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3. 9 조선일보

영국 케임브리지에 사는 대니얼 부인한테서 편지가 왔다. 십여 년 전 케임브리지 대학 병원에서 연수받던 몇 달 동안 홈스테이하던 집 주인이다. 손으로 써서 보냈다. 나는 그 할머니를 직접 만나는 듯 반가웠고, 편지를 읽으며 그의 얘기를 듣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또박또박 손으로 쓴 편지에 최근 있었던 자신의 일, 옛날에 내가 만났던 동네 사람들과 그 친척들 근황, 그리고 교회 얘기 등이 쓰여 있다. 그러면서 이번 여름휴가 때 꼭 놀러 오라 한다. 손 글씨가 주는 따뜻한 정이 느껴진다.
편지가 왔을 때, 봉투에 쓰인 주소가 옛 친구의 낯익은 손 글씨이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를 만난 기분이다. 더구나 그 속에 담긴 글이 딱딱한 컴퓨터 글씨가 아니고 부드러운 손 글씨면 읽으며 가슴이 뛴다. 연하장이나 결혼식 초청장도 손 글씨면 느낌이 다르다. 그러나 봉투 주소도 컴퓨터 글씨, 봉투 속 글도 인쇄한 글씨, 사인도 컴퓨터로 서명한 우편물이라면 보지도 않고 쓰레기통으로 던질 것이다. 요즈음 과연 몇 사람이나 손 편지를 쓰는가. 손 글씨는 마음의 표현이다. 정과 체온이 느껴진다. 그리운 사람에게 편지를 쓰다-tt가 눈물이 묻어 다시 쓰고 또다시 쓴다는 시와 노래도 있지 않은가. 마음이 불안하면 떨려서 잘 써지지 않고, 안정되면 차분하게 예쁘게 쓸 수 있다. 손 글씨는 마음의 상태이고 손 편지는 그 전령(傳令)이다.
나는 손 글씨를 자주 쓴다. 어머니에게 편지 쓸 때, 친한 친구에게 편지 쓸 때, 크리스마스카드나 연하장을 보낼 때 등이다. 특히 봉투 주소는 반드시 손으로 쓴다. 받는 사람은 금방 내 글씨를 알아보고 가슴 두근거릴 것이다. 결혼식이나 장례식장 방명록에도 천천히 공들여 이름을 쓴다. 혼주나 상주가 들춰볼 때 내가 예의를 갖추어 축하나 조의를 표하였다고 느낄 것이다. 중요한 서류나 영수증에 사인할 때도 낙서처럼 휘갈기면 교양 있는 사람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나는 글이나 논문 초고를 손으로 쓴다. 그래야 머릿속 생각이나 논리가 정리되기 때문이다. 자판으로 긴 글을 쓰려면 처음에 생각한 여러 감흥이 제대로 풀려 나오지 않는데, 손으로 써 내려가면 줄거리가 나오고, 연관된 느낌이 생각나고, 생각이 정리되면서 손끝과 펜을 통하여 글이 된다. 글자에도 하나하나에 혼이 있고 정신이 있는 법이다.
내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주로 펜으로 잉크를 찍어 필기했다. 한번은 국군 장병에게 위문편지를 펜으로 써 보냈는데, 편지를 받은 군인이 휴가 때 내가 다니던 충청도 시골 중학교까지 고맙다고 인사하러 찾아온 기억이 난다. 정성껏 쓴 글이 마음을 끌었던 모양이다. 학생 때 연애편지를 써보았는가. 사모하는 마음을 정성 들여 써 본 경험이 있으리라. 글자나 내용이 맘에 안 들면 찢고 다시 쓰다가, 그래도 맘에 안 들면 또다시 찢고 새로 쓰는 마음이 사모하는 마음이다. 내 친구 부부는 연애할 때 보내고 받은 편지를 거의 다 모아 두고 가끔 꺼내어 읽는데 몇 십년전으로 돌아가 새로 연애하는 것 같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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