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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관리/처세술 및 코칭

뇌속을 손금 보듯 (중앙일보)

    

 

                                                             조장희 <가천의대 뇌과학연구소장>  중앙일보 2007. 8. 5

대구 피란때 미군에 구리반지 팔아

중학생이 장사 수완 큰돈 벌어

CT의 비밀을 풀어 돈방석(?)에 앉은 것은 뜻하지 않은 행운이었다. 학문을 하다보니 돈이 따라 온 셈이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 나는 먹고 살기 위해 돈벌이에 나서야 했던 적이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듬해인 1951년 1월 서울사대부중 2학년 말이었을 때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50년 가을 황해도 고향집에 추수하러 동생들과 함께 가셨지만 해가 바뀌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집에서 나는 부모형제를 기다리느라 피란도 가지 못하고 있었다. 1월이 되어서야 가족들이 황해도에서 서울까지 그 머나먼 길을 걸어서 내려왔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문간에 들어설 때의 피곤에 지친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전쟁통에 인민군의 눈을 피해 밤이면 걷고 낮에는 숨어서 서울까지 내려왔다는 것이었다.

 이미 서울은 떠날 사람은 모두 피란을 가고 난 뒤여서 도시 전체가 휑할 정도로 비어 있었다. 우리 가족도 짐을 챙겨 피란 열차를 탔다. 열차 객실은 콩나물 시루를 방불케 했고,열차 지붕에도 피란민들이 빼곡히 올라타고 있었다. 요즘 사진이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그대로의 피란 열차 모습이었다. 지붕 꼭대기에 앉아 꼬박 1주일 걸려 대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구 생활은 하루 한 끼로 때우기도 힘들었다. 셋방에 딸린 가게에서 어머니가 고구마를 팔아 연명했으나 그나마도 목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다. 한끼 굶고 한끼 먹는 것도 고구마가 주식이었다.

 하루는 대구역을 간 적이 있는데 역 근처는 미군들로 북적였고, 떠들면서 군용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이동하는 미군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 곳에 아이들이 ‘코리안 골드’라는 것을 미군들에게 팔고 있었다. 코리안 골드는 구리 반지였다. 광이 번쩍번쩍 나게 닦으면 마치 금처럼 보였다. 그걸 미군들에게 내밀면 1~2달러,혹은 양담배 한 보루를 주는 것이었다.

 “저 장사를 하면 돈을 벌 수 있고 지겨운 고구마를 안 먹어도 되겠는 걸.”
 코리안 골드를 파는 아이들의 대부분은 ‘코리안 골드’라는 말 이외에 영어를 거의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중학교 2학년까지 다녔던 터라 영어로 숫자를 세는 것부터 몇 마디는 건넬 수 있었다. 그게 내 ‘사업’에 강력한 무기였다. 어설프더라도 몇마디 건넬 수 있는 것과 아닌 것은 장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코리안 골드를 미군에게 팔아 받은 달러와 양담배, 초콜릿을 뒷골목 시장에 다시 내다 팔았다. 장사는 날로 번창했다. 내 주머니에는 달러가 두둑했고, 집에는 각종 미제 물건이 수북했다. 우리 가족은 더 이상 고구마로 연명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풍족해졌다. 피란지에 내려와 한두달 억지로 다니던 학교는 그만 둔지 오래였다.

 미 8군 사령부가 서울로 올라온 뒤에도 미군을 따라와 장사를 계속했다. 한꺼번에 몇 천 달러 어치 정도의 미군 PX 물건을 사고 팔 정도로 사업 규모가 커졌다. 장사에 나선지 3년도 되지 않아 그 바닥에서 ‘큰 손’으로 성장했다. 소년 가장이었던 내게 친척들은 아쉬울 때마다 손을 내밀곤 했다. 학문 이외의 돈벌이에 나선 것은 이게 내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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