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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관리/CEO

[문화일보]자기를 속이지 말라’

 

[오피니언] 살며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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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 = 안은진 기자 eun0322@munhwa.com
정호승/시인

자기를 속이지 말라.”

성철 스님의 말씀이다. 입적(入寂)하신 지 20년이 지났지만 스님을 생각할 때마다 이 말씀이 떠오른다. 어떻게 하면 나를 속이지 않고 바로 볼 수 있을까. 막막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말씀 한마디는 내 인생의 가슴속에 항상 자리잡고 있다.

성철 스님을 다비(茶毘)할 때 해인사 가야산 연화대에서 피어오르던 연기가 아직 잊히지 않는다. “스님! 불 들어갑니다!” 하고 거화(擧火) 의식을 거행할 때 눈물을 훔치던 제자 스님들의 모습도 잊을 수 없다. 다비의 밤이 깊어갈수록 추워서 자꾸 불길 앞으로 다가갔는데, 그 불길은 바로 성철 스님의 법체(法體)가 타는 불길이었다. ‘아, 스님께서는 당신의 육신을 태워 나를 따뜻하게 해 주시는구나’하는 생각에 그 얼마나 가슴이 뭉클했는지 모른다.

아직도 당신을 태워 나를 따뜻하게 해주신 그 온기는 남아 있고, 아름다운 다비의 불꽃 또한 꺼지지 않고 내 가슴속에서 타오르는데, 나는 아직 나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함으로써 항상 나 자신을 속이며 산다.

“자기는 원래 순금(純金)입니다. 욕심이 마음의 눈을 가려 순금을 잡철(雜鐵)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순금인 자기를 바로 봅시다.”

스님께서는 나를 순금이라고 하셨는데 나는 오늘도 잡철이 되고 만다. 내 속에 시인이라는 순금이 들어 있는데 왜 그 순금을 빛나게 하지 못하는지, 세상의 모든 순금의 언어들이 왜 나에게만 오면 그만 잡철의 언어가 되는지 그저 부끄럽기만 하다.

도대체 내 속에 있는 내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남을 사랑하다가도 미워하고, 욕심을 다 비운 척하다가도 가득 채우는 나. 잠들기 전에 용서하겠다고 결심해 놓고는 아침에 일어나서 분노의 불길에 다시 휩싸여 버리는 나. 나를 바로 보려고 노력하는 것보다는 아예 그 노력을 포기하는 게 더 낫다고 여기는 나.

사실 사람이 자기를 속이지 않고 바로 보는 눈을 갖는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사람의 눈은 판단 기준이 자기 중심적이어서 노력을 해도 자기를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갖기는 어렵다. 그러나 자기를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지니지 못하면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알지를 못한다. 자기 잘못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남을 원망한다. 남에게 잘못의 원인이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자기 향상이 도모되지 않는다. 자기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성철 스님께서는 자기를 바로 보지 못하는 사람은 “거울을 들여다보고 울면서 거울 속의 사람 보고는 웃지 않는다고 성내는 사람” “몸을 구부리고 서서 그림자를 보고 바로 서지 않는다고 욕하는 사람”이라고 하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내가 웃지 않고 거울을 들여다보는데 어찌 거울 속의 내가 웃을 수 있겠는가. 내가 바로 서 있지 않는데 어찌 내 그림자가 똑바로 서 있을 수 있겠는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이다. 나아가 자기를 바로 보고 자기를 속이지 않는 일이다. 자기를 바로 보지 않는 삶은 결국 자기를 속이게 됨으로써 자기가 존재하지 않는 삶이다. 내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나 때문에 일어나지 남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남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비 온 뒤에 꽃이 졌다고 해서 비 때문에 꽃이 진 것이 아니다. 낙화(落花)할 때가 되었기 때문에 낙화한 것이다. 해가 난 뒤에 눈사람이 녹았다고 해서 해 때문에 눈사람이 녹은 것은 아니다. 녹을 때가 되었기 때문에 녹은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비 때문에 꽃이 지고, 해 때문에 눈사람이 녹았다고 생각할까. 그것은 내가 자꾸 나를 속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모든 것을 보려고 한다. 모든 것을 보는 눈을 갈고 닦는다. 그러나 정작 모든 것을 보는 눈은 자기 자신은 보지 못한다. 좋은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보기 이전에 먼저 자기를 바로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자기를 들여다보기 싫은 부분이 있어도 그 부분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래야만 자기를 속이지 않게 되고, 나아가 자기를 용서할 수 있는 시를 쓸 수 있다.
 

오늘은 나 자신을 바로 보는 시간을 애써 가져 본다. 아무래도 내 속엔 남을 의식한 허황된 아름다움이 가득 차 있는 듯하다. 남을 의식한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이 아니고, 남을 의식한 삶은 내 삶이 아닌데도 내 눈은 늘 남을 향해 시선이 고정돼 있다.

심산유곡(深山幽谷)에 홀로 핀 꽃은 다른 꽃을 의식해서 피어난 것이 아니다. 또한 다른 꽃을 의식해서 아름다운 것도 아니다. 스스로 피어나 아름다운 것이지 누가 아름답다고 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내가 늘 남과 비교하는, 밖으로 향한 시선만을 지닌다면, 남의 눈만 의식하는 삶을 산다면 내 삶에 기쁨과 행복은 결코 있을 수 없다.

먼저 내 단점과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회피하는 마음부터 없애야 한다. 내 단점에서 비롯되는 잘못이 많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흰구름이 비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몸을 검은 먹구름으로 바꿔야 하듯이 내 단점을 인정하고 장점으로 개선해야 한다. 그러면 그 단점 또한 내 인생의 아름다움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