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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의 아동교육론
강명관(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지난번에 다산의 아동교육론을 소개한 바 있다. 다시 떠올리면 청소년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공부를 시키지 말라는 말이었다. 이번에는 이덕무(李德懋)의 아동교육에 대한 주장을 한번 들어보자. 이덕무는 알려진 바와 같이 『사소절(士小節)』이란 책을 남기고 있다. 선비들이 갖추어야 할 소소한 예의범절을 모은 것이다. 한데, 이 책에는 여성과 아이들의 예의범절도 있다. 6,7권 『부의(婦儀)』는 여성의, 8권『동규(童規)』는 아이들의 예의범절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동규』를 읽어보면 절로 웃음이 난다. 별별 시시콜콜한 것까지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마음을 가장 잡아끄는 것은 공부에 관한 언급이다.
‘싫증을 내지 않고 스스로 깨치는 아름다움’
이덕무는 참으로 의미가 있는 글이라면서 명나라 장황(章潢)이 쓴『도서편(圖書篇)』이란 책의 한 부분을 인용하는데, 그 중 일부를 들면 다음과 같다. “많은 양의 글을 가르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오직 정밀하고 익숙하게 가르치는 것이 중요한 법이다. 아이의 타고난 능력을 헤아려 2백 자를 배울 수 있는 아이에게는 단지 1백 자만 가르쳐 늘 정신과 역량에 여유가 있도록 해 주면, 싫증을 내지 않고 스스로 깨치는 아름다움이 있을 것이다. 글을 읽을 때는 마음을 오롯이 한곳에 모아 입으로는 외면서 마음으로는 그 뜻을 생각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글자와 글자, 구절과 구절의 뜻을 거듭 찬찬히 풀어나가고, 글 읽는 소리에 억양을 붙이며 자신의 마음과 뜻을 넉넉히 열어 놓게 해야 할 것이다. 이런 공부를 오래하면 올바른 도리가 몸에 충만하고, 총명이 날로 열릴 것이다.” 어린이에게 많은 양을 가르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2백 문제를 배울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아이는 그 반인 백 문제만 가르쳐서 아이가 정신과 역량에 여유를 가지게 하란다. 그러면 아이는 싫증을 내지 않고 스스로 깨닫는 아름다운 교육효과가 있을 것이란 말이다. 이렇게 어린이의 능력으로 충분히 도달할 수 있는 공부의 양을 정해 주고, 그 공부에 집중하게 하면, 올바른 도리를 깨치고 총명이 날로 열리게 된다. 아이의 역량을 넘어서는 공부를 강요하지 말라는 말이다.
이덕무는 또 자신의 경험을 든다.
“아이들에게 읽히는 글은 시간을 배정해서 횟수를 정하되, 그 시간을 넘어서도 안 되고, 더 읽어서도 덜 읽어서도 안 된다. 나는 어렸을 적에 하루도 나에게 주어진 책 읽기를 빼먹지 않았다. 아침에 4,50줄을 배워 50번을 읽었는데,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5차례로 갈라서 한 차례에 10번씩 읽었다. 몸이 아프지 않으면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다. 공부를 하는 과정은 아주 여유가 있었고, 정신은 커지고 자라났다. 그래서 그때 읽은 책은 아직도 그 대의를 기억할 정도다.” 공부하는 양과 시간을 정하고 횟수를 정해 더도 덜도 말고 정해진 것만큼만 하란다. 그런 방식으로 어릴 적 익힌 공부로 정신이 커지고 자라났으며, 나이 들어서도 그때 공부한 것을 그대로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아동교육인가? 아동학대인가?
지금 우리는 지금은 어떤가. 아이들은, 국어와 영어와 수학과 과학과 역사와 지리와 사회, 그리고 피아노와 태권도와 기타 한 없이 열거할 수 있는 무엇과 무엇과 무엇을 한꺼번에 배운다. 학교의 공부로 족한 것을, 학교가 파하고 잠들 때까지 별별 학원으로 아이들을 돌리며 괴롭힌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좋은 결과가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졸업할 때까지 오로지 공부만 했건만, 모두 전문가가 되거나 교양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런 인간이 될 뿐이다.
다산 못지않은 박학한 학자 이덕무, 섬세하기 짝이 없는 감수성을 가진 이덕무였다. 그런 이덕무도 오늘날 어린이처럼 공부하지는 않았다. 이덕무의 말을 들으면 지금 어린아이의 교육이란 ‘아동학대’란 말과 결코 다르지 않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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