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곰 숭배 전통은 훙산문화를 이은 소하연문화(小河沿文化·BC 3000~BC 2500년) 유적에서도 확인된다. 내몽고 오한기(敖漢旗) 백기랑영자(白斯郞營子) 유적에서 발견된 ‘곰머리 채도(熊首彩陶)’가 대표적이다. 또 하나의 예는 츠펑현에서 수집된 곰머리형 채도단지인데, 몸체엔 곰머리와 툭 튀어나온 주둥이 형상이 붙어있다. 이 모두 곰의 특징이며, 곰 모양의 제기(熊尊)라 불린다. 현재 웅룡(熊龍)은 훙산문화 옥기 가운데 가장 많은데 한 20여건이나 보고된다. 웅룡은 말굽형 베개, 구름형 옥패, 방원형 옥벽(玉璧) 등과 함께 훙산문화 옥기의 4대 유형 중 하나로 꼽힌다는 설명이다. 웅룡은 우하량뿐 아니라 오한기, 시마무렌 강 이북의 파림우기(巴林右旗)와 파림좌기(巴林左旗), 하북성(河北省)의 위장(圍場)현 등 폭넓은 지역에서 확인되고 있다. 또한 양저(良渚)문화 옥기에서 보이는 신인(神人)의 발톱도 곰의 발톱으로 밝혀졌다. 특히 죽은 자의 가슴팍에 놓이는 옥기는 가장 등급이 높은데 우하량 제2지점 1호총에서 옥룡이 가슴에서 보인다. 이것은 옥룡이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일종의 신물(神物)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동이족으로 인식되는 상나라에도 홍산문화 옥조각 웅룡의 전통은 당연히 이어졌다. 상나라 유적인 안양(安陽) 은허(殷墟)에서도 홍산문화와 유사한 결상이식이 확인된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곽대순은 다음과 같이 우하량 지역을 포함한 광대한 지역에서 곰 형상이 발견되는 이유를 설명한다. “홍산인이 숭배한 동물신은 여러 신(神) 가운데 으뜸인 주신(主神)이었을 것이고, 홍산인은 바로 곰을 숭배한 족속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중국학자 이실(李實)의 설명이다. 그는 홍산문화 영역에서 확인되는 곰의 흔적을 근거로 홍산인들은 곰을 숭배했고, (중국인의 조상인) 황제(黃帝)는 중국 고대사에 기록된 ‘유웅씨(有熊氏)’라는 것이다. 이실의 주장은 중국학자들을 강타해 홍산문화의 곰을 황제와 본격적으로 연결시키기 시작했다. 만리장성 이북, 즉 오랑캐의 소굴이라고 치부하던 곳에서 곰의 흔적이 쏟아지니 중국학계가 이를 인정하되 황제와 연계시키는 것이다. ‘황제가 곰(熊)족’이라는 기록은 사실 궁색하기 이를 때 없지만 그들이 갑자기 내세울 수 있는 근거는 사마천의 『사기』이다. 『사기』에 ‘황제를 유웅씨라 불렀다(又號有熊氏)’는 기록이 있고, 서진(西晋· 기원전265~316년) 때 학자 황보밀이 쓴 제왕세기(帝王世紀)에도 ‘황제는 유웅이다(黃帝爲有熊)’라고 표현돼 있다. 근래 중국인들의 새롭게 변하고 있는 시각이 어떻든 곰 숭배가 동북아시아의 종족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신앙이라는 것을 부연할 필요는 없다. 특히 그 중에서도 대표격인 나라가 바로 고조선이다. 『삼국유사』에 적혀 있은 환웅과 웅녀의 이야기를 보면 더욱 그렇다. 근래 중국이 그동안 주창하던 역사관을 버리면서까지 ‘황제=곰 숭배=홍산문화의 주인공’이라 단정하려는 것은 그만큼 홍산문화의 중요성을 의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바로 한국과 마찰을 빚고 있는 소위 동북공정은 물론 ‘서북 서남공정’의 실체이다. 간단하게 말해 현재 중국의 영토 내에서 일어난 역사는 모두 중국의 역사라는 것이다. <중국 문명의 서곡은 우하량에서 열렸다> 현재 중국은 우하량 홍산문화 유적지를 중국 상고시대의 사회발전사, 전통문화사, 사상사, 종교사, 건축가, 미술사의 연구 대상으로 삼고 화하족의 조상을 제사지냈던 성지로 간주하면서 동방문명의 빛이라고 자랑한다.
또한 앞에서 설명한 우하량 홍산문화 지역에서 제단, 돌무덤은 물론 신석기시대로 간주되는 빗살무늬토기, 청동시대의 비파형동검 등이 발견됐다는 것을 볼 때 이들 문화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게 한다. 더구나 이지역의 토템이 곰이라는 것은 한민족에게 많은 것을 연상케 한다. 이와 같은 발굴 결과는 중국학자들을 놀라게 했고 결국 중국대륙의 앙소-용산문화와 전혀 다른, 요령지역의 홍산문화 전승자는 만주대륙-한반도-일본열도 전체를 포괄하는 ‘빗살무늬-민무늬 토기, 비파형 동검’ 등을 공유하는 공동체라는 것을 인정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이곳에서 ‘중국문명’이란 ‘황하문명’을 의미한다. 홍산문화가 중국이 견지했던 중국문화와 전혀 다른 동이족의 문화이며 연대도 앞선 것이 분명해지자 중국의 태도는 돌변한다. 과거에 동이 즉 북방 민족의 유산을 부정하던 인식에서 탈피해 이들 문화를 중국문화의 틀 안에 수용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주변국과 마찰을 빚고 있는 동북공정의 실체라는 것을 앞에서 설명했다. 종래 ‘중국의 전통 사학가들은 황하 유역을 중국 문명의 요람으로 봤지만 근래 홍산문화에서 발견되는 유물과 유적으로 중국 문명의 중심지가 결코 한 곳이 아님을 강조하는 계기가 됐으며, 이른바 중화문화(中華文化)의 다원화(多元化)로 요하문명론(遼河文明論)을 대두시켰다. 또한 우하량유적에서 발견된 옥기(玉器)와 제단(祭壇)이 그 후의 왕실건축(王室建築)의 기원이 됐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중국은 요하문명이 중화문명의 한 부분으로 기능하면서 접목돼간다는 주장했다. 즉 홍산문화는 앙소문화 계통의 원시문화로서 결국은 앙소문화의 변형체로서 중국문화발생의 한 근원이 되기 때문에 요하유역은 중국문명발상지의 하나가 된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홍산문화는 황하문명과는 특징이 다르지만, 중국의 역사 속에 편입해 중화문화의 일부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학계가 문명의 서곡을 연 주체는 동이족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서도 요하문명이 통일적 다민족국가를 형성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한 중화문명의 일부임을 천명한다. 중국이 요하문명으로 ‘전설상의 5제시대’를 역사시대로 끌어올리고 있지만 이지역은 고조선과 고구려, 부여 등 우리 민족은 물론 선비, 거란, 말갈 등 서로 피를 나눴거나 이웃으로 지냈던 이른바 동이족이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무대였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특히 그 무대는 요하 유역뿐 아니라 중국의 하북성, 요령성, 내몽고(內蒙古)자치주, 길림성, 흑룡강성은 물론 중국의 산동반도, 그리고 한반도까지를 포함한다. 이형구 교수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지중해 문명이 서양문명의 자양분을 공급했듯, 동이족이 발해연안에서 여명을 연 문명은 중국문명은 물론 요동과 만주, 한반도, 일본의 문명을 일궈내는 젖줄이었다.’ <신비의 왕국 이제 시작이다> 중국이 그동안 얻은 고고학적 성과를 토대로 신화가 아닌 실존했던 고대국가 문명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한국 학자들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변화를 갖고 오게 했다. 이를 역으로 설명하면 홍산 문화 지역에서 동이족의 국가 즉 ‘신비의 왕국’이 존재했다는 것을 중국학자들이 증명해 준 것이다. 즉 중국이 주장하는 ‘중화5천년’이야말로 바로 한민족의 역사가 5천 년 전으로 올라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학계에서는 적석총과 석관묘의 진원을 시베리아로 보지만 홍산문화지역에서는 이보다 2000년 앞서 같은 유물이 나왔다. 이는 우리 문화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묘제를 같이 썼다는 것은 문화 및 인류의 동질성까지 유추할 수 있다.’ 라는 이형구의 언급은 우리나라의 역사도 시베리아와 같은 북방계기원설 외에도 발해연안설(渤海沿岸說)로 설명된다. 이는 한국문화의 시원도 북방시베리아설, 요하발해연안설, 그리고 남방기원설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고고학계의 한창균과 윤내현 이후 복기대도 홍산문화의 주인공은 조선민족 좀 더 구체적으로는 예맥족 문화라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홍산문화로 대표되는 요하지역의 선대문화가 고조선 문화와 연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그동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단군조선의 실체여부를 확실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특히 이들 한국 고대문화의 기원문제는 물론, 요하문명론에 대응할 수 있는 근거도 된다. 소하서문화, 흥륭와문화 등을 필두로 중국의 중원이나 장강지역보다 앞선 신석기문화는 요하 일대에서 지금도 계속 발견되고 있다. 중국이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을 펼치면서 요하문명을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를 제치고 1만 년의 역사를 지닌 세계 최고의 문명으로 정립하고 있지만 이들 주도 세력은 황하문명을 이끈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다. 요서, 요동을 포함한 만주-한반도를 이어 일본으로까지 이어지는 문화권은 세계적으로 신석기 문화권을 대표하는 (1) 거석문화권, (2) 채도문화권, (3) 빗살무늬문화권이 수용되고 융합되는 유일한 지역이다. 이것은 채도문화권만을 수용한 중원 지역과는 처음부터 이질적인 문명권임을 알 수 있다. 물론 기원전 4000년경에는 중원 앙소문화의 채도문화권도 요서지역과 교류를 하지만 그전에 이미 요서지역에는 독자적인 문명권이 형성돼 있었다. 예맥계의 우리 민족은 이런 문화를 바탕으로 기원전 3천 년 경에 이미 국가(신비의 왕국)를 형성해 중원문화에 영향을 주면서 독자적인 문화를 가꾸었고 한반도를 거쳐 일본까지 연결되는 역할을 했다. 중국에서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토대로 요하문명론을 개발해 자신들의 역사를 확장하는데 주력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한반도의 역사만을 수용하는데 급급해 우리의 역사를 도외시하는 우를 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국과 한국의 시원문화로서 요하 일대에서 발달된 독자적인 문명권이 있었으며 그것도 단군조선보다 거의 1천 년 전에 ‘신비의 왕국’ 또는 ‘여왕국’이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요하일대에 살았던 사람들 일부가 중국의 선조가 됐을 개연성도 마냥 부정만 할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 주도 세력의 일부가 예맥의 선조들이며 그 주맥이 4700년 전의 치우, 기원전 2,333년의 단군조선으로 이어져 꽃을 피웠다는 것이 결코 상상의 일만은 아니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이는 현대의 민족이라는 개념에만 천착하지 않더라도 당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한민족의 선조라는 것에 의문을 제기할 필요는 없다는 지적이다. 여하튼 한민족의 고향으로도 알려진 홍산문화에 대한 보다 많은 연구가 우리들의 고대사를 다시 정립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끝) 참고문헌 「홍산문화의 사회적 성질」, 우건설, 2회동북아평화정착을 위한 한중 국제학술회의, 국학학술원, 2007 王巍 외, '손에 잡히는 중국 역사의 수수께끼', 대산인문과학총서(4), 2001, 244~261쪽. 朝陽市旅游局, '朝陽之旅', 中國旅遊出版社, 2005, 32~34쪽. 이기환, '코리안루트를 찾아서(12) 홍산 곰의 정체', 경향신문, 2007.12.22 신형식, '中國의 東北工程의 虛實', '白山學報' 67, 2003. 5쪽. 費孝通, '中華民族的文多元一?局面', '北京大學學報', 1989-4. 田廣林, '中國東北西遼河地區的文明起源', 중화서국, 2004. 이형구, '발해연안에서 찾은 한국고대문화의 비밀', 김영사, 2004, 95~102쪽. 안영배, '중 랴오시 고조선 근거지로 추정', 주간동아, 2003.1.23. 한창균, '고조선의 성립배경과 발전단계시론', 국사관논총33, 국편위, 1992. 22쪽. 윤내현, '고조선연구' 일지사, 1994. 751쪽. 복기대, '중국요서지역 청동기시대 문화의 역사적 이해' '단군학연구' 5, 2001. '상상의 공동체', 베네딕트 앤더슨, 나남출판, 2003 '제국 그 사이의 한국', 앙드레 슈미드, 휴머니스트, 2007 |
![]() |
'정책 > 영재교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야채들의변신 (0) | 2008.02.10 |
---|---|
파란 눈의 조상은 단 한 사람 (0) | 2008.02.05 |
이명박, 경기도교육청 그리고 글로벌 영재 (0) | 2008.02.02 |
무엇이 천재를 둔재로 만드는가 (0) | 2008.02.01 |
NASA 항공연구 부문 최고 책임자 신재원 박사 (0) | 2008.0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