 에큐메니컬 운동은 힘찬 활동을 벌였다. 많은 교회들이 힘을 합쳐 세계 기독교 협의회를 만들었고 그 규모도 엄청나게 커졌다. 그러면서 과연 이 기구를 움직이는 사람들이 교회의 본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느냐는 의문도 강하게 일어났다.

1. 배경

초대 교인들은 자신들이 사도의 복음을 따라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로 연합되었다고 믿었다. 사도의 뒤를 잇는 속사도들은 교회간의 차이를 전혀 말하지 않았고 당연히 동서방 여러 교회들은 연합하는 것을 전제하였다. 니케아 신조에도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고백하고있다. 물론 이것은 무형의 교회를 의미했지만 많은 신자들은 유형의 교회에도 이 의미를 적용했다.

그러나 교회의 일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교리는 거의 일치했지만 서로 연합해서 무슨 일을 하기에는 로마 제국이 너무 넓었다. 특별히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간에는 주도권때문에 알력이 있었다. 결국 중세에 가서 이 둘은 완전히 갈라서게 되었다. 로마 가톨릭과 희랍 정교회가 서로를 이단으로 파문한 것이었다. 그래서 1054년에 완전히 분열하고 마는 결과를 빚었다.

종교개혁 이후에는 수많은 교파들이 난립하는 결과를 빚었다. 독일과 스칸디나비아는 루터교, 제네바와 네덜란드는 칼빈주의, 영국은 성공회 그리고 대부분의 지역은 가톨릭으로 그냥 남아 있었다. 또한 이미 가톨릭과 갈라진 정교회는 희랍과 러시아를 지배하였다. 그뿐 아니다. 여러 군소 교단들, 재침례파들과 신비주의자들 등 여러 분파들이 수없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 후 몇 백 년 동안 개신교단은 숫자가 계속 늘었다. 이 서로 다른 교단들은 아무런 유대가 없었다. 서로 함께 일하는 경우도 없었다. 심지어는 지역의 개교회들끼리도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옆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건 전혀 무관심인 경우도 많았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개교회주의로 나가서는 사회에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었다. 교회끼리의 유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많은 신자들은 여러 교파들이 난립하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있었다. 같은 기독교인이라도 교단이 다르면 아무런 유대가 없었다. 그러니 서로 따로따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개교회들이 어떤 부분에서라도 협동해서 일하는 것을 보고 싶어 했다. 만약 서로 협동한다면 여러 가지 재정이나 인력 낭비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서로 경험도 나눌 수 있지 않겠는가? 이것이 에큐메니칼의 시작이다.

19세기 초 미국에서는 많은 교회와 교단들이 서로 협력했다. 선교사를 보낸다든지, 전도 집회나 부흥회, 성경 반포회, 교도소 전도 그리고 각종 구제 활동 등에서 서로 협조했다. 이 일은 평신도 차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성직자들보다도 평신도들이 교리의 미묘한 차이에 별관심이 없고 그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힘을 합쳐서 일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성직자들 사이에도 퍼져 나갔다. 그러다가 1846년에는 미국과 영국의 50개 교단이 ‘복음주의 연맹’(Evangelical Alliance)을 형성하였다. 신앙적인 자유와 선교 및 교육 활동 분야에서 서로 협력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여기에서는 개신교도들 간의 교리나 교회 정치 구조 등은 상관하지 않았다. 단지 선교하는 일과 교육에 있어서 힘을 합하고 인력을 서로 교환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이것이 발전하여 1908년에 미국에 31개 개신교 교단이 ‘교회 연합회’(Federal Council of Churches)를 구성하게 되었고, 1950년에는 더 큰 규모의 ‘전국 교회 연합회’(National Council of Churches of Christ)가 발족하게 되었다. 현재 한국에도 교회 연합회(KNCC)가 있는데, 대체로 진보적인 교단들이 포함되어 있다. 각국의 교회 연합회가 세계적인 규모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세계 교회 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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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러 분야와 특성

에큐메니칼 운동은 하나의 뿌리를 가진 것이 아니었다. 여러 흐름이 모여진 것이다. 그중 한 분야가‘선교 사역’이다. 이는 선교 현장에서 교파 사이의 경쟁이나 재정과 인력 낭비를 막기위해서 자연적으로 취해진 움직임이었다. 본래부터 선교지에서는 초교파적으로 일이 진행 될 수밖에 없었다. 우선 본국의 선교회가 초교파적으로 많은 평신도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1854년에 뉴욕과 런던에서 범세계적인 선교 대회가 열렸다. 그 후 간헐적으로 비슷한 모임이 있었다. 그렇게 8차로 모인 것인 1910년의 에딘버러 세계 선교 대회였다. 이때부터 모임은 각 선교회의 공식 대표들로 이루어졌다. 완벽한 자료에 의해서 선교사들과 선교 지역의 현지 대표들이 장래 선교의 방향과 영감을 나누었다. 이 대회는 이전의 것들과는 규모나 내용 면에서 획기적이었다.

이 여파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상임 위원회가 생겼고, 다시 이것은 1921년에 국제 선교 협의회로 성장했다. 회의 의장은 에딘버러 대회를 주재했던 존 모트(John Mott)였다. 그는 미국 감리교회의 평신도였다. 이리하여 대표적인 선교회들이 대거 참여하게 되었고, 선교를 받은 지역의 교회 대표들도 다수가 회의에 참여하게 되었다. 1938년 마드라스 대회 때에는 절반이 신생 교회 대표들이었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두 번째로 중요한 분야는 ‘청소년의 사역과 교육’이었다. 이 분야의 선구자적인 기구는 조지 윌리엄스에 의해서 1844년 세워진 YMCA였다. 초교파적인 이 단체는 처음부터 에큐메니칼적이었다. 다음해에는 전 세계를 상대로 YMCA 세계 연맹이 조직되었다. 그리고 비슷한 성격의 YWCA가 세워지고 1894년에는 이 단체의 세계 연맹도 결성되었다.

청년들을 위한 또 하나의 중요한 운동은 해외 선교를 위한 학생 자원 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이었다. 1886년 미국에서 무디의 영향 아래 시작된 이 운동은 존 모트의 지도 아래 1895년 스웨덴에서 세계 학생 기독교 연맹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러 나라에서 기독 학생 운동을 지도하였
다. 그리고 후에 에큐메니칼 운동의 지도자가 될 남녀 학생들의 훈련장이 되었다.

세계 기독교 교육(World Christian Education) 운동도 1889년 시작되었다. 그것이 1907년에는 세계 주일학교 협회가되었다. 후에 이 단체는 여러 나라로 하여금 초교파적 기독교 교육 기구를 만들게 하였다. 결국 이 운동은 1950년 기독 교육과 주일학교 협회 세계 협의회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이 운동은 초교파적으로 젊은이들이 기독교 교육에 조직적, 기술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하였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세 번째 분야는 ‘삶과 일’(Life and Work)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이 분야는 기독교적인 봉사와 윤리를 위해서 연합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이 분야의 처음 출발은 1846년 런던에서 결성되었던 복음주의 연맹이다. 이 단체는 초교파적으로 활동해서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는 데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 연맹은 교회와의 공식적인 관계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1908년에는 조시아 스트롱에 의해서 미국 기독교 협의회가 조직됐다. 이 단체가 목적하는 바는 첫째, 교회들의 교제와 보편적 일치, 둘째, 교파 구별 없이 그리스도와 세상을 위해 함께 봉사, 셋째, 교회의 영적 삶과 신앙 활동에 관해 상호 교제하고 권면, 넷째, 삶의 모든 영역에 그리스도의 법을 적용하여 도덕
적,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치도록 영향력을 모으는 것 등이었다.

이것이 1950년 국내외 선교, 선교사 및 기독교 교육, 고등 교육, 여성 활동 등에 관심을 가진 국내의 여러 초교파적인 기구를 병합한 미국교회 협의회(National Council of the Churches of Christ in U.S.A.)로 발전하였다. 이미 프랑스, 스위스, 영국, 캐나다 등지의 나라에서도 거의 같은 조직들이 만들어져 있었다. 결국 이들이 세계적인 차원으로 응집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네 번째 분야는 ‘신앙과 제도’(Faith and Order)였다. 신앙적이고 교리적인 부분까지도 연합하고 일치하려는 이 분야는 당연히 근본적인 갈등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각 교단간의 교리적인 차이는 심한 것이었다. 1927년 로잔 회의에는 100개 교파 400명의 대표들이 참석했다. 놀라운 것은 교리의 차이에 대해서 서로들 많은 양보를 하여 많은 부분에서 동의했다는 것이다.

1937년에는 에딘버러에서 다음 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문서가 작성된다. 이때 기본적인 교리 가운데 80% 이상의 일치를 보았다. 그리고 ‘신앙과 제도’분야는 ‘삶과 일’분야와 합치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 결과 이듬해 위트레흐트에서 다음과 같은 선언이 선포됐다. “세계 교회 협의회(WCC)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주로 받아들이는 교회들 간의 교제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다섯 번째 분야는 ‘교회의 유기적 일치’(Organic Church Union)였다. 우선 몇 개 교단이 서로 통합하였다.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들이 통합했고 미국의 몇 교회가 북 장로교회와 통합해서 1906년 연합 장로교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남 장로교회와 합쳐서 미국 장로교회가 된다. 이런 식으로 비슷한 몇 교단들이 서로 합치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여섯 번째 분야인 교파들의 세계적인 연합과 친교 기구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앞의 여러 분야들이 차츰 세계 교회 협의회(WCC)로 통합되었다. 거기다 1960년에 획기적 변화가 나타났다. 로마 가톨릭이 WCC에 가입한 것이다. 이로써 에큐메니칼 운동은 그 세력의 절정에 달한 느낌이었다. 공산권에서 온 대단히 수상한 대표들을 포함해서 WCC는 이제 엄청난 규모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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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문제점과 한계

가능하면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교회끼리, 교파끼리 서로 합치고 교제하고 친교하려는 운동이 바로 에큐메니칼이다. 교회들이 서로 연합하고 하나가 되겠다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이 에큐메니칼 운동의 조직이 강화되고 구속력이 커지고 재정이 많아질수록 겉으로 보는 것과는 다
른 내면적인 어려움이 나타나고 있었으니, 이는 목적의식의 불분명이었다.

우선 교리적인 부분에서 가능하면 포괄적으로 다루려는 것이 이 운동의 성향이었다. 각 교파 신학의 특징들을 깎아서 모난 면이 없게 하다 보니 개신교와 가톨릭 같은 현격한 차이를 가진 교단끼리도 별문제 없이 일할 수 있게 되었다.

로마 가톨릭의 교황 피우스 12세는 1928년에 교회 일치 운동에의 협력을 금지한바 있었다. 그러나 1962년부터 1965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개최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 요한 23세는 그동안 금지시켰던 에큐메니칼 운동에 협력하는 것을 장려하는 결정을 공포하였다. 이러한 결정에 따라 과거에는 개신
교도들을 이단자라거나 분파주의자라고 묘사했던 것과는 달리 ‘분리된 형제들’이라고 묘사했다. 그렇다고 해서 가톨릭교회가 교리나 정체 상의 변화를 가져온 것은 결코 아니었다. 교황 요한 23세의 주장대로‘사목적’인 회의 곧 개신교와 정교회와의 관계에 영향을 줄 새로운 태도를 만들어 낸 것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교회 일치 운동을 주창하는 이들은 로마 가톨릭이 에큐메니칼 운동에 동참한 것만으로 만족하여 저들을 수용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각 교단의 전통적인 신학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고 아시아나 라틴아메리카 같은 지역의 극단적인 좌파 신학을 주로 말하게 되었다.

신학적인 차이들을 수용하면서 외형적인 일치를 추구하다보니 자연히 정치,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을 집중할 수밖에 없게되었다. 그 한 예로, 1960년부터는 세상에 대한 봉사로 관심이 모아졌다. 이전의 어느 회의보다도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등의 대표들이 많이 참석하였다. 그러므로 자연히 제3
세계의 관점이 강하게 제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그 모임에서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은 거의 잊혀졌다.

세계교회협의회는 1968년 스웨덴의 웁살라에서 개최된 제1차 회의 이후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경향을 취했으며, 구원을 영적인 것이 아니라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것으로 보았다. 1973년에 태국의 방콕에서 개최된 선교회의에서는 그 주제인 ‘오늘날의 구원’(Salvation Today)을,
인간을 모든 형태의 학대에서 해방하며 세상에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사회의 인간화’(humanizing of society)라고 해석했다. 1975년에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개최된 제5차 회의에서는‘비군사적 게릴라 혁명 계획’을 지지하고,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해방신학이라 할 수 있는 것을 채택하였다.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 사이의 격차가 지적되고 제3세계의 독재 상황이 부각되었다. 그러면서 필요한 경우에는 폭력을 포함해서라도 그리스도인이 혁명적인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사용해서 정치적인 활동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신자가 폭력을 주창하는 입장까지 이른 것이었다.

그 후 세계교회협의회의 방향은 거의 완전히 세상적인 관심에 집중되었다. 전쟁과 평화, 인권, 여권, 전쟁 반대, 인종 차별, 난민, 경제 정의, 민족주의, 지역주의, 국제 구조, 조세 제도, 기아 문제 등이 토론되었다. 영혼의 구원이나 하나님의 뜻은 전혀 안중에도 없었다. 이기적이고 정치적인 대표들에 의해서 회의의 방향이 정해지고 수백 수천만 불의 재정이 그들 뜻대로 사용되었다.

선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강력한 재정 지원에 의해서 선교 신학과 방법이 연구되고 논의되었다. 그러면서 자유주의자들의 선교관이 제창되기 시작했다. 1932년 ‘선교의 재고’(Rethinking Mission)란 이름의 책이 하버드대학 교수인 호킹(Hocking)에 의해 보고서 형식으로 출판되었다. ‘선교 일백 년 후의 평신도들의 연구’란 부제의 이 보고서는 엄청난 파문을 불러왔다.

이 보고서의 주요 관심은 타종교에 관한 기독교의 접근 방법과 선교사들에 의해서 선포되는 메시지였다. 여기서 기독교의 메시지는 역사적 사실이기보다는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원리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힌두교, 이슬람교, 불교 같은 종교들이 ‘전투적이고 비판적인 기독교 운동’에 의해서 고통당한다고 주장하였다. 한마디로 기독교를 그들 대표적인 종교들 가운데 하나로 취급한 것이다.

이 보고서는 “더 이상 어느 예언자 또는 어느 성경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도대체 예언자, 성경, 계시, 의식, 교회를 믿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였다. 모든 예언자들은 새 표적을 보고 있는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과 연합해서 활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다른 종교를 파괴하면 안 되고 그들을 도와서 그들이 가진 종교의 고유성과 장점들을 발견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60여 년 전부터 선교 신학에 이러한 움직임이 있었다. 세계 선교 협의회(WCC)는 선교의 전통적인 의미를 외면했다. 다른 종교에서 개종시키는 것을 죄악이라고 선언한 것은 오래전 일이었다. 이제 많은 과격한 대표자들에게 있어서 선교는 정치, 사회적인 변화에 도움을 주는 일이었다. 남미 독재 국가를 전복시키는 일이 선교이고, 그 일을 위해 세계 교회 협의회는 무기를 사 줘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바야흐로 세계교회협의회는 교회일치운동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종교일치 운동으로 나아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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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보수적 에큐메니칼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한 교단은 거의 다 신학에 있어서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1950년대에 이 에큐메니칼 운동에 교단이 참여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가장 큰 교단인 장로교회가 합동과 통합으로 분열되었다. 전자는 WCC의 신학적인 경향과 노골적인 세속성을 의심하였고, 후자는 믿는 자들이 협조와 화해의 정신으로 일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비단 교회의 일치를 위한 불일치는 장로 교단만 분열시킨 것이 아니었다. 거의 모든 교단에서 비슷한 분열을 경험했다. 자연히 진보적이고 에큐메니칼적인 교단들은 한국의 교회협의회(NCC)에 가입해 결국은 세계교회협의회(WCC)에 속하게 되었다. 반면에 보수적이고 반 에큐메니칼적인 교단들은 복음주의협의회(NAE)에 가입했다.

복음주의협의회는 1941년 시카고에서 결성되었다. 이 모임은 본래 에큐메니칼측에 대항하자는 것이 아니라 극단적 보수주의인 국제교회연합회(ICCC)에 대한 반응이었다. 국제교회연합회는 분리주의자 칼 매킨타이어에 의해서 구성된바, 전투적으로 복음을 방어하고 자유주의에 대항한다는 목적을 선포했다. 그러나 사실상 열심이 부족한 보수주의자들을 비난하고 있었다.

국제교회연합회(ICCC)에서는 WCC에 가입한 교단이나 기관에게 거기서 탈퇴할 것을 요구하였다. 자유주의와 함께 한 교회를 형성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 뿐 아니라 성경에 비추어 볼때도 옳지 않다는 것이 이들의 입장이었다. 매킨타이어가 주필이 된「크리스천 비콘」이란 신문이 발간되고 각종 소책자들이 나왔다. 여기에는 WCC 지도자들의 설교와 글들이 사진과 함께 실려 분석, 비판되었다.

차츰 기독교 연합회 내에서 매킨타이어의 지도력에 대한 반발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1954년에는 그것이 터져서 분열하고 말았다. ICCC의 지도자들은 ‘거짓, 사기, 과장’을 자행하고 각 교파의 지도자들을 이간시켜 교단을 분열시킨다는 비난을 받았다. 결국 매킨타이어는 ICCC를 탈퇴하였다. 차츰 여기 소속된 지도자들은 자신이 속한 교단이나 기관에서 분열주의자로 백안시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건전한 복음주의 연합체를 만드는 것이 NAE의 이상이었다. 구성원들은 자유주의의 배교와도 분리되어야 하지만 신앙인들의 ‘모든 종류의 완고함, 불관용, 중상, 증오, 질투, 거짓 판단, 위선’ 역시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42년 세인트루이스에서 모임을 가졌을 때 34개 교단과 단체에서 약 200명의 대표들이 참가했다. 여기서 해롤드 오켄가(Harold Ockenga)가 지도자로 떠올랐다.

이때부터 국제교회연합회(ICCC)에 실망한 수많은 보수주의 기관의 가입 지원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다음해 시카고 모임에는 50개 교단(도합 1500만의 신자)에서 1000명의 대표들이 모여들었다. 참석자들은 모두가 하나님이 복음주의협의회를 축복하리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운동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전통적인 신앙을 가진 이들은 부흥회 운동을 통해서 에큐메니칼 운동을 실천하기도 하였다. 미국에서는 특히 1950년대 이후에 빌리 그래함에 의해서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어디나 부흥회에 참석하는 이들은 교파에 관계없이 서로 협조하며 설교를 들었다. 한 장소에서 집회가 열리면 교파를 구별하지 않고 은혜를 사모하는 여러 교파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함께 예배했다.

그러나 NAE에 대해서 많은 교회들이 우려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여기 소속된 많은 학자들이 성경관에 있어서 대단히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우려는 곧 현실로 나타났다.

비교적 건전하게 진행되던 보수적 에큐메니칼 진영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던 것이다. 보수적 에큐메니칼을 주도하던 대표적인 인물인 빌리 그래함 목사는 “나는 나의 신앙과 로마 가톨릭의 신앙이 본질적으로 꼭 같은 것임을 발견했다.”라고 공공연히 말할 뿐 아니라, 세계적인 개신교 지도자들과 부흥사들의 상당수가 ‘복음 전파의 한 목적’이라는 미명아래 로마 가톨릭과 손을 잡는 것을 당연시 하더니, 1994년 3월 29일에는 소위 ‘복음주의자와 천주교 연합’(Evangelicals and Catholics Together)이란 이름으로 이른바 ECT선언을 발표하여 세계 기독교계를 놀라게 하였다. 개신교의 대표적인 전도자인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목사를 위시하여 빌 브라이트(Bill Bright), 휘튼대학의 마크 놀(Mark Knoll), 풀러신학교의 리처드 뮤(Richard Mouw), 유명한 ''Knowing God’의 저자인 파커(J. I. Packer), 감옥 설교자로 알려진 찰스 콜슨(Charles Colson), 오스 귀네스(Os Guiuness), 패트 로버트슨(Pat Robertson) 등 이른바 쟁쟁한 복음주의자들이 천주교와의 통합에 앞장선 것이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그 교리나 정체를 변화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복음 전파의 한 목적을 위해서는 서로 연합해야 한다고 하는 이런 연합 운동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신앙의 근본적인 차이들을 무시한 외형적인 일치가 과연 그리스도의 뜻인가? 그리고 일치해서 모여진 지도력과 재정이 오히려 교회의 전통적인 신앙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가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것이 WCC가 안고 있는 문제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소망적인 것은 아직도 많은 교회들의 최대 관심은 일치된 교회 활동 자체보다 영혼의 구원에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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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죤.웨슬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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