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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맨체스터 한인교회 신대현목사 설교)

히브리서 10:19-25

우리

                                                       신대현 목사[2002/2/24] 

만체스터한인교회 주일설교

 

'형제들아'!(19절). 형제는 같은 부모에게서 나온 자들이다. 혈육의 개념으로 보면 그렇다. 조금 더 범위를 넓히자면 사촌도 형제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촌형도 '형'이라 부르고 사촌누나도 그냥 '누나'라고 부른다. 또 윗대로 올라가면 한 족보에 속한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선 다 형제라고 여길 수 있을 게다. 사람의 아는 대로 따졌을 때 나온 결론이 이러하단 얘기이다. 누가복음 3:23에는 사람의 아는 대로 따져서 예수님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끝에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본다: '사람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눅 3:23, 38) 하기야 이성이 계시를 압도한 계몽주의 이전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원을 어렵지 않게 하나님에게서 찾았다. 불과 지난 이 삼백 년의 시기에 사람의 족보에 혼란이 생겼고, 그나마 지난 100년 세월의 세상만이 사람의 아는 대로 자기 기원을 찾을 때에 '원숭이'와 '단세포'로 향했을 뿐이다. 다른 것에서는 근원을 찾을 망정 하나님께로는 죽어도 향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그 완고함이 사람들의 형제됨을 잊게 했고 금 가게 만든 것이다. 이 땅에 어느 누가 스스로 난 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스스로 난 자가 없고 모두 다 나아진 자들이면 결국 모든 사람은 한 태에서 태어난 자들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하나님께로서 나왔으면 다 '형제'인가? 뭔가 답을 생각해 보려고 우물쭈물 할 때, 성경은 주저치 않고 단호히 아니라고 답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님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자들이 있다니 말이다. 요한복음 8:44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이렇다는 것은 사람의 족보를 '사람의 아는 대로'만 따져 올라갈 일이 아니란 얘기이다. 하나님께로 향하는 족보를 육신으로 이어갈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담 사람들의 아는 범위 밖에 무엇이 있었기에 하나님이 아비가 아닌 자가 있는 것인가? 그 범위 밖의 일은 무엇이었으며, 그렇게 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예수님이 말씀해 주시는 '형제'의 정의를 먼저 보자. 요한복음 8:47에 주님은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는 것'이 하나님이 아비가 아닌 것을 증거해 주며, 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과 형제 관계도 아닌 것을 말해 준다는 뜻이다. 그 사건이 일어났던 처음 현장으로 가보자. 모든 어미들의 첫 어미인 하와가 아담의 첫 아들인 가인을 나을 때, 그녀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기뻐 말한다(창 4:1). 하와는 가인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나온 아들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 관계로서의 하나님과 가인의 관계는 비극적인 일로 인하여 깨져버린다. 그것은 용서하고 용서 받을 사건이 아니었다. 그 사건은 바로 '살인'이다. 아비와 아들 간에 생겨난 일은 언제나 아비의 품이 아들의 저지른 일을 포용하면서 끝을 맺는 게 인지상정(人之常情)이지만, 형제 살인은 아비의 포용할 품을 아예 찢어 갈기는 일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살인을 경고할 때에만 극단적인 말씀을 하셨다: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 5:26). 이 살인은 비단 '피를 흘려 죽이는 일'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예수님의 살인의 정의에는 형제를 대하여 노하고 욕하고 업신여기는 일이 포함된다. 그러면 이 살인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는 어떤 관계이길래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 하나님이 아비가 아닌 것을 증거해 준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는가?

가인의 살인을 보면 그 발단은 마음에 일어난 분노에 대해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결과였다(창 4:7). 더욱이 가인은 '여호와 앞을 떠나 나가' 자기의 마음이 내키는 땅으로 향하여 그곳에서 '육신의' 자손을 낳아 살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사는 삶까지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하나님 대신 인간의 본능을 거머쥐고 있는 마귀를 아비로 따르며 사람을 오직 경계해야 할 대상, 죽여야 할 대상으로 보게 되었다(창 4:14, 23). '형제들의 세상'이 '개인들의 세상'으로 바뀌어 버린 사건의 발단이 여기에 있다. 그나마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양심이 있어서 최소한의 질서가 유지되고 있고, 또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세들이 있어서 그들의 사회가 지속될 뿐이지 언제라도 기회가 생기면 뛰쳐 나가 질서를 넘어서고 남을 짓밟을 수 있는 게 사람의 세상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행복은 얼마나 큰 것인지!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원래 창조의 세상인 '형제들의 세상'을 다시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비를 알게 된 후 아버지의 세상에서 아들 된 자가 첫번 째 발견하는 '현실'이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다음으로 형제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 다음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형제'가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가장 가깝게 있는 가족을 볼 때에도 그냥 '자식과 아내, 남편'이 아니라 형제로서의 '자식, 아내, 남편'이며, 교회 안에 믿는 자들을 볼 때에도 그냥 성도가 아니라 '형제로서의 성도'이다. 형제 없는 그리스도인은 없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그 말씀을 받는 대상을 '복수형'으로 언급하고 있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역사 가운데 아주 특별한 개인을 언급할 때에나 '단수형'으로 임할까, 그렇지 않은 경우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그 대상을 단수로 가지지 않는다. 심지어 말씀의 대상이 단수형인 경우에도 그 '단수형'은 복수를 대표하거나 복수에게 임할 메시지의 통로일 뿐이지, 그 개인에게 임하고 그 개인에게 끝나는 허무한 말씀은 성경 안에 어디에도 없다. 오늘 본문만 보아도 쉽게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형제들아', '우리가'(19절), '우리를'(20절), '우리가'(22절), '우리'(23절), '서로'(24절), '나아가자, 격려하자, 그리하자(let us...)'(23-25절).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그 근본 주제에 형제애를 담고 있다. 그래서 어떤 말씀이라도 그 적용에는 '형제애'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그리스도인은 그 말씀을 '우리'로 받아야 한다. 이는 선택이 아니라 본질이다. 

오늘 본문은 그러한 형제 된 '우리'가 해야 할 여러 일들을 말해 준다. 그냥 세부적인 사항의 일이 아니라 '우리'로서 해야 하는 근본적인 큰 틀을 말해주고 있다.

1. '우리'로서 해야 할 첫번째 일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19-22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만나 주셨기에 하나님께로 반응하며 나아가는 것은 그리스도인 됨의 첫 출발이나, 그 뿌리에 있어서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는지를 아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그래야 '왜' 나아가야 하는 지의 이유까지 흔들리지 않고 지켜갈 수 있는 것이다. 19절의 말씀은 '우리가 담력을 얻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우선 말씀한다. 성경에서 '담력'은 '자유'와 같은 개념으로 쓰인다. '담력을 얻었다'는 것은 '자유를 얻었다'는 말인데, 그것도 하나님을 향할 수 있는 담력을 얻었다는 것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자유를 뜻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모든 판단을 벗어나고, 심지어 사람을 궁극적으로 판단하실 심판주인 하나님을 향해서까지 자유할 수 있는 것은 인간 지고(至高)의 자유이며, 이 땅이나 어떤 사람에게도 매이지 않을 수 있는 축복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새롭게 시작된 제 2의 인생 출발이다. 하나님을 만난 자는 '~으로부터의 자유'만이 아니라 '~을 향한 자유'를 발견했기에 필연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그 자유가 스스로 선포하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 그 자유로 나아가느냐는 여전히 더 충분한 설명이 필요하고, 19-22절은 그 필요를 채워준다. 

'어떻게'의 근본에는 '예수의 피'가 있다(19절).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갈 담력을 얻게 되었다. 그 피는 어떤 피인가. 히브리서 12:24는 그 피를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피'라고 소개한다. 아벨의 피는 하나님께 자신의 신원(伸寃)을 말하는 피였지만(창 4:10), 예수의 피는 자기를 죽인 자들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그들을 사랑해 달라고 아비에게 호소하는 피이다. 아벨이 의인이었서도 그 피는 자신의 신원에 그쳤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으로 여겨져 죽임을 당했어도 자신의 신원을 위하지 않고 자기 형제들을 향한 아비의 사랑을 하나님께 호소한 것이다. 그리고 그 피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흘린 피였다(행 20:28). 사단은 끊임없이 '저것도 자식이냐'라고 고소하며 조롱했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피를 흘려 보이며 그 고소자에게 말씀하시길 '그래, 그게 내 자식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그 피는 자식을 되찾는 아비의 피였다. 

이 예수의 피 흘려진 사건은 철학이 아니다. 다른 철학이나 종교나 세상 가르침이 얘기하는 식의 '도(道)'가 아니다. 하나님이 보이신 '그 길'은 '예수의 육체'였다. 하나님의 도(道)는 역사적인 실체인 것이다. 사랑은 철학으로 하는 게 아니며,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 보여준 모든 것이다. 그분의 출생, 생애,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 아니, 이미 그 출생이 있기 전부터 있어온 하나님의 예비하심까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이신 '그 길'이었다. 또한 '그 길'은 현실로 눈 앞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모습은 오늘도 우리의 양심과 몸에 당신의 피를 뿌려주시는 실체로 나타나시기 때문이다(22절). 그 분의 대제사장 직분은 계속되고 있다. 하나님의 집인 '우리' 곧 하나님의 성전된 우리가 있는 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멈춰지지 않을 것이다(21절). 

이렇듯 우리는 '우리'로서 하나님께 나아가되, 모든 판단을 벗고 심판주 하나님을 향해 자유한 자로서 담대히 나아가며, 예수님의 형제 사랑을 호소하는 피를 힘입어 아비 된 하나님께 나아가며, 실체로서 우리 앞에 보여진 예수 그리스도의 삶으로 열린 '그 길'을 따라 하나님께 나아가며, 오늘도 진리의 말씀과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 양심에 찾아오시어 우리의 마음으로 참 마음이 되게 하시고 우리의 삶을 정결한 곳으로 인도하시는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마음을 열고 의지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2. '우리'로서 해야 할 두 번째 일은 하나님의 인격을 믿고 우리가 고백한 소망을 놓지 않는 것이다.

기독교의 뿌리에는 하나님의 인격이 있다: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23절). 부부됨의 확인이 결혼증서를 들여다보는 데에 있지 않듯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다른 무엇으로가 아니라 서로의 인격이 맺어준 관계이다. 하나님으로부터 그 인격에 근거한 약속을 받은 것 이상 우리가 그 분께 무엇을 더 요구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인격보다 다른 조건들을 제시하길 원한다. 확연한 진로를 보여 주시던지, 기도한 즉시 일이 풀리기를 바란다든지... 도무지 하나님의 인격을 걸고 하신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 들지 않는 게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뿌리에는 하나님의 인격으로 보장하신 말씀이 있다. 그 말씀을 잃으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는다. 우리가 '우리'일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생각인 말씀이 우리의 생각을 공통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아비를 향해 한 마음일 수 없는 자들이 어찌 서로를 바라보며 형제임을 확인할 수 있겠는가. 형제인 자들은 동일하게 아버지를 사랑함이 그 안에 있고, 아버지를 바라보며 소망함이 동일한 자들이며, 그 아버지의 사랑이 모든 형제에게 흘러 내리고 있기 때문에 또한 서로를 더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커오면서 형제간에 치고 박고 지내왔어도 원수가 되지 않고 오히려 한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부모의 사랑이 서로를 묶어 주었기 때문이었듯이 그리스도인 형제들 간에 조금의 불화와 시끄러운 소리가 날지라도 오히려 성숙해 가면서 서로를 용납함에서 자랄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형제들을 한 울타리에서 보호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니 어찌 아버지의 인격이 아닌 무엇으로 우리의 자아됨과 우리됨을 생각할 것이며, 어찌 각자 딴 생각으로 살 수 있겠는가. 형제들은 소망을 나눌 수 있는 자들이고, 궁극적으로는 아버지의 인격과 생각 안에서 하나 될 수 있는 자들이지 않는가.

3. '우리'로서 해야 할 세 번째 일은 서로를 향해 격려하고 서로 모이는 것이다.

격려와 모임은 좋은 것이니까 해야 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진리를 잃지 않는 절대적인 요구이다. 그것은 형제들 간에 '사랑'을 잃지 않게 하시려는 아버지 하나님의 강한 요구인 것이다. 24절과 25절은 서로 떨어질 수 없다. 곧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함이 있는 곳에는 항상 더욱 모이는 일이 수반되어야 한다. 교제의 포기는 형제애의 포기이며, 진리의 포기이다. 혹 모임이 없어서 믿음이 없고 사랑이 없는 것은 아닌가 돌아보아야 한다. 돈으로 계산하기에 빠른 우리의 생각이 시간의 배분도 지배하고 있기에,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가치가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임을 한낱 자본주의의 잣대로 재어 무시하고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안에서 내 생명이 풍성하여진다고 말하여도 그 생명마저 이 땅의 것과 비교하여 동일선상에서 무엇을 택할까 고민할 것인가. 그런 모습이야말로 '우리'를 잃은 방황하는 개인주의적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한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고, 또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에 격려와 모임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어쩌면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해도 심한 비평이 아닐 수 있다. 

닫는 말

그리스도인은 '우리'를 소중히 여기고, '우리'를 사랑하며, '우리' 중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기쁨을 잃지 않는 자들이어야 한다. '우리'를 잃는 순간 모든 것을 잃는 것을 심각히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날'이 가까옴을 볼수록 더욱 우리는 '우리'됨을 지켜가야 한다. '이 날'이 아니라 '그 날'을 보는 우리 삶은 멈추는 삶이 아니라 진행되어야 하는 삶이기 때문에 이곳의 삶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그 날에 시작될 영원한 나라의 삶을 이곳에서 익히는 삶이어야 한다. 베드로 사도가 던진 질문을 묵상해 보라: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벧후 3:10, 11). 그의 답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였다(벧후 3:13). '내'가 아니라 '우리'였고, '이' 하늘과 '이' 땅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없는 것만을 요구하고 채워넣는 돼지 같은 개인이 될 것이 아니다. 더 개인이 될수록 그 이면에는 더 형제를 살인하는 것이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대신 더 '우리'가 되고 더 소망을 나눠 가지는 '형제들'이 되어야 하며, 더욱이 '모임' 중에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을 '우리'로 만드시고, 한 형제인 것을 알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만나게 되는 사람들, 마음을 나누게 된 사람들, 더욱이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얘기할 때마다 같이 마음이 뜨거워질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너무도 감사합니다. 그들은 단지 '사람들'이 아니라 제 형제들이요, 아버지의 피를 나눈 자들입니다. 더 소중히 여길 수 있게 해 주시고, 아버지의 마음을 깨달아 갈수록 더 형제들을 위한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세요. 형제간에 사랑하고 사는 것을 보시는 것이 아버지의 가장 큰 기쁨인 것을 압니다. 우리의 큰 형님 되신 예수님께서 형제 된 저희들을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사랑해 달라고 아버지께 호소하셨듯이, 저희들도 형님 된 예수님을 따라서 우리의 형제 사랑하길 그치지 않게 해 주시고, 그 날을 가까움을 볼수록 더 모이며 격려하며 사랑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아버지의 인격이 담긴 약속의 말씀을 잃지 않게 해 주시고, 그 말씀 안에서 한 생각이 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도와주세요. 저희들을 '우리'로 만들어 주시고, '우리됨'을 매일 확인해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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