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어떤 모임에서 ‘사무실 전쟁’이 화제였다. 우리 사회에서 가방 끈이 제일 긴 사람들이 다니는 직장에서 새 건물로 이사를 가게 돼, 누가 어떤 사무실을 차지할지 정하다가 싸움이 났다고 한다. 멱살잡이 직전까지 갔다는 말을 듣고 다들 “그렇게 많이 배웠다는 사람들이?”라고 놀라워했다.
얼마 후 얀 마텔의 소설 ‘파이 이야기’를 읽다가 그 사무실 전쟁이 떠올라서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이 책은 몇 년 전 한창 화제였는데, 나는 요즘에야 겨우 읽었다.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던 아버지 덕에 어린 시절부터 동물의 생리를 잘 알던 주인공 파이의 이야기다.
이 책은 나의 편견 하나를 깨주었다. 내 친구는 우리에 갇힌 동물을 보면 우울해서 동물원이 싫다고 했다. 그 후론 나도 왠지 동물원에 가는 일이 꺼려졌다. 그런데 파이는 다른 이야기를 해주었다.
동물원의 비좁은 우리 속에 있는 사자를 보면, 우리는 “넓은 초원에서 자유롭게 살다가 저렇게 좁은 데 갇혔으니 얼마나 갑갑할까”라고 동정한다. 그런데 사자 입장에선 그렇지도 않다고 한다.
야생생활은 혹독하다. 적을 피하고 먹고 마실 것을 얻는 기본 의무를 완수하는 것조차 목숨을 건 힘겨운 투쟁이다. 동물들이 몇 킬로미터를 뛰어다니며 사냥하는 건, 가까운 곳에 먹을 것이 부족해서일 뿐 드넓은 곳에서 거침없이 돌아다니고 싶어서가 아니다. 가만히 있어도 일주일 내내 먹이가 주어진다면, 사자는 좁은 데 갇혔다고 괴로워하기는커녕 동물원 우리의 주인이 된 기분으로 살아간다고 한다. 야생의 사자가 차지하는 영역이 넓은 것은 사자의 ‘취향’ 때문이 아니라 ‘필요’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동물에 대해 썼지만, 나는 “이건 너무나 우리 인간들 이야기로군”이라고 감탄하며 읽어 내려갔다. 예를 들면 ‘텃세’. 텃세야말로 동물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열쇠다. 사자가 동물원의 사자우리에 굴러 떨어진 사람을 물어뜯는 것은 허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영역을 침범 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그간 경험한 각종 텃세는 바로 이런 동물적 분노와 두려움 때문이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됐다. 사람이 나빠서 또는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서열’이 동물이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동물들은 서열이 정해지지 않으면, 마치 무정부 상태에 사는 것처럼 불안해 한다고 한다. 동물의 세계에서 서열은 언제 먹을 수 있는지, 어디서 쉴 수 있는지, 누구와 연대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지표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위 아래, 좌우로 나누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것도 결국 이 때문인가?
서커스 조련사들의 경험으로 보면, 사회적으로 열등한 동물이 주인과 사귀기 위해 가장 끈질기게 노력한다고 한다. 주인의 신뢰를 얻어 보호 받으며, 다른 동물들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킨다는 것이다.
동물은 또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뭔가로부터’ 달아난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어딘가로 확 떠나버리고 싶을 때 마음은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를 벗어나고 싶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가장 마음을 찡하게 울렸던 부분은 “생명이 있는 것은 아무리 작아도 방어를 한다”는 이야기였다. 작고 약하고 무능해 보이는 동물도 생존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투쟁한다는 것이다.
사람도 동물이다. 사람 속에 숨어 있는 동물적 본능이나 기질을 읽어내는 것이 때로는 사람을 더 쉽게 이해하는 방법이다. 사무실 전쟁을 벌인 그 많이 배우신 분들도 알고 보면 더 풍요롭고 안락한 자기영역을 갖기 위해 그렇게 치열하게 싸웠다는 얘기다.
강인선 조선일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