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과학 실록 (11) / 세계 최초 측우기 속에 담겨 있는 태종의 눈물 (하) 2008년 06월 26일(목)
이야기과학실록 태종은 기우제를 지낸 후 비가 오면 참여한 무당이나 승려들에게 모시나 베, 쌀 등을 하사하곤 했다. 실제로 비가 오지 않다가 기우제를 지낸 후 비가 내렸다는 기록을 조선왕조실록의 여러 군데서 찾아볼 수 있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 속에는 아주 작은 물방울과 얼음 알갱이인 빙정들이 섞여 있다. 그 입자가 얼마나 작은가 하면 지름이 평균 20마이크로미터(1마이크로미터 = 100만분의 1미터)에 불과하다. 그런데 땅 위로 내리는 빗방울이 되려면 적어도 2천 마이크로미터(0.2㎝) 이상으로 커져야 한다. 즉, 구름 입자가 최소 100배 이상에서 수천 배까지 성장해야 비나 눈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습도가 아무리 높아도 순수한 수증기 입자들만 모여서는 비나 눈이 되기 매우 어렵다. 조그만 입자들을 서로 뭉치게 하는 중심 물질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구름에는 순수한 수증기만 있는 게 아니다. 바닷물에서 나온 소금 입자나 식물의 포자, 연기 등 여러 종류의 작은 먼지도 함께 섞여 있다. 이것들이 구름에서 비나 눈을 내리게 하는 구름씨 역할을 하는데, 빗방울을 형성하는 것을 응결핵, 작은 얼음 덩어리를 형성하는 것을 빙정핵이라 부른다. 기우제 때 발생하는 연기나 먼지는 바로 이 같은 응결핵의 역할을 할 수 있으므로 강수 확률을 한층 높인다. 이는 요즘의 인공강우 기술과도 똑같은 원리이다.
그 후 요오드화은이 인공강우 물질로 적당하다는 것이 밝혀져 현재 드라이아이스와 함께 가장 널리 이용되고 있다. 인공강우의 원리는 기우제와 마찬가지로 드라이아이스와 요오드화은이 구름에서 핵 역할을 하여 비를 내리게 한다. 이렇게 볼 때 제물을 태우던 기우제는 일종의 원시적인 인공강우 기술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최근에 시도된 인공강우 중에서 가장 화제가 되었던 것은 2007년 중국 랴오닝성의 사례이다. 그 해 랴오닝성은 60년 만에 찾아온 최악의 가뭄으로 봄부터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논밭이 거북 등처럼 갈라진 것은 물론이고 식수조차 얻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그 해 6월 27일 드디어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비는 바로 중국 정부에서 시도한 인공강우였다. 이때 내린 비의 양은 총 8억톤이나 되었는데, 인공 강우 사상 최대 규모로 알려져 있다. 한편 소련에서는 인공강우 기술을 이용해 흐린 날을 화창하게 바꾼 일도 있었다. 2005년 5월 제2차 세계대전 승전 60주년을 앞둔 소련은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의 군사 퍼레이드 때 세계 60여 개국의 정상들과 수많은 국제 귀빈들이 참석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행사 당일 구름이 짙게 끼어 있자 러시아 공군은 그날 새벽부터 비행기 11대를 동원해 모스크바 상공 3천~8천 미터에 걸쳐 있는 구름을 모두 제거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현재의 인공강우 기술로도 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비를 내리게 할 수는 없다. 드라이아이스와 요오드화은이 핵으로 작용할 수 있는 구름이 있어야만 인공강우가 가능하다. 또 구름 중에서도 수증기를 듬뿍 함유하고 있고, 비를 형성시킬 수 있는 적당한 조건의 구름이어야만 한다. 앞으로 전자기장을 이용해 구름이 없어도 비를 내리게 하는 기술이 개발된다고 하지만, 언제 그 기술이 실용화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이미 옛날에 100%의 확률로 비를 내리게 하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있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주술사였던 '레인 메이커(rain maker)'가 바로 그들이다.
조선시대에도 이처럼 특출한 능력을 지닌 레인 메이커가 있었다. 바로 가뭄에 가장 민감했던 태종 때의 문가학(文可學)이란 이였다. 1402년(태종 2년) 7월 9일 문가학은 예문관 직제학 정이오(鄭以吾)의 추천으로 태종 앞에 불려갔다. 승려와 무당, 맹인까지 동원해 기우제를 올려도 비가 오지 않아 답답해하던 태종 앞에서 문가학은 사흘 내에 비를 내리게 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기한이 되어도 비가 오지 않자 태종은 문가학에게 다시 한 번 빌어보라고 부탁한다. 문가학은 역마를 타고 급히 불려오느라 자신의 정성이 부족했던 것 같다며 송림사에서 다시 비를 빌었다. 그리고 다음날 태종에게 가서 “오늘 해시(亥時 : 밤 9시에서 11시 사이)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내일에는 큰 비가 내릴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정말 그의 예언대로 해시가 되자 비가 내렸고 그 다음날에도 비가 내렸다. 그 후 문가학은 1403년부터 1405년까지 매년 가뭄이 들 때마다 기우제를 지내게 되었다. 1406년 11월에도 문가학은 대궐로 불려왔다. 하지만 그때는 비를 내리게 하는 도술가가 아니라 요언을 퍼뜨려서 모반을 꾀한 죄인의 신분이 되어 있었다. 문가학은 “이제 불법은 쇠잔하고 천문이 여러 번 변하였소. 나는 귀신을 부릴 수 있고 천병(天兵)과 신병(神兵)도 부리기 어렵지 아니하오. 만일 인병(人兵)을 얻는다면 큰일을 거사할 수 있소.”라는 말로 몇몇 전직 관리들을 꼬드겨 난을 일으키려다 발각된 것이다. 이에 태종은 “내 문가학을 미친놈이라 여긴다. 천병과 신병을 제가 부를 수 있다 하니 미친놈의 말이 아니겠는가.”라며 어이없어 한다. 결국 국문 끝에 문가학은 동조자 5명과 함께 수레에 의해 몸이 두 갈래로 찢어져 죽는 환형에 처해졌고, 그의 젖먹이 아들도 교수형을 받았다. 기우제에 대한 태종의 집착이 낳은 어처구니없는 모반 사건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세종은 기우제에만 매달리기보다는 가뭄에 잘 대비하기 위한 방편을 찾았다. 그 방편이란 가뭄의 정도를 보다 잘 파악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바로 세계 최초의 측우기와 과학적인 하천 수위계인 수표의 탄생이었다. 1441년(세종 23년) 8월 호조에서는 비의 양을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는 측우기와 하천 빗물의 수위를 측정할 수 있는 수표의 설치를 세종에게 건의했다. 이에 따라 1442년 5월 높이 약 32㎝ 지름 약 15㎝의 측우기가 서운관에 설치되었다. 그것은 1635년 발명된 유럽 최초의 우량계인 카르텔리보다 무려 198년이나 앞서는 세계 최초의 정량적 우량계였다. 또 청계천 마전교(훗날 수표교로 불림)에는 측정 단위가 2㎜ 정도인 매우 정교한 수표가 설치되었다. 측우기와 수표라는 세종의 과학적 업적을 탄생시킨 일등공신은 바로 가뭄 때마다 흘린 태종의 후회어린 눈물이었던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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