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심한' 목사의 기복적인 설교
어느 날 '한심한' 목사는 같은 처지에 있는 눈먼 동류(同類) 목사들과 함께, 서울 근교에 있는 어느 절간을 찾아갔다. 절간을 찾아간 이유는 모처럼 고궁과도 같은 절간 관광도 하고 경치 좋은 곳에서 휴식도 즐길겸해서 찾아갔지만, 절간에는 왠 사람들이 그리 많은지?.......
그래서 같은 동료들과 함께 무슨 이유로 절간에 사람들이 북적거리는지를 알고자하여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았다.
그 날 절간에 찾아간 사람들은 한 줄로 줄을 서서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꼬불 꼬불 지그재그로 늘어선 모습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 것이었다. '한심한' 목사는 맨 앞줄에 무슨 일이 있긴 있나보다 생각하여, 맨 앞줄 쪽으로 다가가서 무슨 일인가 하고 유심히 살펴보았더니, 거기에는 승여 몇 분이 책상을 여러 개 갖다 놓고 뭔가 접수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절간을 새로 짓기 위하여 성금을 모금하는 행사였는데, 절간을 찾아간 수 많은 사람들이 성금 접수를 위하여 늘어선 것이었다. '한심한' 목사 일행은 관심을 가지고 유심히 지켜보았다.
절간을 새로 짓기 위하여 성금을 모금하는 방법은, 절간에서 판매하는 기왓장을 신도들이 사서 다시 그 절간에 기증하는 방법이었는데, 그 기왓장 한 장 값이 일 만원으로 정해지긴 했어도, 신도들의 믿음 여하에 따라서는, 많게는 몇 십만원에서부터 기천만원까지 천차만별이었다. 왜냐하면 절간에서 판매하는 기왓장을 사서, 다시 기증하게 되면 기왓장 하나하나에 기증자의 이름을 새겨주는 것이었다. 때문에 많은 신도들은 자신들이 사서 기증한 기왓장이 새로 짓는 절간 지붕에 많이 올라갈수록 그들이 믿는 신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계산에서 나온 발상이 아닌가 짐작된다. 이러한 광경을 목격한 '한심한' 목사 일행은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한 듯이 회심의 미소를 띄우며 관광을 마치고 절간을 내려왔다.
절간을 다녀온 후 '한심한' 목사는 모처럼 서재에서 떠날 줄을 모르고 설교 준비에 열심을 다하는 것이었다. 성전 건축 문제 때문에 자주 찾아와서 상의하는 절친한 측근인 '황당한' 장로의 면회까지도 사절하면서 말이다. 그는 '황당한' 장로에게 말하기를 "이번 주 설교는 우리교회의 사활이 달려있는 설교이기 때문에 미안하지만 제가 설교 준비하는 금번 주간만큼은 저를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정중하게 면회를 거절하는 '한심한' 목사의 태도에 대하여 '황당한' 장로는 이해 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뚱거리는 것이었다.
드디어 '한심한' 목사가 벼르고 있던 주일이 다가오자 '한심한 목사는 상기된 표정으로 강대상에 등단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폭포수와도 같은 설교가 물 흐르듯이 시작되었는데, 그의 설교는 막힘 없는 웅변조의 설교로서 모든 신도들에게 뜨거운 심정을 불러일으키는데 하나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대선 경쟁에 뛰어든 후보들의 명 연설보다 한 수 위인 것만은 분명하게 보였다.
그 날의 설교 제목은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였는데 성경 본문은 마태복음6장19절-24절(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이었다.
그럼 그의 설교 내용을 요약하여 들어보기로 하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여러분의 가정 위에 하나님의 무한하신 축복이 함께 하시길 축원해 드립니다. 오늘 제가 설교하고자 하는 내용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어떻게 평가하고 계신지를 생각해 보고,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하나님이 보실 때 인정하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지를 다시 한번 말씀을 통하여 정립하시는 귀한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성경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세상 재물을 섬길 수 없다고 결론을 짓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종들은 세상을 위하여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하나님께 보여 줘야 하는데, 그것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재물 곧, 물질을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물질을, 여러분 자신을 위하여 사용한다거나 이 세상에 저축해 놓는다면 그것은 본문 19절의 말씀처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보물이라고 생각하는 물질을 하늘에 저축하여 두지 않고 세상에 쌓아 놓는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불신앙적 행위임을 아셔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의 말씀처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상고하셔서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시길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항상 복 주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상 할 수 없을 정도의 축복을 얼마든지 더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을 통하여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 하시리리라(마6:33)"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우리가 먼저 구해야 하는 것은 우리들이 바라는 소원보다는 주님의 몸된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을 먼저 구하면서 그 것을 위하여 우리가 최선을 다하여 채워드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구하지 아니한 모든 것까지도 덤으로 채워주신다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의미를 염두에 두고, 우리들이 보물처럼 아끼는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둔다는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여러분이 가장 아끼는 재물을 주님 앞에 먼저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서, 혹은 세상에서의 미래를 위해서 은행에 저축한다거나 보험에 가입하여 자신을 세상에 맡낀다고 하는 것은 보물을 땅에 쌓아 놓고 그것으로부터 위안을 받고 안심한 생활을 해 보겠다는 발상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적 도발 행위임을 아셔야합니다. 왜냐하면 좋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키신다는 믿음이 전혀 없기 때문에 세상의 물질을 의지하면서 살고 싶어하는 욕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의 믿음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여 세상을 의지하면서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물질, 곧 재물을 붙잡고 있으면 그것은 영원한 보증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 19절 말씀을 보면, 재물을 땅에 쌓아 놓으면 좀과 동록과 도적이 넘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말씀의 의미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바치지 않고 세상에서의 자신의 안락을 위하여 저축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때로는 질병이 찾아 온다거나, 갑자기 어떠한 교통사고가 난다거나 아니면 사업이 실패한다거나 아니면 부도가 나서 도산한다거나 진짜로 도적이 들어 어느 순간에 갑자기 실패하고 망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자들은 갑자스런 사고들로 인하여 우리가 세상에서 쌓아 놓은 재물이 결국은 시험들고 병들고 무용지물이 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즉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시면 결국 제로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제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 있는 자가 되어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부어주시는 축복을 믿고 오로지 주님을 위해서 바치시고, 재물을 아낌없이 바친 자들에게는 하늘에서의 상급과 더불어 이 세상에서는 여러분들이 바친 재물의 몇 천배라도 주님은 다시 갚아주실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건강과 사업도 지켜 주시리라 믿습니다.(이때 말씀에 눈먼 신도들은 돈이야기를 하는 설교에 무거운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서 '아멘, 아멘' 하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부담감을 떨쳐 버릴 수 없었으리라....)
제가 처음 우리 교회를 개척할 때 일어났던 사건 한 가지 실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처음 성전을 건축하자고 했을 때 돈 많은 어느 집사 한분이 그렇게도 반대하면서 나를 괴롭히더니, 결국 그는 교통사고로 숨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성전 건축을 끝까지 반대하고 자기의 재물을 사랑하는 자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를 실증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와 같은 불행이 혹시나 여러분들에게 나타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전 건축을 그렇게도 반대하면서 자신의 재물을 주님을 위하여 내어 놓치 않는 자의 말로는 가장 슬픈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재물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물질을 원하실 때 주님께 바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저 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바칠 때 하나님은 더 많은 것으로 채워주실 뿐만 아니라 하늘에서의 상급이 크다는 사실을 꼭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장차 천국에 가서 개털 모자나 쓰고 허름한 판잣집에서 사는 것보다는 의의 면류관, 승리의 면류관을 쓰고, 롯데 호텔보다도 훨씬 더 좋은 아파트나, 넓은 정원이 딸린 그런 천국에서 살고 싶으신 분들은 자기가 소유한 재물에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재물이 원래 하나님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근데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여 땅에 쌓아 놓는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절대 기뻐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더 많은 것으로 바친다면,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원하시는 모든 소원뿐만 아니라 재물까지도 쌓을 창고가 없을 정도로 넉넉히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또한 장차 천국에서 받을 상급과 함께 각종 황금 보석으로 꾸며진 면류관도 거머쥐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성도는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오늘 저희 교회에 나오신 성도 여러분 모두에게 이러한 믿음이 충만해져서, 여러분들이 소유한 재물을 하나님께 아낌없이 바칠 뿐만 아니라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을 온전히 받을 수 있는 성령 충만한 성도들이 되어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해 드립니다.
장차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어떻게 평가하실지를 생각하면서 우리 모두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는 믿음 곧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을 소유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다시 한번 축원해 드립니다.
저는 오늘 설교시간에 여러분들에게 중대한 발표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 신도시에 개척한지 15년이 넘었습니다. 그동안 성도 여러분들이 많이 헌금해주신 덕택에 10년전에 성전을 건축하였지만 부분적으로 많이 낡았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더 큰 성전을 지어 하나님께 바치고자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성전을 아름답게 건축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가 장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이일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믿음을 가지고 이루어 나갈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제가 엊그제 저희 교회 '황당한' 장로님과 함께 "온세상 제일 중심교회"를 찾아가서 아름답게 세워진 성전을 바라보면서 저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세계 제일 중심교회"에 너무 많은 축복을 주셨구나] 하는 생각 말입니다. 그 교회는 우리 "이상한 교회"보다 교인 수가 적은 가운데서도 저희 교회보다 더 아름다운 성전을 지었다는 사실이 저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주님! 우리교회 성도님들이 "온세상 제일 중심교회" 교인들보다 뭐가 부족합니까? 믿음이 없습니까? 재물이 없습니까? 하고 주님께 물었더니 주님께서 내 마음 속에서 응답을 하시는데 무어라고 하시느냐면, [너희 교회 성도들은 나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는 성도들이 너무많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습니까?(이때 말씀에 눈먼 신도들은 그저 '아멘' '아멘'할 뿐이었다)
제가 "온세상 제일 중심교회" 담임 목사보다, 부족한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 교회 목사는 신학교만 나왔지 박사학위 하나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도 저는 명색이 목회학 박사('한심한' 목사의 목회학 박사학위는 군소 신학교에서 얼마정도의 체면치례 학습을 하고나면 자동적으로 받은 박사학위임;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요즘 목사들 가운데는 목회학 박사가 제일 많는지도 모름)가 아닙니까? 라고 자신의 박사 학위를 추겨 세우면서 눈먼 신도들에게 다시 외치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교회 성도들이 "온세상 제일 중심교회" 성도들 보다 훨씬 더 믿음이 있다고 저는 자부합니다.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이때도 눈먼 신도들은 무조건 '아멘, 아멘'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저희 교회가 "온세상 제일 중심교회"보다 더 멋있는 성전을 건축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여러분 믿습니까?..... 그렇게 믿으시는 성도 여러분들은 한번 손을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눈먼 신도들은 옆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한 사람 두 사람 모두 손을 드는 것이었다)
성도 여러분 참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크나큰 역사를 시작하시리라 저는 믿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앞으로 새성전 건축을 하는 일에 모두 동참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더 큰 축복을 받아 누리시길 간절히 간절히 바랍니다.
근데 성도 여러분!
문제는 앞으로 막대한 성전 건축 자금을 어떻게 충당하느냐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고자 하실 텐데, 우리 모두는 이러한 하나님의 시험에 무사히 통과하리라 믿습니다.
저는 앞으로 성전 건축위원회를 만들고,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바칠 명세서를 배포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배포될 명세서에는 성전 건축에 필요한 자제 물품 내역서인데, 여러분들 중에서 자기가 기증하고 싶은 물품 내역서에 체크를 해 주시고, 기증하고자 하시는 물품 내역에 합당한 헌금을 내주시면 됩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들이 교회 강대상이나 피아노 그리고 교회 장의자를 기증하고 싶으시면, 수량에 합당한 헌금을 하시면 됩니다. 물론 본인의 믿음 여하에 따라서는 물품 가격이상으로 헌금을 해주셔도 괜찮습니다. 그렇게만 해주시면 하나님께서는 더 기뻐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기증한 물품에 대해서는 그 물품에 기증자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금색 도금으로 새겨드릴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이름은 하나님 나라의 보물이 되어 하나님나라의 장부에 올라갈 것입니다.
그리고 기증자들의 이름을 새기기가 어려운 자재들, 곧 씨멘트, 벽돌, 철근등 여러 가지 내역들은 성전 건축이 다 끝나면, 헌금하신 여러분들의 이름과 헌금 내역들을 돌비에 새겨서 성전 모퉁이 돌에 박아두어 영원히 남도록하겠습니다. ('한심한' 목사는 몇 일전 절간에서 기왓장을 판매하는 방법을 그대로 도용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앞으로 성전 건축이 무사히 마치게 되면, 저희 교회는 더욱 더 부흥하리라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더 많은 성도들을 보내 주실테니까요. 부디 여러분 모두가 동참하여 기적을 이루어내는 역사를 체험하시고 물 붓듯이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길 축원해 드립니다. 할렐루야.!
이와 같은 "이상한 교회" '한심한' 목사의 기복적인 설교 내용이 과연 성경적인가를 살펴 보겠습니다.
먼저 '한심한' 목사의 설교 서론 부분은 어느 정도 우리들이 인정할 부분들이 많이 있음을 부정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문제는 설교 전체가 던져 주는 메시지는 너무 기복주의로 흘러가 버렸다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설교의 내용들이 너무 기복적이거나 윤리나 도덕적인 문제로 매듭을 짓는데 큰 문제가 있는 것이, 오늘날 제도권 교회의 강단의 위기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진실과 비스므리한 설교들이 우리를 실족시킬 때가 많다는 사실도 우려되는 부분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전제 아래,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는 것은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일처럼, 부추기며 헌금을 강요하고 또한 하나님께 믿음으로 바친 재물은 몇 배의 축복으로 다시 돌려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 대단히 기복주의 라는 사실입니다.
성경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심한' 목사가 정한 본문 마태복음 6장19-24절 뿐만 아니라 6장 마지막절인 34절 까지의 내용을 염두에 두면서 설교를 했어야 제대로 된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문 24절에 이어 25절 첫 부분에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를 삽입함으로서 본문은 25절 이하에서 34절까지 연결된 본문임을 이해하면서 해석을 해나갈 때 바람직한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심한' 목사는 설교 본문을 24절까지만 제한시킨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 부분입니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하나님의 종들이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전제아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무조건 하나님께 바치라고 강요하는 듯한 설교는 대단히 위험한 설교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강요되어진 헌신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말씀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닫도록 하시며, 자신의 삶이 세상에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인도하시며, 인도하는 과정 속에서 성도들은 자신들이 깨달은 말씀에 대하여 자발적인 헌신에 동참하도록 이끌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강요되어진 헌신은 성령께서 독자적으로 하시는 일을 제한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네 자녀들이 부모가 요구하시는 말씀의 의미는 잘 모르고 주위에서 억지로 설득하거나 강요하여 부모의 요구에 부응하는 모습은 부모의 입장으로서는 여간 슬픈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강요되어진 삶은 언젠가는 부모의 입장을 떠나서 자기 주장대로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모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수납하는 가운에 부모가 요구하시는 말씀에 대하여 순종하는 자녀는 절대 부모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불완전한 인간관계는 언제든 파괴 될 수도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신 하나님의 자녀는 절대 하나님을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만들어 가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적절한 예화를 한 가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부잣집에 종으로 일하는 노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종이 자기 주인의 명령을 어기고 죽을 수밖에 없는 큰 죄를 짓고 도망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노예 신분이라는 마크가 온 몸에 표시되어 있어서 얼마 도망가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잡히게 되었습니다. 그 노예를 잡은 사람은 그 노예가 주인의 집에서 도망 나온 줄을 알고 그를 협박하면서 자기 집의 노예로 있어줄 것을 강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그 노예의 진짜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이었습니다. 옛날 그 당시의 법적으로는 노예가 주인의 집을 나오면 그는 마땅히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새 주인은 십분 이용하여 불법적으로 남의 집 노예를 자기의 노예로 학대하고 부려먹는 것이었습니다.
한 편 노예를 잃어버린 원래 진짜 주인은 자신의 종이, 죄를 짓고 도망간 사실을 알면서도, 그 종의 죄를 묻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 종이 다시 돌아와 줄 것을 기대하며 전국에 방을 써서 붙이고 그 종이 스스로 찾아오길 기대했지만, 집을 뛰쳐나간 종은 쉽게 찾아오질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자신이 직접 도망 나간 종을 찾으러 나섰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은 노예 시장에 나갔다가 노예 시장에 팔려나온 노예들 중에 자신의 집에서 도망쳐 나온 종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종을 데리고 나온 새 주인에게 그 노예가 원래 자신의 종이라고 돌려 달라고 했지만 그 악한 새 주인은 원래부터 자기가 주인이었다고 우기면서 그 종을 적당한 값에 사가라는 것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원래 진짜 주인은 값을 지불하기로 하고 자신의 종을 자기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그 종에게 이르기를 "네가 지은 죄는 내가 다시는 묻지 않겠다. 다만 종전과 같이 우리 집에서 함께 있어주길 바란다"는 것이었습니다. 종의 입장으로서는 너무나 고마울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종은 눈물을 흘리면서 원래 주인에게 몇 번이고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이제는 절대로 주인의 명령을 어기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다짐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종은 종전과 같이 주인의 집에서 열심히 일하기는 했지만 그는 항상 종이라는 신분 때문에 완전한 자유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점점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종은 주인에 대한 고마움과 은혜는 차츰 잊어버리고 주인이 시키는 일이 힘이 들고 일하는 즐거움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때문에 그는 주인이 자기를 부르는 목소리만 들어도 깜짝 깜짝 놀라면서 주인의 명령을 억지로 감당하는 것이 짐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은 잠시 쉬고 있는 종을 불렀습니다. 그 때 종의 심정은 늙은 주인이 빨리 죽지 않고 또 일을 시킬려고 부르는구나 생각하고 주인을 찾아갔습니다. 근데 뜻 밖에도 그 주인은 자신의 종에게 말하기를 "내가 자네를 오늘부터 종의 신분이 아닌 양아들로 삼을테니 이제부터는 나를 아버지라 부르기를 바라네 그리고 집안의 모든 일은 스스로 알아서 잘 처리하길 바라네, 그리고 장차 자네가 우리 집안의 모든 것을 상속받길 바라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주인은 종의 신분을 풀어주고 자신의 아들로 입적을 시키고, 아들로서의 정당한 대우를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 종은 얼마나 기뻐했을까 하는 것은 우리가 상상을 해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 후 그 종은 주인이 일일이 간섭하거나, 일을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일하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하는 일이 이제는 남의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일이며, 그것이 주인의 은혜를 위한 일이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주인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도 과거처럼 부담스럽던 모습도 차츰 사라지게되었다는 이야깁니다. 이 이야기의 요점은 종의 신분으로서 주인의 재산을 상속받은 아들로서의 자유함을 묘사한 글입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는 눈치가 빠른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지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으리라 봅니다.)
종의 신분으로 주인의 눈치를 살피면서 주인의 명령을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지키고자 하는 모습은 율법적인 행동이기 때문에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똑 같은 행동이라 할 찌라고 주인이 원하는 의도를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녀들에게 무조건적으로 베푸시는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본의를 깨닫지 못함), 자원하여 즐거움으로 동참하는 것이, 주인이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의 가치와 깊이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아는 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깊이를 진정으로 깨닫는 자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자신의 이름을 내 세운다거나 자신의 공로를 은연중 드러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사단의 종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의 옛 모습을 쉽게 잊어버리고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의 가치를 진정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밖에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종이었으나(갈4:7,엡2:3),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요1:12)을 가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갈3;29, 4:7)로 믿음 안에서 자유함(요8:32, 8:36) 을 누리는 것이며 그 자유함 속에는 자원하는 심정(출35:21, 시51:12, 벧전5:2)으로 주의 일에 동참하는 자발적인 능력을 성령의 인도하심(말씀의 가치를 깨닫는 즐거움)을 따라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강요되어진 율법으로서의 행함은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불신앙적 모습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당연히 감당해야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그 일의 결과에 대해서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임을 고백하면서 자신은 아직도 무익한 종(눅17:10)임을 알아야하는 것입니다.
앞서 이해를 돕기 위하여 도입한 예화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이해의 폭을 넓혀 주었으리라 봅니다. 예화 속에서 악한 주인(사단) 밑에서 결국은 죽음을 면할 수 없는 불쌍한 종(죄를 범한 인간)을, 선한 주인(하나님)이 값을 치루고 다시 사서(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 그를 살려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자녀로 삼아주시고 천국을 유업으로 주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믿는 자녀로서의 삶은 항상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가운데 자발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나라의 일은 인간의 의지로 이루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말씀의 의미를 깨닫도록 하시는 범위 안에서 감당하도록 하신다는 사실을 알게되면, 자신의 공노를 추겨 세우면서, 어떠한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 모습으로 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심한' 목사의 설교는 꽤나 연구한 흔적이 보이긴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본의(本意)와는 너무 다르게 나타난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자신의 명령을 억지로 짐을 지우게 하는 율법적 방식으로 일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엄청난 보상이나 상급을 미끼로 하여 일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문제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상급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누가복음 17장 7절에서부터 10절까지의 주님의 말씀(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를 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을 참고하면서, 마태 복음 20장에 나와 있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1절-16절)를 살펴보면 어느 정도 감을 잡으리라 봅니다.
포도원 품꿈의 비유를 보면, 천국을 품꾼을 부르신 포도원 주인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포도원 주인이 품꾼을 부르실 때,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염두에 두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만약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서 일할 사람이 없어서 일꾼을 불렀다면 포도원에서 필요로 하는 숫자만큼 아침 일찍 불러서 일을 시키는 것이 포도원 주인으로서는 더욱 효과적인 일을 시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보면 주인은 아침부터 시간대 별로 5번씩이나 품꾼들을 불렀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은 일이 다 마감될 시간에도 불렀다는 사실입니다. 이 비유에서 주인이 품꾼들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만약 이 비유에서 품꾼들이 주인을 위해서 얼마나 일을 많이 해주었는가에 말씀의 초점이 모아지면, 아침 일찍부터 와서 일한 포도원 품꾼에게 더 많은 임금을 주어야하는 주인의 모습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대 별로 더 많이 일한 품꾼과 일이 다 끝나 갈 무렵에 와서 일한 품꾼에 대해서는 차등적인 임금을 적용해야 주인으로서는 정당하다할 것입니다. 그러나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는 주인은 아침 일찍부터 와서 일 한자와 시간대 별로 늦게 온 자와의 임금이 똑 같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포도원 품꾼을 부르신 주인의 의도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품꾼들에게 일한 만큼 임금을 주기 위해서 부르신 것이 아니며, 품꾼들이 얼마나 일을 많이 해 줄까하고 기대를 하면서 부르신 것도 아니며, 일할 사람이 없어서 그들에게 일을 맡껴야 되겠다는 심정으로 품꾼을 부르지 아니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일한 만큼 임금을 챙겨주는 주인이었더라면, 아침 일찍부터 일터에 나와서 일한 품꾼들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일한 것에 대하여 자랑하면서 기대도 클 것입니다. 이러한 식으로 주인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다면 주인의 마음을 무시하는 태도일 것입니다. 따라서 주인의 마음을 정말 잘 알고 있는 품꾼이라고 한다면, 일할 자리가 없어서 놀고 있는 자신을 불러준 주인의 은혜와 자비 그리고 긍휼하심을 생각하고 감사해야하는 것입니다.
원래 인간의 본질은 하나님과 원수된자(롬5:10)이며, 본질상 진노의 자식(엡2:3)이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불러주셨다는 사실만으로도 주님께 감사하면서, 주의 일을 자원함으로 감당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이며, 구원받은 사람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은 사람일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성령의 역사와 부르심 없이는 주님의 선한 일을 감당할 수 없다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일을 감당하게 되는 것이며 주님의 사랑을 깨닫는 자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않는 한 '한심한' 목사의 기복적인 설교에 놀아날 것입니다.
참된 개혁 교회를 사랑하며 이루어 가길 원하는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여!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함과 구원의 기쁨을 충만하게 누리는 은혜의 삶이 되시길........^0^.............
remnant7000
'교육자료 > 교회장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기도론 (0) | 2017.04.22 |
---|---|
[스크랩] 바울서신서 개요 (0) | 2017.04.22 |
[스크랩] 한국교회, 구조할 수 없는 타이타닉 (0) | 2017.04.18 |
[스크랩] [인물강해] 호세아 (0) | 2017.04.18 |
[스크랩] 목사는 바리새인을 향한 일곱 저주를 설교하지 말라 (0) | 2017.04.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