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촌구석이었다. 휴대전화에 수시로 ‘통화권 이탈’이 찍혀 나오는 곳이다. 지나다니는 차도 몇 안 됐다. W 교수를 찾아간 건 그가 직접 설계를 해서 자기 손으로 집을 지었다는 소문을 들어서였다. W 교수는 작업 점퍼, 부인은 위아래 운동복 차림이었다. 강아지가 꼬리를 치다가 배까지 뒤집었다. 발 아래는 계곡이었다. 마당엔 뱀이 왔다 갔다 한다고 했다. 집 한쪽으론 나무 숲이었다. 도회지에선 몇십억원을 써도 가질 수 없는 숲이다.
집은 2층인데 목재와 황토로 지었다. 지붕엔 초가와 너와를 얹었다. 거실 벽은 통유리였는데 유리 너머가 숲이었다. 교수 부인은 “서울 갔다가 돌아오면 나무들이 ‘어디 갔다 왔어?’ 하는 것 같다”고 했다.
W 교수가 대학노트 세 권을 꺼냈다. 어느 기둥은 어떤 굵기의 몇자짜리를 써서 어디에 끼운다는 것까지 적혀 있었다. 문짝과 창문 도면엔 깨알 같은 숫자가 달려 있었다. 집 짓는 일과 전혀 상관없는 전공을 한 그였지만 머릿속으로 수십 번 집을 지었다 부쉈다 했을 것이다.
W 교수는 몇년 전 건강을 크게 잃었다. 정년이 4년 남았지만 건강이 더 중요했다. 서울대 교수직을 던지고 시골로 가기로 했다. 돈이 모자랐다. 내 손으로 지으면 덜 들지 않겠나 싶었다. 춘천·영월·구례로 누비면서 남이 지은 집에서 자보기도 했고 인터넷도 어지간히 뒤졌다. 무슨 나무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는 목재상에 발품을 팔아 배웠다. 포클레인 움직이는 법도 배워 땅도 자기가 직접 팠다. 고용한 목수 도움을 받으면서 그때그때 인부들을 사서 썼다. 1년을 준비하고 짓는 데 또 1년 걸렸다.
W 교수는 “얻어온 설계도면을 시공업자에게 맡기고 나중에 열쇠나 건네받고 싶진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집짓기 학교도 다녔고 황토 벽돌도 찍었다. 일정이 착착 맞아떨어지지 않아 자재 낭비, 인력 낭비를 겪을 땐 가슴이 타들어 갔다. 그래도 평생 가본 일 없는 길을 가는 것 아닌가. 행복이 별건가. 마음껏 꿈을 그릴 수 있는 자기 화폭을 가진 게 행복이었다. 무엇보다 건강이 회복됐다. 얼굴에서 병약의 자취는 사라졌다.
그런데 그와의 대화 말미에 정말 예상 밖 얘기를 들었다. 집을 부동산에 내놨다는 것이다. 그렇게 지은 집을 포기한다니, 한참을 머리가 띵했다. 동네 사람들과 친화를 못 하겠더라는 것이다. 도시 사람에 대한 거부를 극복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았다. 부인은 “너무 큰 마음고생을 겪었다”고 했다.
서울 와서 W 교수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요리사를 하던 H씨는 시골에 집 짓고 들어가 농사 지은 지 3년이 됐다.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려 무진 애를 썼다고 한다. 허리 휜 할아버지댁 형광등도 갈아드리고, 비 새는 생활보호대상자 할머니네 지붕도 대신 관청에 사정해 무상 수리를 받도록 했다. 이웃들 농사일도 시간 나는 대로 거들었다. 그래도 마을 사람들 닫힌 마음의 문은 꿈쩍 안 했다. 뼈저린 일을 많이 겪었다. 견디다 못해 인권위원회, 농림부, 고충처리위원회에 하소연도 해봤다.
도시 사람이 어느 날 들어와 살면 시골 사람들이 거리감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텃세도 있는 법이다. 서로 신뢰를 쌓을 책임은 우선은 도시에서 간 사람에게 있다. 마을 일을 열심히 돕고 고개도 숙여야 한다. 그렇지만 시골도 자기들한테 온 도시 사람한테 마음을 열어야 한다. 앞으로 농촌엔 귀농자가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시골엔 아기 울음이 끊겼다. 도시에서 간 사람들이 시골을 지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 도시 사람이 성공적으로 정착해야 농촌에 활기가 돋고 경제적 기회도 생기는 것이다.
한삼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