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만물은 인과법칙을 따른다. 맞는 말이다. 모든 사건에는 출발점이 되는 ‘원인’이 있고, 그로 인해 ‘결과’가 생긴다. 원인만 파악할 수 있다면 미래에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예측할 수 있다. 이것이 고전물리학으로 파악 가능한 ‘기계론적 세계관’이다.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정신’과 ‘물질’이 완전히 다른 세계에 속해 있으며, 자연세계는 기계적인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했다. 이어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은 물체의 운동을 수학적으로 계산하는 방법을 확정시켰다. “자연의 모든 요소를 파악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에 불확실한 미래란 없다”고 말한 마르키 드 라플라스(Marquis de Laplace) 등 ‘뉴턴주의자’들이 18~19세기의 물리학을 지배했다. 그렇게 고전물리학은 세계 정복을 끝낸 듯했다.
스스로 움직이고 춤추는 ‘죽은’ 입자들
균열은 엉뚱한 곳에서 시작되었다. 1827년 로버트 브라운(Robert Brown)이 야생화의 꽃가루를 현미경으로 관찰하면서, 100년 후 고전물리학의 입지를 일거에 뒤엎은 사건이 출발한 것이다.
꽃가루는 생명체가 아니다. 그러나 브라운이 최신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꽃가루는 스스로 움직이고 있었다. 바싹 마른 나무의 가루, 잘게 부순 유리 가루, 심지어 스핑크스 미라에서 긁어낸 고대의 먼지들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살아 있는 듯 춤을 췄다.
물체가 움직이려면 그 ‘원인’이 되는 힘이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작은 입자들은 생명도 없고 아무 자극도 가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움직인다. 고전물리학계는 이 기이한 현상을 간단히 해결했다. 그냥 무시한 것이다.
그로부터 80년 후,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 발표한 네 편의 논문에는 특수상대성이론과 더불어 브라운 운동(Brownian Motion)을 하는 입자의 위치를 계산하는 공식이 포함되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위치를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어림짐작’하는 공식이다. 잠깐만. 입자의 모든 구성요소를 아는데도 위치를 예측할 수 없고 그저 짐작할 뿐이라고? 입자 스스로가 자유의지라도 가지고 있단 말인가?
이것이 양자역학의 출발점이다. 훗날 “신은 주사위 놀음을 할 리 없다”며 양자역학의 애매모호함에 핏대를 세웠던 아인슈타인이 장차 세계를 바꿀 사건에 불을 지핀 것이다. 이후 닐스 보어(Niels Bohr),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 데이비드 봄(David Bohm), 에르빈 슈뢰딩거(Erwin Schrodinger) 등 양자물리학자들과 기나긴 논쟁을 거치면서, 결국에는 떨떠름한 마음으로 양자역학을 인정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인과 법칙을 벗어나는 해괴한 미시세계
‘불확정성(Uncertainty)’은 양자역학의 기본 특성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고전물리학에서는 입자의 운동량과 위치는 서로 변환시킬 수 있는 연결된 값이다. 그런데 원자 주위를 도는 전자(electron)의 위치를 알아내려고 하면 문제가 달라진다. 빛의 알갱이 즉 광자(photon)가 전자와 충돌했을 때, 이 둘은 1초 후 어느 위치에 가 있게 될까?
기존에는 계산 가능한 것으로 생각했지만, 양자역학에서는 단호하게 결론을 내린다. “입자의 운동량과 위치를 동시에 알아낼 수는 없다”고. 하이젠베르크는 이를 ‘불확정성의 원리(Uncertainty Principle)’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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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시절의 하이젠베르크 | 물리량 즉 물리학적으로 측정된 값은 말 그대로 ‘측정 또는 관측’되어야 한다. 문제는 관측 행위가 대상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다. 전화기나 바위 등 거시세계의 물체들은 우리가 바라본다고 크게 영향받지 않지만, 미시세계는 다르다. 우리의 관측 행위 자체가 대상의 성질을 교란시킬 수도 있다.
물의 온도를 재려면 온도계를 꽂으면 된다. 그런데 물의 양이 한 방울도 안 되는데 온도계 크기는 팔뚝만하다면, 물이 온도계에 닿는 순간 온도계와 물 모두의 온도가 변한다. 온도계를 미리 물의 온도에 맞출 수도 없다. 아직 측정을 안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관측의 딜레마다. 값을 측정하려니 들여다봐야 하고, 들여다보려니 값이 변한다. 일반적인 머리로 생각하면 제자리에서 뱅뱅 돌기만 하고 결론이 나지 않는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전자는 입자와 파동의 성질을 ‘모두’ 갖는다. 입자였다가 파동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입자인 ‘동시에’ 파동이다. 알갱이 하나이면서 물결 전체라는 뜻이다.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리적인 모순을 몸소 실천하는 것이다.
게다가 전자는 여기서 저기로 시공간을 뛰어넘어 도약(jump)한다. 위치가 변하면 연속적인 궤적을 그리지만, 도약을 하게 되면 물리량은 이 값에서 저 값으로 급격히 변한다. 방금 전에는 여기 있던 전자가 1초 후에는 우주 반대편에 존재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불연속’이 전자의 기본 속성이다. 말 그대로 “원인도 없이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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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의 토론을 다룬 과학연극 '코펜하겐' | 문제는 우주 만물과 우리 몸이 원자로 이루어져 있고,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구분된다는 사실이다. 우리 몸은 여기 있지만, 우리 몸을 이루는 전자는 매 순간마다 도약한다. 몸의 위치는 알 수 있어도 전자의 위치는 측정할 수 없다. 우주 만물은 인과법칙을 따른다? 거시세계에서만 그렇다.
기이하고도 해괴하다. 이것이 양자의 세계다. 보어를 중심으로 한 코펜하겐 학파는 양자의 성질을 정리하여 ‘코펜하겐 해석(Copenhagen Interpretation)’으로 발표했다. 최근에는 이를 소재로 한 ‘코펜하겐’이라는 제목의 연극이 국내에 소개된 바 있다.
양자역학의 역사를 꼼꼼히 조사한 기록
<불확정성>은 이처럼 1827년의 브라운 운동 발견부터 1938년의 보어의 코펜하겐 강연에 이르는 100여년 간의 사건을 꼼꼼히 조사한 기록이다. 이 책은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어려운 용어에 얽매이지 않고 부담 없이 읽다 보면 양자역학이 어떻게 출발해서 발전해왔는지, 아인슈타인은 왜 양자역학을 싫어했는지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대중서 또는 입문서라 부를 책은 아닌 듯하다. 페이지마다 등장하는 각 이론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저자도 역자도 물리학 전공자여서일까. 일반 독자들을 위한 배려가 아쉽다. 책의 내용이 지닌 콘텐츠의 무게만큼 독자들을 살갑게 대했으면 하는 생각은 비전공자의 바람일까.
저자는 양자역학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확대 해석을 경계한다. 확실한 것만을 말해야 한다는 일부 과학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듯하다. 저자는 양자역학이 주장하는 만물의 불확정성이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면서 오해도 커졌다고 지적한다. “나무만 보면 숲을 보지 못한다”라든가 “세상은 원래 그렇게 일관성이 없다”는 식의 표현은 양자물리학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양자역학의 기본 아이디어가 이제는 생물학과 철학, 심리학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보어, 하이젠베르크, 봄 등 양자역학의 핵심인물들 본인이 수 차례의 강연을 통해 철학적 의문과 새로운 세계관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만물의 기본법칙을 발견하려는 것이 물리학의 목표라면, 그로 인해 연관 분야들이 영향받는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마지막 장까지도 애써 객관적이려는 저자의 목소리가 건조하다.
물론 여타의 대중과학서를 통해 양자 세계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만큼 <불확정성> 같은 진지한 서적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 책은 넘쳐나는 양자역학 서적이 보여주지 못하는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긴 비전공자에게 양자역학은 너무나 어려운 주제다. “양자역학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리처드 파인먼(Richard Feynman)의 농담을 위안 삼는 수밖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