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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3)찬송가의 정체

 

3)찬송가의 정체


찬송가의 정체 


몇 년 전 글루미 선데이라는 영화를 아주 흥미롭게 본 기억이 난다."당신을 잃느니 반쪽이라도 갖겠어." 라고 말하며 한 여자(일로나)의 정신과 육체를 공동으로 소유함에 합의하는 두 사람(자보와 안드라스)과 그 반쪽 사랑을 완전한 사랑으로 승화시키고자 노력하는 여인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추하지 않게 잘 묘사된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영화는 배경 음악인 글루미 선데이 (Gloomy Sunday)의 전설적인 실화...즉 수백 명 이상을 자살에 이르게 한 역사적 사실이 더욱 흥미를 유발시킨 영화이기도 했다. 그렇다. 음악은 군중들을 세뇌시키는 가장 강력한 무기의 하나가 아닌가...


기독교인들 역시 알게 모르게 찬송가에 마인드 컨트롤되고 있다는 게 정확한 진실이 되겠다. 그러나 이 찬송가에는 기독교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신론자가 작곡한 것도 있고 독일의 신화가 배경이 된 작품도 있다. 기독인들이 잘 모르는 찬송가에 숨겨진 비밀을 정리해 보기로 하겠다.


1)무신론자가 작곡한 찬송가

[94장:예수님은 누구신가]

* 프랑스의 철학자 장자크 루소가 1752년 작곡한 것

*주지하는바 루소는 대표적인 무신론자(범신론자)였지 않은가?....기독인 여러분들은 무신론자가 작곡한 노래를 열심히도 부르고 있다.


2)독일의 신화를 배경으로 한 작품

[431장:내 주여 뜻대로]

*이 노래는 독일의 작곡가 베버의 오페라 중 "마탄의 사수"서곡이 되겠다.

*독일의 신화와 예수의 뜻은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을까?


3)유럽제국의 국가

[245장:시온성과 같은 교회]

*여러분은 오늘도 열심히 독일 국가를 목청껏 부르고 있는 셈이다.

*유럽 사람들에게 이 노래는 엄청난 악몽을 떠 올리게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나치가 독일 주변 국가를 점령할 때 부른 독일국가이기 때문에 그 노래만 들어도 악몽 같은 세계대전이 생각나서 그런다고 한다.


[79장:피난처 있으니]

*이 곡은 영국국가가 되겠다.


[77장:전능의 하나님]

*제정 러시아의 국가였다고 한다. 대한민국 국민이 남의 나라 국가는 왜 그렇게 목청껏 불러야할까?


4)민요

[545장:하늘가는 밝은길이]....이외 [533장]

*아일랜드의 세속민요

[430장:내 선한 목자]

*벨기에의 세속민요

[338장:천부여 의지 없어서]....이외 [545장,78장,149장,173장]

*영국의 민요

[28장:복의 근원 강림하사]....이외 [229장,190장,405장]

*미국의 민요

[125장:천사들의 노래가]....이외 [160장,520장]

*프랑스 민요

[14장:구세주를 아는 이들]....이외 57장,309장

*독일 민요

[32장,39장,517장]

*네델란드 민요

[29장]

*스페인 민요

[515장]

*웨일즈 민요


기독인 여러분들은 우리나라 민요는 몰라도 유럽 각국의 민요는 열심히도 불러주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웃기지도 않는 것은 338장 「마귀들과 싸울지라」는 미국 소방대원 행진곡이라 한다. 이 노래는 남북전쟁 때에는 북군이 "남군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를 신 사과나무에 목을 달고"라는 가사로 부른 전투곡이기도 하였다 한다. 그대들이 목 놓아 부르며 저주하고 있는 그 마귀의 정체가 누구인지 확인해 보시길 바란다.


5)연애 노래가 찬송가로 둔갑한 경우

[145장:오 거룩하신 주님 그 상하신 머리]는 경건하고 숙연한 분위기의 수난절 찬송으로 알려져 있다.그러나 이 노래는 원래 17세기의 독일 대중가요였다고 하는 데 원 가사를 아래에 인용하겠다.

<<내 마음이 안절부절이네, 그 처녀 때문일세

나는 아주 안절부절하고 있네. 내 마음은 중병이 들었네

낮이고 밤이고 안식이 없고 언제나 탄식뿐일세

한숨과 눈물뿐이고 슬픔 속에서 자포자기 상태에 있네

그녀의 마음을 녹일 수만 있다면

내가 곧바로 다시 건강해질 것이라고...>>


*소위 "노가바"가 되겠다.


현행 찬송가 가사를 분석해 보면 "성도의 삶"이 41.5%로 가장 많고, "성자" 15.6%, "예배" 12.9%, "성부"와 "성령"이 합하여 3.3% 순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성도의 삶"은 우리의 찬양과 헌신과 사랑을 하나님께 드리고 이웃에게 베풀겠다는 의미의 가사보다는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내용이 더 많다. 죄 용서함 받고, 은혜도 받고, 사랑도 받고, 복도 받고, 위로도 받고, 재물도 받고, 건강도 받고, 소원도 이룬다는 내용의 가사가 많이 있는 것이다.


이웃의 아픔과 민족의 고난은 내가 알 바 아니요, 오직 내가 받을 복과 죄 사함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개인주의적 신앙과 기복적 신앙에 기초한 현행 찬송가를 부르는 한국 기독인들의 신앙은 자연히 나 외에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고,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참 제자 됨과 공동체성이 결여되고, 역사와 민족의 요구에 무관심한 탈 역사성을 나타난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구원받은 이들의 사랑과 헌신과 나눔, 더불어 살아가는 구체적인 신앙적 삶의 모습은 없고 피안적, 탈 역사적인 개인 영혼 구원의 신앙관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현재 부르고 있는 찬송가가 이렇게 개인주의적이요 기복적인 신앙을 담고 있는 것은, 대부분의 현행 찬송가가 우리 한국인의 삶의 자리와 거리가 먼 서양의 17세기 경건주의와 19세기 근본주의 신학이 발흥할 때 만들어진 찬송가들이기 때문이다. 17, 19세기 신앙전통은 개인의 구원과 내적 체험을 강조하며, 문자적이고 교조적인 획일적 신앙관을 절대화하는, 다분히 그리스도 신앙의 한 부분만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개인주의적이고 교조주의적인 신앙관은 초기 한국 선교사들이 지녔던 신앙의 근본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신앙을 기준으로 삼아 이 땅의 문화 유산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고, 우리 민족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배타적이고 비역사적인 신앙관을 주입시켰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에 고스란히 스며 있는 것이다.


자 이제 정리를 하면서 몇 가지 의문을 제시하고자 한다.


*가난하고 약한 자에게 용기를 주는 찬송은 왜 없을까?

*민족의 고난과 아픔에 동참하는 찬송은 왜 없을까?

*농촌교회 교인을 위한 찬송은 왜 없을까?

*민족절기 때 부를 수 있는 찬송은 왜 없을까?

*한국의 자연을 느끼고 보존하는 찬송은 왜 없을까?

*일터에서 부르는 찬송은 왜 없을까?

*여성을 위한 찬송은 왜 없을까?

*어린이, 청소년, 젊은이들을 위한 찬송은 왜 없을까?


사족: 현 미국장로교의 찬송가 346장은 한국민요 아리랑(Arirang)이라고 하는데 그 가사는 골로새서 1장 15∼18절의 내용을 시로 지어 찬송가로 만들었다 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나라에선 왜 우리 민요가 찬송가로 채택되는 경우는 전혀 없을까?


사단을 경배하는 캐롤송...고요한 밤 거룩한 밤


이제 며칠 후면 크리스마스라 한다. 이 외래 명절이 우리네 생활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은 것에 대한 안타까움은 별도로 논하기로 하고 오늘은 우리가 그리고 기독교인이 오해하고 있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해 얘기해 보기로 하자.


크리스마스가 예수의 생일이 아니고 미트라의 탄생축제날임은 기독교 내에서도 인정하는 바이나 보편적 신도들도 크리스마스가 예수탄신일이 아니라 타 종교의 교조 탄생을 대리 축하함을 필히 알아야 하겠고... 그 다음은 기독인들이 정말 오해하고 있는 한 가지 비밀을 알려드리겠다.


기독인들이 이즈음 가장 흔히 부르는 캐롤 중의 하나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란 찬송가라 할 수 있겠는데 사실 이 노래는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노래가 아니라 오히려 사탄을 경배하는 노래로 둔갑했음을 기독인들은 아시는지 모르겠다. 자 우선 이 노래의 가사를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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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밤 거룩한밤 어둠에 묻힌밤

주의 부모 앉아서 감사기도 드릴 때

아기 잘도 잔다 아기 잘도 잔다


고요한밤 거룩한밤 영광이 둘린밤

천군천사 나타나 기뻐 노래 불렀네

왕이 나셨도다 왕이 나셨도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동방의 박사들

별을 보고 찾아와 꿇어 경배 드렸네

왕이 나셨도다 왕이 나셨도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주 예수 나신밤

그의 얼굴 광채가 세상 빛이 되셨네

왕이 나셨도다 왕이 나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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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는 독일인 요셉 모르(Joseph Mohr, 1792-1848)가 1818년에 노랫말을 짓고, 같은 해에 프란츠 그뤼버(Franz Grueber)가 곡을 부친 것이라고 하는데 아마 마태복음의 동정녀 탄신 설화와 요한 복음 1장을 조합한 찬송으로 보여 진다. 원어와 거의 유사하게 번역된 영어가사를 보면 충분히 이해되겠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한 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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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ilent night, holy night,

All is calm, all is bright.

Round yon virgin mother and child,

Holy infant so tender and mild,

Sleep in heavenly peace,

Sleep in heavenly peace.


2. Silent night, holy night,

Darkness flies, all is light;

Shepherds hear the angels sing,

"Alleluia! hail the king!

Christ the Savior is born,

Christ the Savior is born."


3. Silent night, holy night,

Son of God, love"s pure light.

Radiant beams from Thy holy face,

With the dawn of redeeming grace,

Jesus, Lord, at Thy birth,

Jesus, Lord, at Thy birth.


4. Silent night, holy night,

Wondrous star, lend Thy light;

With the angels let us sing,

Alleluia to our king;

Christ the Savior is born,

Christ the Savior is bo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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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러면 한글 가사와 비교해 보기로 하자.

원 가사에서는 예수가 태어난 밤은 조용하고, 거룩하고, 모든 게 밝다고 표현되어 있다.

이 말은 요한복음과 정확히 일치 한다. 즉 태초의 말씀이 성육화하여 예수로 태어났고 그 예수로 인해 세상이 밝아지리란 뜻이 되겠다. 그러나 한글 가사를 보시라.


*예수가 탄생했다는데도 어둠에 묻혀 있다 한다.

*그리고 예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는 그 어둠 상태를 감사기도로 누군가에게

경배하고 있고...

*예수는 그것도 모르고 그저 잠만 자고 있다?

*게다가 마리아가 동정녀임을 찬양하지도 않는다.


동정녀 탄생 설화와 예수의 성육화 도그마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근본 교리가 아닌가? 그런 관점에서 원작가의 교묘함이 상당히 돋보이는 작품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데 한국이란 동방의 한 나라에 와서 이 노래의 원 뜻은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이절을 보면 원작자의 뜻이 좀 더 명확하게 나타난다. 즉 예수가 태어남으로 어둠은 물러나고 세상만물이 빛으로 가득하리란 소망.. 그러나 한글 가사는 예수의 역할에 대한 소망이 전혀 표현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원 가사에는 예수의 메시아 됨을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됨을 간략하나마 계속해서 표현하고 있다.


정리해 보면

*말씀의 성육화

*동정녀 탄생

*예수가 빛이 되어 세상의 어둠을 몰아냄

*예수가 메시아임 등을 표현한 게 원작이 나타내고자 한 의미라 한다면


한글 가사가 나타내고 있는 바는

*예수가 태어났다 해도 어둠은 계속 된다

*그 어둠이 사탄이라 한다면

*예수의 부모는 사탄에게 감사 기도를 계속 드리고자 한다...

*게다가 아직 사탄이 계속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데

*천사까지 예수의 그 무능력함을 찬양하고 있다...

*이 상태에서 예수는 누구의 왕으로 등극할까?

아시겠는가? 기독인 여러분은 올해 크리스마스도 어김없이 이방신 탄신을 대리 축하해 주고 있겠고 게다가 예수가 태어나도 어둠이 즉 사탄이 계속 권능을 발휘할 거라는 찬송 아닌 찬송을 부르고 있을 거라는 이 거룩한 비밀을.... 

찬송가 그곳에는 이웃사랑이 없다


사실 광신자 수준이 아니면 10년 20년 신앙생활 자랑하는 집사 권사 장로라 해도 바이블을 일독조차 하지 않는다는 게 아마 정설이겠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한글개역성경의 난해성이 그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고 본다. 보다 본질적인 원인으로는 교회 간다는 의미를 그저 습관성으로 가거나 교회를 친목회 정도로 여기는 신도 그리고 간혹 교회를 입신양명의 도구로 이용하는 부류도 있겠고.... 그렇다.


보통의 기독신자들의 의식구조를 지배하는 것은 바이블 보다는 목사의 설교 그리고 그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가의 내용이 보다 본질적으로 세뇌 시키는 도구가 아닌가 한다. 교파에 따라 바이블의 해석은 여러 갈래지만 찬송가에 시비를 거는 일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고 대개 같은 찬송가를 부르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러면 그 찬송가의 내용을 한번 짚어 보기로 하자.


송영(1~8) 찬양과 경배(9~55) 주일(56~58) 송영(59~62) 아침과 저녘(63~68)

헌금(69~72)창조와 섭리(73~80) 예수 그리스도(81~103) 강림(104~107)

탄생(108~126) 생애(127~133) 고난(134~148) 부활(149~160) 재림(16! 1~168)

성령(169~181) 속죄(182~202) 거듭남(203~209) 성결(210~219) 천국(220~233

성경(234~241) 하나님나라(242~250) 전도와 선교(251~277)

친교와 봉사(278~280) 성찬(281~285) 혼례(286~288) 장례(289~295)

신년(296) 어린이(297~301) 청년(302~303) 어버이(304) 가정(305)

감사절(306~312) 부르심과 영접(313~329) 회개와 사죄(330~339)

신뢰와 확신(340~345) 소명과 확신(346~362) 시련과 극복(363~367)

봉사와 충성(368~383) 분투와 승리(384~402) 은혜와 사랑(403~418)

인도와 보호(419~463) 평안과 위로(464~478) 기도와 간구(479~487)

축복과 감사(488~489) 주와 동행(490~504) 주를 본받음(505~509)

제자의 길(509~522) 성도의 교제(523~527) 신유(528~530) 소망(531~558)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주지한 바와 같이 찬송가 558절 내역을 살펴보면 기독교의 근본이념, 교리 등이 너무나 자세히 잘 나와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가장 큰 계명 둘 중 즉 이웃사랑에 대한 찬송가가 한 절도 없지 않은가!!


<<마태복음 [Matthew] 22장 39절

[개역]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무언가 큰 음모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부모에 대한 사랑도 304절 오직 하나 가정의 소중함도 305절 하나..... 나머지는 헌금 감사하게 내고 교회에 봉사활동 열심히 하고 전도 목숨 바쳐 하라 그다음에 천국에서 다시보자..... 아시겠는가? 기독교가 신도들에게 무엇을 강요하며 어떻게 그들의 의식구조를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는지.....


본인 소견으로 기독교가 다시 태어 날려면 우선 현재의 찬송가와 한글 개역판 바이블을 우선 쓰레기통에 버리는 작업을 하고 물론 십일조 외 각종헌금 강요를 없애는 작업도 병행하여만 기독교가 새로운 종교로 다시 태어날 발판이나마 마련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기독인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하신가.....?? 

친일인사를 민족인사로 둔갑시키는 찬송가


평범한 민초가 아닌, 역사적 책임을 짊어져야만 할 사회 지도층 인사라면, 지난 시절의 사소한 잘못이라도 책임을 져야할 부분은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하며, 반성이나 참회는 당연한 그리고 최소한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과정조차도 생략된다면,  그 민족의 미래는 역시 어두울 수밖에 없다고 단정한다.


이점, 금번 친일인사 명단 발표는 너무나 늦어 만시지탄의 회오를 감출 수 없지만 일단 환영의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 물론 그 과정상 조금의 오류는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과오는 점진적으로 수정해 나가면 될 듯하다. 이번에 발표된 친일 인사 명단 발표 후, 온갖 단체 언론 네티즌 등이 각자가 처한 입장에 따라  나름대로의 목소리를 드높였지만, 유독 침묵으로 일관한 집단이 있었다.


한기총을 비롯한 기독교 관련 단체가 그러했다. 항의도 하지 않았으며 참회 혹은 환영의 목소리도 내지 않았다. 왜 그들은 그저 침묵만 지키고 있었을까? 긁어 부스럼 만들기를 원치 않았다....정도가 필자의 짐작인데, 사실 지난 역사를 그저 덮어두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 그들이 원하는 대로 지나간 일이니까...잘못도 했지만 다른 방법으로 민족에게 공헌한 바가 더욱 많으니까....


이렇게 덮어 둬야만 할까? 친일 문제를 비롯한 과거사 문제는 반드시 평가가 따라야 한다고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사람은 어느 누구나 잘못을 범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잘못에 대해 진심으로 참회한다면 그 어느 누가 돌을 던지겠는가?


한편, 분명 잘못이 드러났음에도 반성과 참회를 하기는커녕 오히려 지난 역사를 왜곡하는 음모의  집단이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만 할까? 덮어두면, 다음 차례로 왜곡과 음모의 시절이 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대표적인 집단의 하나가 기독교계가 아닌가 한다.


종교인 166명 중 기독교계 인사는 48명으로 발표되었으나, 사실 타 분야에서 기독인으로서 활동한 사람들을 포함하면 기독교가 일제 당시 우리 민족에게 끼친 영향력은 숫자상 드러난 의미 이상이었을 거라고 짐작된다. 이들 중 문화계 인사로 분류된 주요한과 교육학술 분야의 김활란에 대한 기독교의 왜곡 사례를 찬송가의 역사를 참고로 하여 예를 들어 보기로 하겠다.

1)끈질긴 생명력

<합동 찬송가>, <새 찬송가>, <개편 찬송가> 시대를 거쳐 1984년에 <통일 찬송가>를 발행하게 되었는데, 지금 현재는 <21세기찬송가>를 준비 중이라 한다.


질문을 하나 하기로 하겠다. 지금 그대가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 중 한국인 작품은 얼마나 될까? 아마 대부분 모르리라 생각한다. 그냥 정답을 알려 드리겠다.


588장으로 구성된 찬송가 중 한국인 작품은 겨우 17편인데(작사가 기준, 작곡기준으론 18편임) 지난 개편찬송가의 27편에 비하면 무려 10편 정도가 제외되었다고 보면 되겠다. 중복된 작품을 제외하면 14명의 작가만이 선택을 받은 셈이다.


김정준(53),최봉춘(453),김재준(261)전영택(317,305),김활란(461),정용철(378,369),이호운(355,493),석진영(256),주요한(304),임옥인(311),반병섭(303),마경일(92),홍현설(272),남궁억(371)


이들이 그 영광의 주인공들인 바, 김활란, 주요한의 두 작품은 수많은 역경을 거치고도 지금까지 기독인들을 세뇌하는데 한몫 단단히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사실 그들의 작품이 기독인들의 찬송가로 선택되었다는 자체야 무슨 그리 큰일이겠나만, 주지하는 바, 그들은 루소라는 무신론자의 작품(94장)도 독일의 신화를 배경으로 한 작품(431장)도 찬송으로 부르고 있으며 게다가 미국 소방대원들의 출정가(388장) 마저 찬송가로 둔갑시켜 부리고 있는 실정이 아니었던가.....이외 유럽제국과 미국의 민요와 국가 등도 한국의 찬송으로 버젓이 불리 우고 있고......


문제는 찬송가와 함께 애독되고 있는 찬송가 해설이라는 책의 내용이 순전히 왜곡 날조된 음모의 소산으로 지금도 기독인들을 세뇌시키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 그러면 그 왜곡과 날조의 현장으로 안내 하겠다.


2)김활란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불 때/ 만경창파 망망한 바다에/ 외로운 배 한 척이 떠나가니/ 아 위태하구나 위태하구나(1절)

비바람이 무섭게 몰아치고/ 그 놀란 물 큰 파도 일 때에/ 저 뱃사공 어쩔줄 몰라하니/ 아 가련하구나 가련하구나(2절) <이하 3·4·5절 생략>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불 때 461장


가사 자체에 대해 시비를 걸 지는 않겠다. 그러나 이 찬송에 대한 해설을 보면 기독인들이 어떻게 역사와 인물을 왜곡시키며 조작하고 있는 지 그 실상이 드러나리라 본다. 함께 감상하기로 하자.


["김활란(1899~1970)은 인천 태생의 여성 지도자. 교육가. 이화여전 재학 시 그녀는 이화전도단을 구성 전국을 순회하며 복음과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일본 경찰들은 전도 활동을 금지시키고 말았다. 여기에 울분을 느낀 그녀는 조국의 운명을 만경창파의 배 한척으로 비유하는 동시에 나라의 운명을 주님의 자비로운 손길에 부탁하는 본 시를 작시하기에 이르렀다." ]....해설찬송가에서 발췌


어떠한가? 그녀는 과연 민족정신을 고취시킨 지도자였음이 진실인가? 그녀는 진실로 일본에 대해 울분을 느꼈을까? '여성박사 1호, 이화여대 총장, YWCA 창립자' ....등등 그녀의 화려한 경력에 대해서는 생략하자. 단지, 그녀가 일본제국주의에 어떻게 헌신해왔는지 몇 가지 예화를 검토해 보면 상기 기독교계의 김활란 평이 얼마나 허구와 왜곡의 증거물이 되는 지 판단이 되리라 믿는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지금까지 우리는 나라를 위해서 귀한 아들을 즐겁게 전장으로 내보내는 내지의 어머니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그러나 반도여성 자신들이 그 어머니, 그 아내가 된 것이다.…이제 우리도 국민으로서의 최대 책임을 다할 기회가 왔고, 그 책임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얼마나 황송한 일인지 알 수 없다. 이 감격을 저버리지 않고 우리에게 내려진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이다. ]....김활란이 <신시대>에 기고한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1942. 12)'


[학도병 출진의 북은 울렸다. 그대들은 여기에 발맞추어 용약(勇躍) 떠나련다!

가라, 마음놓고! 뒷일은 총후(銃後)는 우리 부녀가 지킬 것이다. 남아로

태어나서 오늘같이 생의 참뜻을 느꼈음도 없었으리라. 학병 제군 앞에는

양양한 전도가 열리었다. 몸으로 국가에 순(殉)하는 거룩한 사명이

부여되었다.]....([뒷일은 우리가], {조광}, 1943. 12)


그녀가 1944년경 악성안질에 걸려 실명할 우려가 있다는 의사의 말에 "남의 귀한 아들들을 사지(死地)로 나가라고 했으니, 장님이 되어도 억울할 것 없지… 당연한 형벌"이라고 말했다....이것은 김활란의 최측근 인사의 한사람이었던 김옥길 전 이화여대 총장이 <김활란 박사 소묘>라는 글에서 적은 글이라 한다.


이외 정신대 참여를 은근히 부추기는듯한 글도 있다. 같이 감상해 보기로 하자.


[아세아 10억 민중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결전이 바야흐로 최고조에 달한 이

때 어찌 여성인들 잠자코 구경만 할 수가 있겠습니까.……이번 반도

학도들에게 열려진 군문으로 향한 광명의 길은 응당 우리 이화전문학교

생도들도 함께 걸어가야 될 일이지만 오직 여성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참여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싸움이란 반드시 제일선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학교가 앞으로 여자특별연성소 지도원

양성기관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인 동시에 생도들도

황국여성으로서 다시없는 특전이라고 감격하고 있습니다.]....({매일신보}, 1943.

12. 25)


일단 이 정도로 그치겠는데, 좀더 자세한 정보를 원하면 반민족문제연구소 등에서 제공하고 있는 자료들을 참고하시길 바란다.


3)주요한

[어머니의 넓은 사랑 귀하고도 귀하다/ 그 사랑이 언제든지 나를 감싸줍니다/

내가 울 때 어머니는 주께 기도드리고/ 내가 기뻐 웃을때에 찬송부르십니다.(1절)

온유하고 겸손하며 올바르고 굳세게/ 어머니의 뜻 받들어 보람있게 살리다/ 풍파많은 세상에서 선한싸움 싸우다/ 생명시내 흐르는 곳 길이 함께 살리라(4절) ]....어머니의 넓은 사랑 304장


["주요한(1900~1979)은 시인이며 언론인·정치인, 젊었을 때는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도 했으며 후에는 시인으로 문예 동인지 <창조>에 '불놀이'란 시를 발표하였다"며 "본 찬송시는 1967년 한국 찬송가 위원회로부터 어머니날 찬송가를 의뢰받고 특별히 쓴 것으로 자식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는 어머니상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을 특별히 부각시키고 있다" ]....해설찬송가에서 발췌


이 해설만 보면, 주요한 역시 독립운동가요 민족지사로 둔갑하게 된다. 그 역시 김활란에 못지않은 화려한 이력을 자랑하지만 이글에선 일단 생략하기로 하겠다. 이광수, 최남선 등과 문필을 경쟁하며 친일 활동 역시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주요한의 노골적 친일 작품을 보며 진실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기회를 함께 가지도록 했으면 한다.


[나는 간다/ 만세를 부르고/ 천황폐하 만세를/ 목껏 부르고/ 대륙의 풀밭에/ 피를 부르고/ 너보다 앞서서/ 나는 간다./ 피는 뿜어서/ 누런 흙 우에/ 검게 엉기인다/ 형아!아우야!


이 피는/ 너들의 피다/ 너들의 뜨거운 피가/ 2천3백만 너들의 피가/ 내 몸을 통해서/ 흐르는 것이다/ 역사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뿌려지는 피다/ 반도의 무리가/ 님께 바친/ 처음의 피다.


나는 내 피에/ 고개를 숙이어/ 절한다/ 그것은/ 너들의 피기 까닭에/ 장차 내 뒤를 따라올/ 백과 천과 만의/ 너들의/ 뜨거운 피기 때문에/ 아아/ 간다/ 나는/ 너보다 앞서서/ 한자욱 앞서서/ 만세, 만세. ]....주요한이 지원병 출신으로 죽은 이인석 상등병에게 바친 <첫피>(1941.3)



주요한이란 시인이자 정치가를 정확히 파악할려면 불놀이와 함께 이러한 시도 함께 검토되어야 한다고 본다.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징병을 독려하던 주요한의 진실한 정체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진작 이루어졌다면, 그가 상공부 장관이니 부흥부 장관이니 등등의 요직에 등용되었을 수 있었을까? 그저 지나간 역사가 안타깝기만 하다.


[금일의 문학은 다만 이기기 위한 문학, 미·영 격멸을 위한 문학이 있을 뿐입니다. 동양이 오늘의 찬연한 문화를 건설할 수 있는 것은 금일 미·영 격멸의 피비린내나는 문화활동을 통해서만 가능할 뿐입니다.……우리들은 친애하는 만주제국 5000만 민중들 역시 하루라도 속히 직접 총을 잡고 포학한 미·영의 두상에 불의 세례를 내릴 것을 기원해 마지 않는 바입니다.]....[결전하 만주의 예문태세](決戰下滿洲の藝文態勢)({신시대}, 1944. 1)


이렇게 미국을 타도하자던 친일 모리배들이 해방 후에는 어떻게 죄다 미국을 숭배하는 집단으로 둔갑해 버렸는지 그 화려한 변신술에 그저 놀랍기만 하다. 그들은 자서전이나 기타 기고문 등에서 단 한 번도 자신들의 이러한 친일 행위에 대해 참회하거나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다. 아니 변명조차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음습한 음모의 그늘에서 숨죽이고 있던 역사적 진실들이 이제야 하나둘 햇빛에 드러나고 있을 뿐이다.


기독인들도 이제 역사의 준엄함에 조금은 솔직해져야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가? 아직 21세기 찬송가가 출간되지 않았다고 들었다. 이제라도 두 명의 친일 인사가 제조한 위선의 작품들을 그대들의 찬송가에서 삭제하길 권유한다.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그 해설만이라도 좀 더 진실하게, 정확한 정보로 기록하길 강요한다.


어떻게 친일 모리배를 민족지사로 둔갑시키는 지, 그대들의 뻔뻔함에 이제는 분노를 자제하지 않는 무리도 있음을 기억하길 요망한다. 기독교는 서기 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공인 이후 조작과 왜곡된 신화 만들기에 골몰해왔다. 이러한 기독교의 음모는 오늘 현재도 진행형임에 분명하다. 물론 한국 기독교도 예외가 될 수 없겠다.


찬송가는 한국 기독교가 성장하는데 결정적 공헌을 했음에 분명하다. 그러한 공헌의 당사자로서 김활란과 주요한을 지금껏 왜곡시킨 정보로 신도들을 세뇌시키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일본인 사사오의 작품이 다섯 편이나 수록되어 있음은 그저 애교로 봐두겠지만, 김활란과 주요한의 두 작품에 대해서는 시비를 걸지 않을 수 없음을 밝혀 두고자 한다. 물론 국외자의 입장이지만, 그대들에게 세뇌되고 있는 이들이 우리의 자매요 이웃이 아니던가...필자는 당연히 자격이 있다고 자부하며, 이글을 맺도록 하겠다.








찬송가와 기복행위 


교회 출석한지 20년 정도 되는 집사 그리고 30년 경력을 자랑하는 장로도 사실 바이블의 내용은 잘 모르고 있음이 현실이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목사들이 설교로 자주 인용하고 있는 몇몇 구절과 내용 그리고 작심하여 읽어 보았던 일부 바이블의 줄거리 정도가 그들의 지식 전부라고 해도 그리 큰 반발은 없으리라 본다.


몇몇 희귀한 기독 신자들이 바이블의 정체를 알기 위해 교회에서 금하고 있는 공동번역이나 외경, 위경 등을 독파하는 사람도 일부 있겠지만, 그들은 그 결과로 자신의 양심을 속이고 그저 무늬 신자가 되어 출석만 하는 교인이 되던가 아니면 대부분 안티로 돌아서게 된다고 확신하고 있다.


대부분의 기독인들은 바이블을 읽지 않으며 그 진실한 내용에 대해 제대로 모르고 있음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들은 찬송가에 대해서는 1장부터 550 장까지 거의 대부분 암기하고 있다고 보여 진다.


기독인들의  의식구조를 지배하는  것은 바이블이 아니고 찬송가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 가사가 바이블과 상충하는 내용이 꽤 많이 있다는 것을 기독인들은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이글에서는 기복을 강조하는 찬송가의 내용을 중심으로 바이블은 어떻게 대답하고 있는 지를 비교해 보는 기회를 갖기로 하겠다.


1)복의 근원은 누구일까?

[복의 근원 강림하사 찬송하게 하소서 한량없이 자비하심 측량할 길 없도다 천사

들의 찬송가로 나를 가르치소서 구속하신 그 사랑을 항상 찬송합니다 ]


찬송가 28장의 가사이다. 그러면 이 복의 근원은 누구일까 혹은 무엇일까? 아마 대부분의 기독인들은 야훼나  성령 그리고 예수라고 답변을 제출하리라 본다. 우선 찬송가의 답변을 알아보기로 하자.


[만복의 근원 하나님 온백성 찬송 드리고 저 천사여 찬송하세 찬송 성부 성자 성령]....찬송가 1장


다음 차례로, 과연 바이블은 어떻게 대답하고 있을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창 12:2) >>


바이블 66권에서 복의 근원이라는 내용이 나오는 것은 상기 창세기 12장이 유일하다. 그렇다면 아브라함만이 복의 근원이라는 뜻이 아닌가? 복의 근원은 야훼일까? 아니면 아브라함일까? 그대의 답변을 기대하겠다.


2)예수만 믿으면 만사가 형통할까?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주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위로 받겠네/ 무슨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무슨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434장


한국 기독인들이 가장 애창하는 곡 중의 하나이다.(사실 필자도 즐겨 불렀음을 고백한다.) 그런데 정말, 병에 걸리든지, 사고를 당하든지, 파산을 당하든지 예수만 함께 하면 만사형통 할까? 예수가 정말 인도해 줄까? 기독교의 기본 도그마를 제공했고 나름대로 예수를 가장 잘 믿었다고 평가되고 있는 바울의 고백을 예로 들어 보기로 하자.


<<내가 굉장한 계시를 받았다 해서 잔뜩 교만해질까봐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을 하나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나를 줄곧 괴롭혀 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교만에 빠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고후 12:7) >>


<<나는 그 고통이 내게서 떠나게 해 주시기를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번번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게 머무르도록 하려고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나의 약점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고후 12:8,9) >>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약해지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며, 모욕과 빈곤과 박해와 곤궁을 달게 받습니다. 그것은 내가 약해졌을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 (고후 12:10) >>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가장 모범적인 신도라고 할 수 있는 바울은 자신의 갈길 다가도록 가시 병에 시달렸으며, 모욕과 빈곤과 박해와 곤궁을 달게 받는다고 했지 않았는가? 질병, 모욕, 빈곤, 박해, 곤궁에 대해서는 예수가 나몰라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면 예수가 만사형통하게 해준다는 그 무슨 일은 과연 어떠한 것일까?


사실 필자의 개인 소견으론 , 기복신앙 자체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본다.

어차피 시간과 자연을 초월하지 못하는 인류에게는 무언가 초월하는 존재가 필요할 지도 모르겠다. 부모의 무병장수, 자식과 남편의 입신양명...등등 그러한 소망을 초월자에게 기원하는 행위는 인류의 오래된 관습이었음을 인정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약함을 빌미로 사기를 치는 종교 사업자들은 당연히 사회와 격리되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게다가 기존의 민간 신앙을 미신이라고 폄하하면서, 자신들의 기복행위에는 아무런 가책감도 느끼지 않는 기독교의 몰염치는 당연히 비난받아야 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박멸되어야만 될 이데올로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오늘도 기독인들은 찬송가를 부르면서....예수는 복의 근원이라고 세뇌되기를 즐겨 하고 있다한다.

출처 : 종추련
글쓴이 : 이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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